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의 무단통치와 3·1 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육각정에서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있었다. 곧이어 조선이 독립국임이 선언되었고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이 온 한반도에 메아리쳤다.
3·1운동은 이렇게 불타올랐다...
당시 일본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조선에서의 식민통치를 시도하고,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의 원료공급지와 상품판매시장이라는 식민지경제형태로 재편하였다. 일본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이 미약했고 조선에 침투한 일본자본주의는 모험적 이윤을 노리는 중소자본 위주였기 때문에 식민통치에서 초과이윤을 얻기 위해 일제는 더욱 악랄한 식민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1912년부터 1918년 11월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조선의 토지소유관계를 제도적으로 확립하여 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데있었다. '신고주의'를 원칙으로 실시 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왕실소유지(궁방전), 관유지(역둔토) 등이 총독부소유의 '국유지'로 넘어갔고 총독부는 국유지로 편입된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 지주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총독부와 일본인 지주가 전체 경지면적의 약 10% 이상을 소유하게 되었고, 전체 농가의 3.1%에 해당하는 지주의 경작지가 경지면적의 50.4%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제는 사업의 과정에서 지주의 소유권을 절대·배타적으로 인정하여 지주층을 식민지 농업정책의 협력자, 식민통치의 유력한 동반자로 포섭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바탕으로 1914년 지세대상과 납세자를 확인하는 지세령을 공포하여 지세수입을 확보하고 식민지지배의 재정을 뒷받침하였다.
산업에 있어서도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일본인 자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10년 회사령을 공포하였다. 회사령은 회사를 설립하거나 조선 밖의 회사가 조선에 본사 또는 지사를 설립할 때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한 규정으로 일본인의 회사설립을 촉진시키고 조선인의 회사설립은 억압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의 조선의 민족별 자본 구성은 조선인 기업이 11.6%, 일본인 기업이 78.4%, 일본인 기업과 다를 바 없던 조·일 합동기업이 8.9%로서 조선인 자본이 엄청난 열세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설립된 조선인 회사는 대부분 일제의 원료약탈과 상품수출에 관련된 원료가공업과 유통부문에 관련된 금융·상업·운수 부문에 한정되었다. 1919년 조선의 수출은 원료와 원료용 제품이 90% 이상을 차지하였고 그 대부분은 쌀이었다. 이렇게 1910년대 조선은 일제의 경제예속화정책으로 전형적인 식민지가 되어갔다.
일제의 수탈의 결과 전체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농민의 처지는 더욱 궁핍해졌고 토지조사사업으로 강화된 지주제를 바탕으로 5할이던 소작료가 더욱 늘어 지주들이 부담해야하는 지세·비료값 등 농업경영비용까지 떠넘겨받게 되었고, 실제적으로 70% 이상을 부담하게 되었다. 지주들은 소작농에게서 걷어들인 쌀을 일본에 수출하여 돈을 모았고 그 돈을 다시 토지에 투자하거나 고리대를 놓았다.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제 수탈은 일제와 조선민중 사이의 갈등을 한층 첨예하게 만들었고, 조선 사회 안의 계급모순을 격화시켰다. 일본에 빌붙은 자본가와 지주, 친일파를 뺀 여러 계층의 민중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절실하게 원했다. 특히 일제의 억압과 수탈의 주 대상이었던 노동자와 농민은 오직 독립만이 해방구가 될 수 있었다.
나라밖에서도 '민족자결'과 '독립'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1914년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1917년 11월 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한 레닌은 재정러시아 치하 100여 개 이상의 피압박민족과 동양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독립국가 수립을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권을 지지하였으며 아시아·아프리카의 민족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이 재창한 '민족자결주의'도 식민지 피억압민족에게 독립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의 대상은 전승국이 지배하는 식민지를 제외한 일부 패전국의 식민지와 전쟁에 기여한 일부 약소민족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나라 안팎의 민족주의자나 지식인들에게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곧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었고 이것은 3·1운동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외적 요인이 되었다.
국내의 반일 독립운동은 학생층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들은 민중보다 국외 정세변화에 민감할 수 있었고,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학교나 교회 등을 통해 힘을 모을 수 있었다. 1918년 말부터 천도교와 기독교 조직을 중심으로 이들 교파들과 친분있는 지식인, 각 교파 지도급 인사들은 독립요구를 정치적으로 표시하자는 논의를 거듭하였다. 2월말 두 교단 및 불교계가 가담하였고 여기에 학생층도 거사계획에 참여한다. 이들은 2월 27일 몰래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종교·학생조직을 통해 전국 곳곳으로 배포하고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작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 등 4인을 제외한 29명은 엉뚱하게도 바로 옆, 지금의 인사동 고급 요리집 태화관에 모여있었다. 학생대표가 탑골공원으로 가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이들의 간청을 끝내 뿌리치고 자신들끼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독립선언서 서명자 일동이 명월관 지점에 연행·구속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투항해버렸다. 이들은 "많은 학생과 시민이 모이면 군중심리에 따라 뜻밖의 동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민족대표들이 불참하자 한 학생이 탑골공원의 육각정에 뛰어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자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만세시위는 그 동안 민족의 가슴속 깊숙이 억눌려 있던 독립의지를 분출시켜,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갔다. 만세시위는 처음에는 종교지도자·학생·중소상인 등이 이끌었고, 3월 말 4월 초에는 전국적인 시위로 발전되면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더 이상 비폭력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군중들은 만세 행진이 일본 경찰과 군인들의 무자비한 탄압 앞에서 허망한 죽음만을 부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군중들은 관공서 및 일제의 착취기구나 그 대리자들 그리고 일본인 지주·상인·고리대업자들을 투쟁대상으로 삼았다. 전국 232개 부·군 중 229개 부·군에서 1491건의 시위가 벌어졌고 2개월여에 걸쳐 200만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은 4월 말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점차 사그라들어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월 1일에서 5월 말까지 학살된 사람이 7979명, 부상자가 1만 5961명, 검거자가 4만 6968명에 이르렀다.
3·1운동에서 주목할 점은 3·1운동을 준비하고 스스로 민족대표라고 하던 33인이 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기는 했으되 투쟁이 번지고 일제가 탄압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항쟁 처음부터
투쟁을 포기해버렸다는 점이다. 이들은 민중의 광범한 독립의지를 바탕으로 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끌기보다는 제국주의 열강의 속성을 깨닫지 못한 채 한때 유리하게 조성된 정세에 편승하여 민족독립을 해결하려 한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대외적인 독립선포, 일제 당국자에 대한 독립청원으로 독립이 달성되는 줄 알았다. 민족대표는 세계 제 1차 대전을 지성과 문명의 승리로 받아들였고 열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이것은 제국주의의 속성상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상이었다. 민족대표들은 재판과정에서 민중의 폭력시위에 대해 "우리의 취지를 잘 못 이해한 것", "폭동은 우매한 것으로 우리의 독립선언과 폭동은 하등의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에 위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한결같이 말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3·1운동은 민족 자신의 힘에 바탕을 두고 운동을 끝까지 책임질 지도조직이 없으면 민족해방을 이룰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고 이것은 운동을 총괄·지도할 조직 건설 움직임으로 이어져 임정의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운동의 과정에서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독립 의지와 변혁열망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민족해방운동의 저변을 확대했다는 데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민중의 저항에 놀란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고 기만적인 유화정책을 펴나갔다. 악명 높던 헌병경찰제도 보통경찰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은 경찰업무와 군사업무를 나눈 것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반일 운동을 효과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더욱 강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경찰관서를 3·1운동 전 55개소에서 761개소로, 경찰 수를 5400명에서 1만 8400명으로 늘렸고, 경찰 경비도 800만원에서 2394만으로 3배 이상 늘려 총독부예산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으나 그것은 단재 신채호가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서 기계·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 목탁으로 자명하여 강도의 비위를 거슬리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라고 꼬집었듯이 일제가 인정한 범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일제는 문화정치의 본질을 숨긴 채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조선민족이 열등하다고 교육·선전하여 우리 민족에게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강요하고 식민지 노예로 길들이려고 하였다. 기만적인 문화정치의 미끼로 3·1운동 뒤 흔들리던 조선인 대지주와 자본가·지식인 등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상층부를 식민지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민족을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일제는 "친일분자를 귀족·양반·부호·교육가 등에 침투시켜 여러 친일 단체를 조직케 할 것, 친일적인 민간유지에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조선 청년을 친일분자의 인재로 양성할 것, 조선인 부호 자본가에 대해 일본자본가와의 연계를 추진할 것" 등의 6가지 친일파 육성방침을 내세웠다. 당시 경무국장 마루야마는 "조선은 당장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항일투쟁을 포기하고 일제의 보호아래 먼저 실력을 쌓은 듯에 독립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조차도 일제가 인정할 때라야 가능하"고 하여 문화정치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곳 '조선독립 불가론'이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일제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고 실력양성론·자치론으로 빠져 민족의 독립역량을 약화시켰고 결국은 변절하고 만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여 독점자본주의 체제를 굳히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농업과 공업이 불균등하게 발전하였다. 결국 일본에서는 늘어가는 노동자의 식량이 부족하여 '쌀 폭동' 이 일어났다. 일제는 부족한 쌀을 조선에서 증산하여 해결하려고 하였고 때문에 지주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소유권을 강화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토지개량사업을 실시하였는데 농촌에 침투한 일본 독점자본은 농민의 몰락을 부채질하였고, 쌀 생산은 늘었으되 토지소유자들은 온갖 잡세에 견디지 못해 몰락할 지경이었으며, 증산된 산미 이상의 쌀이 수탈되어 농민은 끊임없이 토지에서 내몰렸다. 1920년에는 회사령이 철폐되어 일본자본이 조선을 더욱 깊이 잠식해 들어왔다. 이제 급성장한 일본자본주의는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일본인 자본의 활동을 지원하는 회사령이 불필요했고 일본자본주의가 자유롭게 건너올 수 있어야 했다.
일본 독점 자본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식민지자본주의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노동자의 수도 100만 가량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줄 7.5%가 아니 어린 노동자였으며, 35%는 여성노동자였다. 조선노동자는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일본 노동자의 임금의 절반도 되지 않는 차별 속에서 혹사당했다. 전체 인구의 70∼ 80% 차지하던 농민들의 처지도 노동자들과 다를바 없었다. 지주와 소작농·화전민은 해마다 늘어갔으나 자작농·자소작농은 해마다 줄어들었다. 소작농은 5할이 넘는 소작료에 원래 지주의 몫인 비료·농기구·이자와 지세공과금·수세·마름보수·소작료 운반비 등까지 부담했으므로 실제 농민들의 부담은 수확량의 70∼ 80% 정도였다. 농민들의 생활상태는 더욱 열악해지고, 그에 따라 고리대에 대한 부채도 늘어 가구당 평균 부채액이 137원이었다. 당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1원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빼앗기고 토지에서 유리되었으며 이드릉ㄴ 농업노동자 혹은 임금노동자가 되어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육각정에서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있었다. 곧이어 조선이 독립국임이 선언되었고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이 온 한반도에 메아리쳤다.
3·1운동은 이렇게 불타올랐다...
당시 일본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조선에서의 식민통치를 시도하고,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의 원료공급지와 상품판매시장이라는 식민지경제형태로 재편하였다. 일본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이 미약했고 조선에 침투한 일본자본주의는 모험적 이윤을 노리는 중소자본 위주였기 때문에 식민통치에서 초과이윤을 얻기 위해 일제는 더욱 악랄한 식민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1912년부터 1918년 11월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조선의 토지소유관계를 제도적으로 확립하여 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데있었다. '신고주의'를 원칙으로 실시 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왕실소유지(궁방전), 관유지(역둔토) 등이 총독부소유의 '국유지'로 넘어갔고 총독부는 국유지로 편입된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 지주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총독부와 일본인 지주가 전체 경지면적의 약 10% 이상을 소유하게 되었고, 전체 농가의 3.1%에 해당하는 지주의 경작지가 경지면적의 50.4%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제는 사업의 과정에서 지주의 소유권을 절대·배타적으로 인정하여 지주층을 식민지 농업정책의 협력자, 식민통치의 유력한 동반자로 포섭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바탕으로 1914년 지세대상과 납세자를 확인하는 지세령을 공포하여 지세수입을 확보하고 식민지지배의 재정을 뒷받침하였다.
산업에 있어서도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일본인 자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10년 회사령을 공포하였다. 회사령은 회사를 설립하거나 조선 밖의 회사가 조선에 본사 또는 지사를 설립할 때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한 규정으로 일본인의 회사설립을 촉진시키고 조선인의 회사설립은 억압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의 조선의 민족별 자본 구성은 조선인 기업이 11.6%, 일본인 기업이 78.4%, 일본인 기업과 다를 바 없던 조·일 합동기업이 8.9%로서 조선인 자본이 엄청난 열세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설립된 조선인 회사는 대부분 일제의 원료약탈과 상품수출에 관련된 원료가공업과 유통부문에 관련된 금융·상업·운수 부문에 한정되었다. 1919년 조선의 수출은 원료와 원료용 제품이 90% 이상을 차지하였고 그 대부분은 쌀이었다. 이렇게 1910년대 조선은 일제의 경제예속화정책으로 전형적인 식민지가 되어갔다.
일제의 수탈의 결과 전체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농민의 처지는 더욱 궁핍해졌고 토지조사사업으로 강화된 지주제를 바탕으로 5할이던 소작료가 더욱 늘어 지주들이 부담해야하는 지세·비료값 등 농업경영비용까지 떠넘겨받게 되었고, 실제적으로 70% 이상을 부담하게 되었다. 지주들은 소작농에게서 걷어들인 쌀을 일본에 수출하여 돈을 모았고 그 돈을 다시 토지에 투자하거나 고리대를 놓았다.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제 수탈은 일제와 조선민중 사이의 갈등을 한층 첨예하게 만들었고, 조선 사회 안의 계급모순을 격화시켰다. 일본에 빌붙은 자본가와 지주, 친일파를 뺀 여러 계층의 민중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절실하게 원했다. 특히 일제의 억압과 수탈의 주 대상이었던 노동자와 농민은 오직 독립만이 해방구가 될 수 있었다.
나라밖에서도 '민족자결'과 '독립'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1914년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1917년 11월 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한 레닌은 재정러시아 치하 100여 개 이상의 피압박민족과 동양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독립국가 수립을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권을 지지하였으며 아시아·아프리카의 민족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이 재창한 '민족자결주의'도 식민지 피억압민족에게 독립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의 대상은 전승국이 지배하는 식민지를 제외한 일부 패전국의 식민지와 전쟁에 기여한 일부 약소민족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나라 안팎의 민족주의자나 지식인들에게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곧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었고 이것은 3·1운동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외적 요인이 되었다.
국내의 반일 독립운동은 학생층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들은 민중보다 국외 정세변화에 민감할 수 있었고,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학교나 교회 등을 통해 힘을 모을 수 있었다. 1918년 말부터 천도교와 기독교 조직을 중심으로 이들 교파들과 친분있는 지식인, 각 교파 지도급 인사들은 독립요구를 정치적으로 표시하자는 논의를 거듭하였다. 2월말 두 교단 및 불교계가 가담하였고 여기에 학생층도 거사계획에 참여한다. 이들은 2월 27일 몰래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종교·학생조직을 통해 전국 곳곳으로 배포하고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작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 등 4인을 제외한 29명은 엉뚱하게도 바로 옆, 지금의 인사동 고급 요리집 태화관에 모여있었다. 학생대표가 탑골공원으로 가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이들의 간청을 끝내 뿌리치고 자신들끼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독립선언서 서명자 일동이 명월관 지점에 연행·구속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투항해버렸다. 이들은 "많은 학생과 시민이 모이면 군중심리에 따라 뜻밖의 동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민족대표들이 불참하자 한 학생이 탑골공원의 육각정에 뛰어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자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만세시위는 그 동안 민족의 가슴속 깊숙이 억눌려 있던 독립의지를 분출시켜,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갔다. 만세시위는 처음에는 종교지도자·학생·중소상인 등이 이끌었고, 3월 말 4월 초에는 전국적인 시위로 발전되면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더 이상 비폭력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군중들은 만세 행진이 일본 경찰과 군인들의 무자비한 탄압 앞에서 허망한 죽음만을 부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군중들은 관공서 및 일제의 착취기구나 그 대리자들 그리고 일본인 지주·상인·고리대업자들을 투쟁대상으로 삼았다. 전국 232개 부·군 중 229개 부·군에서 1491건의 시위가 벌어졌고 2개월여에 걸쳐 200만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은 4월 말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점차 사그라들어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월 1일에서 5월 말까지 학살된 사람이 7979명, 부상자가 1만 5961명, 검거자가 4만 6968명에 이르렀다.
3·1운동에서 주목할 점은 3·1운동을 준비하고 스스로 민족대표라고 하던 33인이 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기는 했으되 투쟁이 번지고 일제가 탄압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항쟁 처음부터
투쟁을 포기해버렸다는 점이다. 이들은 민중의 광범한 독립의지를 바탕으로 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끌기보다는 제국주의 열강의 속성을 깨닫지 못한 채 한때 유리하게 조성된 정세에 편승하여 민족독립을 해결하려 한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대외적인 독립선포, 일제 당국자에 대한 독립청원으로 독립이 달성되는 줄 알았다. 민족대표는 세계 제 1차 대전을 지성과 문명의 승리로 받아들였고 열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이것은 제국주의의 속성상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상이었다. 민족대표들은 재판과정에서 민중의 폭력시위에 대해 "우리의 취지를 잘 못 이해한 것", "폭동은 우매한 것으로 우리의 독립선언과 폭동은 하등의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에 위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한결같이 말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3·1운동은 민족 자신의 힘에 바탕을 두고 운동을 끝까지 책임질 지도조직이 없으면 민족해방을 이룰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고 이것은 운동을 총괄·지도할 조직 건설 움직임으로 이어져 임정의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운동의 과정에서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독립 의지와 변혁열망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민족해방운동의 저변을 확대했다는 데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민중의 저항에 놀란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고 기만적인 유화정책을 펴나갔다. 악명 높던 헌병경찰제도 보통경찰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은 경찰업무와 군사업무를 나눈 것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반일 운동을 효과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더욱 강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경찰관서를 3·1운동 전 55개소에서 761개소로, 경찰 수를 5400명에서 1만 8400명으로 늘렸고, 경찰 경비도 800만원에서 2394만으로 3배 이상 늘려 총독부예산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으나 그것은 단재 신채호가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서 기계·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 목탁으로 자명하여 강도의 비위를 거슬리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라고 꼬집었듯이 일제가 인정한 범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일제는 문화정치의 본질을 숨긴 채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조선민족이 열등하다고 교육·선전하여 우리 민족에게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강요하고 식민지 노예로 길들이려고 하였다. 기만적인 문화정치의 미끼로 3·1운동 뒤 흔들리던 조선인 대지주와 자본가·지식인 등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상층부를 식민지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민족을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일제는 "친일분자를 귀족·양반·부호·교육가 등에 침투시켜 여러 친일 단체를 조직케 할 것, 친일적인 민간유지에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조선 청년을 친일분자의 인재로 양성할 것, 조선인 부호 자본가에 대해 일본자본가와의 연계를 추진할 것" 등의 6가지 친일파 육성방침을 내세웠다. 당시 경무국장 마루야마는 "조선은 당장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항일투쟁을 포기하고 일제의 보호아래 먼저 실력을 쌓은 듯에 독립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조차도 일제가 인정할 때라야 가능하"고 하여 문화정치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곳 '조선독립 불가론'이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일제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고 실력양성론·자치론으로 빠져 민족의 독립역량을 약화시켰고 결국은 변절하고 만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여 독점자본주의 체제를 굳히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농업과 공업이 불균등하게 발전하였다. 결국 일본에서는 늘어가는 노동자의 식량이 부족하여 '쌀 폭동' 이 일어났다. 일제는 부족한 쌀을 조선에서 증산하여 해결하려고 하였고 때문에 지주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소유권을 강화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토지개량사업을 실시하였는데 농촌에 침투한 일본 독점자본은 농민의 몰락을 부채질하였고, 쌀 생산은 늘었으되 토지소유자들은 온갖 잡세에 견디지 못해 몰락할 지경이었으며, 증산된 산미 이상의 쌀이 수탈되어 농민은 끊임없이 토지에서 내몰렸다. 1920년에는 회사령이 철폐되어 일본자본이 조선을 더욱 깊이 잠식해 들어왔다. 이제 급성장한 일본자본주의는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일본인 자본의 활동을 지원하는 회사령이 불필요했고 일본자본주의가 자유롭게 건너올 수 있어야 했다.
일본 독점 자본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식민지자본주의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노동자의 수도 100만 가량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줄 7.5%가 아니 어린 노동자였으며, 35%는 여성노동자였다. 조선노동자는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일본 노동자의 임금의 절반도 되지 않는 차별 속에서 혹사당했다. 전체 인구의 70∼ 80% 차지하던 농민들의 처지도 노동자들과 다를바 없었다. 지주와 소작농·화전민은 해마다 늘어갔으나 자작농·자소작농은 해마다 줄어들었다. 소작농은 5할이 넘는 소작료에 원래 지주의 몫인 비료·농기구·이자와 지세공과금·수세·마름보수·소작료 운반비 등까지 부담했으므로 실제 농민들의 부담은 수확량의 70∼ 80% 정도였다. 농민들의 생활상태는 더욱 열악해지고, 그에 따라 고리대에 대한 부채도 늘어 가구당 평균 부채액이 137원이었다. 당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1원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빼앗기고 토지에서 유리되었으며 이드릉ㄴ 농업노동자 혹은 임금노동자가 되어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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