코모두스는 유혈 검투와 섹스를 방탕하게 즐겼다는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 Caligula(작은 군화)를 닮았다
칼리굴라(Caligula)는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12년 8월 31일 - 41년 1월 24일, 재위 37년 3월 16일- 41년 1월 24일)이다.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이며, 칼리굴라는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가 지휘하고 있었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귀여워하며 붙여준 '꼬마 장화'라는 뜻을 가진 별명이다.
His son, Commodus, takes over and Commodus is the beginning of a succession of emperors who are less and less competent.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가 정권을 잡는데, 그는 점점 더 능력없는 황제들의 계승의 시작이었습니다
Commodus asks Maximus to serve him but he refuses.
Commodus orders that Maximus and his wife and child be killed.
■ 지독한 폭군이자 암군, 로마 17대 코모두스 황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모두스 안토니누스
(Luci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
○ 생몰 년도
161년 8월 31일 ~ 192년 12월 31일
○ 재위 기간
177년 중기[3] ~ 192년 12월 31일
1. 소개
코모두스의 치세는 한마디로 로마 제국의 재앙이었다.
- 디오 카시우스
당대와 후세 모두에서 역사적으로 공인된, 로마 제국의 암흑기를 연 폭군이자 암군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비에 개같은 자식)의 대표 사례.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성을 더럽힌 코모두스는 황제 부적격자. 혈통주의 폐단의 상징으로서 이후 군인 황제 시대의 막을 연 황제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표현에 의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천 년에 걸친 로마제국이 본격적으로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는 시점을 코모두스의 즉위 연도로 보고 있다.
즉위 후에도 그 위험성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피바람과 황음으로 나라를 첫 쇠퇴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조선 연산군의 프로토타입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코모두스의 면모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다른 비판도 나온다. 5현제 중 다른 4현제 즉
네르바(12대)
트라야누스(13대)
하드리아누스(14대)
안토니누스 피우스(15대)
처럼 유능한 인사를 양자로 삼아 계승시키지 않고 무작정 친아들에게 물려준게 잘못이라는 내용. 하지만 이건 아우렐리우스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대 황제들은 모두 처음부터 제위를 물려줄 만한 친자식이 없었기에 양자 계승이 가능했다. 게다가 성장기의 코모두스는 정신병과 같은 매우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만약 아우렐리우스가 양자 계승을 시도했다가, 친아들인 코모두스가 자신이 정당한 친자 계승자임을 내세우며 대항한다면 로마 제국이 난장판이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
왕조 국가에서 왕위 계승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내란을 일으켜서 나라를 말아먹는 사례는 역사에서 매우 흔했다. 굳이 지적하자면 자식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계승하는 전제군주제 자체의 한계로 봐야 할 것이다.
2. 즉위
코모두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코모두스는 서기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자녀 14명 중 열 번째로 태어났고 쌍둥이 형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남자 형제들은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고 그의 쌍둥이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버지가 제위에 있을 때에 태어나 황제의 직위를 물려받은 유일한 황제였다.
물론 티투스 황제와 도미티아누스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나 그들은 아버지가 황제가 되기 전에 태어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 코모두스가 제위에 있은 12년 동안 그가 행한 포악한 행위 때문에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그를 후계자로 삼는데 주저했다고도 하며,
픽션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에서처럼 다른 인물을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얘기들이 있지만 실제로 마르쿠스 황제는 일찍부터 아들을 후계자로 기르는 수순을 밟아왔다.
그는 이미 다섯 살 때인 166년에 카이사르 칭호를 받았고 171년에는 '게르마니쿠스'라는 아버지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176년에는 로마에서 아버지와 함께 개선식을 했고 177년에는 공동 황제의 직위에 올랐다.
코모두스는 아버지와 함께 178년과 179년에 도나우 전선에서 함께 싸웠고 180년으로 계획된 원정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같은 해 3월에 제위에 올랐다. 그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진중에서 죽은 후 코모두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온갖 악평에도 불구하고 코모두스는 19세의 나이에 제위에 오를 때까지 아버지가 굳이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선택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결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코모두스가 아버지와는 달리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체육이나 검투사 경기를 좋아하는 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이것은 황제로서의 자질이라기 보다는 개인의 적성과 취향의 차이였다.
검투사 경기는 좀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공부보다 체육을 좋아했다는 것이 로마 상류층에서도 딱히 흠이 될 만한 것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권장되기도 했다. 코모두스가 180년 3월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한 후 이에 대해 군사들에게 연설을 했다.
"짐의 아버지는 천상으로 올라가 신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는 인간사에 관심을 갖고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
그는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이 모인 회의에서도 장수들의 강력한 요청을 단호히 기각한 것을 보면 역시 황제로서의 위엄을 갖춘 모양이다.
코모두스가 부황의 별세 이후 로마의 전례로 현장에서 군단의 승인을 받아서 곧바로 황위에 등극한 초짜 황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배짱도 두둑하고 치세 초기에는 군왕의 권위도 있었다. 하지만 무능함이 드러나서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정치는 아버지 시절의 관료들과 침실 시종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놀고 먹는 세월을 보냈다.
3. 암살 시도와 보복
남매 중 장녀이며 친누나 루킬라가 어처구니없는 악감정으로 암살극을 벌인 탓에 황제 시해 미수 이후의 치세는 그야말로 피로 얼룩지게 되었다.
그녀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Claudius pompeianus Quninitianus)가 옷에 단도를 감추고 코모두스가 콜로세움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황제가 가까이 오자 그는 숨어 있던 곳에서 급히 달려 나오며 단도를 휘둘렀지만, 바로 황제를 찌르지 않고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라고 외치며 시간을 낭비했고, 이 말을 하는 사이에 그는 호위병에게 붙잡혀 칼을 빼앗겼다. 코모두스는 비록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에 사오테루스가 암살되자 그는 한층 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젊은 나이에 큰 충격을 받은 코모두스는 쓸데없는 의심병이 생기고 이것이 도져버렸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따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식농사 에 실패했다. 시기적으로 이후에 표변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실제로도 그저 좀 이상한 놈에서 미친 놈으로 변하는 수준으로 변했다는 평가가 많다.
보복은 무자비했다. 로마의 핵심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들, 아버지 시절의 유능한 관리들이나 주변 친척, 친지들 그리고 능력 있는 군단장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줄줄이 죽여버렸으니. 루킬라와 퀸티아누스가 처형되었고, 근위대장 타루티에누스 파테르누스(Taruttienus Paternus) 역시 사오테루스의 죽음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코모두스는 앞서 티기디우스 페렌니스를 파테르누스와 함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했었지만, 파테르누스가 처형되자 페렌니스가 근위대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통치권까지 전권을 잡았다. 다만 루킬라의 남편이었던 폼페이아누스는 숙청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위로 삼을 만큼 전폭적으로 신뢰했고 큰 누나와의 내외간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 때문인 듯. 그리고 5명의 누이들의 남편 - 매형, 매제 - 들 중 3명이나 살해하는 참극을 일으켰다. 누이들에게 위협은 가하지 않았지만 애정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코모두스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평생 일부일처로 절제된 생활을 한 아버지와 전혀 달랐다. 애첩과의 결혼을 위해 조강지처인 크리스피나를 간통죄의 누명을 씌어 카프리 섬에 유배했고 며칠 후 자객을 보내 살해하는 파렴치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코모두스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이상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피했고 모든 사항을 페렌니스를 통해 전달하게 했다. 페렌니스가 통치권을 잡고 있는 상황속에서 그는 인물을 바꾸어 가며 권력을 쥐어주고 황제 자신은 사치와 향락으로 세월을 보냈다.
기록에 의하면 코모두스는 술에 취해 궁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으며, 수시로 온천을 즐기면서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3백명에 달하는 첩들과 함께 놀았으며 3백명의 어린 소년들을 사들여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한 명씩 골라내며 하렘 같은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그가 내세운 권력자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재산을 축적하고 그 돈을 가지고 황제의 타락한 생활을 뒷받침 했다. 권력을 잡은 자는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자리까지도 공공연하게 판매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고 황제 역시 그 과실을 함께 취했다. 코모두스는 재위 기간 내내 정사는 전혀 돌보지 않고 평소 좋아하던 검투사 경기에만 심취했고 이것은 곧 중독 증세로 발전했다.
그래도 유능한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있을 때는 페렌니스가 직무 유기하는 어리석은 황제 대신 나라를 이끌었지만, 185년 페렌니스가 권력에서 밀려났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진 그가 코모두스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황제로 세우려고 했지만, 페렌니스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군단이 장정 대표 1500명을 로마로 보내 황제에게 위험을 경고했다고 한다. 또는 브리타니아 군단이 시위를 한 실제 이유는 페렌니스의 정부가 부패해서였거나 또는 페렌니스가 그 해에 일찍이 브리타니아 내의 로마군 사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가혹했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페렌니스의 반란 음모가 사실이여서 페렌니스를 처형했는지 코모두스가 자신의 의심병과 간신배의 농간에 넘어가 오히려 자신의 충신 페렌니스를 처형했는지 반란의 사실여부는 모르지만 코모두스는 결국 페렌니스와 그의 아들들의 즉각 반역죄로 처형시켰다. 그들이 죽고서 새 침실 시종이자 탐욕스러운 해방노예 출신인 클레안드로스가 근위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가 실권을 쥔 뒤로 로마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클레안드로스는 처음 프리지아 출신의 노예로 로마에 왔다가 황실 내에서 차근차근 승진하여 최고 관직에 올랐다. 그는 유능한 인물임은 틀림없었지만,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이며, 지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페렌니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력 역시 황제를 원하는 방식대로 살게 해줄 수 있는 능력 여부에 달려있었다. 클레안드로스 역시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자리를 공공연히 판매하였고 이러한 행위로 인해 어느 해에는 무려 25명을 집정관직에 임명하면서 극에 달했다. 클레안드로스는 벌어들인 수입의 많은 부분을 자신이 가졌지만, 상당한 몫을 콤모두스에게 주었다.
이 무렵에 콤모두스를 노리는 두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다. 주동자는 궁정 관료가 아니라 완전히 외부인으로, 군대를 이탈하고 산적 두목이 되어 갈리아 지방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마테르누스(Maternus)였다. 그는 187년 3월에 로마에서 열리는 키벨레[10] 축제 기간에 황제를 암살할 계획이였지만, 음모 사실이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고 축제 기간 전에 처형되었다. 콤모두스는 더욱 강한 호위병을 곁에 두었고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의 황실 사유지나 교외 지역에서 보냈다. 그는 더욱 재판과 황제의 업무를 피하면서 신변 보호를 더 철저히 했다.
코모두스에게 정치적으로 위기가 찾아온 것은 서기 190년이 되면서부터였다, 로마 시는 화재에 이어 곡물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전염병과 기근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클레안데르스의 정적들이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클레안데르스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살 수 있는 모든 곡식들을 사들여 인위적인 곡물 부족을 초래한다는 내용이였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제 주범은 곡물 담당관인 파피리우스 디오니시우스(Paprius Dionysius)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여러 차례의 재난에 이어 전염병과 기근으로 초래된 곡물 부족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치들을 취한 후에 그 책임을 클레안데르스에게 뒤집어 쓰웠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대전차 경기장에서는 성난 군중들이 남쪽으로 아피아 가도를 지나 로마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코모두스가 머물고 있던 퀸틸리 빌라로 까지 들이닥쳤다. 그들은 클레안데르의 처형을 요구했다. 클레안데르스는 기병대에게 군중들을 로마로 쫒아 보내라고 명령했지만, 군중들이 밀고 들어오자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옥상에서 공격을 당했고 수도 경찰대마저 민중의 편에 섰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야 코모두스는 사태를 깨달았다. 그는 클리안데르스를 처형하고 시민들에게 수급을 던져주는 걸로 봉기를 가라앉혔다. 군중들은 기뻐하며 몰락한 권신의 시신을 마구 다룬 후에 그의 목을 장대에 매달아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고, 콤모두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환호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았다. 콤모두스는 클레안데스 같은 사람을 재상에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권력을 모조리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고대 로마 황제들은 자주 속주의 총독이나 국경의 군대 지휘관과 서신을 교환했는데, 제국 전역에 부임한 총독이나 지휘관의 수를 합하면 그 수가 실로 어마어마하다보니 보통 황제들이 일일히 서신을 쓰기보다는 몇가지 지침만 내려주면 그걸 가지고 서신을 작성하는 관료들이 살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트라야누스처럼 일일히 자기가 다 답장써준 먼치킨들도 존재했다. 그런데 콤모두스의 숙청극으로 이런 관료들이 아예 공직에서 쫓겨난데다가, 콤모두스 본인도 통치에 관심도 없다보니 황제가 보내온 편지에는 늘 Vale 하나만 달랑 적혀있었다고 한다.
4. 검투사 황제
그의 광적인 행동은 정신불안으로 점차 심해졌다. 특히 과대망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클레안데르스가 죽고 난 뒤였다. 이런 과대망성 증상은 계속되는 암살 시도와 시민들의 봉기로 인해 목숨에 불안을 느낀 불안감 때문에 정신이 불안해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콤모두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데에도 신격화를 해달라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며,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가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라고 불러 달라는 개소리요구를 했다.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는 병약했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아버지를 경멸한 것이 이유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을 강인함과 용기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칭하며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고 곤봉을 든 모습의 조각상을 남기게 했는데 맨위에 보이는 저 조각상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스스로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여겼으며 사자 가죽 옷의 헤라클레스 복장을 입고 곤봉을 휘두르며 직접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과 싸우기도 하는 등 다양한 기행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코스프레라니! 심지어 검투 시합을 예행연습한 장소로 추정되는 미니 콜로세움까지 발견됐다.
검투사로서의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그는 실제로 엄청난 완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흉기였으며, 매 싸움마다 전승무패였다. 물론 전승무패의 기록 자체는 그가 황제였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곤봉과 칼에 희생당한 자들은 검투사들보다는 주로 본인이 스스로 조달하게 한 범죄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전문 검투사들과 싸운 경기의 승리는 반드시 상대의 항복으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와 대결한 검투사들은 한 명도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폭군답지 않은 자비로움을 여기서 보여줬다 다만 그의 베스티아리로서의 실력을 생각해보면 검투사들 쪽에서 먼저 죽고 싶지 않아 항복했을지언정, 그가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서 억지로 상대를 지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그의 무서운 힘과 기술은 베스티아리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기린, 얼룩말를 사냥하고, 코끼리 3마리를 죽였고 하루에 100마리의 사자와 곰을 때려죽인 적도 있으며 그 외 각종 맹수들을 무대에서 죽이곤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단순히 완력이 셌을 뿐만 아니라 잘 훈련된 전투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궁술에 능했다고 한다. Augustan History에 따르면 70-90km/h로 전력질주하는 타조도 활로 쏴 죽였다고 한다.
5. 최후
치세 마지막 몇 년 동안 코모두스는 점차 원로원 의원들에게 불안감을 느끼고 적대적이 되었다. 로마가 재건되었으나 황제는 신의 화신임을 자처했고, 많은 의원들이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황제의 최측근들조차 그에게 치를 떨며, 민중들의 갑작스러운 분노가 폭발하여 불러올 수 있는 파멸을 미리 막아보기 위해 축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는데다 거의 대부분을 무장한 채 지내는 인간흉기 황제를 죽일 방법은 별로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음식에 독을 탔으며, 그가 독 때문에 욕실에서 토하고 괴로워하는 틈을 타서 그의 레슬링 교관이자 파트너를 보내서 목 졸라 죽이게 된다.
황제의 시신은 콤모두스가 죽일 계획이었던 집정관 당선자 가운데 한 사람인 파비우스 킬로(Fabius Cilo)에게 넘겨져 밤 사이에 매장되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시신을 파내 일반 죄수처럼 시내를 끌고 다녀야 한다고 맹렬히 주장했지만 그것까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보다 더 야만적이고 네로보다 더 악랄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대로 그도 당하게 하라"
단 네로는 사치나 코르불로와 같은 장군들을 위협이 될 지 모른다며 자결을 강요한 것을 비롯해 원로원측에서 깔 만한 거리가 많았던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그저 기득권인 원로원을 무시하고 로마가 공화정이 아닌 제정 국가가 되었음을 분명히 한 인물이었기에 야만적이라고 욕먹은 것일 뿐이다.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의 기록 말살형은 그냥 원로원인 개새끼였기에 벌어진 일이었고, 결국 3세기에 들어 질린 로마 황제들은 사실상 수도를 버리게 되며, 나중에는 동고트 왕국이 로마 원로원을 갈아버리는 걸 보고도 모른척하는 것으로 복수를 하였다.
콤모두스의 시신은 그 뒤 상당 기간 그대로 매장되었다가 이어 제위에 오른 페르티낙스 황제에 의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로 이장되었다. 다만 기록 말살형은 세베루스 황제가 철회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시절이자 세베루스 자신이 군단장이었을 때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고 세베루스는 평소에 콤모두스 하면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베루스가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 철회를 명령한 까닭은, 단순히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경쟁자인 알비누스의 지지자가 다수 포진해있는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기록말살형 철회가 원로원 입장에서는 크나큰 굴욕이었을 것이다.
6. 평가
로마는 물론이고 전 세계 역사상 최악의 군주 가운데 하나.
로마 제국 뿐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살펴봐도 이 콤모두스라는 인간인지 아닌지 의심되는 존재와 비교할 만한 인물은 찾기 힘들다. 동아시아에서 최악의 통치자들로 손꼽히는 수양제나 금나라의 해릉양왕, 충혜왕, 연산군조차도 이 존재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보기도 하며, 만력제파업황제나 히틀러와 비교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칼리굴라나 네로 등을 암군이라 하지만 일단 칼리굴라는 치세가 4년에 불과했고, 기본적인 수준이지만 정사를 돌보기는 했다는 점에서 아예 손 놓고 검투사질이나 하거나 수시로 사람을 죽인 이 인간 말종과 비교를 할 수는 없으며 네로는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기독교도 박해 문제 때문에 부풀려져서 그렇지 아무리 깎아내려도 평범한 황제라고는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코모두스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바로 직전 시대가 오현제 시대였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만족의 성장에 대한 대비가 소홀하다는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자 나섰던 황제였지만, 코모두스는 아버지의 노력을 이어받기는커녕 아예 박살을 내 버린다.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코모두스는 균형 잡힌 몸매에 남자답고 잘 생긴,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눈은 이글거렸고, 머리는 날 때부터 금발에 곱슬로 햇빛을 받으면 하도 반짝거려서 마치 금가루를 뿌린 듯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이를 불가사의하게 여겨 하늘의 후광이 그의 머리를 비추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병약한 몸과 철학적 기질과 성실성, 그리고 아들의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비성실성을 볼 때, 최소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에 존경하고 복종하기에도 후계자 선택권이 사실상 없는 상태이므로 눈앞에서 시늉만 해도 그만. 그리고 국정운영을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와 모자란 재능과 천성까지 연결되면 아버지의 성품이나 수완을 이해하고 존경하기에는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을 수도 있다.
결국 아버지랑 달리 불성실한데다 무능한 나머지 정치나 국방에서는 하나도 개선된 게 없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선 수백 명의 미소년, 미소녀들을 모은 하렘이 있었다는데 그 숫자가 각각 33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며 매일매일 술판을 벌이고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등 타락의 극치를 달렸다고 적혀 있다.
흔히 폭군의 대명사로 네로를 떠올리는데 코모두스와 비교하면 명군이라고 불리기에는 많이 모자라고 막판에 실패했어도 네로는 최대한 할 일을 하는 황제였다.
사치가 심했고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지나친 심취, 무엇보다 화재 전에 로마는 아름답지 못해서 다 때려부수고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 데다가 화재 후 복구 사업 때 자신의 궁전을 크게 지으려고 한 부적절한 처사 때문에 폭군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사실 네로는 제위 기간 동안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했고 제법 성과도 올렸다. 거기에 이런저런 이벤트도 많이 열었고 개인적인 매력도 상당해서 일반 시민들에게는 꽤나 인기있는 황제였다.
하지만 콤모두스는 정치할 생각을 아예 그만둔 암군이었다. 폭정이든 실정이든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오직 여흥과 취미생활 분야에서만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노력했으며, 가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숙청을 가하는 정도에 그쳤다. 다만 한번 터지면 제대로 성질을 부려서 관련자들을 잡아 죽였다고 한다.
또한 현제로 알려진 트라야누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와는 달리 코모두스의 통치기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코모두스가 기독교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통치에 전혀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노예 출신으로 코모두스의 애첩이 된 마르키아의 입김도 작용했던 이야기도 있다 왜냐하면, 마르키아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해서 기독교 박해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기독교도를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그의 얼마 안되는 선행 중 하나다.
시오노 나나미도 이 건에 대해 섭섭하게 여겼는지 애매모호하게 반응했다.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신고해도 콤모두스 황제가 무시하고 기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소한 일로 과인을 귀찮게 하지 마." 정도의 대응이었고 큰 연관성은 없겠지만 그를 시해한 암살건에 가담한 후실황비가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어쨌든 잠시나마 기독교 공동체에 숨통을 틔워주었고 계속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정말로 큰 업적이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선황 아우렐리우스에게 탄압을 받은 기독교가 코모두스 치세에 연속해서 궁지에 몰리지 않았기에 다른건 몰라도 기독교 문헌이나 교황청에서 코모두스를 지적해서 비판하는 경우는 없다. 사실 교황청 입장에서는 빌라도처럼 표창장을 주고 싶을지 모른다.
의외로 세상사람들에게는 명군으로 알려진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후세에 기독교가 제국을 장악한 로마 말기나 중세유럽에 신나게 혹평 당했고, 그의 기마상이나 동상은 보는 즉시 파괴될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