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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안흥석님께 드리는 글ㅡ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마라ㅡ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작성자이강산|작성시간26.06.18|조회수167 목록 댓글 6

ㅡ 폐사지처럼 산다 ㅡ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고 묻지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중략)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여주 고달사지 옛모습(1950년)

 

고달사지승탑ㅡ국보 

 

고달사지원종대사탑비ㅡ보물

 

고달사지원종대사탑ㅡ보물

 

고달사지석조대좌ㅡ보물

 

고달사지쌍사자석등ㅡ보물

 

고달사지석조ㅡ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여주 고달사지 복원도(추정)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을 지닌 고달사는 혜목산 아래에 있고

 

   신라 경덕왕 (764)에 창건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누가 창건했으며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추정하기로 이때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했던 시기였고 남한강의 유리한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사원을 경영했을 때였으므로  원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은 맞지가 않고 원종대사

 

이전에 나말여초기에 세력을 떨친 선종 계통의 절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조(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는 번창했으나,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

 

"에는 폐사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조선 중기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어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달사지 전경 >

 

고달사지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큰절의 위용을 갖추었고 사방 30리가 모두 절의 땅이었고 

 

 머물던 스님만 수백 명이었다 고달사를 중흥시킨 사람은 원종대사였다.신라 말 새롭게  세력을 얻은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파의 중심 사찰로 봉림산문의 개산조인 현욱이 864년에 절을 중건하였고  

 

고려 원종대사 찬유가 이곳에 28년간 주석하며  고려 광종 때에는 왕실과

 

중앙 정부의 후원을 받아  고려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대찰로 성장하였다.

통일신라 말기들어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자 수도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호족들이 세력을 확장해

 

독자적인 힘을 키우게 된다. 이들 사원이  자리잡은 곳은 대부분 수운과 육상교통로가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며

 

이포나루, 조포나루가 가깝고 북쪽 요충지에는  지평역이 있다. 즉,고달사는 풍부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어 인구가

 

밀집된  지역으   충주, 원주에서 이어지는 물길의 길목이자 강릉 등 영동지역에서 이어지는 육로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남한강변에는 조운 창고가 여럿 있었고, 고려시대엔 수도 개경과 남경(서울)을 잇는 수운로

 

역할을 했기에  독자적인 힘을 키운 세력이 등장한다. 당시 사원은 지방호족과 결탁해 토지 등 방대한 사원전을

 

소유할 수 있었고, 많은 노비를 동원해 경제활동을 하면서 정치, 군사적 역할까지 수행했다.  이 시기 남한강변 요충지엔

 

나라의 지원을 받는 절들이 지어 졌는데, 나말여초에는 그만큼 지방사회를 통제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안정적인

 

지배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하천이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던 시절이라 순항을 기원하는 상인들의 시주 덕분에

 

남한강변 사원들은 흥행하게 된다. 이 시기에 남한강 유역의 선종사원은 여주 고달원(고달사 전신), 원주 안락사(

 

(거돈사 전신), 흥법선원, 충주 정토사, 영월의 흥녕선원 등이다 원감국사 당시에 신라의 후원을 받았던 사원이 

 

이제는 왕건의 후원 아래 다시 일어났다는 자체가 후삼국기의 정치적 변화 상황을 잘 보여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여주목불구조」에 “취암사와 상원사가 혜목산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고달사의

 

암자인 듯한 두절만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불전 및 영당 영역을 포함한 고달사지 발굴지 (나)구역 서쪽에서 동쪽으로 높이에 따라

 

3단으로 조성된 대지에 불전 영역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터가 배치되아 있다

고달사지 출토 기단석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한 가람배치는 남북축의 완만한 경사를 따라

 

승방 - 금당 - 고승 영역 순으로  지어졌고, 9 ~ 17세기 까지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고달사지 석조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

<고달사지 석조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

 

길이 321cm, 폭149cm, 높이98cm 규모의 이 석조는  전체적인 치석 수법과 고달사지의 연혁 등을 고려할 때

 

고려 전기에서도 이른 시기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는 대개 승려들이 물을 담아 두거나 곡물을 씻을 때

 

사용하거나 중심공간에 진입하는 부분에 놓여 부처님 앞에 나갈 때 손을 씻거나 입을 행궈 몸을 청결히 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실제 석조는 그 기능상 요사체와 종종 연관지어 이야기되며, 여러 절터에서 발견된

 

석조는 그 크기나 위치가 제각각이지만 이처럼 건물지 안에서 발견되기는 드문 예이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 (보물 제8호) 

 

. 좌대는 높이 1.57m 사각이며 상, 중, 하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아래받침돌과 윗받침 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

불상이 놓였던 상대의 각형 받침에는 23잎의 당려문을 새기고 그 밑에 각형 받침에는 다시 안상을 새겨 놓였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기법은 고달사지 승탑의 아래 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 나가는 모양으로 꽃잎을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 시대 석조

 

미술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남한강 유역 선종 사원에서는 유난히 철로 만든 불상이 많이 만들어 졌는데,

 

이곳도 대형 대좌인 것을 보면 철불을 안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달사지 승탑이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물 제6호

 

 975년 세워진 원종대사 탑비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 또는 고달선원으로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귀부와 이수는  원종대사 찬유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그를 기리고, 살아생전의

 

행적을 비문으로 새겨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신라 경문왕 (869)에 태어난 원종대사가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여러 국왕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불교 발전에 공로가 높았다. 광종은

 

원종대사가  958년 90세로 입적하자 신하를 보내 조문하고, 시호를 ‘원종’, 탑호를 ‘혜진’이라

 

내리었다.  1915년 비몸이 넘어지면서 여덟 조각으로 깨어지자 현재 여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원종대사탑비는 고려시대 국사로 추대되었던 원종대사 찬유의 탑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비 몸은 2014년 복제한 것이다  원종대사 승탑의 귀부인 이수는 나라 안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탑비를

 

짊어지고 있는 돌 거북은 그 당당함이 태산 같은 힘을 분출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한 역동적인 모습으로 만들었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이수의 맨 아래에 앙련을 둘러 새기고 1층의 단을

 

두었으며 앞면에는 중앙의 전액을  중심으로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하고서 전액 안에다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비”라고 썼다.   

. 등에는 3중의 6각형 문양을 정연하게 조각하였으며, 가운데에는 소용돌이치는 구름 문양

 

위에 연꽃이 장식된 비좌를 마련한 것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이어지는 탑비

 

형식을 잘 보여 준다..

 탑비는 광종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으며, 최고의 장인 국공을 파견하여

 

진영을 조성하고 승탑과 한 쌍으로 건립하도록 했다 비문에 의하면 탑비를 세우고 나서 977년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석에 새겨진

 

 비문에는  찬유의  행적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제도,불교 문화 등에 대한 기록도 포함하고 있어 역사학.

 

불교학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비석에 쓰인 서체는 금석학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869년) 13세에 출가하여 상주 공산 삼랑사에서 융제선사에게

 

사사하였으며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 를 받았고 23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서주 동성현

 

적주산에서 자선화상에게 사사하였으며 경명왕 (921년)에 귀국하여 봉림사에 거주하였다. 그 후 광주

 

천왕사에서  고려 광종 (958년)에 90세로 입적하니 왕이 애도하여 원종대사 혜진이라 추시하고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 입적 후 17년에 비가 세워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머릿돌은 연꽃 받침대 위에 거북이와 용이 살아 있는 듯 생동감 넘치는 조각 기법을 보여 고려 건국

 

초기의 역동적이고 웅장한 풍조를 반영하고 있. 상단부에는 큼직한 보주를 끼울 수 있도록 구멍이 있다

거북을 비의 받침으로 삼아서 귀부이고 이무기를 지붕으로 삼으니 이수라 하는데 거북은 지상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면서 천년수명을 누리는 장수의 상징이다. 또한 이무기는 하늘을 나는 용의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둘 다 신성한 영물이다.

 

앞면


비문의 내용은 원종대사의 탄생과 심희에게 출가하여 당에 가서 투자대동에게 수학하고, 귀국하여 고려 태조를

 

만나고, 혜목산에서 선풍을 진작하다 혜종과 정종의 귀의를 받고, 광종 대에 국사로 책봉되어 입적한 생애가

 

기술 되어 있다.

뒷면


음기에는 고달원이 희양원 및 도봉원과 함께 3대 사원이 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또한 원종대사의 문하 제자가

 

5백 여 명이 있음을 말하고, 사찰의 주요 직책과 탑비의 건립 직책이 열거 되어 있습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 >보물 제7호.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제 4대 임금인 광종 때까지 활동한 원종대사의 부도이다

 

 원종대사 찬유는 통일신라 경문왕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58년에 입적한 고승이다.

 

승탑이 세워진 연대는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 따르면 고려 경종 977년으로 추정된다..

 

원종대사탑은 팔각원당형 승탑으로 탁월한 조형미와  정교한 조각(거북이.용.운문.사천왕상 등)

 

을 가지고 있다

.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97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부도는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로 2.5m 높이에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중대석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거북의 좌우로  4마리의 용과 수많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 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상대석의 아래쪽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있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탑신부의 4면에는 문비장식과 사천왕상이 서로 하나 건너로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 아래 밑에 꽃무늬가 표현된 팔면체의 노반과 개석은 모서리 끝에 귀꽃이 돋아 있고,

 상륜부에는 꽃무늬가 조각된 복발 위에 작은 보개와 보주가 올려져 있다

지붕돌 끝에는 귀꽃이  오똑 돋아 모습으로 새겨졌다.

고달사지 승탑(국보)

 

 높이 4.3m의 고달사지 승탑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승탑의 주인과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승탑의 기본형인 팔각원당형 구조를 잘 따르면서도  구조적 균형과 장식미가 탁월하여

 

한국 불교 조각 건축의 역사상 중요한 예술적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 유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이 높다 현존하는 승탑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형태와 조각을 갖춰 한국 승탑 에술의  절정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디 조각의 세부수법에서는 고려 특유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고려 시대 전기인 10세기 무렵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양식을 비교적 정직하게 이어 받은 고려시대 8각 원당형인 이 승탑은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같은 절터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탑(977년)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지대석과 판석>

 

팔각형의 판석은 석등을 올려 놓았던 지대석으로 추정된다 그예로 

 

가까운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부도 앞에 석등이 있는 것도 한 예로 들 수 있다  

배례석

 

측면 4곳에 안상을 새겼고 상면에는 무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340cm 높이의 이 부도는 8각원당형으로  기단은 상·중·하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의 각 면에는 내부에 꽃 형태의 무늬가 있는 안상이 2구씩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16엽의 연판이 돌려졌다.

 

팔각지대석 위에 2단의 8각 굄대 위에. 하대석  윗면에는 복련이 조각되었다

 중대석에 용머라형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과 구름무늬가 부조되었는데 용머리 부분이나

 

구름에 싸인 용의 몸체표현은 새김이 깊고 생동감이 있다.

 상대석에는 큼지막한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탑신을 받치고 있다.

몸돌에는 8각의 면마다 우주를 모각하고  그 사이 마다 문비장식과 영창(映窓)이 각기 표현되어 있고

 

 사천왕상이 4면을 차지 하고 있다 탑신을 덮고 있는 옥개석은 꽤 두꺼운 편으로 아랫면에 비천과 구름을

 

표현하였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껍고 지붕 윗면에는 8개의 우동선이 도드라졌고 추녀 끝에 높은 귀꽃이 장식되었다

 

 옥게석은 몸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어 졌는데  추녀 밑 3단을 이룬 윗면에는 이 승탑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 상륜부에는 복발과 8각의 옥개석 모양의 보개석만 남아 있다

 

옥개석 정상부에 복련으로 상륜부와 연결지었다. 

귀꽃

본시 용의 머리는 낙타의 머리로 형상화 한 것이나 여기서는 주둥이가 뭉뚝하니 사자의 모습에 가깝다

 

. 용은 9가지의 동물의 특수한 부분을 조합하여 형상화 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소의 귀,

 

뱀의 목, 토끼의 눈, 배(腹)는 큰 조개, 잉어의 비늘, 호랑이 다리, 매의 발톱 등 이다. 이처럼 여러 동물들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최고의 권력자인 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겼다.

 

왕의 얼굴을 용안, 왕이 앉는 의자를 용상, 왕의 옷은 용포, 왕의 눈물은 용루, 즉 용의 눈물이라는 표현이다. 이처럼

 

옛 사람들은 용을 최상의 상서로운 동물로 여겼다. 용(龍)은 12띠를 상징하는 동물 중에 유일하게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로서 극대화 하였으며 옛 사람들은 용을 신비롭고 신성한 동물로, 비와 바람을 부리며

 

복을 가져오고 재앙을 물리쳐주는 수호신으로 여겼다

중대는 이 승탑에서 가장 조각수법이 뛰어난 부재로써 거의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거북의 얼굴은 용의 형상이고 목에는 부처의 목처럼 삼도가 표현되어 있고 앞발톱은  세정하고 힘이 있으며

 

탑신을 받치고 있는 8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복련대는 한 변의 길이가 76.5cm 이며 무늬가  큼직하지만

 

섬세하고 정교하다. 가운데 거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네 마리의 용이  보주를 쥐고 있으며, 나머지 공간은

 

구름무늬를 가득 채웠다.  머리 위에는 직사각의 구멍이 있는데, 용의 뿔을 따로 조각해 끼웠던  구멍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의주를 입에 문 용과 서기를 뿜어내는 용이 각기 발 하나 씩 뻗어 함께 화염에 싸인 보주를 받들고 있다. 

우측 정면으로 창틀이 표현되어 있다.

<팔각 옥개석 아래 면   비천상> 

 

 옥개석 밑 면에 비천상의 요염한 자태와 천의 자락이  양각되어 있다 

<팔각 옥개석  아래 면>

 

  밑 면에는 (운문)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사천왕상>

 

각 사방의 측면에는 사천왕상이  양각되어 있다. 

왜 ?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 >보물이고 

 

"고달사지 승탑은 국보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국보>는 한국적 양식의 독보적 정점 .시대 대표성 .유례없는 예술성을 꼽는다면

 

<보물>은 높은 수준의  보존과 예술의 가치 중요 문화 유산이지만 시대.형식 대표 .기준이 미달한 것을 말한다 

(발견 당시의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보물 제8호

 

혜목산 기슭의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764년)에  창건돼 고려 원종(1260년) 지금의 사찰 터 규모로 확장됐다.

 

.이 절은 고려초기에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가운데 하나로 왕실의 보호를 받은 사찰이었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 비문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 또는 고달선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조선초기까지 번창했으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 (발견 당시의 쌍사자 모습)

 

 고달사지 처음 발견 당시는 옥개석과 상륜부를 잃어버리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까지만 남아,넘어져

 

있던 것을 한 주민이  수습하여  보관하다가 1958년  서울시 종로구 종로4가 동원예식장 뒤뜰로 옮겼다.

 

그  뒤  경복궁 경회루 옆에 옮겨졌고다시 (국립중앙박물관)로 이동되어 복원하였다. 2000년 현재

 

경기문화재연구원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옥개석이 출토되어 2001년 석등의 제 위치에 올려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관 ㅡ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고려시대 작품으로 높이는 2.43m이다. . 웅크린 사자 두 마리가 석등을 받치고 있다.

 

좌우에서 앞발을 앞으로 내밀고 웅크리고  앉아 서로 마주보는 형상이고, 그 사이에 구름문양을 양각했다

 

. 즉 사자의 등은 구름을 받치고, 구름은 석등을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위에는 두개로 된 간주가 

 

놓였다. 밑에는 운문이 조각된 얕은 돌이 놓이고, 위에는 중앙에 팔각형의 넓은 마디가 있다. 팔각형의 석재를

 

얹졌는데 위와 아래를 향하여 비스듬히 폭을 넓히는 특이한 형태를 만들었다

화사석은  부등변팔각형으로  우주가 표현되었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창이 네 개다

 

옥개석은 일부가 파손되어 있고 그 위의 노반과 보주는 멸실 되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화창/火窓>

 

상대석은 팔각형으로 큼직큼직한 앙련이 꽃을 피우고 있네요. 화사석도

 

부등변팔각형으로 우주가 표현되었고, 화창은 넓은 면에만 뚫렸다

두 마리의 사자가 불발기집(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석등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다른 쌍사자 석등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국보인 속리산 법주사의 쌍사자석등과 보물인 회암사 쌍사자석등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모두 두발을 들고 서 있는 상인데, 고달사지의 이 쌍사자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이다

 

조각수법에서는 고려시대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으며, 건립연대는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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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이강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8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슴이라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이모티콘
  • 작성자권태기(김인배) | 작성시간 26.06.18 흔적만 남아있는 터를 보면 많은 생각과 상상을 해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이강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8
    그러게 말입니다
    허허벌판인
    터를 보면
    무안한 상상에 빠지지요
  • 작성자정은영 | 작성시간 26.06.18 전국 유적지 다 다니시는것 같아요
    역사 선생님이신가유
    저두 어떻게 사느냐가 묻지 않을께유 ㅎ
  • 답댓글 작성자이강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8

    ㅎㅎㅎ
    농담도 잘하십니다
    안흥석님이 유홍준교수를
    말씀하시기에
    그 수준에 맞출려면
    이 정도 글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올려 보았습니다
    사실은 돌팔이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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