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론적 윤리의 한 원인으로서의 영지주의에 대한 반론
박찬호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1. 들어가며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사고 내지는 윤리의 병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198) 이원론적 사고는 영과 육을 서로 대립되는 원리로 이해한다.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이 따로 있으며 육적인 일은 영적인 일에 비해 열등하거나 적은 가치만을 가진다. 영적인 일은 거룩하지만 육적인 일은 세속의 일일뿐이다. 교회 일은 거룩한 일이지만 직장에서의 일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교회 바깥의 세상을 등한시하게 하며 육적인 일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갖게 한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의 배후에는 교회사 속에 있었던 영지주의적 이단의 영향이 있다. 교회사 속에서 영지주의는 이단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심성에 깊이 뿌리하고 있다. 영지주의는 “창조를 열등한 신의 작품으로 보고 물리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부터 날카롭게 구별하여 입교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숭고한 신적인 존재와 연합할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지식을 제공하였던 다양하고 널리 퍼져 있던 종교적 운동”199)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영지주의는 일종의 종교적 혼합주의 운동으로 그럴만한 흥미 있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니이브(J. L. Neve)는 초대 교회 시대에 영지주의가 발흥하게 된 이유를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고대 세계는 정신적 자원이 고갈되어 버렸으며 따라서 무서운 기근, 즉 구원의 결핍으로 인해서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2) 고대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도입한 유익하고 갱생시키는 감화력을 기뻐하였으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전하는 기독교에 대하여 전혀 만족을 하지 못하였다. (3) 당시의 이지적이고 개화된 사람들은 기독 교회가 마땅히 존중해야 할 철학적 사상과 원리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4) 이교의 정교하고 신비적인 종교의식에 친숙했던 사람들에게 교회의 예배는 이상하게도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효험도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200)
영지주의는 단일한 운동이라기 보다는 여러 사상이 혼합된 운동이요 그러하기에 그 주장 또한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영지주의의 특징을 들라면 이원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지주의 이원론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하에 형성된 시리아 사상으로부터 유래하였다. 페르시아의 이원론은 신화적인 것이었으며 두 가지 상반되는 원리, 즉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지주의에 있어서는 이러한 빛과 어둠의 신화적 이원론이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발전되었다. 즉 악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물질의 세계는 선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지배되는 정신의 세계와는 태초부터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충돌에서 정신적 원리 가운데 일부가 물질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계와 인간이 시작되었으며, 또 죄와 고통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201) 이러한 영지주의적 이원론 하에서는 물질 세계는 죄악시되었고 일반적으로 구약의 야훼 하나님과 동일시되었던 물질 세계의 창조주(demiurge)는 비록 전적으로 악하고 적대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열등하고 적대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결국 영지주의의 주된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물질의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빛의 세계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202)하는 것이었다.
이원론적인 윤리란 육신을 정죄하고 물질을 악하다고 보는 편향된 견해를 말한다. 이 땅의 삶보다는 내세를 지향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이원론적인 윤리는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상대화하며 소위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문제는 이 세상은 불타 없어져 버릴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는 일면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육신적인 일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으로 이 땅에서의 책임 있는 삶을 포기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이런 생각들을 통해 예배와 생활의 괴리가 오고 신앙과 삶의 분리가 오게 된다.
영지주의에 대한 반론을 위해 필자는 먼저 성육신에 대한 견해를 살펴본다. 성육신에서 예수는 육신을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셨다. 영지주의의 가현설은 성육신을 인정하지 못한다. 예수가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역사 속에 실재하셨던 분이라 것을 영지주의는 부정한다.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물질세계의 일부분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공존하게 되었다 (2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하지만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이 땅 가운데 실재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이 땅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과 책임이 있다(3절). 예수는 성만찬에 성령을 통하여 임재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만찬에서 우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그리스도의 실재적인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4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는 역사 끝에 오셔서 새창조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런 미래에 이루어질 새창조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모종의 물질적인 상태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5절). 이러한 논의를 통해 육신을 포함한 물질을 일면적으로 정죄하는 영지주의는 그 자리를 잃고 만다. 그렇다면 영지주의가 그 한 원인이 된 이원론적 윤리의 구체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필자는 윌리암 더니스의 견해를 이 세상에서의 삶의 신학과 몸의 윤리를 위한 대안적인 실례로 제시할 것이다 (6절).
2. 성육신
창조는 단순히 우리의 구원을 위한 배경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가 언약의 외적인 근거라는 바르트의 말은 일면적이랄 수 있다. 창조 그 자체가 하나의 언약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세계를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영지주의적 견해와는 달리 기독교의 창조론은 우리에게 창조가 필연적인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장소라고 말하고 있다. 창조 세계는 칼빈이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 또는 극장(theatrum gloriae Dei)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쳐왔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성육신의 교리를 부인한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도저히 육체를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1) 절대적 존재는 유한한 존재와 진정한 결합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며, (2) 물질은 악하고 영적 세계는 항상 물질과 충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에서는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불리어진 심오한 영적 인간과 일시적으로만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니이브는 피셔의 설명을 인용하며 가현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신성은 단순히 인간성과 일시적으로 병존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 와 같은 결합은 예수가 탄생할 때나 혹은 세례 받을 때에 이루어졌으며 십자가에 처형되기 직전에 분리되었다. 그러므로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수난자는 인간 예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가현설을 주장한 노스틱주의는 구속자에게서 어떠한 참 인간성도 모두 박탈해 버렸으며 그리스도의 역사적 인격을 파괴해 버렸다.203)
결국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역사적 인격은 부정이 되고 만다.
몰트만은 한 부드러운 가현설(a mild docetism)이 초대 교회의 기독론을 일관하고 있으며 전통적 기독론은 가현설의 경향으로 빠지고 말았음을 지적하고 있는데204) 이러한 지적은 정당해 보인다. 결국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현설적 이단의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지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유사한 이유들로 인해 경건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가 몸을 입으시고 이 물질세계에 오셨다는 것에 대해 심정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가현설에 대해 우리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창조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구현하시는 중심 되는 방식(the central way)이다.”205) 그러므로 성육신은 타락한 세상의 구속뿐 아니라 신적인 현존의 성취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더니스(Dyrness)는 “예수의 사역의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새롭고 보다 친밀한 방식으로 창조에 현존해 있으셨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라고 주장한다.206) 이러한 더니스의 견해는 성육신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은 - 그가 비록 그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 우리의 공간적인 영역으로 오신 것이라고 말하는 토렌스(Torrance)의 주장207)과 매우 유사하게 들린다. 하나님의 아들은 항상 창조 세계에 현존해 있다. 하지만 성육신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은 새롭고 보다 친밀한 방식으로 창조 안에 현존하게 되었다. 기독교적인 창조론과 성육신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의심할 것도 없이 영지주의적인 주장과는 날카롭게 대립이 된다.
군톤(Gunton)은 불트만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의 많은 가정 가운데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가정은 우리의 문화와 신약성경 및 신경의 저자들의 문화 사이에는 과격한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기독론은 위로부터 지구로 오는 신적인 구속자라는 영지주의적 신화로부터 그 형태를 취했다는 것이 이러한 가정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군톤에 의하면 “주로 그러한 영지주의적 신화가 초대교회의 기독론 이전이 아닌 이후에 발전했다는 근거 위에서” 이제는 폭 넓게 의문에 부쳐지고 있다.208) 불트만의 두 번째 가정은 현대 세계는 원인과 결과라는 하나의 닫혀진 체계로 세계를 본다는 것이다. 군톤은 이러한 두 번째 가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 존재의 변함없는 정신적인 장비의 부분으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칸트의 견해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209) 불트만의 프로그램의 두 번째 가정은 뉴톤과 칸트가 주장했던 절대공간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군톤에 의하면 이러한 견해는 “기독론에서의 공간이라는 진정한 문제”에 직면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톤은 “문제는 내려오심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 안에 공존(co-presence)하는 것이다. 신성이나 인성을 상실하지 않고 같은 공간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주장된다”210)라고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군톤은 “불트만의 설명에 집중되어 있는 논쟁은... 기독론에서의 공간이라고 하는 진정한 문제를 흐리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211)라고 주장한다.
군톤은 “초월성에 관한 많은 난점이 시각적인 지각의 형태가 우리의 공간에 대한 이해를 지배하고 있는 방식에서 야기된다”212)고 주장하고 있다. 시각적인 지각의 형태는 상호 배타성(a mutual exclusiveness)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시각적인 지각의 형태는 절대 공간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절대 공간의 기독론적인 함축에 대하여 군톤은 “전통적인 성육신에 대한 교리는 기계 바깥에(outside) 계신 하나님에 의한 ‘개입’(intervention)의 형태, 즉 신적인 스패너를 가지고 그 일 가운데 몰입하는 조잡한 형태를 취하는 것 같다”213)고 말하고 있다.
사물의 상호 배타성을 강조하는 시각적인 경험의 형태 대신에 군톤은 청취(hearing)라는 현상을 제안하고 있다. 음악의 예로 군톤은 우리가 공간 안에서 함께 일어나는 둘 또는 그 이상의 다른 일들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군톤은 음악과 기독론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유사점을 이끌어 낸다.214) 하지만 군톤은 이러한 유사점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유사점일 뿐이다. 왜냐하면 고전적인 기독론에서의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유한과 무한의 공간적인 공존을 가진다는 것인 반면에 음악은 그것이 하늘을 한껏 예견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의 이 세상적인 실체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2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설명은 여전히 유용한 유추다.
영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함 없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은 자신의 성육신에서 보이는 사람이 되었다고 토렌스는 주장한다.216) “창조주가 창조주이기를 중단함 없이 피조물이 되고, 초월적인 존재가 초월적이기를 멈추지 않고 우연적인 것이 되며, 영원한 것이 영원하기를 중단함이 없이 시간이 된다”는 점에서 성육신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한 것 보다 훨씬 더 놀라운 행동이라고 토렌스는 주장한다.217) 성육신은 하나님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육체적으로 구현된 것(incarnate embodiment)이다. 이러한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자기 자신의 신적인 인격적 생명의 가장 내밀한 비밀 가운데 그 어떤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218) 골로새서 2:9에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바울이 쓰고 있는 것 처럼 전체 삼위일체 하나님(the whole Trinity)이 성자 예수의 성육신 가운데 계시되었다.
우리가 성육신을 진지하게 다루면 우리는 가현설이나 영지주의가 자리할 수 없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신성과 육체를 반대적인 것으로만 이해할 때 성육신은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부담이 되고 만다. 몸 또는 육체를 포함한 물질세계를 일면적으로 죄악시할 때 하나님의 창조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 또한 정당한 설명과 자리 매김이 불가능하게 된다. 성육신은 신적인 본질에 외부적이지 않고 내재적이요 본래적이며 전체 삼위일체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육신은 성부로부터 성자의 자기구별임과 동시에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실현이다. 토렌스는 성육신이 “하나의 잠정적인 에피소드”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신적인 존재를 취하신 것으로서의 성육신은 “단지 경륜적이지만” 않다. 토렌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인간적이고 피조적인 존재에 관여하는 것은 그의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 후에도 반드시 아무런 유보 없이 유지되어야만 한다”219)고 주장한다. 성부의 오른편에 오른 성자는 이 세상에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스도는 또한 성찬에 임재하신다고 약속하셨다.
3. 그리스도의 몸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죠지 래드(George E. Ladd)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위한 바울의 비유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래드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바울은 결코 교회를 그 자체 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in Christ) 몸이며 (롬12:5) 그리스도의 (of Christ) 몸 (고전 12:27)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고전 12:12).”220) 래드는 이 비유의 주된 강조점은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일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비유에 대해 토렌스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그 자신의 몸으로 연합하신다고 주장한다.221)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함은 그러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의 실체를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 보여주는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이르는 표현이다.
래드는 바울이 교회를 성육신의 연장으로 생각하였다-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하셨듯이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성육신하신다는 식으로-는 해석은 지나친 주장이라고 지적한다.222)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옥중 서신들인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주장-로마서나 고린도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전적으로 일치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을 확증해 준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라는 주장을 통해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도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래드는 주장한다.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3)는 바울의 말을 래드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완전케하다거나 그리스도를 채운다는 식으로 보다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223)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니스는 보다 적극적인 주장을 한다. 더니스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실체가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이 신약성경에서 명확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우 문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구현한다고 할 수 있다”224)고 말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현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다. 더니스에게 있어 교회는 피조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역을 반영한다. 성육신하셔서 구속의 사역을 이루신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의 우편 권위의 자리에 앉으셔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창조 편에 계신 분으로서” 이러한 역할을 하신다. 더니스는 “그리스도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완전케하는 영광된 상태를 실현하신다.... 성령은 이러한 새로운 피조된 본성의 담지자로서의 우리의 마음에 (단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부어진다”225)라고 쓰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몸을 “새로운 창조” (고후 5:17)라 부른다. 이러한 새로운 창조는 어느 날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목적의 완전한 구현이 되게 된다.
루터파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있다는 개혁파의 공간적 이해에 대해 반대하여 루터의 견해를 이어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주장한다. 결국 교회는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실재적으로 임재하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인성의 잃어버린 차원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루터의 후예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자체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진정한 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26) 루터파의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해는 성만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는 양식에 대해 개혁파 신학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교회는 영적인 의미의 이스라엘이다.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 (갈6:16)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공동체적이고 외형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이 신약에서는 개인화되고 내면화되고 영화되었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물질적인 면이 배제되고 영적인 것만이 강조되고 있다는 주장은 지나친 주장이다. 바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 (고전10:18)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신약의 교회가 “영을 따라 난 이스라엘”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진정한 영적인 이스라엘(true spiritual Israel)로서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227) 이것은 구약과는 달리 신약에서는 모든 설명이 영화(靈化)되었다는 주장이 일면적임을 반증해준다. 볼 수 있고 감각적인 요소를 통해 영적인 축복을 나누는 성례 또한 그러한 반대되는 예 중의 하나일 것이다.
4. 성만찬
개혁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즉 예수님의 몸(body)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의 임재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육신을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셨던 그분이 하나님의 보좌를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역의 설명이 가능하다. 즉, 지금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안 계신 것이 아니다라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현재적인 임재를 밝히 보여주는 것이 성찬식이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는 성례로 정의되는 반면에 성례는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성경으로부터 구분되긴 하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 리챠드 멀러에 의하면 “어거스틴의 전통적인 정의에서 성례는 볼 수 없는 은혜(invisible grace)의 볼 수 있는 표지(visible sign)이다.”228) 멀러는 성례가 적절하고 엄격하게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세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성례는 하나님에 의해 명해져야만 한다 (a Deo mandata). (2) 성례는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볼 수 있거나 감각적인 요소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3) 성례는 복음의 약속 (promissio evangelicae)을 은혜를 통해 적용하거나 인쳐야만 한다.”229) 이러한 엄격한 정의에 의해 멀러는 세례와 주의 만찬을 제외한 로마 카톨릭이 성례로 간주하는 다른 의식들을 제외하고 있다. 견진, 고해, 서품, 종부와 같은 의식은 하나님의 명령 (mandatum Dei)을 가지고 있지 못한 반면에 혼배 의식은 복음의 약속을 결여하고 있다. 세례와 주의 만찬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례가 영단번으로 유효한, 시작의 종말론적인 징표(the eschatological sign of starting out)인 것과 같이 주의 상에서의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교제는 도상에 있음의 종말론적인 징표(the eschatolgoical sign of being on the way)이다. 세례가 유일한 은혜의 징표(the unique sign of grace)라고 불린다면, 성찬은 반복 가능한 소망의 징표(the repeatable sign of hope)로 이해되어야만 한다.”230) 세례를 통해 개인은 그리스도의 교제에 들어가며 자신의 순례길을 시작한다. 주의 만찬을 통해 신자들은 공동체에 대한 자신들의 연계성을 유지하며 그 공동체 안에 머물게 된다.231)
성례에 대한 토론에서 주의 만찬은 그 자체로 교회의 부요함에 근본적이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주의 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양식은 세례의 양식과 함께 분열과 교단적인 다툼이라고 하는 불행의 기회가 되곤 했다. 칼빈의 견해는 두 가지 양 극단을 피하려 한다. 주의 만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것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 대해 스텐리 그렌츠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말하고 있다:
칼빈이 성령에 호소한 것은 그를 중간적인 입장에 자리하게 했다. 칼빈 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가 성찬의 요소들에 집중해 있는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나 루터에게 동의했다. 하지만 칼빈은 그 견해가 주 님의 육체적인 몸의 진정한 임재를 의미한다는 것은 부정했다. 여기에 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그의 인성으로 하늘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쯔빙글리에게 동의했다. 실재적인 임재를 요청하기보다는 제네바의 개 혁자는 요소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적인(spiritual) 임재를 말했다. 이 러한 그리스도와의 위대한 친교는 성령에 의해 촉진이 된다. 성령은 지 구상에 있는 우리의 위치와 하나님의 우편에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그 커다란 거리를 뛰어넘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232)
칼빈의 견해는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하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과 루터,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재는 전혀 빵과 포도주 ‘안에서’(in)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쯔빙글리 사이의 중간적인 입장이다. 그렌츠에 의하면 루터와 함께 칼빈은 “우리가 믿음으로 성례를 받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하는 진정한 실체(real substance)에 진실로 동참하는 자가 된다’”233)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시각화하는데 있어서 칼빈은 중세와 단절하고 성령의 중재적인 사역을 주창하였다. 칼빈은 “이러한 성스러운 신비를 감소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기적적인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고 주장해야만 하며 하나님의 성령이 준비의 보증(bond)이시기에 우리는 그것을 영적이라고 부른다”234)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상반되는 입장을 중재하는 것과 함께 성찬에서의 성령의 역할에 대한 정당한 강조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성찬에 대한 견해가 갖는 장점이 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어떤 면에서 성찬에 관한 이러한 칼빈의 견해는 영지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235)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지나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리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실재적으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있고 마지막 날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다시 오신다는 주장은 반(反)영지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만찬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영지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의 견해는 어떤 면에서 미신적이요 신비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루터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다는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의 견해에 반대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이 편재한다라고 하는 교리를 전개한다. 개혁파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몸 또는 육체의 부재(absence)를 함축하므로 루터파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의 몸이 성만찬의 떡 “아래” 함께 임재하게 된다고 루터파에서는 주장한다. 이런 성만찬에 대한 견해에서는 성령은 아무런 중요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의 육체적 재림에 대해서도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례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성례의 가장 확실한 원칙은 이 유사점에 있다. 즉 우리는 물질에서 영적인 것을 마치 눈 앞에 있는 듯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영적인 것을 이런 형상으로 나타내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236) 성찬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 가운데 성령을 통하여 실재적으로 임재하신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도 하나님의 보좌를 떠난 적이 없는 것 처럼 지금 하나님의 보좌에 계시지만 이 땅 가운데 성령을 통하여 실재하신다.
『성찬과 종말』이라는 책에서 제프리 왜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는 성찬의 이미지를 종말론적인 함축을 지닌 예견적인 식사로 규정하고 있다.237) “주 예수여 오소서” (maranatha, 고전 16:22; 계 22:20 참조)라는 외침은 오는 하나님 나라를 예견하고 식탁 교제에 그가 오시기를 요청하는 것 일뿐 아니라 (디다케 10.6) 승천하신 주님이 자기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종말론적으로 오시기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238) 그러므로 성찬식은 이러한 종말론적인 차원을 가진다. 페로우는 “성찬식의 자리는 처음과 마지막 강림(parousia)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자리다”239)라고 주장한다. 성찬식에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것은 마지막 날 강림 시와 동일하지 않다. 주님의 성찬의 임재는 종말에 이루어질 주님의 재림의 예견이다. 그때에 주님은 그가 이미 자신의 초림 동안에 시작하신 새로운 창조를 성취하실 것이다.
5. 새창조
아브라함 반 드 베크(Abraham van de Beek)는 “부활과 신체성”이라는 논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장래의 소망으로 바라보는 새창조에 대한 것을 현재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기술하는 것의 한계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뿐 아니라 마지막 날 성도들의 부활도 몸의 부활이고 그 부활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실재적인 몸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 몸은 우리의 현실적인 몸과는 다른 종류의 몸이다. 그러므로 반 드 베크는 현재의 몸과 영원한 삶 사이의 그 어떤 연속성도 인정하지 않았던 소위 ‘초기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현대의 영원한 몸을 가진 삶에 대한 생각들이 아주 구체적인 몸의 연속성을 주장하는데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240) 물론 이러한 현대의 주장들도 일종의 비연속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이 인정하는 비연속성은 물리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을 포함한 모든 악의 비연속성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 이들이 제시하는 것은 반 드 베크에 의하면 자신들의 이상의 영속화요 그들이 원하는 삶이지 실재하는 삶이 아니다. 여기에서 현대의 주장들은 다분히 영지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낸다고 반 드 베크는 비판한다: “계속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이상들이고, 지상에서의 구체적인 인간의 존재가 아닌 것이다.”241) 이 땅의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한 몸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 반 드 베크는 몸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영지주의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적인 삶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한 것으로 미래의 새창조의 상태를 묘사하는 주장에 대해 반 드 베크는 “그리스도의 부활체에는 십자가의 상흔이 보이는 것이다”라 말하면서 바울이 그리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과 그를 따라 고난의 삶을 산 사람들이 부활한 삶”이라고 주장한다.242)
새창조에 대하여 더니스는 “비록 우리가 이 사건의 세부사항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사건이 하나의 체현적인 사건(an embodied event)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243)라고 말한다. 계시록 21장 2에서 요한은 새로운 창조를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묘사하고 있다. 더니스에 의하면 이러한 신부라는 표현은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사용되고 있다 (고후11:2을 보라). 그러므로 더니스는 “창조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 계시록의 또 다른 구절인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계21:3)을 인용하면서 더니스는 “운동의 방향이 하늘과 하나님의 초월적인 ‘장소’를 향하여 위로가 아니라 인간 창조를 향하여 아래다. 이것은 마치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거하시는 이러한 최종적인 하나님의 사역의 전조가 되는 것과 같다”244)라고 지적하고 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헬라의 문화권 가운데 선교하면서 몸의 부활을 전한 것 때문에 조롱을 받았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행17:18). 사도신경의 한 구절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질 때 우리가 바라는 구속은 몸으로부터의 구속이 아니라 ‘몸의 구속’ (redemption of the body)이다 (롬8:23). 안토니 후크마는 “육체의 부활은 성경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245)고 말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종말의 비젼은 비록 지금과는 어떤 의미로든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몸을 포함한 물질적임 상태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초림하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러한 새창조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육체적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벌코프는 예수님의 재림의 방식을 논하면서 그것이 육체적일 것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가견적인 것임을 주장한다.246) 예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창조의 비젼은 완전히 영적인 비물질적인 상태가 아니다. 모종의 정화라고 하는 과정을 통과하겠지만 새창조의 상태는 여전히 물질적일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6. 세상에서의 삶의 신학
성육신에서 예수는 육신을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셨다. 예수가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역사 속에 실재하셨던 분이라는 것을 영지주의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물질세계의 일부분이 되셨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하지만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이 땅 가운데 실재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이 땅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과 책임이 있다. 예수는 성만찬에 성령을 통하여 임재하신다.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그리스도의 실재적인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는 역사 끝에 오셔서 새창조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런 미래에 이루어질 새창조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모종의 물질적인 상태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육신을 포함한 물질을 일면적으로 정죄하는 영지주의는 그 자리를 잃고 만다.
영지주의의 주장이 이원론적 윤리의 한 원인이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윌리암 더니스는 『지구는 하나님의 것』(The Earth id God's)이라는 책에서 이 세상에서의 일반적인 인간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더니스는 “이전에 하나님을 말하던 방식-그것이 확실한 지식으로든 아니면 하나님의 행동의 이야기로든-은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육체적이고 구현적인 삶을 소개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해주지 못했다”247)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더니스의 비판은 역사와 이야기 신학을 겨냥한 것이다. 역사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분명히 중요한 도구임을 더니스는 인정한다. 그러나 역사와 이야기는 교정과 심화를 필요로 한다. “역사와 이야기는 시간을 기꺼이 다루지만 공간은 다룰 수 없는 범주들이다.”248) 공간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야할 중요성을 말한 다음, 더니스는 “공간적이고 촉각적인 차원이 우리의 지적인 지도(intellectual map)와 우리의 영적인 여정(spiritual journey)에 더해져야만 한다”249)고 주장하고 있다.
더니스는 깨끗한 물과 인종적인 갈등과 같은 주제들을 제안할 수 있는 적합성을 가진 신학적인 도구, 즉 우리의 육체적인 삶의 구조를 다룰 수 있는 도구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가장 최근의 신학자 세대들이 제안한 하나님을 말하는 새로운 방법은 우리가 이러한 지정학적인 관심들(geopolitical concerns)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더니스는 “삼위 하나님의 임재에 근거하여 우리는 관계성, 행동, 그리고 구현이라는 범주가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간적 삶을 효과적으로 조명해주는 창문이라고 논의한다”250)고 말하고 있다.
어떤 간격이 신학을 우리의 육체적인 삶으로부터 나누고 있음을 지적하며 더니스는 하나님과 우리의 육체적인 삶은 서로 관련된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더니스에 의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육체적인 삶 사이의 이러한 필연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열쇠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성품이다. 이러한 점에서 더니스는 우리가 이어 받은 신학적인 형식에 어떤 약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세계를 말하기 위해 이어 받은 언어는 하나님이 지구와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가지는 지속적인 관계를 표현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이야기’ (story)로 이해하는데 대한 보다 최근의 강조마저도 많은 부분 유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들이 피조 세계의 구체적인 청지기됨을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251) 그러므로 더니스는 우리가 이어받은 언어가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적인 임재와 실체에서 나오는 세 가지 규범적인 범주에 의해 보완되어야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범주들은 더니스에 의하면 “세상에서의 삶의 신학을 향한 지시점들(pointers toward a theology of life in the world)이다.”252)
이야기 신학은 통시적(diachronic)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뛰어 넘게 해주며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방향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의 최종적인 실현을 지시해주는 목적(telos) 뿐 아니라 우리가 감히 무시해서는 안되는 구조와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더니스는 “우리는 이야기 신학의 통시적인 방법에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공시적인(synchronic) 방법을 더해야만 한다. 이러한 방법은 우리가 여기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공간적이고 구현된 삶에 대한 핸들을 갖도록 도와 준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의지를 행하도록 구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여기 이러한 복잡성 가운데서 이기 때문이다.”253) 이러한 복잡성의 중요한 요소는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악이 우리의 삶의 이야기들을 방해하고 (망치는) 방식”이다. 더니스는 자신의 책의 기본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학은 우리의 육체적이고 개인적인 삶 가운데 있는 ‘이야기 없는’ 공간들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을 발견해야만 한다. 우리의 삼위일체적인 출발점과 이러한 지시점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신학적인 실체를 분명히 하는데 사용될 세 가지 규범적인 범주를 제안하게 한다.”254)
더니스는 삼위일체적인 기초에 근거한 관계성(relationship)의 범주에 두 가지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적극적인 찾음과 수동적인 받음이 그것이다. 더니스는 “관계성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위임(commitment)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기 보다 더니스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성경이 사용하는 인격적인 범주들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사랑과 위임은 거기에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찾는 것과 접촉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255) 그러므로 더니스는 “이러한 위임이라는 활동 없이는 어떠한 것도 행해지지 않으며 어떠한 관계성도 형성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관계성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성, 다른 인간 존재와의 관계성, 그리고 다른 창조 세계와의 관계성 등의 세 가지 측면을 가진다. 더니스는 “타자와의 관계성은 (짐짓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를 제한하기 보다는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며 그 지향성에 있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위임을 반영해주는 모든 흥미와 동기, 그리고 느낌들을 잠재적으로 표현해 준다”256)라고 쓰고 있다.
행동(agency)이 더니스의 두 번째 범주다. 더니스는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 “일어나는 것, 행해지는 것은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 보다 어떤 면에서 덜 중요해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기본적인 것이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행동이 어떠한 우선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더니스에게 있어 “우리의 지식은 세상에서의 우리의 물리적이고 활동적인 삶에서 실현되고 확증되며 종종 촉진된다.”257) 더니스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에 대한 강조는 “생각 없음과 짐짓 파괴적인 행동주의라고 하는 한쌍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더니스는 “인간 존재로서 흔히 쉼 없는 갈망과 외로움에 근거하고 있는 행동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258)라고 말하고 있다. 라쿠나(Catherine LaCugna)를 인용하면서 더니스는 “하나님은 행동하기로 자유로이 선택하시며 이러한 행동은 항상 불가피하게 문맥을 가진 모든 인간 행위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으셨듯이 인간 행위자도 또한 타자를 향하여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259)고 주장하고 있다.
구현(embodiment)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에 필수적인 세 번째 범주이다: “인간의 삶이란 필연적으로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삶이다.” “성경에서 육체적인 삶이란 하나님과의 삶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그러한 삶을 위한 특권을 부여받은 도구(vehicle)가 된다.... 인간의 삶이란 불가피하게 구현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물리적인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260)고 더니스는 논평하고 있다. 성자의 성육신을 지시하며 더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자의 육체적인 임재가 구원 사역의 도구가 되었듯이 성자가 소개한 통치(Reign)는 영과 물질 사이의 어떠한 구분도 하지 않는다.”261) 우리의 구원의 본성이 육체적임을 논한 다음 더니스는 “하늘에서의 하나님과의 삶은 육체를 배제한 것이 아닐 것이며 에로틱하지 않은 즐거운 육체적인 상태일 것이다”262)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더니스는 인간의 삶이 구현된 예배(embodied worship)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령과 진리 가운데 삼위 하나님을 예배한다 (요4:24).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불가피하게 하나의 구현된 활동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몸 안에서 예배한다. 오는 세상에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몸 안에서 예배할 것이다.
더니스는 이러한 자신의 세 가지 범주를 창조와 문화, 인종과 생태학, 그리고 예술 등의 다섯 가지 주제에 적용하여 토론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상론하지 않고 로버트 톰슨이 제시하는 다음의 요약으로 대신한다: “창조는 하나님이 자유로이 선택하신 한계를 의미한다. 문화는 사람들이 창조로부터 만들어낸 것이다. 인종은 우리가 만든 것인 문화로부터 획득하는 정체성이다. 생태학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인간적인 청지기직에 관련된 도전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반면, 예술은 창조의 깊은 장엄과 고민을 미적인 형태로 표현해야하는 인간의 필요를 구현한 것이다.”263) 이러한 더니스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적인 지식의 양식(mode)은 삶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의 추상이나 절정의 경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물질성에 구체적으로 관여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264)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다음의 말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20).
7. 나가며
지금까지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론, 성찬에 대한 칼빈의 견해, 그리고 새창조가 갖는 반영지주의적인 측면들을 살펴보고 이원론적 윤리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몸의 윤리를 더니스의 주장을 통해 개진하였다. 기독교는 육체를 포함한 물질세계를 일면적으로 정죄시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이 땅에서의 삶에 책임적인 참여를 성경은 명한다.
이원론적인 사고가 영지주의에 기인한 것이라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주장하며 우리는 이원론적인 윤리를 배격해야 할 것이다. 육과 영을 날카롭게 대립시켜 육이 무가치한다는 주장은 정당하지 않다. 성과 속을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 온다. 우리가 육적인 일이요 세속의 일이라고 도외시했던 부분들에 대해 우리는 정당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이르면 이 세상에서의 삶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것이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몸의 윤리를 바르게 확립하는 것일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며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땅의 일에 몰두해버리고 육신적인 탐욕에 빠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면적으로 치우친 편향된 의식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창조 세계에 대한 보다 진지한 관심을 갖자는 것이요 영적이라고 하는 것을 육체적인 것의 반대로만 설정하지 말고 정당한 몸의 윤리를 확립하자는 것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 필자는 피안성만을 강조하는 내세지향적인 신앙의 행태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이 갖는 정당한 차안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우리 신앙의 차안성을 강조하는 것이 피안성을 배제한 차안성만을 추구하자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차안성을 배제한 피안성에만 치우침에 대한 정당한 바로 잡음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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