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주의Pharisaism(형식주의形式主義): ‘사랑’이 율법의 대강령이건만, 율법의 ‘본질(내용)’인 ‘사랑’을 경시하고 율법의 ‘겉’인 의식법 같은 ‘외형’만을 중시하는 주의主義.
{바른 믿음} 정이철 <정이철 목사의 신간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 출간>
<목숨을 위해 마귀의 굵은 빨대 노릇을 했던 라합(수 2:1~21)>1)에서 나는 ‘주님께서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다윗과 그의 일행들을 두고 “무죄하다.” 하신 일’을 언급한 뒤 “이처럼 사랑(자비, 긍휼)의 법法은 의식법에 우선하는 법法으로서 가장 큰(大) 법法이다.”고 말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비상한 책”에 실린, “비상한” 논리를 갖춘 추천사라서 “정이철 학동”이 쓴 <추천사>를 또 옮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예수께서 일어나라! 한마디면 충분할 것을 굳이 시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민 19:11) 라는 율법을 잊으셨던 것일까? 아니다. 율법의 의를 그리스도의 몸에 이식하려는 능동적 순종 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신 것이다. 능동적 순종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을 따라 시체 때문에 부정해지지만,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접촉하는 모든 자가 생명을 얻는다고 외친다. 정이철 목사님의 이 비상한 책이 시체에 손대길 두려워하는 능동적 순종 망령으로부터 교회를 구해낼 것이다.
2022년 10월 10일 김문정 (예장 합동 세광교회 집사. 교정 담당)
‘이 땅 위 주님의 신성을 부정한 이단 박창진 목사’를 안타까워하며 이른바 “평신도” 파발 님께서 쓰신 불후의 명시 <바보를 위한 엘레지>2)에 “‘예수님이 성육신하셨을 때 신성은 없었다.’고 어떤 바보는 말한다. 곰팡이 냄새 펄펄 나는 이단 요설을 재탕하고 있는 것이다. 사골이면 진한 육수가 배어 나오겠으나, 유통기한이 2000 년이 넘었으니, 썩어도 보통 썩은 게 아니라네.”라는 독설이 있다. 그런데 11세기 중세 천주교 스콜라 신학자 안셀무스를 이어 16세기 알미니안 신학자 피스카토르는 ‘그리스도 능동 순종의 의는 인정했지만, 그 의의 전가’를 부정했다. 그리고 21세기인 지금 예장 합동 꼴뚜기 파 목사들은 알미니안 신학 아류로서 새관점 신학, 새관점 신학자들과 똑같이 ‘그리스도 능동 순종의 의’마저 부정하며 유통기한이 수 세기가 넘은 이단 요설을 재탕하고 있다.
또한 <바보를 위한 엘레지>에 “하는 말마다 고삐 풀려 좌충우돌하는데, 상대가 필요 없고, 스스로 하는 말에 걸려 넘어지고 자빠지고, 호랑나비 춤추다가, 스스로 딴지 걸리고,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면서”라는 독설이 있다.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는 게 바보들 특징인데, “율법의 의를 그리스도의 몸에 이식하려는 능동적 순종 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신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제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제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했음으로
(행 2:28)
<그리스도 능동 순종 극치로서 십자가 고난: 진리의 자기주장은 장엄하다!>3)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면 흠 하나 없는 어린양 1 년 생애에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의 극치가 드러나는 지점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는 형벌을 내리심을 아심에도,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한 공포에 휩싸여 십자가의 길을 그토록 피하고 싶으셨음에도, 겟세마네 기도 뒤 십자가의 길로 적극(능동) 가셨습니다. 왜 적극 가셨겠습니까?
육체로 나타나신 뒤 그동안 “생명의 길”을 걸어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사망 권세에 굴복하는 치욕의 길이기는 하지만 ‘② 우리 죄를 짊어짐’으로써 ‘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길 역시 “생명의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죽기까지(빌 2:8) 율법의 대강령 ‘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② 이웃(형제)을 향한 사랑’을 흠 하나 없이 다 이루심으로써 “다 이뤘다!”(요 19:30) 하신 뒤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스도 능동 순종’이 “망령亡靈”이면, ‘그리스도 능동 순종의 극치’가 드러난 ‘그리스도 십자가’ 역시 “망령”이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면서” 신성모독의 말인 줄도 모른 채 아무 말이나 지껄여 대며 “곰팡이 냄새 펄펄 나는 이단 요설을 재탕하고 있는” 두 바보가 망령妄靈 난 것이다.
{바른 믿음} 정이철 <복음을 허무는 사이비 개혁주의 놀음 이제 그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음은 위 링크 글에서 또 옮기는 글이다.
그리스도께서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었다면, 그리스도에게도 간음의 욕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간음의 욕구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킨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웃(형제)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대강령을 지켜 의를 얻으셨다면, 그리스도께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려는 욕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려는 욕구가 전혀 없으신 그리스도께는 “이웃(형제)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대강령을 지킨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면서” “하는 말마다 고삐 풀려” 아무 말이나 지껄여 댄 Wolf이철의 수준 낮은 논리에 숨은 뜻인데, 그리스도께는 “이웃(형제)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대강령을 지킨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강제로 매달아 죽이심으로써 “율법의 의”인 자신의 공의를 충족하셨는가?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은 “망령”이고 그리스도께는 “율법을 지킨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 능동 순종의 극치로서 십자가 수난’을 논술한 내 글은 망령妄靈 난 비평문인가?
그리스도께는 “율법을 지킨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서철원 박사 성경 주석 시리즈: 갈라디아서} (쿰란출판사, 2020)’ 173쪽에서 서철원 목사님은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뒤에 “생명의 길”로서 율법의 대강령,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형제)을 향한 사랑이라는 “율법의 의”를 이루는 십자가의 길을 능동으로 가신 그리스도’를 두고 “그리스도는 자기 스스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를 십자가에 다셨다.”는 요설, “곰팡이 냄새 펄펄 나는 이단 요설”, 망령 난 말을 하신 것인가?4) ㅉㅉㅉ!
그 스승(서철원 목사님)에 그 제자(Wolf이철)다. 그 스승(Wolf이철)에 그 제자(김문정 집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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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숨을 위해 마귀의 굵은 빨대 노릇을 했던 라합(수 2:1~21)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277
2) ‘서철원 교조주의’ 목사들 때문에 또 감상한 ‘파발 <바보를 위한 엘레지>’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88
3) 그리스도 능동 순종 극치로서 십자가 고난: 진리의 자기주장은 장엄하다!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53
4) 이단의 괴수 서철원 목사님이 그 얼마나 ‘그리스도 능동(적극, 자발) 순종’이 싫으셨으면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272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