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심판
송하연
“죽었다 치고 공부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도 합격 장담은……”
인터넷 강의는 언제나 일타 강사의 쓴소리로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든 들리는 내용은 대체로 비슷했다. 어딘가에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이 시기만은 죽은 상태가 용인된다는 것. 위안이 되는 말이었지만 몇 달째 듣다 보니 슬슬 지겨워졌다. 이제는 “노량진 임용고시생들은 지금 좀비 상태”라는 강사의 열변보다도 좀비라는 단어가 귀에 먼저 들어왔다. 강사는 아마 모를 것이다. 좀비들에게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앞날을 위해 달리다가 피폐해진 노량진의 좀비들이 상급. 삶에 대한 기대도 열의도 없이 본능만 남은 좀비가 최하급. 나는 틀림없는 후자였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허송세월한 기간만 2년. 고난의 스물다섯 살이 찾아왔다. 뭐가 그리 괴롭냐는 물음 앞에서 나도 모른다고 고함치기에는 조금 뻘쭘한 나이였다. 청춘의 반절을 날려 먹었다는 허망함과 함께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양쪽에서 직격타를 날려댔다. 무시하고 평소처럼 무기력감에 몸을 맡기자니 기력이 없었다. 제일 어리고 힘 좋을 때 모든 정력을 부모님과의 냉전에 써버린 뒤였다. 출퇴근하는 부모님 앞에서 이 세상 모든 불행을 떠안은 사람처럼 절묘하게 누워있는 것도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적당할 때 동년배가 치르는 인생 과업에 끼어드는 일이 차라리 덜 피곤해 보였다. 그렇게 올해 ‘취준’이라는 퍼포먼스가 시작된 것이었다.
침대에만 누워지내던 딸이 사람 구실을 시작하자 부모님은 적잖이 안도한 눈치였다. 학교 간다며 나간 딸을 삼십 분 뒤에 동네 산책로에서 마주쳤던 뒷목 잡을 사건도 이제는 철 지난 농담이 되었다. 집안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도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때늦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초과 학기를 이수하고, 매일 열 시간씩 임용고시 공부에 매진하면서. 그 모습이 대견했던지 아빠는 종종 칭찬하듯 물었다.
“오랜만에 공부할라니까 힘 안 들드나.”
“그냥 뭐…… 할 거 없으니까 하는 거지.”
같은 질문만 벌써 세 번째였다. 내심 으쓱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소외감만 곱씹던 일상에 느닷없이 ‘기특한 딸’이라는 배역이 생겨 기꺼웠다. 그 배역에 기대고 있으면 나도 남들 만큼은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질문을 네 번째로 받게 됐을 때였다.
“오랜만에 공부할라니까 힘은 안 들드나.”
이번에는 벼르고 별러 답변을 준비했었다. 그 사이 좀 진부해진 배역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참이었다. 너무 놀아봐서 그런지 게임보다는 공부가 더 즐겁다는 설정이 추가되면 완벽할 것 같았다.
“에이 뭐, 딱히 할 것도 없고 해보니까 공부가 재미…….”
“하하, 그래, 솔직히 이제 니 불러주는 곳도 없잖아. 맞제? 그럼 공부나 해야지 뭐 어쩌겠노.”
예상치 못한 대사가 말을 끊었다. 야심 차게 준비한 버전Ⅱ를 개시하기도 전이었다. 그간 찌꺼기 같은 효능감이라도 느껴왔던 자랑스러운 딸의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밀려드는 모멸감에 정신이 멍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빠는 순박하게 웃고 있었다. 악의 하나 없이. 데이트며 대학 MT며 날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여동생과 나를 무의식중에 비교한 걸지도 몰랐다. 무언가 욱하고 치달았지만,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아서 그냥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날 밤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낮의 일을 안건 삼아 내면 깊은 곳에서 대토론회가 벌어졌다. 역시 짜증 난 기색이라도 보여야 했을까. 현대사회 가족의 모습에 비추어 봤을 때 딸의 짜증 정도는 패륜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아빠의 말이 완전히 맞는 것도 아니었다. 인간관계에 심드렁해져서 자발적으로 연락을 끊은 것은 내 쪽이었다. 그것을 ‘불러주는 곳도 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연애로 치면 찬 쪽과 차인 쪽을 착각한 무례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그런 말이 곧장 튀어나왔다는 건 아빠가 평소 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드러내는 반증이 아닌가.
애써 생각을 지우려는데 무언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 쓸모없는 놈. 넌 자랑스러운 딸이 아니다. 영웅이 아니다. 예쁜 여자가 아니다. 인생의 위기 하나 없이 혼자 몸져누운 놈이다. 정신과 의사들도 한심해할 놈이다……. 아닌 밤중의 비난은 영혼 안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바닥 없는 불행감에 젖어 살던 은둔 청년 시절에 이미 숱하게 겪은 증상이었다. 이런 소란은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불리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오늘 밤은 못 잔다고 봐야 했다.
결국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그래, 멋대로들 지껄여라! 어차피 이딴 인생에 애착도 없다. 도전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진작 끝난 지 오래고, 지금은 순전히 쳇바퀴 같은 삶에 갇혀서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목소리들도 차츰 사그라들었다. 이런 고군분투는 골백번도 더 해 봤기에 놈들을 상대하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소란을 더 큰 자기혐오로 덮어버리거나, 게임과 유튜브를 마취제 삼아 머릿속을 둔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물러간 줄 알았던 목소리들이 며칠 사이 세를 불리더니 일상을 서서히 압박해 왔던 것이다. 놈들이 지금 내 인생에 이렇다 할 목표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 분명했다. 텅 빈 육신을 차지해 보려고 저렇게 떠들고 있을 터였다.
대학 강의를 듣는 중에도 예외는 없었다.
“……자네들은 왜 이렇게 도전 정신이 없나?”
나이 든 남자 교수가 언짢은 듯 운을 뗐다. 질문에 대한 침묵을 참을 수 없을 때 으레 꺼내는 주제였다. 곧 무턱대고 미국 유학에 다녀온 자신의 젊은 시절 무용담부터 청년들에 대한 충고, 정치에 대한 한탄까지 이어질 것이다. 혹시라도 이 일장연설에 감명받은 사람이 있는지 찾기 위해 슬쩍 눈을 굴렸다. 정갈한 정수리들만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광경인데,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저마다 몰래 폰을 보면서 꿈뻑거리는 눈들이 지나치리만치 무구하게 느껴졌다. 자신들이 지금껏 어디로 끌려왔고 앞으로는 또 어디로 가게 될지 의문 하나 없는 도살장의 소떼들 같다.
왈칵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어째서 나처럼 예리한 지성을 가진 사람까지 이딴 지잡대에 묶여버렸단 말인가! 고2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앞날이 창창했는데. 아냐, 고작 자학 한 번 하겠다고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건 비겁한 일이다. 게다가 지잡대라는 야만적인 단어까지 쓰다니……. 그래, 까짓거 몰상식한 쓰레기가 되겠다. 지잡대, 지잡대, 지잡대, 지잡대!
소리 없는 아우성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너는 죄인이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놈이다. 어디서 새는지 모를 여름철 방충망 같은 놈이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네 자신을 구해줄 능력도 없는 놈이다……. 쉴 새도 없이 비난에 시달렸더니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 모든 게 다른 누군가의 사주 없이 나 스스로 뿜어내는 악의라는 점에서 더더욱. 억울한 감정도 며칠이었을 뿐, 완전히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들의 말이 맞았다. 나는 대역죄를 지었다. 너무나도 무능력한 죄. 모든 걸 망쳐버린 죄. 과거의 자신을 배반한 죄. 자신에게마저 경멸당하는 죄. 자신에게만 포악한 죄.
그때 마음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형체들이 솟아올랐다. 처음에는 연기처럼 일렁이던 것들이 차츰 사람의 윤곽을 띠더니, 곧 가슴팍에 검사와 변호인이라는 푯말을 달았다. 먼저 나선 것은 검사 쪽이었다.
―피고, 모든 죄목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어물어물하던 것도 잠시, 절로 입이 열렸다.
―죄목도 아는 사람이 2년째 이 지경으로 사는 이유는 뭡니까?
……모르겠다. 무언가 아주 커다란 것을, 울화통이 치밀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중요한 것을 잃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종일 가슴을 난도질하는 듯한 상실감이 치민다. 더는 되고 싶은 것도 기대되는 것도 없는데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이 뜨악스럽기만 하다. 생활을 꾸리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긍심도 없다. 이 모든 하루하루가 사전 동의 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저 위의 보이지 않는 배심원들에게 호소하듯이 살고 있다.
아니다. 내가 인생에 걸고 있는 집착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사실은 자존심이 상해서 복수하고 싶은 것이다. 나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으로 취급하는 세상에 단 1인분의 몫도 해주지 않음으로써 빈자리를 느끼게 하고 싶다. 정말로 하등 쓸모없는 짐짝이 되어서 모두를 짓눌러버리고 싶다. 그러나 많고 많은 인구 중에 나 하나가 방안에 틀어박혀 곡기를 끊는다고 한들 무슨 놀라운 일이 생기겠는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무슨 오기인지 아직까지도 혼자 고독한 싸움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잠시만요. 이 증거를 보십시오, 제가 알기로 피고는 무시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방구석에 드러눕는 건 남들에게 무시당할 빌미를 주는 것 같은데요?
검사가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열네 살에 썼던 노트 한 장을 꺼내들었다.
「 내가 싫어하는 것들
- 누가 유식한 척할 때 → 내가 어벙해 보이니까
- 내가 무식해 보일 때 → 난 유식해야 하니까 」
처음 보는 기록이라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진술을 이어갔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나란 존재에 대해 가져왔던 미지의 호기심과 가설들이 모조리 판명된 지 오래다. 특별한 존재일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냥 정신 쇠약자였다. 이제는 기대할 것도, 지켜야 할 체면도 없다. 그러니 남들이 무시하든 말든, 오히려 이죽거리고 싶은 기분까지 드는 것이다. 차라리 정체 모를 상실감을 휘둘러 분노처럼 표출하는 것이 즐겁다. 그래, 분노다. 쌓이고 쌓여서 현기증이 날 지경인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분이 풀릴 때까지 남들을 헐뜯고만 싶다.
……역시 아니다. 나는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놈이다. 그 점이 21세기의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위안과 동시에 커다란 수치심을 준다. 자각할 때마다 닥치는 대로 아무 데나 발길질을 해서 뭐라도 겁주고 싶어진다. 그러다가도 공연히 다리를 들어가며 허둥댈 모습이 또 얼마나 꼴사나울지 생각하면 깊은 슬픔에 잠기고 마는 것이다. 아, 도대체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은 한없이 난해하다.
―원래 기대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좋은 대학에 가고, 예쁜 여자가 되고, 대단한 위인이 되고 싶었다. 거의 매번 제대로 닿지 못하고 헐떡거려야 했지만, 이 목표라는 것들은 언제나 망망대해의 희미한 등불이 되어주었다.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빛나는 꿈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직 이 세상의 무언가가 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환희에 빠져들게 됐다.
―노력은 해봤겠지요.
물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물겨운 노력 뒤에는 항상 설명하기 힘든 기행이 따라붙었다. 이를테면 간신히 쌓아 올린 것들을 어느날 난데없이 부숴버리는 버릇 같은 것. 다이어트로 40kg을 뺐다가도 사람들의 칭찬이 최고조에 달할 때 닥치는 대로 먹어서 살을 찌웠고, 고3 때는 죄책감을 온몸으로 견디며 아예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혔다. 그러다가도 정신이 돌아오면 뼈저리게 후회하며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했으니, 노력도 두 배쯤 더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공든 탑을 또 쌓고 또 쌓고 또 쌓아도 처절하게 실패했다. 어떻게든 세상에 어울려보려고 분투할 때마다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 굴욕을 줬다. 대입도, 인간관계도, 다이어트도, 자랑스러운 딸이 되는 일도 전부. 수만 번의 편입 시도가 좌절된 끝에 급기야 무엇도 의식할 필요 없는 혼자만의 동굴 속으로 비척비척 걸어들어간 것이었다.
―어떤 굴욕이었죠?
청춘을 누리기 위해 20킬로그램을 뺐던 대학교 1학년.
은퇴한 전공 교수의 말을 빌자면 우리 학과는 ‘세 가지’가 없는 학과였다. 천재, 미인, 부자. 그중에서 그나마 돋보이는 예쁘장한 여자애가 한 명 있었다. 그 애는 과의 모든 사람에게 참 친절했는데, 휠체어를 타는 여자 동기와 친해지고 싶다며 다른 동기에게 부탁해 소개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뚱뚱한 여자 동기들과는 부득불 선을 그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 여자애는 네 명짜리 전공 모임에서 학과의 뚱뚱한 여자 동기 둘과 같은 조가 되었다. 그중 하나가 나였다. 과제를 위해 다같이 근처 카페로 이동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애는 나머지 마른 여자 조원을 데리고 거의 2인 달리기 질주를 하듯이 앞서 걸었었다. 횡단보도 하나만큼의 거리를 뒤처져 걷자니 절로 얼굴이 홧홧해졌다. 도대체 나의 무엇이 저 여자애를 달리기 선수로 만든 것인지 한참을 곱씹다보니 가슴이 막막했다. 옆에 남은 동기의 떡진 머리를 바라보면서 그래도 나는 씻기라도 한다고 못된 한탄을 했다.
―……피고, 혹시 지금 장난치십니까?
다른 일도 있었다.
어느날 그 달리기 선수 여자애한테 보이스톡이 왔다. 학과 1학년들끼리 술을 먹기로 했는데 여자 인원수가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오늘 화장을 안 해서 못 가겠다 했더니, 그 애 옆에 있던 다른 여자애들이 자기들도 다 쌩얼이라고 외쳤다. 많이 고민했지만 스무 살에 술자리 한번은 가져봐야 할 것 같아서 나갔다. 나쁜년들이 마스카라까지 하고 있었다.
술집에는 아는 얼굴이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동기들끼리는 이미 제법 친해 보였다. 네 명씩 테이블을 나눠 앉은 뒤, 각자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마셨다. 웬만하면 랜덤으로 이동할 법도 한데, 다들 꽃을 찾아 헤매는 한 마리 벌마냥 테이블마다 살포시 앉았다 떠나길 반복했다. 같이 앉았던 여자애들이 친한 남자 동기들을 찾아 하나 둘 테이블을 떠나니, 나는 곧 혼자 남게 됐다. 사방팔방으로 드르륵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필이면 내가 앉은 테이블은 그 넓은 술집의 정중앙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자의식이 불운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직접 자리를 옮겨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테이블째로 세상에서 추방당한 것만 같은 소외감에 버둥거리느라 사방이 보이지 않았다.
체감상 한 시간쯤 뒤에 달리기 선수 동기가 돌아왔다. 그 뒤로 그 애에게서 눈을 못 떼던 어리숙한 남자애 둘도 털레털레 따라왔다. 네 명이 모이자 나도 간신히 술게임이라는 것을 해볼 수 있었다.
“진 사람이 음, 여기서 제일… 공부 잘하게 생긴 사람 지목. 아이, 아니다. 이건 상처받을 수 있으니까 그냥 귓속말로 말해봐.”
달리기 선수가 웃으면서 벌칙을 정했다. 공부 잘하게 생긴 사람을 발음할 때의 눈빛이 유독 음흉했다. 칭찬이라기에는 묘한 비꼼이 담겨있었다. 사실상 ‘범생이’나 ‘찌질이’라는 멸칭을 좀 교양 있게 돌려 말한 것 같았다. 앞머리를 유난히 털어 넘기던 남자애 하나가 벌칙 수행을 고민하는 척하더니, 달리기 선수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놈의 앞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 입모양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놈은 내 이름을 말하고 실실 웃었다. 달리기 선수는 그의 팔을 가볍게 치며 “어우, 그건 심했다” 하며 따라 웃었다.
이후로 성형을 했다. 다이어트까지 죽어라 했더니 학교 에브리타임 어플에 사범대에서 제일 예쁜 여자라고 이름 초성이 올라왔다. 달리기 선수 여자애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뭔가 인생이 달라졌다는 확신을 받고 싶었다. 학과 MT에도 가본 적 없건만 얼굴도 잘 모르는 동기와 후배에게 고백도 받았다. 사귀고 싶다고 했다. 더 알고 싶고, 차이더라도 같이 밥 한끼 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고 싶다고 했다.
풋풋한 고백 앞에서 이상하게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벌거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많은 것이 그대로다. 사실 살이 덜 빠졌다. 아니, 늘어지고 말았다. 하필 성형만 대박 나서 꼭 사기꾼이 된 느낌이었다. 차라리 목 놓아 울면서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이 아는 그 여자가 아니라고. 단 한 번도 그 여자가 될 수 없었다고. 이제는 무언가를 사랑할 능력도 용기도 잃어버렸다. 아, 황량한 이십대.
―피고,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나 힘든 겁니까? 본인이 인생 난이도를 높이는 게 아니고요? 피고가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그간의 굴욕적인 사건 사고 모니터링만 하고 있으니 과장된 것 같은데요.
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드디어 변호인이라는 놈이 변호를 시작했다.
—이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게 원래 일어나지 않은 실패에도 짓눌려 사는 존재 아닙니까? 소아비만 출신인 피고는 고기반찬이 맛있어도 급식을 더 받지 못했습니다. 용기를 내서 고기반찬을 받으러 갔을 때 남자애들이 시시덕거리며 돼지라고 놀렸기 때문이죠. 무게와 부피 개념이 생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의 날짜로 환산해 보면, 욕망을 참아야 했던 나날이 자그마치 3600일 남짓 되는 겁니다.
벙찐 검사를 뒤로하고 변호인이 새로운 증거를 들이밀었다.
—여기 피고가 침대 인간이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고3 때 일기를 증거 자료로 제출합니다.
「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빛나는 눈동자를 하고 미래를 고대하던 어린 시절의 나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 기대를 처참히 밟아버리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모두가 나한테 기대를 걸고 있다. 이대로 모든 게 무의미해질 수는 없다. 입시를 끝내면 분명 과거의 내가 울고불고 내 멱살을 잡을지도 모른다. —수능이 임박한 시기로 추정되는 일기— 」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여자 한 명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면 엄청난 국가 비상사태 아닙니까? 등골이 섬찟한데요.
증거물을 바라보던 검사가 고개를 저었다.
—검사 측, 말조심하세요. 피고는 심신미약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벌떼처럼 몰려오는 무수한 생각들에 쫓기면서 사는데 제정신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피고는 병적인 자기애와 자기혐오에 시달리느라 일 년 중 대부분은 멀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티격대는 두 환영을 뒤로한 채, 머릿속에 펼쳐진 과거의 흔적을 한참 읽었다.
모두의 기대를 처참히 밟은 시점에 읽어서 그런지,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실패한 미래는 그렇게나 매도하면서 도대체 상처 입은 과거의 무엇을 보호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훗날의 자신이 멱살을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본 모양이었다.
그러다가도 곧 본능적인 자기연민이 올라왔다. 볼품없이 주저앉은 나를 달래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허황된 미래를 약속해 왔었다. 언젠가 대단한 존재가 되어, 이런 인간도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보란 듯이 증명하고 싶었다. 쭈그러든 만큼 부풀리지 않으면 버틸 수 없던 나날이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그 많은 다짐 끝에 된 것이 겨우 지잡대 출신의 요요가 온 평범한 여자라니. 허물어지는 신화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한때 그토록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믿었던 어린 내가 이런 결말을 원망하기라도 할까 봐 벌벌 떨었다.
—피고는 원망하십니까?
변호인과 검사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과거의 자신이 좀 더 분발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에 화가 나십니까?
“…아니, 그런 건 과거의 내가 심판하는 거고, 지금 나한테는 자격이 없잖아.”
—그럼 피고는 뭘 할 수 있는 겁니까?
“나? 나는 그냥, 과거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실패한 미래는 그렇게나 매도하면서 도대체 상처 입은 과거의 무엇을 보호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방금 전 꺼낸 생각이 되돌아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변호인도 검사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쪽 어딘가에서 꺼진 줄 알았던 무언가가 미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