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3MR/76 황영철 [구약의 중생] 사계四季 | 조회 67 |추천 0 | 2013.06.13. 19:53 긴 강설이니, 성신님의 조명을 구하며 차분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제7강 구약의 중생 황영철 목사 2013년 5월 5일, 성의교회 주일예배 강설 중생의 원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함.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구약 성경에서 중생의 도리를 배워 알고 있었어야 했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할례를 통해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내용은 모세 율법에서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났음.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만이 모세 율법을 지킬 수 있었음.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자랑한 것은 불신앙이었음.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음.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새 언약, 곧 마음의 할례를 약속하심.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서에서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가르치심. 새 언약은 성신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는 언약임. 이와 같이 구약 성경은 마음의 할례, 곧 물과 성신으로 거듭나는 도리, 중생의 도리를 가르침. 그런데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니고데모는 이 도리를 모르고 있었음. 성경 본문: [에스겔] 36장 22절~28절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내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오늘은 구약에서 가르친 중생의 도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봤듯이 아담의 후손으로 죄와 저주 가운데서 출생한 사람은 누구나 중생해야 만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중생의 원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함. 중생해야 한다는 이 규칙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적용되지 않을까요? “구약에서는 중생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율법을 지켜야 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도 역시 중생해야 했습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원리가 구약에도 적용됩니다. 그들도 역시 성신으로 중생해 영생,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는 아니었지만, 그 중에 중생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구약에서 이뤄진 방식과 신약에서 이뤄 방식이 달라서 구분해야 하는 내용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중생이라는 원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그 나라 백성으로 들어가서 살았던 사람들은 중생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구약 성경에서 중생의 도리를 배워 알고 있었어야 했음. 주님과 니고데모 대화에서도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시던 중에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10절에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중생의 도리를 알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그가 백성을 바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중생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의문이 듭니다. 만약 그가 중생의 도리에 대해 알고 있었어야 했다면, 어디서 그것을 배웠어야 했을까요? 대답은 자명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그것을 배웠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니고데모가 알아야 했지만 알지 못하고 있던 도리, 곧 구약에서 가르친 중생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할례를 통해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심. 구약은 할례를 통해서 중생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다음과 같이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 9절에서 11절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이 명령에 따르면 할례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대대로 지켜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할례가 남기는 흔적은 언약의 표징입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갔다는 물질적 증거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항상 상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할례를 받기만 하면 영원한 언약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할례를 받는 것 자체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가 확립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 언약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언약의 전부가 아닙니다. 할례 이외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하는 다른 언약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7장 1절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이것도 언약의 내용에 포함됩니다. 또한 창세기 18장 19절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해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내용은 양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행위 완전하고 의와 공도를 행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언약의 양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지키기만 하면 그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 중에서도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모든 이방 민족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이런 언약 관계 가운데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예식이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내용은 모세 율법에서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났음.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이 모세 율법에서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통해서 언약 가운데 들어간 아브라함의 후손은 율법으로 주신 언약의 조항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지게 됩니다. 그것이 할례의 궁극적 의미입니다.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그 언약에 신실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신실성은 율법 준수를 통해서 구현돼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지킨다면 그들은 할례의 정신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할례를 받고도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할례의 정신에 역행하는 것이며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약속이 깨지면 계약서는 종이조각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것이 할례의 기능이요 뜻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에 충실해 하나님의 법을 순종했을까요?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의 모든 내용을 지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고, 그 백성을 수가 많고 크고 강한 민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편에서는 모세를 통해 내려주신 율법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불신실함이 출애굽해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언약에 충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과 열 두 아들을 보호해 애굽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당시 그들 전체 인구는 70 여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실 때에는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장정의 숫자만 603,550 명이었습니다. 전체 인구를 따지면 줄잡아 250만 명에서 300만 명 정도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 인수를 크게 늘려주셨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싸움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강한 군대가 됐습니다. 광야에서 율법을 내려 주셨고, 제사 제도를 확립해 주셨고, 하나님께서는 쉐키나의 구름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언약에 불충실했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그들이 충실하게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계속해서 언약에 불충실했고, 결국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넘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이었던 사람 중에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는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만이 모세 율법을 지킬 수 있었음. 이런 사실 앞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언약의 표로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언약을 지키지 않아 약속의 땅에 도달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갔다면 그들에게 할례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10장 12절에서 16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해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해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요단 동편을 전부 점령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공격할 준비를 하는 히브리 사람들입니다. 지난 40 년 광야를 방황하던 동안에 죽어야 할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20세 이하였거나 광야에서 출생한 사람들에게 모세가 율법을 다시 설명한 것이 신명기입니다. 방금 읽은 구절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규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목을 곧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마음의 할례’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자랑한 것은 불신앙이었음.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음. 그러면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우선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에 대해 보겠습니다. 신명기 29장 1절에서 4절을 읽겠습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봤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했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에 보여준 기이한 불순종과 반역의 원인을 밝히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을 무수히 경험했습니다. 열 가지 재앙, 홍해 물이 갈라지는 것, 애굽 군대가 그 물에 몰살당하는 것, 만나,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 같은, 그들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능력과 기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만 발생한 일이 아닙니다. 신약에도 이와 똑 같은 일이 반복됐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발생한 일이 그것입니다. 광야에서 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많은 음식이 남는 기적이 일어나자 그것을 본 백성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입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표적을 못봤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표적이었습니다. 곧 무엇인가를 가리켜 보여주는 표지판과 같은 것입니다. 그 기적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이런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겠는가? 그분께서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표적으로 정확하게 본 사람은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실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도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에 숨은 뜻을 볼 눈이 없었습니다. 깨닫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이 곧았고 말씀을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볼 눈도, 생명의 말씀을 순종할 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새 언약, 곧 마음의 할례를 약속하심.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께서는 예레미야 4장 4절에서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해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6장 10절에서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생명의 말씀이 그들에게 욕으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보여준 이 암매와 맹목과 불순종은 이스라엘에게 앞으로 임할 하나님 심판의 전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신명기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주셨습니다. 신명기 30장 1절에서 8절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 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로 임하게 하시리니,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신명기의 이 예언은 뒤에 그대로 실현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구절이 6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것은 앞에서 본 신명기 10장 12절에서 16절 말씀의 반복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얻는 길은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이 일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 일을 여호와께서 하실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해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었던 이스라엘 성인은 지난 40 년 동안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 말을 듣는 이 회중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면 동일한 일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 후손들 역시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해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이방인에게 붙들려 갈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하나님은 그들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 육신의 할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대답이 예레미야 9장 25절, 26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해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서에서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가르치심. 이 말씀은 육신에만 할례를 받고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은 전혀 할례를 받지 않은 것과 아무 다를 것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못한 열국과 할례를 받은 유다가 함께 벌을 받습니다. 결국 관건은 마음의 할례이지 육신의 할례가 아닙니다. 이 중요한 진리를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서에서 훌륭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로마서 2장 28절, 29절입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니라.”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위해 하기로 약속한 모든 일들을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도 자기들에게 주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백성은 그 언약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언약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육신에 할례를 받았으나 그 약속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 할례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됐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망해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언약에 충실하게 행동해도 백성이 불충실합니다. 그들 마음이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서 시작됐던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4절에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됐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했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해 나는 그들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 언약은 성신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는 언약임.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미래의 어떤 날이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새 언약을 세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은 이전의 언약과 다른 특성을 가집니다. 곧 ‘하나님의 법이 그들 마음에 기록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법이 마음에 기록되면 그 마음은 이전 마음과 다르게 될 것입니다. ‘법이 마음에 기록된다는 것은 그 마음이 법에 합당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그들이 기쁨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것입니다. 그 법을 지키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게 될 것입니다. 법과 마음이 어울리게 됐으니 그 법을 거슬리는 것을 마음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동일한 내용을 에스겔 선지자께서도 에스겔 36장 23절부터 27절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데, 그 중에서 25절에서 2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구절이 특별히 우리 주의를 끄는 것은 여기에 물과 성신께서 함께 등장하는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결과 열국 중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더럽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견디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건지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훌륭하거나 쓸모가 있어 건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수치를 당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열국 중에서 그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방인과 섞이고 우상을 섬긴 까닭에 이방에서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므로 물로 그들의 더러움을 씻어야 합니다. 이렇게 씻은 다음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줘 새 마음을 주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해법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 성경은 마음의 할례, 곧 물과 성신으로 거듭나는 도리, 중생의 도리를 가르침. 그런데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니고데모는 이 도리를 모르고 있었음. 이제 우리는 왜 니고데모가 ‘물과 성신으로 거듭난다.’는 주님의 교훈을 알고 있었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구약은 물과 성신으로 거듭나는 도리를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 중생이야 말로 사람의 마음이 부패하고 악하여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절망을 해결해 줍니다. 이와 같이 중생은 언약과 연결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과 거룩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내를 사랑하는 충실한 남편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위해 약속한 모든 좋은 것들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부정한 아내처럼 그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생명의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게 하려고 할례까지 행하게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행하고서도 언약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 선지자를 부지런히 보내 가르치고 꾸짖으시면서 그들의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을 그 상태대로 놔두면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임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해답은 하나님께서 성신을 보내 그들 마음을 아주 바꿔 버리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셔서 그들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소원으로 삼게 만들어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먼저 물로 그들의 더러움을 씻어야 하셨고 성신으로 그들을 새 사람으로 만드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법을 지켜서 지상에 하나님께서 세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설 것입니다. 결론으로, 중생의 도리는 구약의 역사 속에서 마음의 할례라는 말로 충분히 가르쳐졌습니다. 그리고 중생이 왜 필요하며 무엇과 연결되는지도 분명해졌습니다. 사람은 중생해야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섭니다. 그렇게 돼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그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중생을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신 까닭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배울 진리는 이것입니다. 지금까지 중생을 다룰 때에는 대개 한 개인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과 연결했습니다. 하지만 중생은 언약의 순종, 하나님 나라와 연결돼 있습니다. 중생은 그런 빛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최후의 관건은 마음이 새로워져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중생의 사실은 종교적인 생활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생활로 입증됩니다. *** 소제목은 제가 지었습니다. *** *** 제가 문장을 다듬어 고친 곳도 있습니다. *** 댓글 6 고경태 13.06.13. 23:17 제가 무리를 일으키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1) 저는 중생의 원리가 틀리다고 말한 적은 없고, 항상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2) 황영철 목사님은 중생의 시여자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혹 중생의 시여자가 ‘성령’이라고 한다면, 구원 협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구원의 작정, 구원의 실행(시여), 구원의 적용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할 수 있고, 구속주는 오직 2위 하나님께만 귀속하는 것이 정통 신학입니다. 즉 구주는 예수이시며, 백성에게 성령을 파송하시어 구원을 이룹니다. 성령께서 단독적으로 마음의 할례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주는 분은 주님입니다 고경태 13.06.13. 23:24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 황영철 목사님은 주님의 교훈이라고 말을 흘러가는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주체를 말해줘야 명확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사계四季 13.06.15. 00:47 1) ‘중생의 원리는 물과 성신으로’[요 3:5. 요 1:33 참고]입니다. 그런데 고경태 목사님께서는 “중생의 원리는 항상 동일하다.”고 하셨습니다. ① “이 말씀은 구약 성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인지, 오직 오순절 성신 강림 이후 성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인지?”를 여쭈고 싶습니다. ② “오순절 이후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면 주님의 제자들과 삭개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 중생자들이 아니었다는 말씀인지?”를 여쭈고 싶습니다. ┗ 사계四季 13.06.15. 00:47 ③ “그들이 중생자들이었다면 성부께 보내심을 받은 성신께서는 그들을 중생케만 하시고 다시 떠나셨다는 뜻인지?”를 여쭈고 싶습니다. ④ 아니면, “그들은 중생자들이 아니었고 ‘중생=성령의 영원하신 내주=성령 세례’ 보증서로 기능하는 물세례만 받은 자들었다는 뜻인지?’를 여쭈고 싶습니다. ⑤ 위 4번 답변이 가능하다면, 또 여쭈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만, 이 질문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사계四季 13.06.15. 00:47 2) “혹 중생의 시여자가 성령이라고 한다면, 구원 협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중생은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중생의 주체자는 성삼위 하나님이시다. 즉, 구속주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혁 신학이 이를 엄밀하게 구분해 말할 때는 “구속주는 성삼위 하나님이신데, 대속물이 되신 구속주는 성자이시다.”고 말합니다. ┗ 사계四季 13.06.15. 00:47 또한 저는 ‘성신께서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는 분이시지만, 성신 하나님께서는 중생의 주체자[기독교강요 제1권 제14장 제14항]이시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엄밀하게 구분해 말씀 드리자면, 대속물이 되신 구속주는 성자이시듯이 중생케 하시는 분은, 즉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의 구속을 예정된 자들에게 적용하시는 분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