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공대생의 인생칼럼 2편) 인연은 정해져 있다.

작성자김형선|작성시간14.12.26|조회수64 목록 댓글 0

(포항공대생의 인생칼럼 2편) 인연은 정해져 있다.

 

포항공대 재학생이 달려오는 차량 앞에 서있던 어린이를 구하고, 자신은 하늘나라로 갔다. 어린이는 무사하다. 아래 글은 그 학생의 남동생이 형을 그리며 쓴 글이다. 글이 길어 3편으로 나누어

1편 어머니,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제2편 인연은 정해져 있다.

"3편 천사는 이 땅에 오래 있지 않는다.” 로 나누어 게재하고자 한다.

 

 

 

포항공대생은 타고날 때부터 언청이였다. 수없이 수술을 받아가면서 열심히 공부만 하는 착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 글을 쓴 바로 밑 남동생은 인물도 잘 났고, 인기도 좋고, 공부도 잘 한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형을 시기하고 질투했으나, 커 가면서 형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형은 공부를 아주 잘한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을 도와줬고,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줬다. 어머니의 분신은 형이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형,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은 다 귀한 것이다. 이 세상 자녀들이여! 부모에게 관심을 가져라. 그리고 부모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려라.

 

 

 


고기반찬은 한 끼 뿐이요. 기쁨은 평생 가지고 가는 것이다. 아픈 곳은 없으신지 항시 관심을 갖는 자녀들 좋아하신다. 그리고 늘 주물러 드리고 뽀뽀도 해드려라. 부모는 자녀보다 손자. 손녀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손주들과 같이 사는 노인들은 치매 걱정이 없단다. 2편 글을 올려 드린다.

 

 

형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또 수술을 받았다. 정말 그 놈의 수술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 말로는 형의 수술비로 집 한 채 값이 날아갔다고 한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일 년에 두 번씩 이사를 다녔다. 우리 집을 가지는 게 소원이었다. 거기다가 형의 수술비까지 대느라 언제나 쪼들렸다. 아버지가 벌어 오시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돈놀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다. 쉽게 말해서 고리대금업이었는데 어머니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셨다. 채무자들을 어쩔 때는 참 심하다싶게 몰아 부치시기도 하였다. 부동산에도 손을 대셔서 지금 있는 집도 장만하시고 그러셨다. 어머니는 참 지독하셨다. 그리고 너무 돈에 집착하고 그랬다.

 

극장도 한번 안 가셨다. 극장가서 영화 볼 돈 있으면 차라리 맛있는 걸 사먹는 게 낫다는 주의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형은 항상 마음 아파했다.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저렇게 되셨다는 것이었다. 형은 어머니에게 누가 될 만한 일은 한 번도 해본일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랬다. 하지만, 그런 형에게도 어머니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형은 거의 돈을 쓰지 않았는데 그런 형도 돈을 쓰는 곳이 한군데 있었다. 길에서 거지를 보면 없는 돈에도 항상 얼마씩을 주고는 했다.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옆에서 아무리 저런 사람들 도와줘 봤자 하나 소용없는 짓이라고 설교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형의 행위를 어머니에게 일러바치면 어머니는 형을 참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는 하셨다. 돈이라는 게 얼마나 피나게 모아야하는 건데 저러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형에게 항상 무서운 세상에 대해서 말하시곤 했다. 그러면서, 말끝머리에는 항상 "너는 공부 못하면 시체야..." 이런 말을 붙이시고는 했다. 형은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것일까...?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형이 자기 자신 때문에 뭘 걱정하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곁에 항상 여자가 많아서 용돈이 부족하고는 했다. 좀 부족하긴 했지만 어렸을 적처럼 어머니 지갑을 뒤지진 않았다. 형이 나 때문에 그렇게 모진 매를 맞았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또 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해 겨울 우리 집에 경사가 하나 났다. 형이 대학에 합격한 것이었다. 그런데, 형은 서울의 좋다하는 대학을 다 마다하고 지방에 있는 P공대를 지망해서 합격했다. 나는 참 알 수가 없었다. 서울이 얼마나 놀기가 좋은데 그 외진 데까지 찾아가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형이 서울을 떠나던 날... 나는 그때까지 어머니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보이시는 건 처음 봤다. 형이 떠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손수건이 눈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보기 싫어 그날은 혼자서 시내를 배회하다가 집에 돌아왔다.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형이 없어지니까 집안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은 자주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어버이날 마다 선물을 들고 집에를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형은 어머니 생일날에는 선물을 하지 않았다. 꼭 어버이날 그렇게 선물을 들고 오고는 했다. 참 아직까지 말하지 않은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형하고 어머니는 생일이 같다. 어머니말로는 예정일을 보름이나 앞당겨서 태어나면서 어머니의 생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띠까지 같았다.

 

그러기도 참 힘들 거 같은데 어쨌든 형하고 어머니는 전생의 인연이 참 깊었었나보다. 형은 어머니 생일날 태어난 걸 항상 어머니에게 미안하게 생각했다. 즐거워야할 어머니의 생일날 자신이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태어나 어머니를 슬프게 한 것이 그렇게 마음에 못이 되었었나보다.

 

그러고 보니 형은 백일 사진도 없고 돐 사진도 없다. 언젠가는 형이 어버이날 어머니 선물로 비싼 지갑을 사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도 참 그 선물을 보시고는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지갑은 벌써 하나 있는데 가서 다른 걸루 바꿔올 수 없나?" 그런 말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형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후 그 지갑 을 항상 곁에 지니며 다니셨다. 마치 형의 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은 대학교 2학년 겨울에 또 수술을 받았다. 정말 끝이 없을 것 같던 형의 수술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때는 집안도 넉넉해져서 형의 수술비용이 별로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수술 일자가 개강과 이상하게 맞물려서 형은 할수 없이 한 학기 동안 휴학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다. 형의 얼굴도 많은 수술 덕분인지 약간의 수술 자국을 제외하고는 어느새 정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형과 이십년 넘게 살아오면서 형의 얼굴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학력고사에 한번 낙방했던 나도 힘든 재수 끝에 용케 Y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해 3월부터 8월까지 우리 집은 참 행복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렸을 적 형이 매맞았던 사건에 대해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어머니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시며 형과 나를 바라보셨다.

 

형은 밤마다 어머니가 잠드실 때까지 어깨며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는 했다. 어머니는 나보다 형이 주물러 드리는 걸 더 좋아했다. 형이 안마를 해주면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어머니는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라도 형만 옆에 있으면 행복해했을 것이다.

제 3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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