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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를 돌면 새 길이 보입니다. - 박은희님 글

작성자이신정|작성시간26.06.15|조회수29 목록 댓글 0

1. 모퉁이를 돌면 새 길이 열립니다.

 

방향을 한 번 꺾고 나니 비슷한 듯 온전히 다른 글이 되었네요. 목욕탕이라는 공간에 대한 핍진했던 묘사는 배경이 되면서 물러나고, 그 장소에서 생겨난 특별한 인물과의 만남이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구성과 문체, 관점과 해석, (사건처럼 시작되는) 인물들 간의 대사까지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원래 고수하던 단문 형식의 문체가 복구되면서 리듬과 기운이 이전보다 강화된 점이 눈에 띕니다. 실험 삼아 다른 문체를 시도해 본 뒤 다시금 자신의 문체로 돌아오면, 제 자리인 듯 제 자리가 아닌 걸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요. 홀로그램처럼 같은 자리에서 다른 차원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 다녀왔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변화를 한 번 구체적으로 써 보겠습니다. 1-1은 지난 달 처음 쓰셨던 글의 첫 단락이고 1-2는 이번에 고쳐 쓴 글의 같은 단락입니다.

 

1-1.

'수증기가 자욱한 그곳은 도심 속에서 유일하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섬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일상의 허물을 벗기 위해 그 건물을 찾는다.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마다 동네 목욕탕들이 이름 모를 카페나 빈터로 변해갔지만, 7층짜리 상가 건물은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엘리베이터가 노후한 소리를 내며 6층에 멈춰 서면, 문이 열리기도 전에 습한 공기와 비누 향이 먼저 코끝을 건드린다. 육중한 규모의 공간에 들어설 때면, 마치 거대한 수중 도시의 입국 심사를 받는 기분이 든다.'

 

1-2

'일주일에 한 번 목욕탕에 간다.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간 뒤 동네 목욕탕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그 자리마다 카페나 빈터가 들어섰다. 그래도 7층 상가 건물은 살아남았다. 엘리베이터는 늙은 짐승처럼 끙끙거리며 6층에 멈춘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습한 공기와 비누 향이 코끝을 건드린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어깨가 내려간다. 한 주를 버텼다는 신호다.'

 

-> 리듬과 속도가 전보다 생생하게 살아난 듯합니다. 묘사를 길게 하려는 욕심을 내다 보면 자칫 ‘유일하게 시간이 느리게... 꿋꿋하게’ 처럼 꼭 필요하지 않은 부사가 겹치면서 문장에 걸림돌이 생기거나 ‘육중한... 거대한....’처럼 형용하는 말이 비슷하게 이어지면서 문장이 늘어지고 지루해지기 쉽습니다. 그런 난제를 모두 해결하셨네요. 비유와 묘사에 대한 욕심을 거르고 나니 꼭 필요한 것만 남은 깨끗한 단문에 ‘늙은 짐승처럼 끙끙거리며’ 처럼 갑자기 들어선 비유가 더 돌올하게 읽히는 효과도 생깁니다.

 

 

2. 견습공에서 숙련공으로. 무대(stage)를 바꾸어야 할 때.

 

어딜 어떻게 밟아도 딱히 빠지는 데 없이 바닥이 단단하게 느껴진다면 때가 온 것입니다. 기초공사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다른 차원으로 도약해야 할 때 말이죠. 쓰기의 향유를 체감한 사람에게 필요한 건 위로나 치유가 아니라 창조를 지속하는 자가발전의 동력일 거예요. 그러니 이제 흔들릴 때마다 뒤에서 자전거 안장을 잡아주거나, 그 정돈 틀려도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손길은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충만해지는 방법을 체득한 주체에게 그런 손길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작은 향락에서 더 큰 향락으로, 엇비슷한 향유에서 고유하고 남다른 향유로, 점층법처럼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깊고 복잡하게, 더 차갑고 면밀하게, 더 고집스럽고 까다롭게, ‘자신만의 쓰기를 고수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본격적인 향락을 위한 고투가 시작되는 것이죠. 자기 자신이라 믿었던 것과 점점 더 멀어지면서요. 힘들게 먼 길을 걸어오셨으니 이제 그 힘으로 더 힘든 길을 가셔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비문을 허용하지 않고, 어색한 표현을 어색하지 않을 때까지 집요하게 고쳐 쓰고, 알고 있는 걸 모두 알리려 하지 않고, 설명 가능한 걸 모두 설명하려 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걸 감추거나 밑바닥에 깔고, 그래서 쓰는 일 못지 않게 빼는 일, 결합하는 일 못지 않게 배치하는 일에도 주력하셔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꺼진 불도 다시 보듯, 다음 무대를 위해 다지고 또 다져야 하는 건 두 가지, 문장과 플롯입니다.

 

2-1.

아래는 손이 덜 가서 다소 덜 익게 된 문장들입니다. 한 번만 더 고쳐 썼다면 해결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초점이 맞춰질수록 심장이 빨라졌다.’ -> 주어와 동사, 주술관계가 어색합니다.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가슴이 빠르게 덜컹거렸다.’ 이런 식으로 바꾸면 해결될 듯합니다.

‘키는 154센티미터 남짓했다.’ -> 통상 육안으로만 보고 ‘154센치미터’라는 정확한 측정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색하거나 과하게 느껴져요. ‘키는 150 남짓, 작아 보였다.’ 정도가 어떨까 싶습니다.

‘목 아래로 이어지는 풍경은 현실 같지 않았다.’ -> 몸을 곧바로 풍경으로 표현하는 건 어색합니다. ‘형상’ 정도가 어떨까요.

 

2-2

플롯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이지만, 문장이나 단락 단위에서도 내부적으로 작동합니다. 한 문장 안에서도 플롯이 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1)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가을이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 한 문장 안에 만남이라는 결과와 그 만남이 예측되는 시간적 배경이 모두 포함돼 있습니다. 독자는 이미 화자가 그녀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첫 문장 안에서 알게 됩니다. 플롯의 핵심은 생략과 결합, 지연과 배치입니다. ‘그녀와의 만남을 언제 어디쯤 배치해서 알릴 것인가, 처음부터 알리고 들어갈 것인가, 차츰, 조금씩, 알 듯 모를 듯 그녀의 일부, 파편만 던져주다가 결정적일 때 전모를 알게 할 것인가. 이 고민이 단락을 여는 첫 문장을 결정합니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을 생략하고 가을이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나머지만으로 첫 문장을 연다면, 독자는 시점만 알게 될 뿐, 이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 긴장과 유예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입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두 알리고 들어가려는 서사적 조급함’, 혹은 회고적 관성입니다. 시간과 서술은 분리될수록 좋습니다. 좋은 서사는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지연시키며, 독자를 계속 다음 문장으로 끌고 갑니다. 이 질문과 유예/지연의 구조가 플롯의 기본 동력입니다. 좋은 첫 문장은 그 자체로 이미 질문입니다.

 

2)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물병이 형광등 빛을 받아 진한 보라색으로 번졌다. 블루베리와 비트를 섞으면 저런 색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아이가 좋아해서 자주 만들어주던 색이었다.

"블루베리예요?"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물병을 잠깐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비트도 넣었어요.”’

 

-> ‘블루베리와 비트를 섞으면 저런 색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아이가 좋아해서 자주 만들어주던 색이었다.’ 이 문장들을 뒤로 뺀다면, 그래서 알면서도 모른 척 느닷없이 ‘블루베리예요?’ 물었다면, 이 단락이 갖는 탄력과 긴장은 더 증폭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경계 밖, 먼 거리에 있어야 할 타인에게 최초로 건네는 말, 그 난데없는 말이 갖는 ‘미스터리’(왜 하필 그 말이어야 하는지 독자는 몰라야 함)에 독자를 집중시키는 것이야말로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능청스러움’인지도 모릅니다. 한 마디로 ‘아는 건 가능한 한 뒤로 뺀다, 혹은 안다고 다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단락에도 적용되어야 할 플롯의 핵심입니다. 화자는 결론을 알고 있지만 독자는 모를 때, 이야기를 운용하는 키는 화자가 끝까지 쥐고 독자를 쥐락펴락해야 합니다. 아는 걸 너무 빨리 넘겨주지 마세요.

 

예3)

‘머릿속으로 미리 연습한 말이었는데, 가까이 갈수록 그 말이 너무 거창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시시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연습한 버전 중 가장 짧은 쪽을 골랐다.

“등 밀어드릴까요?”’

 

-> 플롯이 제대로 선 단락으로 읽힙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독자의 호기심을 끌고 가니까요.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발생하게 하고, 의미를 해석해 주기보다 독자가 발견하게 하고, 경험을 서술한 뒤 왜 그랬는지에 대한 추론을 독자가 알아서 하게 하는 것. “등 밀어드릴까요?”이 대사가 단락의 마지막으로 유예되면서 배치되었기 때문에 그 효과가 반전처럼 일어납니다.

 

3. 도약의 동력

 

‘엑스레이녀라’는 별칭에 대한 다른 관점의 접근, 거울을 통해 그녀를 보고, 그녀를 거울 삼아 다시 나를 비춰보는 중첩된 시선의 도입, ‘등을 밀어주는 행위’를 관찰하고 해석하기보다 직접 실행하는 사건, 언뜻 잔약해 보이는 두 사람의 만남이 어느덧 그녀가 공백이 되면서 알 수 없는 후유증으로, 무한한 기다림으로, 규정할 수 없는, 흔치 않은 사유를 일으키는 흔적으로 남게 한 결말... 이 모든 변화가 놀랍습니다. 기초공사가 마무리됐다는 느낌이 들게 했으니까요. 그래서 탄탄하게 고삐를 조이듯, 더 나아가셨으면 하는 쪽으로 제안하고 싶은 내용을 먼저 쓰게 됐습니다.

 

4. 옥석을 가리기 어렵지만 그래도 옥을 골라 봅니다.

 

갈수록 문장을 제련하는 솜씨가 괄목상대할 만큼 좋아져요. 그중에서도 좋았던 문장들, 밑줄쳤던 문장들 골라보았습니다.

 

‘그 움직임은 쇠를 담금질하는 의식처럼 보이기도 했고, 마른 가죽에 수분을 강제로 주입하는 사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정확함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따라왔다. 이름 대신 몸의 상태로 불리는 사람. 그녀도 그렇게 불린다는 것을 알까.’

‘어느 쪽이든 시선은 늘 몸에 먼저 닿았다. 사람보다 몸이 먼저 읽히는 경험.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지금 그녀의 몸을 보고 있었다는 것. 별명을 비웃을 자격이 없었다. 시선을 거두려 했지만, 눈은 여전히 그녀의 등을 따라가고 있었다. 모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었다. 그 별명에 가장 먼저 찔려야 할 사람이, 정작 누구보다 그 별명을 따라 그녀의 몸을 훑고 있었다.’

‘걱정도 동정도 아닌, 그냥 옆자리에 앉는 것.’

‘그것도 소리라기보다는 옅은 입김 같았다. 흐린 날 낮게 깔린 구름이 제 몸을 비비는 소리처럼 낮고 습했다. 들리는가 싶으면 곧 수증기와 섞여 흩어졌다.’

‘그녀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쏟아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 주에 한두 마디씩,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듯 조금씩 흘렸다. 어떤 날은 날씨 이야기였다. 어떤 날은 사우나 온도가 낮아진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러다 가끔, 아주 가끔, 문장 하나가 다른 무게로 떨어졌다.’

‘몸이 변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고 했다. 처음에는 입맛이 없어서였다. 밥을 차려도 반 그릇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 살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줄어드는 숫자만큼 무언가에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한때 그녀를 옭아맸던 모든 시선, 모든 기대, 모든 평가로부터.

“처음엔 그냥 살이 빠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니까, 내가 점점 없어지고 있더라고요.”’

‘뼈만 남은 몸은 누구의 기대도 담을 수 없는 그릇이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몇 달 전, 이 손바닥이 그녀의 등을 읽었다. 가느다란 등뼈, 오랜 긴장, 길어지던 숨소리. 그 감촉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이를 만나러 가는 날의 전날 밤. 그녀에게 이 목욕탕은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설레고 무서운 밤을 예열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두 달째 그 의식을 치르러 오지 않는다.’

‘비어 있어도 상관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이 목욕탕에 오기 시작한 지 몇 년, 처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5. 독후감처럼 떠오른 이기인 시인의 시 한 편 덧붙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이기인

 

오랜만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지요.

나는 당신의 등뼈를 본 첫 번째 사랑이지요.

당신의 등뼈에 붙은 살이 얼마나 얇은지 알고 있는 사랑이지요.

그렇게 얇은 삶이 바람을 견딘 것을 알고

손가락으로 당신의 등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과

뒤돌아서서 날 깨우쳐주신 마른 가슴이 있다는 걸 알았지요.

내가 처음부터 만질 수 없었던 당신의 몸은 바람이 부는 동안

내가 사는 골목까지 날아와 기다렸지요.

당신은 그때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워하는 몸으로 들어왔지요.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

불빛처럼 아름다운 당신의 이야기를 밤새 읽다가.

 

*

불빛처럼 영롱한 글, 밤새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놀라움을 일으키는 다음 글, 또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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