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성숙, 부흥, 개혁 혹은 쇄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설교를 교회 개혁의 의미 있는 지렛대로 여긴 이들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17세기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를 개혁하되 과격한 혁명이 아닌 점진적인 개혁을 시도했고, 특히 설교 운동을 통해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청교도들은 설교를 중생의 수단으로 간주하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한 교훈’(didaskalia)‘을 통해 죄인의 심령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고 여겼으며, ‘교리의 생활화’를 강조했다. 윌리엄 에임스(W. Ames) 또한 ‘교리는 믿음의 표준일 뿐 아니라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에도 개인과 교회,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도구로 설교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 설교야말로 한국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주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는 ‘그 시대’적 상황의 반영
설교는 삶의 자리에서 성경적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고하는 행위로, 설교자 자신이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즉 본문(text)은 상황(context) 가운데 주어진 것이고, 설교는 ‘그 시대’의 질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설교가 어떠한가?’ 하는 점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과 한국교회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동시에 한국교회 현실과 과제에 대한 바른 인식은 설교의 갱신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해서 50만 성도를 거느리고 있다는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설교는 50만 명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그 파급 효과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가 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자원고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근검하는 삶의 이상을 가르치고, ‘종이 한 장이라도 아껴 쓰자’고 설교하고 본인이 모범을 보인다면 그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그가 한국교회 현실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의 개선을 위해 설교하고 자신이 모범을 보인다면 이 또한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들이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따라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오늘의 한국교회 문제의 상당 부분은 목회자들이 가진 의식의 문제이고, 목회자들의 설교는 교회 갱신의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에는 약 6만여 곳의 교회가 있고, 약 9만 명의 설교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다 동일한 시각이나 신학을 견지할 수는 없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동일한 입장에서 가르치고 설교한다면 적어도 20%의 한국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간접적인 영향권을 고려한다면 그 영향력은 국가 기관의 강제력에 못 미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970년대, ‘물질적 풍요’가 기독교 신앙의 전거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이지만 1920년 이전 초기 기독교가 복음과 기독교적 가치를 가르치면서 권선징악(勸善懲惡)이나 상선벌악(賞善罰惡)을 강조한 것이 이 나라 도덕의식에 영향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충군애국(忠君愛國)적 설교가 민족의식이나 독립정신에 영향을 준 일을 부인하지 못한다. 또 1930년대를 거쳐 가면서 일제하의 암담한 현실에서 현세적 삶 보다는 내세적인 소망을 강조한 것이 탈 역사적 신비주의적 경향에 영향을 준 점을 부인 할 수 없다.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제일주의' 정책 하에서 한국교회도 성장을 제일의 가치로 추구하였는데, 그 결과로 이 시기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한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 시기 ‘교회성장’은 최선의 요구이자 최선의 가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설교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성장이었다.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는 말씀은 사랑받는 성구였다. 그래서 교회의 수적 확장은 최선의 가치였고, 이와 함께 물질적 풍요와 축복은 기독교 신앙의 전거로 강조되었으며, 복음은 현세적 안녕이나 소원성취를 위한 방편이 되었다.
반복하지만 축복 지향적 설교와 목회 경향은 이 시대의 유행이었다. 교리지향적이던 보수적 교회들도 이 큰 흐름 속에서 점차 이념적인 와해를 경험했다. 필자가 속한 고신교회 또한 그러했다. 개혁주의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이나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거부하는 성령론의 재고가 그 일단을 보여준다. 교회 성장에서의 상대적 침체는 근본적으로 동적 활력을 상실한 성령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반성에서 나온 타개책이었던 셈이다.
한국교회, 기독교적 가치 고양에 힘써야
오늘의 설교에서 번영의 신학(theology of prosperity)은 여전히 애호되고 있으나 1980년대 후반 이후 급격한 사회변화의 물결 속에서 그 열기는 식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이전 시기에서와 같은 수적 성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의 과제는 바른 교회 건설, 곧 교회 개혁과 쇄신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요구는 교회 내외의 호소이다. 특히 최근의 종교인구 조사에서 들어난 기독교인의 감소현상은 이 점에 대한 외적 요구가 범상치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도덕적 신뢰를 상실하면 영적 권위마저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교회가 다른 조직체처럼 이기집단이나 이익집단으로 비쳐진다면 교회는 ‘언덕 위의 도시’로서 계도적 권위를 지닐 수 없게 된다.
과거의 한국교회는 현실에서의 안녕과 물질적 부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차원 높은 도덕적 삶이나 섬김, 배려, 희생 등 보다 고상한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는 일에 무관심했다. 과거의 기독교라고 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다. 그것이 1970년 이후의 우리 교회의 현실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생과 이에 준한 현실의 삶속에서 지향하는 이타적 삶의 방식을 강조하지만 그 동안 우리는 기복(祈福)과 치병(治病), 그리고 양제(讓災)에 취심 했다. 우선 한국교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것에 눈을 돌려야 하고, 복음적 삶을 살도록 결단해야 한다. 믿는 바에 준한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할 때 힘을 상실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삶으로부터 유리된 공허한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의 개혁이 한국교회의 개혁
결국 남은 과제는 설교자의 몫이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무엇을 설교해야 할까? 청교도들이 꿈꾸어왔던 것처럼 무지(無智)와 죽은 전통이라는 늪에 빠져 있는 의식적인 신앙에서 걸어 나와, 살아있고 생명력 있는 신앙적 삶을 고양시켜주어야 한다. 한국교회에는 여전히 제목중심의 모범론적 설교가 유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두 가지 위험성, 곧 메시지의 내용이 성경본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요구에 맞춘다는 점에서 인간의 생각을 전할 위험이 있고, 또 설교가 성경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사상을 전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결과적으로 성경이 설교자의 사상을 뒷받침 해 주는 전거(proof reading)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패커(J. I. Packer)는 이 점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종교적 전문가에 의해 퇴색, 변조되게 하는 것”이라고 심하게 말한 적이 있다.
본문이 주어진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풍유화(諷諭化,Allegorizing)와 신령화(諷諭化,Spiritualizing) 또한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시급한 것은 성경 원전에 대한 이해력을 제고하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한국교회 강단을 그리고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최선의 길일 것이다. 번역 성경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설교자의 임무이자 특권이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를 보다 설득력 있게 전하고 그 가르침 안에 살게 할 수 있는 개혁의 힘일 것이다. 설교의 개혁이 한국교회 개혁의 지렛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