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Eastern Orthodox icon of the prophet Elijah, depicted with a disciple
엘리야(Elijah)는 구약성서 열왕기상에 나오는 야훼의 예언자로 구약성서에서 모세, 사무엘 등과 함께 위대한 예언자로 꼽힌다.
배경 및 의미
당시의 북왕국은 오므리 왕조의 최성기에 해당하며, 아합왕은 페니키아로부터 왕비를 맞아 양국간에 우호관계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경제적·정치적인 이로움이 많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페니키아의 종교가 공공연히 이스라엘에 침투하게 되었던 것도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언자 엘리야의 행적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이교신(異敎神) 바알과의 대결에 있었다.
갈멜 산 위에서 참다운 신의 증거를 구하면서 바알에 도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신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 배경에 지니고 있는 사막문화와 가나안의 옥토문화 사이의 필연적인 대결이었으며, 그 결과 모세 이래의 야훼 신앙이 승리하게 되었다.
엘리야의 예언자정신과 그 활동은 그 후 이스라엘의 종교사상에 등장하는 일련의 예언자들의 선구(先驅)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경 속의 엘리야
아합 시대의 엘리야
엘리야는 길앗의 티스베 출신의 사람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 시기에 살던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아합 왕이 악행을 저지르고 우상 숭배를 하며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자 엘리야는 아합에게로 가 몇 해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이스라엘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로 인해 아합과 이세벨의 미움을 사 쫓기게 된 엘리야는 요르단 강 동쪽에 위치한 크릿 시내에 숨어지냈다.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셨고 음식은 야훼가 명령한 까마귀들이 떨어뜨려 주어 며칠 동안 머물렀다.
이적과 카르멜(갈멜)산의 대결
엘리야는 야훼의 신탁에 따라 시돈의 사렙타로 가 머물렀다. 그곳에 한 과부의 친절한 대우로 숨어지냈을 수 있었는데, 그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자 엘리야는 기적을 일으켜 아이를 살려내게 하였다.
한편 가뭄이 몇 해 동안 계속되자 이것이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한 아합은 궁내 대신 오바댜와 함께 엘리야를 찾으러 떠났다.
아합을 만난 엘리야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 450명과 대결하게 된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은 제물을 바치고 자신들의 신을 불렀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야훼를 부르자 곧바로 불로 응답하셨다.
엘리야는 백성들을 시켜 바알의 예언자들을 처형했고 곧 비가 내리면서 가뭄이 종결되었다. 그리고 엘리야는 야훼의 도움로 사마리아로 도망치는 아합보다 더 빨리 가 이스라엘에 이르렀다.
엘리사를 부르다
이 사건으로 이세벨의 미움을 더 극렬하게 받은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쳐 호렙 산에서 죽기를 간구하는 극심한 두려움에 빠지지만, 야훼는 천사와 하자엘을 아람 왕으로 세우고 님시의 손자 예후를 이스라엘 왕국의 새 왕으로 세우고 아벨 므홀라 출신의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신탁으로 그를 보살핀다.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 그에게 자신의 겉옷을 입혀 후계자로 세운다. 그리고 아합이 야훼의 사랑을 받던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차지하자 엘리야는 아합이 비참한 최후를 맞고 이세벨과 그 자손들도 똑같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이후 아합이 전사하고 그의 아들 아하즈야가 왕위에 올라 똑같은 악행을 저지르자 엘리야는 아하시야 왕에게도 똑같은 최후를 맞을 거라는 예언을 한다.
후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을 눈으로 목격하고서 여호와의 영을 갑절로 받게 되고 그의 겉옷으로 다시 요르단 강을 갈라 건너가는 이적을 행한다.
승천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길갈을 떠나 베텔로 내려갔다. 엘리야는 그곳에서 엘리사를 머물게 하려 했으나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있기를 청하고 함께 베델로 갔다. 베델에서 다시 엘리야는 엘리사를 그곳에 머물게 하고 혼자 여리고로 가려고 했으나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있기를 청하고 함께 여리고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엘리야는 엘리사를 여리고에 머물게 하려했지만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있기를 청하고 함께 요르단으로 갔다.
엘리야는 요르단 강에서 멀찍이 있는 그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겉옷으로 물을 갈라 엘리사와 함께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자 불병거와 불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승천했다.
신약성서의 영향
신약성서에 따르면 예수의 모습이 변했을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별세하게 될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한 의인 야고보는 야고보의 편지에서 올바른 사람의 기도의 사례로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정말 비가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관련 항목
아합
예후
엘리사 (예언자)
엘리사Elisha는 엘리야의 제자로 그의 모든 권한을 이어받았다. 엘리사의 역할은 우상숭배에 빠진 ‘아합왕조‘를 뒤집는 일이었다.
임금을 제거하는 모반이었기에 목숨을 걸어야했다. 그는 군인이었던 ‘예후’를 부추겼고 그와 함께 반란을 주도했다. 이렇게 해서 ‘이즈르엘의 대학살’을 이끌어냈다.
당시 이즈르엘은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고 임금은 아합의 둘째 아들 ‘요람’이었다.
그는 아람족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치료받고 있던 중이었다. 틈새를 놓치지 않고 예후의 군대는 왕궁을 덮쳤다. 쿠데타였다. 저항하던 요람은 도망을 쳤지만 예후는 그를 활로 싸 죽인다(2열왕 9,24).
그리고는 ‘이제벨’을 찾아내어 살해했다. 이제벨은 자신의 처소에서 화장을 하고 당당하게 예후를 맞이했다. “자기 주군을 죽인 지므리 같은 자야, 평안하냐?”(2열왕 9,31) 죽음을 각오한 이제벨은 마지막 순간까지 밀리지 않았다. 분노한 예후는 내시에게 창밖으로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이제벨은 땅에 떨어져 죽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예후는 즉시 정적들을 제거했다. 아합의 아들 70명과 남아 있던 관료들을 모두 살해한 것이다. 이것이 이즈르엘의 대학살이다. 훗날 ‘호세아’는 예후를 비난하는 예언을 남긴다.(호세 1,4) 그만큼 잔인한 사건이었다. 예후의 후광으로 엘리사는 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구약의 예언자들 대부분이 비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엘리사의 삶은 예외였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겸손했고 청렴하게 처신하였다.
그러기에 엘리사는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물이 좋지 않은 성읍의 지하수를 정화시켰고 죽은 제자의 부인을 애련히 여겨 기름이 많아지는 기적을 베풀었다. 그리고 보리빵 스무 개로 백여 명을 먹게 했으며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도 했다.(2열왕 4,35)
가장 유명한 기적은 아람 Aram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을 고친 일이다.
그는 문둥병에 걸려 있었는데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르단 강에서 목욕하자 병이 나았던 것이다.(2열왕 5,14)
엘리사는 예언자로 불림받기 전에는 평범한 시골 농부였다. 그런데 엘리야가 부르자 즉시 응답했다. 그만큼 결단력이 빨랐던 것이다. 그리고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놓고 성대한 송별식을 가졌다.(1열왕19,21)
미루어보건대 상당한 부자였던 것 같다. 하지만 평생 허름한 옷에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대머리였고 가끔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2열왕 2,23) ‘임금의 후원’을 받는 막강한 예언자였지만 일생을 소박하고 겸허하게 살았던 것이다.
엘리사 (Elisha)
엘리사(Elisha)는 구약시대 살던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엘리야의 후계자라 불린다.
엘리야의 부름
엘리사의 정확한 초기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벨 므홀라 출신의 사팟의 아들로 엘리야가 하느님의 명령으로 엘리사를 불러 겉옷을 걸려 주어 후계자로 세웠다고 한다.
이후 엘리야와 함께 여러 지역을 다니다가 요르단 강가에서 엘리야가 소원이 있는지 묻자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을 두 배로 갖고 싶다고 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그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주어 엘리야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이적들
엘리사는 그 뒤에도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며 많은 이적(14개)들을 남겼다.
요단강을 건넘
엘리사가 물이 나빠 생산력을 잃은 한 성읍에 와 소금을 뿌리고 물이 다시 나오게 했다.[2]
엘리사가 베텔로 가던 도중 그걸 보던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욕하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어린아이들을 저주했다. 곧 암곰 2마리가 나와 아이들 가운데 42명을 찢어 죽였다.
유다 왕국의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국의 요람과 에돔 왕이 모압을 정벌하던 도중 가축들을 먹일 물이 떨어지자 엘리사가 나서 제물을 바치고 물이 나오게 했다.
엘리사는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공경하던 남편을 가졌던 한 과부가 빚을 지고 아들들이 종이 될 위기에 처하자 과부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기름을 늘려 그것을 팔아 빚을 갚게 했다.
수넴 여자의 아들이 죽게 되자 이적을 베풀어 그 아들이 다시 살아나게 했다.
길갈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독이 든 줄도 모르고 열매를 넣어 국을 끓이고 엘리사에게 대접했는데 엘리사는 이를 미리 알아차리고 밀가루를 솥에 넣어 독을 없앴다.
바알 살리사에서는 보리빵 20개와 햇곡식 이삭으로 100명을 먹이기도 했다.
나병 걸린 아람의 장군 나아만이 엘리사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병을 고치러 오자 이스라엘 땅의 요단강에서 일곱번 목욕하게 하여 나병을 고치게 하였다.
엘리사 종 게하지에게 나아만의 나병을 옮기게 하여 벌을 받게 했다.
요르단 강에서는 한 예언자 무리가 엘리사를 위한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다가 강물에 빠뜨린 도끼를 찾아주었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로 쳐들어오자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여 성으로 유인한 뒤 배불리 음식을 먹이고 돌려보내어 아람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도록 했다.
엘리사는 집에 원로들과 함께 있던 도중 자객이 자신을 해치러 오는 것을 미리 알고 피하기도 했다.
엘리사는 아람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훗날 아람의 왕이 될 하자엘을 만나 하자엘이 훗날 아람의 왕이 될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날 밤 하자엘은 자신이 모시던 아람 왕 벤 하닷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엘리사는 님시의 손자이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국의 새 왕으로 세운 뒤 혁명을 일으켜 요람 왕과 아하시야 왕, 이세벨과 아합의 아들들을 죽이게 했다.
죽음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국의 여호아스 왕 시기에 죽었는데 그때도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던 때였다. 마침 여호아스 왕이 방문하자 엘리사가 여호아스 왕에게 땅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여호아스 왕이 땅을 세번만 치자 "임금님께서 대여섯 번 치셨더라면, 아람을 쳐서 전멸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람을 세 번밖에 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한탄하며 죽었다.
사람들은 엘리사를 장사지내고 묻었으나 그 무렵 엘리사가 묻힌 곳에 모압 약탈대가 나타나 그곳에 주검을 묻으려던 사람들을 죽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떨어뜨리고 간 주검이 엘리사의 시체에 닿자 다시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섰다고 한다.
이사야(Isaiah)
이사야서(-書, 히브리어: ספר ישעיהו 이샤야후, 그리스어: Ἠσαΐας 헤사야스[*], 영어: Book of Isaiah)는 흔히 구약성서라고 불리는 히브리 성서의 한 책이자, 기독교 구약성서의 23번째 책으로, 총 66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통적으로 이사야가 저자로 알려져 있다.
예언자 이사야
출신
이사야(히브리어 יְשַׁעְיָהוּ Yeshayáhu, 현대 히브리어 Yəšaʿyáhu, 티베리안 히브리어 Yəšaʿăyāhû: "야훼/여호와는/은 구원이시다")는 아모스의 아들로 유다 출신이며 예루살렘 사람이다(사 1:1). 그는 전통적인 자료들을 취하기 위하여 왕이나(이사야 7:3) 제사장(이사야 8:2) 등 다른 지도자들에게 쉽게 접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는 고위직 가문 출신이나 왕족으로서 우찌야 왕의 사촌이거나 아마지야의 조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활동시기
이사야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아 기원전 745-695년까지 50년간 활동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사야는 본서 이외의 책들도 쓴 것으로 생각된다.(대하 26:22; 32:32). 그런데 그 책들은 왕들의 행적을 담고 있으므로 이사야는 역사가이기도 했다.
역대기 하 26장 22절 - "우찌야의 나머지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모쓰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가 기록해 두었다." - 을 감안하면, 이사야는 우찌야가 죽기 전부터 저술가로써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가 우찌야의 행적을 기록한 정황을 감안하면, 애초에 그는 왕의 연대기나 행적을 기록하는 궁중 서기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예언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우찌야가 죽던 해인 것으로 생각되며, 우찌야의 죽음 이후에 이사야는 소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 나아가, 이사야가 궁중 서기관이었다면 그의 예언에 세계사적 시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가족
이사야는 '여성 예언자'(이사야 8:3)라고 불리는 여성과 결혼을 했으며, 그녀가 그렇게 불렸던 것은 판관 드보라 (판관기 4:4), 그리고 여선지자 훌다(열왕기 하 22:14-20)와 같이 야웨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預言)'을 했거나, 혹은 단순히 그녀가 '예언자'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이사야 38:1).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들은 모두 상징적이었다(이사야 8:18).
한 아들은 '스알야숩(Shear-jashub)' 즉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7:3)였고, 다른 아들은 '마헤르 샬랄 하스 바스(Maher-shalal-hash-baz)' 즉 '그가 잡은 먹이가 빨리 부패함' 혹은 '파멸이 임박했다'(8:1-4)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밖에 이사야의 신상에 대하여 더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이사야의 저작 문제
저자
"누가 이사야서를 기록했는가?"에 대해 기원전 8세기 어간에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의 저작이라는 견해가 역사-비평적 신학이 발흥하기 전까지 전체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유럽에 불어닥친 계몽사상의 여파로 성서를 고문헌으로 이해하는 비평적 성서 읽기를 생각하면서, 이사야 외 제2 이사야, 제3 이사야라는 학설 즉, 이사야 예언서의 저자를 복수로 보는 해석이 등장하게 되었다.
1775년 되덜라인(J. C. Döderlein)은 그의 "이사야"란 (Esaias) 저작에서 이사야서는 두 개의 다른 작품들의 합성이라 주장하고, 아이히혼(J. G. Eichhorn)은 "구약 서론"이란 책에서(Eichhorn, 1780-1783) 사 40-66장은 이사야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사야서에 대한 비평적 가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게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의 이사야서 주석(Das Buch Jesaja, 1872)이었다.
둠에 의하면, 이사야서는 원-이사야서 (Proto-Isaiah), 제2 이사야서 (40-55장), 제3 이사야서 (56-66장) 등으로 구분되는데, 소위 제2 이사야서는 기원전 538년 바빌론에 거주하던 추방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어떤 무명의 예언자에 의해 기록되었고, 소위 제3 이사야서는 추방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후에 어떤 무명의 또 다른 예언자가 기록한 책이며, 소위 원-이사야서는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시대까지도 계속 진화 중에 있던 가장 늦게 산출된 문헌이라 한다.
베른하르트 둠
베른하르트 둠의 삼구분설 비평 가설이 비평학계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런 구분은 어휘 상의 차이, 문체상의 차이, 신학 사상의 차이 등에 근거한다고 한다.
특히 소위 제2 이사야서에는 심판 이후의 회복 주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또한 소위 제3 이사야서에서도 회복 주제가 부각되지만, 기소하고 심판을 선고하는 심판 메시지도 등장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회복의 메시지는 둠이 원-이사야서라 부른 1-39장에서도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는 메시지에서 (이사야 13-14장) 추방 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사야 14:1 이하).
이사야서 후반부를 추방 이후의 저작이라 가정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고레스(키루스 2세)"라는 페르시아 대왕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사야 44:28, 45:1 등).
그래서 이사야 후반부는 키루스 대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여 이름을 떨치던 시기에 기록되었으리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에 대하여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키루스"라는 왕의 이름은 예언으로 알려졌을 수 있으며 ("요시야"란 이름이 열왕기 상 13:2에서 태어나기 약 300년 전에 예언으로 선포되는 점을 참조),
이사야 후반부의 회복 메시지도 예수나 사도들이 가졌던 입장처럼 (마태오 복음서 3:3, 4:14, 8:17, 사도행전 8:30 등),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라고 확신한다.
베른하르트 둠을 필두로 하는 비평가설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도전은 "현재 우리가 지닌 구약 선지서들 중에서 무명의 저작은 전무한데, 유독 이사야같이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예언서를 어떤 무명의 선지자가 기록했겠는가?"하는 점이다. 더구나 "이사야 후반부의 회복을 이미 체험한 어떤 이가 그 메시지를 기록했다면, 그것은 예언을 가장한 가짜 예언인데(vaticinia ex eventu), 그런 거짓된 것을 성경의 일부로 용납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자체를 위서로 보는 입장에서는 누구를 저자로 보아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이사야의 시대 배경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왕국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의 동맹을 통해, 유다를 침공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히스기야 왕 때에는 아시리아의 산헤립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공격 당하여 유다왕국의 존폐가 달린 일도 있었다. 이사야는 그 때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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