孟子(맹자) 公孫丑(공손추)편에 나오는 말
無惻隱之心 非人也(무측은지심 비인야),
無羞惡之心 非人也(무수오지심 비인야),
無辭讓之心 非人也(무사양지심 비인야),
無是非之心 非人也(무시비지심 비인야),
無不忍之心 非人也(무불인지심 비인야)
※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는 4가지 덕목 仁(인), 義(의), 禮(예), 智(지)
1. 惻隱之心仁之端也(측은지심인지단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근본(根本)임
2. 羞惡之心義之端也(수오지심의지단야)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端緖)임
3. 辭讓之心禮之端也(사양지심예지단야)
겸허(謙虛)하게 양보(讓步)하는 마음은 예(禮)의 근본(根本)임
4. 是非之心智之端也(시비지심지지단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근본(根本)임
5. 不忍之心人之端也(무불인지인지단야)
고통에 겨워하는 남을 돕고, 고통 유발의 원인을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징벌하는 마음이 인간이다.
無惻隱之心 非人也(무측은지심비인야) : 사람이 측은함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無羞惡之心 非人也(무수오지심비인야) :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無辭讓之心 非人也(무사양지심비인야) : 겸허(謙虛)하게 양보(讓步)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無是非之心 非人也(무시비지심비인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無不忍之心 非人也(무불인지심비인야) : 고통에 겨워하는 남을 돕고, 고통 유발의 원인을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징벌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유래 :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선왕(先王)이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곧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政事)를 했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政治)를 행하면 천하(天下)를 다스리기는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사람이 누구나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理由)는, 지금 사람이 문득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놀라고 측은한 마음 이 있을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부모(父母)와 교분을 맺기 위한 것이 아니며, 향당 (鄕黨)과 친구(親舊)들에게 칭찬(稱讚)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 비난(非難)하는 소리가 싫어 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의(仁義) 발단이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 의 발단이요, 사양(讓)하는 마음은 예의 발단이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은 지의 발단이다.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해치는 자요, 그 임금이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자는 그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무릇 나에게 있는 사단을 다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 이 처음 솟아오르는 것과 같으니, 만일 확충한다면 사해(四海)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요, 만일 확충시키지 못한다면 부모(父母)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출전 :
맹자(孟子)의 공손추상(公孫丑上)
http://hanja.naver.com/word?q=%E5%9B%9B%E7%AB%AF
‘武’는 창이란 뜻의 과(戈)와 그치다는 뜻의 지(止)로 이뤄져 있고,
창은 전쟁을 가리키기에 무는 “전쟁을 그치다”는 뜻을 지니게 되므로
무라는 역량은 단지 체력이나 완력, 전투력 같은 물리력 자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전쟁을 그치는 힘, 이미 벌어진 다툼을 해소하는 윤리적 정당성을 말하기도 한다...?!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인의를 설파했으나
민중을 질곡에 빠뜨린 채 호의호식하는 군주를 징벌하는 전쟁을 ‘의로운 전쟁’이라 규정하며,
악을 종식시키기 위한 물리력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고통에 겨워하는 남을 돕고, 고통 유발의 원인을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징벌하는 마음 不忍之心(불인지심)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3172051005&code=960205&s_code=ac220
관용하지 않을 권리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여전히 관용의 자세다.
관용은 그저 착하기만 해서 자기주장 없이 뭐든지 다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고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관용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다.
우리 사회에는 나와 다른 생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관계들이 많다.
나이, 직급, 학벌, 성별, 인종, 지역, 혹은 종교나 정치적 신념 등이 수많은 장벽들을 만들어내고 상대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관용이야말로 사회 곳곳에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러나 칼 포퍼가 ‘관용의 역설’이라고 말했듯이,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관용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면 관용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자신을 냉철하게 성찰하고 상대의 입장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힘겨운 노력을 잠시라도 멈춘다면 누구나 불관용의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러기에 촛불집회와 친박집회 사이에조차도, 상호 관용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관용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단호하게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관용이 부족한 원인의 하나로 유교 전통의 폐해를 들 수도 있겠으나, 유교의 근본이념 가운데 하나인 ‘충서(忠恕)’는 나의 마음을 다해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관용과 닿아 있다.
관용이 ‘인정하기 힘든 다름을 참아냄’에서 비롯된 데 비해, 충서는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평화적 공존이라는 명분 아래 상호 불간섭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는 관용에 따뜻한 숨결을 더해줄 수 있는 것이 충서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타인의 아픔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괴물에게 베풀 관용은 없다.
세월호 유족을 조롱하고 참사의 진상 조사를 악의적으로 방해하며 거짓 뉴스들을 양산해온 이들, 봉하마을까지 몰려가서 고인의 가족을 능멸하는 것도 모자라 유인물 안 받는다는 이유로 손녀 같은 학생의 따귀를 때리는 이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푼다면, 이 사회에 그나마 존재하는 관용들마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4042118015&code=990100
참조 :
사람들은 '똘레랑스(관용)'의 문화라는 프랑스 문화를 아주 낭만화하곤 하지만,
프랑스든 어디든 간에 한 사회의 똘레랑스의 수준은
그 사회의 불관용의 한계에 의해 정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http://blog.naver.com/sanskysea?Redirect=Log&logNo=220570217339&from=postView
모본이나 푯대로서 경종을 울리는 어른은 드물고, 나이만 어른들과 갑질이 만연한 세상에
아이들과 청년들의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하는 작금의 시대,
과연 무엇이 안전한 미래를 담보해주겠습니까. 한번 가만히 생각 좀 해보자구요...?!
'송곳' 같은 남편, 나는 자신이 없다, 드라마 <송곳>, 재밌게는 봤는데... 불편한 아쉬움
http://blog.naver.com/sanskysea?Redirect=Log&logNo=220568051570&from=postView
그대들이 발등의 불 떨어진 것만 생각해 좋아, 좋아의 好好(hǎohǎo)가 아닌
두 눈 부릅떠서 "안돼" 또는 "stop"의 不好(bùhǎo)를
강력하게 외쳐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일 것이오.
http://blog.naver.com/sanskysea?Redirect=Log&logNo=220419839273&from=postView
곧장배기
자연과 모험을 좋아하고 물리와 공학에 관심이 많으며 나무로 하는 것은 다 배우려는 한옥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