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을 통한 한국선교의 시도
⑴ 조선에 처음 온 개신교인들
① 벨트브레(네덜란드인)는 1627년 항해 중에 표류하다가 조선에 들어왔고 그는 조국으로 돌아살 수 있는 길을 찾기 못했다.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여인과 결혼을 하고 정착했다.
이 시기 네덜란드인들이 조선에 오게 된 것은 개신교 국가로서 유일하게 항해무역을 할 수 있었던 국가는 네덜란드였기 때문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두 가톨릭 강대국가가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개신교 국가는 해외선교 하기가 어려웠다.
② 하멜(네덜란드인) 일행은 1653년 난파하여 제주도에 도착했다. 38명은 익사했고 28명은 구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666년 9월 하멜과 8명은 조선을 탈출하여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이들은 1668년에 귀국하여 「하멜 표류기」를 저술했고 조선에 대해 서양사회에 소개했다. 그러나 그 기록은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하멜이 표류한 제주도

(1668년 발간)
③ 맥스웰과 바실 홀
그후 시간은 19세기로 흘렀다. 영국 해군이었던 맥스웰과 홀 두 사람은 1816년 해도를 작성할 목적으로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했다. 그는 마량진에 정박했고, 첨사 조대복을 만나 한문성경(1611 번역된 킹 제임스 추정)을 주었다.
바실 홀의 「한국서해안 류큐열도 항해기」(1818) 안에는 한국의 풍속화가 작성되어 그려져 있다. 이 「항해기」는 「하멜 표류기」와 함께 한국을 서양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이 해도를 사용해서 귀츨하프가 조선을 찾아오게 된다.

맥스 웰 대령

바실홀 항해기의 동판화-조대복 첨사
나폴레옹 황제는 이 그림을 보고 곰방대에 관심을 가졌다.

최초의 성경 전래지
⑵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의 내한
귀츨라프는 유태계 독일인으로 네덜란드 선교회에 소속(1826)이었다. 그는 사이암 선교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중국을 여행하고 1831년 중국어 성경번역자 모리슨을 접촉하여 한문성경을 받았다. 그는 영국동인도회사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의 통역 겸 船醫로 동승하였다. 그 배의 선장은 린지(Hugh H. Lindsay)였다. 그들은 중국, 한국, 일본 오키나와, 타이완을 순방하는 항해를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영국통상을 위한 항구 조사 및 관민들의 통상 개시에 대한 관심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기독교 전도문서, 성서 및 선물 마련했다.
귀츨라프 일행은 1832년 7월 17일 서해안 장산곶에 도착했고, 7월 23일에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했다. 그들은 지방관을 통해 국왕에게 청원서와 성서 및 전도문서 전달했다. 그리고 국왕의 회신을 기다리며 주민들에게 전도문서를 주고 감자 심는 법을 알려주고, 약을 나누어 주었으며, 한문 주기도문을 음역 했다.
그러나 조정은 8월 9일 중국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전달했다. 귀츨라프 일행은 식량을 공급받고 조선을 떠났다. 귀츨라프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는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라는 저술을 남겨 조선을 언급했다.

귀츨라프
⑶ 토마스 목사와 제너럴 셔만호 사건(1866)
로버트 토마스 목사(Robert J Thomas)는 한국개신교 역사의 첫 순교자이다. 그는 웨일즈의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런던 대학교의 뉴칼리지를 졸업했고,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런던선교회(LMS) 파송 중국선교사(1863)가 되어 중국에 갔으나 아내가 사망하자 선교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청(淸)의 해관에 취직하였다. 그는 중국어, 러시아어, 몽고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
토마스 목사는 지푸에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을 통해 조선인 천주교인 두 사람을 만났고 한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1865년 9월13일 한국 서해안에 들어왔다. 두달 반 동안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문 성경을 나눠주는 전도활동을 하였다.
1866년 1일 북경으로 돌아온 토마스 목사는 다시 런던선교회 선교사 신분을 회복하고 4월까지 북경에 머물면서 조선에서 온 동지사(사신단) 일행과 친분을 나누었다. 그는 자신이 전한 한문 성경이 평양에 들어갔음을 알고 기뻐했다. 그는 조선 원정을 떠나려 한 프랑스 함대의 통역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받았으나 그 원정은 연기되었다. 그리고 그는 제너럴셔먼호의 통역관을 자청해서 조선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제너럴 셔만호의 모습
조선에 도착한 후 토마스는 자신들의 목적지가 평양이며 자신들의 목적은 통상과 야소교를 전파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제너럴 셔만호는 중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정부는 그들을 의심하였다. 셔먼호 측은 협상자로 간 중군 이현익을 납포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조총 사격을 하여 많은 관민들이 죽고 다쳤다.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는 개화론자였으나 제너럴셔먼호의 오만하고 폭력적인 접근은 용서하기 어려웠다. 제너럴셔먼호가 썰물로 인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조선인들은 뗏목에 불을 붙여 공격하였다.

평양 대동강(1890)
1866년 9월 2일 제너럴셔먼호는 불탔고 토마스 목사는 함께 헤엄져 나온 선원들과 함께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시신은 동강나서 불탄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나의 27세였다. 토마스 목사는 선한 의지로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그는 좋지 않은 시기에 좋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희생은 교회 역사속에서 헛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존 로스 목사가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가 전한 성경은 평양의 복음화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2. 만주를 통한 한국선교 ⑴ 로스ㆍ매킨타이어와 한국인 개종자들
①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했다. 1872년 존 매킨타이어 목사(John Macintyre)와 존 로스 목사(John Ross)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의 조언을 받아들여 만주의 개항장 영구(營口)로 갔다. 존 로스 목사는 또한 윌리엄슨을 통해 6년전에 순교한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소식을 듣고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존 로스 목사와 그 가족 로스는 1874년에 조선인들이 장사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고려문을 탐방하여 백씨(백홍준의 부친)에게 한문 신약성경을 선물로 부었다. 그후 1876년 4월 강화도 조약 이후 로스는 조선의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두 번째로 고려문을 탐방했다. 이때 로스는 조선인 의주의 상인으로 파산을 하여 움직일 수 없게 된 이응찬을 만나 그를 도와주면서 한국어를 공부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응찬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성경번역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존 로스는 훗날 서상륜을 만나 그를 성경번역에 참석히켰다. 로스가 조선 성경을 번역한 것은 대원군의 쇄국기(1864~1873)에 선교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려문의 자리(1966 헐리기전, 요령) 고려문의 위치 존 로스의 한글공부 자료 ② 1878년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이 번역 출판되었고, 1879년에는 누가복음이 번역되었다.
③ 1879년 존 로스가 안식년을 떠난 사이 존 매킨타이어는 성경번역에 참여했던 4명의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첫째는 번역 일을 맡았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 (1월), 둘째는 백홍준(白鴻俊), 셋째는 이응찬(李應贊), 넷째는 한의사 출신의 이응찬의 친척이었다. 1879 최초의 개신교인들이 세례받은 우장교회 ⑵ 성경번역과 출판 로스의 성경번역 동기는 1200만 조선 백성에게 성경을 전하겠다는 사명감과 선교의 문이 열릴 때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① 준비기 (1876-77) : 로스와 이응찬의 만남으로 로스는Corean Primer(한국어교재)를 간행했다.
② 초역기 (1877 여름~1879.4) :요한복음 번역에 착수한 시기로서 로스는 안식년을 받아서 번역에 전념했다. 마태복음에서 로마서까지를 번역했다. 번역에는 이응찬, 서상륜, 첫 수세자, 백홍준 등이 참여했다. 1879년에는 History of Korea, Ancient and Modern을 간행하였다. ③ 제3기(1879.5~1881.5)는 매킨타이어의 주도로 번역이 진행되었다. 1879년 신약성경 번역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헬라어 성경을 참고로 수정을 하였다. ④ 제4기(1881.6~1886가을)에는 로스가 귀국하여 여러 출판물 및 신약성경 출판을 완성했다. 로스는 성경1천부를 일본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톰슨에게 보냈고 톰슨은 일본인 권서를 통해 부산에 배포하였다. 나머지 성경은 김청송(金靑松)에 의해 서간도의 한인촌으로, 서상륜(徐相崙)과 백홍준 등에 의해 한국인에게 직접배포 했다. 1887 예수셩교젼서 ⑶ 반포사업과 교회들의 설립 반포사업의 주역은 한국인 개종자들과 권서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① 서간도 한인촌의 전도 ② 서상륜의 활동 서상륜과 그의 가족 서경조와 그의 가족 소래교회(조선교회의 산실, 1883.5.15 최초 교인들이 모임) 1884 소래교회의 시작 언더우드 사택-정동(새문안)교회의 출발지 최초의 정동 감리교회 인천내리감리교회와 아펜젤러 ③ 백홍준의 의주선교 백홍준 ④ 제2의 식자공의 평양선교
이상 서간도의 한인촌, 의주, 소래, 평양에서 형성된 한국인 초대 교회의 모습은 성서 중심적 신앙공동체라는 특징과 자발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전도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자랑스런 한국교회의 전통이다. 앞으로도 그 전통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⑴ 이수정(李樹廷, Rijutei)의 개종과 신앙 활동 이수정은 온건개화파 양반학자였다. 그는 임오군란(1882) 때에 명성황후를 구출하여 공을 쌓았다. 임오군란은 신식군대를 우대하고 구식군대를 차별하는 것에 대해 분노가 쌓여 있던 군인들이 일으킨 난이었다. 안종수의 농학(農政新編)에 자극을 받은 이수정은 명성황후를 구한 공로로 국비장학생으로 40세의 나이에 일본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1882년 9월 박영효(朴泳孝) 수신사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도일한 이수정은 농학자이며 기독교인 츠다 센(津田仙)과 만나 기독교를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나가다 목사와 함께 성경을 연구하다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1883년 4월 29일 이수정은 야스가와(安川亭) 목사의 입회 하에 미국북장로교선교사 녹스(G. W. Knox)에게 노월정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그가 일본에 온지 7개월만에 이루어진 전격적인 변화였다. 신식군대 별기군 이수정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 대회 참석 이수정과 존녹스(1883.4.29) 세례직후로 추정 가운데는 헨리 루미스 (미성서공회총무) 그리고 이수정은 5월 8일~13일 제3회 전국 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해서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하였고 요한복음14장을 중심으로 신인상감(神人相感)의 원리를 빌어 신앙을 고백하였다. “무릇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한 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를 가리킴이며,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하여 이르시기를 ‘내 아버지는 포도원 주인이요, 나는 포도나무이며 너희는 가지라’ 하셨으니, 그 이치는 쉽게 곧바로 이해될 것이거늘 번거로이 천착하지 않을 것이므로 제가 이제 무슨 말로 밝힐 수 있겠습니까?” “대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는 이와 같습니다. 비유하면 등잔의 심지가 타지 않으면 빛이 없으니 등잔 심지는 도(道)를 가리킴이요, 도심(道心)이 타서 믿음이 되며 심화(心火)는 하느님을 감동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감동은 믿는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고는 얻을 수 없으며, 한갓 심지만 가지고는 등잔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불타지 않을 때는 끝내 빛을 볼 수 없고 믿지 않고서는 끝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심이 소리가 종(鐘)에 있는 것과 같아 치면 응하고 때리면 소리 나는 것이니, 종과 망치(槌)가 구비되어 있더라도 각기 다른 곳에 달려 있다면 소리가 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큰 심지로 등잔이 타면 빛이 크고 조그만 망치로 치면 소리가 적으니 곧 많이 구하면 많이 얻고 적게 믿으면 적게 이룬다는 뜻이요 오직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를 알고자하면 마땅히 자신에게 믿음(信心)이 있는지 여부를 살펴볼 것이요, 스승에게도 묻지 말며 하느님께도 여쭙지 말 것입니다.”
⑵ 선교활동 이수정이 개신교선교를 위해 한 중요한 활동을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신약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둘째, 유학생을 중심으로 활발한 전도활동을 해서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셋째 그는 서구 기독교계를 향해 한국선교를 해달라고 호소하여 미국선교사들의 입국을 촉진했다. 1) 성경번역―이수정은 재일성서공회총무 루미스목사(H. Loomis)의 제안으로 한국어 성경을 번역착수했다. 2) 전도활동―그는 30여명의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여 유학생들의 개종과 수세에 앞장섰으며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예배를 드렸다. 훗날 유학생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한인교회 창립과 동경 한인YMCA창립에 주축이된다. 3) 서구 기독교계에 한국선교 호소(1883. 12. 13) : 이수정 당시 일본교회는 한국선교를 논의했으나 이수정은 조선과 일본의 국제 관계를 고려할 때 조선의 선교는 미국이 시도하는 편이 낳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조선의 선교를 요청하는 공개편지를 미국기독교에 보냈다. 이 편지는 번역되어 "Rijutei to the Christian of America Greeting" Missionary Review (March, 1884), pp.145-146에 개제되었다. 그는 "한국최초의 개종자(First Corean convert)"로 미국선교잡지에 소개되었고 그의 호소는 한국에서 온 마케도니아의 호소라고 알려졌다. (a Macedonian from Corea) 4. 미국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⑴ 한미조약과 견미(遣美)사절단 (1882) 김기수(1차 수신사) 김홍집(2차 수신사) 황준헌의 조선책략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 푸트공사 부인의 나들이 앞줄 : 로웰(P. Lowell)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오례당 뒷줄 : 현흥택 일본인 통역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아더 대통령과 민영익 일행(1883.9.25) ⑵ 미국개신교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① 감리교의 한국선교준비 고종황제 ② 장로교의 한국선교준비 미국장로교회의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한 몇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는 이수정의 한국선교에 대한 호소가 해외선교위원회의 마음을 움직였다. 둘째, 미국회중교회 해외선교부 총무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신중론을 제시했으나 북장로교 선교부위원 엘린우드(F.E. Ellinwood)는 "즉시 파견론"를 주장했다. 셋째, 1884년 2월 맥 윌리엄즈(David W. McWillians)는 선교사 2년 생활비에 해당하는 5000달러를 선교부에 헌금했다. 이리하여 북장로교회는 알렌과 제중원 알렌과 조선인 요리사, 고종이 하사한 나귀(1885) 알렌이 내린 최초의 서양진단서 (1885. 9.15 제물포)









누가복음전서 (1882) 요안내 복음전서(1882)








1895년 소래교회의 모습








함대를 동원한 일본의 협박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 개항직후 제물포(인천항)






민영익 가우처 박사
맥를레이 목사와 김옥균


엘린우드(1826-1908)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