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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학

[스크랩] 감리교(웨슬리 계열)의 예배신학 -정장복교수

작성자이지명|작성시간13.03.24|조회수257 목록 댓글 0

감리교(웨슬리 계열)의 예배신학 -정장복교수

 

▲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

미국내 흑인들의 예배는 깊은 억압과 자유를 향한 애타는 갈망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배를 통하여 흑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경험하며 나아가 죄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임을 얻게 된다.

A. 들어가는 말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이들은 교단을 초월해 한마음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소외되고 억압된 사회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들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공통된 욕구와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드리며 하나님의 용서와 신실하심, 그리고 억압의 사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그들을 억압으로부터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로 나와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능을 부여받기를 간구한다. 중생한 자들의 모임으로서 이들의 예배는 코이노니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코이노니아의 장인 예배를 위해 모이고,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 세계 선교와 복음화를 위해 세상속으로 흩어지기를 소망한다.

미국내 흑인 기독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메리카 흑인 개신교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유럽계통의 아메리카 흑인 회중교회가 그것이며, 또한 단일 교단으로서 로마 가톨릭과 수많은 크고 작은 분파들이 있다. 그렇기에 아메리카 흑인 기독교인들은 같은 통일성 아래 다양한 신앙의 색깔을 지닌 예배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각기 다른 교단내의 다양한 예배 형태로 인해 미국내 흑인 예배자들은 자신들의 예배를 한마디로 규정하려는 시도들을 진부한 행위로 치부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메리카 흑인"(African-American)이라고 불리는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예배를 다루고자 한다. "아메리카 흑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이름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백인과 흑인이라는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의 문화속에서 그들이 간직해온 아프리카의 고유한 유산과 미국적 유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배는 아프리카 흑인, 미국계 흑인 그리고 유대 기독교 신앙 전통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강제로 이주된 미국의 흑인 노예들의 기록에 따를 것 같으면, 이들은 삶속에서 경험되어지는 다양한 삶의 시각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친근한 사랑으로 그들속에 다가오시어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서 함께하심을 함께 이야기하며 나눈다. 그렇기에 이들의 예배는 함께 공유하는 공통된 삶의 욕구와 기쁨, 갈등, 그리고 희망 등, 그들의 삶의 현장과 관계된 삶의 욕구들을 발산한다. 주일의 공적인 예배에서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들이 마련된다. 또한 이들의 예배 분위기는 삶속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회심의 체험들을 간증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들은 개인적인 삶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심지어 예배의 형태와 의식에도 변화를 끼치는 요인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감사와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신앙적인 체험들은 삶의 현장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곳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들의 기본적인 예배의 신학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삶의 상황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나 주시며 성령님에 의해 마음문이 열리고 억눌린 영이 자유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흑인 노예의 후예들은 비록 하나님을 만나기 전일지라도 은연중에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과거 낯선 이국땅에서 혹독했던 노예시대를 살았던 미국의 흑인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을 속박하는 노예제도하에서도 이들은 그들을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분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들의 특수한 삶의 상황에서 형성되고 구전을 통해 전해져 온 그들의 노래들은 미국의 흑인 노예들만의 독특한 신학 교리를 형성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B. 신학사상의 뿌리

미국 흑인들의 예배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아프리카의 기본적인 종교적 전통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문화는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에겐 종교적 신앙과 제사를 위한 어떤 규정집이나 경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 없이 많은 부족들, 관습, 문화, 언어, 사회구조, 정치적이며 경제적 제도들 등, 이러한 것들은 아프리카만의 특수한 사회구조를 엿보게 한다. 이들 수많은 부족들은 문명화되기 이전엔 나름대로의 사회의 제도와 국가 구조가 잘 발달되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본적으로 공통된 세계관을 지니고 있기에 이들의 삶, 이상(ideals), 덕(virtues), 상징, 표현양태, 그리고 제의적 행위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요소인 것이다. 이들의 삶속 깊이 흐르는 세계관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회들은 같은 세계관을 지니는데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종교적 우주(religious universe)에 사는 한 개체이다. 그렇기에 자연이나 자연현상, 물리적 사건 그리고 삶의 전 부분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되어 발생한다는 것이다.(John S Mbiti, Concepts of God in Africa, New York:Praeger, 1970, chapters 8-13) 삶, 다시말해 생명은 전인적으로 이해되며 그리고 이러한 삶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는 성과 속을 분리하지 않는 통전적이며 일원론적인 이해인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해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이와 상호관계(interrelated)를 맺은 상태에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우주에 속해있는 한 전인적이며 통전적인 존재로 살아가며 우주와 그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과 결속된 관계로 존재한다.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전통은 유대 기독교 신학의 형성에 직접적이면서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애굽에 정착했을 때부터 시작하여 초기 기독교 교회가 기독론과 신앙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시작된 때까지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으며 뿐만 아니라, 이들은 신학의 체계적인 조직과 신조(Creed)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주역들을 배출했다. 그렇기에 세계 기독교를 꽃피우고 발전시킨 위대한 신학자 9명이 바로 북아프리카 출신인 것이다. 클레맨트, 오리겐, 터툴리안, 시프리안, 디오니시우스, 아타나시우스, 디디무스, 어거스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시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오늘날 미국의 흑인 예배의 신학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북쪽 세네갈에서 남부 앙골라까지 이르는 서쪽 아프리카의 해변에서 끌려와 노예로 팔려갔다. 미국의 흑인 예배신학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주된 세계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하셨으며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그분의 창조 사역을 이루시고 계신다.

2)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일부분이며, 그렇기에 인간은 모든 피조 세계와 서로 깊은 연결과 상호 관계성 속에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우주론적인 인간이해는 인간이 관계적이며 상호 결속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확고히 한다.

3) 상호 결속(Communal solidarity)이라는 말은 대가족적인 사회에서 말하는 아주 친근하며 가까운 친족관계를 말할 때 쓰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살아있는 자와의 관계 뿐 만 아니라, 죽었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자들과의 역동적인 관계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이 개념은 종종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의 성자들과 계속적인 교제를 경험하는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적인 공동체로 표현되기도 한다.

4) 인간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된다면, 개인적이면서 공동체적인 삶이 서로 어울린 다는 통전적인 우주이해는 기꺼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5) 우주의 주기적인 법칙은 하나님의 질서와 조화, 그리고 역사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현 상 들이다. 또한 그러한 우주의 법칙은 인간의 삶의 법칙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6) 시간은 상대적이며 순환적이고 과거에 의해 좌우되어지며 현재의 개념은 광대하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2가지 기본 차원은 현재와 미래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자연 현상의 주기적인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므비티(John S. Mbiti)는 "이들에게 앞으로 2 년 정도의 시간은 현재로부터 어느 정도 앞서있는 시간으로 여긴다하더라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 사실 미래라는 것은 시간개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므비티가 제시한 샤스(Sas)와 쟈마니(Zamani)는 2개의 시간 개념을 뜻하는 말인데, 그 는 영국인들에게 익숙해있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논리적 시간개념을 피하기 위해 사스와 쟈마니를 제안한 것이었다. 샤샤(Sasa)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즉각적이며 순간적 인 시간과 관계된 시간용어이다. 이는 보다 더 현재에 가깝고 즉시적인 시간을 나타내 는 말이다. 미래의 일들은 필연적인 자연 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 다. 그러나 미래의 시간은 수치로 나타낼 수 없다. 쟈마니는 제한 받지 않는 과거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쟈마니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즉시적인 미래를 내포하고 있기 에 영국인들의 과거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7) 공간과 시간은 삶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개념이다. 이 공간과 시간은 때때로 같은 의미 의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시간과 같이 공간도 상대적이며 어떤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 는 반드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샴사(Samsa)가 사람들이 같은 시기에 경험하는 삶의 모습들을 담고 있듯이 공간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다. 그러므로 땅은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성스러운 것을 받들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땅 은 조상때부터 그들이 의지해온 존재의 원천이며 신비적으로 산자와 죽은자를 함께 묶어 놓는 끈과 같은 것이다.

대개 아프리카인들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성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확고히 믿고 있다. 예를 들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우주의 구조라든지 인간의 전인화(human wholeness)를 위한 기본적인 욕구 등 말이다. 제의적인 행위는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만나도록 하는 하나의 통로이다. 예배시 하나님과의 연접은 상징들과 기호를 통하여 가능하다. 예를 들어 땅과 같이 물은 생명의 기원과 자양분임을 상징한다. 또한 물은 종종 창조주 하나님과 동의어로 이해되었는데, 그분의 임재하심과 계속적인 창조사역은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큰 바다를 이루는 것을 볼 때 뚜렷해진다. 물은 또한 죽음의 의미와 새 삶의 의미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물로 씻는다는 것은 유한한 생명이 창조의 과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물은 많은 제의적 활동에서 사용되는데 특히 피조세계의 우주적 관계들을 나타내고, 조상들의 죽음을 상징하며 재창조와 중생, 그리고 성화됨을 상징하는 제의에서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있어 제의적 행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악의 세력으로 가득찬 세상속에서 존재론적인 조화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응답의 형태는 의식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또 즉흥적일 수도 있고 예전적일 수도 있다. 또한 개인적일 수도 있으며 공동체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신적인 계시를 받은 어떤 사람은 공동체속에서 사는 동안 혹은 불균형이 발생했을 시 적절한 제의적인 형식을 갖춘 제사를 행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사장 혹은 중재자라고 불려지고 공동체를 대신하여 조정자의 역할을 하도록 세움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적인 영과의 접촉을 통해 능력을 행사하도록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일반적으로 묵상의 형태보다는 음성과 신체로 표현된다(Mbiti, African Religion and Philosophy,75). 하나님께 드리는 공중의 예배는 이성적이라기 보다는 경험적인데, 단순히 정보전달이라기 보다는, 현실에 대한 공동체의 나눔에 초점을 맞춘다. 전통적 아프리카의 종교들 속에서, 단순히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련의 생각들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가 한정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간단하게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들 속에서 경험될 수 있게 때문에 존재한다. 아샨티 속담에 "아이에게 궁극적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아이들조차 마치 본능에 의한 것처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Ibid, 38).

예배가 기본적으로 신성에 대한 상황적-경험적 응답이기 때문에, 공동체에게는 평범한 상징들과 상징적 형식들이, 상호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가장 표현력 있는 수단들을 제공한다. 종종 거울이나 음성 재생기, 혹은 자연환경 속에서의 움직임 같은 상징들을 통해서, 공동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을 나타낼 수 있다. 음악, 육체의 움직임(춤), 몸짓들, 동족간의 하나됨 같은 다양한 형식들과 모양들은 아프리카 민족들에게는 평범한 상징들이다. 물, 산들, 나무들, 큰 바위들 그리고 동물의 생명과 같은 자연 요소들 또한 세상 속의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대한 상징이다. 다른 전통들 속에서처럼, 상징들은 낳아지고, 적용되고, 새로운 상징들이 등장하면 소멸한다.

아프리카 민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여정을 계속할 때, 이제 이 상징들은 디아스포라 아프리카 민족들 속에 깊이 뿌리내려진 신학적 토대가 된다.

C. 기독교와의 첫 만남

현존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미국 내 흑인 기독교의 신학을 최종적으로 구체화했을 몇몇 아프리카인들은 당시 식민지였던 북미 대륙에 도착하기 전에 기독교를 이미 접했었다. 아프리카 흑인들을 포획하고 노예화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위해 유럽인들은 기독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단시일 내에 많은 세례를 베풀었다. 이 "급작스런" 세례들은 노예화된 아프리카흑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식민지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전 급속히 행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북미의 대지 위에서 영국교회의 권위 아래 세례를 받은 첫 흑인 아이들의 부모들은 1619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우연히 보내진 흑인 노예 부부였다. 이것이 바로 유럽계 미국인들이 흑인들을 속박하면서 조금이나마 그들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마지못해 기독교화 하려한 역사의 첫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모순된 역사는 위선의 탈을 벗어 던진 신학을 형성하려 했던 미국 내 흑인들에겐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의 땅, 북미에서는 수많은 흑인들이 유럽계 미국인들에 의하여 제정된 일련의 법 아래 노예가 되도록 강요받아야 했다. 그리고 1624년과 1641년에 흑인들에 의해 베풀어진 얼마 되지 않는 그들만의 단독 세례 사건을 제한다 하더라도, 당시 회중 20명으로 구성된 가장 큰 흑인 교회의 예배예전에 조차도 당시의 예전학자들은 일말의 관심을 갖지도 않았었다. 이는 당시 북미 대륙의 백인 개척자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능력을 인정치 않았기 때문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자료들이 전해진다. 또한 흑인 노예들은 기독교의 교리도 이해할 수 있는 지적능력조차도 없다고 하는 백인들의 부정적인 견해로 말미암아 점점 노예들의 기독교화를 독려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다. 심지어 어떤 농장주들은 기독교인이 된 노예들은 건방져서 통제하기가 불가능해진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백인들 사이에서는 흑인 노예들을 계속적으로 전도하고 기독교화할 것인가에 대한 뜨거운 논란과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노예전도에 관한 긍정적, 부정적 결론들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노예의 자유에 관련하여 "세례받은 노예들의 신분"에 관한 구조적인 논쟁이 다름 아닌 심각한 신학적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이 인간을 상징하는가?" 그리고 "과연 어느 누가 어떤 민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고 어떤 민족은 그렇지 않다고 정죄할 자격을 가졌는가?"라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그리스도와 연합됨"의 의미와 연관되어 있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가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는가? 신체의 한 부분이 전체의 가치보다 더 귀중할 수 있는가?, 이러한 판단이 인간의 결정에 맡겨질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들이었다. 그런데 결국 이러한 질문들은 미연방 법정에서 변형된 형태로 해결되었는데, 이는 새롭게 부각하고 있던 미합중국이 자기들에 의해 저질러진 이러한 사회문제에 궁색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비인륜적으로 처우하는 행위를 합법화하기 위한 법들을 실행하기 위하여 미연방은 성(聖)과 속(俗)을 분명하게 이분화시켰다. 그리하여 흑인 노예들은 세례를 받아 그의 영이 자유하게 되었을지라도 육신의 신분인 노예의 의무로부터는 자유하게 될 수 없음을 명시했다. 이후 미국에서는 세례받은 노예들을 계속하여 비인륜적이며 차별적으로 대우하면서 아프리카 흑인들을 전도하고 세례주는 일에 대단한 열정을 쏟았다.

초기 백인 지주들은 노예들을 온전한 교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예배자로서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의 예배 참여는 그리스도 몸의 이 "의문스러운"지체들이 백인 자신들에게 아무런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관대한 농장주인에 의해서만 허락되었다. 더군다나 흑인 노예들은 예배의 형식에 관한 문제에 참여할 합법적인 목소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이들은 비밀스런 종교적 모임들을 은밀히 만들게 되었다. 농장주의 감시를 벗어난 숲속의 외딴 "덤불 은신처"에서 노예들은 자신들만이 예배할 수 있고 자신들의 신앙경험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첫 흑인교회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신앙의 핵심, 생존을 위한 투쟁들, 그리고 이스라엘과 모든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케하시는 사역을 자신들의 정황에 맞추어 재해석한 내용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신학화의 토착화 방법이 발견된 것이었다.

영적 각성운동을 통한 자유로움과 예배에서 종종 나타나는 자유분방한 열광주의는 후대의 예배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자유로움에 익숙해 있는 미국내 흑인과 노예들은 연합 예배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고, 오랜 뒤 미국의 부흥 운동가들은 미국의 영적 부흥의 축복이 바로 과거 흑인 노예들의 "덤불 은신처"에서 기인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예배 처소에서 설교와 찬양, 그리고 모든 진정어린 기도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며 찬미한 것이다. 이처럼 다분히 소외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기억했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공동체들의 삶과 자신들의 삶이 일치되는 것으로 재구성했던 것이다. 또한 예배 요소들의 형태들은 억압받는 민족의 진솔한 표현들에서 만들어졌다.

미국의 흑인들은 명백하게 타불라 로사(Tabula Rasa)에 도착하지 않았을 뿐더러 하나님의 이야기에도 익숙지 않았다. 백인들이 전해준 하나님은 하나님이 그레꼬-로만 역사를 통해서만 오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경에 명시된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 하셨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새로운 것이었지만 이것 또한 그들의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의 토착화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자신들의 삶과 유사했던 나사렛 예수는 노예의 신분인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선 해방자 예수가 된 것이다. 인종차별에 찌든 예배당, 인종차별을 불러일으키는 의자와 압제적 교회환경 속에서 드리는 예배는 흑인 노예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끔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위선적이며 스스로 혼동가운데 있는 복음 전도자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자신들이 영성의 진보를 촉진시킬 수 있는 구별된 장소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성경이 그들이 추구하려한 새로운 신학을 낳게 한 가장 유일하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투쟁과 고독으로 가득찬 그들의 삶이 성경의 이야기들을 투과해 볼 수 있는 렌즈가 되는 것 같은 특별한 해석학적 원리는 복음을 노예들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노예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성경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기 오래 전에, 그들이 들어 왔던 자유에 대한 이야기들은 자신들이 경험으로 알게 된 신과 성경의 하나님이 같은 신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만약 하나님이 사자굴속의 다니엘과 풀무불 속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히브리 아이들을 자유케 했다면, 동일한 하나님이 북미 대륙에 와있는 노예들을 억압에서 자유케 하실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성육신한 하나님의 복음은 그들이 전하기 시작한 하나님과 더불어 자신들의 삶에 함께 했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각양각색의 문화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다른 자신들의 언어로 복음을 들었지만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능력과 복음전파라는 공통된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로이 영어를 배울 수 있게 됨으로 이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동안 백인들만이 소유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자신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하여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D. 토착화로 균형을 이룬 새로운 예배신학


미국내의 흑인 기독교의 신학화 작업은 위에서 언급한 아프리카의 원시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선택한 자들을 자유롭게 부르시는 하나님, 한 민족의 삶과 역사에 깊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그들을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은 이 땅의 유한한 존재들을 불러 그분을 예배케 하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그 하나님께 향한 신앙의 메시지를 증거해온 전통적인 방법은 노예들의 노래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에 디아스포라 아프리카 민족을 위한 기호화된 통신의 기본적 형태로서는 음악과 노래를 들 수 있는데 이러한 그들의 선천적인 은사는 아직도 큰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노예들을 위한 신학화 작업은 어떤 한 개인의 체계적인 노력이 아니었고, 그들 공동체의 "민족적 과업"으로서 계속된 것이다. 다문화 속에서 구전이라는 민간전승이 연속되는 삶에 기초하는 반면에, 새로운 대륙에서의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종교들을 존속시키고,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민족전통을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것은 미국내 흑인들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기초적 신앙의 내용들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것은 새롭고 역동적인 문화의 형성과정을 더욱 강화시켰으며, 또한 새로운 방법으로 신학을 체계화하기 위한 중추적 조절 "화음"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생명과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새로운 상황이라는 현실과 삶의 흐름에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혼합주의(Syncretisms)는 신학적 강연과 최종적인 신학적 결정을 위한 모임에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발전되었다. 아프리카에서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아프리카인들은 전지한, 편재하는, 전능한, 초월적인, 내재적과 같은 그레꼬-로만식의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험은 하나님이 모든 앎이고, 모든 지혜이며, 영원하시고, 어디에나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넘어서 계시는 분임을 가르쳐 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은 예배에서 특히 그 효력을 발하게 되었다.


구별된 신성한 장소인 교회에서조차 "거룩하게 도둑맞은" 그들의 자유는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은 교회가 바로 에클레시아이어야 한다는 교회론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을 소외하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언제나 외롭고 이방인이었던 노예들은 자신들이 예배자로서 하나님과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깨닫게됨으로 비참한 삶의 경주를 극복한 것이다. 흑인교회는 처음부터 자유스런 예배 공동체로 구성되었다. 이 교회의 생명력은 언제나 지속되었고 참된 예배의 진정성과 지속성의 조화에 계속해서 부합하였다. 교회는 제도로서 기능하기에 앞서 사람들과 공동체 전체가 보여지고 발견되는 살아있는 단체로서 작용해야 한다. 자신들만의 신성한 공간을 갖게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성령의 능력 아래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자신들의 최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거룩한 능력은 축적되고 생존을 위한 희망이 부여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어왔다. 노예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배와 삶으로 응답하는 것 못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수세기 동안 예배가 발전되면서 성경의 말씀들은 흑인들의 신앙과 영성의 기초가 되었다. 처음부터 흠정역판(King James) 성경에 몰두된 흑인 예배자들은 점차적으로 영어에 대해 질문하기를 꺼려했고, 심지어 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비유 말씀도 그러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나 다른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새롭게 번역되어 도입된 성경에 회중들은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국내 흑인 예전학자나 성서학자, 음악가들에 의해 연구된 최근의 연구들은 모두 이러한 과정과 작업들에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하겠다.


미국 흑인들의 성경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경전인 것에는 입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기록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증거하는 책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의 경험들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규범들을 교훈하고 있는 말씀이며 구원의 진리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모든 흑인 회중들의 예배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렇게 지속하도록 항상 결정을 내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다른 어떤 것 보다 자주 성경에 기초하며, 예배시 영감을 얻게 되는 원천이다.


미국 내 흑인들은 예언자, 목사, 그리고 하나님의 치유의 거룩한 도구로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흑인 설교자의 역할을 언제나 존중한다. 흑인 설교자들의 유명한 은사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능력과, 모인 회중이 그 말씀을 그들이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그리옷(griot;이야기의 화자이며 구전 역사가)처럼 이야기의 전개방식은 "부름-응답"의 방법으로 공동체에 의해 지탱되고 고무된다. 설교자가 설교 도중에 회중과 개방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 보다 더 친근한 결속이 맺어지게 되며, 이러한 결속은 찬양과 예배의 다른 순서들과 그 밖의 계속되는 공동의 친교속에서 자유로워진다.


설교자들은 노예 시대동안에 그들의 공동체에서 가장 지성적인 존재로 여겨졌기에 모든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설교자는 신학화 작업에 필요한 기본적인 여러 자료들을 제공했으며, 회중들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전통적인 형태로 재구성했다. 이들의 신학적 핵심은 종종 찬양 가사를 통해 엿볼 수 있으며 예배와 매일의 노동 현장속에서 표현되고 증거 되었다. 이들의 삶의 주제는 교회의 음악을 통하여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성(聖)과 속(俗)을 통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아래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종교적 제의 행위는 그 내용과 상징들에 있어서 대부분 자신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다른 여타의 제의 행위들과의 가장 큰 유사점은 제의 형태와 그것이 속해 있는 문화와의 역동적 관계에 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삶의 자리에서와 예배 절정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창조적으로 응답하는 예배자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또한 그 형태와 모양은 예배자가 겪어온 삶의 경험들에 의해 규정되는 예배의 성격들과 각각의 공동체의 욕구와 기대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미국내 흑인들에게 있어서 제의 행위인 예배는 원래 그들을 사회 중심된 구조로부터 소외시키려는 미국 사회에 대항하려는 반사회적 조직으로 기능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J. Randall Nichols, "worship as Anti Structure : The Contribtion of Victor Turner," Theology Today 41:401-402; see also Victor W. Tuner, The Ritual Process : Structure and Anti-Structur ).


묵상적이든 무아지경으로 이끄든지 간에, 예배는 성령님에 의해 주도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예배를 통하여 사회로부터 떠밀린 사회의 끝자락에서 그것도 제한적인 차원으로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아래 하나님께 응답의 행위를 할 때 우리의 전 인격체가 변화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과 비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예배를 말할 때 독특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한마디로 미국 내 흑인 기독교의 예배는 경험적이며, 상황적(Contextual)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예배는 다양한 성품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즉, 인격적이면서 내재적이며, 초월적이면서 권능적이신 하나님을 통합적으로 경험하는 예배라고 할 것이다. 예배자들은 절대 존재이시며 신비로우시며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게 되며 그럴 때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미쁘신 분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압제의 세력을 능히 정복하사니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만남의 장소이며 제단(alter)인 것이다. 우리는 이 제단 위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다. 예배의 사건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어지는 어느 곳에서나 발생될 수 있지만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한자리에 모이는 주일 예배를 통해 발생한다. 이들은 예배시 뛰기도 하며 말하며, 찬양과 더불어 소리를 높여 외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만남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살아서 임재하심을 깨닫게 되었을 때 온전한 회심을 체험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은 기도와 찬양과 설교를 통하여 동일한 고백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예배 신학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역할이다. 성령님은 예배의 역동적인 권능으로, 인격적이면서 강권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성령님은 단순히 감정적 분위기를 조성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님의 친근하면서도 우리를 변화시키는 권능은 구원을 가능케 하며, 예배에 생동감을 부어주시고 교회의 사역, 뿐만 아니라 선교와 목회를 더욱 견고케 해주시는 것이다. 이외에 이들의 예배신학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는 제의적 행위와 성령님에 대한 이해에 따른 신학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교단의 정책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차이점과 교단의 정책은 앞에서 이미 기술한 여러 교파들의 경우와 같이 주님의 만찬과 세례에 있어서 더욱 뚜렷이 보여진다.

여기서 주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 예배에서 보게되는 "자유양식(liberation key)"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예배에서 나타나는 자유양식은 과거 노예제도 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은밀히 조직된 덤불 은신처의 분위기 속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이 자유양식은 미국으로 이주해온 흑인들의 마음속에서 처음 발견되고 타올랐으며 지금도 흑인 복음송과 운율 찬송가들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본성은 따로 구별된 예배 처소를 원했던 초기 전통 신학자들의 아프리카 원시 세계관에서 분명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며, 믿음의 공동체는 각각의 회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삶의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신앙의 고백을 표현하고 찬양으로 증거하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교파간의 차이로 인해 유일하면서도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낼 때에도 미국의 흑인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임함으로 하나님에 의해 자유케 된 그의 백성은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과 말한 대로 살자라는 결단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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