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차이나China가 된 이유
1. 정복군주 진시황제 영정嬴政의 진짜 업적
진시황 영정이 6국을 통일한 것은 받아 놓은 날짜였다. 진秦은 혈통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오르내리는 계급제도를 도입한 개혁이 성공하여 전국시대 칠웅 중에 넘볼 수 없는 강대국으로 변모했다. 통일 제국 이전의 진은 3진晉으로 부른 한韓, 위魏, 조와 봉작에 의한 이성 제후국으로 출발했던 연, 제, 초를 모두 합친 국력보다 두 배나 강력했다. 진은 외국인 출신 유세객들의 외교적 능력과 비상한 수단까지 동원하는 공작원들의 활약으로 6국의 공동투쟁체제도 와해시켜 버렸다. 진에 저항다운 저항을 한 것은 같은 처지의 신흥 강국이었던 초나라 정도였다. 중국 통일의 마지막 순서는 제나라였을지라도.
진시황제 영정의 얼굴. AI가 만든것. South China Morning Post
한국의 역사 덕후들도 진제국이 훈(흉노)을 몰아낸 북벌만을 알지 남정에 대해서 진공 상태인 경우가 많다. 벌伐은 외적을 내쫒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고, 정征은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군사정치행동이다. 벌의 결과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고, 정복은 군과 현을 설치해서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북벌과 남정은 통치 비용에서 비교할 수가 없는 무게다.
과거 중국학자들도 기원전 219년에 영정이 남정, 즉 백월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파악했으나, 초나라가 정복된 기원전 223년에 시작된 것으로 수정이 되어가고 있다. 2세 황제 호해의 시기, 조고 정권 때에 일어난 반란들도 초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진제국의 부역에 저항한 진승과 오광에 의한 농민 봉기군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 장초張楚였고, 항우는 서초西楚 패왕을 자처했다. 항우는 진제국에 대한 저항군의 대표가 되기 위해 멸망한 초나라의 후예인 웅심熊心을 황제로 세워 섭정이 되기도 했다. 진과 초는 중원의 국가들과 달리 변방에서 일어난 신흥 강국이었고, 인구 구성이 사뭇 다른 다인족 국가였다.
진은 초에 대한 정복 전쟁 과정에서 대륙의 남쪽과 동남해안에 엄청난 중원과는 문명적 차이가 뚜렷한 인구 집단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영정의 진제국은 춘추 시대에 존재했던 패권국覇權國이 되려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 경쟁국이었던 6국은 물론 이질적인 인족의 부족연맹체 국가를를 정복해서 군현의 주민을 만들어 직접 통치하고자 했다. 진은 통일 제국을 다스리기 위하여 군현제를 실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군현제가 정착된 상태여서 그것을 정복지에 확대하는 문제였다. 정복지에서 진의 군대는 저항 세력의 진압과 내치를 담당하는 주둔군 겸 계엄군이 되었다. 진의 조정은 지방 행정을 담당할 태수와 감監을 파견하여 주둔군 사령관인 군위郡衛와 함께 3권 분립 형태로 지방을 통치했다. 중앙의 조정은 감을 통하여 행정책임자와 주둔군 사령관을 감찰하였고, 중앙과 지방간에 내밀한 소통을 보장하는 어사이기도 했다.
진제국이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설치한 군은 남군南郡, 동정군洞庭郡, 창오군蒼梧郡이었다. 진이 설치한 군과 관련하여 여러 설이 있었으나 2002년에 이야진간里耶秦簡이 발견되어 장사군長沙郡과 검중군黔中郡은 후대의 일이거나 착오로 밝혀졌다. 남군은 이미 선진시기부터 초로부터 빼앗은 땅이었다. 진이 얻은 새로 얻은 영토는 호남과 호북을 가르는 동정호 일대를 완전히 장악해서 동정군을 설치했고, 그 남쪽으로 남령산맥까지 소수 인족들이 혼합되어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역에 창오군을 설치한 것이었다. 거기 주민을 창오만蒼梧蠻이라 하였다. 창오만의 인구 구성은 장강 일대에서 벼농사를 짓던 몽-미엔(먀오-야오/苗瑤)과 타이인(Tai/Dai)들이었다.
왕전 국방장관 겸 총사령관은 초를 멸망시키고 은퇴했다. 초를 정복한 과정은 영정의 시대에 원로 장군들과 신세대 장군들 간의 경쟁을 보여주었다. 전국시대 최고 명장이었던 왕전은 정복 군주 영정과 젊은 장군들에게 강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실전을 통해 보여주면서 화려하고 아름답게 은퇴를 했다. 정복된 초나라 지역에 동정군의 군위는 조타(趙佗/Triệu Đà:찌에우다), 창오군의 군위는 도휴(屠睢)였을 것이다. 이것은 진제국의 남정군이 어떻게 백월전쟁을 전개하려고 했는지를 통해서 역추적을 해 본 것이다.
2. 진시황제 영정, 백월전쟁을 시작하다
영정이 기원전 221년 6국을 통일한 후에 본격적으로 외부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영정은 몽염을 북벌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자신의 장남인 부소를 북벌군에 대한 감독관으로 내보냈다. 북벌군에 배치한 병력은 10만이었다. 반면에 영정이 남정군 총사령관으로 도휴, 나중에 남월국의 황제가 되는 조타(趙佗/Triệu Đà:찌에우다)를 기병사령관 겸 부사령관에 임명하면서 안배한 병력은 무려 50만이었다.
남방의 국가들은 혈연에 의거한 씨족들이 연합한 부족연맹체 국가 수준이었다. 추장이나 부족장이 최고 권력이 되는 체제이니 북방의 국가들처럼 말이 끄는 중기갑 마차를 낼 수 없었다. 이렇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백월百越 지역에 영정이 50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한 것은 초나라에 대한 정복전쟁에서 믿고 맡긴 젊은 사령관들인 이신과 몽염의 패전에서 교훈을 찾은 결과였다.
도휴가 대장군의 직책인 국위가 되어 남정군 총사령관이 된 것은 백월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기원전 219년을 기준으로 43세였다. 1차 백월전쟁에서 패배한 요인을 6국 통일 전쟁 과정에서 나오지도 않는 경험없는 도휴와 같은 애송이를 대장군으로 임명한 탓이라고 하는데 이는 진제국의 군사제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억측으로 보인다. 진제국은 능력에 따른 승진 체제로 절대 듣보잡이 총사령관에 임명될 수가 없다. 정치가 문란해진 2세 황제인 호해 때도 아니고, 당시 황제 영정은 정치에 대한 열정으로 매일 25킬로의 죽간을 통해 보고서를 읽었다. 진제국에서 계급제도의 근간은 군사체제에서 온 것이었고 병졸은 에누리 없이 적의 수급을 베는 숫자에 비례해서 진급이 가능했다. 장령의 승진도 전공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남정5군 진격도 Baidu Baike
마흔 살이 된 영정은 왕전의 은퇴로 자기 또래의 사령관들과 백월전쟁을 함께하게 되었다. 도휴와 조타는 50만의 병력을 5군으로 나누어 지휘를 했다. 영정은 이들에 대한 지원과 감독, 진의 조정과 연결하는 어사로서 성이 알려져 있지 않은 록祿이라는 인물을 임명했다. 조타가 지휘를 맡게 된 두 개의 군단 중에 하나의 군단은 동정호에 흘러드는 지류를 통해 복건방향으로 진출하여 동월과 민월에 대한 공략을 맡게 하고, 자신은 3만에 달하는 기병 사단을 직접 이끌고 남령산맥을 넘어 번우(광동)에 안착해서 진을 설치했다. 총사령관 도휴는 10여만으로 구성된 3개 군단을 지휘하여 무기의 수준도 높고, 인구도 많은 광동성의 이남부터 베트남 북부에 걸쳐 존재한 서오우(西瓯)와 락월駱越을 정복하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영정이 전심전력을 다해 기원전 219년부터 214년까지 남정군을 지원했으나 총사령관 도휴가 전사하고 30만명의 병력이 전멸하면서 1차 백월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제1차 백월전쟁을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진제국이 오늘날의 절강성부터 광동성까지 모든 월인들을 정복하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으니 절반 이상의 승리이기도 했다. 진제국이 개전을 했을 때 백월전쟁으로 시작했으나 도휴가 담당한 타이인들의 부족연맹체 국가인 서오우를 정복하지 못한 미완의 원정으로 끝나면서, 제2차 백월 전쟁의 성격은 진-오우(秦瓯)전쟁으로 전환되었다. 타이인들이 주도한 오우국이 둘이 있어 정확하게는 진과 서오우간의 전쟁이었다. 동오우는 오늘날의 복건성 지역에 있었는데 조타가 지휘한 군대에게 일찍이 항복했다. 동오우와 서오우에 쓰인 오우瓯는 거칠고 험란한 지역이라는 의미였다.
3. 진-오우秦瓯 전쟁
서오우는 전체 인구가 50만에 불과했다. 6국을 통일한 진제국의 막강한 50만 군대가 어떻게 총사령관이 전사하고 30만명에 달하는 정규 병력이 녹아버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최강의 미군이 제2차 베트남 전쟁에서 10년간 엄청난 전비와 화력을 퍼부었으면서도 월맹에게 패배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2천여년의 시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양상은 비슷했다. 아프가니스탄이 강대국의 무덤이 되었던 것도 마찬가지 사례이다.
남령산맥 5령 위치. Baidu Baike
초기 서오우군은 역우송译吁宋이라는 부족연맹체의 추장이 이끌었다. 타이인들은 이때 정치와 군사 부문의 지도자가 분리되지 않아 추장이 직접 부족민 전체를 이끌고 싸웠다. 타이인의 이런 전통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개전 초기에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토착민이었던 진제국의 강병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오우의 군진이 무너지면서 추장 역우송이 전사하고 말았다. 지도자를 잃은 타이인들은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남령산맥, 나중에 다섯 개의 요처에 관문이 설치되어 오령산맥으로 부르는 이 산맥은 호남성과 중국의 영남지역인 광동과 광서라는 양광兩廣지역으로 갈라놓는다. 베트남 전쟁에서 월맹군이 이용한 안남산맥보다 남령산맥이 고대에는 훨씬 유리했다. 고대에 항공전력은 없었다.
4. 타이인의 명장 걸준桀骏의 전략
역우송이 죽었음에도 타이인들은 항복하려 하지 않았고 침략자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는 것을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백월전쟁이 시작될 당시 서오우는 혈연에 기초한 씨족들의 연맹체여서 전민개병제의 국가였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추장이나 족장의 지휘로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참여하는 형태의 전쟁. 그들은 진제국의 막강한 군대와 싸우면서 전문적인 군사지휘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역우송의 전사 이후 뛰어난 무공을 보여준 걸준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걸준은 타이인의 기대에 부응하여 탁월한 유격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걸준은 군사적으로 훈련되어 있지 않은 주민들이 조악한 장비를 가지고 싸우면 희생만 커진다는 것을 절감하고 유격전을 감당할 수 있는 장정만을 선발하여 게릴라의 형태로 타이군을 재편했다. 걸준이 처음으로 한 일은 도휴의 군대가 식량을 얻을 수 없도록 들에 불을 지르는 청야전술을 폈다. 유격전을 담당할 수 없는 주민들은 남령산맥의 기슭에서 농사를 지어 자신의 병사들에게 군량을 제공하게 했다.
걸준이 택한 군사 방침은 대체로 아래와 같았다.
-진제국의 군사적 우세를 의식하여 정면 대결을 피해 최대한 역량을 보존하면서 장기항전으로 끌고갔다.
-지리적인 이점인 남령산맥과 양광지역의 복잡한 수계를 이용하여 산악 유격전과 배를 이용한 기습으로 진제국의 군량과 양초의 보급선을 차단했다.
- 야간에만 남정군을 강습하여 최대로 지치고 피로하게 만들었다.
진제국군은 북쪽 사람들이 주력이었다. 도휴의 병사들은 열대의 습윤한 기후에 쉽사리 적응을 할 수 없었다. 도휴의 병력은 저항력이 떨어졌고 마침내 풍토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진제국은 강대국으로서 보급에 장점이 있었지만 남령산맥을 넘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마차를 동원하려면 길이 닦여있어야 한다. 당시 양광 지역은 산악 아니면 습지여서 서오우군이 정면 대결을 피하면 도휴가 이끄는 군대는 자신들의 군사적 이점을 살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남정군은 낮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적군을 상대로 싸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밤이면 쳐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부득이 진을 치고 성을 쌓은 수 밖에 없었다. 전황은 주동에서 피동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남정군이 쌓았던 성은 오늘날까지 진성秦城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계림에 일부가 남아있다.
남정군은 남령산맥의 요로에 관을 설치하면서 양광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조타의 두 개의 군단은 동정호의 지류를 이용해서 복건방향으로 접근해서 쳐내려오고 조타가 지휘하는 기동부대는 남령산맥을 넘어 광동에서 진을 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계획적으로 실행이 되었다.
총사령관 도휴가 이끄는 3개 군단이 남령산맥을 넘어 서오우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서전에 서오우 진영을 무너트리고 적장을 전사시킨 대승을 거두어 도휴의 군단들은 기세를 올렸으나 타이인들이 흩어져 산으로 들어가 버리니 오히려 문제가 생겼다. 포위를 하려면 진을 친 군대가 있거나 성이 있어야 포위를 할 수 있다. 남령산맥에 설치한 첫 관문이 있는 5령의 서쪽 봉우리인 월성령越城岭에서 동쪽 끝 봉우리인 다유령大庾岭까지 포장도로로 최단거리가 620Km에 달하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타이인들을 무슨 수로 포위를 하겠는가? 서오우군은 낮에는 이동을 피하고 밤을 이용해서 기습을 해오니 도휴의 군대는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도 서오군의 기습 때문에 편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라오인의 배와 아이들 둘
타이인들은 배를 잘 만든다. 오늘날에도 라오스에서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은 집집마다 통나무의 속을 파내서 만든 배를 가지고 있다. 아무 나무나 배를 만드는 것은 아니고 강하면서도 수액에 기름기가 있어 불을 밝히는데 사용하는 아름드리 나무 종류가 있다. 그런 나무로 배를 만들면 방수가 되어 아주 편리하다. 타이인들은 우기가 끝나면 마을마다 배를 만들어 경주 대회를 한다. 이것은 남방 사람들이라면 내남적없이 즐기는 축제다. 이런 축제는 타이 인족인 라오스와 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크메르 문명의 주인들인 캄보디아인들도 똘레쌉의 물결이 바뀌는 때에 맞추어 배 경주 대회를 한다. 마을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50인승 이상의 큰 배는 경주 대회가 끝나면 절이나 공동의 장소에 보관한다. 메콩강 일대의 타이인들은 우기에 작은 배를 이용해서 왕래도 하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다. 오늘날에 와서 고대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배에 작은 모터를 단다는 것. 진의 조정에서 군량과 양초를 실은 배를 보내봐야 타이인들이 몇 명이면 거뜬히 들 수 있는 배와 함께 몸을 숨겼다가 강폭이 좁거나 물살이 센 곳에서 급습을 해버리면 막아내기가 쉽지가 않았다.
라오스 비엔티안의 배 경주 축제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도휴 사령관의 남정군은 3년 동안 갑옷을 벗을 수도 없었고, 밤이 되면 나타나는 타이군의 기습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해서 마음 놓고 활의 시위를 풀러둘 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걸준이 지휘하는 서오우군의 압박으로 진제국군 진영에 말이 먹어야 할 양초는 고사하고 병사들이 먹어야 할 양식도 떨어지게 되었다. 도휴의 군대는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태가 되었다.
말이라고 아무 풀이나 먹는 것이 아니니 말도 야위고 병사들은 식량 부족과 기후에 시달려 전염병으로 죽어나갔다. 결국 도휴 총사령관은 인내심을 잃고 걸준이 지휘하는 유격대들의 유인에 말려들어 남령산맥의 계곡에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도휴는 서오우군이 쏜 독사와 전갈의 독이 발린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지니 얼굴과 몸에 두 발을 맞고서 말에서 떨어져 전사하고 말았다. 그가 이끌던 30만 대군은 남령산맥에서 사령관을 잃고 소오우군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전멸했다. 1차 백월전쟁에서 수많은 월인 부락들은 정복을 당하였으나 서오우와 락월(駱越/Lac Viet)은 끝내 정복되지 않았다. 주강 수계에 있던 서오우를 공략해야 홍강 수계에 있던 락월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으니 서오우인 타이인들에 의해 비엣인들이 보호를 받고 있었다. 고대의 타이인과 비엣인들의 관계는 서오우가 입술이고 락비엣이 이가 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였다. 대륙인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월인(Viet)으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5. 진시황제 영정의 타이인들에 대한 반격전
영정은 호남성 지역의 월인 부락을 공략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10년, 거국적으로 역량을 집중해서 백월을 공략한 지 5년만에 진제국이 당해본 적이 없는 총사령관의 전사와 주력 군단의 궤멸이라는 엄중한 사태를 맞이했다. 정복 군주인 영정과 진제국의 조정은 패배의 책임을 장수에게 찾지 않고 남정군에게 군량과 양초가 제 때에 전달되지 못한 것에서 패인을 찾았다.
화교와 화상의 원형인 객가客家의 탄생
영정은 진제국에 남자는 갑옷을 입고 출정하고, 여자는 군량을 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징집의 대상도 양민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죄수,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상인, 무능력자로 푸대접을 받언 데릴사위, 특별한 직업이 없는 잉여 인력으로 확대되었다. 여성들도 징발의 대상이 되었다. 남정군 부사령관이었던 조타는 특별히 갑옷을 수선할 수 있는 여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영정은 받아들였다. 영정이 조타의 요청에서 행간을 읽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객가(客家/Hakka)라는 중국식 이민자 사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영국이 호주에 식민지를 개척할 때의 인력 구성과 다를 바가 없다.
객가 마을: wikipedia
진제국군의 최대 강점은 공병이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로마군의 강점이 공병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정은 지리적 열세를 장강 수계와 주강의 수계를 이어 지리적 열세라는 전략적 문제를 극복하는데 집중했다. 광서에서 발원해서 동정호로 흘러드는 상강湘江과 주강의 수계인 계림의 이강漓江을 연결하는 군사용 운하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건설책임자로 감군이자 어사였던 록을 임명했다. 대장군에는 노련한 임효任嚣를 임명하여 10여년을 남정군의 야전사령관으로 경험을 쌓아온 사령관 조타를 지휘하게 했다.
진의 패전의 요인이 전투력이라는 전술적 문제가 아니라 지리라는 전략적 문제였으므로 보급로의 확보라는 전략적 핵심 문제에 집중했다.
운하를 건설한다!
도강언都江堰
영정이 남정의 종국적 승리를 위해 운하를 뚫는다는 발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제국에 운하와 수로 공사에 대한 경험이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정이 어렸을 때 사천 분지 지역인 촉의 지방관이었던 이빙李冰과 그의 아들은 획기적인 방식의 관개 방식을 고안했다. 물막이 공사를 통해서 홍수를 조절하는 방식이 아니라 강의 흐름을 나누는 방식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진제국은 획기적인 관개灌漑 시스템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강언(都江堰/두장옌/Dujiangyan Irrigation System)으로 성도(成都/청두)를 풍요의 도시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도강언은 홍수 조절 외에도 농업 용수의 공급, 목재 운반과 같은 수운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정국거鄭國渠, 약소국의 판타지는 강대국에서 현실이 된다
정국거라는 인공 수로가 만들어진 과정은 더욱 극적이다. 변방의 진나라가 고도성장을 계속하여 강대국이 되면서 국경을 접하고 있던 약소국 한韓은 군사적 대결로 승산이 없자 간첩으로 대항을 하려했다. 한은 정국이란 토목전문가를 간첩으로 파견했다. 영정에게 감당 불가능한 대형 국책사업을 일으키도록 만들어 진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킨다는 한나라의 대단히 고차원적인 책략이었다. 영정은 여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담한 제안을 정국으로부터 듣었다. 중국 문명을 상징하는 두 강인 황하와 장강의 상류를 연결하는 수로(渠/거)를 건설하자!
정국이 간첩이었으므로 제안자 자신도 실현가능성을 믿지 않았던 엄청난 규모의 국책 사업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다. 진제국의 조정이란 개방적이어서 외국에서 온 모만가지의 기묘한 아이디어를 가진 유세객들이 출세 경쟁을 하는 공간이었다. 야심가들 사이의 경쟁은 고금을 막론하고 모함과 투서로 얼룩지기 마련이다. 정국의 정체와 저의는 이내 드러나게 되었다. 정국도 간첩이라는 사실을 자백했다. 정국은 공사 과정에서 실현 불가능하다고 봤던 목표가 진제국의 국력으로는 실현 가능한 과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약소국의 엔지니어로서 150킬로미터에 달하는 운하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지, 전국 시대의 강국 6개국의 모든 역량을 합친 것보다 두 배나 큰 국력을 진제국은 차원을 달리하는 국가였다. 정국은 목숨을 건 마지막 유세를 했다. 정국은 간첩이라는 정체를 완전히 잊고 진제국에 둘 도 없는 애국자라도 되는듯이 진제국의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과 운하의 상관 관계를 설명해서 황제인 영정이 설복을 당했다. 정국거는 진나라의 생산력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려 국가 혁신의 기념비적 토목공사가 되었다. 정국거가 완공되면서 ‘관중에는 흉년이 없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강남의 심은 귤이 강북에서 탱자가 되는 것이 진실이지만, 그 역도 가능해서 약소국의 판타지는 강대국에서 현실이 된다.
남정의 승리를 위해 혼을 담은 운하를 뚫다.
영거(링취)의 모습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운하를 건설한다는 비범한 생각은 영정이라는 인물의 호연한 기상이기도 했지만, 진이라는 나라 자체가 비범했다. 진의 조정은 대대로 개방적이어서 국제적인 인재와 아이디어들이 경쟁하는 공간이었다. 계림에 있던 타이계 인족들의 국가와 부락을 정복하기 위해 만든 이 운하의 이름은 영거(灵渠/링취)라 붙여졌다. 영혼이 담긴 운하. 영혼을 의미하는 영灵자가 붙은 운하. 썩 어울리는 이름이다. 호남성을 의미하는 상강(湘江)과 광서를 상징하는 계림을 잇는 운하라고 해서 상계湘桂운하라고도 한다. 湘과 桂라는 글자는 호남성과 광서자치구에 속한 자동차를 식별하는데 쓰이고 있다.
영거(링취) 약도. Baidu Baike
남정군의 감군이자 어사였던 록이라는 인물은 20만명의 병사들을 지휘해서 이강과 상강을 잇는 37Km에 달하는 운하가 뚤어냈다. 고대 전쟁에서 노르망디나 인천 상륙작전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타이인들에게 지정학적 우세가 사라지자 진제국의 압도적인 전력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영남은 진제국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누구도 인터넷을 군사적 전략자산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이 개발되던 무렵에는 적군의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은 통신망의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다. 조정혁은 전쟁이 민족을 조직했다라는 명제를 주장하고 있다. 전쟁은 동시에 신기술이 발명되고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새삼스러운 역사적 사실도 환기를 하고 싶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정권이다. 정권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면 정신적 장애가 있는 것이다. 전쟁 그 자체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규모 소비 행위다. 그러나 한편에서 국가적 단위에서 과학과 기술이 집대성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6. 서오우의 멸망의 동아시아 역사에서의 의미
타이족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타이인의 이동선. wikipedia 이미지
태국, 라오스, 광서의 좡족, 미얀마의 샨족의 조상이 되는 타이인들은 세계 최강이었던 진제국에 맞서 완강하게 10년을 버텨냈다. 결국 압도적인 전력차에 의해 전쟁의 승리는 진제국에 돌아갔다. 타이인들에게 두 가지 선택이 주어졌다. 정복을 받아들이는 부족과 떠나는 부족. 모든 약소 인족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타이인들은 이런 선택을 반복해야 했다. 진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떠나기로 한 부락민은 주강을 따라 운남으로 이주했다. 다른 일부는 오늘날의 베트남 북부 지역인 홍강 유역의 락월駱越지역으로 이주해서 다시 한 번 항전을 준비했다.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를 버릴 수 없었던 부족은 그 자리에 남아 대륙 정권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이들이 광서좡족자치구의 직계 조상이다. 진제국이 멸망한 이후 조타가 남월국을 세워 황제가 되면서 남월국의 주민이 되었고 대륙에서 내려온 객가 집단과 문명을 교환했다. 광서자치구의 좡족이 좡족의 원류이지만 대륙인들과의 문명 혼혈로 언어와 풍속에서 가장 많은 차이가 나게 되었다.
남정군은 진제국 멸망의 최대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제국의 국력은 백월전쟁으로 엄청나게 소모되었다. 6국을 병합하기 이전 시기에 진의 국력은 1년에 40만의 병력을 부양할 수 있었다. 진제국이 건설되면서 국력의 신장이 있었다하더라도 60만을 넘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남정 과정에서 주력군 30만을 잃게 되면서 부강한 진제국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출혈이 불가피했다. 양민이 아닌 ‘객가’가 조직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돌아갈 조국은 없었고, 식민지에서도 역시 주인이 아니라 ‘객客’家들인 남의 집 식구들이었다.
타이인들의 완장한 저항을 경험한 진의 조정은 양광 지역을 정복한 후 반항하는 세력에 대한 진압과 수습을 담당하는 숙군만을 남기고 나머지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았다. 이질적인 문명의 사람들을 포섭한 남해군, 계림군, 상군을 다스리기 위해서 50만명이 병력을 양광지역에 그대로 남겨두어야 했고 팽창주의 정책을 폈던 진의 조정은 비엣인들이 주류인 락월을 마저 정복해야만 했다.
진시황 영정이 죽고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났다. 진제국의 병력들이 북벌군 10만, 남정군으로 50만이 나가있으니 관중과 중원에 민란을 진압할 병력이 제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비상한 국면에 수도방위사령관 및 대장군이 된 사람이 장한章邯이었다. 그는 군 출신이 아니라 세금과 조정의 경비를 처리하는 조정의 관리였다. 장한은 죄수를 석방하여 병력으로 징집하는 안을 내서 조정의 승인을 받고 군을 편성해서 싸웠다. 그는 수도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초기 봉기군의 대부분을 격파하는 분전을 펼쳤다. 이것만으로도 진제국의 저력을 보여준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진제국의 불행은 봉기가 전국화 되기 전에 압도적인 무장력으로 신속하고 단호한 진압을 할 수 있는 중앙군의 정예 무장력이 없었다.
발굴된 남월국 황제의 수의 Baidu Baike
진의 조정은 사자들을 파견하여 남정군의 북상을 종용했으나 남정군 사령관 출신인 조타는 본토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결국 독립을 선택했다. 조타의 처지에서 보면 10여년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워 개척한 강토이고 자신이 건설한 국가로 여겼다. 게다가 조타의 정치적 기반인 객가 사회는 진제국에 빚을 진 사람들이 아니었고 신세계에 와서 목숨을 걸고 원주민과 싸우면서 겨우 정착한 마당에 내전이 일어난 본토로 돌아가 관중 방어 전투에 참가한다는 발상이 오히려 억지스럽다. 이것이 20세기까지 거대국가로서 중국에 존재했던 근본 문제였다. 무장한 지방 세력이 강해지면 독립한다는 공식.
남방 인족들의 북상이 저지되었다.
중국대륙의 동해안지역은 인도차이나의 원주민, 장강 유역의 몽과 미엔인, 타이인들이 북상하는 통로였다. 동시베리아와 연해주의 신화와 신앙, 풍속은 가까운 중국 대륙을 닮은 것이 아니라 남방을 닮아있다. 호랑이와 곰 토템도 마찬가지다. 극동까지 범위를 넓히지 않더라도 월인Viet들은 쉽게 양자강까지 북상할 수 있었다. 월왕 구천도 문신을 했다는 설이 있다. 대륙인들은 신체를 변형하거나 훼손하는 것에 대한 금기taboo가 있어 문신에 대해 거부감이 심한 인족이다. 오늘날까지 이런 전통이 이어져 축구 선수들에게 문신을 하지말라는 당의 지침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대륙인들이 남만南蠻이라고 멸시한 주요한 원인도 문신이었다.
진시황의 백월전쟁의 결과, 특히 서오우의 멸망으로 대륙인들이 양광지역을 점거하게 되면서 비엣인, 타이인, 이미 남하한 몽-미엔인들의 북상은 저지 되었다. 이미 북상해서 정착한 남방계들도 허리가 잘려 남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완전히 막혔다. 북과 남의 남방계 인족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복건성 지역의 주민들이 대만을 통해서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만 남게 되었다.
베트남에 대한 대륙 정권들의 천년 지배가 시작되는 시발점은 제3차 백월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조타가 세운 남월국에 의해 전개되었다. 조타정권은 남정군이 중심이 되고, 전쟁을 통해 이주해 온 군 출신의 객가 집단과 조타의 지배를 받아들인 토착민들이 융합하여 형성된 정권이었다. 중국은 남월국을 지방정권으로 베트남은 자신의 선조들이 세운 정권으로 볼 수 있는 나름의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 조타에게 묻는다면 뭐라할까. 짐朕의 국가, 짐의 강산이라고 답할 것 같다.
4. 서오우의 멸망으로 중국이 차이나China가 되었다.
진-오우 전쟁으로 전쟁 난민이 발생하면서 진제국의 존재는 동아시아는 물론 인도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인도인들을 통해서 진제국의 이름은 서양에까지 전파되었다. 중국의 원래 이름은 진(秦)인 들이 사는 땅이니 친秦-아, Chin-A였다. 이것을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 차이나다. 중국에 대한 한자 표기는 지나支那였다. 인도차이나는 인도지나印度地那. 진나라에 대한 평판은 정복을 당했던 인족들이 퍼트린 것이었으니 고을 수가 없었고 멸시의 뜻이 담겨있었다.
조정혁의 동아시아 문명 추리문학
남방신기의 타이문명편
진시황제에게 패배를 안겨준 태국과 라오스인의 조상편 끝
Image 출처
진시황제 영정의 얼굴. AI가 만든것. South China Morning Post
진시황 남평백월. 남정5군 동선. Baidu Baike
남령산맥 5령 위치. Baidu Baike
영거(링취) 약도 Baidu Baike
영거 모습 Baidu Baike
객가 마을 wikipedia
타이인의 이주 경로도 wikipedia
발굴된 남월국 황제의 수의 Baidu Baike
원문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166498&memberNo=9672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