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후 고구려
서기 660년.
나. 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
서기 668년.
주변의 우호국들을 하나씩 잃기 시작한 고구려는 제국 帝國의 위용 威容을 잃어버리고,
당시 절대권력자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다툼으로 인한 자체 내분으로 멸망한다.
고구려가 당에 멸망하자, 고구려의 많은 유민 遺民들은 망국 亡國의 비통 悲痛함을 가슴속에 묻고
우호국 友好國인 돌궐로 피신한다.
엄연히 형제 국가다.
고대로 올라가면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우리의 삼국시대에는 이웃한 지역에서 서로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마음과 이념으로 공동의 적을 상대하였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순수 혈통의 동이족 다수 多數가 또다시, 돌궐로 흘러들어 합류하였다.
서기 733년
마도산 전투
걸걸중상(乞乞仲象, 629년?~698년)과 그 아들 대조영이 이끈, 말갈족이 큰 축을 이룬 고구려 유민과
요하 遼河의 영주에서 거병 擧兵하여 거란을 독립시킨 이진충의 뒤를 이은 손만영 추장의 거란군,
그리고 돌궐군이 연합하여 천문령 天門嶺에서 당군을 격파한다.
마도산 전투에서 발해, 거란, 돌궐 연합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여 주력군 主力軍을 잃어버린 당나라의
측천무후 則天武后는 어쩔 수 없이 대조영이 이끌고 있던 ‘후고구려’를 '대진국 大震國'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걸걸중상은 고구려의 유민을 결집하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 형성되자, 처음에는 ‘후 고려’라 자칭 自稱하였다.
그러자, 唐 당은 죽기 살기로 전력을 다하여 후고구려를 집중 공격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의 보잘것없었던 짧은 역사와 유구 悠久한 고구려는 비교조차 하기 힘든 엄청난 연륜의 차이를 보인다.
그동안 대륙에서 명멸한 많은 나라들은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하여 갖가지 전략 전술을 동원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나라가 망할 때까지 노심초사 勞心焦思하며 전력투구 全力投球하였던 나라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웅혼한 고구려 제국으로 인하여 명멸하였으며, 당의 황제에 오른 이세민도
이판사판의 도박하는 심정으로 전력을 다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그런데,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 그 트라우마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 지역에 또다시 ‘후고구려’가 등장하다니,
당나라에서는 꺼지지 않는 그 강인한 생명력에 대단한 충격을 받고 심적 心的으로 허탈 虛脫에 빠졌다.
고구려를 표방하는 그 불씨를 초기에 진압하고자 갖은 노력을 경주 傾注하였다.
그러나 주력군을 보내고도 마도산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달래보기도 하고 으르기도 하였으나 여의치 아니하자, 무력으로 제압하고자 군 軍을 동원하였으나,
도리어 처참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어찌할 수 없는 고구려의 그 끈질긴 생명력.
그래서 고심하던 당의 조정대신 朝廷大臣 신료 臣僚들은 마음을 추스리고 별도의 전략을 세운다.
‘국명 國名만이라도 다르게 바꾸어 보자’
그 지역과 그곳 사람들의 의식과 정신은 ‘고구려’와 같지만, 나라 이름이나마 다르게 표현하자는
의견이 아암리에 조용히 대두되었다.
그래서 전시 戰時 중이지만, 사신을 후고려에 보내어, “국명만 ‘발해’로 바꾸면 새로운 나라로 인정 해주고,
더 이상 다툼하지 않겠다”라는 약조 約條를 은밀하게 제시하였다. 그러자 마도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나름 그간의 전투에 지친 연합군들은 그 제의에 귀가 솔깃하였다.
자연스럽게 그 휴전 제의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미 큰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내었으니, 소기 所期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에서
하긴, 나라 이름 한 가지로 전쟁을 끝낼지, 아니면 자국 병사들의 충성스러운 소중한 붉은 피를 흘릴 전투를
지속할지를 결정할 그 선택은 단순하였다.
그 단순한 제의를 거절하기에는 수많은 휘하 麾下 병사들의 귀중한 목숨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이기도 하였고
또, 전투를 고집하며 당과 계속 대립하기에는 명분이 약하였다.
대조영도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연합군의 의견을 무시만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하여
당의 휴전 休戰 조건을 묵인 默認한다.
그러니 발해의 초기 국명이 여러 가지로 문헌 文獻 상에 나타나게 된다.
이후 당의 조정과 신라에서는 ‘후고구려’를 ‘발해’로 통칭 通稱하였고, 비로소 그동안 여러 가지로 억압받았던
거대한 고구려의 그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스스로 자기 위안을 삼았다.
특이한 것은 우리가 현재 ‘발해’라고 부르고 있는 ‘발해’에서는 스스로 발해라고 호칭하지 아니하고
‘고려’ ‘후고구려’ ‘후고려’ ‘진국’ ‘대진국’ 등 다양하게 호칭하고 있었다.
거란에서는 발해를 '단 구르(dan gur)' 혹은 '모시 구르(mos-i gur)'라고 불렀다고 하며, 이 중 '단 구르'라는
국명이 동단국의 어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발해인 본인들이 자국을 '단'이라고 불렀는지,
아니면 거란인만이 부르는 칭호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 倭’에서는 ‘발해’를 칭할 때 ‘고려’라는 국명으로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인정하는 호칭이다.
돌궐과의 친밀한 역사적인 교류와 연합전선을 이룬 혈맹 血盟의 동지 同志.
중화사상 中華思想에 동화 同化되고, 사대주의 事大主義에 물들었던 우리만 몰랐던 사실이다.
현재, 유럽인들은 터키인들을 백인계보다는 아시아계 인종으로 여기고 있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터키인들의 겉모습은 아시아계보다 유럽 백인계에 조금 더 가까워 보인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 흑인에서 백인이 갈라져 나왔고, 그 직후에 황인종이 갈라져 나왔다.
생명체의 모든 유전인자 遺傳因子는 동. 식물을 막론하고,
본래 갖고 있던 유전인자(DNA)로 되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을 갖고 있다.
동물이나 식물 가리지 아니하고, 교잡 개량한 품종 중에서도 몇 세대나 흐른 이후,
어느 날 갑자기 먼 선대 先代의 고유한 특징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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