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계교회사

개혁파교회의 태동과 형성, 특징에 대한 연구 보고서

작성자이지명|작성시간13.01.31|조회수505 목록 댓글 0

 

1.서론

중세시대는 말씀보다는 성례를 중시하는 성례제도주의와 단순한 말씀의 선포보다는 철학적인 연설을 중시하던 스콜라 신학에 의하여 오래 동안 설교다운 설교가 들려지지 않았다.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또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무지와 미신 가운데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무지와 미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말씀 증거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말씀의 부흥운동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결국 개혁파교회를 새로이 형성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본론

 

1)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독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중산층 계층의 사람으로 맨스펠드에서 주물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지도를 따라 법학을 하다가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많은 갈등 가운데 하나님, 믿음, 그리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을 얻은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그릇된 신앙에 대항하다가 교황의 파문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 루터란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루터의 개혁 운동은 그의 설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그의 주장이 로마 교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설교하였다. 루터는 구원이 행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게하고 죄인을 구하는 것은 설교이다. 이러한 점에서 루터는 설교를 자연스럽게 예배의 중심 부분에 놓았다. 루터는 설교자가 비록 역사적인 신앙을 선포하지만 그것이 죄인들에게 적용될 때에 구원에 이르는 신앙으로 바꾼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루터는 ‘오직 믿음’ 사상을 강조하였다. 또한 루터는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다. 성경은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교훈한다. 마치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는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은 타락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므로 율법에 의한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루터의 ‘오직 은혜’사상은 은혜로만 구원받음을 주장하므로 사제와 같은 중보자를 통한 구원을 부인한다. 이러한 오직 은혜의 사상의 영향으로 개혁파교회의 태동이 일어난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소수의 종교개혁가들이 전통카톨릭적 교회에 반대하여 자신들만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는 하였으나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체계화 되고 드디어 개혁파교회의 기초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와같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미신적인 종교는 설교에 의하여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 어두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를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척도로 보기 시작하였다. 마틴 부쳐(Martin Bucer)는 교회의 3대 표지로 권징의 바른 실행, 聖禮의 바른 시행, 말씀의 바른 선포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에게 참 교회는 설교 중심의 교회였고, 거짓 교회는 의식 중심의 교회였다. 이러한 루터의 영향을 입은 요한 칼빈은 주장하기를 설교는 그리스도 교회의 홀로서, 그것에 의하여 모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나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에게 바른 교회 운동은 설교자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설교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웠고, 영국의 청교도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임마뉴엘 대학을 세우기도 하였다.

 

2)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 개혁교회

칼빈은 과격 종교 개혁자들이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폭력 사용을 정당화한 것을 배척하고 루터와 쯔빙글리를 따라 설교만이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검은 문자적인 검이 아니라 영적인 검, 곧 말씀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설교라는 방편을 가지고 제네바를 개혁키 위해서 자유교회를 세웠다. 김홍기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칼빈에 관하여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네바시 목회기간 동안 교회적 정치가로서, 종교적 논쟁가로서, 교육가로서, 저자로서 그의 명성과 영향은 넓게 퍼져 나갔다. 그의 신학적 통찰력, 주석적 재능, 언어 지식은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있는 저술가가 되게 하였다. 그의 기독교강요 는 루터교회 이외의 개신교회 속에 가장 권위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칼빈이 신학자 혹은 복음 변증가로서의 삶에서 목회자로의 삶으로 바뀐 곳은 스위스의 수도 제네바였다. 그는 기독교강요로 인하여 핍박을 받다가 파리를 떠나 제네바를 통과하여 스트라스버그에 가려고 하였다. 도중에 그는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려고 여장을 잠시 풀었다. 그때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화렐이 아침 일찍 칼빈을 찾아온 것이다. 화렐은 바젤, 모우, 스트라스브르크, 베른 등지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다가 제네바에 돌아와 있었는데 종교개혁에 있어서는 선배인 그가 기독교 강요의 저자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칼빈을 만난 화렐은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칼빈은 학구적인 성격과 앞으로의 연구계획, 그리고 자신의 내성적인 면 등을 들어 사양하였다. 여러 번 간청해도 칼빈이 고사하자 화렐은 벌떡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선언한다. 당신은 자기공부를 구실로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노하실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만 생각하고 있다”고 벼락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이일을 두고 후일에 칼빈은 회고하기를 “그때 마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게 손을 펴시고 나를 사로잡는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화렐의 간청을 따라 그곳에서 그 위대한 개혁자요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당시 로마가톨릭교의 사교도시였던 제네바는 화렐의 생명을 건 활동으로 로마 가톨릭 미사가 폐지되고 시민들은 복음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까지 받아놓은 교회개혁의 성공지였다.. 이때가 칼빈의 나이 27세 때였고 1536년 7월 하순경이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칼빈을 만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성구의 말처럼 제네바는 날개 없는 새가 날개를 가진 셈이 되었다..

당시 제네바의 사회상은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극도로 타락하였다. 너무 많은 공창,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특별한 복장을 입혀야 했고, 심지어 교직자 중에도 첩을 몇씩 두어서 사생아가 많았고 민간재산을 강요해 음란한 생활에 소비해 버리는 일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도 하에 극히 복잡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개혁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운동이 반대파로 인해 무너질 위기게 놓였을 때 화렐은 칼빈에게 성경강해를 부탁했다. 말씀교육을 통한 개혁을 지속적으로 벌이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1536년 8월말 산 파엘교회에서 바울서신 강해를 시작으로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목회는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틈이 나는데로 복음의 토론을 하였고 이로 인해 로잔과 그 주변의 주민들은 신교신앙을 택하게 되었다..

로잔의 토론회와 베른의 루터파 대표자들과의 회의에서 명성을 얻은 칼빈은 설교자로 임명받아서 제네바교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칼빈은 세 가지의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는데 첫째는 자녀들의 종교 교육이었다. 즉, 모든 어린이들에게 복음적 신앙의 요점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다음 세대까지 종교개혁이 이어지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둘째는 도덕적 훈련을 시켰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 중에는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칼빈은 모범적인 인물들을 뽑아 장로회를 조직하고 시민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교회의 도덕 규율에 따르지 않는 자를 수찬 정지시켰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런 교회 형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참된 신교 신앙 고백과 새 교회 건설을 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시민 하나 하나에게 결단케 하여 거부하면 제네바시에서 추방하고 시인하는 자만으로 제네바시를 구성하자는 ‘신앙고백’을 제정했다.

개인의 정신 자립이라는 원리를 세우는 반면에 전 시민이 따를 신앙고백을 규정하여 따르지 않으면 추방한다는 중세 공동체적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모순도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고 시민 자치회의 결의에 의해 급진적 개혁이 좌절되게 되었다. 결국 시 의회의 가결에 의해 칼빈은 제네바시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 때가 1538년 4월,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만 2년이 채 못되는 때였다.

한편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 시는 거의 무정부상태로 돌아갔으며 날로 부패하고 신교는 구교의 세력에 다시금 힘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칼빈의 초청을 다시금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시의회는 1540년 칼빈을 재 초청하기로 결의하여 초청한다. 이에 대해 처음에는 칼빈이 선뜻 응하지 않았으나 화렐의 간곡한 권유 때문에 1541년 9월 제네바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칼빈의 제 2차 제네바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1564년 5월 그의 마지막 때까지 23년간 철저한 개혁운동가로 목회하며 지내게 된다. 이러한 칼빈의 개혁운동은 결국 유럽의 각국들이 개혁교회를 세우는 도화선이 되게 된다.

 

3) 프랑스의 개혁교회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정부 체계는 이미 왕권 절대주의(royal absolutism)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것에 분개했다. 루이 11세(1461-83)는 후에 마키아벨리적인(Machiavellian) 것으로 생각된 정책들을 시행했으며 충고에 귀를 귀울이지 않고 통치했다.) 루이 11세(Louis 11)는 1480년에는 완전히 봉건 세력을 억압하고 중앙 집권을 달성하였다. 그는 절대주의 왕권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12세(1498-1515) 이래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법, 한 왕 이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는 서구 최초로 강력한 민족국가 내지 국민국가를 형성하였다. 왕권의 증대를 추구하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왕의 지배 하에 있어야 했다.. 교회를 자기의 지배 하에 넣기 위한 구실로서 프랑스 왕은 프랑스의 카톨릭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근세 초기 프랑스인의 민족감정에 매우 일치하는 주장 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루이 12세의 아들 프랑소아 1세(1515-1547 재위)에 이르러 갈리아주의 (Gallicanism)로 나타났다. 갈리아란 프랑스에 대한 로마시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갈리아라는 말을 쓸 때는 프랑스의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할 때이다. 그러므로 갈리아주의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의 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보다 프랑스 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516년 프랑소아 1세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볼로냐 조약(Concordat of Bologna)을 맺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가 레오 10세에 대항하여(토스카나의 패권을 둘러싸고) 이탈리아 전쟁을 수행한 후, 승리한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 조약은 절대왕정에 유리하였고 교회에는 불리하였다. 레오 10세는 1521년 루터를 파문했던 교황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혼란 중에 사망하였다. 이 조약(협약)은 종교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 의해서 국왕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규정지은 것이다. 어느 초기 역사가는, 그 협정에 의해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temporal advantage)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spiritual sway)를 찬탈했다고 말했다. 교회 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으며 교회법에 따른 주교들의 선출은 폐지되고 왕이 주교를 지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소아(프란시스) 1세는 방대한 교회 이권들을 자기 손에서 주무르게 되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승진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공부하기 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the pleasure of the king)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다. 교회를 절대 왕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소아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the new learning of the Renaissance)을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인문주의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의 다른 학문들뿐 아니라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 그는 불어 성경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다. 그러한 왕이 총애하고 승진시킨 성직자들이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자질들을 결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상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었으며 방탕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부유하게 살면서 자기들의 본래 활동 영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소아 1세는 국가의 재원을 낭비했고, 매관매직으로 그것을 충당했으며 자기 곁에 있는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러한 낭비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프랑소아 1세는 왕권 강화에 열중하였지만, 또한 문예의 보호에도 힘을 기울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프랑소아 1세는 내심 종교개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처럼 프랑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치적 분열까지 맞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

이다. 1520년대 초 프랑스에는 모(Meaus) 그룹이라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이란 고전 연구와 원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교회 내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되 독일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로마교회와의 단절은 추구하지 않는 교회개혁운동을 말한다. 이 그룹을 모 그룹이라 한 것은 플아스 파리 동쪽에 위치한 도시인 모(Meaux)의 주교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1470-1534)가 이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 그룹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는 르페브르(Lefevre d'Etaples, 1450-1536)와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유명하다. 르페브르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1523년에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후에 구약성경과 외경을 번역하였다(1528년). 이것은 1530년에 함께 출간되었다(Antwerp Bible). 이 번역이 비록 라틴어역(벌게이트)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후의 번역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1521년 르페브르는 소르본느 대학 박사들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작품들을 정죄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주석 에서 르페브르는 루터의 칭의 교리(Luther's doctrine of justification)를 기대하면서 개혁을 소망하고 있었다. 르페브르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날개 돋힌듯이 팔렸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는 집권 초기에 이 모 그룹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었다.) 그의 여동생인 나바라(Navarra) 왕비 마르가레뜨는 모 그룹을 음양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 패배하고, 프랑소아 1세가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랑소아 1세는 국력 신장을 위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종교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의 통합은 전통적 종교인 카톨릭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개시하게 되고, 모 그룹도 프로테스탄트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순교하였고 혹은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칼빈이 바젤로 망명한 것도 프랑소아 1세 때의 일이었다(1534년). 1525년 이후 프랑스 내에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종교개혁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던 해인 1536년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칼빈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사실상 지도자였다. 그가 기독교강요 초판을 저작하게 된 것도 프랑스에서의 개신교도 박해 때문이었다. 칼빈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그는 조용한 바젤 시에서 붓을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강요 가 되었다.) 기독교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초판은 1536년 4월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칼빈의 나이는 27세였다. 이 책은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조숙한 천재의 걸작이다.

칼빈은 개혁파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신교의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불리었다.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강요 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교리의 변호라고 예찬하였다.

기독교강요 가 유럽의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이야말로 지대한 것이었다. 이 책이 출판된 지 몇 주 후에 부처(Bucer)는 칼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귀하를 그의 종으로 택하셔서, 가장 부요한 은혜를 교회에게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 를 출판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소위 <벽보 사건>이 있었다. 즉, 1534년 10월 17일 밤에 미사를 반대하는 내용의 벽보가 파리 시내 여러 곳에 붙여졌다.) 이 벽보를 작성한 사람은 느카텔 교회의 목사 앙트완느 마르코르트 (Antoine Marcourt)였다. 다음 날 아침, 파리 시민들은 자기들의 집과 공공건물과 교회에 벽보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대담한 전단을 뿌린 자들은 왕의 침실까지 들어가서 왕의 식탁용 냅킨이 놓여있는 그릇에다 그 전단을 한 장 놓고 갔다. 화가 난 프랑소아는 뚜르농(Tournon)의 추기경 및 다른 성직자들과 상의한 후 가혹한 조처를 취했다. 박해는 무차별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다. 교묘하고 야만적인 고문들이 개발되었고, 그 중에는 사람을 간헐적으로 불에 굽는 기계인 에스트라파데(the estrapade)도 있었다. 희생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도 있었다. 친구 이름은 Etienne de la Forge이다. 바로 이러한 박해를 배경으로 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 가 출판된 것이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개신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서(a reasoned exposition of their faith)를 가지게 되었다.

1546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모(Meaux)에 세워졌으나 곧 폐쇄당해 버렸다. 지도자 14명은 고문을 당하고 화형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처벌을 받았다.) 프랑소아가 살아있는 동안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존속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앙리 2세(1547-59)도 역시 박멸 정책을 썼다. 그는 파리 의회에 불붙는 방 (the burning chamber)이라 불리던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감옥은 차고 넘치고 화형이 흔해졌다. 성경에 관한 책들과 제네바에서 온 모든 책이 금서가 되었다. 화형수들은 혀를 잘라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결국 커다란 위험 가운데 1555년 9월에 파리에서 교회가 조직되었다. 이제 프로테스탄트들 중에는 저명한 귀족들도 있었다. 파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Poictiers)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목사들은 전국적 교회의 조직을 위한 교회 정치의 조항들 (Articles of Polity, 1557)을 작성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들은 신앙과 조직의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총회(General meeting)를 계획했다. 1559년 5월 파리에는 약 50개 교회의 대표들이 모였다. 신속히 완전한 합의를 거쳐 그들은 권징의 형식과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교회 정치에 관해서 그들은 제네바의 영향 하에 있었다. 이때쯤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보통 위그노(Huguenots)) 혹은 휴그노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그노들의 사상은 철저한 칼빈주의였다.. 1598년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를 주었다.

소위 개혁 신앙 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가 약 200개의 동네들과 약 3,000명의 귀족들의 성에 허용되었다. 개혁교회의 대회들이 간섭없이 허용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①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② 200개의 도시와 300개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공연한 신앙을 인정한다.

③ 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준다.

④ 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허가한다.

⑤ 프로테스탄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준다.

⑥ 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 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한다.

⑦ 8년간 약 200개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

이 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당했다.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에 이 책령을 폐지하였고, 그 결과 신교도 약 40만명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신교도들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칙령의 폐지로 경제계의 타격은 매우 컸다.

그러면 프랑스 개혁교회에 대해 칼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칼빈의 마음 속에는 항상 동족 프랑스인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잡고 있었다.

제네바의 칼빈은 복음적 신앙에 동정적이거나 이미 지지를 하거나 참여한 시민과 귀족 그리고 신자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다. 칼빈은 조국 프랑스에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1549년 6월, 칼빈은 한 부인 (그 편지는 Madame de la Roche-Posay에게 보내진 것이며, 1549년 6월 10일 발송된 것이다) 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the Kingdom of the Son of God our Saviour)가 확장될 때, 그리고 주의 가르침의 좋은 씨앗(the good seed of his doctrine)이 널리 모든 곳에 뿌려질 때 우리가 기뻐해야 하듯이, 나는 당신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이르러 당신으로하여금 주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옥의 심연까지라도 당신에게 손을 내미셨다는 것과 이와같이 하심으로써 당신을 향한 무한한 동정심을 표현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요. 따라서 성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사용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duty)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에게 부르심으로써 우리의 전생애(our whole life)가 그의 영광이 되도록 우리를 구별시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른 무엇보다도, 즉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임을 철저히 확신해야 합니다".

1557년 10월, 칼빈은 프랑스 왕에게 개신교의 신앙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을 썼다. 그 내용은 프랑스의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 in France)의 신앙을 해설한 것이다..

프랑스 개신교의 초기에는 루터파 복음주의와 명백한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550년대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칼빈주의 서적들이 점차 널리 유포됨에 따라, 프랑스의 개신교는 제네바를 닮아가기 시작

했다. 신자들은 그룹을 지어 개인 주택이나 헛간, 숲 속이나 들, 동굴이나 그밖의 은신처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자 그들은 칼빈에게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요청했다. 칼빈은 그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일꾼을 파송하였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시편 찬송, 칼빈의 논문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정의 박해와 탄압은 거세고 일관성 있고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1559년부터 전국적 교회를 조직화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Ibid., 231쪽. 앙리 2세(Henry Ⅱ)는 이단을 별도로 재판하기 위해 특수 법원(chambre ardent)을 설치하였다. 그는 가학적 취미가 있는 다로서, 말년에는 이단을 화형시키는 것을 즐겨 구경했다. 자기 양복을 짓던 제봉사가 불타 죽으면서 얼마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 보았던지 앙리 2세는 그 후 며칠 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4) 네덜란드의 종교개혁과 개혁교회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의 국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 국민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현저한 요소(a distinctive factor in the life of the Dutch nation)가 되어왔다.

네덜란드 종교에 있어 근대적 시기(the modern era)는 루터나 칼빈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14-15세기의 형제단 운동, 특히 공동생활 형제단 (Brethren of the Common Life)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것은 반(半) 수도원 단체로서 청빈, 순결, 순종의 세가지 규율을 지키기는 했지만 형식적 맹세에는 얽매이지 않았다. 이 형제단은 탁발 수도와는 달리 조용히 연구에 몰두했으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들의 직업을 갖고 손수 일을 하였다. 흐루트가 페스트로 죽자, 라데빈 스가 데보티오 모데르나 (Devotio Moderna)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395년에 교황 보니페이스 9세는 그들의 조직을 인정하였다. 공동생활 형제단 의 많은 회원과 그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기독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운동은 1378년 제라드 흐루트(Gerard Groot)와 플로렌트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ns)에 의해 창설되었고, 그 요람인 데벤터(Deventer)에서부터 여러 동네로 전파되어 북유럽의 많은 대학들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교 교사로서의 형제단원들은 학문과 지성(literacy and intelligence)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신약성경 헬라어와 다른 성경연구에 흥미를 보였으며, 구어체로 된 성경의 보급을 주장하고 그것에 힘써왔다. 평범한 언어로 된 “성경을 읽을 필요성(The Usefulness of Reading Sacred Scripture in the Common Speech)”은 창설자들의 동료인 제라르 제르볼트(Gerard Zerbolt)가 쓴 논문의 제목이였다(1398년). 형제단은 이러한 목적 및 다른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인쇄 출판에 있어서 선구

자였다. 그들의 신학은 어거스틴적이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본명은 Thomas Haemerken)는 데보티오 모데르나 (Devotio Moderna)) 데오피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는 14세기 말에 시작된 종교적 갱신(religious renewal) 운동이다. 그 운동은 후기 스콜라주의의 지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써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성(personal, interior spirituality)을 강조하였다. 그 운동은 네덜란드로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으로 퍼져나갔다. 스페인에서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of Loyola)가 그 영향을 받았다. 그 운동의 고전적 표현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이다. 그 운동은 대중 교육과 성경의 자국어 번역을 자극했다.

네덜란드의 카톨릭 교회 안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많은 요인들은 종교개혁을 향한 길을 마련해 놓았다. 첫째로,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criticism of the doctrine and practice of the Catholic hurch). 둘째로, 단순하고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simple, practical, Biblical Christianity)에 대한 강조가 증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부흥이 일어났다(revival of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이것은 로마교회가 거의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었던 면이었다.

그러면,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개혁의 기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록 후에 칼빈주의가 그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 되었지만, 루터의 글들이 먼저 소개되어 널리 읽혔다. 어거스틴파 수사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가르쳤고, 1523년에 이미 그 수사들 가운데 두 사람이 이단 혐의로 브뤼셀(Brussels)에서 화형을 당했다.) Ibid., p.65. 그 두 사람의 이름은 하인리히 뵈스(Heinrich Voes)와 요한 에쉬(Johann Esch)이다. 그들은 개신교 신앙을 위한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다.

로마 교회의 끈질긴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종교개혁 당시 화란의 통치자는 카알 5세(Karl Ⅴ, 1500-1558)였다. 그는 1519년 신성로마 황제(1519-1556)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신성로마 황제가 된 다음부터 화란의 개신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화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베네룩스(Benelux)삼국이라 부른다. 16세기 중엽 화란은 오늘날의 벨기에, 룩셈부르크(Luxemburg)와 함께 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 화란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6세기 중엽의 화란은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고, 당시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또한 화란은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 화란은 일찍부터 인문주의가 발달하여 북구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카알 5세의 개신교 탄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루터교도가 아니라 재세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화란 재세례파의 기원은 1520년대 말 독일 출신의 호프만(Melchior Hofmann, c. 1496-1544)) 호프만은 1530년 이후 화란의 재세례파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열정적인 종말론을 가르쳤고, 천상적 육신(heavenly flesh)의 기도론을 주장했으며, 성만찬에 있어서 신령주의적(spiritualist)견해를 가졌다. 또한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그는 그의 말년(10년 기간)을 스트라스부르크 감옥에서 보냈다. 이 화란과 독일의 북부 국경지방인 프리즐란트(Friesland)에서 전도활동을 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호프만의 영향을 받은 재세례파를 멜키오르파라고 한다.) 멜키오르파(Melchiorites)는 멜키오르 호프만의 추종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뮌스터 반란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열렬한 종말론, 신령적, 비유적 성경해석 그리고 성인 신자의 세례에 대한 강조이다. 또한 영지주의적(Gnostic) 기독론을 갖고 있고, 교회의 순결(purity)을 강조한다.

멜키오르파의 지도자였던 얀 마티스(Jan Mattys)와 얀 복켈손(Jan Bockelson)이 독일 서북부 뮌스터에서 시온 왕국 이라는 재세례파의 천년왕국을 건설하려다가 실패한 1533년 이후, 화란의 수많은 재세례파 신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재세례파는 로마교회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의해서도 심하게 박해받았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이 모두 비판하였다. 그들은 수만명이 죽었고, 오늘날까지도 심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찬송학과 순교론이 동정적 차원에서 연구되고 있다. 재세례파의 교리는 후에 보다 평화적인 멘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대부분 수정되었다. 시몬스는 카톨릭 사제의 신분에서 루터의 사상으로, 그리고 다시 재세례파의 견해로 옮겨간 인물이었다. 메노파(Mennonites)는 16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뮌스터 폭동 이후 침체된 재세례파를 재규합하여 형성되었다. 메노파는 성인 신자에 대한 세례를 주장하고, 개체교회의 책임과 권리를 강조하며 교인의 세속 권력 참여를 반대한다. 17-18세기에 이르러 메노파는 네덜란드 안에서 영향력이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메노파는 성만찬의 화체설을 부정하고 있으며, 평신도 중에서 선발된 장로들이 성만찬을 집례한다. 또한 설교는 남녀 아무나 할 수 있고, 국가의 군대 징집을 거부한다. 1980년 현재 전세계 메노파 교인은 64만 3천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카알 5세의 지하에서 화란의 개신교도는 전반적으로 보아 크게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카알 5세 때에 화란에서는 종교로 인한 국가분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카알 5세의 뒤를 이어 필립 2세(재위 1556-1598)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 사정은 매우 달라졌다. 편협하고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인 필립 2세는 4년간 네덜란드에 살았는데,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개신교도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가장 초기의 칼빈주의적 회중은 1548-1550년 무렵에 망명지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정책을 수행하였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필립의 정책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로마교회에 항거하는 폭동이 개혁교회 신도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제단과 상(image)을 파괴하였다. 군중 봉기는 성공했으나, 무자비한 억합 정책이 뒤따랐다. 스페인의 장군 알바 공작(the duke of Alva, 즉 Ferdinand Alvarez de Toledo, 1508-1582)은 필립 2세의 충성스러운 심복이었고,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 정책을 펴, 기를 꺾었다. 1567년 8월, 알바 공작은 브뤼셀에 입성하여 여러 귀족들을 체포하고 공포정치를 시작하였다. 9월 20일부터 법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소위 피의 의회(Council of Blood)를 조직하였다. 알바 공작은 유죄에서 처형까지 사이에 죽은 10만명의 신교도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

1584년 북부 네덜란드는 오렌지 공(公) 윌리암(1533-1584)) 그는 침묵자 윌리암(William the Silent)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는 경험 많고 유능한 군 지도자이기도 했다. 1584년 7월 10일 그는 칼빈주의자로 변장하고 있던 카톨릭 신자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그의 지휘아래 한 연방을 형성하였다. 긴 기간 동안의 쓰라린 투쟁을 거쳐 그들은 로마교회와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1574년 최초의 신교 회의가 도르트(Dort)에서 열렸다. 다음 해에 윌리암은 라이덴 대학을 세웠다. 새로 세워진 개혁교회는 그들의 신앙 성명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와 벨직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다. 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는 칼빈주의적인 것으로서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의거한 것이다. 그것은 1561년에 칼빈의 제자인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가 개정하였고, 1572년에 도르트레히트(Dordrecht)회의에서 승인을 얻었다.) A. Dakin, Calvinism, p.138. Dordrecht는 Dort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의 신조(the creed of Netherland Protestantism)가 되었다. 또한 모든 교회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Heidelberg Cattechism)을 채택하였다.)

1575년 라이덴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프라네커(Franeker), 그로닝겐(Groningen), 우트레히트(Utrecht) 그리고 하더위크(Harderwijk)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학교육(theological training)을 실시하는 학교가 되었고 여러 나라로부터 학생들이 몰려 왔다. 17세기까지 화란의 신학자들은 전(全) 기독교계에서 높은 지위와 명성을 차지하였다. 그들이 개신교에 준 영향은 지대하였고 칼빈주의를 더 널리 전파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Their influence on Protestantism generally was very great and accounted for the further spread of Calvinism).)

한편, 네덜란드 교회는 예정론의 본질에 관하여 격심한 신학 논쟁을 하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적 결론(칼빈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아르미니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특정한 일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것이며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1610년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에 선 사람들(에피스 코피우스, 위텐보가에르트)은 그들의 5개조 항의문 을 의회에 제출해 신앙고백 및 교리문답을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항의파 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 5개항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주요 신조가 되었다. 그의 교리는 도르트 회의(1618-1619)에서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게속 전파되었으며 18세기 웨슬레에 의해 채택되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그 후 제네바로 가 베자(1519-1605)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단지 그가 칼빈의 가르침에서 벗어 난 부분이 칼빈주의의 핵심으로 알려진 예정론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라 하면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제네바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 부터 자기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봉직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또 성경과 신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목회상담자로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 화란에는 코오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라는 법률가가 있었는데,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적인 인문주의 신학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사람은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였다. 그는 죽은 아르미니우스를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 때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당시 궁정목사로 있던 요한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결책을 상의하였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소위, 항의문 (Remonstrance)을 제출했다(1610-년).) 이 문서 때문에 그들은 Remonstrants 로 불리운다.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개 조항으로 요약하였다 :

① 예정 :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자를 미리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예정 개념은 결정론적 예정 개념이 아니었다. 그들은 절대적 선택이나 절대적 유기를 믿지 않았다(개방적 예정론).

② 구속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만인구원론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지닌 보편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③ 죄 혹은 자유의지 :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했 다. 펠라기우스(Pelagius)의 가르침은 주후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혹은 성령의 역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그들은 자유의지의 역할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했다.

④ 은혜 :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 영향력을 깨뜨려 버릴 만한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또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은혜로 주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 충분하고도 능력있는 은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은혜는 불가항력적 (irresistible)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고마루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협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⑤ 성도의 견인 :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 에 관한 가르침, 곧 한 번 중생한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고마루스 일파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611년 반(反) 항의서 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화란 의회는 처음에 항의파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아르미니우스 논쟁은 도르트 회의(1618. 11-1619. 5)에서 결말지어졌다. 이 회의는 어떤 의미에서 개혁교회 최초의 세계대회가 되었다.) 도르트 회의를 소집함에 있어서 화란의 교회 대표 뿐만 아니라, 영국, 스코틀란드, 스위스, 독일, 프랑스의 모든 개혁교회 대표들도 초정하였다.

화란 교회의 대표는 약 70명이었고 그밖의 나라에서는 모두 27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참석을 금지시켰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의파 가 대표의 자격이 아니라 피고의 자격으로 출두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해야 했다.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러한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아르미니우스 5대 원칙에 대응하고,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5대 원칙의 영어 첫 글자를 조합하면 튜울립(TULIP)이라는 말이 된다. 튜울립은 화란의 국화(the national flower)이다. 물론 이 다섯 가지 교리가 칼빈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 교리는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기본적 골격이 되었다.

 

3.결론

개혁교회의 시작은 칼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칼빈 이전에도 중세의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독자적인 길을 가는 교회들이 간혹 있었지만 성경을 중심으로 날마다 개혁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탄생한 개혁교호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칼빈이다. 칼빈이 신학자 혹은 복음 변증가로서의 삶에서 목회자로의 삶으로 바뀐 곳은 스위스의 수도 제네바였다. 결국 그는 화렐의 간청을 따라 그곳에서 그 위대한 개혁자요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당시 로마가톨릭교의 사교도시였던 제네바는 화렐의 생명을 건 활동으로 로마 가톨릭 미사가 폐지되고 시민들은 복음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까지 받아놓은 교회개혁의 성공지였다. 이때가 칼빈의 나이 27세 때였고 1536년 7월 하순경이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칼빈을 만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성구의 말처럼 제네바는 날개 없는 새가 날개를 가진 셈이 되었다.

이때부터 1564년 5월 그의 마지막 때까지 23년간 철저한 개혁운동가로 목회하며 지내게 된다. 이러한 칼빈의 개혁운동은 결국 유럽의 각국들이 개혁교회를 세우는 도화선이 되게 된다.

 

참고문헌

정성구,「칼빈의 생애와 사상」(서울: 세종문화사, 1980

김홍기, 세계기독교의 역사이야기, (서울: 예루살렘, 1992),

이근삼,「칼빈, 칼빈주의」(서울: 고신대 출판부, 1978

김광채,「근세, 현대 교회사」,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1991),

신복윤,「기독교강요 : 역사, 저작 목적, 사상적 배경」, 기독교강요 (상권),(서울: 생명의 말씀 사,1990

박건택, 개혁주의 교회론, 총신대학신학대학원 박사원, 교재용, 1998.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Ⅷ.,

Harold J. Grimm, op.cit., p.376. "The Edict of Nantes"(1598. 4. 13).

Harold J. Grimm, The Reformation Era, Macmillan Publishing Co.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Tracts and Letters), Edited by Henry Beveridge and Jules Bonnet, Baker Book House, Volume 5 (Letter, Part 2, 1545-1553

기독교문사편, 기독교사전, (서울:기독교문사, 1992)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