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관성에 따라 환경변화에 두려움이 생기고 하나둘씩 기능이 떨어져가는 내 몸의 기관들을 느껴가며 언젠간 맞이할 이 땅으로 부터의 출구를 그려간다. 오늘 나는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
어떤 이의 의지에 의해 세상에 나온 후로 생존의 압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해 정신없이 지나온 삶의 길에 뿌려온 혼란과 쓰레기들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도 되지 않지만 적어도 기억의 둘레 안에 남아있는 어지러움 들은 내 힘과 의지가 허용되는 정도는 정리해 가야하지 않을까? 굳이 화장실에 적혀있는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글귀가 아니더라도 지난 삶을 돌아다 본적이 있는 이 라면 두드러기처럼 보여지는 부끄러움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고, 치열한 삶으로 예쁘게 포장해놓은 욕심이 낳은 이기심과 치졸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락되지 않은 지리산 자락의 능선을 달리며 지리산을 지키려 노력하는 공단직원과 숨바꼭질을 해가던 내가 가스통을 메고 성삼재에서 노고단산장에 올라와 백숙을 삶는 이들에게 손가락질하던 모습은 가증스럽기만 하다. 떠난 자리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내 조각들을 찾아 하나하나 지워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더 나은 길이 남아있는지 찾아가야할까? 그것도 아니면 내 모든 치부를 꺼내 세상에 드러내놓고 온갖 멸시와 창피를 당하는 벌을 받으며 나와 같이 어리석고 치사하게 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지켜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시간을 견뎌 왔을까? 나도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었고 남은 나의 삶을 살고 싶다. 행복에 무엇이 필요할까? 뭐니 뭐니 해도 돈이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지만 주위에는 유교적 청렴의식으로 돈을 벌기위해 노력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현재 주어진 나의 능력은 이 사회가 나에게 투자한 결과라 생각하기에 투자자에게 대한 나의 의무를 버리고 무욕의 삶의 사는 것은 그들에 대한 배신은 아닐까 생각한다. 치열하게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면 돈을 버는 일이 쉬운 길 아닐까? 돈을 벌기위해 자유와 시간을 내 줄 수밖에 없다면 나는 행복할까? 그렇다고 돈을 벌기위해 자유를 포기한다는 건 돈벌이 도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쉼과 느림을 즐길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행복할 자신이 없다. 세상에 참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적당히”는 또 어떤가? 돈과 자유와 시간을 적당하게 나눌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순간 일어난 모든 일들은 내게 선택을 강요하고 시간의 등에 떠밀려서라도 나는 선택을 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는 현재의 나의 모습이고 지금 이순간의 선택은 또 미래의 내 모습을 결정해 갈 것이다.
어떤 이는 행복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내려놓는다.”라 하지만 포기라고 이해되어선 안 될 것이다. 혹시 자신은 행복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것의 자극을 견뎌 무뎌지는 내가 되는 것으로 행복을 찾게 된다면 어느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타인에겐 괴로움을 강요하는 일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부를 한다.
현재 내게 다가온 일들이 자신에 득인지 실인지 확인할 수 있는 혜안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고 그 혜택을 원한다. 하지만 세상일들은 그렇게 단순함만으로 내게 오지는 않는다. 거기엔 내 맘이라는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즐겁고…….
다가온 사건에 내 마음의 사칙연산(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이 선택의 결과를 결정해가리라 생각한다. (+)에 (-)를 곱한다면 득이 될 일일까? 내 마음의 절대 값을 크게 만들었다고 좋은 결과만 나타날까? 나누면 오히려 작아 질 것을…….
이런 복잡함과 어려움 속에서 숨을 쉴 나의 휴식처이고, 아주 작게 변해버린 내 마음을 마주할 수 있는 그 곳이며, 혀 짧은 영어 몇 마디로 몸을 숨기고, 늘어져버린 얼룩진 셔츠의 목선에도 당당히 얼굴 들고 웃을 수 있는 인연의 실타래를 모두 끊어 낸 그 순간의 그리움에 나는 오늘 열대의 밤을 그린다.
내 마음을 모두 비워낼 수 있다면 모든 선택의 곱을 0으로 만들 수 있고, 모든 나눔을 무한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세상의 끝에 도착하면 될 일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