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버버리 우리 형님을 생각하면서...............

작성자김형선|작성시간14.12.24|조회수36 목록 댓글 0

제 1 편 버버리 우리 형님을 생각하면서...............

2014년도 이제 며칠이 남지 않았다.

연말이 오면 바쁜 사람도 많지만, 오히려 할 일이 없어 고달픈 사람도 있고, 쓸쓸한 사람도 참 많더라.

필자는 평소 바빠서 못했던 일들을 연말연시나, 명절 연휴 때 몰아서 처리하는 습관이 있다. 글을 정리하다가 마음을 울리는 글이 있어 올려 본다. 

혹여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들은 끝까지 읽어 보시면 참 좋겠다! 

포항공대 재학생이 달려오는 차량 앞에 서있던 어린이를 구하고, 자신은 하늘나라로 갔다. 어린이는 무사하다. 아래 글은 그 학생의 남동생이 형을 그리며 쓴 글이다. 글이 길어 3편으로 나누어 1편 어머니,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2편 인연은 정해져 있다. "3편 천사는 이 땅에 오래 있지 않는다.” 로 나누어 게재하고자 한다.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애타게 그려 봅니다.......

 

 

 

1편은 12월 23, 2편은 12월24, 3편은 12월25일 올려 드리겠다.

글을 쓴 동생은 서울 Y대학교에 재학중이라고 한다.

글쓴이의 뜻을 살리기 위해 원문 그대로 올리고자 한다.

원작자의 허락 없이 쓴 글이니 그리 아시고 지루해도 끝까지 읽으시고,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인생지침서로 삼으시면 참 좋겠다는 김형선의 마음이다.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애타게 그려 봅니다.......

 

 

형을 그리는 동생의 글

우리 형은 언청이였다. 어려운 말로는 구개열이라고도 하는데 입천정이 벌어져서 태어나는 선천성 기형의 한 종류였다. 세상에 태어난 형을 처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머니의 젖꼭지가 아니라 차가운 주사바늘이었다. 형은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아야 했고 남들은 그리 쉽게 무는 어머니의 젖꼭지도 태어나고 몇날 며칠이나 지난 후에야 물 수 있었다.

 

형의 어렸을 때 별명은 방 귀신이었다. 허구헌 날 밖에도 안 나오고 방에서만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하기는 밖에 나와 봐야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나 되기 일쑤였으니 나로서는 차라리 그런 형이 그저 집안에만 있어 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나는 그런 형이 챙피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형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비록 어렸을 때였으나 수술실로 형을 들여보내고 나서 수술실 밖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기도드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형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니 은근히 형에 대한 질투심이 들었다. 어머님이 그렇게 기도드리던 그 순간만큼은 저안에서 수술 받고 있는 사람이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하고 바랬던 것 같다. 어머니는 솔직히 나보다 형을 더 좋아했다.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애타게 그려 봅니다.......

 

 

​버벅거린다고 버버리라 놀려댔던 내 자신이 .........

가끔씩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속에서 항상 형은 착하고 순한 아이였고 나는 어쩔수 없는 장난꾸러기였다. "그네를 태우면 형은 즐겁게 잘 탔었는데 너는 울고 제자리에서 빙 빙 돌다가 넘어지고 그랬지..."형은 나보다 한해 먼저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수술 자국을 숨기기 위해 아침마다 어머니는 하얀 반창고를 형의 입술 위에다가 붙여 주시고는 했다.

 

나 같으면 그 꼴을 하고서는 챙피해서 학교에 못갈 텐데 형은 아무 소리도 않고 매일 아침 등교 길에 올랐다. 형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잘 몰랐지만 아마 고생께나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형에게는 말을 더듬는 버릇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형을 걱정해주기는커녕 말할 때마다 버벅거린다고 버버리`라고 놀리고 그랬다. 형이라는 말대신 버버리라고 불렀고 내딴에는 그말이 참 재미있는 말로 생각되었다.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애타게 그려 봅니다.......

어머니가 있는 자리에서는 무서워서 감히 버버리란 말을 못 썼지만 형하구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버버리 버버리, 이렇게 부르곤 했다. 형은 공부를 잘했다. 항상 반에서 일등을 하였다. 비록 한 학년 차이가 나긴 했지만 형의 성적표는 나보다 항상 조금 더 잘 나오곤 했다. 어쩌면 그런 형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에서 더 그런 말을 쓰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형이 어머니에게 무진장 매 맞은 적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한참 만화와 오락에 빠져 있었는데 항상 용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매일 밤 어머니의 지갑에서 몇백 원씩을 슬쩍하고는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간 크게도 어머니의 지갑에서 오천원이나 훔쳐서 (그 옛날오천원은 참 큰돈이었다) 텔레비젼 위의 덮개밑에 숨겨 두었는데 그게 아침에 발각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당연히 나를 의심했다.

 

어머니는 무서운 분이었다. 게다가 그 며칠 전부터 돈 문제로 고민하고 계셨던 어머니였던지라 두려운 마음에 나는 절대 그런 적이 없었다고 철저하게잡아 땠다. 다음에 어머니는 형을 추궁했다. 형은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줄 몰라 했다. 찰라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염치없게도 형의 대답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그 위기를 빠져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형은 어머니에게 잘못했다고 말했다.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애타게 그려 봅니다.......

 

나 때문에 죽도록 매 맞고 부르르 떨던 우리 형....... 

 

어머니는 믿었던 형이었기에 더욱 더 화가 나셨고 나는 죽도록 어머니에 게매맞고 있던 형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형이 그렇게 매를 맞는 모습을 보니 철없던 내 마음에도 형에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버리고서 방 한구석에 엎드려 있던 형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형은 숨조차 고르게 쉬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형은 국민학교 5학년 때 세 번 째 수술을 받았다. 그 후로는 입술위에반창고 붙이는 짓은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말더듬는 버릇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형에게 버버리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TV에서 `언청이`란 말을 처음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얼마 후에 그말이 바로 우리형과 같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희귀한 단어를 알게 된 게 참 신기했다.

 

그리고, 며칠 후 형에게 버버리대신 언청이라는 말을 썼다. 그 말을 들은 형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 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 한 표정으로 듣고 있더니 내 머리에 꿀밤을 먹이면서 "그 말을 이제 알았 구나?" 하며 웃어주었다. 웬지 그런 형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형에게 다시는 언청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다닐 적 어버이날 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방안에서 소리 없이 울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편지 같은걸 읽으시면서 울고 계셨다. 어머니는 잠시 후 그 편지를 어느 조금은 초라하게 생긴 핸드백 안에 넣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방을 나가신 후 그 핸드백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조금 빛바랜 편지봉투부터 쓴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편지까지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지금 막 읽으셨던 듯한 편지를 꺼냈다. 형이 쓴 편지였다. 형이 매해 어버이날마다 썼던 편지를 어머니는 그렇게 모아놓고 계셨던것이었다. 편지내용을 읽어보고는 나는 왜 그토록 어머니가 형을 사랑하고 형에게 집착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형처럼 태어났다면 나는 나를 그렇게 낳은 부모를 원망 하고 미워했을 텐데 형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자기가 그렇게 태어남으로 해서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셨을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또 위로하고 있었다.

 

어느덧 한해가 또 지나고 형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 나도 중학교에 올라갔는데 한집에서 살고 있음에도 형과 나는 다른 학교를 배정받았다. 형은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항상 1등을 했다. 나도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는데 항상 형보다는 조금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형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씩 형의 일기를 훔쳐보곤 했는데 형은 시인이었던 것같다. 형이 지은 시는 이해하기가 참 쉬웠다. 교과서에 실린 시들처럼 복잡한 비유나 은유같은 것도 없었고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그런 시를 많이 썼다. 그런데,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맴도는 그런 시들이었다.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애타게 그려 봅니다.......

형은 마음을 써 내려간 진솔된 시인이었다.

나는 형이 썼던 시들을 참 좋아했다. 형의 영향으로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쌍밤`이라는 문학써클에 가입하게 되었다. 연합써클이라 여학생들도 참 많았다. 한집에 사는데도 불구하고 중학교는 형과 다른 곳을 다녔는데 고등학교에서는 형과 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때 갑자기 키가 부쩍 자라 형보다 10cm는 더 크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얼굴도 어디를 가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 생겨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는 형이 불쌍했다. 키도 작지, 그렇다고 얼굴이 잘생겼기를 하나, 말을 잘하나, 형을 보며 나는 무언가 우월감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거에 형은 전혀 무감각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처럼 보였다. 어느 맑은 가을날이었다. 집을 나서는데 참새 한마리가 대문 앞에 죽어 있었다. 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서 착한 일한답시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나왔다. 참새를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다. 그 때 형이 대문을 나왔다.

 

나는 형이 칭찬해 줄 것으로 알고 잔뜩 기대했는데 형은 모처럼 착한일 하려고 하는 나를 만류했다. 그러더니, 손수건을 꺼내 그 죽은 새를 담더니 집 뒤의 야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 늦을까봐 미리 집을 나섰다. 형은 그날 지각을 해서 운동장에서 기합을 받았다.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형에게 참새는 어떻게 했냐구 물어보니까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참새를 묻어 주고 나서 기도를 했다고 했다. 나는 내심 그깟 죽은 새한마리 땅에 묻고 나서 기도는 무슨 기도냐며 그래도 궁금해 형에게 뭐라고 기도했냐구 물었더니 형은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만약 이 다음 어느 생엔가 내가 오늘의 너처럼 어느 집 앞에 쓸쓸히 죽어 누워있으면 그때는 니가 나를 거두어주렴.......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애타게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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