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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자립하는 한국교회/장로교회의 자립

작성자이지명|작성시간12.11.15|조회수405 목록 댓글 0

 

한국 감리교회에 비하면 장로교회는 훨씬 더 일찍 자립하여 자치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것은 감독교회와 장로교회라는 교회 치리 형태의 차이도 있지만, 한국에 온 네 장로교 선교회들이 연합하여 ‘네비우스 방법’을 따라 실천한 덕분이다. 1907년에는 조선 장로교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선교 역사와 교회사에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독노회의 조직이 대부흥이 일어난 해에 있었던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들 말한다. 그렇다고 새 독노회가 대부흥의 결과로 탄생된 것은 아니지만, 영적 부흥은 교회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각처에 신자는 많으나 치리회가 없으므로, 1893년에 선교사공의회를 조직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완전히 조직될 때까지 전국 교회를 돌아보고 치리하는 상회의 역할을 하였다. 이눌서 선교사가 제1회 회장이 되었다. 교세가 급성장하고 지도적인 한국인 신자들이 많이 육성됨에 따라 1901년에 선교사와 한국인 총대가 합하여 소위 합동공의회를 조직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朝鮮耶蘇敎長老會公議會)라고 하였다. 그 해 회원은 한국인 장로 3명과 조사 6명, 선교사 25명이었으며, 회장은 스왈른(William Swallen, 蘇安論, 1865-1954) 선교사였다.

장로교합동공의회는 선교사들로만 구성된 영어사용위원회(English Session)와 한국어사용위원회(Korean Session)를 두었다. 한국어사용위원회는 선교사와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회합을 하는 모임으로 전국 각지에 설립된 여러 교회들의 소식을 교환하고 문제점들을 토의하였다. 영어사용위원회에서는 신학교 설립과 조선 독노회 설립을 위한 제반 준비 문제 등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하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과도기적 과정에서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 지도자들은 이를 통하여 교회 치리와 그밖의 모든 일을 점차적으로 배우고 익혀서 앞으로 독자적으로 교회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준비를 갖추었다.

1901년 장로교 공의회에서 결정한 주요한 안건은 독노회 설립 방침 의정위원(議定委員)과 장로회헌법 번역위원을 선정한 일과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한 일이다. 사무엘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을 교장으로 선임하고 학교일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1902년 평양에서 장로 두 사람을 학생으로 받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에는 교회 설교자로 일하고 있는 네 사람의 학생이 입학하여 함께 공부하였다. 학생들은 3개월 동안 공부하여 5년 만에 졸업하도록 정하였다. 1905년 장로교 공의회는 이를 인준하고 이름을 평양신학교라고 하였다.

장로교 공의회는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의 노회 조직에 관심을 가지고 논의하였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에서는 가능한 한 즉시 노회를 조직하자고 하였고, 캐나다 선교회도 이 제안에 찬성했으나, 미국의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회들은 먼저 본국 교회의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당장 그 일을 추진할 수 없으므로 미루자고 하였다. 또한 본국인 목사도 없는 상황에서 외국인 선교사들과 본국인 장로들만으로 노회가 조직된다면 건전한 노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장로교 공의회는 물론 선교사들의 본국 교회들도 한국 교회의 교세를 볼 때 독노회의 조직을 더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때가 무르익었음을 인식하였다. 장로교 공의회는 1907년에 제1회 신학교 졸업생들이 배출되어 목사로 장립될 것이므로 그 해에 노회를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로교의 원칙에 의하면, 목사의 장립은 노회에서 하는 것이므로 이를 위해서도 노회가 조직되어야만했다.

평양신학교의 학생 수는 1906년에 50명이었고, 1907년에는 75명에 달하였다. 1906년 장로교 공의회는 그 이듬해에 노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목사 안수 절차를 정하는 한편, 한국 장로교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하기로 한 12신조를 노회에 상정하였다.

1907년 9월 17일, 연초에 대부흥집회가 열렸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첫 노회가 열렸다. 33명의 선교사와 36명의 한국인 장로들이 노회원으로 참석하였다. 임원으로는 노회장 마포삼열, 부노회장에 방기창(邦基昌, 1851-1911), 서기에 한석진(韓錫晋), 부서기에 송인서(宋麟瑞), 회계에 이길함(Graham Lee)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17일 노회의 저녁 집회에서는 이 해에 신학교를 졸업한 서경조(徐景祚),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梁甸伯, 1870-1933), 방기창, 길선주(吉善宙, 1869-1935), 이기풍(李基豊, 1865-1942) 일곱 사람이 목사 장립을 받았다. 장로교의 교세는 목사가 7명, 장로가 53명, 70,000명 이상의 교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세례 교인이 19,000명이었다.

그리고 노회는 장로교 공의회에서 상정한 12조항의 신조를 받아들였다. 이 신조는 1904년 인도교회가 먼저 채택한 것이다. 장로교 공의회는 이미 1902년 조선 장로교회의 노회 조직을 내다보고 신경준비위원을 선정하였다. 준비위원들은 여러 신경을 비교, 연구하던 끝에 1905년에 이 12신조를 조선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도록 정하였다. 그것은 처음에 인도교회를 위하여 선교사들이 만든 것이지만, 신앙고백서란 그리스도의 교회가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는 것이므로, 비슷한 상황에서 이제 자라기 시작하는 한국 교회도 이를 사용할 수 있으며, 간단하면서도 손색이 없는 신경으로 당시의 시대적인 형편에도 적당하고 성경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알고 채택하였다.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고백서를 한국 교인들 스스로 만들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종교개혁 이후 특히 개혁주의교회에서 60여 개가 넘는 많은 신앙고백서가 나온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교회에서도 신앙고백서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자립하는 선교지교회를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와 동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선교지 교회에서 신앙고백서를 기대한다는 것은 1년 된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조급한 생각이다. 이제 처음으로 안수를 받은 목사를 배출한 어린 교회가 신앙고백서를 가져야 할 이유를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만큼 신학적으로 성숙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새로 조직된 한국 장로교 독노회는 신앙고백의 채택뿐만 아니라 교회의 조직과 정치에 관한 문제 등 교회의 제반 사항에 관한 것을 선교사들의 지도에 따라 결정하였다. 선교를 받아 바야흐로 조직되는 교회가 선교사들의 지도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정상적인 일이었다.

독노회는 미국과 캐나다, 호주 장로교회에 노회가 조직되었음을 통고하고 감사를 표하는 한편, 세계개혁주의교회연맹에 회원 가입을 청원하였다. 노회는 또한 선교부를 두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1908년에는 서울에서 노회가 열렸다. 노회원 수는 한국인 59명, 외국인 선교사가 30명이었다. 1909년에는 85명의 한국인과 33명의 선교사가 회원으로 참석했으며, 8명의 목사가 장립을 받았다. 1910년에는 선천에서, 1911년에는 대구에서 노회가 열렸다. 대구에서 열린 독노회에는 목사가 29명, 장로가 112명, 외국인 선교사 46명이 회원으로 참석하였다. 대구의 독노회에서는 이듬해에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총회 총대는 매 5개 지교회에서 목사 1명, 장로 1명을 파송하고, 노회의 기능을 해 온 7개 대리회(代理會)를 7개 노회로 개편하기로 하였다.

1912년 9월 드디어 제1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52명의 한국인 목사와 125명의 장로, 44명의 선교사가 총대로 참석하였다. 선교사 언더우드가 총회장으로, 방위량이 회계로 선출되었고, 나머지 임원진은 한국인이 맡게 되었다. 1913년에는 총회의 총대로 목사와 장로가 동수를 이루게 되었다. 독노회 산하의 7개 대리회는 지방노회가 되었고, 선교사 가운데 목사는 모두 노회원인 동시에 총회의 총대가 되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또 한편 자기 본국 교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이 이중 교적을 가지는 일을 비판하였다.

“선교사 제군의 공(功)과 역(力)이 진실로 의(義)하고 감사할 것은 4장로파가 문호를 각립하지 않고 합동하여 1총회를 성함이 신의 지(旨)를 성취한 의거(義擧)요 성사(盛事)이다.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후에는 독립하여 전도국에도 속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며, 선교사 제군이 역시 자증명하는 바인데 하고(何故)인지 선교사 제군이 자기 노회와 전도국에서 이명하지 않고 엄연히 조선 노회와 총회 회원이 되며, 또 회원이 될 시에는 그 회에 속함이 분명한 것인데 하고인지 조선 노회와 총회가 치리할 권이 무하다 함으로 차(此)로 유(由)하여 모순이 심하지 아니한가. 차는 무타(無他)가 선교사 제군이 조선 교회를 동인시(同人視)하며 형제시하지 않고 야만시하며 노예시함이다. 선교사 제군이여, 성신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결국 하려느냐. 속히 회개할지어다. 차외(此外) 개인의 부족은 거론치 아니하노라.”라고 하였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비판이 비록 대다수는 아니더라도 원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13년 장로교 공의회는 외국 선교사들이 그 수에 비례하여 총회 총대가 되도록 하자고 의논하고 이를 총회에 건의하였다. 1914년과 1916년에 총회는 이 제안을 기각시키고, 목사 선교사는 다 종전과 같이 노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물론 총회 총대가 되어서 한국 교회 대표들과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며 협력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1917년에는 한국인 총대 8명과 선교사 6명이 구성하는 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1920년까지 연구하여 총회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선교사들의 제안으로 이 문제는 한국인 총대끼리만 모여서 협의를 하도록 했는데, 협의 결과 제출한 제안은 1922년의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외국 선교사는 선교회의 위임장을 노회에 제시하고 노회원 가입을 신청해야 한다. 노회는 이를 받아 선교사에게 노회 내의 일정한 지역을 맡겨 선교 사업을 하도록 위촉하면 선교사가 결의권을 갖는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위촉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참관인으로 노회에 참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선교사가 노회의 어느 소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을 경우에는 그 소위원회 안에서 결의권을 갖는다. 또 노회가 선교사들을 총회의 총대로 뽑을 경우에 그 수가 한국인 목사 총대의 반수를 초과할 수 없다. 모든 총대는 동일하게 결의권을 갖는다. 선교사가 노회 회원으로 일단 등록을 하면 노회의 재판법에도 순종해야 한다. 새로 부임하는 선교사는 한국 장로교의 신조를 받아들인다고 공포해야 한다. 선교사의 총회 총대 수는 40명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선교사 총대가 30명을 초과하지 않았다. 한국 장로교는 1907년부터 자립하는 교회가 되었으므로 선교사들은 다만 손님이요 협조자 역할을 하였다. 사실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장로회 공의회’는 “선교사들로 구성된 장로교 공의회의 교권은 한국 장로교회가 조직될 때까지 행사하기로 하되, 한국 장로교회가 조직되면 거기에 이양하기로 한다.”는 1901년의 결의를 확인하였다. 1915년 이후에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늘 한국인이 총회장이 되었다.

(1)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

시간이 지나면서 평양신학교는 신학교로서의 틀을 견실하게 갖추어갔다. 또한 학생들의 신학 수업을 위한 경비도 소속 지역의 지교회들이 헌신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1906년 교수진은 서울의 사무엘 무어(Samuel Moore), 부산의 스미스(Walter Everett Smith), 남장로교의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와 전킨(William M. Junkin) 그리고 호주 선교회의 엥겔(George O. Engel) 등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한국 전역으로 힘 있게 확산되던 1907년에는 학생이 75명으로 증가했고, 1909년에는 재학생이 5개 반 138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이 해에는 졸업생들을 위해 연구과가 설치되어 1년에 1개월씩 1년 만에 수료하도록 했다. 처음 5년간은 북장로교 선교회가 주도하다가 1906년부터 남장로교 선교부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에서 교수를 파송했고, 후에 캐나다 선교부도 여기에 합류하여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모두 협력하는 장로교신학교로 발전했다.

처음 평양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마펫(마포삼열), 리(이길함), 언더우드, 스왈른(소안론), 베어드(배위량), 번하이셀(편하설), 클락(곽안련), 헌트(한위렴), 레이놀즈(이눌서), 게일(기일), 그리고 엥겔(왕길지) 등이었다. 특별히 이 중에서도 마포삼열, 소안론, 곽안련, 이길함, 그리고 이눌서 등은 평양신학교의 발전에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이눌서를 제외한 네 사람은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미국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 1925년 프린스턴 출신의 라부열 선교사에게 교장직을 물려줄 때까지 마포삼열 선교사는 1901년 초대 교장을 맡은 이래 1924년까지 무려 24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평양신학교를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신학교로 발전시켰다.

1907년 6월 20일, 평양신학교는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들은 그 해에 열린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고 1909년에 김필수, 이원민, 최충진, 윤식명, 장관선, 정기정, 최관흘, 김창성 등 8명이 졸업했다. 그리고 1910년 7월 15일에 거행된 졸업식에서는 역대 가장 많은 2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첫 졸업생을 배출하던 1907년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4개의 장로교선교회는 평양신학교를‘장로교회신학교’로 지정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한 후 그 해 6월까지 계속된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사역자로서의 영적인 채비를 갖춘 십자가 군병이 되었다.

1907년 이후 16명에서 33명의 신학생이 꾸준하게 졸업해 1916년까지 총 17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1915년에는 230명이 재학하고 있어서 평양신학교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회신학교”가 되었다. 1916년 신학교 재적생은 본과 187명, 후과 43명, 총 230명이었다.

1916년, 졸업생을 배출한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많은 졸업생들이 각 분야에서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로 갔고, 뒤이어 1909년 졸업생 윤식명과 1912년 최태진이 제주도 선교사에 합류했으며, 길선주와 양전백이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각각 한국에서 가장 큰 평양 장대현교회와 평안북도에서 가장 큰 선천의 선천읍교회를 9년 동안 담임하고 있었다. 한석진이 총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의 편집장에, 1909년 졸업생 김필수가 총회장에, 1912년 졸업생 박태로, 1913년 졸업생 최성주, 1911년 졸업생 김덕선과 차형준, 1913년 졸업생 김내범과 최봉석, 그리고 1914년 졸업생 한경위가 만주 한인들을 위해, 그리고 1910년 졸업생 주공삼이 도쿄에서 한인 목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비록 졸업생 중 한 명이 목사 면직을 당했지만, 1916년까지 평양신학교 졸업생들은 국내 목회 현장이나 해외 선교 현장, 혹은 국내 여러 기관에서 성공적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1908년 5월, 시카고의 맥코믹 여사(麥古默, Mrs. Nettel Flower C. McCormick)의 지원으로 건축비 5,500달러에 달하는 신학교 교사가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의 넓은 대지(약 6,000평) 위에 착공되어 그 다음 해에 준공되었다. “건물은 한식 2층으로 상층은 중앙에 기도실과 교수실이 있고, 남쪽에 4학년 교실이, 북쪽에 5학년 교실이 각각 있고, 하층은 서쪽에 1, 2, 3학년 교실이 연결되어 있고, 동쪽에는 창고와 수위실이 각각 마련되어 있었다.” 교사의 동남쪽 언덕 위에 기숙사 여섯 동이 건축되었는데, 교사 남쪽 옆에는 맥코믹 여사가 보낸 기부금으로 두 채의 한식 건물“맥코믹 기념 기숙사”를 건축했다. 그 외 남장로교에서 지은 언덕 위의 벽돌 2층집은 “알렉산더 기념 기숙사”, 그 뒤에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지은 한식집 2층 기숙사는 “마르다 기념 기숙사”, 그리고 호주장로교 선교회에서 지은 북편 길가의 기숙사는 “빅토리아 기념 기숙사”라 불렀다.

1907년 학교의 교수는 주로 선교사로 구성되었다. 그러다가 1916년 평양신학교는 6명의 정규 교수와 7명의 협동교수를 확보하여 교수진을 확대 재편함으로써 신학교로서의 면모를 더욱 공고히 갖출 수 있었다. 나아가 1918년부터는 신학생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신학지남(神學指南)을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책임 하에 성경사전(Bible Dictionary)도 간행했다. 1921년에는 5년 과정의 교과과정이 1년 2학기 총 3년 과정으로 개편되었고, 지도자 과정을 위해 6주씩 2년의 기독교 교육 과정도 개설했다.

(2)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성격과 신학적 특징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첫째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의 관련성이고, 둘째는 초기 교수들의 출신 학교 성향이다.

첫째, 평양신학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관련하여 설립되고 육성되었다. 교회학교와 성경학교, 신학교조차도 모든 신학교육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인 사경회와 깊은 관련 속에서 진행되었다. 평양신학교는 독립적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이었던 사경회 제도의 연장이었다.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통해서 성경학교를 성공적으로 이수한 사람들을 장로회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추천했고, 또 이들에 대한 신학교육은 성경학교와 연계되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이했던 1934년, 영향력 있는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블레어(Herbert E. Blair)는 평양신학교와 관련하여 너무도 적절한 지적을 하였다.

“성경만이 강조된 교과서이며 연구 교과서이다.… 역사적 칼빈주의의 배경을 지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서를 수납하며, 장로정치를 채용한 장로교인들은 구 프린스턴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치 않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중심이 있는 복음 이야기와 이에 대한 바울의 초자연적 해석을 선교사들이 가르쳤고, 한국교회는 서슴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라고 했다.

스탠리 솔터(T. Stanley Soltau)가 지적한 것처럼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그리고 실제로 전국에 걸친 모든 장로교 사역에서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영감된 말씀(the infallible and inspired Word of God) 으로 존중과 인정을 받아 왔으며, 그곳에서의 가르침은 미국에 있는 프린스턴신학교의 역사적 입장과 유사하게, 매우 강한 복음주의 및 보수주의 톤으로 특징되었다.” 이와 같이 평양신학교가 추구하는 신학교육의 토대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신학생들은 커리큘럼에 따라 반드시 신구약 전권을 공부하고 졸업해야 했다.

이들의 신학적 입장은 성경관은 물론 처녀 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기적의 역사성, 역사적 재림 등을 포함한 전통적인 교리를 계승하는 철저한 복음주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구학파의 전통에 서 있었지만 부흥운동에 대해 열려 있는 전형적인 청교도 풍의 개혁파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처음부터 평양신학교의 설립 목적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신학교육, 기도와 말씀과 전도 세 가지 전통을 그대로 갖춘 목회자를 배출하는 데에 두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평양신학교 출신들은 목회자요 설교자요 전도자로서의 소명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따라서 1938년 폐교될 때까지 평양신학교를 통해서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 평양신학교가 장로교의 구심점인 동시에 한국교회의 영적 구심점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또한 「신학지남(神學指南)」이나 일련의 저널을 통해서 신학교육뿐 아니라 한국의 신학을 정립해 가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은 평양신학교 개교 후 로버트(라부열, S. L. Roberts)가 마포삼열을 이어 평양신학교 교장직을 맡기 전 25년 동안 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 대부분이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이 아니라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평양신학교가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신학교로 발전하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선교사들은 마포삼열, 이눌서, 곽안련 세 사람이었는데, 이 중 마포삼열과 곽안련 두 사람이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 동부의 프린스턴이라 불린 맥코믹신학교는 신학적으로는 구학파의 전통, 즉 프린스턴의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A. A. 핫지(A. A. Hodge, 1823-1886) 그리고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 의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반영하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은 초기 선교사들이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한 선교사들이 구학파 전통에서 보수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이 학교가 여타 구학파 전통에 선 신학교와는 달리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맥코믹신학교가 시카고에 위치하고 있어서 신학적으로는 프린스턴과 같은 구학파 신학을 계승하면서도 무디의 영향 하에 있는 지리적인 여건으로 미국의 구학파의 일반적인 분위기보다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한 선교사들이 어떻게 해서 신학적으로는 미국의 구학파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부흥운동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10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이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맥코믹출신자들이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측면이 신학교에 그대로 반영되어 교육되었고, 자연히 그곳에서 배출된 목회자들이 처음부터 부흥운동을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또한 본래 부흥운동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감리교와 부흥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장로교가 하나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는 감리교에서 시작한 부흥운동이 장로교에 와서 저변이 확대되고 놀라운 결실을 맺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세 명의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와 한국교회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평양신학교 교육의 전체적인 책임을 맡은 마포삼열 선교사는 맥코믹에서 구학파의 신학과 부흥운동의 중요성 두 가지를 몸소 체험한 데다 그것을 12년간의 한국선교 경험과 함께 신학 교육과 연계시켜 평양신학교를 한국교회 지도자를 배출하는 대표적인 신학교로 육성했던 것이다. 마포삼열이 얼마나 보수적인 칼빈주의자였는가는 1934년 선교 50주년을 맞은 희년기념예배 석상에서 행한 그의 기념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복음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며, 만일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확신했다.” 이와 같은 복음주의적 입장은 한국북장로교선교 50주년기념보고서에서 재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신앙은 미국의 구학파 출신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분명한 개혁파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마포삼열 선교사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인물은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1878-1961) 선교사였다. 1902년 한국에 파송된 그는 1908년에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전임교수가 되었다. 그가 주로 담당한 분야는 실천신학이었지만 그의 활동이 꼭 그 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마포삼열 선교사가 행정을 통해 평양신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면, 곽안련 선교사는 수많은 연구서와 「신학지남」에 기고를 함으로써 평양신학교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신학지남」의 3분의 1을 기고했으며, 신학교 교재 설교학과 예배학을 비롯한 50권의 한국어 책을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비롯한 6권의 영어 책을, 그리고 레위기, 민수기, 사무엘, 에스라, 느헤미야, 욥기, 시편, 6권의 소선지서, 또 공관복음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분량의 표준성경주석을 집필한 주인공이었다.

또한 그의 논문과 책들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신학교의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그가 철저하게 성경의 영감을 변호하는 보수적인 성경관을 견지하면서도 끊임없이 현장에 귀를 기울였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만큼 순수 기독교 외에 타종교를 깊이 연구한 선교사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옛 종교들’이라는 저술과 ‘염라’(閻羅)에 대한 시카고 대학 석사학위논문이 말해 준다.

마포삼열 선교사가 행정을 통해, 곽안련 선교사가 학술적인 저술을 통해 평양신학교에 공헌했다면, 이눌서 선교사는 신학적인 면에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박윤선이 고백한 것처럼 능숙한 한국말로 진행된 그의 조직신학 강의는 학생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애플바이(Appleby)가 유니온신학교가 배출한 졸업생중 가장 자랑스러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이눌서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연설에 감동을 받고 1892년 6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에 발을 디딘 후 45년간 순회선교사, 성경번역가, 신학교 교수로 헌신했던 탁월한 선교사였다. 그는 오늘날의 축자영감을 따랐으며, 성경의 완전영감뿐 아니라 무오성을 철저하게 변호했다.

이와 같은 복음주의 신앙과 탁월한 리더십을 소유한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평양신학교에서 교육받은 졸업생들이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07년 7명, 1909년 8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평양신학교는 1938년 신사참배로 폐교되기까지 7명을 배출한 1919년을 제외하고는 해마다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4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1926년과 1927년에는 전후기로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1927년 최초의 한국인 교수 남궁혁 목사가 영입된 후 이성휘(1930)와 박형룡 박사가 차례로 평양신학교 교수진에 합류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평양신학교는 1903년과 1907년의 원산 및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놀랍게 성장할 한국교회를 미리 예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처럼 보인다. 또한 1907년에 조직된 독노회나 1912년에 결성된 총회 역시 평양신학교를 통해 배출된 목회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평양신학교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질의 신학교육은 양질의 교회를 만든다는 사실, 바른 신학은 놀라운 교회 성장의 토대라는 사실을 평양신학교는 역사 속에서 분명히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이 한국교회에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백낙준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평양신학교는 성경 중심의 신학교육을 강조하다 보니 복음전파와 복음의 순수성만큼이나 중요한 복음의 대 사회적 책임을 일깨우는 데 미흡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장로교뿐 아니라 감리교와 성결교의 신학교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장·감·성 각 교회에는 교파주의와 더불어 내세적이고 이원론적인 신앙관이 일반 교인들의 심성에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개혁주의 배경에서 성장하고 개혁주의 신학교육을 받은 언더우드가 게일과 더불어 세대주의 종말론을 소개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써 한국교회의 개혁주의는 역사적 개혁주의와 다른 방향에서 개혁주의를 이해하게 되었고, 심지어 세대주의 종말론의 틀속에서 개혁주의 종말신앙을 이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평양신학교는 한국장로교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평양신학교가 배출한 졸업생들을 통해 한국장로교회는 자연스럽게 장로교공의회, 독노회, 총회를 조직하여 제도적인 틀을 다지며, 자립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

한국장로교회의 경우, 1907년 독노회가 결성되기 전까지 각종 치리회의 조직과 발전은 장로교 선교공의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1889년 데이비스가 입국한 후 북장로교회와 호주 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회 미션과 빅토리아(오스트레일리아 중 1도) 미션 병합 공의회”를 조직했고, 이어 1892년 남장로교회가 입국해 한국선교를 시작하자 1893년 1월 28일에 세 선교회는“서울에 있는 빈톤선교사 집에서”모여 연합으로 “장로회정치를 쓰는 미션 공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결성하여 한국에 개혁주의 신앙과 장로교 정치를 채용한 단일 장로교회를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조선지(朝鮮地)에 갱정교(更政敎) 신경(信經)과 장로회 정치를 사용하는 연합교회를 설립”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각 교단의 벽을 넘어 하나의 장로교회를 향한 결의를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연합 정신과 여기에 동참하려는 선교사들의 실천적인 협력정신이 이 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후 수많은 한국장로교회가 설립되어 노회 설립을 위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1895년 선교사공의회는 산하에 공의회위원회(Committee of Council)를 두기로 하고 서울위원회와 평안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898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조직됨에 따라 1901년에는 남북장로교, 호주 빅토리아, 캐나다 장로교 등 국내의 4개 장로교 선교회가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했다. 장로회공의회는 1901년부터 한국인 대표를 참가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해 장연군 송천교회 서경조와 평양 판동교회 김종섭 두 사람을 장로로 임직하고, 1901년 9월 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서경조, 김종섭, 방기창 세 명의 장로와 양전백, 송순명, 최홍서, 천광실, 고찬익, 유태연 여섯 명의 조사(助師)와 25명의 선교사들이 모여 제1회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했다. 회장에는 소안론 목사, 서기에는 서경조 장로가 선출되었다. 공의회 산하에 전라위원회(남장로교 선교회)와 경상위원회(호주장로교 선교회)가 결성되었고, 그 이듬해에 함경위원회(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각 지방 선교 지부마다 공의회위원회 산하에 당회위원회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장로교 정치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틀을 다졌다.

이 모임은 장로교 정치를 갖는 4개의 선교회를 중심으로 구성된 장로교선교공의회와 우리 한국교회의 장로와 조사들이 함께 뜻을 모아 한국교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장로회공의회는 단순한 협력기구라는 성격을 넘어 독노회 조직을 위한 일종의 예비 기구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01년 회록 서문에서도 “한국에는 아직 노회가 없어서 우리는 임시로 장로회공의회라는 전국적인 회의를 마련했다. 이 회의로 인하여 앞으로 노회가 될 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장로회공의회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한국장로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첫째, 장로회공의회는 처음으로 한국인에 의해 교회 정치 규정을 명시하여 한국교회가 독노회를 조직할 수 있는 기초 골격을 제공해 주었다. 1901년 장로회공의회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헌의를 받아들여 조선자유장로회 설립을 결의하고, 그 이듬해 조선자유장로회 설립방침의정위원에 의해 설립 방침을 결정하였다. 장로 한 사람 이상 있는 지교회 12교회가 있고, 임직할 목사 3인 이상이 될 때 예수교장로회를 설립하고 선교사들에게도 회원권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본국 노회의 회원권과 한국 노회의 회원권을 동시에 소유했다. 비록 논란이 있었지만 이 독노회 조직은 본국의 네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설립 인허를 받았고, 그 결과 1907년에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둘째, 장로회공의회는 한국장로교의 신학적 틀을 제공해 주었다. 1903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소요리문답을, 그리고 1905년에는 교회신경을 채용했다. 한국장로교회가 지향해야 할 신학적 방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시해 준 셈이다. 그것은 미국 장로교회가 존중하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한국장로교회의 신경으로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공의회는 1901년에 김종섭, 방기창을, 1902년에는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를 피택하여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하여 목회자 양성을 위한 한국 신학교육의 토대를 구축했다.

셋째, 장로교라는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타 교파와의 협력을 추구하였다. 1901년에 선정된 ‘갱정교회 총칭명호 의정위원’(更正敎會總稱名號議政委員)은 장·감 공히 교회 명칭을 ‘야소교회’로 통일하기로 결정하고, 그 위에 자신들의 교파 명칭을 추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1902년에는 ‘챤셩시’를 장로교회의 소용으로 하면서 다른 교파와 연합하여 사용할 찬송가 편찬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1905년에는 감리교와 연합으로 찬송가를 공동 편찬하기로 결의했다.”

넷째, 장로교 선교회 간의 협력은 물론 감리교와 선교지 분할 협정을 통해 효율적으로 한국의 복음화를 추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1893년 감리교와 맺은 교계예양이 비록 당시 한국을 방문한 감리교 감독 포스터(R. S. Foster)에 의해 거부되기는 했지만 장·감 선교사들이 존중해 오다 1905년 장로교공의회와 남북감리교 선교회가 장·감연합공회를 조직하면서 한층 더 강화되었다. 선교지 분할 협정은 단순히 선교지 분할만이 아니라 지역 복음화를 위해 순회전도와 조사 양성으로 이어져 실질적인 복음화로 이어졌다.

1888년 언더우드가 백홍준, 서상륜, 최명오를 조사로 임명한 이후 조사의 수효는 급증하여 1905년에는 80명, 그 이듬해에는 105명 그리고 1907년에는 160명이 되었다. 청일전쟁 직후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장로교 선교회는 교회의 지도를 위해 조사 외에 조사의 협조자 영수 제도를 채택했다. 이 제도는 1894년 평양에서 이영언을 영수로 임명한 후 널리 시행되며 1920년대까지 존재했다. 서리집사는 1887년 정동장로교회에서 시작되었고, 안수집사 제도는 1907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1908년 서울 새문안교회에 1명, 그리고 평양에 8명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제도는 한국교회의 제도적인 틀을 다져 장차 한국교회가 자립, 자전, 자치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주었다. 이전의 선교사 중심의 리더십이 이제는 선교사와 한국인 지도자 상호협력으로 발전 확대되어 한국교회에서 한국인들의 역할이 한층 강화된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강화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으로 교회가 늘어났고 자연히 교회를 지도할 한국인 목회자가 필요했다. 한국인들을 목사로 안수해 세우기 위해서는 노회의 설립이 필수적이었다. 1905년 1월 25일 마포삼열은 선교부 총무 브라운(Arthur J. Brown)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 북장로교 총회로 하여금 한국인 목회자 안수에 대한 인준을 받을 수 있도록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미국 남북장로교회 총회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고, 그 해 가을 장로교 선교공의회는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본국 선교부는 선교사들이“단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러므로 교회의 설립은 어떤 나라에서든지 미션 프로그램에서 본질적인 단계로 간주되었다.”이들이“교육, 의료, 사회, 그리고 기타 사역은 수행될 수도, 수행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교회는 반드시 설립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문제는 새로 세워지는 교회의 성격이었다. 이들은 새로 선교지에 설립되는 교회는 복음의 토양에 맞는 성격의 교횓여야 한다는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모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한국적인 토착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한국에 세워지는 교회는 복음의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교회,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에 충실하면서도 한국적 상황에서 그것을 소화하고 계승 발전시킬수 있는 그런 성숙한 교회로의 발전을 교회 설립의 이상으로 설정하고 한국에 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다스려지는“자치”(selfgoverning)의 교회이다.

사도행전이 보여 주는 것처럼 선교지에서 교회를 설립하는 공식적인 대표자들은 안수받은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육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개교회의 임시 직분자들을 세웠다. 세례받는 자들이 증가하면서 교회들에 의해 지도자 선출이 시작되고, 그 다음에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개교회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했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교회 역시 한국인 목사들이 안수를 받을 때까지 선교사 목사가 당회장이 되어 교회를 조직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독립적이고 전적으로 자치하는 교회라는 사실이 반드시 강조되어 왔다.”1915년 이래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총회장에 선교사들이 선출된 경우가 없었고, 선교사들은 총회 석상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자치정신은 1922년에 채택된 장로교 헌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둘째,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는“자전”(selfpropagating)의 교회이다.

왜 한국교회가 그렇게 놀랍게 성장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주저하지 않고“주된 이유는 한국교회가 항상 열심히 전도하는 교회였기 때문이다.”라고 답해 왔다. 초기 선교사들은“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임을 선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강조했다. 학습문답과 세례문답에서도 이웃과 가족과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감당해야 할 중요한 의무임을 일깨워 주었고,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은 사랑방을 복음 전파의 접촉점으로 삼았다. 사경회 기간에 열리는 저녁집회는 일종의 전도집회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사경회가 열리는 낮 동안에 참석자들은 오후에 한두 시간씩 나가 가까운 마을에서 축호전도를 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믿지 않는 자들을 저녁집회에 초청했다.”한국인들에 의한 복음 전도가 한국교회의 기적을 만들어 낸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고 2년 후 "1909년 가을 동안에 자신이 맡고 있는 교회를 방문한 스왈른(W. L.Swallen)은 600명 이상의 성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교회가 세워지고 얼마 되지 않아 남녀전도회가 먼저 조직된 것도, 1907년 노회가 조직되면서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것도, 1912년 총회가 조직되면서 중국선교를 시작한 것도 한국교회가 처음부터“자전하는 교회”(a self-propagating church)였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자전정신은 한국교회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1912년 총회 당시 7개였던 노회가 1933년에는 24개로 늘어났다.

셋째, 한국교회는 처음부터“자립”(self-supporting)의 교회로 자리 잡았다.

1890년에 방문한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을 채택한 후 한국교회는 자립하는 것을 원칙으로 설정했다. 1895년 기포드(D. L.Gifford)가‘코리아 리파지토리’(Korea Repository)에서 지적한 것처럼 선교회는 종교적인 사역을 수행하는 한국인들 극소수에게만 선교비를 지원했고, 대부분의 경우는 한국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책을 사고, 교회 건물을 짓고, 자신들의 전도자들(preachers)에게 사례를 지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1901-1902년 ''''평양선교부보고서''''(the Pyengyang Station Report) 가 밝히듯이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은“자립의 능력이 어느 나라에서든지 처음부터 교회 자체 안에 있다.”고 믿었다. 1893년 1월 장로회 공의회 첫 모임에서 채택한 선교사역의 몇 가지 원칙 가운데 하나가 자립하는 교회였다. “적극적인 교회는 반드시 자립하는 교회여야 하고, 우리는 우리 선교회원들 가운데 의존율을 극소화하고, 대신 자립률을 증가시키고, 그러므로 헌금하는 교인들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1894년에 불과 26명의 세례교인과 그 정도의 학습교인과 몇몇의 교인들의 힘으로 소래교회가 건축된 이후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교회 건물을 스스로의 힘으로 세웠다. 1908년까지 188개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중 186개 교회가 자립하는 교회였다. 1909년‘전환기의 한국’(Korea in Transition)에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교회 건축 헌금에 보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저녁을 굶었고, 새 옷, 옥으로 장식한 은비녀, 그리고 반지를 헌금함에 넣었다.”고 전해 준다. 그런데 자립은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교육 사역에서도 자립은 초등학교, 유치원, 야간학교, 어린이 성경학교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한국교회는 자치, 자전, 자립의 정신을 처음부터 철저하게 실천해 왔다. 특별히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한 이후에 그와 같은 자립정신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아 왔다. 이런 면에서 1907년에 한국장로교의 독노회 설립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 한국인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찬성 위원 9명, 합 78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역사적인“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조직되었다. 바로 9개월전 한국교회에 놀라운 성장을 점화시킨 그 역사적 현장에서 이 민족을 대변하는 독립된 민족교회가 태동된 것이다. 그 역사적 현장에 한국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길함, 배위량, 방위량, 윤산온, 소안론, 곽안련, 이눌서, 업아력 등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거의 모두 참석했다. 장로 총대는 소래교회의 서경조 장로를 비롯하여 봉산군 모동교회의 최덕립, 문화읍 종산교회의 우종서, 백천군의 천광실, 안악군 교동교회의 조병직 등이 참석했다.

지난해 장로회공의회 회장 배유진 목사가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고 게일 목사가 떡을 가지고 축사하고 분병하였고, 배유진 목사가 포도주를 가지고 축사하고 장로들이 분잔하여 성례식을 거행했다. 이어 그 해 공의회 회장이었던 마포삼열 선교사가 남북장로교, 오스트리아, 캐나다 장로교 총회의 허락을 받아 노회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취지를 설명하고“네 곳 총회에서 얻은 권리대로 여러 선교사를 대표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노라.”고 선언했다. 오후 2시에 속회된 노회에서 노회장 선거가 진행되어 게일 선교사의 천거로 마포삼열 선교사가 노회장에, 부노회장에 방기창, 서기에 한석진, 부서기에 송인서, 회계에 이길함이 선출되었다.

1907년 노회는 종래의 소회 대신에 경기, 충청, 평북, 평남, 함경 및 전라도 지방에 7개의 대리회를 두어 노회의 위임 사무를 처리하도록 결정했다. 독노회가 장차 총회로 가기 위해 제도적인 틀을 마련한 것이다. 게일 선교사의 동의에 따라 노회 설립 후 노회 서기는 이 역사적인 노회 설립의 사건을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전보로 알려 주었다. 또한 노회장과 서기 이름으로 미국 남북장로교와 캐나다와 오스트리아 장로교회 총회가 한국장로교 노회 조직을 허락하고 노회가 은혜 가운데 조직된 것을 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1884년에 시작된 한국장로교회가 이제 명실상부한 한국의 민족교회로서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첫 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가 목사로 장립받았다. 이들 가운데 서경조와 방기창(58세)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40세 전후였다. 이 7명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검증된 신앙인들이었다. 1888년 세례를 받은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 평양에서 마포삼열을 도와 복음을 전하다 관가에 체포되어 사형집행 바로 전에 사형을 면한 한석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등 모두가 많은 핍박 속에서도 생명을 담보하고 복음을 전했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이들 7명은 비로소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교회로부터 지도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안수 후 길선주는 장대현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1908년 3월 1일 마포삼열의 도움을 받아 2,001명을 대상으로 첫 세례예식을 거행했다.

독노회가 조직되던 1907년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교회 785개, 세례교인 18,061명, 전체 교인 75,968명, 목사 49명, 장로 47명, 조사 160명, 남 전도인 58명, 여 전도인 38명이라는 규모를 갖출 만큼 외형적으로도 제법 틀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선교가 시작된 지 23년 만에 이와 같은 외형적인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선교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기가 다소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그리고 백만인구령운동이 전개되기 전에 조직적인 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한국장로교 독노회 조직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독노회 조직은 부족하지만 우리의 형편을 반영하는 신앙고백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또 해외선교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가 도약의 틀을 다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① 장로회 신앙고백 12신조의 채택

독노회가 결성되면서 한국장로교회는 소위 12신조로 알려진 장로교 신앙에 기초한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본래 12신조는 영국장로교회가 자신들의 선교지인 인도의 자유장로교회에 제정한 신경으로, 인도에서는 1904년에 그곳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했다. 노회 조직과 더불어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한국의 선교사들은 신조의 서언만을 바꾼 후 한국장로교회의 신조로 채택한 것이다. 평양신학교가 설립된 후 그곳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가르쳐 왔지만 이것을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지 않고 12신조를 택한 것은 “선교지의 문화적인 상황을 감안하고 선교지 교회의 신앙적인 자율성을 배려”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이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간과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요리문답 대·소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요리문답 작은 책을 더욱 교회 문답으로 삼느니라.”는 12신조 서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하다. 비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명문화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신조를 택한 선교사들의 이면에는 한국교회가 12신조 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할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독노회가 채택한 12신조는 간단하지만 아더 브라운이 지적한대로 대체로“복음주의적이며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기독교의 근본교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 창조,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스도의 대속, 성령의 사역, 하나님의 구원에의 예정, 성례, 그리고 종말과 심판에 대해 매우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을 두고 백낙준 박사는 “신앙고백 자체는 칼빈주의 경향이 강하게 표시된 12조의 신조”라고 평했지만, 여기에 담겨진 내용은 실제로 전통적인 장로교의 신앙이라기보다는 복음주의 신앙고백을 더 많이 반영하고있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

첫째는 성경관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신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믿고 행할 본분의 확실한 법률인데 다만 이밖에 없느니라.” 이것은 성경이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정확무오한 법칙”(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이라는 것을 알기 쉽게 의역한 것이다. 당시 프린스턴 신학자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미국 장로교회는 성경관을 정의할 때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the infallible Word written by the inspiration of God)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었다. 성경관을 논할 때 그 출발점이 성경의 영감이었고, 부분적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의미에서 완전 영감(plenary inspiration) 또는 축자 영감(verbal inspiration)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영감의 결과로 성경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했다. 이에 비교할 때 12신조의 성경관은 엄격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는 성경의 영감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경관을 이 정도로 정립하는 데 그친 것으로 보이지만, 본국이나 선교지 어디서나 늘 신학적인 다양성으로 인한 논쟁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을 예견하여 분명한 성경관을 피력했어야 했다. 그러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이라는 사실이 12신조에 명문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이 갖고 있는 성경관이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거나 성경의 무오성을 신앙과 행위에 국한시킨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이 말을 복음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영감된 무오한 말씀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왔다.

둘째는 장로교 전통이었던 분명한 예정론 교리가 명문화되지않고 대신 온건한 예정론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와 같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2신조에는 칼빈의 엄격한 이중예정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고 대신 하나님의 일반적인 구원, 예정만 언급되어 있다. 이 말이 이중예정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천명하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구원의 예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정에 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내용과 조화시키려는 노력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본국에서 받았던 엄격한 장로교 이중예정과는 달리 선교지에서의 오랜 선교사역을 통해 행여 성숙하지 못한 선교지의 교회가 엄격한 이중예정 교리로 인해 복음전도에 장애가 초래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도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05년 감리교와 장·감연합공회 조직을 통해 감리교 선교회와 협력하여 한국선교를 가속화시키려는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2신조가 선교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은 12신조를 채택했을 때 단순히 12신조만을 명문화시키지 않고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요리문답 대·소책자는 성경을 명해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교수할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요리문답 소책을 더욱 교회 문답으로 삼느니라”는 문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2신조에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12신조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반영함으로써 한국장로교회가 틀을 더해 가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왜 그들이 완벽한 신앙고백을 채택하지 않았느냐고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시카고의 맥코믹신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어 부흥운동과 더불어 조직된 한국장로교회는 초기 청교도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부흥운동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장로교 내 신파(New Side)와 유사한 면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②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조직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된 후 한국장로교회는 상당한 제도적인 틀을 다질 수 있었고, 그와 함께 교회는 양적으로도 놀랍게 성장했다. 1906년 12,500명이었던 세례교인 수가 1910년에는 32,500명으로 증가하고, 교인 수도 44,000명에서 무려 11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이왕에 결성되었던 노회로는 외형적인 성장 규모를 소화해 낼 수 없었다.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된 후 전국의 장로교회는 독노회 산하에 경기충청대리회(1893), 평남대리회(1893), 평북대리회(1907), 황해대리회(1907), 전라대리회(1901), 경상대리회(1901), 함경대리회(1902) 등 7대리노회(subpresbytery)를 조직하여 관할하였다. 이들 대리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대리회는 경상대리회로서 186개 교회가 소속되었고, 그 다음이 평북대리회로 160개 교회, 전라대리회는 127개 교회, 평남대리회는 89개 교회, 함경대리회는 78개 교회, 그리고 경충대리회는 50개 교회였다.

이와 같은 각 대리회에 속한 교회의 수는 기성의 노회 규모와 버금가는 것이었다. 이들 7개의 대리회는 소속된 교회만도 무려 737개 교회가 되었으니 당시 노회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듯 각 대리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한국장로교회는 독노회 조직 5년 만에 불가피하게 총회를 설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1년 9월 17일, 대구 남문교회에서 회집된 제5회 독노회에서는 1912년 3월 이전까지 7개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하여 7개 노회가 총회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1911년 독노회에서는 장·감의 선교지 분할 문제의 주도권과 책임을 선교회에서 독노회(총회)로 이첩하는 한편, 주일학교의 체계적인 운영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제5회 독노회의 결정에 따라 각 대리회가 모여서 노회를 결성했다.

드디어 1912년 9월 1일, 7개의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총대 96명(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경창리에 있는 여자성경학원에서 역사적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결성되었다. 독노회장 이눌서의 사회로 진행된 총회에서 전국에서 모인 221명의 총대들은 총회장 언더우드, 부총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방위량, 부회계 김석창 목사를 각각 선출했다. 이와 같은 인선은 예측했던 결과였다. 혹자는 선교사가 총회장에 선출되었다는 것이 이미 한국장로교회가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장로교 정치제도에 익숙하지 못한 국내의 교계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할 만한 완숙한 지도자가 총회장을 맡아 틀을 다지게 하고, 장차 한국교회를 대변할 만한 한국인 지도자를 부총회장에 선출해 미래 지향적인 한국교회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선교사가 총회장에 당선된 것도 선교사들이 표를 몰아주어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참석한 이들 가운데 선교사들보다도 한국인 총대들이 더 많았음에도 선교사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만드는 일에 주역으로 쓰임 받았던 마포삼열 선교사가 1907년 독노회장에 선출되고, 한국선교를 시작한 개척자이며, 한국교회에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을 가져다 준 주인공 언더우드 선교사가 역사적인 첫 총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총회가 결성되던 1912년은 언더우드가 한국에 입국한 지 27년을 맞는 해였다. 26세에 한국에 입국했으니 이로써 그는 자신이 태어난 영국과 성장한 미국보다도 더 많은 세월을 선교지 한국에서 보낸 셈이다.

한국장로교회가 노회 결성 5년 만에 총회를 조직한 것은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총회 결정은 양대 부흥운동으로 끝없이 성장하는 외형적인 교세를 노회 조직을 통해 총회 산하에 조직적으로 관할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깊다. 또한 총회가 조직되던 1912년은 신구약 성경 번역이 완료되어 우리의 성경을 가진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총회의 결성은 한국교회가 외형적인 틀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나 리더십 측면에서도 한국인에 의한 교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초석을 놓은 사건이었다. 불과 한국선교 4반세기 만에 그와 같은 제도적인 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를 염원하던 선교사들의 의지의 결과였으며, 선교사 주도의 한국교회가 이제 한국인 중심의 리더십으로 서서히 이관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확실히 1900년대 접어들어 10여 년을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놀랍게 성장을 거듭했고, 그와 함께 기독교의 대국가 및 사회 문화적인 영향력도 더욱 확대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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