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사람들은 이징옥(李澄玉)에 대해서, '반란자' 라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에, 이징옥에 대해 그다지 좋은 평가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사학계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징옥의 고구려적인 그 큰 기상과 자주성을 알고 있다면,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이징옥은 대금국(大金國)의 황제(皇帝)를 꿈꾸던, 비운의 영걸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 이징옥의 젊은 시절 ◆
이징옥의 본관은 양산(梁山)이며, 지중추원사 이전생(李全生)의 아들이며, 이징석(李澄石)의 아우입니다.
이징옥 형제는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영민하기까지 하였는데 특히 아우 징옥이 뛰어났으며, 거기에 일화가 몇 가지 전해 옵니다.
그가 14세가 되고, 그 형이 18세 였을때, 두 형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의 힘을 시험하고자, 숲속에서 산짐승을 잡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징석, 징옥 두 형제는 그 길로 사냥을 나섰고, 형 징석은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오니, 그의 모친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우인 징옥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하자, 그의 모친이 말하기를,
"남이 말하기를 네가 네 형 보다 힘이 세고 날래다 하더니, 오늘 보니까 너는 빈 이름 뿐이요. 실력이 없는 사람이니, 남 부끄럽지 아니하냐?"
그러자 이징옥은 대문 밖에 있는 산더미 만하게 큰 돼지를 산채로 끌고 와서 그 어머니를 보였습니다. 이것은 징옥이가 그 형처럼 돼지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잡기위해 기력(氣力)을 다 뽑아 낸것 입니다.
그 후 이징옥은 각지를 유랑하다, 김해(金海)에서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만날 것을 청하였으나,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한 부사는 그를 만나주지 않아서, 그는 결국 떠나야 했습니다.
관아에서 몇십리를 걸어온 이징옥은, 곡(哭)소리를 듣게 되자 이징옥은 그 소리를 듣고 그 집을 찾아가는데 그 집에는 여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사연인 즉,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징옥은 근처의 산에 올라가 호랑이 한 마리를 발견하는데, 사람은 이미 잡아먹힌 듯 하였습니다.
이징옥은 한 손으로 호랑이의 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호랑이의 배를 갈라, 남편의 시신을 꺼내어 주고, 호랑이의 가죽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김해 부사(金海府使)의 귀에 들어와, 김해부사는 이징옥을 청하였으나 이징옥은 오지 않았다 합니다.
◆ 이징옥의 출세 가도 ◆
그는 갑사(甲士)로서 중앙에서 벼슬을 하다가, 1416년(태종 16)부사직으로 별시에 응하여 무과친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복소윤(司僕少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징옥은 김종서를 도와 북방 영토의 개척에도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1423년(세종 5) 황상(黃象)의 천거로 경원첨절제사로 발탁되어 아산(阿山)에 침입한 야인을 격퇴하였으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신임을 받아, 김종서(金宗瑞)의 천(薦)으로 그를 대신하여 함북절도사(咸北節度使)가 되었습니다.
그는 군사를 오색으로 대를 지어 회녕(會寧)의 군사는 말과 의복을 다 희게 하고, 종성(鍾城)의 군사는 말과 의복을 다 푸르게 하며 그 외 다른 곳은 혹 검게도 하고 붉게도 누르게도 하였습니다.
그의 군사는 정비가 잘 되었고, 날래고 용감하여 북방의 여진족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용맹하고 군(軍)에 밝아 여진족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청렴결백하여 우리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합니다.
1449년 20여년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여진의 정복ㆍ회유ㆍ복속에 기여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올랐으며, 1450년(문종 원년) 함길도절제사로 부임, 10년 만에 다시 북방 최전선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 계유정난과 이징옥의 난 ◆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그의 심복들과 쿠데타를 일으켜, 황보 인과, 김종서 정승을 제거하니, 김종서의 심복인 이징옥도 수양대군의 계략에 의해 파직 되어 한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징옥은,
"전일에 세종대왕이 친명하시기를 국가에 큰 일이 있지 않으면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말씀까지 하였는데, 오늘에 무단히 부르는 것은, 필경 나를 시기(猜忌)하여 해코지함이니 나라의 일이 나쁜 놈들의 손에 어지럽게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여, 후임자 박호문(朴好問)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상감마마의 어명일 뿐이오"
라고 하자, 이징옥은 그를 잡아다 심문하니, 그는 수양대군의 음모를 말하고 이징옥은 그를 참하였습니다.
중앙의 명령을 거역한 그는 이제 역적(?)이 되었습니다. 이징옥은 나라의 일을 바로 잡기 위하여 세조(世祖)의 반정(反正)한 죄를 성토(聲討)하기 위해 한양으로 진공하려다가,
"지금 수양을 치는 것보다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야인들과 손을 잡고, 대금황제(大金皇帝)가 되는 것이 쾌한 일이라"
라고 생각하여, 병마를 이끌고 종성에 가서, 스스로 칭제하고 나라이름을 대금(大金)이라고 하고 도읍을 오국성(五國城,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잡혀 지낸곳)으로 정하여, 두만강을 넘어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성판관 정종(鄭種)과 이행검(李行儉) 등의 습격을 받아 그의 아들 세 명과 같이 최후(最后)를 맞이하니, 그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 넋두리 ◆
이징옥이 꿈꾸던 대금제국(大金帝國), 얼마나 장합니까? 그 당시 친명 사대(親明事大)에 젖은 조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니 말입니다.
고려에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이징옥이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여타 다른 반란의 경우는, 지방에서 일어나 도읍지가 있는 곳으로 진공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징옥의 경우는 야인들의 땅이었던 곳, 만주로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만약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한양으로 진공하여 실권을 잡을수도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낭가(郎家) 사상과 사대(事大)사상의 대립이었다면, 이징옥의 난도 그와 맥락이 같습니다.
수양대군은 명에 사신으로 가는 등, 명황실과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했던 것에 비해, 이징옥은 스스로 칭제를 하여 남방의 문약한 족속들(명, 수양대군으로 대표되는 조선)을 쓰러뜨리려고 한 웅대한 기상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 이징옥 관련 참고문헌 ◆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知退堂集,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李澄玉과 六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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