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벤치와 마운드 사이
오래도록 벤치에 머물러야 했던 선수의 얼굴엔 복잡한 상념이 스며 있습니다. ‘할 수 있는데’와 ‘할 수 있을까’ 사이, ‘불러주면 잘 던질 수 있는데’와 ‘부르지 않으니 못 던지겠다’ 사이, 기대와 체념을 오가느라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표피의 주름이 (뜻밖에도) 그 얼굴에 좋은 음영을 만들기도 합니다. 40매짜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글 「99.9%」도 그렇게 읽었습니다. 오랜 대기 끝에 누구의 호명 없이도 스스로 막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사람의 글.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사람이라는 걸 입증하듯,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자신을 끌어당겨 미래로 호출하는 글. 그러고 보면 투수가 하나가 아니듯 마운드도 한 자리에 고정된 건 아닐 겁니다. 거기, 보이지 않는 그 마운드에 서는 꿈은 언제 이루어지는 걸까요. 벤치에서 일어서는 순간부터입니다.
2. 해학의 힘
‘어느 날은 마당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아무 데나 시원하게 볼일을 보던 똥개 덕구를 보며, 그녀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부럽다”라고 중얼거렸다. 너무 추워서 나오려던 것조차 쏙 들어간다는 부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차마 말해주지 못했다. 이 화장실의 진짜 공포는 날이 따뜻해질 때 시작된다는 것을. 덕구도 그 무시무시한 비밀은 최대한 숨겨 주자는 듯, 타이밍 좋게 긴 똥을 뽑아내며 부부의 시선을 빼앗았다.’
->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결여를 드러내는 천연덕스러움, 가난, 수치, 상처 같은 단어에 매몰되기 쉬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른 시선, 다른 어조로 뒤집어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길어내 보겠다는 의연하고도 태연자약한 태도. 지적인 허세의 가장 은밀한 형태가 ‘모름을 견디지 못하는 것’ 혹은 ‘내가 모른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것’이라면, 일곱 살 어린 화자를 빌어 ‘나는 물론 알고 있지만 기껏해야 여기까지 알 뿐이다. 사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라고 실토하는 건, 실로 적게 말하면서 많은 걸 드러내는 좋은 전략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독자를 무장 해제시키면서 몸소 글에 뛰어들게 하는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니까요. 비밀을 숨긴 덕구가 뽑아내는 긴 똥처럼 말이죠.
3. 구멍난 화장실로 보(이)는 다른 세계
‘하루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화장실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아버지는 주먹으로 뚫린 그 기괴한 문구멍 안으로 자신의 거친 손을 슬그머니 밀어 넣어 보았다. 마치 제 손에 딱 맞는 장갑을 찾았다는 듯이, 아버지는 구멍 속에 손을 넣은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문짝 너머 화장실 안쪽의 짙은 어둠이 아버지의 손목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내, 오래전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던 신발 한 짝의 감각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 글의 중핵과 같은 단락입니다. 윗집/주인집이 휘둘렀던 폭력의 흔적이 어떻게 아랫집의 폭력으로 전이되는가, 과거의 폭력이 어떻게 현재의 폭력으로 변이되는가, 집을 소유한 가장의 폭력이 어떻게 집 없이 떠돌아야 했던 세입자 가장의 폭력으로 전승되는가, 왜 우리는 욕하면서, 괴로워하면서 그 이웃을 닮아가는가, 이 중차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바람이 있다면, 이 집에서 보고 듣고 겪었던 경험을 더 깊이 있고 밀도 있게,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시각적으로, 그리고 다각도로 묘사해 보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글이 어린 소년의 눈에 비친 화장실 변천사로 이어졌다면, 현재 이 집에서 겪게 된 일은 단순히 화장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최소공동체가 거주하는 집이라는 환경이, 어떻게 가족들의 내면과 그 관계의 문제까지 흔들어놓을 수 있는지, 주제를 겹으로, 층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이라는 구멍을 통해 바라 본 똥통처럼 깊고 어두운 어른들의 감춰진 심연. 이 문제와 씨름하는 과정이 이 글을 전적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하게 하는 중요한 힘이 될 듯합니다.
4. 부사를 부사 아닌 것으로
‘덕구가 신발 한 짝을 완전히 너덜너덜하게 물어뜯어 놓았을 무렵, 우리 네 식구는 내 신발 한 짝을 영영 삼켜버린 파란 지붕 집을 떠나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시내의 월세방으로 향하게 되었다. 혼자 떠났던 큰외삼촌이 제 가족들을 주렁주렁 이끌고 돌아와 우리 네 식구를 밀어낸 탓이었다.
-> ‘다닥다닥’만 남기고 밑줄 친 다른 부사어들은 모두 생략해도 글을 전달하는 데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싶은 대로, 나오면 나오는 대로, 모두 더해서 써보고, 이어 그 모든 걸 빼고 써보는 과정, 이 첨삭의 과정에서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남긴 것을 다시 어떻게 다른 것으로, 낯설게 바꿔내야 하는지, 이 씨름의 과정에서 이정훈님만의 고유한 문체가 탄생할 것 같아요. 이미 바닥은 충분히 다져져 있으니까요.
5. 해학에서 풍자로
“화장실이 두 개다, 두 개. 아무 때나 맘 편히 싸라.”
맘 편히 ‘써라’가 아니라 맘 편히 ‘싸라’에서 느껴지는 의외의 패기, 그것이야말로 결여를 바라보는 응시의 힘인 듯합니다. 이 기운을 더 밀어붙여 보시면 좋겠습니다. 해학은 잃거나 빼앗긴 자가 그 결여를 해체하면서 다시 구축하는 데서 생기는 항력 같은 것이니까요. 이 항력이 필력이 될 때, 남다른 풍자의 세계가 열릴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조금만 ‘바짝’ 집중하시면 전격적으로 등판하셔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