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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된 견해 논파

아잔 문, 아잔 차, 아잔 간하, 아잔 브람

작성자걸식|작성시간16.09.29|조회수681 목록 댓글 3

약 100 여년전인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레디 사야도와 밍군 사야도(마하시 스님의 스승)와 같은 고승들이 미얀마 불교의 수행전통을 대중화시키는데 초석을 다졌고, 마하시 사야도, 순룬 사야도, 모곡 사야도, 우 바 킨 등의 훌륭한 2세대 스승들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를 이루었다면, 현재는 우 판디타, 우 자나카, 고엔카지와 같은 3세대 스승에 의해서 위파사나 수행법은 미얀마는 물론 전 세계에 수행법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위파사나 수행을 말 할 때, 미얀마의 수행전통이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스승들에 의해 법의 전승이 있었기 때문이고, 활발한 지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관심을 태국으로 돌려보면, 100 여년 전, 부처님 당시 때부터 내려오던 오래된 수행전통이 동북지역에서 유명한 두 고승에 의해서 부활하고 있었다. 두 분은 바로 아찬 사오(Ajahn Sao, 1860∼1942)와 아찬 문(Ajahn Mun, 1870∼1949)이었다. 아찬 사오는 아찬 문의 스승이자 도반이었으며, 아찬 문은 금세기 태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또 큰 영향을 끼친 선정과 위파사나 수행의 대가이다. 그의 지도에 힘입어 숲 속의 수행 전통은 다시금 불교 수행의 중요한 전통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최근에 입적했거나 아직도 살아 있는 태국의 위대한 수행자 중 대부분은 아찬 문의 직계 제자이거나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분들이다.

아찬 문의 전기로 직제자인 마하부와 스님의 『Acharn Mun』(『위빠싸나 성자 아짠 문』, 김열권 옮김, 서울: 불광출판사, 2000년)있다. 이 책에 의하면, 아찬 문은 15세에 처음 사미가 되어 2년 동안 사원에서 교학을 공부한다. 2년 후 아버지에 의해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가 22세가 되던 해에 다시 출가하여 비구가 된다. 법명은 지혜를 받은 자라는 의미의 부리닷따(Bhuridatta)였다. 비구계를 받고 난 후에 아찬 사오와 함께 수행 생활로 들어섰다.

아찬 문은 처음에는 “붓도 Buddho”(부처님)이라고 마음으로 부처님을 반복하며 수행하는 부처님에 대한 마음챙김(buddhanussati 佛隨念)을 하면서 수행을 했다. 처음 부처님에 대한 마음챙김을 수행의 주제로 삼았을 때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났고, 그 현상들을 쫓으며 수행을 했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외면적으로는 검소한 수행자의 삶을 사는 숲 속에서의 두타행의 실천을 하면서 선정 수행의 주제에서 내면적으로 주로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을 중심으로 한 위파사나 수행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수행을 지도해주는 스승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서 닦아가는 길은 종종 8정도에서 어긋나는 곳으로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위파사나라는 올바른 길을 발견한 후에는 확고한 정진력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였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위파사나 수행을 계속 이어나갔다. 잠이 오면 걷기 수행으로 잠에서 벗어났고, 오랫동안의 경행(걷기 수행)으로 몸이 피곤해지면 좌선을 이어 나갔다. 수행의 경계에 부딪힐 때 스승이자 도반인 아찬 사오에게 질문을 하였지만, 아찬 사오의 대답은 자신도 경험하지 못한 문제들이기 때문에 도와줄 수가 없으니, 혼자서 잘 해결해보라는 충고만 들었다.

아찬 문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되기를 결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숲 속에서 수행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결심을 버렸다. 이러한 결심을 완성하려면, 길고 긴 시간 동안 생사를 거듭하여야 했기 때문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결심을 버린 후, 아찬의 마음은 부담이 줄어들었고, 정진은 더욱 빠르게 향상되었다.

타심통으로 제자 지도

아찬 문은 많은 수행법을 직접 체험하였고, 그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한 수행법도 있었지만, 타인을 위한 수행법도 많이 있었기 때문 후에 많은 후학들을 지도 할 수 있었다. 선정수행과 위파사나 수행으로 얻은 여러 가지 신통의 힘으로 악마를 제압하기도 하고, 짐승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타심통을 얻은 아찬은 위파사나를 닦고 있다는 한 노스님이 밤새 수행을 못하고 가족을 걱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노스님에게 그런 사실을 좋은 의도로 말해주었으나, 결과는 노스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여 그 절에서 떠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이후 아찬 문은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알게 되어도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적절한 때를 살피게 되었다.

아찬 문은 수행도중에 선정 속에서 부처님의 직제자인 아라한들이 나타났고, 직접 수행법을 지도받았다. 이런 이야기는 대승불교 유식학파의 거장 무착 스님이 선정 수행 중에 미륵보살을 만나 가르침을 전해 받은 이야기를 상기시켜준다. 아라한들의 자세한 설법을 들으면서 올바른 수행을 하던 아찬 문은 불환과(不還果, 아나가미)를 성취하여 다섯 가지 번뇌를 끊어 버렸다.

이 후 많은 출가자들이 스님의 지도하에 수행을 하게 되었고, 수행의 힘으로 많은 육체적 정신적인 병을 치유하는 이적을 행하기도 하였다. 타심통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제자들은 스님의 지도하에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었다. 제자들에 대한 지도로 잠시 답보상태였던 위파사나 수행에 더욱 박차를 가해서 아찬 문은 12연기를 관하여 모든 번뇌의 근원인 무명(無明, 진리를 모름)이 끊어진 아라한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이 때 미세한 물질의 세계[色界]와 정신의 세계[無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인 오상분결(五上分結)이 모두 끊어져 버린 것이다. 즉, ⑥색계에 대한 욕망, ⑦무색계에 대한 욕망, ⑧아만, ⑨들뜸, ⑩진리를 모름[無明]이었다.

 

깨달음은 정확한 현실인식과 그 해결법을 이룬 상태이다. 즉, 괴로움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길을 따라서 괴로움의 소멸을 직접 체험한 내적인 사건이다. 깨달음은 따라서 흔들림 없는 마음의 자유(不動心解脫)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이루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貪瞋痴)이라는 번뇌의 뿌리가 완전히 사라진다.

이 경지에 도달한 이가 아라한이다. 부처님이 지니신 9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라한이며, 부처님의 제자들도 아라한이 되는 것을 최상의 목적으로 수행한다. 고타마 부처님 당시 수많은 제자들이 법을 듣고 수행을 해서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한 깨달음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아찬 문은 불굴의 수행을 통해서 아라한이 됨으로써 그 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너희들은 목숨을 걸었느냐!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아찬 문은 아라한이 되면서 직접 체험한다. 열반의 법을 체험한 아찬 문에게 부처님과 아라한의 제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육체적인 죽음 이후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경전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하지만 아찬 문의 깊은 선정체험 속에 나타난 부처님과 아라한을 보면, 우리도 법을 체험할 때 부처님과 아라한 제자들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생기게 한다.

아찬 문의 마음에 떠오른 한 아라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도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여 더 이상 번뇌가 없는 사람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의 존경받는 이가 되었으니 이제는 아라한이오. 이 윤회의 세계인 삼계에서 보기 드문 성취를 이룬 그대의 깨달음을 축하해 주기 위해 왔소.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정진하지요. 그대는 그 경지를 이루었소.”

부처님이라는 한 분의 스승 아래에 각기의 능력과 특성에 맞는 많은 수행법이 실천되고 있었다. 밝은 보름달이 뜬 숲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 있다. 달빛이 이 숲을 밝게 비추듯이 어떤 수행자가 이 숲을 비출 수 있을까 즉, 어떤 수행자가 이상적인 수행자인가라는 주제로 아누룻다, 마하가섭, 목갈라나, 사리불 그리고 부처님께서 각각 이상적인 수행자란 이런 비구다라고 말씀하신 이야기이다.

제 각기 각자의 이상적인 수행자에 대해 말하자 부처님께서 모두 인정하신 후 부처님께서도 당신이 고행하시던 시절의 용맹정진하던 모습을 말씀하시며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아찬 문 스님의 아라한과의 성취는 부처님이 말씀하셨던 불굴의 정진력을 지니고 탐진치 삼독을 모두 제거한 수행자의 모습에 가깝다.

수타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성자들은 자신의 경지에 이른 후 다시 되돌아보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끊어진 번뇌가 무엇이며, 아직 남아 있는 번뇌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다. 아찬 문의 경우는 이러한 번뇌의 소멸과 함께 아라한과 부처님에 의한 아라한과의 성취에 대한 인증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덤벼라 후퇴는 없다

아라한이 된 아찬 문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규칙적인 경행과 좌선을 하였고, 자신을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타심통과 천안통의 지혜가 있었던 아찬 문은 가까이서 지도하는 제자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제자들의 마음 상태나 수행의 정도도 알 수 있었고, 그 제자들이 전력을 다해서 정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며 지도했던 것이다. 아찬 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격심한 아픔과 고통을 세 차례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걸 이겨내고 살아남아서 이렇게 스승이 되었다. 그대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라. 목숨을 건 노력 없이는 결코 법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법은 법을 실천하는 이를 보호한다. 아찬 문은 마음챙김(sati, 念)과 지혜라는 법에 의해 고통의 원인인 번뇌와 고통과 죽음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법을 실천하는 수행자는 일단 진리를 깨닫게 되면, 어떤 번뇌의 적이 공격해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아찬 문 스님이 다시 부활시킨 숲 속 수행, 즉 두타행을 닦는 스님들에게 수행이 필요한 것도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마음과 몸의 괴로움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고통이란 수행의 좋은 대상이다. 고통에 맞서지 않고 고통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찬 문 스님은 제자들에게 강조해서 가르쳤다. “무엇이든 덤벼라, 그러면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다하는 순간까지 싸울 것이다. 절대로 후퇴나 철수는 없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을 마치고, 보리수 아래에 앉아 마지막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정진하신 일을 연상시킨다. 아찬 문과 그 제자들이 밟아온 숲 속 수행의 전통은 부처님의 수행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두타행 전통 이은 대스승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찬 문은 ‘붓도’라고 마음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반복하는 염불 수행과 끊어짐 없는 마음챙김의 위파사나를 수행할 것을 가르쳤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덕을 반복해서 상기하는 ‘붓도’ 수행과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마음챙김 수행의 전통은 바로 자신을 보호하고 수행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아찬 문 스님이 밟았던 길이었고, 그것은 곧 제자들로 이어지는 수행 전통이 되었다.

 

< 법보신문, 2004년 7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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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스승 아잔 차 

 

 

 

[다음의 이야기는 태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아잔 브람의 위대한 스승 태국불교의 고승 아잔 차의 초월적인 지혜에 대한 이야기다.  아잔브람은 이번 새해에 참불선원 아잔브람 한국명상센터(선원장 각산스님)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21세기에 재림한 부처님이라 할 정도의 감화를 준 세계적 명상의 대가이다]

 

 

어느 날 근처 마을의 이장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다급한 걸음걸이로 아잔 차 스승을 찾아왔다. 스승은 그때 손님들을 만나는 오두막에 앉아 있었다. 

 

 

지난밤 마을의 한 여성 몸에 매우 폭력적이고 사악한 귀신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녀를 위대한 수행승 앞으로 데려왔다.  그들이 아잔 차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귀신 들린 여인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아잔 차는 즉각적으로 두 제자를 시켜 장작불을 피우고 솥에다 물을 끓이게 했다.  그리고 다른 두 제자에게는 오두막 근처에 커다란 구멍을 파도록 지시했다.

 

 

제자들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스승의 지시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네 명의 신체 건장한 마을 남자들, 북동부 지방의 억센 농부인 그들조차도 몸부림치는 여인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들이 그녀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신성한 사원으로 데려오는 동안 그녀는 입에 담기도 힘든 온갖 외설스런 욕설을 내질렀다.

 

 

그녀를 본 아잔 차는 제자들에게 소리쳤다.

"땅을 더 빨리 파라! 어서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 커다란 구멍과 많은 양의 끓는 물이 필요하다."

아잔 차의 오두막 아래 모인 승려들과 농부들 중 누구도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감을 잡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울부짖는 여인을 아잔 차의 오두막 아래로 데려왔을 때 그녀는 말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핏빛으로 충혈된 두 눈은 광기로 사납게 찢어져 있었다.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로 그녀는 아잔 차를 향해 온갖 상스럽고 외설스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더 많은 남자들이 달려들어 욕을 내뱉는 여인을 꿇어 앉혔다.

 

"아직도 구멍을 다 파지 않았는가? 서둘러라! 물은 다 끓었는가? 빨리 가져오라!"

 

 

발악하는 여인에 대고 아잔 차가 소리쳤다.

"저 여자를 그 구멍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다 뜨거운 물을 퍼부어라.  그런 다음 흙으로 파묻으라.  그것만이 이 사악한 귀신을 제거하는 유일한 길이다.  더 빨리 파라! 뜨거운 물을 더 가져오라!"

 

 

여러 세월 동안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아잔 차 스승이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정상적인 수행승의 관점에서 보면 예측 불허의 인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귀신 들린 여인을 구멍 속에 내던지고 끓는 물로 데친 뒤 땅 속에 파묻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여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발악이 눈에 띄게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구멍이 다 완성되고 물이 다 끓기 전에, 그녀는 아잔 차 앞에 지친 얼굴로 고요히 앉아 있었다.  품위 있는 모습으로 아잔 차의 축복을 받은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부드러운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아잔 차는 알고 있었다.  귀신이 들렸든 아니면 단순히 미쳤든,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자기 보호 본능'이라 불리는 강력한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기술적으로, 그리고 매우 극적으로 그녀 안에 있는 그 단추를 누른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과 죽음의 공포가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내쫓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직관적이고, 계획함 없이 행해지고,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아잔 브라흐마(아잔 브람), 류시화 옮김 

-참불선원 아잔브람 한국명상센터, 무생인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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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님께서 아잔 간하에 대한 기사를 올려주셨군요.

이번에 한국에 7대 성자 명상대전에 오신답니다.

제가 번역해 본 태국의 큰 스승이신 아잔 간하 스님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를 올려봅니다.


아래 글은 태국스님인 아잔 간하에 대한 글인데, 그 분은 숲속 명상의 전통을 잇고 있는 분이시다. (역주; 아잔이란 태국어로 큰 스님이란 뜻이다.)


아잔 간하께서는 스승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는 루앙 포 차의 뛰어난 제자이시고 그분의 조카이시다. 현재(1994년) 44살이시고 27년간 승려 생활을 하셨으며, 태국에서는 떠오르는 새로운 세대의 명상 스승 중 한 분이시다. (너무 오래된 글이군요.^^)


아잔 간하께서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수 있다. 일 년에 반은 하루 중 대부분을 대나무 의자에 앉아서 내방객을 만나고 질문에 답을 하고 비구, 비구니들과 환담을 하신다. 만약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그저 앉아 계신다. 스님은 통통하고 작은 몸을 흔드시면서 주변 사람들과 웃고, 미소 짓고, 장난을 치신다. 평화와 자애를 방사하시면서 스님의 자비로운 시선이 가슴 깊이 사무친다. 그분은 부드럽고, 친절하며 자애로우시다.


나머지 반년 동안은 아잔 간하께서는 맨발로 유행(tudong?)을 하신다. 몸의 건재함과 어려움을 인내하는 능력을 보여주시며 출가 이후 매년 규정된 유행을 하신다. 이러한 운수납자의 유행을 떠날 때는, 승단의 대부분 사람들과 같이 가며, 매년 그 제자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루앙 포 차의 장례식 후에 62명의 수행자와 함께 걸어서 유행을 떠났다. 열기와 비와 통증 혹은 가끔은 음식 부족 (한 달간은 익힌 바나나 줄기를 먹음)등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아잔 간하께서는 다부졌으며 절제되어 있으셨다.


아잔 간하께서는 전통적인 수행 방법을 고수하셔서 유행 수련을 철저히 지키시고 (유행은 부처님께서 권장하신 금욕의 수행이다.) 숲속 수행자의 단순하고 은거적인 생활 방식을 거의 대부분 따르셨다. 그럼에도 스님께서는 수행 방법에 있어서는 매우 독창적이셨다. 스님과 그 제자들은 모두 채식주의자이며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으신다. 아잔 간하께서는 고난에 직면해서도 흔들림 없이 온전히 평정하며 연민의 마음을 키우는데 이것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며 제자들이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대나무 의자에 앉아 내방객을 수 시간 동안 만나거나 유행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내를 보이시든지 간에 스님께서는 언제나 평정한 성품을 보여주시며, 이 때문에 대부분의 스님의 제자들은 스님을 존경한다. 스님은 언제나 유쾌하시다. 스님께선 결코 피곤이나 조급함이나 졸음을 보여주신 적이 없다고 한다. 한 우기 안거기간동안 스님께서는 잠을 자거나 눕지 않으며 오로지 깊은 삼매에 머물겠다고 마음을 세우셨다. 진짜로 삼개월간 잠을 주무시지 않으셨고 졸거나 하품을 하시는 경우도 없었다고 한다.


아잔 간하께서는 거의 법문을 하시지 않음에도 위대한 스승으로 간주되고 있다. 결점이 없는 방법을 통해서, 격식 없이 적시에 단순하고도 직접적이어서 효율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유행 중에는 제자들을 극한까지 내 모시고 또 편하고자 하는 욕망을 창의적으로 가차 없이 무너뜨리신다. 마치 제자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듯이 제자 각자의 성향에 따라서 알맞은 방향으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깨닫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 그 무엇도 너를 화나게 하거나 방해하게 하지 말라. 우리는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것이다. 깨어있음에 머물며 마음을 조용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라. 그것이 무엇이든 지나가는 것으로 보라. 하지만 삼매가 없는 통찰을 개발하는 것은 면도날로 큰 나무를 베어내려는 것과 같다. 아무리 날이 날카로워도 도끼의 무게가 실려야 비로소 나무가 베어질 수 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너무 멀리 내다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가시를 밟게 될 것이다. 마음을 시원하게 하라, 평온(Sabaay) 평온...”


아잔 간하의 사찰은 외형적으로는 비좁고, 붐비며, 분주한 철길 옆에 위치한다. 하지만 스님께서 형성하신 분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수행하기에 조용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찰에서 대화와 친목도모를 최소화 시키는 것을 권장했기 때문이다. 일과 중에 대화가 필요할 때면 스님들은 간단한 몸짓으로 대신 한다. 공양을 하거나 절을 하거나 발우를 닦는 일은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이루어진다. 모든 일과는 주의 깊게 조율되고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다.


승단의 선배에게 존경을 보이는 것은 겸손을 증장시키는 도구이며, 공동체의 잘 짜인 역할은 정제된 예의로 조화롭게 흘러간다. 사찰에서는 쾌적한 평온함을 구석구석에서 느낄 수 있다. 이런 신뢰와 자비의 분위기에서는 자기방어나 이질감, 나를 세우는 것을 놓아 버려도 될 것 같이 느껴진다.


이 둥글고 강인한 아잔께서는 스님이 되시기 전에는 무엇을 하셨을까? 그는 승마 기수였다. 아잔 간하께서 말씀하시길 그는 성공적인 기수였는데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장 없이 말 잔등에 타려면 쥘 것이 없어서 양손바닥으로 말의 양 측면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 스님은 또 마을 의사로 일하면서 매춘부 치료를 했다고 하신다. 이런 경험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냉정해지셨다고(열정이 없어지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스님은 출가를 하려고 했지만 부친께서 지속적으로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잔 간하께서는 이것이 아주 큰 괴로움이셨다고 회고하신다.


1981년 홀로 유행 중에 아잔 간하께서는 제자들과 버마 국경 근처인 랑클라부리(Langklaburi)에서 만나기로 하신다. 이때는 우기 안거를 시작하기 2주 전이었으며, 장마 비가 이미 내리기 시작했었다. 스님은 퉁 야이(Tung Yai) 야생 보호 구역의 깊은 정글과 산을 헤치고 족히 100 킬로미터를 넘는 거리를 통과해야 했다. 스님은 탁발을 해서 음식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없는 곳을 수일 동안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게다가 이 지역에는 소로도 대로도 없었다. 지도도 없었고 나침반과 코끼리가 다니는 길을 따라가면서 멀고 먼 높은 산악 지역을 향해 나아갔다. 스님은 자주 야생 동물과 마주쳤으며, 수풀이 높게 자란 곳의 길을 가다가 호랑이와 마주쳤는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리였다고 한다. “멈춰라, 멈춰라” 스님은 외쳤다. 그 호랑이는 멈췄고 그리곤 놀라서 껑충 뛰어 사라졌다.


아잔 간하께서는 7일 동안 단식을 하셨고 계속 걸으셨다. “오직 삼매 속에서 살아남으셨다.” 그렇게 계속하셔서 마침내 집에서 기르는 물소가 다니는 길을 만나시게 된다. 그 길을 따라가다가 카렌족 사람을 보시게 된다.-그는 고산족으로 그가 잡은 짖는 사슴의 내장을 제거하고 있었다. 아잔 간하께서는 그에게 어디에 사냐고 물어봤지만 그는 태국 말을 몰랐다. 그 카렌 족은 몸짓을 통해서 아잔 간하께 그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는 스님을 풀로 만든 집으로 인도하고는 사라졌다.


30분 후에 그는 무장한 공산 게릴라 무리와 함께 돌아왔다. 이 게릴라들은 태국 학생들이었으며 정부군에 맞서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즉시 아잔 간하께서 승려 복장의 스파이라고 생각했고 심문을 시작했다. 반복적으로 심문을 해서 숨겨진 임무를 드러내려 하였다. 그들은 스님께서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를 물어보았다.


“7일간이요.”

- 보급품은 어디 있소?

“그런 것은 없소.”

- 어떤 길로 이곳으로 왔소?

“나는 길을 따라오지 않았소. 원시림을 가로질러 왔을 뿐이요.”

- 그게 어찌 가능하단 말이요? 이 지역은 전체가 지뢰밭인데?


이때 까지도 공산주의자들은 아잔 간하께서 진짜 스파이인지 확신하지 못했었다. 이때가 아직 정오 전이라 그들은 그 카렌족 사람에게 짖는 사슴의 내장을 (맛있는 요리) 요리하라고 시켰고 스님께도 그 음식을 쌀밥과 함께 드렸다. 아잔 간하께서는 채식을 하는 것이 수행의 일부라면서 쌀밥이면 족하다고 하셨다. 이에 놀라움과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숲에서 나는 채소를 찾아 스님께 공양드렸다.


식사 후에 공산주의자들은 스님을 그들의 주 거점지로 호송하였다. 여러 개의 초소들과 망루들은 새소리를 내면서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주 거점지에 도달할 때 까지 수백 에이커의 논을 지나기도 했는데 큰 군대를 먹이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주 거점지에서는 반군의 지도자에 의해서 다시 심문이 이어졌다. 아잔 간하께서는 나는 아잔 차 스님의 제자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아잔 차라면 문제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스님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가르치시죠. 다른 중들처럼 주술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속이시지는 않으시죠.”


아잔 간하께서는 그들에게 잡혀있는 동안 내내 자애를 방사하셨습니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진짜 스님임을 믿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곳을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님을 풀어주었다. 스님께선 앞뒤로 군인을 대동하고 지뢰밭을 건너셨다. 지뢰밭의 끝자락에 도착하자 그 군인들은 스님께서 자유롭게 가셔도 된다고 했다.


아잔 간하께서 떠나려고 하실 때, 그들은 스님께 멈추라고 하였다. 그들은 달려와서 총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삼배를 올렸다. 그들은 스님께서 우기 안거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 아잔 간하께서는 스님께서 약속 장소에 가시지 않으면 제자들이 걱정하게 된다며 미안하다고 대답하셨다.


그리곤 돌아서 계속 걸어가셨다...

http://cafe.naver.com/sangdomeditation/18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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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걸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9.29 윗글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찬 문은 ‘붓도’라고 마음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반복하는 염불 수행과 끊어짐 없는 마음챙김의 위파사나를 수행할 것을 가르쳤다."
    -----------
    이에 반해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 때 부처님과 빠세나디 왕이 앉아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거리에서 일곱 명의 결발 고행자, 일곱 명의 나체고행자, 일곱 명의 한 벌 옷의 고행자, 일곱 명의 방랑 수행자 등이 더부룩한 겨드랑이 털, 긴 손톱과, 긴 몸의 털을 한 채 그들의 필수품 꾸러미를 들고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빠세나디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무릎을 끓고 합장한 채 이들 수행자를 향하여
  • 작성자걸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9.29 “나는 꼬살라의 왕 빠세나디입니다. 존자여.”라고 세 번 말하였다. 이들이 다 지나간 후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저들은 아라한입니까, 또는 아라한의 길에 들어선 이들입니까?”
    “대왕님, 세속에 사는 사람이 그것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계행을 지니고 있는지는 함께 살아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청정한지 어떤지는 함께 대화를 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불굴의 정신이 있는지는 역경에 처했을 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지혜가 있는지는 토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는 알 수 없고 긴 시간이 지난 후에나 알 수 있습니다.
  • 작성자걸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9.29 또한 주의 깊어야 알 수 있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지혜로워야 알 수 있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

    - 겉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S3:11),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 p434

    =>
    위 경전을 곰곰히 생각하면서 읽어보시면,
    부처님의 명호를 반복하고 염불하는 수행은
    부처님이 가르친 수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고 사유하여 행하라(문,사,수)는 가르침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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