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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작성자이지명|작성시간12.11.15|조회수1,129 목록 댓글 0

Ⅰ. 선교사들의 입국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외국에서 복음을 접한 이들의 적극적인 복음 전파와 선교 청원에 힘입어 1884년 들어서 한국선교를 위한 미국에서의 준비가 가속화되었다.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으며, 감리교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회 아펜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J. W. Heron)이 입국하여 미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하였다.

1. 한국의 첫 선교사 알렌

1) 알렌의 조선 입국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 )은 1858년 4월 23일 독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Etthan Allen)의 후손으로 태어나 1881년 중부의 명문 오하이오의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대에 진학해 학업을 마치고, 1883년에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세계 선교의 붐을 타고 1883년 봄 알렌은 북장로교 선교부에 중국 의료 선교사로 지원했고, 곧바로 그 청원이 받아들여져 그 해, 갓 결혼한 아내 패니와 함께 중국에 파송되었다. 1883년 10월 11일 중국에 도착한 그는 상해를 거점으로 하여 선교사역을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알렌에게는 25살의
젊음, 2차 대부흥운동에서 체험한 뜨거운 성령의 역사, 미지에 대한 담대함이 있었으나, 선교 경험의 미숙, 어린 나이, 동료 선교사들과의 마찰, 아내의 건강 악화로 인해 첫 1년간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알렌은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중국에서의 선교가 여의치 않자 선교지를 옮길 생각을 했다.

헨더슨 박사(Dr. Henderson)와 몇몇 다른 상해 의료 선교사들이 알렌 선교사에게 한국행을 권면하자, 마침 한국에 관심이 있던 알렌은 함께 묵고 있는 윌리엄 홀트(William S.Holt) 선교사와 상의한 후, 1884년 6월 6일 한국세관(the Korean Customs Service)의 요셉 하스(Joseph Hass)에게 한국에 의사가 필요한지를 문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다시 3일 후인 9일에 뉴욕 북장로교 선교부 엘린우드에게“한국의 여러 외국 공관들과 세관에서 의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허락하신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그곳에 가서 선교사로서 열심히 일해 보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자신을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해 줄 수 있는지 전보로 알려 달라고 조심스럽게 문의했다. 7월 22일 알렌은 선교부로부터 한국 입국을 허락하는 전보를 받았다.

아내가 출산을 한 후 아내를 상해에 남겨 두고 그 해 9월 14일 남경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한 알렌은 9월 20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틀 후 상해에서 같이 온 중국인 어학 선생과 함께 매우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당나귀를 타고 서울에 입성했다. 처음 그의 공식적인 입국 신분은 미국공관의 공관의였고, 후에 영국, 중국 그리고 일본의 공관 의료를 담당했다.

고종은 알렌의 도착 후 푸트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자리에서 그가 이전에 선교사였는지, 또 선교사 자격으로 입국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를 원했다. 이때 푸트는“그는 미국 공관의이다.”라며 선교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피해 나갔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조선 사람들에게 선교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지양하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예배를 드리며 자신을 이곳 조선으로 보내 주신 주님의 뜻과 섭리를 헤아리고 있었다.

2) 갑신정변(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대원군의 실각 뒤에도 계속 개화정책 구현이 미흡하고 오히려 수구파가 정권을 주도하는 것을 본 개화파는 일본을 등에 업고 정권찬탈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민영익과 서광범 등 견미사절단으로 미국에 입국했던 상당수의 수구파 지도자들은 비록 3개월의 짧은 미국체류였지만, 이 기간 동안 동양보다 수세기를 앞선 미국의 문화와 문명을 목도한 후에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의 미묘하고 복잡한 정치 기류로 인해 민영익과 서광범의 동반관계는 얼마 가지 않아 금이 가고 말았다. 민영익은 서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청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 원했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급진적이라고 할 만큼 적극적이었던 서광범과의 사이에 갈
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구파와 개화파의 갈등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 불란서의 압력을 받고 있는 청국이 한국 주둔군의 반을 철수하면서 기회는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일본은 일본을 등에 업고 개화를 꾀하는 한국 내의 친일 세력의 개화파들과 결탁해서 물리적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거사를 계획하고, 12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이 날을 거사일로 잡은 것은 각국 공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개화파 지도자들은 일본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사관학교 생도들을 쿠데타에 동원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으로 국왕을 호위케 한 후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필요한 무기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박문국에 고용된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주선을 통해 일본에서 밀수입하여 조달했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일본 공사 타케조이가 배후에서 지원했으며, 직접 행동할 사람들도 김옥균이 골라 일본에 파견했던 유학생 출신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거사에 참여한 개화파들은 저들이 원했든 원치 아니했든 간에 일제침략지반의 앞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 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일본인 낭인 4인을 배치하고 일본군 30명을 창덕궁과 경우궁
사이에 배치해 두었다. 12월 4일 저녁에 개최하기로 계획된 만찬회는 예정대로 일본영사를 제외한 서울주재 각국 외교관들과 척족일파가 참석한 가운
데 진행되었다. 자객들을 연회장 가까운 곳에 숨겨 두었고, 안국동 별궁의 방화가 실패하자 연회장에 인접한 가옥을 방화함으로 거사가 시작되었다. 연회장에 있던 수구파 지도자들이 외국 공사들과 함께 급히 밖으로 도피하자 숨어 있던 개화파 자들은 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개화파 일당은 거사 후 급히 창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에게 지금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속이고 고종을 통해 일본군의 호위를 요청케 하는 한편,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겼다. 일본군의 호위 속에 경우궁 안은 일체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12월 5일, 개화당은 각국의 공사, 영사들에게 신 정권의 성립을 통고하고 혁신정강(革新政綱)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 그들이 마련한 혁신정강은‘문벌의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확립, 관제의 개혁과 용관(冗官)의 혁파, 전세제(田稅制)의 개혁과 재정의 일원화, 군제의 통합과 순사 제도의 신설, 고관회의에 의한 정책 심의 그리고 형정(刑政)의 시정’등이었다.

일본 군대가 12월 5일과 6일 왕궁을 지키는 동안 급진 개화파 지도자들은 거짓으로 왕의 조서를 만들어 6명의 대신들을 왕궁으로 소환시켜서 모두 살해했다.

그러나 12월 6일 아침 6시에 일본 타도를 외치는 군중의 외침이 들렸고, 그날 오후에 3,000명의 한국인의 지원을 받는 600명의 중국정예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훗날 그리피스가 말한‘유혈의 거리 전투’(a bloody street battle)가 발생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 군대는 즉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갑신정변은 삼 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새로 건립한 우정국과 일본 외교부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일본 민간인이 살해되었으며, 권좌를 버리기를 거부한 홍영식은 중국 군대에 체포되어 중국군 캠프로 끌려가 거기서 처형되었으며, 갑신정변에 연루된 11명도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청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갑신정변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12월 30일 청국 대사가 3,000명의 청군을 대동하고 한국에 도착했고, 같은 날 일본대사 이노우에가 2,500명의 일본군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수개월 동안 조선 정국은 매우 긴장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885년 4월 18일 청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양국 군대가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1885년 10월 5일 대원군이 청국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으로 긴장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개화파들은 한국 선교의 장을 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885년에는 박영효가, 1888년에는 김옥균이 그리고 1895년에는 유길준이 서구문명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그 뿌리가 되는 기독교의 수용을 상소와 보도 형식으로 주창한 것 등이 한국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지극히 세속적인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3) 알렌의 광혜원 설립

갑신정변 때 뜻하지 않은 화재로 왕궁으로 가기 위해 우정국 밖으로 먼저 뛰쳐나갔던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수구파의 지도자인 민영익은 개화파의 자객의 칼에 일곱 군데나 찔려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 마침 한국 정부 세관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an Mollendorf)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민영익을 식당으로 급히 옮겨 응급조치하고 한 시간 후 다시 세관본부로 사용하는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알렌 의사를 황급히 불렀다.

알렌 선교사가 도착하자 14명이나 되는 한의들이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으나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어진 혈관은 동양의학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의사들은 알렌의 치료를 극구 반대하였다. 저들은 ‘고귀하신 민대감의 몸에 서양 오랑캐가 감히 손
을 대고 치료하는 것은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민영익의 생명이 점점 위독하여지고 자신들의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해지자 끝까지 반대할 수 없어 알렌을 부르게 되었다. 알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신유의 은사를 내리시사 민대감을 살려냄으로 선교의 길이 열리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치료에 임하였다. 알렌은 민영익의 깊은 상처를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치료했다. 그리고 상당한 걱정과 불안 속에서 석 달이나 치료해 주었다. 비록 노련한 의사는 아니었지만 알렌은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고, 민영익의 외상은 놀라운 속도로 치유되었다.

1885년 1월 27일 민영익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알렌에게 현금 10만냥을 제공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정2품에 해당하는 참관 벼슬까지 하사했다. 후에 민영익이 알렌의 은혜에 감사해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하며 “당신이 미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위해 하늘
에서 내려왔다." 고 생각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와 함께 알렌이 고백한 대로 민영익의 회복은 이 은둔의 나라 한국의 지도자들에게 서양의학과 외과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알렌이 민영익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서양의학 기술을 소개하고 후에 직접선교의 길을 열어 준 최초의 서양병원 광혜원의 설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전기가 되었다. 알렌은 1885년 1월 한국주재 미국 공관 폴크를 통해서 한국에 서양병원 설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1885년 봄, 조선 정부는 병원설립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회답을 보냄으로써 그해 4월 10일 한국에 침대 40개를 갖춘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인 광혜원이 개설될 수 있었다. 광혜원은 ‘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이며, 갑신
정변 때 죽임을 당한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집을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4월 26일 개설된 지 16일 만에 광혜원은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이름인 제중원으로 개명되고 왕실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되었다.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이 개원되기 5일 전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그곳을 선교거점으로 삼고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1885년 6월 21일에 입국한 장로교 의료 선교사 존 헤론(John Heron), 같은 해 5월1일에 입국한 학문과 경건과 복음의 열정을 균형 있게 겸비한 감리교 의료 선교사 스크랜톤, 1896년에 입국한 의료 선교사 앨러스도 처음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제중원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때를 기다리던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체재할 수 있는 은신처이며, 활동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 제중원이 후에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고, 오늘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이 되었다.

알렌은 1887년 선교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관 소속 서기관이 되었다. 1889년 선교본부로부터 재임명을 받았으나 1890년 선교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다시 서울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897년에는 총영사, 1901년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일했다. 이런 변천 때문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알렌의 소명과 그의 모난 성품을 들어 제발 다시는 선교사로 임명해 주지 말 것을 미국 선교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얼마 후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에비슨 선교사가 도착해 공관으로 자리를 옮긴 알렌을 대신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알렌은 1884년에 한국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과 의료 활동을 통해서 선교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언더우드의 입국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정식 선교사의 입국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입국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1) 언더우드의 성장 및 교육 배경

(1) 출생 및 유년기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적인 관심이 많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었고, 그의 증조부인 토마스 언더우드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또한 토마스의 아내는 스코틀랜드 출신인 알렉산더 와우 박사(Dr. Alexander Waugh)의 딸인데, 박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서 능력 있는 설교자였으며, 해외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지닌 분이었다. 언더우드와 알렉산더 와우 박사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는데, 관대한 마음 씀씀이, 넓은 박애심, 연합에의 사랑, 자비, 지도 및 조직의 자질, 지적인 은사 등을 들 수 있다.

언더우드는 이런 신앙의 계보를 가진 가정에서 신앙적 유산을 받아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는 주의 재림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을 완전히 물려받았다. 해서 주의 재림은 언더우드에게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언더우드가 다섯 살 되던 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기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몇년 후 재혼했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 10살 된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12살 먹은 형 프레드 언더우드(Fred Underwood)와 함께 프랑스의 불로뉴 슈메르(Boulogne Sur Mer) 지방에 있는 가톨릭이 운영하는 기숙사 남학교에 보냈다. 가톨릭계 학교라 해서 소년들을 개종시키려 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소년들은 영국인 교회에 출석하면서 흔들림 없이 개신교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곳에는 영국 학생들이 있기는 했으나 주로 프랑스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두 형제는 기숙사에 들어오자 언제나처럼 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했다. 당시 세속화되어가던 가톨릭계 학교에서 볼 수 없었던 낯선 이 모습을 보던 프랑스 소년들은 베개, 장화, 빗 등을 던지며 조소했지만, 두 형제는 굴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에 처음에는 방관하던 영국 소년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형제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 소년들도 저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여 취침하기 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숙사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어릴 때 언더우드에게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집중력 때문에 언더우드는 한 번 하고자 결심한 일은 그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이든, 또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다 해도 그것을 뚫고 나가 결국 거의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끝내곤 했다.

(2) 미국에서의 청소년기

1872년 언더우드가 12살 되던 때에 부친은 그의 가족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 뉴저지주의 뉴더햄(New Durham)에 정착했다.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언더우드가 화란개혁교회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후에 언더우드가 보여 준 타 교단에 대한 관용, 신학적인 유연성, 동료들과의 친화, 부흥운동에 대한 열정 이 모두는 화란개혁교회에서 물려받은 유산들이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주일 오후의 대부분을 자녀들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주일에는, 아이들은 교회 놀이를 하곤 했는데, 이런 경우에 호러스는 언제나 설교자 역을 맡았다. 그는 의
자 위에 올라서서 정식 예배와 똑같이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청중과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설교를 하곤 하였다. 프레드는 가장 성자답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고, 존은 장남으로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 둘 중 한 사람이 설교를 담당하는 것이 제격일 수도 있었는데, 설교자의 역할은 언제나 호러스가 맡곤 했다.

훗날 실제로 설교단에 서서 청중들을 사로잡아 감동시켰던 그 재능 그리고 한국의 이야기를 그렇게 힘차게 설파했던 그 재능의 상당 부분이 이 당시에
이미 발견되고 발전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이 호러스에게 맡겨졌던 것이 아닐까싶다.

미국에서의 소년 시절 동안, 소년들은 많은 복음사업에 관여하였다. 교회와 주일학교에서의 서너 번의 정규 예배 외에도 이들은 선교학교에 참여하였으며, 유니온 힐(Union Hill)의 암흑가에 종교서적을 배포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한 번은 술집에서 전도하던 중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나가라고 거칠게 소리친 적이 있었다. 소년들은 예의바르게 절을 하고 물러났지만, 난폭한 행동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음 주에 침착하게 다시 방문하였다. 소년들은 경찰을 부르겠다는 협박을 받았으나, 열 살 때에도 그 소란스러웠던 기숙사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이들인지라, 이제 열여섯, 열일곱이 된 나이에 한두 명의 문지기가 저지한다고 해서 단념할 리가 없었다. 결국 술집 사람들은 옛날의 프랑스 학생들처럼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에 굴복하였고, 이 상냥하면서도 동시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어린 복음전파자들과 친해지기까지 하였다.

이 시절에 호러스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로브 교회에서 봉사하던 메이번 목사(Rev. Mabon)였다. 호러스는 그의 밑에서 자라면서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하게되었고, 학자처럼 탐구하는 자세로 책에 몰두하여, 여섯 달이 지나자 대학에 진학하는 데 필요한 헬라어를 모두 배우게 되었다. 메이번 목사는 호러스가 브룬스윅에 있는 화란 개혁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학과장직을 맡고 있었다.

(3) 청년기

이민 후 자기의 본업인 문방구 제조에 착수하여 성공한 아버지는 언더우드를 장차 목회자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1877년 뉴욕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다시 가세가 기울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언더우드는 20여 리나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통학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형편을 불평한 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졸업 시 졸업반을 대표하여 고별연설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 속에서도 신학교로의 입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1881년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 1784년에 설립된 화란개혁교회(RCA) 교단 신학교 뉴 브룬스윅신학교는 비록 외형적으로는 프린스톤신학교와 견줄 수 없었지만 그리피스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 선교사, 학자를 배출한 훌륭한 신학교였다.

호러스는 이목구비가 단정한 외모에 성실, 헌신, 영성 그리고 지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남다른 복음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언더우드는 신학교 은사들의 인상에 깊게 남은 남다른 학생이 되었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그를 관찰했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썼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는 수업이 시작되는 첫날 뉴 부룬스윅의 신학교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는데, 나는 어떤 이에게 그가 누구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를 처음 보았는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어떤 목적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집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호러스는 말씀 연구와 신학공부, 그리고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하루 5시간만 자는 고된 일과를 감당했다. 한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마는 성격 탓에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동안에도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학업과 복음 사역에 전념하는 열성을 보였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거의 매일 그가 무슨 종교적인 일로 뉴 브룬스윅의 어떤 거리를 외투자락을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그의 급우 중 한 사람은 이야기 하곤 했다.

이러한 활동이 학업에 지장을 주리라고 믿는 교수들은 그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러스의 활동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또 그가 하는 행동들이 학급에서 그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거나, 5시간의 수면과 19시간의 학업과 일을 강철과 같이 견뎌내는 그의 몸에도 무리를 가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교수들은 실제로 그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뉴 브룬스윅의 가장 큰 화란 개혁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이스튼 박사는 호러스와 마음이 통하는 인물이었다. 영혼에 대한 정열로 불타오르던 그 목사는 이전에는 변화가 없고 냉랭했던 교회에 불을 질렀다. 계속적인 부흥, 놀라운 회심들, 새벽기도와 저녁기도, 예배 후의 모임 등으로 넘쳐
나게 된 이 교회는 모든 이웃 교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호러스는 부목사가 감당해야 할 만한 역할을 감당해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주일 하루 내내 일곱 여덟 번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열정적인 활동을 감당했다.

2) 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준비

언더우드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네 살 때였다. 언더우드는 인도에서 온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가 될 결심을 했었는데, 선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자 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의학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오지의 선교부에서 일할 충분한 준비를 갖추는 데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의학도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뉴욕대학교에서의 4년 그리고 뉴 브룬스윅신학교에서 3년간 그가 경험한 배고픔과 어려움, 고학과 면학, 근면과 성실은 후에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중요한 훈련과정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관해 처음 접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인 1882-1883년 겨울이었다. 그의 급우 가운데 한 사람인 앨버트 올트먼스(Albert Oltmans)가 뉴 브룬스윅신학교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한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200만 내지 1,300만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고 있어 이곳에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한국에 대한 선교를 촉구한 또 하나의 계기는 한국에 대한 윌리엄 그리피스의 도전을 통해서였다. 1882년, 언더우드의 뉴 브룬스윅신학교 10년 선배인 그리피스는 그 유명한‘조선: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를 출판해 한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방대한 자료의 섭렵과 예리한 필치가 조화를 이룬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당시로서는 한국에 관한 가장 무게 있는 서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고, 달레의‘한국교회사’나 로스의‘한국의 역사, 고대와 근대’(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와 더불어 한국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서적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 관한 역사, 문화, 사회는 물론 한국의 대 외국교류관계, 그리고 선교 전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그러면서도 국제 정세와 선교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기술했다. 당시 세계무대의 뒤안에 가리어져 있던 은둔의 나라 한국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낸 작품이었다.

또한 신학교에서 마지막 3학년을 보내던 1883년과 1884년 사이 뉴 브룬스윅신학교 학생들 앞에서 행한 복음주의운동의 대변자 피어선(A. T. Pierson)의 강연은 언더우드에게 많은 유익이 되었다. 뉴 브룬스윅에 재학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점점 더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준비한 터였기 때문에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많은 난관과 어려움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신학교의 마지막 학년인 1883년의 여름 동안, 언더우드는 뉴저지주 폼프돈의 한 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는 선교의 명분을 강조하여 줄기차게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당회는 만일 외국 선교지에 너무 많은 돈을 내어 놓는다면 그의 보수도 지급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는“걱정마십시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보수를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답했고, 이렇게 되어 선교에 할당되는 예산은 엄청나게 증가하였고(4배), 그도 목회를 마칠 무렵에는 두 배의 보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했고, 1884년 11월에는 뉴브룬스윅 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즈음 그는 비록 인도에 가기로 결정은 했지만, 한국과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오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선교본부에 올린 선교 제25주년 기념식 연설(문)에서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882년과 1883년에 걸치는 겨울, 지금은 토오쿄오의 명치학원에 계시지만 그 당시에는 학생이었던 엘트먼 목사(Rev. Dr. Altman)가 뉴 브룬스윅의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 놓고 한 보고서를 읽어주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조약에 의해 서양 세계에 마침내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은둔의 나라에 관한 것으로, 그분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천이백만 내지 천삼백만의 사
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것, 교회가 문호개방을 위해 기도했고, 결국 1882년 슈펠트 제독을 통해 맺은 조약에 의해 미국에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선교를 위한 아무런 준비활동도 없이 일 년여를 보냈다는 생각 때문에, 저는 한국에 갈 사람을 찾는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
다고 믿고 있었고, 이런 신념하에 그곳에 갈 특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일 년 동안 의학 공부를 해온 터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누군가 기꺼이 한국에 갈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서둘러 한국에 갈 사람을 물색해보았지만,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 채 일 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 사업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하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에 울려온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인도가 필요로 하는 것, 인도에의 특별한 부르심에 대한 저의 믿음 그리고 그 소명을 위해 각별히 준비해 오던 일들이 떠올라 제가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저는 개혁교회 선교부(The Reformed Board)에 두 차례나 신청을 했으나 그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자금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장로교에도 두 번 신청했으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미국에 남아있거나 인도로 가는 문은 넓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교회
의 요청을 수락하는 서신을 써서 그것을 막 우체통에 넣으려는 찰나, 어떤 목소리를 들은 듯했습니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그래서 언더우드는 서신을 보내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재차 장로교 선교부에 신청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갈 때 막 문을 나서는 우체부를 지나쳤다. 엘린우드 박사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사는 방금 편지 한 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선교부가 원래 파송하려 했던 사람이 사정상 갈 수 없게 되어 언더우드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수일 내에 임명을
받게 될 것을 알리는 편지였다.

이 무렵 브루클린(Brooklyn)의 라파예트 장로교회의 맥윌리엄(Mr. McWilliam)씨는 미국 선교부의 위원 한 사람이 한국의 문호는 아직 개방된 것이 아니라고 쓴 글을 읽고, 엘린우드 박사에게 한국의 상황을 문의하였고, 엘린우드 박사는 맥윌리엄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맥윌리엄은 한국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데 써 달라고 그 자리에서 6천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주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따라 한국 선교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미지의 나라였다. 해서 언더우드의 형제들은 만일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저 어두운 지역으로 꼭 가야 하겠다면, 최소한 영국에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에게 작별 인사는 해야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884년 여름, 언더우드는 대서양을 건너 삼촌, 숙모, 사촌들을 짧은 기간 동안 방문하였다. 언더우드는 런던 선교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의 총무직을 맡고 있던 삼촌인 에드워드 존스 목사(Rev. Edward Jones)를 방문하여 그곳에서‘거의 20년 전에 우리도 그곳으로 한 사람을 보냈는데, 그 후론 소식을 못 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도 결코 낙심하거나 한국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한 달 후인 1885년 1월 25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많은 돈을 가지고 떠난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손수 커다란 카메라와 타자기 그리고 가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짐의 화물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현금을 거의 다 써버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돈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호텔 비용으로 다 나가버렸기 때문에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빈털터리 상태였다.

언더우드는 하나같이 한국선교를 염원하고 후원하던 헵번(J. C. Hepburn)을 비롯, 그곳의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동양에서는 어디서든 선교사끼리 만나면 그들은 곧 형제를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사람의 집, 지갑, 시간 등 모든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선교사 신임장을 갖고 있기만 하면
누구든 얼마만큼의 돈이라도 빌려주는 것이 통례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선교사는 그 돈을 갚아줄 수 있는 미국의 커다란 선교부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교사들은 오래된 동양의 전통에 따라 그들의 정직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뒤흔들 수 없는 확고한 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돈 문제에 관해서는 걱정이 없게 되었다.

한국과 같이 외떨어진 곳에 가는 증기선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언더우드는 배 위에서 그리고 선원들의 집에서 특별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인 이수정을 만났는데, 그는 한국으로 전령을 보냈고, 언더우드는 그와 함께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한국에 들어갈 때 그가 번역한 신약 마가복음을 들고 입국할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웬만한 예인선보다 별로 클 것이 없는 증기선이 한국으로 출항할 준비를 갖추었으므로 언더우드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도시에서 며칠 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일본말도 모른 채 낯선 집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묵던 어느 날 밤, 아주 경이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갑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했을 때, 일본말로 불려지는‘만세 반석’(Rock of Ages)의 부드러운 곡조가 한밤의 정적을 타고 은은하게 흘러나왔고, 뒤를 이어 엄숙한 기도 소리가 들어 왔던 것이다. 뜻밖에도 자신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흐뭇한 희열을 느끼며 언더우드는 소지품을 지키려고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단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도처에서 들었다. 로마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라든가, 한국인의 야만성이라든가, 한 그루의 나무도 없고 지저귀는 새도 없으며 한 포기의 꽃도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최근에 서울에서 일어난 무시무시한 폭동(갑신정변) 때에는 일단의 혁명가들과 일본인들이 간신히 항구로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그럼에
도 언더우드는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한국행을 단행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3) 언더우드의 입국과 활동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 아침에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아내가 임신 중에 있었기때문에 입국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미국 공관 폴크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주일 후 아내를 데리고 일본에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피스가 말한 바,“ 이 땅에 상주한 첫 안수받은 선교사”가 된 언더우드는 4월 7일 서울
에 도착해 4월 10일부터 광혜원에‘약제사’로 들어가 의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마가복음의 번역과 사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후 장로교 선교회의 헤론(Heron) 의사 부부가 6월에 도착하였고, 에니 엘러스(Annie Ellers)는 국립학교 교사들과 함께 1886년 6월에 도착하였다.

(1) 교육 사역

언더우드는 처음에 수술을 집도하는 알렌을 도우려고 했으나 피를 보고 두 번이나 기절해 할 수 없이 내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거의 동시에 경신학교의 전신인 존 디 웰즈 학교(John D. Wells School)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립 운동가이며 해방 후 입법의원 원장을 지낸 김규식이 부모를 잃고 가난에 굶주리고 있을 때 언더우드를 만난 것이 바로 경신학교에서였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양반으로서 관직에 있었는데 정치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귀양을 갔고, 모친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삼촌들은 생활이 궁핍하여 이 아이를 돌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건립된 고아원으로 그를 데려왔다. 그러나 네 살짜리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 아이는 다시 친척들에게 돌려보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 몸 역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필사적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아이가 죽을 경우 언더우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사들과 선교사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더우드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가 극진히 간호하였다. 결국 그 어린 생명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이 아이는 빠른 속도로 영어를 익혔으며, 마침내 한국 그리스도인 교역자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한 사람이 되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교회나 YMCA(1900년 설립)에서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몇 년 동안 언더우드의 비서로서 일을 보기도 하였다.

(2) 성경번역사역

학교사업 외에 1887년에는 성서번역을 추진하기 위해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결성했고, 1890년에는 문서 선교를 위해 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했다. 성서번역은 언더우드의 필생의 사업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에 온 정성을 기울였지만 특히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아펜젤러, 스크랜톤의 노력은 대단했다.

한국에 도착한지 일 년 남짓 되어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공동 작업으로 마가복음의 임시 번역판을 출판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성경을 번역·출판·보급하는 데 열심이어서, 아주 빠른 시기에 상임성서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는 여러 선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산하의 번역위원회를 통하여 번역 사업을 지도하고 통제하였으며, 성서공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인쇄와 출판을 지도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은 번역위원회 소속이었으며, 언더우드는 일생 동안 위원장직을 맡았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기까지 이 일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주님이나 한국을 위해 일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둘 다 이 일에 값비싼 희생을 지불했다. 아펜젤러는 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에 익사하였으며, 언더우드는 1915년 여름 휴가 때, 가을과 겨울에 닥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해 두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개의치 않고 번역 일에 몰두함으로써 결국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성경 번역을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로 생각하였다. 사람의 수중에 있는 성경이 가장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한국을 누비며 많은 성경을 배포, 판매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인 권서인들과 여자 권서인들을 지도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고, 성심으로 그들을 격려하였다.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번역자들이 정확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중국어로 된 성경과 영어 개역 성경을 참고서로 사용했다고 언더우드는‘코리언 미션 필드’(The Korean Mission Field)에서 밝힌바 있다. 또한 언더우드는 ''첫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도착한 지 4 반세기도 안 되어 성경 전체가 한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늦은 일이라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택해 보내 주시고, 지혜와 은혜를 주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지도하신 위대하신 조력자와 교사셨던 주님이 없었다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큰 은사를 주신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린다.’고 하였다.

(3) 전도사역

언더우드는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세례를 베푼 인물이다. 언더우드에게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은 노춘경이다. 그는 외국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한국의 양반으로, 특히 외국 종교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의 많은 동포들이 신앙을 고백하
여 고문을 당하고 목이 잘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알렌 박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는 체 하면서, 언제나 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서재 책상에서 두 복음서를 훔쳐보게 되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새도 없이 급히 그 두 권의 책을 넓은 소매 속에 넣은 다음 훔친 보물을 들고 집으로 달려왔다. 그는 이 책의 놀라운 매력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마음에도 그저 아름다운 것일 뿐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밤새 그 책을 읽고 아침에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용감하게도 복음이 좋고 웅대하며, 죽든 살든 믿음을 갖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언더우드는 후에 이 일을 회고하면서“이 사람을 보면, 우리는 마치 그를 뒤따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어두운 한국에 동이 틀 날이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한 사람의 신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시려고 작정하신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임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고 하였다.

노춘경은 1886년 7월 11일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으며, 다음해 봄에는 또 3명이 세례를 받아, 이로부터 첫 교회가 조직되었다. 1887년 12월 언더우드의 집에서는 7명의 세례교인만이 참석한 한국 최초의 성찬 예배가 드려졌다.

그 외에도 언더우드는 남장로교 선교회와 캐나다 선교회의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 준 인물이며, 연합 선교의 이상을 통해 한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선교의 개척자였다.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성경번역자로서’, ‘편집가로서’, ‘여행가로서’, ‘정치가로서’그리고‘평화의 사도로서’그가 이룩한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선교의 계획 이면에 언더우드의 신앙과 이상과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이 반영되어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 양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의 생애에는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 화란개혁교회 교단과 뉴 브룬스윅신학교의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19세기 부흥운동의 전통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4) 언더우드 뒤를 이어 입국한 북장로교 개척 선교사들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6월 20일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J. W. Heron) 부부가 일본에 체류하던 스크랜톤 어머니, 스크랜톤 아내,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하고 이어 훈련된 간호사 앤니 앨러스(Annie Ellers)와 후에 언더우드의 아내가 된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Lilias Horton)이 입국해 한국의 의료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영국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헤론은 14살 때 부친을 따라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로 이주해 메리빌(Maryville) 대학과 테네시대학교(University of Tennesse)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교수 요원으로 남아 달라는 테네시 의과대학의 요청을 뒤로 한 채 1885년 6월에 입국하여 그 달 21일에 제중원 의사로 임명받았고, 1887년 9월 알렌이 선교사직을 사임한 뒤에는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사무엘 마펫이‘이상적인 의료 선교사’,‘ 신실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던 헤론은 언더우드와 스크랜톤과 더불어 성경 번역위원에도 임명되었던‘가장 성공적인 의사 및 외과의사일 뿐만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 깊은 책임 의식을 갖고 있었던’의사였다.

1897년 12월‘코리안 리파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에서 헤론의 사랑하는 동료 다니엘 기포드(Daniel L. Gifford)는, 헤론은 어느 누구보다도 맡겨진 의료 선교사역에 충실했던 양식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왕으로부터 가난한 옹기장수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국인은 숙련된 그의 손길을 통해 육체적인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외과 의사였던 그가 휘두르는 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였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그의 헌신적인 치료와 정성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치료가 단순히 숙련된 의술을 통한 치료에 그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겸손히 쓰임 받겠다는 신실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헌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믿음의 형제, 그것은 바로 헤론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가난한 민중에서부터 여러 공관들과 왕의 충실한 시의였던 북장로교 선교사 헤론은 5년 만인 1890년 7월 2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충성하던 그가, 하루 이틀을 병석에 누워있다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해진 것이었다. 둘러앉은 한국인과 여러 동료 선교사들에게 그는 희미한 의식을 가다듬으며“예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가 함께 있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먼저 하늘 나라로 갔다.

그러나 이 땅에는 그의 시신을 묻을 만한 단 한 평의 땅도 없었다. 서울 가까이의 양화진에 매장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언더우드와 헤론의 조사들이 거주하는 선교회 소속 집 뒤뜰에 임시 매장하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제물포에 외국인 묘지가 있었으나 한여름에 30마일이나 떨어진 그곳까지 시체를 옮겨 매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그의 유해는 미국 공관안에 임시 매장되었다가 다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이장되어 고이 잠들어 있다.

헤론을 잃은 것은 참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전후하여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때 한국 땅을 밟은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① 길모어(G. W. Gilmore, 吉毛, 1857-?)

길모어는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대학을 다니던 중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1886년 한국에 왔다가, 서울의 유력자들의 자제들을 가르치고자 설립된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학업에 열의가 없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 뒤 귀국하였으며, 1894년엔 이 학원도 폐교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길모어는 전체 15장으로 구성된‘서울풍물지’를 기록하여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 책에서 길모어는 국토, 정부, 서울의 모습, 언어, 국민, 가정생활, 복식과 장식, 여성의 생활, 놀이, 종교, 자원, 문명화로의 진보, 외교관계, 조선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생활, 선교사업 등에 관해 보고, 느낀 바를 비교적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② 기퍼드(D. L. Gifford, 奇普, ?-1900)와 헤이든(M. E. Hayden, 1857-1900)

1888년에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기퍼드는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1890년에는 정동여학당 학장 헤이든(M. E. Hayden)과 결혼했다. 그는 1892년에 창간한 The Korean Repository에 한국 선교의 활동 및 한국문화에 대한 많은 글을 기고했다. 언더우드학당에서 교사로 활동했던 그는 1900년 4월 10일 경기 남부지방의 선교 순회 도중 갑자기 사망했다.

헤이든은 1857년 미국에서 태어나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9월 29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서울 정동여학당 2대 당장에 취임하였으며, 1890년 기퍼드와 결혼하였다. 기퍼드와 함께 여성 선교 사업에 주력하다 1900년 남편이 죽자 한 달 뒤에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

③ 게일(J. S. Gale, 奇一, 1863-1937)

1888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을 졸업한 게일은 그 해 YMCA선교사로 내한하여 조선성교문서회의 창립위원이 되었으며, 성서공회 전임번역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1891년 2월 토론토대학 YMCA선교부 해체로 북장로교 선교부에 소속되었다. 1900년부터 연동교회 담임선교사로 목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듬해 조선성교문서회 3대 회장에 선출되어 적극적인 문서전도활동을 펼쳤다. 1903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위원과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1908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에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 이후에는 주로 성경번역과 찬송가 개편에 힘써 1925년에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글과 저작들을 남겼다.

④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

하노버대학과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마펫은 1890년 1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언더우드로부터 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펼쳤으며, 이 무렵 그는 모두 3차례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1893년 평양에 선교부를 본격적으로 설치하였으며, 전도활동을 통해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01년 평양신학교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1904년부터 1924년
까지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그 후 그는 숭실학교 학교장으로 시무하기도 했다. 그는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업을 총괄한 서북기독교의 대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⑤ 베어드(W. M. Baird, 裵偉良, 1862-1931)

미국 하노버대학과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베어드는 1890년 아담스(A. L. Adams Baird, 安愛理, 1864-1916)와 결혼하고 1891년 3월 25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했으며, 1895년 12월에는 대구로 선교구역을 이전하여 활동했다. 1896년에는 서울 예수교학당과 곤당골 사립학교 교사를 겸직했으며, 1897년에는 평양지역 선교회로 이전했다. 이전하자마자 그는 그의 사랑방에서 숭실학당을 시작하였다. 이 학당은 1906년 합성 숭실대학으로 발전했다. 1916년 숭실대학장직을 사임하고, 이후 공과교재 집필 및 편집과 기독교서회 편찬위원, 성서공회 성서출판위원으로 주로 문서사업과 성서번역작업분야에서 활동했다. 베어드 부인은 남편과 함께 파송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여성사업, 문서전도, 육영사업에 헌신했으며, 학생들을 위한 교과서의 번역, 찬송가번역 등을 하는 한편, 문학소설을 저술할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⑥ 빈턴(C. C. Vinton, 賓頓, 1856-1936)

북장로교 선교사로 1891년 4월에 내한한 빈턴은 서울 국립병원 제중원 의사로 활동하다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893년 11월 제중원 원장을 사직하고 개인진료소에서 치료, 복음전도에 전념했는데, 평양, 의주, 만주 등지에 이르는 전도여행을 했다. 조선성교문서회의 창설에도 관여했으며, The Christian News, The Korea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 등을 발간하는 데 실제적인 책임자로 활동했다. 1904년에는 나병환자 수용소 설치에 공헌했다.

⑦ 스왈른(W. L. Swallen, 蘇安論, 1865-1954)

1892년 11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스왈른은 관서지방 개척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평양지방 선교사업의 개시 및 평양주재 선교사로 위임받았다. 한 때 함남 원산선교부로 파송되기도 했으며, 1899년 숭실학당 관리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190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 초대회장이 되어, 1903년 마펫, 베어드 등과 함께 평양신학교를 발족하고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⑧ 그레이험 리(Graham Lee, 李吉咸, 1861-1916)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이듬해 관서지방 개척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형편상 서울로 돌아와 연동교회 설립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후 1895년 한국인 조사 한석진을 대동하고 평양에서 개척선교를 시작했다. 1901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1907년 1월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대사경회를 개최하여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⑨ 에비슨(O. R. Avison, 魚丕信, 1860-1956)

에비슨은 1890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2년 6월 미북장로교 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그 해 11월부터 제중원 의사로 활동했다. 제중원에서 그는 처음으로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1890년대 이후 제중원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하던 그는 1904년 세브란스의 기금으로 병원을 준공,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1913년 병원장을 사임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1934년까지 일하다가 은퇴 후 귀국했다.

⑩ 밀러(F. S. Miller, 閔老雅, 1866-1937)

피츠버그대학과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밀러는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이듬해 그는 예수교학당(이후 경신학교가 됨)의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방침대로 발전시켰다. 1895년에는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0년부터는 충청도 전도사업에 종사했는데, 이후 청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지역을 복음화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문서활동을 통한 기독교선교를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위와 같은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인해 복음 전도가 활기를 뜀으로써 북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선교단체가 되었다.


3. 아펜젤러의 입국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는 1885년 4월 5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여 합법적으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제물포에 도착한 직후 본국의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날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아펜젤러는 자신이 외친 이 기원을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해서 그리피스는 그에게‘한국 복음의 개척자’,‘ 한국인의 사도’라는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1) 아펜젤러의 성장 및 교육 배경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 소더톤에서 기드온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와 마리아 게르하르트(Maria Gerhart)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메노나이트 출신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 속에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줄줄 암송할 만큼 독실한
신앙 훈련과 경건의 훈련을 받았고, 1872년 11월 12일 임마누엘 개혁교회에서 피터 피셔(Peter S. Fisher)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개혁파 전통을 준수하는 전형적인 장로교인이 되었다.

그러다 18세 때인 1876년 10월 1일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며칠 후인 10월 11일부터 무려 3년 동안이나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옮기는 문제를 고민하다 감리교로 이적했다.

1879년 경에 그의 교회생활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랭카스터에 있을 때 그는 감리교도들과 많은 교제를 하면서 여러 교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4월 5일자 일기가 증명하듯이, 이때 그는 한동안 정신적 불안상태에 빠져 있었고, 동시에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불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는 보다 풍부한 체험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제일감리교회에서의 기도 모임과 조모임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며,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 연회의 회의록을 검토하고 감명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선택한 교회가 하고 있는 선한 사업은 나에게 기쁨을 준다.”또 그 다음 주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개혁교회에서 감리교회로 옮기는 문제에 대한 이전의 모든 생각과 논쟁들이 오늘
모두 끝났다. 나는 감리교회의 완전한 신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택한 일이다. 이 일은 한동안의 기도와 묵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1876년 10월 1일 회개한 이래 나는 주로 감리교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개혁교회에서 보다 훨씬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감리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오늘 내가 한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펜젤러는 1879년 4월 20일 스미드 목사가 목회를 하던 랭카스터 소재 제일감리교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감리교도가 되었다.

아펜젤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위한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봉사를 의미했다. 그는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단지 소극적으로 선하다는 데 자족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였다. 신약을 읽으면서 그는 주님이, 유혹에 넘어간 자나 버림받은 자, 혹은 소위‘죄인’들을 경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체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나 선한 사마리아인과는 정 반대 되는 사람, 즉 자기가 정통임을 주장하는 게으름뱅이들을 당장 꾸짖으신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아펜젤러는 행동과 유리된 지식이란 질병이나 죄악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은 주후 33년 경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주후 1870년에 바로 그의 면전에서 하신 말씀인 것처럼 그에게 실감나게 들려왔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신 인자되신 주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위엄 있어, 그 자신에게 들려오는 절대적인 명령과도 같았다. 아펜젤러는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영혼의 목자와 설교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가를 배우기 위해 랭카스터에 있는 작은 예배당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아펜젤러는 음악적 재능을 포함한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예리한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농담의 요점을 재빠르게 파악하며 사물의 즐거운 측면을 판별해 냄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흥겹게하여 많은 짐들을 가볍게 만드는 윤활유 같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가 후에 한국인들의 마음을 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2)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 준비

아펜젤러는 지방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랭카스터의 개혁교회 계통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마친 후, 뉴저지 주에 있는 두루신학교(Drew Seminary)에 갔다. 아펜젤러는 제임스 스트롱(James
Strong) 박사, 크룩스(G. R. Crooks) 박사, 업햄(S. F. Upham) 박사, 커목크(R. L. Cummock) 박사, 윌리(J. Wiley)박사, 실버맨(J. P Silverman) 박사 그리고 1912년까지 학장직을 맡았던 헨리 부츠(H. R. Butz) 박사 등 영향력 있는 교수들 밑에서 신앙과 지적인 훈련을 쌓는 한편, 당시 미국 신학생들에게 일고 있던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처음에는 일본에, 다음에는 한국에 복음선교사로 갈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신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펜젤러는 1883년 10월 24일부터 28일까지 하트포드에서 열린 신학교 연맹대회(The Americal Inter-seminary Alliance)에 참석해 선교사로서의 비전을 다짐했고, 그곳에서 장차 함께 한국선교를 위해 젊음을 불태울 총명한 청년 언더우드를 만났다.

비렌즈(A. F. Behrends), 뉴톤(Richard Newton), 핫지(A. A. Hodge), 타운센드(L. T. Townsend), 고든(A. J. Gordon)등 신학과 선교 분야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들이 대거 하트포드 선교 대회의 강사들로 참여했다. 그리피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들은“모두가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이었고 여러 교단들을 대표하는”“영감어린 강사진들”이었다. 이
미 이 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10월 22일 친구 워즈워드(J. S. Wadsworth)와 선교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선교를 결심했던 차였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전에 없는 선교 열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와의 역사적인 만남은 아펜젤러에게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어넣었다. 본래 아펜젤러가 가려던 선교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으나 한국선교를 지망했던 친구 워즈워드가 어머니의 중병으로 한국행이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친구를 대신하여 한국선교를 결심한 것이다.

아펜젤러는 1884년 12월 17일 랭카스터의 제일감리교회에서 엘라 닷지(Ella Dodge)와 결혼식을 올렸다. 닷지란 이름을 가진 미국인들은 그 대부분이 영국의 체스터(Chester)에서 1629년에 배를 타고 매사추세츠의 살렘으로 건너온 청교도 윌리엄 닷지(William Dodge)의 후손들이다. 이 가문 출신의 엘라 닷지 역시 가문의 이름에 손색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내와 동반자가 되어 그를 땅 끝까지라도 쫓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해외로 갈 준비가 되어 있던 여인이었다. 아펜젤러 부부는 결혼 후 곧바로 수더튼의 오랜 농가를 방문하였다. 이곳 고향에서 크리스마스 주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그의 한국 선교가 확정되었으며 곧 떠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친지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집을 떠나기까지 한 달 밖에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아펜젤러는‘교회의 부르심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고 순종하였다.

1885년 1월 14일 드루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아펜젤러 부부의 한국행을 축하하는‘대단히 감동적인 파송예배’를 드렸고, 거의 전 신학교 교수와 학생이 역까지 나와 이들의 한국행을 축복해 주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 젊은 학생들은 그가 먼 이국땅에서 자신들을 대표하여 그리스도의 사신의 직무를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며‘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과‘우리 그 강에서 만날까’라는 찬송을 불렀다.

1885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북감리교 파울러 감독(Bishop Fowler)에게 안수받은 아펜젤러는 아내와 함께 그 다음날인 3일, 이미 1884년에 미 감리교 선교사 후보생으로 지명된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 내외, 스크랜톤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
1831-1929)과 함께‘아라빅’(S. S. Arabic) 호에 몸을 싣고 한국을 향해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명문 예일대학과 뉴욕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스크랜톤은 1882년부터 1884년까지 오하이오 주에서 개업하다 아펜젤러보다 앞서 1884년 12월 북감리교 한국선교 후보생으로 내정을 받고 같이 한국을 향해 출발한 것이다.

1885년 2월 27일 요코하마에 도착한 아펜젤러 일행은 3월 5일,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맥클레이 선교사 자택에서 열린‘제1회 한국 선교사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가 열린 야오야마 에이와 학원(英和學院, Anglo Japanese College) 구내에 있는 맥클레이 집에는 맥클레이 부부,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톤 부부, 메리 스크랜톤 등 7명의 선교사와 박영효와 이수정 등 2명의 한국인이 참석했다.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감리교 한국 선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으며, 아펜젤러 일행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틈나는 대로 한국어를 습득하고,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한국선교를 준비하였다. 아펜젤러와 언더우
드 일행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1885년 3월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 지도자들이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던 기간이었다. 자연히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이들 일행 중 스크랜톤은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피신해 와 있던 박영효를 만나 그로부터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맥클레이 선교사도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망명해 와 있던 김옥균을 만나 유사한 말을 전해
들었다. 비록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아펜젤러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박영효로부터 한국어도 배웠다.

한국선교는, 한국선교의 때가 무르익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의해 한국인들로 하여금 선교를 요구하게 하시고,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불타게 하시며, 모국 선교부와 교회들 또한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게 하셔서 성공적인 출발을 하게 하셨다.

3) 아펜젤러의 한국 입국

1885년 3월 31일 아펜젤러는 미스비시사의 트세리오(Tserio)호를 타고 한국을 향해 떠났다. 같이 여행한 승객 중에는 언더우드, 스커더(Scudder), 테일러(Taylor) 등의 선교사와 조선 왕의 고문인 묄렌도르프(von Molendorf), 지난 12월의 살인 및 폭동(갑신정변으로 인한)에 대해 사과하러 서울로부터 토쿄에 파견되었던 한국 사절단들이 있었다.

1885년 4월 2일 오전 8시 15분, 항도 부산이 시야에 들어왔고, 얼마 후 그들을 태운 배는 부산항에 도착해 잠시 체류하였다. 아펜젤러에게 부산에 대한 첫 인상은‘덥수룩하고 거칠며 헐벗고 쭈글쭈글하며 닳아빠진 것’처럼 보였으며,‘ 가난 그 자체를 보는 것’같았다. 그럼에도 아펜젤러는 부산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 다시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 주
일 오후 3시,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들의 입국을 축하라도 해주는 듯 그날 봄을 재촉하는 4월의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서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사람은 아펜젤러 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3개월 전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국내 정치는 수없이 불안정했고, 기득권을 장악하려는 청·일간의 정치, 군사적 대립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그로 인해 서울 민심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한 미국 대리공사 폴크(George C. Foulk)가 미혼인 언더우드만 입국을 허락하고 신변의 안전을 위해 아펜젤러 내외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물포의 한 호텔(Harry''s Hotel)에 머물면서 공식적인 입국허락을 기다리던 아펜젤러는 얼마 후 폴크로부터“한국의 실정이 외국 여자가 들어와 살기에는 아직 때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인은 잠시 일본에 돌아가 그곳에 있다 오는 것이 좋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4월 13일 국내 입국 약 일주일 만에 아펜젤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아펜젤러는 4월 18일 미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마 일 년 동안은 일본에 숙소를 정할 것 같다고 써 보내면서 “한국에는 복음 선교사보다 의사가 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체류하는 동안에 그는 인력거를 타고 히고를 거쳐 쿠마모토까지 여행하였다.

이 열성적인 선교사는 황국(皇國)의 해변에 오래 살게 되지는 않았다. 곧 한국의 지평선에는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의 기운은 장밋빛 고요로 바뀌었던 것이다. 한국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열정적인 순례자들을 초대할 수 있는 고요한 아침으로 돌아갔다. 스크랜튼 박사는 5월 1일 서울에서 진료에 임하고 있었고, 4월 5일에 도착했던 언더우드는 그 땅에 거주
하는 최초의 복음 사역 선교사로 있었다.

6월 16일 아펜젤러 부부는 헤론(John W. Heron) 의사 부부, 스크랜톤 박사의 모친 및 처자와 함께 전과 같은 기선을 타고 일본을 떠나 다시 바다를 건넜다. 오랜 옛날 중국의 선원 시인들이 처음으로 시를 지은 이래 이 바다는 폭풍우의 바다로 유명하였다. 이 오랜 명성에 어울리게 파도가 높이 솟아 배는 심신을 혼란하게 할 정도로 흔들렸다. 그 사람이 가득 들어찬 배에서 멀미를 하지 않은 사람은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박사의 아기뿐이었다. 6월 20일 배는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 부부는 수도에 선교사 거주지가 마련되는 동안 7월 29일까지 제물포에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에 그들은 항구에 있는 집에 거주하였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의 상황을 아펜젤러의 전기 작가인 그리피스는 아주 재미있게 묘사하였다. ‘그곳은 가게에서 구입한 포장지로 (벽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만 집이라는 구실을 해주는 것뿐 아니라 읽을거리까지 제공하였다. 아펜젤러 부인은 벽에서 여러 상업상의 암호나 부호뿐만 아니라, 사업자의 주소 혹은 “건조한 곳에 보관하시오”라든가 “고리를 사용하지 마시오”라는 경고문까지 읽을 수 있었다. 때는 우기였는데, 지붕은 그물처럼 비가 샜기 때문에 다만 침대라도 젖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서울을 향해 떠났다. 남자는 말을 타고 여자는 남자들이 어깨에 짊어지는 가마를 탔다. 숨을 헐떡이며 옛날이야기와 우스개 소리를 해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에 가마꾼들은 길가는 데 힘드는 것을 잊었다. 한국은 전설의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하는 노동은 대개 노래나 이야기로 흥겨워지며 사교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여 성문이 닫히기 전에 성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그들은 스크랜튼 박사의 환영을 받았으며 알렌의 집에 임시숙소를 정하였다.

아펜젤러는 정동에 집을 사서 깨끗이 수리하고 청소하여 선교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리피스는 당시의 상황을 ‘한국의 주택은 일본의 것보다 훨씬 튼튼하고 따뜻하며 중국의 것보다 훨씬 안락할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온 보통의 근대적 크리스천이 세내어 사는 것도 간편했다. 공간이나 목욕탕, 벽난로 등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들과 같은 부수적인 혜택뿐만 아니라 산소
나 산소와 수소의 복합체(물을 가리킴)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풍요하게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감사한다면’한국에서의 생활은 꽤 견딜만한 것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미국 사절로서 서울을 다녀온 한 외교관이 워싱턴에서 다음 발령을 기다리며 유럽지역 요직으로는 발령이 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교수형을 당하는 것보다는 사이암(태국의 옛 이름)에 가는 것이 낫다. 그러나 한국에 다시 가는 것보다는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한 것에 대해 처음으로 한국에 온 사람은 공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사랑스런 사람들과 오래 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4) 아펜젤러의 활동

정동에 자리 잡은 아펜젤러는 8월 3일 이겸라, 고영필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학교를 설립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그 후 19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더불어 아펜젤러가 한국선교에 이룩한 업적은 연합선교, 성경 번역, 학교 설립, 신학 교육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가히 경이적인 것이었다.

(1) 교육 사역

아펜젤러가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은 서울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이며(4명의 학생을 가르침), 미국 공사관의 폴크를 통해 고종의 허락을 받은 후 1886년 6월 8일에 학교를 시작하여 7월 2일에 첫 학기를 끝냈으며, 1887년 2월에는 국왕으로부터‘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하사받았다. 아펜젤러는 1887년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예배실, 강의실 4개, 도서관 및 산업부를 위한 반 지하실을 갖춘 교사를 지었다. 아펜젤러가 산업부를 둔 것은 한국인들이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경멸하기 때문에 노동의 숭고함을 고취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아펜젤러는 1887년 연례보고서에서 재학생이 63명이며 평균 최고 출석수가 40명 그리고 보고서를 쓰는 날까지 37명의 어른과 소년들이 입학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이 해에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학생들이 나오게 된 것을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펜젤러는 교육 사업의 초기부터 가능한 한 자조를 도입하려고 했다. 자조정책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대가를 낼 줄 모르는 자에게는 도움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새 교사가 생기면서 구 교사는 기숙사로 사용하였으며, 산업부를 두어서 근로 장학생들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자조훈련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의 하나였다. 아펜젤러는 이러한 훈련을 통해 자조·자주·독립의 근대정신으로 발전되어 나가도록 지도하였다.

또한 아펜젤러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자조하는 정신뿐만 아니라 자기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 헌신해야 할 숭고한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지도코자 하였다. 자기 사회와 나라에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섬기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펜젤러는「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는 말씀을 교육을 통하여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해서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을‘欲爲大者 當爲人役’즉‘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
을 받아야 한다.’로 정하였다. 아펜젤러는 학생들을 통역관이나 교환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박학한 교양인으로 양성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다. 봉건적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현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찾아 오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둔 것이다.

교육 사역을 통해 아펜젤러는 1887년 박중상, 한용경 두 학생을 개종시켜 예비 교인으로 만들었으며, 1888년 종교의 자유가 없어 신학부를 시작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학생들 중에는 정규시간 외에 교사들을 만나는 말씀에 대한 진지함을 가진 8명의 학생들이 생겼으며, 1890년에는 대다수 학생들이 종교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하는 성과를 올렸다. 1890년대에 들어서서 아펜젤러는 신앙교육을 한층 강화하였다. 아직 국내에서의 신약성경 완역출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배재학당에서는 한문신약성경을 교과과정의 일부로 삼았다. 교과과정의 일부로 했다는 것은 입학한 전원에게 기독교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몇 가지 현저한 변화가 유도되었다.

첫째,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의 증가된 영적 분위기와 기독교 지식에 대한 열망이 두드러졌고 격려의 원인이 되었다.

둘째, 이러한 영적 분위기가 배재학당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감을 갖도록 했는데, 그것은 크리스천 일반교사를 예비하고 크리스천 사역자 즉 지방의 전임교역자를 훈련시키는 숭고한 기회와 숭고한 사업을 갖게 된 것이었다.

셋째, 위의 교역자 양성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1896년 2월에 신학부를 개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학부 개설은 1개월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것은 아펜젤러의 교육의 방향과 배재학당의 선교학교로서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펜젤러가 지도하는 신앙훈련은 학교의 분위기를 신앙적으로 변모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하여 1890년대 후반에 가서는, 크리스마스 때에 불신학생까지도 예수의 탄생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내린 축복에 대해서 증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학교는 완전히 기독교 정신으로 충만해 있게 되었고, 복음적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힘 있고 진취적인 기구가 되었다. 학생들 중에는 교과과정만 밟고 학교를 마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수는 아펜젤러의 교육이념과 신앙훈련에 큰 영향을 받아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며, 때로는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한 주간씩 기도회를 가지기도 하고, 성경공부반이 열리기도 했다. 이렇게 새로운 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개인의 삶이 변화되자 그 변화된 삶은 누룩과도 같이 사회에 퍼져 들어갔다.

아펜젤러와 함께 교육 사역에 동역한 이들로는 올링거 목사와 존스 목사 외에 벙커(D. A. Bunker), 노블(W. A. Noble) 등이 있다.


4) 아펜젤러의 활동

(2) 전도 사역

아펜젤러는 북감리교 해외선교부가 맥클레이 목사를 통해 한국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바에 따라서 복음 선교를 위한 교육에 전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널리 전파하느냐 하는 것이 선교사로서의 그의 주된 임
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복음을 통해서라야만 이 땅의 민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실히 믿었다.

① 주한 외국인에게 전도

아펜젤러가 한국에 왔던 초기에는 자유롭게 한국인에게 전도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교육 사역을 먼저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85년 겨울부터는 주한 외국인에게 전도하여 1886년 4월 초에는 3명의 일본인이 주일 오후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으며, 그 가운데 1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성경공부 모임이 1886년 가을에는 일본 영사의 집으로 옮겨서 모이게 되었고, 참석자도 12명으로 늘어났다.

② 한국인에 대한 전도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의 개설을 준비하며 일본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알렌의 한국어 교사인 노춘경이 몰래 훔쳐서 읽은 성경을 통하여 복음을 영접하고 자발적으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나선 일 때문이었다. 이 일로 인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한국인을 향한 전도에 큰 용기를 갖게 되었다. 해서 아펜젤러는 그가 설립한 학교를 통하여 조심스럽게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국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이 하사된 1887년 2월경에 한용경이라는 학생이 복음의 진리를 찾도록 인도했다. 한용경은 1886년 가을에 중국어 성경을 보고는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1887년 2월에 들어서 몇 주간 주일 저녁에 어둠이 깃든 후 참빛을 찾아서 아펜젤러에게 찾
아오곤 했다.

또 다른 기회는 그의 제자인 박중상이라는 학생을 통해 찾아왔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기독교에 입교한 듯하며 귀국해서 일본 공사관의 하야가와와 교제를 나누다가 세례를 권고받게 되었고, 아펜젤러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게되었다.

이 즈음에 그는 성서번역에 종사하면서 어학선생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를 권서인 겸 전도인으로 세웠다. 그 이름이 서씨인 것으로 보아서 6년 전에 만주 우장에서 맥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 아닐까 추정된다. 아펜젤러는 서씨의 노력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고 그의 일기에 써 놓았다.

선교사들의 의료 및 교육부문의 활동과 영향력으로 선교상황은 점차 개선되어 갔으며, 한불조약 체결 후에는 기독교에 대한 금제(禁制)가 약화되어 한결 수월하게 복음을 전할수 있었다.

아펜젤러는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시내 남쪽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사서 수리하여 한국인들이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교회당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887년 10월 2일 주일 날 저녁 그는 배재학교 학생인 한용경에게 두 번째로 세례를 주었으며, 10월 16일 주일에는 29세의 최씨 부인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녀는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로 세례 받은 여성이 되었다. 10월 23일에는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예식을 가졌다.

③ 전도여행

아펜젤러는 1887년 4-5월에 걸쳐 지방 여행에 나섰다. 서울을 출발한 아펜젤러는 고양, 장단, 미력, 파주, 임진강, 송도, 금천, 통천, 평산, 서흥, 봉상, 황주, 철도 등을 거쳐 23일에는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평양감사 남정철의 영접을 받으며 평양의 풍물을 견문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아펜젤러는 한국인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절망과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만이 저들의 품위를 높여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여행은 1888년 봄,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같이 북부지방으로 약 2주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들은 의약품과 책자와 소책자들을 팔면서 가는 곳마다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2주일간 전도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서울 주재 미국공사 딘스모어(Hugh A. Dinsmore)로부터 전도여행을 중지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한국정부의 반대에 직면하여 이 전도 사업을 계속해야 할 지 그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것은 오히려 한국정부에 대해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후에 개신교의 선교활동을 용이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1888년 한 해 동안 전도 사업을 위해 1,830마일이나 지방여행을 강행했는데, 그 가운데 1,400마일 이상은 승마 여행이었다. 1889년 2월에는 공주를 그리고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했다. 8개 도 가운데 6개 도를 방문했다.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친절하게 맞아 주었고,
최소한 괴롭히지는 않았다.

서울에서의 활동과 정력적인 지방 전도여행의 결과, 아펜젤러는 1889년 27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29명을 준교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889년 당시의 교인 수는 정교인이 9명, 준 교인이 36명, 준교인 중에서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도중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주재전도사로서 임명받은
사람이 2명이었다. 또한 4명이 권서인으로 채용되었고, 부분적으로 3개의 교회 조직체가 있게 되었다.

④ 교회설립 및 건축

1887년 10월 9일 주일에 아펜젤러가 성경공부를 위해서 매입한 집인 벧엘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했다. 오전에는 선교사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한국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선교사들의 예배에서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번갈아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4명이 참석한 한국인들의 예배에서는 아펜젤러가 1887년 12월 25일에 처음으로 권서인 최씨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설교문을 작성한 후 그것을 읽어줌으로써 설교를 시작하였다. 이런 설교는 아펜젤러가 한국어에 익숙해져서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벧엘교회는 점차 성장하게 되어 1888년 3월 11일 주일에는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비록 영어로 진행된 것이긴 했지만 이 무렵 주일학교가 아펜젤러의 집에서 30분간씩 인도되었다. 또한 스크랜튼 부인(스크랜튼 선교사의 어머니)에 의해 여성들을 위한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부인 예배로서 첫째 날에 21명이 참석했다.

1894년 정동과 이화학당 구역에서 남녀가 각각 따로 모여 예배드리는 회중을 합치면 200명이나 되었다. 해서 예배당을 신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895년 8월 7일에는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교회의 신축공사는 잘 진행되어, 1896년 6월 3일에는 거의 창 높이까지 쌓아져서 건물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교회 건축에 소요되는 경비때문에 크게 고심하고 있었다. 이미 막대한 금액을 투입했지만, 아직도 많은 경비가 요청되었다. 그는 이 건축경비 마련을 위해 그의 아버지에게 눈물겨운 호소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통 끝에 신축 교회당은 1897년 7월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달 8일 종강행사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1897년 10월 3일 주일에 남녀 교우들이 모여 이 새 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렸고, 그해 12월 26일에 예배당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새 교회당이 완공된 것은 그 이듬해인
1898년 10월이었다.

(3) 성경 번역 사역

한국에 도착했을 때 선교사들은 존 로스 목사가 번역한 신약성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서 이것이 매우 불완전하며, 보다 나은 번역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그들은 성서번역상임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아펜젤러는 그 후 수년 동안 이 위원회의 한 구성원으로 일했다. 위원들은 선교사들 가운데서 번역 작업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선출되었다. 아펜젤러는 처음으로 뽑힌 사람들 속에 포함되었으며, 그 이후 계속해서 번역반에 소속되어 일했다. 아펜젤러는 가능한 모든 회기에 이 모임에 참석하기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 일에서 큰 기쁨을 느꼈다.

또한 아펜젤러는 기독교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책들을 출판하기 위해 대한성교서회를 설립하였으며, 주일학교연합과 감리교 선교부 문서회의 후견인으로 일했다. 그리고 올링거 목사와 함께 출판소와 제본소를 시작하여 각종 신앙 서적을 출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올링거 목사와 그의 아내가 1892년부터 ''코리언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를 발행하다가 떠난 후, 그 발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895년부터 4년 동안 아펜젤러는 존스 목사와 함께 이 책을 다시 발행하였다. 이 잡지의 영향력은 전 동양에 미쳤으며, 한국 문제에 대한 권위지로 통했다.

5) 아펜젤러의 순교

1902년 6월 11일 밤,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는 작은 증기선인 쿠마가와 마루호를 타고 가던 아펜젤러는 그가 탄 배가 기소가와호와 충돌하는 바람에 그만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목포로 가던 배에는 그의 번역 조사 조한규와 아펜젤러가 동행시킨 여학생 한 명, 광산기술자 미국인 보울비 그리고 2,3명의 일본인이 동승하고 있었다. 한밤중 짙은 안개 속을 헤치며 항해하던 배는 마주 오던 배와 충돌하게 되었다. 곧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보울비와 아펜젤러는 갑판으로 올라왔으나, 아펜젤러는 자신의 안전보다도 동행했던 조사와 여학생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다. 해서 물에 빠진 여학생을 건지려다 결국 순교하고 말았다.

그는 한국선교 17년 만에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동안 그가 이룩한 선교의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한 달 전, 아펜젤러는 17년 동안의 한국 선교를 이렇게 정리했다.

“한국에서 첫 세례 받은 사람이 생긴 지 15년이 채 안되며, 첫 지방회가 조직된 지 12년이 좀 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세 장로사와 세 지방회가 있고 입교인이 1,296명, 학습인이 4,559명이 있으며, 14명의 본처 전도사와 47개의 교회와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교회는 목회와 교회 경비와 교회 건물들의 경비를 위해 1,600달러의 헌금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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