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전부터 캘빈의 제네바 목회야말로 “종합적인 목회”라고 명명하고, 기회가 있는 대로 알리고자 했다. 그의 목회를 종합적인 목회라 함은 그가 목사로서의 사역이 단순히 제네바 교회를 말씀과 성례로 돌보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시의회와의 적극적인 관계 속에서 제네바 시 전체를, 시민 모두를 사회복지, 교육, 도덕적 삶의 모습 회복 등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또한 캘빈이 종합적인 목회를 실천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은 그가 4중 직분에 근거하여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종합적 목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시의회와의 관계를 살펴본 후에 그가 4중 직분에 근거하여 마련한 제도들(목사회, 컨시스토리, 종합병원, 제네바아카데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시 정부와의 관계
캘빈은 교회가 국가 혹은 지역 정부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해 상세한 서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제네바 목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에서 시 정부와의 관계를 취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사실 캘빈은 제1기 제네바 목회(1536~1538년) 기간을 통해서 제네바 시의회와의 갈등을 충분히 경험하였다. 비록 그의 제2기 제네바 목회(1541~1564년)는 제네바 시의 적극적인 권유와 요청에 의하여 시작되었지만 시의회와의 갈등은 1555년 페린파(Perrinist)들이 실권할 때까지(그 이후에도 약간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긴 한다) 계속되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시의회의 도움 없이는 목회의 진전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잘 이해하게 해 주었기에 그가 시의회와의 관계 맺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캘빈은 결코 시의회의 권위를 무시하지도, 함부로 도전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시 정부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지는 않았다. 캘빈과 제네바 목사들은 출교(수찬 정지)와 관련하여 일어난 시의회의 월권행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또 함께 시의회로 가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집단 항거를 하기도 하였다. 1553년에 일어났던 베텔리어(Berthelier) 형제 케이스가 바로 좋은 예가 된다.
‘베텔리어 형제’의 사례
필베르 베텔리어(Philbert Berthelier)는 컨시스토리로부터 출교를 받았으나, 컨시스토리도 모르게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시의회로 가서 회복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캘빈은 설교에서 공개적으로 시의회에 항거하였다. 이어서 9월 7일에 제네바 시의 목사(캘빈은 불참-이유는 제공되지 않음)들은 시의회로 출두하여 시의회의 그와 같은 행동은 직권 남용으로, 법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항의하였다. 다음날 그들은 다시 시의회로 가서 1541년 교회 법령에 근거하여, 컨시스토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출교권에 대해 항명한 문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한동안 답변이 없던 시 정부는 그해 11월 7일 화요일에 200인 시의회를 소집하여 목사들이 제기한 컨시스토리의 권위, 즉 출교와 회복의 권한을 부정하고, 오히려 그 권한이 시의회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캘빈은 컨시스토리를 대변하여 시의회 앞에서 시의회의 결정에 문제가 있음을 조목조목 지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 목요일에 목사들은 일제히 시의회로 가서 자신들은 시 정부의 결정에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 “거룩한 질서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캘빈은 자신이 다시 한 번 200인회와 전체 시의회(General Council)에 나가 소명할 기회를 달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하였다. 그 대신 시 정부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12월 21일 목요일 시 정부는 성찬에 참석하기를 주장하는 필베르의 케이스를 정리하기 위하여 컨시스토리를 소환하였다. 크리스마스 주일에 있을 성찬에 남들처럼 참석하고 싶었던 필베르가 시의회에 자신의 확실한 회복을 요구한 데 따른 조치였을 것이다. 시의회의 요청에 컨시스토리는 필베르가 회개의 증거를 보여주어야 성찬에 참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필베르와 동행하였던 그의 형제 프랑소와 베텔리어는 흥분하며, 목사들이 시의회의 명을 듣지 않고 독재와 전횡을 일삼는다고 화를 버럭 내며 목사들을 여러 가지 말로 비난하였다. 그의 과격한 행동은 시의회의 제재를 받아 의회에서 퇴장을 요구받았을 정도였다. 일이 이쯤 되자 필베르에 대해서 시의회도 그가 수찬 정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으로 중지를 모았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날 시의회에서 퇴장당한 프랑소와 베텔리어가 컨시스토리로 소환을 당했다는 것이다. 컨시스토리는 성찬이 다가오는데 그가 오전 중에 시의회에서 언급했던 각종 악한 말들에 대하여 어떻게 회개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적반하장으로 그는 더 교만하게 악한 말들을 하며 목사들이 자기 형제 필베르를 다루는 것이 가히 “사탄적”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에 컨시스토리는 그에게 ‘수찬 정지’를 선포했는데 물론 그는 지지 않고 컨시스토리가 출교를 명해도 자신은 회복을 명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다. 베텔리어 형제들의 케이스는 결국 해를 넘겨 1554년까지 가게 된다. 3월 8일 목요일 일변한 태도의 프랑소와는 컨시스토리로 출두하여 이전에 자신이 목사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악한 말을 내뱉은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며 용서를 구하고, 다가오는 성찬(부활절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컨시스토리는 여러 가지 말로 그를 권면하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필베르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3월 22일 목요일에 “시의회의 명령으로”[어쩔 수 없이] 컨시스토리에 출두하였다. 그는 컨시스토리의 친절하고도 경건한 권면에 상관치 않고, 몇 번이나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았고 반항적이었기에 도저히 회복을 받을 수가 없었다.1 여기서 우리는 필베르의 컨시스토리 출두가 “시의회의 명령”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시의회는 이전의 입장에서 상당히 물러나 조심스럽게 컨시스토리의 권한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회와 컨시스토리 간의 출교권에 관한 논쟁의 확실한 종결은 1555년에야 이루어진다. 1555년 1월 24일 목요일 60인회, 200인회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캘빈은 목사들과 함께 참석하여 컨시스토리의 출교권은 성경의 말씀과 교회사 속에서 발견되는 교회의 관행들 속에서 정당화되어진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에 시의 최고위원 중 한 명인 암블라르 콘(Amblard Corne)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전에 공포된 법령에 근거하여 출교권이 컨시스토리에 속한 절대 권한임을 선포하게 됨으로써 시의회와 교회간의 긴 갈등은 일단락되었다.2
다소 장황하게 베텔리어 형제의 케이스를 소개한 것은 캘빈과 동료 목사들로 대표되는 교회가 시 정부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캘빈은 근본적으로 세상사 일체를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였지만 교회의 역할과 정부의 역할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져 있는 것으로,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여야 하며, 정부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불법을 행하는 경우에는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캘빈의 저항 이론(resistance theory)은 사실상 개신교 핍박이 일어났던 프랑스나 스코틀랜드에서 더 적극적으로 발전되었다.
상호영역 존중과 협조의 긴밀한 관계를 개발해야
다시 정리하면 제네바에서 캘빈은 시의회에 대하여 인내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설득하며,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민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충분히 고려하고, 시 정부가 가진 효율적인 관리와 모든 법적 권한과 처벌권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교회만의 절대적인 권한이 침해당하는 경우에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의 법률적 지식과 성경적 확신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사실 캘빈은 현재와 같이 교회가 자원자들의 공동체(voluntary community)라든가 다원적 세속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더 정확하게는 아마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는 캘빈의 이론적 가르침이나 실천적 행동이 자신의 시대에 적합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캘빈에게 집중하는 것은 그의 목회가 보여주는 기본 정신일 것이다. 즉 ‘상호영역 존중’ 그리고 ‘긴밀한 협조관계’가 그것인데, 이 정신이야말로 교회가 세상 정부와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이제 캘빈의 4중 직분을 활용한 다양한 제도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어떻게 캘빈의 종합적인 목회의 단면을 구성하고 있는지 보기로 하자. 다음의 도표가 종합적 목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도와준다.
1. 제네바 목사회
‘제네바 목사회’는 1541년에 조직된 제네바와 그 주변 시골지역 목사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매주 정기적으로 모였는데, 효과적으로 기록을 하고 보관하기 위하여 서기를 채용하였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서는 1546년 이후부터이고, 내용상 상당히 부분적이고 파편적이라 다른 문서와 비교 대조를 통한 보충이 필요하다. 시작 당시 목사들은 9명이었는데, 캘빈의 생존 시 최고 22명까지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 중 반은 제네바 시 외벽 안에 있는 3개 교구를 나누어 맡았고, 나머지는 외벽 밖에 있는 작은 시골 교회를 맡은 목사들이었다. 당시 제네바와 인근 시골을 다 합하여 인구가 2만 5,000명 정도 되었으니까 한 목사당 교인 수가 1,000명 이상이었다. 결코 작은 수가 아니었다. 인근 시골지역 목사들은 목사회에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꼭 참석해야 했던 것에 비해 제네바 시 목사들은 목사회에 매번 참석해야 했다. 이 목사회에는 회장(moderator)과 서기(secretary)가 있었다. 캘빈은 죽을 때까지 목사회 회장직을 맡았고, 후에는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가 담당하였다.
회장의 기능은 세 가지, 1) 목사회 모든 모임의 사회를 보고, 2) 시의회 회의에 나가 목사회를 대표하고, 3) 컨시스토리 모임에서 목사들을 이끄는 것이었다. 이 목사회가 행한 기능에 대하여 로버트 킹던(Robert M. Kingdon) 교수는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 기능은 안수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미 지난 호에 이야기한 것처럼 제네바에서 목사는 건전한 교리를 가졌는지, 말씀을 교인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일정한 테스트(면접과 실전)를 받고 임명되었다. 바로 그 일정한 테스트를 하는 기관이 목사회이다. 현대 교회가 개 교회별로 장로 중심의 청빙위원회를 구성하는 것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목사 후보자는 주어진 본문 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해야 한다. 이때 목사회는 그의 성서 해석이 건전한지, 또 충분히 큰 소리로(당시 고딕교회의 구조를 감안하여) 설교할 수 있는지3 를 살피고 후보자의 적합성을 시의회에 보고한다. 목사회의 심사에 합격하여 시의회에 소개된 후보자는 시 정부에 대한 태도를 점검받는데, 이때 아무 문제가 없으면 시 정부에서 선서를 하게 된다.
이후 후보자는 자신이 섬길 교회 회중들에게 소개되는데, 이때 다시 설교하게 된다. 이 때 회중들이 모두 기뻐하면 그는 그 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회중에게 거부권(veto)이 있지만 실제로 1차 관문, 즉 목사회의 심사가 가장 어려워서 이 심사를 통과한 후 그 다음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례는 없었다. 자, 이런 모든 과정을 거쳐 한 명의 새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안수식은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중세 교회에서 안수(laying on hands of hands)와 관련하여 있었던 여러 가지 폐단을 막기 위하여 사도들의 예(행 13:2~3)조차도 생략된 듯하다. 이렇게 사역을 시작하는 목사들은 시 정부로부터 주택과 곡물과 포도주 공급 외에 넉 달에 한 번씩 봉급을 받았다.
목사회의 두 번째 기능은 회원 교육이었다. 회원 목사들은 매주 모여 서로가 신학적으로 정립될 수 있도록 도왔다. 교육 내용은 성경 해석과 관련된 것이거나, 전통적인 신학 주제들이나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신학 주제를 토론하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볼섹(Bolsec)이나 세르베투스(Servetus)의 주장들이 목사회의 점검과 토론을 거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 번째는 자기비판, 상호비판의 기능이다. 이 기능에 대한 증거 자료는 다양하지 않지만 교회 법령이 소개하고 있는 목사들이 범할 수 있는 잘못들과 관련하여, 서로 잘못을 고백하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것이 목사회의 한 기능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킹던 교수는 목사회의 기능으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선교 사역을 지적하고 있다. 목사회는 가톨릭교회가 주를 이루던 지역(특별히 프랑스)으로, 캘빈의 가르침으로 무장된 목사나 권사를 파송했는데, 이는 그 지역 교회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그들이 핍박 가운데서도 순수하게 신앙을 지켜 가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2. 제네바 컨시스토리
‘컨시스토리’는 목사회와 마찬가지로 캘빈이 재입국하던 1541년 말에 세워졌다. 컨시스토리는 목사와 장로가 함께 참여하지만 목사는 당연직(ex officio)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장로들의 성도관리 사역이었다. 캘빈은 “복음의 가장 큰 적들은 로마의 교황도, 이단도, 유혹하는 자들도, 독재자도 아니고 바로 나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나쁜 그리스도인들이란 “선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주장했다.4 그러므로 말씀에 따라 성도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교회가 훈련하고, 필요시에는 권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도의 훈련과 권징”(church discipline)을 담당하는 기구였던 컨시스토리 연구는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헌신적인 수고를 바친 사람은 로버트 킹던 교수이다. 그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캘빈 시대 컨시스토리 문서를 현대 불어로 옮기고, 주석을 다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5 킹던 교수에 의하면 컨시스토리의 기능은 1)교육기관, 2)강압적 상담기관, 3)심리 법정이었다. 성도들은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야 하지만 연약하여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의 죄의 경중에 따라 그들을 지도하여 1)그들이 속히 회개하게 하고(자신을 정결하게 함), 2)교회 공동체가 죄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리하여 3)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일을 막는 것이다.6 이러한 목적 하에 캘빈은 생활에 본이 되는 장로들이 교인들의 삶을 살피고(oversee) 필요에 따라 그들을 컨시스토리로 소환하여 권면과 징계로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컨시스토리의 설립을 자신의 재입국 조건으로 내세웠다.
컨시스토리에 불려오는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오게 되지만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성도의 표지”를 중심으로 크게 세 종류로 대별이 가능하였다. 즉 신앙의 고백과 관련된 잘못들이나 무지함(주기도문, 가톨릭적인 행위, 예배를 경시하는 태도 등), 성찬의 정기적 참여(성찬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점), 그리고 삶의 모범으로 각종 윤리적·도덕적인 문제들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컨시스토리는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증인 소환에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하여 법정과 같이 구속력을 가진 소환관을 고용하고, 1556년 이후에는 선서를 채택하여 위증이나 유사한 류의 거짓말을 예방하고자 노력하였다.
제네바 시민들은 특히 초기에 컨시스토리의 강력한 도덕적 통제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였지만 컨시스토리의 사역은 결국 제네바 시의 범죄율을 떨어뜨리고, 타락의 요소(각종 음란, 도박성 게임 등)들을 제거함으로써 도시를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존 낙스를 비롯하여 제네바 시를 방문하였던 유럽의 많은 개신교도들이 이 성공적인 도시 변혁을 모델로 삼아, 자신들의 도시와 국가를 변혁하고자 하는 꿈을 꾸면서 이 도시를 벤치마킹하였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 있다.
3. 제네바 종합병원
4중 직분의 다른 하나는 집사직인데, 이 직분은 처음부터 구제와 관련되어 마련된 것이다. 캘빈은 초기 교회가 집사직을 둘 때 두 종류, 즉 행정관(French:procureur=procurator) 과 사회복지사(French:hospitallier=hospitaler)를 두었다고 이해했다. 사실 중세 사회에서 구제는 교회의 주요 사업이었다. 조직적인 걸식을 주선하고, 병원(hospital)으로 불리어지는 구제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구제의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러한 구제 방식은 이미 합리화(rationalization)와 평신도화(laicization)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제네바 시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옮겨간 1535년에 경건한 평신도들에 의해서 제네바 종합병원이 세워졌다. 비록 이 병원은 캘빈 이전에 세워지고 운영되고 있었지만, 이 기관을 개신교 교회의 구제사역, 평신도 집사의 직무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면서 거룩하게 인친 것은 캘빈이었다.
종합병원의 주 사역은 총체적인 사회복지기관의 성격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병원의 집사들은 기금을 마련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현대판 무료급식소(숩키친, Soup Kitchen)7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병원의 실제적인 운영은 사회복지사가 담당하였다. 이러한 직분들을 맡은 집사들은 장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의회가 목사와 협의를 거쳐(실제로는 장로의 경우만 잘 지켜지고, 집사는 1562년에야 확실하게 지켜졌다) 선택하였고, 매년 업무 능력을 평가하여 면직하기도, 재임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직분 개념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는 매우 다르다. 우리는 집사 다음에 장로로 선출되는 것이지, 장로가 다시 집사가 되는 법은 없다. 그런데 이 당시 직분은 철저히 직무상의 기능이었기 때문에 장로로 섬기던 이가 집사가 되기도 하였다.8
원칙적으로 종합병원의 사회복지 혜택은 제네바 시민에게 국한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병원은 외부에서 오는 가난한 여행객들이 3일까지는 체류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그 외에도 1545년에 시작된 가난한 “프랑스 난민들을 위한 구제기금”, 간단하게는 프랑스 기금”도 집사들이 운영하였다. 이 기금은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에 살았던 프랑스인 종교 핍박 난민의 유산으로 시작되었고, 캘빈을 비롯한 프랑스 사람들의 계속적인 지원으로 유지되었다. 제네바는 개신교 개혁이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캘빈을 비롯한 프랑스인 목사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프랑스 난민들이 많이 몰려 왔다. 특히 1550년대 이후 더욱 그러했다. 대부분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없었지만 간혹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제네바 인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 프랑스기금에서 경제적인 도움, 취업 알선 및 기술 교육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 기금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전담 서기를 고용하여 캘빈의 성경 강해나 설교를 필사하고, 시편 찬송가를 인쇄하는 데도 사용되었다.9
4. 제네바 아카데미
제네바대학교(University of Geneva)의 모체인 제네바 아카데미는 1559년 6월 5일에 개교하였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은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제네바 시의 교육 혁명을 예고하였고, 지성사회의 도래를 의미하였다. 4중 직분 중 “교사”의 직분이 활용되었던 이 아카데미의 설립은 1541년 교회 법령에서 이미 예고되어 있던 바였다. 법령을 통하여 캘빈은 학교에서 교회 사역과 시 정부의 일꾼을 양성하기 위하여 언어(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와 인문학(신학과 법학)을 가르치면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558년경에 로잔학교(Lausanne School)가 분쟁에 휘말리면서 많은 교사들을 해고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에, 특별히 양질의 교사 수급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자 캘빈의 후계자가 된 테오도르 베자 역시 로잔학교에서 왔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두 학교, 즉 ‘school privata’(private school: 이름과는 달리 소년들을 위한 공립 예비학교)와 ‘school publica’(고등교육기관)로 구성되어 있었다. 베자가 1564년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학교를 소개했는데, 5년 만에 이 학교의 학생은 school privata에 300명, school publica에 1,200명이 재학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2년 후에는 2,000명의 학생이 진급했다고 적고 있다. 괄목할 만한 성장임에 틀림없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 나라에서 왔는데, 이들은 교수들이나 목사들의 집에 머물며 학교에 다녔고, 과정을 마치면 본국으로 돌아가 목회에 입문하여 리더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아카데미는 캘빈주의적 개신교를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교사들은 목사회의 추천에 의하여, 시의회의 심사를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시의회가 이들을 교수로 임명하면 이들은 목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교회의 훈련과 권징의 권위에 순종하여야 했다. 시 정부는 교사들에게 주택과 봉급을 제공하였다. 아카데미의 재정은 시 정부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개인적인 기부금을 받는 것이 가능했다. 시 정부는 공증인들에게 지시를 내려, 유언자들이 자신들의 유언 속에 이 학교를 포함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네바의 모든 출판인들은 자신들이 출판한 책들을 아카데미 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학교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아카데미의 수업은 동틀 때 기도로 시작되었고 예비학교에서 학생들은 예배 참석과 학습교육(catechism) 이수, 시편 찬양 등을 의무적으로 했고 하루 수업이 끝날 때에는 하루일과에서 잘못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주기도문을 외우고, 신앙고백과 십계명을 외웠다. 1597년에 나온 한 자료는 제네바 아카데미는 학문의 수월성, 순수한 복음의 전파(이단이 허용된 적이 없음), 좋은 훈련이 있었기에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 현재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독일, 프랑스, 영국 학교에서 빼내어 제네바 아카데미로 보냈다고 한다.10
캘빈의 ‘종합적 목회’를 오늘에 적용한다
특정의 역사적 사실은 결코 재현될 수 없는 법이다. 시대성과 지역성의 독특함은 결코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역사가 현재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거나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캘빈의 목회가 과연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급변하는 또한 다원화된 21세기의 한복판에서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고, 복음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믿는 우리들이 캘빈에게 배울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참 힘들다고 하지만 캘빈이 살아갔던 16세기는 우리 세기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격동의 세기였다.
캘빈은 결코 녹녹치 않은 세상의 한가운데서 복음을 전해야 했다. 그렇기에 그는 복음의 능력을 누구보다 확실히 믿었지만, 그것을 전함에 있어서는 매우 전략적으로 임했다. 그는 하나님이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잘 알았기에 교회의 4중 직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그 직분들이 최고의 효율성을 올릴 수 있는 제도들을 개발하였다. 그는 말씀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과 전달력을 가졌고, 그것을 나눔에 있어서 심할 정도로 성실했다.11 또 지역 정부인 시의회와의 관계를 중요시했고, 정부를 지극히 존중하면서도 결코 비굴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신뢰를 쌓아 갔다.
필자는 오늘 한국 교회가 캘빈의 목회로부터 이런 것들을 좀 더 배우면 좋겠다고 소망해 본다. 권위주의가 아닌 권위(영적, 세속적)에의 순종과 존중, 목회자들의 자질 향상(말씀 이해의 깊이, 세상에 대한 지혜, 윤리성 향상 및 성품 훈련)에 투자하기, 평신도들의 직분을 존중하고 그 기능을 중시하는 것, 신학 교육기관(신학생 전도사 혹은 목사 포함)에 대한 후원과 배려를 통하여 양질의 차세대 목회자를 양성하도록 도우는 것, 사회복지에 적극적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과 더 일치하고, 세상은 교회를 가리켜 ‘이 시대의 참 희망’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