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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해방과 새로운 출발 (1945-60)

작성자이지명|작성시간12.11.10|조회수905 목록 댓글 1

해방 이후 민족의 과제와 교회의 과제 

 

  1. 민족의 통일은 자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본의 패전과 미소양국의 한반도 점령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결국 민족의 분단을 초래했다.
  2. 그러나 주권 없이 신앙의 박해를 받으면서 살았던 우리 민족과 교회에게 해방은 감격의 소식이었다.
  3. 특히 일제는 8월 18일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몰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질문 1. 해방 이후 우리민족이 목표로 삼아야 할 민족사의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질문 2. 그렇다면 교회의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현실은?

1945년 해방 이후 1960년 4.19학생 혁명까지의 시기는 민족사적으로 분단이 고착화 되는 시기였다. 북쪽에서는 공산정권 치하에서 교회가 박해를 받았다. 남쪽에서는 교회는 보호받고 성장했으나 국가의 모든 영역은 친일파들의 손에 다시 넘어갔고, 권위적인 친미ㆍ반공 정권이 세워졌다. 교회 안에서도 교회재건 및 반공의 명분아래 친일행위와 신사참배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민족과 교회 안에 민족정기가 사라졌고 교회와 정권 사이에 유착현상이 일어났다. 남쪽에서는 월남 성도들이 증가하면서 교회는 더 보수화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크게 증가되었다. 1950-60년대는 전쟁 이후 사회적 아노미 현상으로 교회 분열 현상이 악화되었고 각종 이단운동들이 자라났다. 민족분단과 교회분열은 깊은 정서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미7사단 32보병연대의 한국진주,     미일통치권 이양문서(45.9.9),     일장기 하강(45. 9.9)

 

 

이승만의 귀국(45.10.16)

 

미국은 특별 전세기 편으로 이승만을 가장 먼저 귀국시켰고,  다른 임정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도록 하여 이승만의 집권을 준비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중경임시정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등 15명이 귀국했고 12월 3일 임시정부 요인 2진이 귀국했다.  앞줄 왼2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뒷줄 왼2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환, 김종준, 유동열, 김원봉

 

임시정부요인 환영 꽃전차

 

 

 

해방공간의 좌우대립

 

우파들의 신탁통치 반대(45.12), 좌파들의 신탁통치찬성(46.1.3)


 

 

남조선노동당 결성 (46.11.23) 박헌영과 여운형          김일성과 박헌영 (1946. 9) 월북한 박헌영





김구의 남북협상길

 

대한민국건국선포식 1948.8.15

  

1. 해방과 교회재건

 

⑴ 북한교회의 재건

 

1) 교회재건의 5대원칙

해방 이후,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20여명의 성도들이 출옥했다. 지하에 은거했던 교계의 지도자들도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왔다.  출옥성도들과 평양노회 회원들은 평양 산정현 교회에 모여 한국교회 재건문제를 논의한 후 9월 20일 경 “교회 재건의 5대 원칙”을 발표했다.

 

① 교회의 지도자(목사 및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②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③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④ 교회 재건의 기본원칙을 전한(全韓)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케 할 것

⑤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 할 것

 

출옥성도들은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숫적으로 열세여서 교회재건 작업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독일 고백교회 재건의 경우

 

 

출옥성도들
뒷줄 왼쪽부터 조수옥, 주남선, 한상동, 이인재, 고흥봉, 손명복
.
앞줄 왼쪽부터 최덕지, 이기선, 방계성, 김인희, 오윤선, 서정환




 

출옥성도 환영식(1945) 남산신궁터

 

 

2) 평북6노회 교역자 퇴수회

45. 11.14-21 평북6노회(평동, 평북, 용천, 의산, 산서, 삼산) 교역자 퇴수회(200여명 참석)에서 박형룡 박사는 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때 홍택기 등이 강력히 반발했다.

 

  •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

 

 

 평북6노회 교역자 퇴수회(1945.11, 선천)

 

3) 이북5도연합노회

  • 1945. 12  북한지역 장로교회는 총회를 대행할 “이북5도 연합노회”결성했다.
  • 통일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하는 잠정적 협의 기관 

①  총회 헌법은 개정 이전 헌법을 사용하되 남북통일 총회가 열릴 때까지 그대로 둔다.

②  전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한다.

③  신학교는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

④  조국의 기독문화를 목표로 독립기념 전도회를 조직 전도 교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⑤  북한교회를 대표할 사절을 파송하여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

 

 

⑵ 기독교조선남부대회

 

해방직후, 남쪽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있었다. 교단지도자들은 두 가지 명분으로 이 교단을 존속시키려고 했다.

  1. 비록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통합되었지만 한국교회장래를 위해 하나의 교단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2.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건국과정에서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 이승만, 김규식 3명이 모두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규식, 김구, 지청천, 이승만

 

이들은 교단 명칭을 “조선기독교단”으로 변경하고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를 개최했다. 남북이 분단되었기 때문에 총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부대회에는 주로 장로교와 감리교의 인사들만이 모였고 감리교 지도자들의 일부는 다시 감리교로 환원을 선언하고 퇴장했다.

 

11월에 다시 모인 남부대회는 순교자추도회, 임시정부지지, 선교사내한 요청, 미국대통령에게 자주독립진정, 교회신문〈기독교공보〉발행을 결의했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이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던 남부대회는 유지되기 어려웠고, 교파환원이 대세였다. 이듬해 제2차 남부대회(46.4.3-5.20)는 교파환원을 결정했다.

 

그렇지만 1946년 10월 10일에 설립된 “조선기독교연합회”(NCC)는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전통을 이어 교회연합기구(정부수립이후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남았다.

 

⑶ 교회의 재건

 

1) 장로교회의 재건

장로교회의 재건은 경남노회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출옥성도 손양원, 주남선, 한상동 목사도 경남사람이었다)

경남재건노회 조직 (45.9.18), 경남노회 재건 (11.3)

남부대회 해체 이후 장로교회는 승동교회에서 남부총회를 소집했다(6.15, 대회장 배은희, 부대회장 함태영).

 

의결사항

① 헌법은 남북이 통일 될 때까지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제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이를 취소한다.

조선신학교를 남부 총회 직영신학으로 한다.

④ 여자 장로 직의 설정문제는 남북통일 총회 시까지 보류한다.

문제점: 신사참배에 대한 참회가 없다는 점

 

배은희 목사(제32회 총회장)  

7. 해방 후 첫 부활절연합예배(1946)

 

제2회 남부총회는(47.4 대구제일교회)는 통일의 가능성이 멀어지면서 제33회 총회로 개회되었다.

 

2) 감리교회의 재건

1945.9.8   변홍규, 이규갑, 김광우 목사 등은 남부대회를 떠나 감리교 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감리교회는 동부(변홍규), 서부(이윤영), 중부(이규갑)로 3연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946년 연합연회를 형성하고 2월에 신학교를 개교했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재건파와 복흥파로 분열되었다. “재건파”는 일제시대 정춘수 감독 당시 친미로 몰려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었다. “재건파”는 친일교권의 청산을 요구했고, “복흥파”는 과거에 집착하기 말고 미래지향적인 교회부흥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권은 “복흥파”에게 있었다. 감리교 안에서 월남 교역자들의 수가 늘어가고 감리교 선교사들이 재입국하면서 "재건파"가 우세해졌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미국 유학파와 월남 교역자들인 류형기, 정일형, 송흥국, 이환신 등이었다.

 

3) 성결교회의 재건

1945. 11  흩어졌던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다시 모여 교회 재건에 나셨다. 채택강령은 "성경과 성결, 재림교회로 복귀하여 신앙을 회복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었다. 교단 신학교였던 경성신학교를 서울신학교로 개명하였다. 교장에 이건 목사, 명예교장에 이명직 목사가 추대되었다. 교단지인 〈활천〉이 복간되었다. 성결교회는 강력한 전도열을 통해 장감 다음의 교세를 확보하게 된다.

 

4) 침례교회(동아기독교)

동아기독교회는 1944년에 일제에 이해 교단이 해체 되었다. 침례교회는 재건운동에 나섰다. 1946년 9월 노재천 대리 감목의 소집으로 대화회(大和會)를 열고, 교회체제를 총회제로, 감목정치를 회중정치로, 파송제로 하던 교역자 제도를 청빙제로 바꾸었다. 1947년 미국남침례교회와 정식으로 유대관계를 체결하였고, 1949년 9월 “동아기독교”를 “침례교회”로 변경하였다.

 

5) 구세군

1945년 10월에 전국에 흩어졌던 사관과 지방관들이 회집하였다. 황종률 정령을 서기관장으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로드(H. Lord)가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1947년 사관학교(신학교)도 개교하였다.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고아원, 후생학원, 모자원, 구세병원 등을 활기찼고 상탄절 자선남비를 통해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였다.

 

6)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1943년 12월 안식교회는 말세 신앙 때문에 교회가 해산되었다. 삼육원, 청량리 위생병원, 시조사 등이 모두 일제에 강제 징용되었으나 해방 이후 모든 기관을 회수하고 10월 교회 재건에 나셨다. 

 
 

2. 분단과 기독교

 

⑴ 남한교회와 정부수립

 

1) 미군정과 교회

 

미군정과 선교사들

1945년 9월 8일 하지(John Hodge)는 미군정 사령관으로 입국했다. 미군정의 목적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 친미 반공국가를 수립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정권을 이양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집단을 육성했다. 즉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인데 그들의 주류는 미국유학파였고 개신교신자들이 압도적이었다.

 

미군정 당시 국가-교회 관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귀국한 선교사들이었다. 한국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하지 장군은 한국어를 구사하는 선교사들을 의지했고 선교사는 미군정과 교회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감리교선교사 아들 조지 윌리엄스 소령은 군정당국의 고위인사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감리교 노블선교사 아들 헤럴드 노블은 하지의 정치 연락장교였다. 1945년 10월말 전략사령부(OSS)요원이었던 원한경(H. G. Underwood,1917-2004)은 언더우드의 아들로서 소령대우를 받는 민간인 군정고문으로 입국했다. 1947년 7월 11명의 선교사들이 미군정의 정식관리로 일했다.

 

 

   

 

                                                          하지와 장택상                   원일한과 언더우드                           원일한

 

선교사들은 미군정 요직에 개신교 지도자들을 기용하도록 도왔다. 그들은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군정 11명의 행정고문 중 6명이 개신교인이었고 3명이 목사였다. 46년 미군정 최고직에 임명된 50명의 한국인들 중 35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미군정의 종교정책과 기독교

미군정의 종교정책은 기독교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단정수립을 반대했던 김창숙이 이끄는 유교는 지원에서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일제 때의 사찰령을 존속시켰고 1947년 수도경찰청장은 서울에 무당이 굿할 수 있는 곳은 15개 처로 제한했다. 일본종교단체들이 남기고 간 많은 재산이 적산으로 분류되었는데, 일본신사와 조합교회의 재산은 대부분 기독교에 불하되었다.

 

영락교회, 경동교회, 남산의 기독교 박물관과 장로회신학교 등이 그렇게 설립되었다. 1946년에 형무소 형목 제도가 실시되었는데 전국18개 형무소의 교무과장직에 일제히 목사들이 임명되었고 그들은 공무원 월급을 받았다. 또한 천주교회의 반공적인 입장은 자연스럽게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었다.

 

 천주교회는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압수한 조선정판사를 불하 받아 [경향신문]을 복간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미군정에 접근이 가능한 교육을 받은 세력이었다.

 

2) 해방 공간 개신교 단체들의 성격과 정치적 입장

 

개신교 단체들의 성격

강인철은 종교사회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해서 해방 이후 개신교 집단을 6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1) 「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945~1960」, pp. 262-63. 이 분류는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여러 집단들이 신학적 특성, 정치적 성격, 미국과의 관계, 친일의 경력에 따라 어떻게 서로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지 살펴보는데 큰 도움을 준다.

 

 

①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45.8)―중도파(김구, 김규식)

기독교신민회(45.12)-온건우파(김구)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45.12)-우파(이승만)

그리스도교연맹(47.7)-우파(이승만)

기독교민주동맹(47.12)-좌파(김일성)

 

기독교 정치단체들의 정치적인 입장

  1. 신탁통치안―모스크바 3상회의(45.12)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중심으로 최대 5년간 4개국 신탁통치안을 제시했다. 우파와 교계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2. 남한 단독정부수립안 ―한반도문제를 이양 받은 UN은 단독정부안을 제기했다. 이승만은 이를 찬성했다.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엄요섭, 조향록, 이강훈, 강원용 등 교계청년운동)가 유일하게 단정반대, 남북협상을 지지했다.
  3. 남북협상 실패와 김구의 암살로 교회 안에서 김구ㆍ김규식 노선은 소멸했다. 해방정국에서 개신교는 이승만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

 

좌우협상파(강원용-가운데줄 왼쪽에서 두번째)

 

 

3) 기독교 국가 재건론

해방정국 (45-48)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거나 기독교에 기초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논의되고 있었다. 1945년 11월 남부대회가 열릴 때, 김구, 김규식, 이승만이 모두 참석하여 기독교정신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고 호소하였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대한민국 초대국회의 개원식에서 국회의원이었던 이원영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자신도 국회의장 자격으로 “하나님과 애국선열과 삼천만 동포 앞에” 선서했다. 

 

초대국회의원 208명중에 21%인 44명이 개신교인이었다. 장차관 242명중에 38%가 개신교인이었다. 당시 신자비율은 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극소수 임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기독교 국가 건설을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기독교에 우호적인 미군정, 정교일치의 사고,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 해방정국의 열띤 국가 재건 분위기 등이 기독교인들에게 적극적 정치참여 환경을 조성했다. 또한 기독교의 위상이 높아졌고 풍부한 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4) 일제잔재의 청산 실패

 

교단재건 이후 한국교회의 과제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일제 때의 기득권자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을 유지했다. 이 과제를 실패한 핵심 이유는 민족분단과 정치적인 이유였다.

 

해방공간 통치자였던 미군정은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일제관료를 활용했다. 일제 시대 경찰 8천명 가운데 5천명이 경찰에 재직하였다(46).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이 47.7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통과시켰으나 미군정은 거부했다.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특별처벌법(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 친일지도자들

 

친일헌병 박종표 무죄석방-(마산경찰서 경비주임으로 다시 근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제헌국회는 9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49.1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장로교목사 정인과, 감리교 감독 양주삼과 정춘수, 기독신보사장 전필순, 장로교 부총회장을 지닌 김길창 등이 구속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의 방해(49.66사건)로 반민특위는 일년도 되지 않아 해체되었고 구속된 교계 지도자들은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⑵ 북한정권하의 기독교

 

1) 사회주의 정권의 성립과 교회의 반응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은 평양에 입성했고 군정이 시작되었다. 기독교와 북한정권이 충돌하게 되는 이유는 신앙의 자유 뿐 만이 아니라 정치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북한의 교회는 반공적이었고, 남한의 이념과 체제(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를 선호했다.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 중심인물들은 중농, 부농, 지주 혹은 자본가 계층이 많았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교회와 북한정권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해방 이후 북쪽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단체들을 결성했는데 이것은 생존의 모색이었다.

 

  1. 평남건국준비위원회(조만식, 오윤선)
  2.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3. 황해도건국준비위원회(김응순목사)
  4. 평북자치위원회(위원장 이윤필 목사)
  5. 기독교사회민주당(윤하영, 이유필, 한경직 목사)
  6. 조선민주당(조만식, 이윤영)-좌우합작/1945년말 조선노동당원은 4,350명이었으나 조선민주당원은 수십만 명이었다.

 

북한정권과 교회의 충돌은 신탁통치 문제와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나타났다. 1946년 1월 평남인민위원회가 신탁통치 반대를 결정하자 소련군정은 조만식을 연금하고, 조선민주당은 그를 친일파로 몰았다. 그후 기독교인들은 조선 민주당에서 대거 탈당했다. 북조선 사회주의 세력은 1946년 2월 임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46년 11월 3일 주일 오전 11시를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국회의원)일로 공표했다.

 

인민위원회선거(1946.11)

 

소련군의 중재로 조만식(왼)과 김일성의 만남(1945.9)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재건파는 모든 형태의 정치참여를 거부했고 이북5도연합노회는 북한당국에 5개항의 결의문을 전달했다.

 

  1.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2. 정치와 종교는 이를 엄격히 구별한다.
  3. 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요, 권리이다. 교회당은 예배 이외에는 여하한 경우도 이를 사용함을 금한다.
  4. 현직 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한 경우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5.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2) 북조선기독교도연맹

 

이북5도 연합노회는 교인들에게 새벽기도부터 밤12시까지 강단을 지키고 선거에 참여치 않도록 했고, 사회주의 정권은 “마귀”이며 선거용지는 “마귀표”라고 주지시켰다. 북조선임시위원회는 크게 당황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행동을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했다. 김일성은 장로교, 감리교 지도자들 10여명을 불러서 일요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은가 반대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였다.

 

사실 북한에서 기독교인의 수는 개신교, 천주교를 합해도 2-3%에 불과했고 인민위원회 선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감리교 목사 홍기주와 장로교 목사 강량욱은 적극적으로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다. 이북5도연합 노회의 일요일 선거거부 사건은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친정부적인 교회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외종조부인 강량욱 목사에게 기독교인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거국사업에 적극 참가할 수 있게" 새로운 조직을 결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북조선기독교도련맹(조기련)이 조직되었다(46.11.28)

 

조기련의 결성 이후, 북한의 교회는 친사회주의적인 교회와 사회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교회로 양분되었다. 월남하지 않고 북한에서 생존하려면 기독교인들은 조기련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1948년9월 조기련 회원 수는 85,118명이었다.

 

신학교문제

이북5도연합회는 평양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결정했다. 교장에 김인준 목사가 임명되었다. 그는 기독교도연맹 가입을 거절했기 때문에 1947년 정치보위보에 체포되어 순교했다. 1947년 1월 이성휘 목사가 교장에 추임했다. 조기련은 장로회 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통합하여 기독교신학교로 재편성했고 각각 600명 200명이었던 신학생을 줄여 120명의 학생만 남겼다. 1950년 3월 양 신학교는 통합되었다. 이성휘 목사는 평양이 탈환될 때 공산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김인준 목사

 

3) 북한의 종교정책

 

북한의 종교정책은 제한기-탄압기-말살기의 과정을 거쳤다.

 

1.제한기-해방직후~6.25전쟁

2.탄압기-6.25전쟁 기간

3. 말살기-6.25전쟁 이후

 

6.25전쟁 당시 북진정책의 과정에서 남쪽 교회의 선무활동이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노출했고 남쪽군대를 환영했고 그 후 기독교는 말살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북한교회사에 관한 글들은 한편으로 북한의 종교탄압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교회의 수난을 강조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종교집단의 허용여부, 그 범위의 크기 만을 가지고 정치집단을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평가에 한계가 있다.

북한정부의 교회탄압은 분명 종교적 박해였지만 그 외에도 교회의 정치참여, 그리고 친일에 대한 탄압도 함께 있었다.

 

해방직후 북한교회의 정치관여에 대한 평가

 

 한철하(1968)

  • “ . . . 북한의 교회가 자기의 정치적 풍토를 더 현실적으로 직시 하는 가운데, 오히려 처음부터  정치적 영역에서 있어서는 양보하고 교회로서의  최소한의  공간만 요구하고 나섰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여 본다. . . . 또는 더  나아가서  사회적  성분에  대한  공산당 이상의 예리한 자기 비판을  가하는 가운데 오히려 무산 근로 계급으로 자신을 떨어뜨리는 용기를 나타냈어야 할 것이 아니었나? 

 민경배 (1981)

  • “……북한에서 기독교인들 일부는 조선민주당이요 기독교 사회민주당이요 해서 해방 직후 막 바로 정치 정당활동을 시작하였고 그것이 결국 한 특수계층 곧 가령 부농이나 지식인과 같은 유산층과의 관계를 굳히게 되었기 때문에 박해를 혹 자초하지 않았던가 하는 가정이다. 교회는 오히려 사회성분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성서적 사랑을 실천하여 스스로 가난하고 곤궁한 무산층과 함께 길을 간다는 용기를 나타내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북한의 교회는 처음부터 예민한 신학적 사고를 깊이 하면서 정치적 수준에서 지나친 대결을 피하고 오히려 종교적 차원에서의 존립을 획득할 수 있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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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지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1.10 그림이나 사진이 나타나지 않으면
    글의 제목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ohyh45님의 블로그'가 나오며 관련 자료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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