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1. 기판력의 의의
종국판결이 확정된 경우에, 그 판결 속에서의 ‘청구(소송물)’에 대한 판단은 이후 당사자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규준으로서 구속력을 갖게 되므로, 그 후 ‘당사자’는 같은 사항에 대해 다툼을 되풀이하거나 전소법원의 판단에 반하는 주장을 해서 다툴 수 없고, ‘법원’도 다시 재심사해 모순·저촉되는 판단을 할 수 없는데, 이러한 구속력을 기판력이라 한다. 말 뜻 그대로 풀이하면 ‘이미 판단받은 효력’을 말한다.
기판력은 개념적으로 당연히 앞의 소송(이하 전소)과 뒤의 소송(이하 후소)을 전제로 한다. 이는 중복소제기금지(전소 소송계속중의 후소제기의 금지)나 재소금지(전소 종국판결 뒤 소취하 후의 후소제기의 금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후소가 확정판결 뒤인지(기판력), 소송계속중인지(중복제소금지) 아니면 소취하 후인지(재소금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기판력의 이론적 근거
‘법적 안정성(사회질서의 유지)의 요청과 소송경제(같은 분쟁의 반복금지)의 요청’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며(법적안정설), 다툼의 대상인 권리관계의 존부에 대해 변론과 소송수행의 기회가 주어진 점 즉, ‘당사자가 절차보장을 받은 점’에서 근거를 찾는 견해도 있고(절차보장설), 양자를 종합해 ‘법적 안정성과 소송경제의 요청·절차보장받은 당사자의 자기책임’에서 근거를 찾는 견해도 있다(이원설).
Ⅱ. 기판력의 범위에 관한 문제점
1. 동일한 소송인지의 판단
후소가 기판력에 저촉된다(기판력의 작용범위 속에 있다)고 하기 위해서는, 판결이 확정된 전소와 새로이 제기된 후소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앞의 소송과 뒤의 소송과의 동일성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가 문제인데, 소송을 이루는 3요소는 법원·당사자·소송물(청구)이므로, 법원이 같고 당사자가 같으며 소송물이 같으면 동일한 소송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원의 동일성은 문제되지 않으므로, 결국 당사자와 소송물이 같으면 동일한 소송이라고 보게 된다. 따라서 후소가 기판력에 저촉되기 위해서는 전소와 후소의 당사자와 소송물이 같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2. 소송의 동일성 범위의 확장
그러나 당사자와 소송물이 반드시 일치해야만 기판력에 저촉된다고 보게 되면, 양자가 일치하지 않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전·후 소송이 실질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후소에서의 상이한 판단을 허용하게 되어, 양자의 판결이 모순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주관적’으로 전소의 당사자와 후소의 당사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기판력이 작용하게 하거나, ‘객관적’으로 전소의 소송물과 후소의 소송물이 다름에도 기판력이 작용하게 할 필요성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전소의 확정판결의 기판력은 원칙적으로 전소의 당사자와 소송물에 관한 판단에만 ‘발생’하지만, 후소에 ‘작용’함에 있어서는 발생범위보다 ‘확장’된다.
3. 발생범위와 작용범위의 구별
이렇게 ‘발생’과 ‘작용’을 구분하게 되면, 기판력의 범위에 관해 좀더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기판력·중복제소·재소금지에 있어서 확장되는 범위의 비교가 가능해진다(회독을 거듭할수록 헷갈리는 부분이다). 많은 교과서들은 기판력의 범위에 대해 서술하면서, 발생과 작용을 구분하지 않고 ‘미친다’라는 표현을 써서 수험생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다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민사소송법의 입법자들이 ‘확정판결은’이라는 동일한 주어하에, 제216조(기판력의 객관적 범위)에서는 ‘기판력을 가진다’라고 표현하고, 제218조(기판력의 주관적 범위)에서는 ‘효력이 미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아래에서는 기판력의 객관적 범위와 주관적 범위에 있어서 발생범위와 작용범위를 나누어 서술하여 기판력에 관한 심화된 이해를 시도해 보고, 여론으로 중복소송금지·재소금지에 있어서의 확장(확대)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기판력의 시적 범위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기로 한다.
Ⅲ. 기판력의 객관적 범위
1. 발생범위(전소)
(1) 원칙
기판력은 원칙적으로 판결주문에 포함된 것에 한해 발생한다(제216조 1항). 그런데 주문에 포함된 것이란 당사자가 의식적으로 그 당부의 판단을 법원에 요구한 상대방에 대한 권리주장, 즉 ‘소송물’에 대한 판단이라고 하는 데에 거의 이론이 없다. 다만 어떤 소송물에 대한 판단인가는 청구취지와 판결이유를 참작해 판단해야 한다.
(2) 예외
판결이유 중의 판단에는 원칙적으로 기판력이 발생하지 않으나, 예외적으로 상계의 항변에 대한 판단에는 기판력이 발생한다(제216조 2항). 즉 상계항변은 소송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판단에 기판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상계에 제공된 반대채권에 기판력을 긍정함으로써, 그 후 반대채권의 존부에 관해 다툼이 있는 경우에 상계를 전제로 한 전소의 판결결과의 동요로 이중의 다툼이 유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일종의 ‘발생범위에서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기판력은 당사자의 기본권인 재판을 받을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므로 이의 확장에 있어서도 법률의 근거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발생범위의 확장 시도
‘객관적 발생범위에서의 기판력의 확장’의 시도로 쟁점효이론, 의미관련론, 경제적 가치동일성설이 논의된다. 예컨대 갑이 매매계약에 기한 매매대금지급청구를 하는 경우에, 소송물은 매매대금지급청구권의 존부이고, 매매계약의 효력유무는 선결적 법률관계로서 소송물이 아니며 판결이유중에 판단되지만 이러한 판단에 대해 기판력의 발생을 인정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는 후술하는 ‘객관적 작용범위에서의 기판력의 확장’과 구별하여야 한다.
2. 작용범위(후소)
(1) 원칙
전소에서 기판력이 ‘발생’한 것에 대해서만 후소에서 ‘작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즉 전소의 소송물이 후소의 소송물이 된 경우에만 그에 대한 판단의 기판력이 작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전소의 소송물이 후소에서 선결적 법률관계로 된다거나(선결관계), 전소의 소송물과 후소의 소송물이 정면으로 모순된다고 하더라도(모순관계) 기판력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확장
그러나 이는 실질적으로 전소와 후소의 판결간에 모순을 낳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결과가 되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선결관계나 모순관계의 경우에도 전소의 확정판결의 기판력은 후소에 작용하게 되고 후소법원은 전소판단에 구속을 받게 된다. 이는 교과서에서 ‘기판력의 작용’이라는 표제하에 서술되는 내용이나, 실질적으로는 기판력의 객관적 범위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는 ‘발생범위’의 확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즉 전소에서의 선결적 법률관계에 대한 판단에 기판력이 발생하는가(쟁점효이론 등)는 ‘발생범위’에서의 확장의 문제라고 할 수 있고, 전소에서의 소송물이 후소에서 선결문제가 된 경우에 기판력이 작용하는가(선결관계효)는 ‘작용범위’에서의 확장의 문제이다.
Ⅳ. 기판력의 주관적 범위
1. 발생범위(전소)
주관적으로도 전소의 확정판결의 기판력은 전소의 당사자에 대한 판단에만 발생한다. 필수적 공동소송에 있어서 공동소송인이나 독립당사자참가소송에 있어서 원고·피고·참가인도 소송당사자이므로 이들에 대해서도 기판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소외의 제3자는 물론 대리인이나 보조참가인에게는 기판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2. 작용범위(후소)
(1) 상대효의 원칙
전소의 당사자가 그대로 후소의 당사자가 된 경우에만 기판력이 작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소송은 분쟁당사자 간의 권리·법률관계를 명확히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므로,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고 방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제3자에게까지 소송결과를 강요하는 것은 제3자의 절차보장의 견지에서 부당하기 때문이다.
(2) 확장
당사자 사이의 분쟁해결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률의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기판력이 확장되어 작용하게 된다. 즉, 민사소송법은 당사자와 동일시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제3자에게 기판력의 작용을 긍정하는데, 제218조는 변론종결 후의 승계인, 청구의 목적물의 소지자, 소송담당의 경우에 피담당자에 게 기판력의 확장적 작용을 긍정하고, 제 80·82조는 소송탈퇴자에게 기판력의 확장적 작용을 긍정한다. 또한 가사소송법·상법·행정소송법은 가사소송·회사관계소송·행정소송에서 일정한 경우에 일반 제3자에게 기판력의 확장적 작용을 긍정하고 있다. 채권자 대위소송의 경우에는 통설과 판례가 법정소송담당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판력의 확장에 관한 고유의 논의가 있다.
Ⅴ. 여론 - 중복소송금지·재소금지와의 비교
1. 문제점
중복제소금지와 재소금지에 있어서도 당사자가 동일하고 소송물이 동일해야 그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들에 있어서도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에서 기판력처럼 확장이 긍정된다. 즉 후소의 당사자가 전소의 당사자가 아니라거나, 후소의 소송물이 전소의 소송물이 아닌 경우에도, 중복제소금지·재소금지에의 저촉을 긍정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기판력과 비교해 확장이 인정되거나 확장의 논의가 있는 지점을 표로 간단히 비교하기로 한다.
2. 객관적 확장
기 판 력
원 칙
동일 소송물
확 장
①상계항변 ②전소의 선결적 법률관계 ③선결관계 ④모순관계
중복제소금지
원 칙
동일 소송물
확 장
①상계항변 ②전소의 선결적 법률관계 ③선결관계 ④다른 심판형식
재 소 금 지
원 칙
동일 소송물
확 장
①선결관계
3. 주관적 확장
기 판 력
원 칙
동일 당사자
확 장
①변종 후 승계인 ②청구의 목적물 소지자 ③소송담당의 피담당자 ④채권자대위소송 ⑤소송탈퇴자 ⑥대세효
중복제소금지
원 칙
동일 당사자
확 장
①기판력 받는 자 ②채권자대위소송
재 소 금 지
원 칙
전소의 원고
확 장
①변종 후 승계인 ②선정당사자 ③채권자대위소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