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국교회사

천주교의 한국전래(1594~1800)

작성자이지명|작성시간12.11.10|조회수641 목록 댓글 1

 

1. 임진왜란과 세스베데스(Cespedes)

 

 

⑴ 1517년 개신교의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의 반동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가톨릭교회는 트랜트 공의회를 열어 가톨릭 교리를 재확정하였고, 예수회(1534년 창설)를 외방전교회로 인정하여 적극적인 해외 선교를 하였다. 

 

⑵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22)

그는 1541년 포르투갈 국왕의 지원으로 인도 고아(Goa)에 진출하여 8년 동안 약10만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일본선교(1549.8.15)를 하였다. 사비에르는 일본의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선교하다가 1년 후 교토(京都)로 선교지를 옮겼다.

다이묘(大名) 중에서 많은 개종자가 생겼고 그들에게 소속된 주민들이 개종하였다. 

 

(3) 일본내 천주교의 성장

1570년 3만명, 1579년 10만명, 1587년 20만명의 기리시단(切支丹, 吉利支丹)들이 생겼다.

특히 교토의 명문 다이묘 개종자로는 다카야마(高山右近), 고니시(少西), 이케다(池田丹後)가 있다.

1570~82년 일본 기리시단의 절정기에 규슈의 3대 명문 다이묘들이 12.3세 되는 소년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로마 교황청에 파견하였고 이들은 유럽을 통해 견문을 넓혔다.

 

   

                              프란시스 사비에르                                                    부패하지 않은 사비에르의 시신 
 
 

(4) 임진왜란과 침략군의 선봉

 

임진왜란 당시 가토(가등청정)는 불교부대를 이끌었고, 고니시유키나카(少西行長, 아우구스티누스)는 제1군(18,700명)을 이끌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가톨릭이었다. 고니시의 부대는 웅천에 자리를 잡았는데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일본의 천주교회에 사제를 파견해 줄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스페인 출신의 세르페데스 신부(Gregorio de Cespedes)와 일본인 수사가 조선에 도착했다.(1593. 12.27 도착설). 그들은 1년이 못되는 기간 거주했다. 그러나 가토의 시기와 모함으로 신부의 활동이 어려웠다. 일본에서는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선교사추방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세르페데스의 조선인 선교는 불가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소서행장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기 (십자가 기와 불교기가 인상적)

 

 

1598년 12월 노량해전에서 소서행장은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했다.
 

 

⑹ 조선인 신자의 출현과 순교

 

조선인 포로 약 5만명(7천명 귀환)은 대부분 노예로 끌려갔고 인도 Goa 등지로 팔려갔다. 그들 중에서 약7000명의 천주교 개종자들이 일본에서 나왔다. 그들은 훗날 천주교 박해로 순교의 길을 걸었다.

 

루벤의 초상화에 나타난 한국인 상인

임진왜란 당시 팔려서 네덜란드

상단의 일원이 된 것으로 추정

 

 

오다 줄리야의 묘-고쯔시마(神律島)

 

오다 줄리아는 조선의 왕족으로 평양에서 사로잡혀 고니시를 따라 일본에 와서 그의 수양딸이 되었고

가톨릭 신앙을 이어받았다. 충실한 가톨릭 교인이었던 그녀는 도쿠가와 이예야스의 시녀가 되었으나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고 유배지에 가서 평생을 이웃을 섬기며 살았다.

 

⑺ 1614년 도쿠가와(德川) 막부에서 선교사 추방령 및 기독교 금령이 내려졌다. 이때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  조선인 포로 중에 福者 9명, 순교자 칭호를 받은 사람이 11명이 된다. 또 일본인 성인들 26명 중 조선인이 3인이라는 설도 있다. 권(權) 빈센트, 오타 줄리아(Ota Julia)가 대표적인 조선인 가톨릭교인들이다.

 


 
 순교자 가족
 
 
 

처형되는 모습
 
 

바오로 미키 1579.2.5 나가사키 십자가 못박혀 순교
 
 

처형장면 상상도
 
 
 포루투갈 선교사의 처형

 
 
 

2. 중국을 통한 천주교의 전래

 

⑴ 1514년 포르투갈 상인의 중국도래

 

⑵ 1552년 사비에르는 일본, 인도를 거처 광동 앞 상천도(上川島)에 상륙했고 얼마후 열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중국선교의 길을 열었다. 그후 코르네이로(Corneiro)가 와서 1568년 주교로 서품을 받았고, 루기에리(Michael Ruggieri)도 중국에 왔다. 그러나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중국선교와 선교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테오 리치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는 1589년에 소주(韶州)로 갔고 남창(南昌)에서 6년을 머물면서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익혔다. 그는 자신의 서양 자명종을 선물하면서 관리들의 환심을 샀고 1601년 북경에 도착하여 판도자(D. de Pantoja)와 함께 황제 신종(神宗)을 알현했다. 그는 天學實義, 交友論, 西學記法, 天主實義, 兩儀玄覽圖 등을 저술했다.

 

    

              이탈리아 우표                                400주년 기념 중국우표
 
 

마테오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

 

인간영혼은 불멸하며 각자의 행실에 따라 후세에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응징이 있다.

불교의 윤회설을 배격. 오로지 사랑의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구원을 가져온다. 중국 고경(古經)에 이미 이러한 가르침이 밝혀져 있으니 공부하고 귀의하여야 한다.

우주만물에는 창조주와 주재자가 존재하여 끊임없이 만물을 안양(安養)하고 있다.

 

이 책은 동북아시아 유교전통사회에 가톨릭 신앙을 변증한 책으로, 중국 고대사상과 서구 윤리사상의 습합논리(習合論理)를 편 최초의 작품이었고 동양문화권에 그리스도교 가치체계를 첨가하는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사상사와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천주실의는 이수광의 지봉유설(芝蜂類說, 1614)에 소개 되어 있다.

 


 

⑶ 1631년 중국에 갔던 정두원이 천주실의 등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 서양 문물을 유입했다.

 

⑷ 소현세자의 천주교(신부) 접촉

1636년 병자호란 때 청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북경의 문연각(文淵閣)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청의 흠천감(欽天鑑) 감정(監正)으로 있었던 예수회 신부 아담 샬(J. Adam Schall von Bell)은 소현세자에게 접근했다. 그는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을 전교하려는 "위에서 아래로 가는" 선교방식을 시도했다. 1644년 11일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귀국할 때 아담 샬은 성교정도(聖敎正道) 등의 책과 구세주상을 보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70일 만에 사망했고 이어서 세자빈도 사사 당했고 그 자녀들도 유배 당했다. 이로써 소현을 통해 시도하려 했던 천주교의 선교는 실패했다.

 

 

 
 아담 샬(1519-1666)

예수회 독일인 신부, 과학자, 중국달력 제작, 그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 50만명이 세례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⑸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의 도입은 천주교 전래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역서학서란 천문학, 지리, 기기(器機), 천주교등의 서양서적들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소개한 것이다. 한문 문화권에 있는 조선의 선비들은 이 서적들을 통해 서양문화와 천주교에 접촉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李瀷)은 서학을 이해하고 소개하고 체계화 시킨 선구자였다.

 
 

성호 이익선생

 

⑹ 서학의 학문적 이해

성호(星湖) 이익 선생의 학문적 좌파에 의해 서학(천주교)은 신앙으로 승화되었다. 

* 기호지방의 남인이였던 이벽, 정약용, 정약전,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 이가환 등(양반)은 서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홍유한은 서학을 종교로 받아들이고 계율로 실천하였다. 

* 김범우 등 역관(중인)도 천주교로 귀의 했다. 

* 1777년 경부터 서학을 연구하는 무리들은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교리를 연구하는 강학회를 개최하였다.  

* 1784년 이승훈은 이벽의 권유를 받고 북경 북천주당의 그라몽(J.J. de Grammont) 신부를 찾아가 영세를 받았다. 이 날은 한국 천주교회의 생일이 되었다. 조선 천주교회는 선교사가 입국한 후 전교(傳敎)하는 유형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국외로 신부를 찾아가는 독특한 구도(求道)의 유형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훗날 개신교도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성경이 번역되고 한국인에 의해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한국인들의 종교성과 구도의 열정을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이벽(1754-1785)                   이승훈(1756-1801)
 
  

                                                                                 북천주당

 

3. 천주교의 창설과 초기 박해

 

⑴ 조선천주교회의 창설

 

① 가성직(假聖職) 시대(1785~1787)

이승훈은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었다. 위의 세사람은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1년 안에 천주교회는 경기도 마재, 양근, 포천; 충청도 내포, 예산; 전라도 전주, 진산으로 확대되었다.

 

초기 자생적 신앙공동체는 이벽, 권일신, 유항검 등이 주축이 된 평의회를 조직하고 제반업무를 관장했다. 이들은 성사의 필요를 알고 연장자인 권일신을 주교로 지명하였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출했다. 이들은 세례, 고해성사, 견진성사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1787년 유항검이 교리서를 읽다가 무자격자에 의한 성사집행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성사집행 중단을 요구하고 북경의 신부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1789년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 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중국 천주교는 조선 천주교의 신앙과 전교행위를 높히 찬사하였다. 그러나 영세를 제외한 다른 성사는 금지시켰다. 천주교 교리상 신부없는 성사집행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가성직 시대라고 한다.

 

1790년 정약종의 세례 영장(가성직 시대 이후)

 

 

② 전례문제 논쟁

1790년 윤유일은 두 번째로 북경을 방문하여 조선에 신부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고, 구베아 주교는 그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조선교회는 조상 제사가 가능한 것인지를 질문했다. 이에 대해 중국 천주교회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

 

원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선교할 때 이들은 유교를 부정하지 않고 기독교는 유교의 약점을 보완한다는 보유론적(補儒論的)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회는 신위(神位) 앞에 절, 향, 제물을 봉헌하는 것은 우상숭배나 미신이 아니라 조상공경의 문화라고 주장했고, 공자를 공경하는 것도 문화로 허용했다. 그래서 중국학자 서광계와 이지조 등이 천주교에 호응했다.

 

그러나 도미니칸(1631), 프란시스칸(1633), 파리외방전교회(1684)가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이들은 예수회의 입장을 혼합주의로 비판하고 교황청에 이들을 고발했다. 교황청은 예수회의 선교를 금지시키고 조상전례를 우상숭배라는 입장을 명시했다. 그 결과 중국정부는 도미니칸, 프란시스칸, 파리전교회의 선교사들을 중국에서 추방했다. 교황청은 1777년에 예수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예수회가 해산된 후 1777~1842년 까지 중국의 천주교회는 100여 년간 핍박을 받았다. 천주교회의 조상제사 금지 입장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유교적 입장을 견지했던 이승훈을 비롯한 상당수의 교인이 천주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또한 외부로부터는 벽위ㆍ척사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⑵ 을사추조 적발사건과 진산사건

 

① 乙巳秋曹 적발사건⇒1775(乙巳) 명례방(지금의 명동) 김범우 집에서 집회가 적발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범우만 체포되어 유배형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천주교의 실체가 처음으로 정부에 의해 발각 된 사건이었다. 1776년 김범우는 조선 천주교회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 강학회 상상도

 


  명동성당 1898 (김범우의 집터)
 

김범우의 묘
 
 
 

② 정미(丁未, 1787) 반회(泮會)사건: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반촌(泮村)에 있는 심석태 집에서 서학서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로인해 유학자들은 계속 항소를 올렸고 정조는 서학서를 모두 소각하거나 물에 버리도록 명령를 내렸다.

 

③ 진산(珍山)사건(1791) :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으로 신해(辛亥)교난 혹은 신해사옥이라고 부른다. 윤지충은 1784년 김범우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을 읽고, 권상연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1790년 북경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폐지하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듬해 1791년 모친이 별세 했을 때 윤지충은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천주교인이라는 것이 폭로 되었다. 이 사건은 양반이 천주교회에 입교했고 조사제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참수 되었고, 많은 양반 교인들이 배교했다. 즉 보유론적 천주교 이해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부는 “천주교는 다만 천(天)이 있는 줄만 알고 임금과 어버이가 있음을 모르며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설로서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의혹케 함이 큰물이나 무서운 짐승의 해보다도 더 하다"고 발표했다. 즉 천주교회는 ‘無君無父’의 종교로 오해를 받았다. 박해로 인해 성사가 중단되었고 

교인들이 흩어졌다. 그러자 중인 계층의 교인들이 천주교회를 지키고 신부영입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⑶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1785년부터 10년간 천주교회는 신부없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순교자를 배출했다. 1795년 초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비밀에 조선에 입국했다. 정부는 이 사실을 알고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을 내렸다. 그해 6월에는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처형되었다.

 

주문모 신부
 

당시 정조와 권력의 실세였던 남인 채재공은 천주교에 대해 사건을 축소화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그로인해 주문모 신부는 6년간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엄격한 심사를 거친 교인들에게만 성사를 집행했고 여성 교우들이 증가했다.

 

 

천주교의 변화를 살펴보면

(1) 서학에서―천주학으로 ―천주교로 발전했다.

(2) 양반계층 주도―중인계층의 주도―여성의 주도로 변화했다.

 

강완숙(콜룸바)은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켰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전교활동을 하여 여성들의 교세를 크게 늘렸다.

주문보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4000명이었던 교인은 6년이 지나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지역적으로는 서울; 경기 여주; 충청도 공주, 온양, 내포, 고산, 남포; 전라도 전주에 포교가 이루어졌다.

주문모 신부는 포르투갈 정부가 조선정부에 사절을 보내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출처] 제2장 천주교의 한국전래(1594~1800) 임진왜란과 천주교의 접촉|작성자 물길손길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이지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1.10 그림이나 사진이 나타나지 않으면
    1) 글의 제목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ohyh45님의 블로그'의 블로그가 나오며 관련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