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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 '소래교회'

작성자이지명|작성시간13.01.01|조회수187 목록 댓글 0

 

황해도 소래교회 (대한민국 1호 개신교회) 


인삼 장수 형제가 세워


"이곳 사업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척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9월 27일) 저녁에 14명의 교인으로 한국 땅에서는 첫 번째 그리스도교회 조직을 완료했으며…."(1887년 언더우드의 보고서)

"우리는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영어로 기도하고 시작했으며 우리는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1887년 10월 아펜젤러의 일기)19세기 후반 미국 북장로회와 북감리회가 각각 조선에 파견한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887년 가을 조선에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했음을 알리는 기록을 남겼다. 이들이 교회 설립이라는 감격을 맛보기까지는 조선에 도착한 후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두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었다. 조선의 쇄국정책이 풀리면서 의료와 교육 분야에 선교사의 입국이 허용되자 조선 선교를 자원한 것이다. 각기 다른 교단에 속했지만 일본에서 만난 이들은 그해 3월 31일 나가사키항을 출발한 상선 미쓰비시호를 함께 타고 부산을 거쳐 이날 제물포에 도착했다. 당시 아펜젤러는 26살, 언더우드는 25살이었다. 한 살 차이였던 이들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키며 선교의 씨앗을 뿌리고 교육·의료사업에 앞장섰다.

조선 정부의 전교(傳敎) 금지 방침이 느슨해지자 두 선교사는 서울 정동에 나란히 교회를 설립했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가 정동 선교사 사택에서 14명의 신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현재의 새문안교회를 창립했고, 아펜젤러 역시 그해 9월에 정동에 벧엘예배당(현재의 정동제일교회)을 마련하고 10월 9일에 첫 공개예배를 드렸다. 이 두 교회는 신자 수에서 한국 개신교계의 80%를 넘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모(母)교회'로 불린다.

한편, 이들 외국인 선교사들이 도착하기 전 조선에는 조선인들이 설립한 개신교 공동체가 있었다.황해도 장연군 대구면송천리에 1883년 5월 세워진 '소래교회'였다. 소래교회 설립의 주역은 중국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하던 서상륜·경조 형제였다. 서씨 형제는 1880년대 초 만주에 와 있던 스코틀랜드장로교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통해 개신교를 접했다.

1882년 한글 성경 등 개신교 서적을 숨겨 들어오던 이들은 검문에 걸려 투옥됐다 탈출한 후 친척이 살던 황해도 장연으로 옮겨와 소래교회를 설립했다.

서씨 형제의 열정은 이 마을을 중심으로 서북지방에 개신교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1886년 무렵에는 약 70여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도 있다. 1887년초 언더우드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본격화할 때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고 새문안교회 설립 후 주축이 된 것도 소래교회 교인들이었다.

또 서경조는 1901년 문을 연 평양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 중 한 명이 됐다. 경기도 양지에 있는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정에는 1896년 증축된 소래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이 복원돼 있다.

출처 : 조선일보 2010.07.14
김한수 기자

 

 

 

초라한 초가집에서 20여명의 신자가 모여 예배를 본 것이 시작이었다.

소래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개신교 교회다. 1884년에 세워졌다는 설과 1885년 건립 설이 있다. 그리고 드물게는 이보다 앞선 1883년 건립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중 어느 해에 세워졌건, 소래교회가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최초라는 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 최초라는 말의 그늘에 가려, 그만큼 중요한 다른 어떤 진실이 간과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소래교회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것 같다.
적지않은 수의 사람들은 구한말 이 땅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데에 서양선교사들의 업적이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초기 국내 선교에서 선교사들이 큰 역할은 담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서양선교사들이 펼쳐놓은 기독교라는 잔칫상을 조선인들이 그저 편하게 앉아 넙죽 받아먹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양 선교사들이 본격적인 조선선교를 펼치기에 한발 앞서 국내에 기독교를 전파했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었다. 나라의 감시를 피해가며 기독교를 전파하던 우리 조상들은 외부의 어떤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교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탄생한 교회가 바로 소래교회다. 소래교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라는 점도 큰 의미를 지니지만, 이 최초의 교회가 한국의 자생적 토착교회였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소래교회가 가진 이같은 두 개의 커다란 의미는 현재 소래교회 입구에 세워져 있는 ’소래교회설립약사’의 첫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본 소래교회는 순수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이 강산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요, 한국교회의 뿌리가 되는 교회이다."
소래교회를 세운 장본인은 서상륜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인삼장수를 하던 사람이었다. 순조롭게 매약행상을 하던 그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 것은 30세 되던 1878년이었다. 만주에서 인삼을 팔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열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 소식을 듣고 고향친구 몇명이 달려와 그를 현지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그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로스 선교사(John Ross)다. 또 그곳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매킨타이어 선교사(John MacIntyre)의 끈질긴 전도도 받게 된다.
당시 서상륜의 병세는 매우 위독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로스 선교사는 ’서상륜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그는 결국 병이 완치되면 예수를 믿기로 약속한다. 여러달 동안의 정성어린 치료와 간호로 완쾌되자, 그는 약속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그는 당장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현재 우리가 로스역(譯)
성경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서상륜을 비롯한 여러 한국인 신자들의 힘이 합쳐져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1904년 국내에 입국한 와그너 선교사(Ellasue Wagner)도 로스역 성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로스 번역이라는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서씨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지 않은가? 로스 목사가 어려운 한국어를 배워서 중국어로 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가졌을 것 같지 않다. 합리적 결론은 ’로스 번역’은 이들 한국 청년들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1883년 그는 이렇게 완성된 성경 100권을 지니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조선왕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기독교가 인정된 것은 후에 의료선교사 알렌이 고종의 시의가 되고 나서부터다. 하지만 밀입국을 시도하던 서상륜은 입국 도중 관헌에 발각되고 만다.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권만을 지닌채 탈출한 그는 가족의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피신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의 본래 이름은 ’솔샘’이었다고 한다. 소나무와 샘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솔샘의 한문표기는 松泉(송천), 후에 일본인들에 의해 송천이 솔내(松川)가 되고, 다시 음운현상에 의해 ’소래’로 바뀐 것이다. 소래는 결코 번화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평화로우면서도 농사를 지을 물이 풍부해 곡식이 잘 열리는 풍요로운 고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소래에 터전을 마련한 서상륜은 곧 만주의 로스에게 연락해 성경 6,000권을 선편(船便)으로 전해 받고, 마을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나섰다. 얼마 안있어 20명의 세례지망자가 생겼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들이 기도할 장소였다.
일반적으로 소래교회의 시작은 산간 구석에 세워진 초라한 초가집에서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리 관청의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작은 마을이지만, 국금(國禁)에 속하는 기독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남의 눈을 피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세는 이미 바뀌어 버렸다. 기독교는 급속히 전파됐다. 고종은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알렌(H. N. Allen)은 고종이 기독교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조선 땅에 최초로 내한 한(1884년 4월 5일) 정식 선교사로 기록된다. 1896년 7월 25일에는 한국교회가 고종탄신 기념 경축예배를 드릴 정도였다.
이 무렵 소래교회의 교세는 신도가 약 80여명으로, 58세대가 사는 소래에서 50세대 정도가 기독교를 믿게된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더 큰 예배당이 필요했다. 이미 마을주민 90% 이상이 기독교인이 된 소래에서 이제 예배당 증축은 마을 전체의 문제였다. 마을 공동회가 모인 자리에서 교회건축 문제가 제기됐다. 마을 유지가 선산의 소나무를 베어 건축목재로 제공했으며, 마을 사람들도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헌금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서상륜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그의 동생 서경조다. 서경조는 후에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중 한사람이 되는 인물이다.
소래교회 소식을 접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서상륜과 마을사람들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후에 소래 교인들이 교회의 역사를 남기고자 작성했던 대구면지(大救面誌)에 당시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무렵 언더우드 목사는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경비 일부를 부담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서상륜 형제는 지극히 고마운 일이나 우리가 우리 교회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본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므로 뜻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외국인이나 어느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힘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기록은 계속된다. 도움을 거절당한 언더우드는 돕고싶어도 돕지를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미국에서 큰 양등(洋燈)을 다섯개 사다가 교회에 기증하는 것’으로 달래야 했고, 소래 교인들은 ‘그가 기증한 양등을 남녀방에 각각 두 개씩 걸고, 한 개는 강대상 위에 두어 아주 밝은 등불 밑에서 밤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해서 소래교회는 마침내 1895년 7월 8일, 8칸 기와집으로 거듭나게 됐으며, 그리고 약 1년뒤, 소래교회는 다시 16칸 32평으로 증축 상량했다.
이같은 사연을 간직한 소래교회의 모습은 현재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지난 1988년 한국기독교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복원된 것이다. 본래 소래교회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 복원됐으면 더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그곳은 현재 북한 땅이다. 캠퍼스 기숙사 뒤편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무척 단아한 느낌을 준다. 내부나 겉에서 본 모양은 여느 한옥집과 다름이 없다.
단지 기와 꼭대기에 있는 작은 십자가가 이곳이 교회임을 말해주고 있다.
교회 옆에 있는 철제 종탑 모습이 정겹다. 교회 마당에는 1910년대 평양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다 일제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유명한 최권능 목사의 기념비도 서 있다.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마음 내킬때 이곳에 들러 기도를 한다고 한다. 소래교회를 세웠던 초기 기독교인의 진실한 모습이 아직도 우리네 신학생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출처: http://cafe.daum.net/SeoulDTC

 

최초의 한국개신교회 -소래교회
한국 교회의 시작(성립)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주장에 따라 많이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만주에서 수세(受洗)한 한국인들이 거기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전도한 결과 이루어진 신앙공동체(교회)를 거론할 경우,
서간도의 한인촌교회[金靑松]와 서울교회[徐相崙], 의주교회[白鴻俊], 그리고 소래교회[徐景祚] 등이 거론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1884년경에 서상륜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을 황해도 소래교회를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모교회는 자생토착교회인 소래교회로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졌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한해전인 1884년(1883?), 고향 의주에서 박해를 피해온 서상륜 상우(보통 경조로 통함) 형제가 교회 창설의 주역이었다. 이 교회가 세워진 송천리의 명칭은 순토박이 말로 "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다시 그것이 "소래"가 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들어간다.
기독교가 전래되던 당시 소래에는 약 70호가 살고 있었는데 소래교회는 서씨들이 모여사는 아랫마을과 광산 김씨들이 모여 사는 구석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 두 가문은 모두 10여 년 전에 이주해온 일종의 피난민이었다. 만주에서 쪽복음서를 갖고 밀입국(1882년) 하려다 관헌에 적발되었던 서상륜은 고향에서의 전도도 위기를 느껴 결국 피신해 간 곳이 소래였다. 거기에는 그의 삼촌(또는 당숙)이 살고 있었다. 서울과 소래를 오가며 전도하던 그는 1884년 봄에, 그리고 의주에 살던 동생 경조는 다음해 봄쯤에 소래로 아주 이주 하였는데, 서상륜은 1884년 초가을부터 자기 친척과 몇몇 동네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상경한 형에게서 신약과 "덕혜입문"을 받아 소래로 돌아온 경조가 결단을 하고 믿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형제가 함께 나선 소래에서는 84년에 13명, 이듬해에 20명의 개종자가 생겼다. 그중 7명이 상경하여 언더우드에게 세례받기를 원했으나 서경조 최명오 2명만이 세례(85년)를 받게 되었으며 그해 9월에는 언더우드가 소래로 직접 찾아와
서경조의 석달 아기 병호에게 역사 상 최초의 유아세례를 주었으며, 86년에는 아펜젤러가 같이 5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1887년말 까지 소래에는 10여명의 교인이 생겨났다. 이듬해에는 서울에서 교회사상 최초의 사경회가 한 달 동안 열렸는데 소래교회에서도 10여명의 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소래교회가 보여주듯 한국교회의 창설은 분명 성경을 번역한 평신도들의 독자적 전도와 한글성경 산포에 근거를 둔다. "역간된 복음서들은 누구나 읽으면 곧 그 뜻을 알게기 때문에 개종자가 급증,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열심히 책을
얻어 읽고 있는 현상은 놀랄만한 일"이라 언더우드도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백성 들이 점점 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국인의 신앙열정을 대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장로교와 감리교의 첫 교회들을 한국 교회의 첫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선교사 아펜셀러의 교회 설립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언더우드 목사는 처음 얼마동안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알렌이 세운 광혜원의 강사로 일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배워서 말을 좀 할 수 있게 되자,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에 열을 올렸다. 바로 이러한 때에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서 전도를 시작했던 서상륜이 서울로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와 솔내교회를 한번 방문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얼마 후 그곳을 방문한 언더우드 목사는 벅차게 소용돌이치는 감격을 누를 길이 없어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국법에서 금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자기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웠고 또 그들 자신이 교히를 운영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인을 향하는 뜨거운 애정이 저절로솟아오름을 금하지 못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7년 가을에 솔내에서 7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서울에도 교회를 세워야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1887년 9월 27일에 언더우드 목사는 새문안의 자기 사랑방에 14명의 신자를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린 후 정식으로 교회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새문안 교회의 창립이다. 이 역사적인 한국의 새문안교회 창설예배에 한국교회 최초의 전도자인 백홍준과 서상륜,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과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로쓰 목사등, 이렇게 거대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이는 장차 한국 장로교회가 그 거보를 내딛고 됨을 축복하고 있는 듯 빛나는 영광의 모습이었다.
한말에 입국한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이 이룩했을 신앙공동체는 1885년 6월 28일 저녁에 한국에서 가진 최초의 종교적 집회와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저녁 8시에 헤론 부부와 알렌 부부, 그리고 스크랜튼 대부인이 모여 "공식 주일예배"를 드렸다. 늦어도 1년 반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외국인들의 집회에 한국인도 합석하여 예배를 드린 것 같다. 1887년 2월 27일(주일), 아펜젤러가 인도한 예배에는 50여 명의 외국인들이 참여하여 방이 꽉 찼으며 "한국인들이 우리 예배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 데서 어렴풋이 엿보인다. 이것이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역사적인 출발이다.
출처: http://cafe.daum.net/PG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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