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사적 제 18호)
1960년대의 동궁 월지
앞에 보이는 정자는 신라 때의 임해전이 아니라 1920년경 경주 유림들에 의해
임의로 세워진 건물로 현재 황성공원으로 옮기고 호림정(虎林亭)이라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월지는 신라 문무왕이 서기 674년에 만든 연못이고, 동궁의 임해전은 서기 679년에
지었다고 한다. 동궁과 월지는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며 외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연회장으로도 이용됐으며,
통일 신라 최후의 어전회의를 열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했던 곳이다
40년 전 경주 동궁 월지 발굴조사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동궁 월는 경주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74년 연못을 준설하는 과정에서 기와 등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1975년 본격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2년 2개월 동안 나무배, 금동여래입상, 14면체 주사위
(주령구) 등 3만3000여 점이 출토됐다
동궁 월지의 목선은 길이 6m, 너비 1.2m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우리 배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배는 연못의 동쪽 석축 바로 앞에서 전복된 상태로 나왔는데 이 배는
통나무 배에서 나무판을 이어 붙여서 만드는 배로 넘어가는 중간단게의 형태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오래된 배이다
우리의 토양은 산성이기 때문에 목제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다행히 안압지에서 목선이 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75년 안압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나무배(목선)를 인부 수십명이 옮기고 있다
당시 길이 6.2m에 이르는 통일신라 나무배(木船)를 옮기는 도중에 배가 두 동강이 났다
9년간의 보존 처리를 거쳐‘ 복원되어 현재 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되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동궁 월지 전시관 목선
배가 높이 올라가 있지 않은 것을 봐서는 연못이나 호수에서 쓰는 배로 추정된다.
선유라고 해서 사람이 타고 뱃놀이를 할 수 있는 배인 것 같다
동궁과 월지(사적 제 18호)
674년의 월지 조성과 679년의 동궁 창건했다
동궁 월지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674년에 궁궐 안에 만들어 놓은 연못으로서
당시의 이름은 "월지(月池)"였다. 태자가 사는 곳이자 왕과 귀족들의 연회장소이기도 하였던
임해전과 월지는 신라시대의 왕궁터인 월성 동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월지는 통일신라가 망한 뒤, 세월이 흘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못주변의 흙이 흘러 들어 못에 갈대가
자라고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안압지"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서남쪽의 건물터는 태자가 거처하던 곳이고, 문무왕(679년)에 창건되었다.
임해전에서 문무왕 이후 역대 왕들이 신하들과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를 맞아 마지막 잔치를 베푼 곳이기도 한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제 남근
신라의 성풍속도
과거나 현재나 인간은 누구나 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신라시대의 性은 지금보다도 자유로웠을까
오늘날 개방된 가치관으로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안압지는 신라 왕실의 성풍속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동궁 월지의 남근 목기는 궁궐의 여성이 사용한 유물로 보인다. 소나무 옹이를 이용한 음경 부위의
돌기 3개는 실용적인 용도. 성기 신앙의 용도라고 보기에는 어려워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남근 모양의 목간이 출토되자 서로 만져보겠다고 달려든 얘기 등이 차례차례 공개됐다.
남근 모조품이 출토될 당시 이 유물을 처음 수습한 여성조사원은 작업도중 뻘층에 묻혀있는 이 유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나무편에 글자를 써놓은 목간(木簡)이려니 하고 발굴조사 팀장에게
가져갔다. 팀장은 이를 받아보고 한눈에 목제의 발기된 남근 모조품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국보195호, 토후장식 장경호 (계림로 30호분 출토품)
그래서 여성조사원이 수치스러워할까봐 아무말 하지 않고 현장으로 보내고 자신이 스스로 세척을 했다.
이로써 1,300여년간 동궁 월지 연못의 바닥 뻘층에 묻혀있던 남근 모조품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길이 17.5㎝의 이 발기된 형태의 남근 모조품을 본 여성조사원들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크기에서 뿐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굴조사가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남근은 그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설만 무성한 편이다. 신앙으로서의 성기숭배
사상적인 견해와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기구용’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유사한 목제 남근이 일본 나라시대 헤이조궁 우물에서도 발견됐다
국보195호, 토후장식 장경호 (계림로 30호분 출토품)
미추왕릉과 계림로 30호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등에서 발굴된 토우를 보자.
엉덩이를 치켜든 여인, 그리고 과장된 남근을 들이미는 남자…. 그러면서 남성을 돌아보며 희죽 웃는
여인 다양한 성행위의 모양을 나타내는 각종 토우는 신라인의 자연주의적인 성의식을 보여준다
신라인들은 신라를 신의 나라로 생각을 했다.
신라는 姓(성:sex)을 신성한 혈통을 잇고 보존하는神國(신국)의 道(도)로 여긴듯 하다
그래서 근친 간에 상간이나 혼인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신라 풍습에는 마복자 제도가 있었는데 마복자란 '배를 문질러서 낳은 아이'라는 뜻이다.
화랑 집단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화랑 우두머리가 부하의 임신한 아내와 갖는 잠자리로
장차 태어날 아이와 일종의 양부 관계를 맺는 제도이다 임신한 여성이 남편보다 높은 지위의
남성과 성관계로 남편의 동의 아래 낳은 자식으로 마복자에게는 혈통상 부친과 정치적 부친,
즉 두 후원자 생기는 셈이다 화랑의 하부조직 낭두들도 마복자가 아니면 출세가 불가능했다
신라시대 아내를 귀한 손님에게 동침하게 한 풍습이 있었다
신라 문무왕의 서제(庶弟)인 차득공이라는 인물 지금의 전라도 광주 지역을 익명으로 여행하다가
안길(安吉)이란 관료 집으로 초대받고 그 아내와 동침 차득공은 훗날 높은 벼슬에 오른후
안길에게는 정치적인 배경이 된 인물.
김대문(金大問)이 7세기 말 편찬했다는 ‘화랑세기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라시대 절세 미인이자 최고의 자유부인이었던 미실
미실은 임금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 1명(동륜),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을
닥치는대로 녹여버린 희대의 요부였다. 어머니(묘도)로부터 ‘남자를 녹이는’ 방중술(房中術)을 배웠다.
화랑세기는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정식남편인 세종은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지증왕의 생식기가 1척5촌(약 45㎝)이나 됐다”고 기록했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돼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使者)를 삼도(三道)에 보내서 배필을 구했다. 사자(使者)가 모량부(牟梁部) 동노수(冬老樹) 밑에 이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다. 사자는 그 마을 사람을 찾아 보고 누가 눈 똥인가를 물었다. 한 소녀가 말하였다. "이것은 모량부 상공(牟梁部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7척 5촌이나 된다.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서 그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 황후(皇后)를 봉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례했다.
<삼국유사> ‘무왕조·서동요’에도 나온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善化公主 主隱 他密 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원(저녁 夕변에) 乙抱遣去如)
<삼국유사> ‘김현감조’에도 “흥륜사에서 탑돌이 하던 김현이 한 여자와 눈을 맞춘 후
탑돌이 끝나고 구석진 곳에서 통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진성여왕(887~897년)은 숙부인 위홍과 사통했다. 위홍이 죽은 후에는 소년 미장부 2~3인을
몰래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요직을 주어 국정까지 맡겼다
김춘추의 사위이자 대야주 도독인 품석도 막객 검일의 아내를 빼앗은 일도 있다.
(<삼국사기> ‘열전·죽죽조’) 이에 화가 난 검일은 백제와 내통해 성을 함락시켰다
신라 설화에 등장하는 처용은 부인의 외도에 관대했던 남편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자리를 드니 다리가 넷이더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하는 구절은 또 무엇인가.(<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
입수구(入水溝)
입수구(入水溝)는 동쪽과 서쪽의 호안이 만나는 곳에 설치되어 있고 출수구(出水溝)는
북쪽 호안에 있으며,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있다
현장답사에서 보충 설명이 있겠지만 물의 입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눈여겨 보심이 좋을듯 합니다
주령구(동궁 월지 출토 주사위)
현재 경주박물관 안압지관의 주령구(안압지출토 주사위)는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진짜 주령구는 어디에 있는가?
출토 당시 주령구는 참나무에 흑칠(黑漆)을 한 상태로 오랜시간 뻘 속에 있었기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아 사진 촬영과 실측 등 유물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에서
보존 처리를 실시하였다 연구소측에서는 주령구 속의 수분을 서서히 제거하여 원형에 아무런 손상이
없도록 처리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전기 오븐에 넣고 건조하였다. 이 건조기는 자동 전기 조절이
가능하여 온도가 높아지면 전원이 끊어졌다가 낮아지면 다시 연결되도록 하여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는 장치였다. 그런데 이 자동 전기 조절기의 고장으로 내부가 과열되면서
그 다음날 주사위는 한줌의 재로 발견이 되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학술조사가 모두 끝난 뒤에
일어난 불상사라 남겨진 기록과 사진, 실측자료에 의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주사위 복제품을
제작해 전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령구(동궁 월지 출토 주사위)
14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는 잔치 때 흥을 돋구는 놀이기구의 일종으로,
이것을 굴려서 위로 나타나는 면에 쓰여진 글의 내용에 따라 행동을 하도록 되어있다
<4각형인 여섯면의 벌칙>
飮盡大笑(음진대소) - 술 다 마시고 큰소리로 웃기
三盞一去(삼잔일거) - 술 석잔 한번에 마시기
自唱自飮(자창자음) - 노래부르고 술마시기
禁聲作舞(금성작무) - 소리없이 춤추기
衆人打鼻(중인타비) -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有犯空過(유범공과) - 덤벼들어도 가만있기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6각형인 여덟 면의 벌칙>
醜物莫放(주물막방)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
兩盞則放(양잔즉방) - 두잔이면 쏟아버리기
任意請歌(임의청가) - 사람을 지목해 노래 청하기
曲臂則盡(곡비즉진) -팔뚝을 구부린 채 다 마시기,
弄面孔過(농면공과) - 얼굴을 간지럽혀도 가만있기
自唱怪來晩(자창괴래만)- 스스로 '괴래만'이라는 노래부르기
月鏡一曲(월경일곡) - '월경'이라는 노래부르기
空詠詩過(공영시가) - 시 한수 읊기 등이 적혀 있다.
입수구 근처에 있는 큰 섬으로 인해 폭포시설을 거쳐 거세진 물의
유압을 억제하여 완만하게 흐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월지는 남서쪽 둘레가 직선인데 반해 북동쪽은 매우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되어 있어 어느 곳에서도
못의 전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없다. 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작이라는 뜻의 임해전이라는 건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월지를 바다처럼 보이도록 조성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
문무왕 14년조를 보면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압지는 인공호수다. 즉, 이곳의 땅을 파내어 물을 끌어들여 호수를 만든 것이다
파낸 흙으로 호수의 북동쪽으로 둔덕들이 펼쳐지는데 파낸 흙으로 가산(假山)을 만든 것이다.
.
이는 신선이 거주한다는 중국의 무산 12봉을 생각하고 만든 것이고, 호수 내에도 3개의 섬이 있는데
이 섬들도 신선이 사는 발해만 동쪽에 있다고 믿었던 중국의 3개의 섬인 삼선도(영주, 봉래, 방장)를
생각하고 만든 것이다
.
안압지에서 발견된 판불은 모두 아랫부분에 촉을 단 흔적이 있어 어딘가에 꽂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광배의 주연부에는 못 구멍이 있어 나무판 같은 고정된 장소에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 모셔져 있던 불상인지 추측하기 어렵다.
금동판보살좌상 중에는 광배의 화염 부분이 훼손되어 화염을 따로 만든 후 못으로 박아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어 이를 통해 판불이 오랜 시간 사용되었으며, 왕실 공방에서는 불상을 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리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산십이봉
정원 화단의 돌도 12개이다. '무산십이봉'이다
무산십이봉은 중국에 있는 산 이름으로 중국 시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산이다
무산십이봉 12개 봉우리는 신선이 사는 선경(仙景)을 상징한다
12개 봉우리에는 하나하나 이름이 있다. 조운(朝雲), 집선(集仙), 비봉(飛鳳), 등용(登龍)…
. 이름마다 구름과 신선, 봉황과 용이 등장한다
. . 주로 연못의 가운데 섬으로 두는 석가산에다 무산십이봉의 형태를 모방해 정원을 꾸몄다.
신라 때 무산십이봉의 경치를 본떠 조성한 대표적인 정원이 경주의 ‘동궁과 월지’다
경남 진주의 용호정원도, 충남 논산 명재고택 사랑채 앞마당도 그렇게 다듬어낸 조경이다
월지에서는 약 3만여점의 유물들이 나왔는데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신하들이 이곳에서 잔치할 때
못안으로 빠진 것들과 신라가 멸망하여 왕궁이 폐허가 된 뒤 홍수 등으로 쓸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지금까지 경주의 고분에서 발견 된 유물들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당시 신라시대 궁중 생활을 알 수 있게 하는 실생활용품들이며 그 종류도 다양하여
신라시대 귀족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신라 황남대총이나 금관총
백제 무녕왕릉에서 금속 숫가락과 젓가락이 확인 되었다 통일신라 안압지의 금동 숫가락은
일본까지 전파 되었다
월지에서는 7-10세기초에 제작된 다양한 금동여래입상과 판불, 금동불상의 귀와 손, 화려한
금동 광배와 화불들이 출토되었다. 동궁에 승방전이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내불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월지에서 출토된 불교관련 유물들도 모두 그곳에 모셨던 것들로 짐작된다
월지 출토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와전류이다.
조각을 포함하여 2만4천여 점이나 된다 보상화 무늬전에는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라는 명문과 [조로이년(調露二年)]이라는 명문이 나와서
의봉사년(儀鳳四年)은 당(唐)나라 연호로 문무왕 19년(679)에 해당되고 조로이년(調露二年)은
문무왕 20년(680)에 해당되어 문무왕 19년에 동궁을 창건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녹유도깨비기와
가위 날의 윗면에는 반달모양의 금동판 조각을 덧붙였다. 아마도 초의 심지를 자를 때 심지가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고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서기 8세기 무렵의 신라가
바다 건너 일본과 매우 활발하게 교역했음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일본 나라현 "동대사"라는
절에는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이 있다. 그 속에는 보존상태가 완벽한 고대의 보물이
가득하며 매년 몇 점씩 꺼내어 공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간 알려진 소장품 가운데 제작지가 분명하지
않은 가위가 1점 있었는데 월지에서 금동제 가위가 출토됨에 따라 신라에서 수입한 물품임이 밝혀진
것이다.정창원에 소장된 가위는 길이가 22.6cm로 월지 가위보다 조금 작고 손잡이에 인동당초문이나
어자문은 베풀어져 있지 않지만 좌우 대칭의 손잡이 도안은 월지 가위와 매우 유사하다. 또한 당초
알려진 정창원의 가위에는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반달모양의 장식이 없었으나 근래 소장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부분을 되찾았다고 한다
곱돌공예품 : 곱돌향로뚜껑
안압지에서는 곱돌로 된 향로뚜껑을 비롯하여 작은 단지, 사자상, 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사자의 몸통 안이 뚫려있어 향 연기가 코와 입을 통해서 나오게 되어 있다
"동궁아일"명 자물쇠
동궁아일(동궁아는 752년에 설치된 태자궁을 관리하는 관서'명]으로 월지 주변에 관청들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자물쇠 등은 월지가 670년대 말에 지어졌으며 동궁과 관련된 연못임을 알려준다
2012년 국립경주박물관 남측 부지에서는 '동궁아(東宮衙)'가 새겨진 항아리와 '신심동궁세택(辛審東宮洗宅)'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접시가 ㅡ 발견되기도 했다
삼신산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해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불로초가 많다고 전해지는 세개의 섬 영주 봉래 방장산 있다고 생각했다
월지의 세개의 섬은 신선사상의 영향이라 볼 수있다
문무왕대에 백제 부여의 궁남지를 본따 월지(임해전지)를 조성하면서 건축과 조경 등 백제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원효와 의상의 등장으로 내부의 결속을 다지면서 당나라로부터 독자성과
선도상을 갖추니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선진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출수구
수로 물마개
물마개는 못의 동북쪽에 있는 출수구 시설의 맨 앞에 꽂혀 있었는데
이것으로 안압지의 물높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남기는 글>
동궁 월지는 신라 천년의 궁궐인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궁 월지 앞으로 반월성과 연결돠는 길을 도로를 내어 두 동강이로 만들고
동궁 월지 뒤로는 포항과 부산을 잇는 동해남부선 철도를 놓아 건물지 일부가 훼손되었다
동궁 월지 답사를 하면서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동궁 월지에서 나온 3만여점의 유물로 인해 경주박물관 안압지관이 생기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동궁 월지의 목선은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우리나라 배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옮기는 도중 부주위로 두 동강이 내고
주령구(동궁 월지 출토 주사위) 역시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전기 오븐에 넣고 건조하다가.
과열로 한줌의 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비록 1970년대의 일이지만
우리나라 문화재 보존의 수준에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발굴’은 곧 ‘파괴’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물론 찬반양론이 있겠지만 동궁 월지 건축물 역시 정확한 고증과 자료를 거쳐
복원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신라 건축이 어떤지를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순전히 후대의 건축을 참조로 하여 상상으로 복원하였다
우리가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 것은 아닐까?
문화유적은 발굴을 해야 하는 경우와 안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굉장히 중요한 유적인데 그 속을 전혀 모르면 유적으로서 가치가 없으니까 발굴하는게 맞다
하지만 그 속을 대강 짐작할 수 있으면 그냥 놔두는 게 좋다
왜냐면 발굴과 분석 기술은 갈수록 발전하니까 후대에게 정확한 고증과
학술적 자료를 바탕으로 발굴될 수 있도록 맡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동궁 월지 건너편으로 보이는 텅빈 황룡사지를 바라보며 먼 훗날 미래 세대가
황룡사9층목탑 복원할 때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반월성을 거닌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이강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09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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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현 작성시간 26.06.10 경주에 관한 자세한 안내에ㅡ
다음 방문시에는 더욱 신경 써 관람할수 있겠습니다.
야간 관람에서는 그져 불빛에 어우러진 동궁의 자태에 탄복했습니다만...
당음엔 꼭 경주박물관 답습해야 되겠습니다ㅡㅡ -
답댓글 작성자이강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0 예
야경 사진도
한번 올려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