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신약기독교의 출발
제1장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독교가 완전한 구성을 이루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국가와 민족 안으로 제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나는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던 초기 시대에까지 오직 이스라엘에게로만 제한되었다. 역사학자 중에는 이와 같은 것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의 확장으로 보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 유대교만의 하나님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유대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전 세계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메시아 거부에 의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출발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도처에서 세계적인 기독교가 하나님의 신적작정에 의하여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되어진 것이라고 선포한다.
기독교가 창세전부터 작정되어진 세계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임을 선포하시기전 까지 오직 이스라엘의 교회로만 제한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기독교의 모든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지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어 자신이 기독교의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중심이며 머리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까지는 기독교를 하나의 단일적인 교회로 제한시켜야 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선포하기 이전에 국가단위 또는 민족단위, 부족단위로 교회들이 세워졌다면 기독교는 설립되기도 전에 이미 우상숭배적 사이비종교로 수없이 분열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셨을 때 이미 유대교가 여러 종파로 분열되어져 있음을 통하여 증거 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독교의 모든 것이 완전하게 선포되기 까지는 기독교를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단일교회로 제한하셨던 것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선포한 후에 사마리아로부터 시작되는 세계적인 기독교 확장을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기독교의 근원이며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신학적으로 완전하게 정립한 후 드디어 하나님의 세계적인 기독교를 선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불과 3년(A.D.4-33)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교회의 3년 역사는 아담교회 이래 그때까지의 모든 기독교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교회 이후의 모든 교회역사를 총괄하여 대변하고 증거하고 선포하는 위업을 이루었다. 4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하나님의 세계적인 기독교를 다양한 차원에서 증거하고 선포한다.
1. 기독교 신학의 완성
기독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교회와의 모든 관계를 진행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되고 진행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섭리일체가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까지 주어졌던 하나님의 말씀(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섭리일체가 상징적이며 예표적인 것으로 주어졌고 그것도 서서히 단계적이며 점진적인 것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의 섭리일체가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예고되고 계시되었던 메시아가 곧 자신임을 선포했고 따라서 자신이 곧 기독교의 주체임을 선포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은 오직 자신을 통하여서만 가능할 뿐이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상징적, 예표적, 점진적, 미완성적으로 주어졌던 기독교의 신학체계를 구체적, 실제적으로 완성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신학 체계를 문서로 정립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나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으로 그것을 정립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사도바울을 통하여 문서화 되었고 그것이 성경으로 정립되었다.
2. 교회조직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세베대의 아들), 요한, 빌립, 바돌로메, 도마, 마태,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다대오, 시몬, 유다 등등의 12사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조직을 세웠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세운 것 이외에 다른 어떤 특별한 교회조직을 구성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교회조직은 훗날 사도들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러 세운 12제자가 곧 교회조직의 시작이며 동시에 완성이다. 교회조직은 이미 광야교회시대에 성막교회와 제사장제도를 통하여 상징과 예표로 주어졌으며 특히 여호수아시대의 12부족교회를 통하여 더욱 체계화 되었다. 그러나 사사시대교회와 왕국교회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조직은 와해되어져서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고 왕국교회가 무너진 후 포로교회시대와 유대국에 대한 이방인들의 식민통치 과정에서 완전히 이교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세운 것은 그 12제자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 세워지게 되는 교회조직을 감안할 때 교회조직의 개편, 또는 교회조직의 재건으로 언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교회조직의 시작이며 완성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교회조직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교회조직에 대한 상징과 예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12제자를 통한 교회조직은 지금까지의 교회조직을 총체적으로 반영하고 적용하였다. 그것은 훗날 사도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교회조직의 형태가 광야시대로부터 세워진 교회조직 형태를 그대로 적용한 과정에서 증명된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교회조직은 대제사장을 최고 지도자로 하는 조직형태였다. 대제사장은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과 예표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함에 따라 대제사장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조직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운 12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하에 지교회들을 인도하고 대표하는 직분 자들이다.
3. 하나님나라 선포
예수 그리스도교회에는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은 기독교 성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가 궁금하여 모여들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기적과 이적을 보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나라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현세를 마친 후 구원받은 자들이 부활을 통하여 가는 하나님나라 ‘천국’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성도들의 신앙적, 사명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선포되고 증거 되는 하나님나라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두 개의 하나님나라 중에 후자를 더욱 강하게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유대국과 이스라엘 민족을 복구시켜 줄 현세적인 메시아를 원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는 두 개의 하나님나라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는 하나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에 의하여 비로소 전파된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하나님나라는 오직 하나로서 구원 받은 자들이 가는 하나님나라(천국)이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어떠한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곧 현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는 신학원리는 몰랐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초기 기독교와 중세기독교는 물론이요 현대기독교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이 구원받은 자들이 가는 천국에 대한 개념에만 몰두해 있을 뿐 기독교가 현세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4. 하나님섭리 선포
예수 그리스도교회는 교회에 주어진 사명 중 하나인 하나님의 섭리 선포에 전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중 나는 새들과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선포했고 특히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국만을 하나님나라로 이해했듯이 하나님의 섭리도 자신들을 구원하는 구속사적 차원의 섭리로만 이해하였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몰이해(沒理解)역시 초기기독교와 중세기독교는 물론이요 현대기독교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이 구속사적 차원의 하나님의 섭리에만 몰두해 있을 뿐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5. 하나님말씀 선포
예수 그리스도교회는 제자들에게는 물론이요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훗날 사도들을 통하여 성경으로 정리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신학이었다. 때문에 요한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선포하였고 신학자들은 그것을로고스신학이라고 정립하였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는 기적과 이적을 보기위하여 모여들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내쫒는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며 병자나 귀신들린 자를 내쫒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진행하는 과정에 부차적으로 진행하는 보조적인 것임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병자나 귀신들린 자를 내쫒는 기적과 이적에 더욱 매력을 느끼며(행 8:18-24) 이러한 비진리는 현대기독교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6. 제자훈련
예수 그리스도교회는 교회의 사명 중 하나인 제자훈련을 실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훈련은 신학적인 것임과 동시에 신앙적인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실제적 삶을 통하여 제자들을 훈련시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 삶을 사신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이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적 삶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훈련은 기독교역사에 항상 무시되어 왔다.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제자훈련을 실시함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방침을 따르지 않았다. 저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이루는 섭리적 차원에서의 신학을 가르치지 않고 구속사적인 차원의 교리만 가르쳤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이루는 사명적 차원의 신앙을 가르치지 않고 목회자에게 충성 복종하는 신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자신들은 전혀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반대의 삶을 살아 “저들은 이미 자기상을 받았다”(마 6:2)는 말씀과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하는 바는 본받지 말라”(마 23:3).는 말씀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7. 교회사명 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완성하여 명실상부한 기독교의 수장이 된 후 통치주로서의 권위와 권세로 모든 교회에게 사명을 부여하였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그것은 창 1:28을 통하여 부여된 사명으로서 아담교회 이후의 모든 교회들에게 일률적으로 영원히 부여된 사명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 속에는 마 5:13-16과 마 6:33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기 직전 다시 한번 교회들에게 사명을 상기 시켜주면서 모든 교회들의 사역 현장에 자신의 영(성령)이 함께 하사 교회들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을 인(印)쳐주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교회의 사명은 조직신학에서 정리할 문제임으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원론적인 것만 정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립하여 주신 교회사명의 원론은 다음과 같다.
*진리를 사수하고 보존하고 보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모든 창조영역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고 양육하고 관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들을 계속하여 영원히 세워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사명을 진행함으로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로 온전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하며 그들을 빛과 소금의 전사들로 양육하여 그들이 자신의 현재적 삶의 영역들에서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되고 통치되고 관리되어지는 가운데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만천하에 세워짐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한편 구속사적인 차원에서의 복음전파는 위와 같은 교회의 사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진행되어진다.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총체 또는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역사 중의 한 영역이며 따라서 복음전파 역시 교회사명의 총체 또는 주체가 아니라 교회사명의 한 영역인 것이다.
8. 메시아의 사명 완성
예수 그리스도교회의 역사 중에 가장 장엄하고 가장 거룩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사명 완성이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사역을 완성하는 역사적인 순간들을 통하여 숨 가쁘게 진행되는 기독교역사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사역 완성은 사단의 계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사단은 참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사단의 지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제 곧 어떤 어마어마한 역사를 전개하실 터인데 그것이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그 역사를 진행하실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히 지금 어떤 어마어마한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그 엄청난 역사의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도 확실한데 그 내용과 방법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만약에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서 메시아 사명의 대 역사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가롯 유다를 통하여 그를 체포당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대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진행의 내용과 방법을 알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고 느낌상 그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참으로 난리가 났던 것이다.
사단은 당시의 권력층이었던 왕을 비롯한 정부 관리들과 제사장들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열심당원 등등을 총동원하여 그 내막을 알아내려 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다급한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만 죽으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판단 하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하여 가롯 유다를 이용하였고 제사장들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열심당원 등등을 총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였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올려다보면서 하나님이 보호하사 사단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메시아 사명의 완결일 줄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바보 같은 사단의 한계와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멋진 경륜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로마법정인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당시의 유대는 로마의 정치적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재판은 허용되었으나 사형을 언도하거나 집행 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그것은 로마 법정에서만 가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형을 언도받게 하기 위하여 그를 로마의 법정에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죄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종교적인 것으로서 신성모독죄였고(마 26:63-66) 다른 또 하나는 정치적인 것으로서 반란 기도 죄였다.(마 27;11) 제사장들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신성 모독죄를 적용하였다. 그러나 신성모독죄는 유대의 종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로마법정에서 유죄판결을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 법정에 세울 때는 반란죄로 고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총독이며 재판관이었던 폰티우스 필라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반란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총독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유대의 실권자들과 마찰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결정권을 유대의 군중들에게 맡겼다. 당시의 유대군중들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대신 바라바를 선택 하였다. 하나는 잘못된 메시아 사상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로마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유대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메시아가 도래하여 다윗과 솔로몬시대의 영광을 재현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메시아의 강림하심이 적어도 다윗 가문을 통한 귀족적인 강림일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한 그들에게 초라한 목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임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 그것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코미디였다. 그러나 그들이 목수의 아들을 무시하고 비웃는 사이에 사태가 이상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목수의 아들이 감히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가 하면 자신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통로라고 선포하더니 이제는 아예 자신과 하나님을 동격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민초들을 상대로 하여 변두리광야나 빈들을 헤매던 그가 대중들이 따르는 것에 기고만장하여 이제는 감히 예루살렘성전에까지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는가 하면 제사장들을 훈계하고 드디어는 제사장들을 비롯한 바리새파 사두개인 등등의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을 싸잡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면서 심판하겠다고 협박하고 나섰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보는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지도자 계열로서는 도저히 참고 묵과할 수 없는 오만방자한 것이었다. 한편 로마의 학정에 대한 분노와 민족적 국가적 애국심에 불타는 자들에게는 가난한 자들과 어울리면서 사랑 타령이나 부르는 목수의 아들보다는 실력으로 로마와 대적할 수 있는 바라바가 더욱 요구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형 죄의 명목으로 십자가 처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재판장이었던 폰티우스 필라티우스총독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분명하게 선언하였다(마27:24).
우리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빌라도 법정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재판을 회상하면서 참으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재판장 스스로가 무죄를 선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죄함을 변론하라고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 한마디 변호 외에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라고 울부짖던 예수 그리스도는 정작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위한 한마디의 변호조차 삼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조차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종들에게 몸소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완벽한 실제적 교육이었다. 성경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로마법정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법정에서의 재판보다 더욱 장엄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썼고 십자가에 달리어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혔으며 민초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다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송하던 군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었던 옷마저 벗기어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벗은 몸으로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민초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침까지 뱉으면서 조롱하였고 심지어는 살인강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여 조롱과 야유를 퍼부었다. 참으로 망극한 일이었고 참으로 슬픈 일이었고 참으로 참담한 일이었다. 그것은 정녕 하늘이 무너져야 할 일이었고 땅이 꺼져버려야 할 일이었다. 세상이 온통 무너져 버리고 깨어져 버리고 날아가 버려야 할 일이었다. 세상에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메시아께서 인간을 위하여, 그것도 그냥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고 멸시하고 조롱한 바로 그 인간들을 위하여 메시아께서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참으로 엄청난, 상식을 초월하고 세상을 경악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그 메시아께서는 오히려 세상을 용서하시고 축복하셨던 것이다. 메시아께서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감수 하시면서 마지막 숨이 멎으시는 그 순간까지 저들의 잘못을 변명하시면서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셨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비통이나 패배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분명히 비통과 패배였지만 그것은 잠시에 불과하였고 곧 승리의 역사를 알리는 팡파레가 만천하에 울려 퍼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이 멎으시기 직전 하늘이 울었고 땅도 울었다. 우주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잠시, 아니 순간의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는 순간 하늘의 울음도 땅의 울음도 순식간에 멎어 버렸다.
하늘에서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리웠던 휘장이 찢어져 내리면서 승리의 팡파레가 만천하에 울려 퍼졌고 천군천사가 합창하는 영광의 찬양이 온 천하에 메아리쳤다. 그것은 인간의 말과 글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장엄한 순간이었고 인간의 눈으로는 바라다 볼 수조차 없는 찬란함과 눈부심, 거룩함과 영광의 순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완성한 것이다.
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예수 그리스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통하여 그 짧고도 위대한 역사를 마감하고 사도교회들에게 그 역사적 바통을 넘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인류역사를 뒤 흔들어 놓고도 남음이 있는 전대미문의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조용히 진행되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다시 살아남을 만천하에 광고하지 않고 자신의 제자들을 비롯한 몇몇 성도들에게만 조용하게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의 승천도 부활과 같은 경우이었고 같은 상황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마무리를 한 후 그 바통을 제자들의 교회들에게 넘기고 그들만이 보는 가운데에서 조용하게 승천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용한 부활과 조용한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이로우신 권세와 능력을 실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승천과 같은 사건들은 인류역사상 그 경우를 찾아 볼 수 없는 차원의 역사적 사건들로서 그러한 사건의 당사자라면 누구라도 그 사실을 만천하에 광고하고 자랑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은 자신의 엄청난 사건을 그저 담담하게 진행시켰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을 의심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반동적 소문이 지금까지도 심심치 않게 주장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동분서주 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품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바쁜 자는 강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을 알리려고 노력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 강한 자는 다만 자신의 역사를 진행할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할 필요성은 약한 자에게만 존재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엄청난 사건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조용히 진행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권세와 권위를 아울러 실감하게 된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등등은 인류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일반적 인간차원의 범주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역사학자들의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었다. 종교학적 차원에서 논증할 때에 종교를 창설한 자나 또는 그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에 대해서 신격화 시키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 종교의 위상과 권위와 신실성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종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지도자나 핵심인물들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출생이나 자라온 과정을 비롯한 일생에 관하여 수많은 전설적, 신화적 설화들을 만들어 내었고 그리하여 상식을 초월하는 설화들이나 심지어는 전혀 만화 같은 설화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교학자이면서도 종교의 범주를 초월하여 종교를 이해하려는 자유주의 종교학자인 슐라이에르막허조차도 그 위대성과 신비성에 매료되어 ‘인류역사상 다시 존재할 수 없는 최고의 스승적 인간’이라는 찬사를 할 정도로 위대하고 장엄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간단하게 언급한다. 성경은 30여년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말함에 있어 그가 사역하였던 3년여의 기간에 대한 활동사항과 그의 가르침만을 언급할 뿐 심지어는 그의 탄생일자 까지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대단한 일도 엄청난 일도 신비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와 품위상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광고하지 아니하시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성을 역사적으로 부각시키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성에 의문을 품는 자들을 침묵시키신다.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성을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탄생의 역사성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출생)에 대한 실제성과 역사성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강림을 부인하고 ‘가현적 강림’을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환상적 강림’을 주장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통의 일반적인 사람이었는데 제자들의 추대에 크게 고무되어 스스로 메시아임을 자처하였다고도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성과 역사성은 많은 기록문서들을 통하여 입증된다. 우리는 그것을 일일이 모두 소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만을 소개한다.
1) 로마의 역사적 증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실제성을 증명해 주는 가장 최초의 증거는 로마역사에 의한 증거이다. ‘눅 2:1-20’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증거는 로마제국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 - B.C.27-A.D.14재위)의 명령에 의하여 실시되었던 로마제국 속령 하의 모든 사람에 대한 인구조사를 배경으로 한다. 그때에 유대의 관할권은 수리아(시리아)의 총독 구례노(퀴리니우스-Quirinius)에게 있었다. 당시에 로마정부는 식민지 관리와 세금징수를 위하여 14년마다 정기적인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역사가들은 이 인구조사가 ‘A.D.6년에 실시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 탄생과의 연관성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구례노가 시리아총독으로 두 번 근무했다는 것과(눅 2:2)의 첫 번이라는 단어인(프로테-πρωτη)가 일반적으로는(첫번째)를 의미하지만 때로는 ’이전의‘ 또는 ’앞의‘로도 해석되기 때문에 반드시 ’A.D. 6년‘의 인구조사로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서력기원의 년대 측정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역사의 년도에 중심을 둘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사실성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한편 구례노 총독의 인구조사는 히브리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의 저서(Antiq. XVIII. 26 ii. 1)에도 나온다.
또한 팔레스타인 출신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 팜필루스(Eusebius Pampilius)의 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의 재위 42년, 톨레미왕조의 종식을 가져온 애굽의 정복 및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지 28년 되던 해에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고 증언하며 당시에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구례노(퀴리니우스-Quirinius)에 의해 인구조사가 있었다고 증언한다(유세비우스 교회사-엄성옥편-제1권 제5장)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한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티우스)는( A.D.26-36)에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등등을 통치한 로마제국의 총독이었다. 그는 당시에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운집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에 대비하여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였다. 로마역사는 빌라도의 재판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비롯한 실재성을 증거 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하여 일반역사를 적절하게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때가 이르매)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적용하시는 섭리적 역사에 대한 시간적 적용을 말하는 것이다.
2) 헤롯왕조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혜롯 왕조의 역사를 통하여서도 증명된다. ‘마 2:16’에는 혜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2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학살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마크로비우스(Macrobius)의 저서인 <축제(Saturaalia)>에 나오는데 마크로비우스는 가이사아구스도 황제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헤롯의 명령에 의해서 시리아 일대의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이 살해당할 때에 그 속에 헤롯 자신의 아들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차라리 그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돼지가 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반면에 요세푸스는 헤롯의 유아학살에 관한 이야기를(고대 문물기-Antiquities-17권)와(역사서제2권)을 통하여 더욱 상세하게 기록한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헤롯의 비참한 종말을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다루면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하여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증언한다.
3) 서력 기원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서력기원에 의해서도 증거 된다.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서양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원(紀元)에 대한 동양적인 명칭이다. 유럽에서는 그리스도 기원이라고 하며 그리스도탄생의 해라고 간주되는 해를 기준으로 하여 출발되어 진다. 서력기원은 A.D. 6세기경에 로마의 수도사(修道士)인디오니시우스엑시구스가 창시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건국 기원 754년이라고 하여 그 때를 서력기원 1년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많은 연대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건국 기원 750년으로 계산하여 실제로는 A.D.4년을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해로 간주한다. 서력기원이 유럽에서 사용된 것은 A.D 8세기 이후부터이다. 서력기원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을 기원전(紀元前-B.C.-Before Christ)라고 하고 그리스도탄생 이후를 기원후(紀元後-A.D.-Anno Domini-주의해-主의年)라고 표기한다. 서력기원은 현재 세계 각국에서 이의 없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년도를 기점으로 하여 출발하였다는 것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2) 부활의 역사성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실제성과 역사성을 부인하는 많은 주장들이 있어 왔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 몇 가지를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1) 시체 도적설과 유대의 전승
예수 그리스도부활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가장 처음 거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한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아리마대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후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예고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때문에 그들은 총독 폰티우스 필라티우스를 찾아가 로마의 군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켜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에 관여하기를 꺼려했던 총독은 더 이상 그 일에 관여하기를 싫어하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였다. 저들은 할 수 없이 자체적인 수직군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어떤 역사가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로마군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켰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저들은 수직군사들이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생전에 일으켰던 각종 기적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거대한 돌로 무덤 입구를 봉쇄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조치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고한 대로 장사한지 삼일 후에 살아난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우려(憂慮)가 실제로 나타남에 따라 난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직군사들에게 돈을 주어 자신들이 자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 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 유포한 헛소문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은 헛소문을 내게 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흉계의 전말이 유대 전역에 들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마 28:11-15)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유대인들의 야사(野史)에도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2) 기절설과 로마의 증언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했었다가 살아났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삼류 소설가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예술과 관계없이 수입을 목적으로 하는 몇몇 삼류 소설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기절하였다가 다시 살아난 후 더 이상 활동하지 않고 숨어살다가 나이 먹어 죽었다는 내용의 소설을 써서 많은 수입을 걷어 들였는데 이러한 일들은 근래에도 계속되고 있다. 어떤 미국 여자소설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절했다가 살아난 후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로마를 거쳐서 프랑스로 간 후 그곳에서 자녀를 낳고 살다가 사망했다는 소설을 써서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로마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마카비가(家) 후예들의 인도 하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당시의 로마황제와 원로원은 반란의 원인과 규모에 대한 문제를 보고 받으면서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의 반란임과 동시에 유대의 종교적인 이유가 복합된 반란임을 보고 받았다. 그리고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어 장사된 후 3일 만에 다시 살았다는 보고를 함께 받았다. 그러나 로마의 관심은 정치적인 반란에 있었지 종교적인 반란에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로마의 개념으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종교적인 설화로만 인식되어 가볍게 간과 되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보고에 대한 기록은 로마역사 문헌에 작게나마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3) 에뎃사 왕과 다대오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실제성과 역사성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것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 있는 에뎃사라는 작은 나라의 왕국 공문서인데 이 공문서에는 당시의 왕이었던 아그바루스(Agbarus)의 질병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아그바루스 왕은 백약이 무효인 질병을 앓고 있던 중에 유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 편지를 보내어 초청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제자를 보내어 질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훗날에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한 후 도마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칠십문도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다대오를 에뎃사로 보냈다. 다대오는 복음의 전령사로서 사명을 이행하던 중 왕에게 자신이 오게 된 내역을 전달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은 후 부활하여 승천하였고 따라서 자신이 도마의 명을 받고 에뎃사로 오게 되었다는 전말을 왕에게 고한 것이다. 이때에 왕은 다대오를 통하여 질병을 치유 받았다. 이러한 내용은 에뎃사의 고대역사와 아그바루스왕의 의사록을 담고 있는 공문서에 사실대로 기록되어 오늘날 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그 문서를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고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는 당시의 서신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아그루스바 왕이 예수 그리스도께 보낸 편지.
(이 서신은 특사인 아나니아가 예루살렘의 예수 그리스도께 전달했다.)
에뎃사의 임금 아그바루스는 예루살렘 변경에 출현한 탁월한 구세주 예수에게 문안합니다. 나는 당신이 약이나 약초를 사용하지 않고도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신은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저는 자를 걷게 하며 오랫동안 고생하여온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여주고 죽은 자를 살렸다고 합니다. 당신에 관한 이런 소문을 듣고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이 나를 방문하여 나를 괴롭히고 있는 질병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나는 또 유대인들이 당신에게 대해 불평을 하고 있으며 당신을 해치려는 음모를 꾀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나는 비록 작지만 고귀한 국가를 소유하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충분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그바루스 왕에게 보낸 답신
오 아그바루스여! 나를 보지도 않고서도 믿는 그대에게 복이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나를 본 자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며 나를 보지 못한 자가 나를 믿고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반드시 이루어야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어 나를 보내신 그분의 영접을 받아 하늘로 들려올라 간 뒤에 나는 당신에게 내 제자 한 사람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가 당신의 질병을 고쳐주고 당신 및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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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성과 역사성에 대한 증거들은 공식 또는 비공식적인 역사문서들을 통하여 무수하게 증명 된다. 반면에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역사문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증명하고 부각시키려는 어떤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것을 간략하고 짧게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함에 있어, 자신의 어떤 점을 부각시키려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신학적인 문제만을 열심히 정립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서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거부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성경을 근거로 하는 변증은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어떤 설화들을 만들어 낸다던가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우수성이다.
기독교는 기독교를 부각시키려는 어떤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존재로 강림하였느냐? 아니면 가현적, 또는 환영적으로 강림한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부활 승천하였느냐? 하는 것들은 그것을 논증한다는 것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다. 기독교는 다만 하나님의 섭리대로 살고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하면 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섭리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논증에 의하여 존재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원리에 의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재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장 사도시대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한 후 본래의 자기 위치로 승귀 하시면서 하나님의 교회들을 제자들에게 맡겼다. 그것은 이미 ‘마 16:18-19’을 통하여 예고되어진 것이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제 제자들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긴다는 것이었지만 그 말씀 속에는 교회들에게 주어지는 절대적인 권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교회를 주관할 것이며 또한 영원히 함께 하여 주심으로 승리의 교회들이 될 것임을 약속하신 것이었다. 사도들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심과 명령하심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 가는 사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물려받은 교회는 내용적으로는 영광의 교회였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절대 절명의 험난한 교회였다. 우리는 사도들이 목숨 바쳐 전개한 복음전파와 교회설립의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그 처절한 그러나 참으로 영광스러운 기독교역사를 실감하게 된다.
1. 예루살렘 교회(A.D. 33년)
(1) 예루살렘교회의 역사성
기독교 역사가들은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를 안디옥교회로 본다. 그것은(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는 예루살렘교회다.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고 사역하셨던 교회이며 성령하나님의 공식적인 가시적 임재하심이 최초로 계셨던 교회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는 기독교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역사성을 갖는다. 비록 예루살렘교회가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로서 기독교 본산의 핵심적 위치에 서지 못했고 비운 속에 사라져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초의 신약시대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갖는 역사성에 항상 주목해야 한다.
예루살렘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설립되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사단의 시험을 거치고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한 때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 갈릴리, 나사렛, 스불론, 납달리의 가버나움 등등의 지역에서 휴식을 취함으로서 이사야선지를 통한 하나님의 예고(사9:1-2)를 완성한 후(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를 선포하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였고(마4:12-17)이때에 예루살렘교회를 설립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립한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건물(예배당)이 아니었다.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립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무는 시간과 장소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현장들이 곧 교회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고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현장들이 곧 교회였다.
(2) 예루살렘 교회의 위치
예루살렘교회가 하나의 장소적인 위치를 갖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한 후 사도들이 교회를 인계 받았을 때이다. 예루살렘교회의 위치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서로 다른 주장이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세 가지로서 첫째는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예루살렘성전이며 둘째는 쿰란공동체 또는 엣세네파들의 예배 처소이고 셋째는 마가의 다락방이다. 우리는 그중에서 마가의 다락방을 예루살렘교회로 본다. 학자들 중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성전을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솔로몬의 예루살렘성전이 예루살렘교회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의 사도들은 아직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성전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또한 당시에는 성전 앞뜰에서 자유로이 토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성전 출입은 제한받지 않았었다. 반면에 예루살렘성전의 동쪽 편에 위치해 있던 솔로몬행각이 사도들의 복음 전파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솔로몬행각은 긴 장랑(長廊)으로 되어있었는데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곳이었고 겨울에는 눈과 비를 피하는 곳이었으며 성전에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때문에 사도들은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예루살렘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소한 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구성된 예루살렘교회가 성전에서 공식적인 기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한편 쿰란공동체나 엣세네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의 일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공동체가 예루살렘교회가 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성례전을 정립해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였으며 성령의 임재하심이 가시적으로 있었던 마가의 다락방이 분명하다(행1:13, 행2:1-13).
(3) 성령하나님의 가시적 임재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교회 즉 사도들의 주관 하에 있던 교회역사는 주로 유대 밖의 교회들에 대한 역사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교회역사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되는 사도주관 하의 교회역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부터 출발된다.
예루살렘교회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예고되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던 성령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하심에 대한 증거를 기독교역사에 남겼다(마3:11, 요14:16, 26; 15:26; 16:7, 행 1:8).
성령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하심은 예루살렘교회가 가롯 유다로 인하여 결원된 사도의 숫자를 보강한 후 오순절날에 이루어졌다(행1:1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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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15-2:13’을 곡해하여 많은 비진리들이 주장되고 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성령 강림절
신학을 모르는 자들이 ‘행1:15-2:13’을 성령하나님의 강림하심에 대한 기원으로 간주하여 성령강림 주일이라는 절기를 만들어 내었다. 저들은 특히 성령하나님의 강림하심이 오순절 날에 이루어졌다 하여 오순절 날에 대한 의미를 크게 강조한다.
* 성령 세례
신학을 모르는 자들이 ‘행1:15-2:13’을 성령세례와 연결시킨다. 저들은 세례요한이 증거 한(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의 말씀과 성령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이(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더니-행2:3)의 말씀을 곡해하여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성령세례를(불-火)로 선포한다. 그리하여 성령을 받을 때에 뜨거움을 체험한다고 주장하고 성령세례 역시(불세례)로서 뜨거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님의 섭리역사하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성령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 하나님으로서 이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기독교역사에 처음 관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기독교역사에 참여하셨다. 성령하나님께서 이때에 제자들 앞에 가시적으로 임재하신 것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다.
첫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심에 대한 확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교회, 종, 자녀들에게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보증이다.
셋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성령하나님에 의하여 진행된다는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 교회의 머리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가시적인 역사하심이 아니라 불가시적인 역사하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적속성과 권위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불가시적인 영, 즉(성령-성부하나님의영-성자하나님의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성령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당시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러한 신학원리를 알 수 없었다. 사도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여 실망하고 낙심하여 정체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기독교의 정체성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시적으로 확인시켜 주심으로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으며 또한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후의 모든 교회, 모든 성도, 모든 종들을 향한 배려적 차원의 확인시켜 주심이기도 했다.
당시의 예루살렘교회와 제자들과 성도들 그리고 기독교역사 속의 모든 교회와 종들과 성도들은 ‘행 2:1-13’의 성령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 안에서 안심하고 살게 되며 강하고 담대하게 사명을 진행하는 것이다.
한편 ‘행 2:1-4’은 성령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임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지 성령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을 증거하고 있지 않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 2:1-4).
이와 같이 당시의 성령하나님께서는 가시적으로 임재하신 것이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강림하신)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성령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성령강림 하심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이 문제는 조직신학에서 논증할 문제임으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의 논증을 삼가기로 한다.)
(4) 예루살렘 교회의 신학사상
하나님의 기독교가 에덴교회로부터 출발되어 졌으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하여 기독교역사가 진행되었으므로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유대인, 즉 히브리인들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곧 야훼하나님의 역사였고 기독교의 역사였다. 그들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넣는 망령된 일을 저질러 천추에 씻지 못할 민족적 한을 남겼지만 그들은 조상대대로부터 전승되어진 메시아에 대한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메시아사상은 몇 가지의 종교적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을 수 천 년간 이끌어 온 정치적, 종교적, 핵심은 율법이었다. 그들이 한때 착각하고 실수하여 하나님의 신 정치(神政治)를 거부하고 왕 정치(王政治)를 요구하였지만 그들을 통치하고 인도하는 것은 언제나 율법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메시아 사상은 당연히 율법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또한 조상대대로 전승되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제사장나라가 되는 것이며 히브리민족이 제사장민족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하나님께 선별되고 선택되어진 제사장 국가라는 것을 굳게 믿었으며 또한 자신들의 민족이 하나님께 선별되고 선택되어진 제사장 민족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학과 신앙은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희망이요 등불이었다.
이러한 신학과 신앙으로 인하여 그들은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가 되었어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여전히 야훼하나님을 섬기며 훗날을 기약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당시에 만연했던 그레꼬로만의 사회적 문명 속에 휘말리는 것을 거부하고 민족적 전통문화와 종교를 목숨 걸고 지켰다. 그레꼬로만 문명 속에 안주하는 자들의 입장에 보면 야만스럽고 무지하기까지 한 유대인들이었지만 그들은 장차 자신들이 오히려 그들을 지배하고 다스릴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모든 고난을 감수하였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 신앙적 사상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약속되어진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제사장국가로 세워주고 히브리인들을 제사장민족으로 세워줄 야훼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가진 메시아였다. 때문에 그들은 초라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자신을 가리켜 약속된 메시아라고 했을 때 비록 그가 때때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아닌 목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던진 것이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인정하게 되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메시아사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약속되어진 메시아 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약속된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한 사실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가 약속되어진 메시아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강하고 능력 있는 자신들의 메시아사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함과 동시에 이제는 하늘의 천군천사(千軍天使)를 대동하고 장엄하게 강림하게 될 메시아를 대망하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세계를 통치하는 영광스러운 제사장 국가가 될 것이며 히브리민족은 세계를 주도하는 영광스러운 제사장 민족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러한 대망은(물론 나중에는 그러한 오해가 모두 정리 되었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그리고 더욱 율법주의적 메시아 사상에 매달려 설레이는 기대감 속에서 자신들의 전통적 문화와 종교를 지켜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아사상에 대한 오해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예루살렘교회에 임재된 성령하나님의 공적, 가시적, 임재를 통하여 서서히 바로 잡아지게 되었다. 그때에 성령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을 때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이었지만 사도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아에 대하여 크게 오해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로부터 메시아사상에 대한 역사적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메시아 사상의 전환은 일반 유대인들 보다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인식에서 보다 빠르게 전개되었다. (행2장)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제 그들이 인식하는 메시아는 더 이상 유대교적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적이며, 군사적, 정치적 권능과 권위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한 대속 죄의 메시아로 오셨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과 달리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여전히 유대교적 메시아, 율법적 메시아 사상이 잔존하고 있었다. 신약교회 초기시대에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교회에 내 놓거나 나누어 가지는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은 천국에 대한 소망과 기대감 보다는 이와 같은 메시아의 강림을 기대했던 신앙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강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메시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다 함께 오해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요구되었다. 사도들의 복음전파에 유대인들이 율법적 제동을 걸었던 것은 이와같은 신학적, 신앙적 배경 때문이었다.
(5) 예루살렘 교회의 갈등
예루살렘교회가 유대교적 메시아 신앙에서 기독교적 메시아 신앙으로 서서히 귀환하게 되면서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의 임재하심 속에서 기독교로서의 본격적인 사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현실적인 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점점 어려움을 겪었다. 최초의 교회적 분규는 교회내의 구제 문제로 인하여 일어났다. 이때에 예루살렘교회에는 크게 두 종류의 성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히브리파 유대인 성도였고 다른 하나는 헬라파 유대인 성도였다. 숫자적으로는 헬라파 유대인 성도가 더 많았지만 실권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쥐고 있었다.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서 불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으로 인하여 결국은 분규가 발생했다.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은 자신들에 대한 구제 문제를 표면화 하여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세워서 구제 문제를 전담시켰는데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에 대한 배려를 위하여 일곱 집사를 모두 헬라파 유대인 성도로 세웠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신학 문제였다. 당시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여 예루살렘교회에 들어 왔으나 아직은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의 신학과 신앙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혼합된 것이었다. 그들은 안식일 엄수 및 할례의 절대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예배의식도 여전히 유대교적 율법주의에 입각한 예배의식을 고집하였다. 때문에 심지어는 베드로가 무할례자인 고넬료의 집에서 식사를 한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여호와하나님이 이방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인정할 만한 신앙적 준비가 아직은 되지 않았다. 특히 경건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교류를 죄악으로 여기어 금지하였고 같은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반면에 당시의 12사도들도 아직은 유대교적 신학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할 만한 신학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다. 때문에 사도들은 유대교적 율법주의 기독교신학과 신앙, 그리고 복음주의적 기독교신학과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들을 시원하게 해소해주지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예루살렘교회는 자연히 유대교적 율법주의가 성행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대교적 율법주의는 이미 오랜 전통에 의하여 신학적, 신앙적인 정립이 되어 있었던 반면에 복음주의 기독교신학과 신앙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이방선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이의를 제기하였고 나중에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허락된 후에도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이방교회에 간섭하여 할례 및 안식일 엄수를 강요하는 집요함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6) 기독교 총회로서의 기능행사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유대인들만의 유대교에서 세계의 기독교로 확장되는 분수령적 위치와 권위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교회가 아직은 유대교적 율법주의에 매달려 기독교 교회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교회는 기독교역사를 주도해 나가는 위치와 권위와 기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직 기독교라는 명칭으로 선포되지 않았고 하나님은 유대교의 하나님으로만 소개되어 있는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제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기독교역사의 총회 본부적 권위와 기능을 행사 하였고 기독교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각종 현안들을 심의하고 처리하였다.
예루살렘교회는 고넬료의 회심사건과 성령 받은 사건을 통하여 이방인 선교를 결정하였고 수리아의 안디옥 신자들을 위하여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에 바나바를 파송한 것은 곧 총회교회로서 안디옥교회를 인준한 것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또한 바울의 사도성을 공인하여 주었으며 바울이 제기한 할례의 무용성을 인정하여 할례 폐지를 허락하였다. 이로서 하나님의 기독교는 드디어 합법적인 기독교의 위상을 가지고 본격적인 역사적 진행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면서‘역시 우리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하시고 멋지신 하나님이시도다’라는 찬양을 금할 길이 없다.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를 인준한 것과 바울의 사도성을 공인하여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과 같은 차원에서 정립되어야할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에 세례요한은 깜짝 놀라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거늘 주님이 내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느냐”라고 당황해 한다. 그러나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은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4-15)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요한의 말과 같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셨고 메시아이셨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그의 메시아로서의 위상을 낮출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함이었다. 하나님의 의는 질서와 순종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상황의 경중이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질서와 순종을 절대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 것이었다. 안디옥교회나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인준을 받아야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신적, 주권적 작정에 의하여 준비된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주관 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교회역사의 전통을 지키는 차원에서 예루살렘교회를 통하여 그러한 질서적 절차를 진행시키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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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다. 그 세례에는 두 가지 차원의 하나님섭리가 들어있다.
첫째는 메시아의 강림을 준비하는 죄인으로서의 회개이다. 죄인들은 메시아의 강림을 회개로 준비한다. 그것은 구원의 서정 세 번째 단계인(회심)에 관계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종들이 사역에 들어가기 전에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법(질서)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에 적용 한(하나님의 의)는 이와같은 두 가지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대속죄제의 제물로서 율법의 정죄 하에 있기 때문에 예수 역시 회개로 메시아를 맞아야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해야 한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요한의 세례는 일반인들이 받는 세례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반인들이 받는 세례는 두 가지 모두가 회개를 전제하는 세례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회개는 다르다. 예수의 세례는 죄인의 입장에서 회개의 세례이지만 그리스도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는 의식적 세례이다. 그리스도는 죄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7)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
예루살렘 교회는 사면팔방으로부터의 핍박 속에서 절대 절명의 위기적 상황에 있었지만 초대기독교 총회본부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예루살렘교회는 그토록 어렵고 힘든 상황 하에서도 복음 선교의 진군을 쉬지 않았다. 특히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들로서는 절대 금기였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복음 선교를 출발시켰고 나아가서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이방선교를 진행하였다. 예루살렘의 사마리아 선교를 비롯한 이방선교는 스데반의 순교를 통하여 시작되었고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하여 더욱 활성화 되었다.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와 베드로와 고넬료의 극적인 만남을 통하여 진행되어지는 예루살렘교회의 이방선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또 하나의 경륜을 보게 된다.
첫째는 스데반의 순교(A.D. 33년)이다. 당시의 예루살렘교회는 사면팔방에서 조여 오는 박해의 절대적 위기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종교적, 민족적인 문제들로 인한 박해였지만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배후에 사단의 집요한 흉계가 있었음을 확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여 자화자찬(自畵自讚)의 찬가(讚歌)를 불렀던 사단은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수단이 되었음에 기절초풍을 하였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았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사단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스스로 분노하였을 것이고 자신의 무능함에 비관하여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 그쯤에서 포기할 사단이 아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제2 제3의 공격을 계획하였을 것이다. 사단이 세운 계획은 분명히 예루살렘교회를 해산시키기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여 아니 계시고 남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잔당인 예루살렘교회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번에는 더욱 많은 힘을 기울여 예루살렘교회의 와해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스데반을 공격하여 죽게 만들었고 계속하여 사도들을 공격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서 드디어 예루살렘교회를 와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역시 거기까지가 사단의 한계였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를 멋지게 적용하시면서 기독교역사를 전개하시리라는 것을 꿈에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사단의 흉계에 의하여 예루살렘교회가 위기에 몰리고 사도들을 비롯한 교회지도자들이 생명의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흩어졌을 때 그것이 결국은 세계기독교를 향한 선교의 출항이었을 줄을 사단은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사단이 공격한 것은 무너지고 와해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잔당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독교역사의 현장에 투입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기독교역사의 본당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예루살렘교회의 박해를 위하여 등용한 사울이 장차 바울이 되어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줄을 사단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불쌍한 사단, 바보사단은 이번에도 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또 다시 크게 사용되어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역사이다. 고넬료와 베드로 그 두 사람은 이미 기독교를 위하여 예비 된 사람들이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따로 떼어놓고 보면 전혀 관계를 도모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하에서 만날 수 없는 관계적 입장이었고 또한 만나서도 안되는 입장의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 철저한 유대교인이었고 유대의 민족주의자였다. 반면에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대의 하급 장교 백부장이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고넬료는 조국의 원수였고 고넬료에게 있어서 베드로는 경계해야 할 요 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하여 세계적 기독교역사의 닻을 올리셨다. 그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참으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고넬료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리고 때가 이르매 고넬료와 베드로 두 사람에게 각각 의미 있는 환상을 통하여 서로 만나게 하셨다. 당시의 상황으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에 응한다는 것은 더욱 곤란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피차가 정치적, 종교적, 반역자로 몰릴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한 입장에서 베드로를 따라 온 예루살렘성도들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강복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 세계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는 드디어 이방인을 향한 복음전파의 깃발을 올렸고 사마리아를 시작으로 하여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돛을 올렸던 것이다.
이방선교의 깃발을 제일 먼저 올린 것은 예루살렘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빌립이었다. 빌립은 박해를 피하여 사마리아로 갔고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는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예루살렘교회의 박해는 전체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도들에게는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집사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지만 사도들은 아직 예루살렘교회를 사수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사도들의 예루살렘교회 사수를 위한 결연한 신앙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도들을 함부로 박해했을 때 자칫하면 민란이 일어나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전역에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직 때가 아니었으므로 사도들을 예루살렘교회에 머물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세미한 부분까지 주관하시어 당신의 섭리역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전개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사마리아 선교의 과정에서 나타난다. 만약에 사도들이 먼저 사마리아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더라면 유대인들과 극심한 반목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즉시 그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사마리아는 이방 집권자들의 오랜 정치적 정책에 의하여 혼혈 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순수한 히브리민족을 고집하는 유대인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반목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빌립은 사도가 아니었고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이었으며 또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사마리아에 피신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동질적 입장이었던 사마리아인들에게 즉시 거부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심한 시간적 섭리 역사였다.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을 통하여 역사되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사마리아가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된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여 본격적인 사마리아 선교를 추진하였고 그 후 빌립에 의하여 에디오피아 관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자 더욱 본격적인 이방선교에 들어갔다.
(8)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예루살렘교회가 운영되어질 때에 일반적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교회에 대하여 아직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은 율법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유대교인들은 조상대대로 전수되어온 율법을 자신들의 종교적 삶의 절대적 법으로 믿었고 예루살렘교회도 아직은 같은 이유에서 율법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에 관한 문제는 장차 바울에 의해서 율법이 몽학선생으로 정립되기 전까지 유대교와 기독교를 갈라놓는 분수령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대교인들은 예루살렘교회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등등과 같은 유대교 종파 중에 하나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믿었고 반면에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 예루살렘교회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되도록 유대교와의 마찰을 피하고 그들과 어울려 살기를 희망했다. 왜냐하면 유대교가 곧 자신들의 뿌리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두 자신들의 부모 형제이고 친척이며 이웃이고 동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은 예루살렘교회를 바라보는 유대교인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고 인정하여 자신들과 하나가 되기를 희망했다. 반면에 유대교인들은 예루살렘교회가 고집을 버리고 정통 유대교로 환원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동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이상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의 개념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유대교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아예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적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섬기는 예루살렘교회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교회를 인정하는 것은 곧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이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엣세네파와 쿰란공동체들도 예루살렘교회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불경건한 집단으로 간주하여 교류를 거절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개 목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로 떠받들어 섬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망령되고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열심당원들은 한술 더 떴다. 그들은 로마의 정복자들을 향하여 돌격하기를 거절하는 예루살렘성도들을 매국적 집단이라고 하여 박해하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로마당국도 예루살렘교회를 곱지 않은 눈으로 주시하였고 혜롯정부도 예루살렘교회를 와해시킬 틈을 노렸다. 예루살렘교회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 하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종료는 지도자들의 순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예루살렘교회 핍박의 주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하여 영아들을 살해했던 헤롯왕의 손자(눅1:5)이며 세레요한을 살해했던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 헤롯 아그립바1세(A.D.37-44년)였다. 헤롯왕가는 유대에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의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유대에 대한 전반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는 반면에 실제적 권한을 가진 로마의 눈치를 항상 살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헤롯왕가는 유대민족이 아닌 이두메(에돔)인으로서 민족적 근원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적대를 받았다. 헤롯왕가는 자신들의 권좌를 누리기 위하여 로마와 유대 양편의 눈치를 항상 예의 주시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헤롯왕가는 특히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를 항상 염려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기회만 있으면 와해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입장의 헤롯에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요 방편이었다. 유대인들도 헤롯왕가 못지않게 기독교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헤롯왕가는 예루살렘교회를 공격함으로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자신들의 근심을 없애는 이중적인 유익을 얻으려했다. 헤롯왕가는(A.D.43년)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살해하였고, ‘A.D. 62년’에는 바리새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명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야고보가 살해당하였다. 이때에 체포당했다가 탈출한 베드로를 위시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박해를 피함과 동시에 이방선교를 위하여 예루살렘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핍박은 하나님의 섭리를 반영해 주는 아름다운 역사적 증거였다. 이미 앞장에서 논증한바 있듯이 예루살렘교회의 와해는 곧 하나님의 기독교가 전 세계적 기독교로 확장되는 역사의 출발이었다. 박해를 피하여 예루살렘교회를 떠난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각지로 흩어지면서 세계 만방에 기독교를 전파하게 된 것이다. 한편 우리는 예루살렘교회의 핍박을 통하여 전개되어지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하심을 체험하게 된다. 당시에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순교당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일반적인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순교적 죽음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적 죽음이다. 반면에 헤롯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행12:23)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영광을 주시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다.
(9) 열심당의 저항과 유대의 멸망
로마와 혜롯왕조의 이중 통치 하에서 유대의 민족주의는 점점 강력하게 뻗어나갔다. 유대인들은 로마와 혜롯왕조의 통치에 맞서서 끊임없이 저항하였는데 그것을 지휘한 것은 마카비의 후예를 자처한 열심당이었다. 로마는 이러한 그들의 도전을 좌시할 수 없었다. 로마는 티투스를 보내어 유대의 저항을 종식시켰다. 로마와 유대의 전투는 5년간(A.D.66-70)계속 되었고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여 유대의 종교적 구심점을 없애버렸다. 이때에 유대는 완전히 멸망하였고 그 후(A.D.132)에 아키바(Akiba)랍비의 후원을 받은 바르코흐바(Bar Kochba-또는 벤코세바-Ben Kosebah)가 다시 한 번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3년만에 패퇴하였다. 전쟁이 종료된 후 로마황제 하드리안(Hadrian)의 칙령에 의하여 모든 유대인들은 유대지방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뿔뿔이 흩어졌고 예루살렘은(엘리야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는 야훼하나님의 유대교나 히브리니즘의 외형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랑하였던 야훼하나님의 솔로몬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만 남았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멸시하고 무시하였던 이방신전들과 헬라식 극장들과 검투사들의 경기장들이 대거 들어선 헬라니즘식 도시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0) 유대교의 잔존
유대와 이방인들의 싸움은 곧 히브리니즘과 헬라니즘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유대의 패배는 곧 히브리니즘의 패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니즘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대라는 국가와 유대교의 외형적인 모습은 사라졌으나 유대의 히브리니즘과 그들의 야훼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야훼신앙이 수많은 변절과 배교의 역사를 되풀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야훼하나님을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의 와해 속에서도 민족적 종교를 사수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의 야훼하나님 신앙은 국가와 민족의 절대적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분발되었다. 로마와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조국과 민족의 멸망을 예견한 요하난벤자카이(Johanan ben Zakkai)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에 팔레스타인 해안에 위치한 얌니아(Jamnia)마을로 가서 율법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유대민족의 민족적 자존심과 아울러 그들의 종교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제 국가도 없고 예루살렘성전도 사라져 버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얌니아 율법학교는 그들의 민족적, 종교적 방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남아있는 야훼하나님은 본래의 야훼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의 국가관 민족관인(시오니즘)에 의하여 변형된 하나님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율법서를 비롯한 구약성경이 있었으나 그들이 해석하고 이해하는 율법이나 성경은 본래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1) 예루살렘 교회의 종료
사도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떠난 뒤 남은 지도자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요단강 건너편의 펠라(Pella)로 옮겼다. 그 후 율법의 해석과 신앙문제로 인한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멸망이 선지자들을 통한 회개의 촉구를 거절한 이스라엘의 배교와 불순종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또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면서 그 책임을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들이 영원히 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유대인들의 교만함과 오만방자함으로 인하여 유대교에는 더 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A.D.70년)에 이루어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파멸을 그 시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 성경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예언의 주제가 유대인들만의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따르는 자들로 구성된 세계적 기독교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라는 신학사상을 정립하게 되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이와같은 신학사상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반역자로 보았고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를 적극적으로 탄압하고 핍박하였다.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불신은 기독교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예루살렘교회를 같은 기독교로 인정하였고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중심 모체로 인정하였다. 때문에 예루살렘교회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했을 때 경제적인 후원을 보내었으며 교리적인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교회의 해석을 요구하였다.(행11:27-30)(행15장) 그러나 예루살렘교회가 계속하여 율법주의를 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에도 계속하여 율법준수를 강요하게 되자 더 이상 예루살렘교회를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예루살렘교회는 유대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닌 어정정한 종교가 되어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로부터 외면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요단강 건너로 이주한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유대인들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점점 어려운 상황에 놓였고 그곳의 이방인들과 교류하면서 점점 더욱 괴이한 종교형태로 변질되어갔다. 그리고 기원5세기경 이후에는 아예 자취가 없어져 버렸다.
(12) 하나님의 섭리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히브리인들의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열국의 아비, 곧 하나님의 세계적인 기독교의 총회 본부적 교회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수차에 걸쳐서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끝없는 배교와 불순종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는 국가와 민족의 멸망을 자초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메시아까지 거부하고 고소하여 죽음으로 몰아넣다가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예 단절되어버린 비극적 종말을 이루고 말았던 것이다. 남북왕조가 멸망하면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비극은 2000년 이상 계속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국가를 재건한 현재에도 중동의 아랍 세력들과 불편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유대제국의 멸망은 기독교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풀기 어려운 과제였다. 비록 유대인들의 배교와 불순종이 그 정도를 넘어선 것으로서 지나친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동안 수많은 배교와 불순종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용서하시면서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유대의 멸망에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신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행위계약이 인간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파기되어질 것을 아시고 은혜계약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스스로 선택하신 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으며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그들을 매우 영화스럽게 하셨다. 그러나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도래를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 남북왕조가 멸망하도록 허락하신 것과 이미 메시아께서 오신 상황에서 그리고 메시아를 통해서 인류구원이 드디어 성취된 시점에서 유대제국이 멸망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 한 것이었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두 가지로 해석하였다. 첫째는 교육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 유대제국의 멸망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징계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국가적. 민족적 수난을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에 대한 죄의 대가를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들이 담당하겠다고 호언하였으므로 진노하시어 그들을 징계하셨다는 것이다. 징계론은 예루살렘교회 당시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도 인정한 견해이며 역대 기독교 신학자들 대부분과 현대이스라엘인들 중 일부도 같은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섭리를 함부로 오해하고 제한하는 해석이다. 따라서 그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가 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약속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유대제국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하심이 이스라엘의 배교와 불순종에 대한 징계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징계의 하나님이 되신다.
둘째는 하나님을 상당히 쩨쩨하고 치사한 하나님으로 평가 절하시키는 망령을 범하게 된다. 유대인의 배교와 불순종이 비록 메시아에 대한 거부까지로 극단화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징계적 차원에서 유대의 멸망을 허용하셨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쩨쩨하시고 치사한 하나님이 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미 그러한 결과들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시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결과만을 노여워 하사 징계하신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해석을 거부하고 유대제국의 멸망을 필연적으로 허용하시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진군시키시는 하나님의 멋지시고 아름다우신 경륜을 보고자 한다. 우리는 유대제국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하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율법시대의 종료를 위한 허용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립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계시-성경)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진행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가 완전하게 정립되어져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질 수없는 특성을 갖는다. 그것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야할 인간의 부족성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무수한 시간과 역사적인 과정들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성경을 정립시켜 주셨다. 그러한 시간적, 역사적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졌던 것 중에 하나가 율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교회에 가장 먼저 주신 것은 율법이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임재하시는 방법은 신학(로고스-말씀-계시-성경)이다. 반면에 교회는 하나님 앞에 절대적 신앙(순종)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의 근원과 기초는 신학(로고스-말씀-계시-성경)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신학에 기초한 신앙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광야교회에 성전을 주셨을 때로부터 교회는 성전중심의 제의식(祭儀式)적 생활을 하였다. 아직 신학에 대해서 무지한 그들에게는 신학이나 신앙보다는 제의식이 더욱 쉬웠다. 이러한 그들의 제의식적 신앙생활은 교회가 국가교회로 발전되었을 때 까지도 계속되었다.
이스라엘교회가 법궤를 중요시 하여 전쟁터에 법궤를 메고 나간 것은 법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말씀(신학)때문이 아니라 법궤에 대한 제의식적 신앙 때문이었다. 사울이나 다윗을 비롯한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곁에 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등한시 하고 제사중심의 정치를 진행한 것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들의 성전 중심적 신앙생활은 포로시대에 이르러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어 졌다. 예루살렘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없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의 의미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에스라 같은 신학자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비극을 신앙문제로 이해했고 자신들의 신앙이 잘못된 것은 신학(율법)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성전중심의 제의적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에스라가 포로생활에서 귀국한 후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이 율법준수를 통한 종교개혁이었다. 이때로부터 부각되어진 율법은 유대민족의 신앙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이제 성전중심의 제사적 신앙생활에서 율법중심의 신앙생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신앙적 흐름을 주도한 것은 서기관들이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당시의 서기관들은 에스라의 뒤를 이어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서기관들의 활약은 유대사회에 산헤드린이 조직되어 그 임무를 맡기까지 계속되었는데 유대사회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였지만 반대로 부작용도 많았다. 그들의 잘못된 해석 때문에 율법과 전혀 관계없는 전통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유대의 율법주의 신앙은 하나의 민족적 종교적 단결을 촉구하였고 따라서 유대민족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
유대민족이 헤롯과 로마, 그리고 헬라니즘에 그토록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정치적 민족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율법고수에 대한 강력한 신념이 보다 더욱 큰 이유이기도 했다. 유대의 헬라화를 추진한 집권자들은 유대의 히브리니즘을 말살시키기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들의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때문에 안티오쿠스 4세는 율법서를 닥치는 대로 불살랐고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나 할례를 금하였으며 또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게 하거나 제의식에 올림으로서 그들의 율법을 말살시키려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유지시켜주고 진군시키면서 하나님과 교회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몽학선생적 중보역할을 감당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이며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말씀-로고스-λογος-성경)께서 오시어 하나님의 섭리 일체가 구체적으로 완전하게 정립되어지게 되었을 때 이제 율법은 몽학선생이었던 자기소임을 다한 것이었다. 이제 율법은 더 이상의 독자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위치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제국이 계속하여 부국강병하고 예루살렘성전이 여전히 율법적 제의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기독교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되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의 율법적 역사의 진군을 허락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율법적 역사를 종료시키시기 위하여 유대교의 멸망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께 율법으로 맞섰던 바리새인들의 도전과 사도바울이 평생을 율법주의자들과 싸워야 했던 초기 기독교역사들이 보증해 준다.
2) 세계적 기독교 역사를 위한 허용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대제국의 멸망을 허용하신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본다. 그것은 유대제국이 존속되면 세계적 기독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유대제국에 의해서 제한되어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선민)사상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선민사상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아직까지도 존재한다.)그러한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오직 자신들만의 하나님이어야 했다. 때문에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제한하였고 오직 히브리인들만의 하나님, 유대민족만의 하나님을 고수하려했다. 유대제국의 부국강병은 하나님의 세계적 기독교를 거부하는 강력한 걸림돌이었으며 유대제국의 잔존은 세계적 기독교역사의 진군을 방해하는 적극적인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제국의 붕괴를 허용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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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그러한 허용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고의적인 것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허용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인 반면에 그것은 고의적인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순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에 반기를 든 것에 대한 보복적 차원의 허용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장차의 이스라엘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차원에서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유대제국의 잔존을 허락하셨다면 그리하여 유대민족을 제외하고 다른 민족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강림하게하시고 다른 민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진군시키셨다면 유대는 국가적 민족번영과 잔존은 누렸겠지만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게 됨으로 거국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오히려 국가적 민족적 비극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의 국가적 민족적 붕괴를 논증함에 있어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시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회개가 선행되어진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이 진행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포하심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영원한 용서의 하나님, 영원한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그들을 기다리실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독교 역사를 진군시키시기 위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종결을 허락하시고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적기독교의 역사가 진군되어지도록 하셨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향하여‘돌아오라’ ‘돌아오라’ ‘이제 그만 돌아오라’라고 애절하게 부르실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그들을 품에 않아주시며 그들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실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아담교회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불행과 비극들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오만한 민족주의에 의한 결과라고 보며 유대제국의 멸망 허용은 그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징계라고 믿는다. 아울러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하루 속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한다.
2. 사도 시대교회
(1) 사도 교회시대의 서막
기독교 역사는 예루살렘 교회시대를 마감하고 사도시대 교회로 넘어간다. 어떤 역사학자들(특히 종교역사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어떤 차질을 빚었다고 말한다. 저들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는 한동안 주춤하였으며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박해를 떠나 소아시아 전역으로 흩어질 때까지 어느 정도의 공백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적 궤도 수정을 위하여 사울을 급히 부르셨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했던 사울은 바울이 되기까지 그 준비를 하기 위하여 기다려야 했으며 따라서 이때가 기독교역사의 공백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들은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바울의 은둔기간을 내세운다. 바울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후 아라비아에서의 3년을 비롯한 14년간을 은둔했던 것은 사역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고 하면서 그 기간이 기독교의 공백 기간이라고 주장한다.(갈1:17,18; 2:1-) 성경에는 바울의 아라비아와 다소의 14년 행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주석가들은 바울이 그 기간에 과연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수리아, 길리기아지방에 전도한 것으로 보는 견해(행11:25-26)(갈1:21-24)이고 다른 또 하나는 바울이 그동안에 율법주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주의로 돌아서는 연구를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이 복음주의자로 변하기까지는 그러한 과정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는 차원에서 제기되었다.
우리는 두 가지의 견해를 다함께 수용한다. 우리는 바울이 그 기간에 철저하게 기도하면서 복음연구와 전파를 병행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독교가 잠시나마 주춤하였을 것이라는 저들의 견해에는 동조할 수 없다. 사도바울이 신약초기 기독교역사의 중요한 인물이었었음은 역사가 증거 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바울이 기독교 역사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사명을 진행할 수 있는 경륜을 갖출 때까지 기독교 역사가 정체되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유명 인사들은 다만 하나님의 역사에 등용되는 종들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진행되며 하나님섭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역사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적작정에 의한 섭리적 주관 하에서 순간의 주춤도 없이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가 종료되기 이전에 이미 차세대의 기독교역사를 주도해 나가게 될 교회를 준비하셨다. 그것은 사도교회였다. 그리고 사도교회의 서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와 바울이라는 특별한 사도를 통하여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2) 사도 바울
기독교역사에 부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수 없이 많으며 그들은 모두가 존귀한 하나님의 종들로서 상대적인 우열이나 경중에 대한 비교를 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함에 있어서 사도바울 개인에 대한 특별한 논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기독교역사의 중대한 시기에 쓰임 받았던 상황을 고려하여 사도바울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로서 그는 소아시아 길리기아주(州)의 수도인 다소에서 태어났다. 다소는 시리아주(州)의 하나인 길리기아주의 수도로서 당시 세계문명의 양대 주류였던 그리이스, 로마문명이 교차하면서 꽃피워지고 있었던 전형적인 문화도시였다. 당시의 문화와 학문은 대체적으로 두 개의 조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하나는 헬라니즘적인 것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로마니즘적인 것이었다.
헬라니즘은 철학, 과학, 의학, 문학 등등을 발전시켰고 로마니즘은은 정치, 법률, 군사, 경제 등등을 발전시켰다. 다소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교차하고 합류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양대 문화를 다함께 받아들여 다양한 영역들에 대한 학문들이 차원 높게 전개되었다. 특히 아카데미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다소에서 펼쳐지고 있었으므로 다소는 당대 최고의 문화 속에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문명적,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하여 그 시대를 주도하는 정치, 사회, 군사, 문화, 예술, 교육 등등에 대한 지식을 두루 섭렵하였고 특히 당시 근동일대의 보편적 언어였던 코이네(Koine)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어학적 실력을 갖추었으며 로마어와 히브리어는 물론이요 아람어 방언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바울의 어학적 실력을 비롯한 각종 영역에 대한 학문적 실력은 훗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전파하고 변증하는 사명완수에 충분한 기반이 되었다.
한편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대 최고의 율법학파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전수함으로서 또 다른 차원에서의 기독교역사를 준비하였다. 그것은 그의 평생을 다 바치게 되는 성경의 기록, 변증 과정에서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복음으로 완성되어지는가? 하는 것을 세우고 정립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되기 이전의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기독교가 북부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확산됨에 따라 정통적 율법주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크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 기독교는 지금까지 발생하였던 여러 분파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는 하나의 분파적 차원을 넘어서 유대교 전체를 위협하는 이교도적 존재로 부상하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는 목수의 아들인 예수를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주장하는가 하면 아예 하나님의 아들로 부각시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예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또는 동일한 존재로까지 추켜세웠다.
이제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유대교의 근본을 뿌리 채 뽑아버리려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종교적, 민족적 배신자였다. 특히 애국애족의 열혈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울,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울에게 기독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악한 무리들이요. 당연히 궤멸시켜야 할 민족적 반역자였다.
사울은 바리새파 유대교인으로서 철저한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들을 율법을 파기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인하는 배신자, 신성모독 자들로 간주하여 저주하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교회의 박해에 앞장섰고 특히 스데반의 순교에 증인으로 동참하였으며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아 다메섹의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주포 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와 잔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자신이 예수그리스를 크게 오해하였음을 깨달은 후에 회심하여 하나님의 사도, 바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교회를 위하여 모세를 준비하셨듯이 사도시대교회를 위하여 바울을 준비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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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리엘
가말리엘(Gamaliel)은 힐렐(Hillel)의 손자요 시몬의 아들로서(라반 가말리엘1세-Rabban Gamaliel. I)로 알려졌는데 유대사회의 정치적, 종교적 최고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율법학자였다. 그가 속한 힐렐학파는 샴마이(Shammai)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당대 최고의 학문기관이었다.
샴마이학파는 완고한 보수파인 반면에 힐렐학파는 비교적 온건한 실용주의적 학파였다. 가말리엘은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인격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문하에는 샴마이학파 보다도 더욱 많은 생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산헤드린 회원들이 법정에서 사도들을 심문할 때에 가말리엘이 중용적인 입장으로 연설하여 사도들을 죽이기에 혈안이 된 산헤드린회원들의 격양된 마음을 가라 안치고 사도들을 구한 것에서 증명된다. 가말리엘의 신학사상은 율법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인 미쉬나(mishnah)에 많이 적용되어진다.
한편 “클레멘타인승인”(Celmentine Recognitions)이라는 중세초기의 문서에는 가말리엘이 죽음에 임박하여(A.D.70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자신의 제자인 바울과의 관계를 감안할 때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다.
(3)사도시대의 교회들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들과 바울 등등 하나님의 사도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어진 곳에는 예외 없이 교회들이 세워졌다. 사도들은 아시아를 거쳐서 유럽까지 이르러 교회들을 세웠다. 이와 같은 기독교역사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비롯한 성경의 증거들을 통하여 소개된다. 우리는 그중에서예루살렘교회 이후 가장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교회와 기독교역사상 가장 중요한 역사를 남겼던 로마교회를 소개한다.
1) 안디옥교회
① 안디옥교회의 설립
예루살렘교회 이후 처음 세워진 교회는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였다. 수리아의 안디옥은 수리아지역의 지중해로부터 약32km내륙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480Km의 거리에 있었다. 수리아 안디옥은(B.C.300년)경에 셀류쿠스니카토르1세(Seleucus Nicator I)에 의하여 설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아버지인 안디옥(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안디옥으로 명명되어졌다고 한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안디옥은 A.D.1세기경 로마제국의 영토 중에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로서 인구 약 5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안디옥은 지정학적 위치상 동서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A.D.37-41년)에는 갈리귤라(Caligula)의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초기 기독교역사에서 안디옥교회는 기독교확장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행13:1-3) 안디옥교회는 기독교가 유대교 명칭에서 기독교 본연의 명칭으로 전환한 이정표적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명칭으로 출발한 기독교의 첫 열매교회였으며(행11:26) 유대인들과 할례문제를 통한 신학적 대립에서 승리하여 할례가 더 이상 기독교에 존재하는 것을 근절시킨 역사적 교회이기도하다.(행15:1-2)(갈2:11-21)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핍박의 결과에 의하여 설립되어졌다. 박해를 피하여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성도들은 각지에 정착하여 자신들이 왜 예루살렘에서 피신하였는지를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복음전파는 대부분의 경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로 한정되어있었다.(행11:19) 그러나 안디옥에서는 헬라인들에게도 그 사실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안디옥에 기독교 명칭으로서의 첫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② 바나바 파송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크게 놀랐다. 고넬료 사건으로 시작 된 이방선교가 사마리아로부터 시작되어 어느 정도 확산되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으로부터 480여km나 떨어져 있는 수리아의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예루살렘교회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자세한 전말을 알기 위하여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였다.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의 레위족 후손으로서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설교를 잘하여 사람들로부터 바나바(권위자,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라는 이름을 받은 능력의 종이었다(행4:36). 어떤 사람들은 바나바가 안디옥에 파송된 것에 대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이 모두 선교활동을 하기 위하여 교회를 떠나 있었음으로 예루살렘교회에 사도들이 부재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미 요셉에서 바나바로 이름이 바뀔 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섬 출신이었기 때문에 안디옥에 구브로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살고 있을 것으로 가정할 때에 안디옥 파송의 최고 적임자였다. 바나바의 안디옥 파송은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다. 바나바는 바울의 신학적, 신앙적 경륜을 알아보고 안디옥 지도자로 천거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는 바울을 발견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고 추천한 사람이었다(행 9:27).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어느 정도 확장 시킨 뒤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려와 협동목회를 통하여 안디옥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③ 안디옥교회의 성장과 선교
안디옥교회는 초기에는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서 지도되었고 (A.D.2)세기에는 이그나티우스와 데오빌로가 인도했으며 (A.D.3-4)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 등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이끌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는 전혀 달랐다. 예루살렘교회는 아직도 율법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방황과 갈등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발전보다는 교회내의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가 더욱 크고 복잡하였다. 반면에 안디옥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성도들 중에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랜 디아스포라 생활을 통하여 이미 헬라화 되어 있었음으로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었다. 때문에 안디옥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인 율법으로부터 자유해 있었다. 오히려 안디옥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크게 고무 되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가 넘쳤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 드림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안디옥교회는 재정적으로도 매우 풍족하였다. 안디옥교회는 각처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예루살렘교회에도 선교비를 보내었다.
한편 안디옥교회의 급진적 발전과 선교의 열정은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의 탁월한 지도력에 크게 영향 받았다. 바나바는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드릴만큼 성숙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바울을 능가할 정도의 고결한 인격을 소유한 지도자였다. 바울 역시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능력의 종이었다. 바나바와 바울의 신학과 신앙이 결합된 협동목회는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 붇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고 따라서 안디옥교회는 일취월장의 급진적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의 급진적 성장은 그것을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때문이었다. 안디옥교회는 이제 본격적인 기독교 확장의 역사를 주도하게 되는 교회확장의 선두주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신학적, 신앙적, 재정적인 성장을 급진적으로 이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안디옥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안디옥교회에게 복음선교와 교회확장의 명령을 내리셨다. 이에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다. 이때에 안디옥교회에는 바울과 바나바 외에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지도자들을 다수 양성하여 복음선교에 대비하였다. 그들은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선교지로 달려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던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시아를 거쳐서 유럽으로 진군하게 되고 드디어는 전 세계로 확산된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곳에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그의 복음선교와 교회설립의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순교한 후에도 안디옥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기독교를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안디옥교회를 통하여 구축된 안디옥학파는 알렉산드리아학파와 함께 기독교신학을 주도한 초대 기독교 역사의 신학적 본산이 되었다.
④ 안디옥교회의 바울 선교
A. 제1차 선교:(A.D.45-58)키프로스, 소아시아(베니게(버가)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 두라, 데베-행13-14장)
B. 제2차 선교:(A.D.49-52)소아시아, 유럽(빌립보, 데살로니가, 아테네(아덴)고린도-행15-17 장)
C. 제3차 선교:(A.D.53-58)갈라디아, 에베소, 마케도니아, 드로아, 밀레노, 예루살렘-행18장)
2) 로마교회
① 로마 선교와 바울
사도시대 교회는 로마교회를 통하여 세계를 향한 기독교 확장의 깃발을 드높이 세우게 된다. 바울은 아시아와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유럽선교과정에서 로마를 향한 선교열정을 끊임없이 불태웠다. 바울의 로마선교에 대한 열정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감이었지만 기독교를 세계화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로마선교는 기독교 세계화의 역사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넘어야할 거대한 산이었다.
반면에 사단은 로마를 통하여 전개되어질 하나님의 기독교를 저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사단은 로마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들을 총동원하여 기독교를 탄압하고 박해하려는 모든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로마선교의 주역인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만 했고 실제로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선교에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마지막 교훈을 하면서 그토록 안타까워 하셨던 것이다(요 21:18-19).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안디옥교회를 거점으로 한 3차의 선교과정을 통하여 로마선교를 준비하게 하셨고 그러한 과정에서 로마선교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3차 선교여행 과정을 통하여 주의 종들의 선교역사와 기독교역사를 아울러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에 탄복할 수밖에 없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지만 그리고 아라비아와 다소에서 14년간 기도하면서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승화시키는 신학적 정립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직 세계적 선교사가 되기에는 경륜이 짧았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더불어 협동목회를 하게 하심으로 목회와 선교에 대한 실전을 쌓게 하시고 다음으로는 작은 지방을 시작으로 하는 선교활동을 통하여 선교사로서의 경륜을 쌓게 하신 후에 점점 선교의 지경을 넓혀 가게 하셨으며 특히 로마 입성 전에 로마 외곽의 유럽지역 선교를 통하여 로마선교에 대비하는 훈련을 철저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훈련과 실전경험을 통한 연륜과 경륜 배양과정은 기독교 역사 속에 등용되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훈련과 연단과 실전 경험의 과정들이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은 그러한 과정 과정들을 거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이다. 특히 중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종들일수록 그 과정들은 더욱 길고 험하고 혹독하다. 성경은 모세와 바울 같은 하나님 종들의 훈련과정을 통하여 그와 같은 원리를 가르쳐준다.
② 로마의 상황
로마교회를 고찰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알아본다. 당시의 로마는 지중해를 내륙의 호수처럼 끌어안고 있으면서 영국에서 페르시아까지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북유럽까지를 관장하고 있는 대제국이었다. 사도들이 활약하던 시대의 로마제국은 오랜 전쟁을 종식시킨 후 약200년 간 계속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기간에 속해 있었다. 로마제국은 오랜만에 누리게 되는 평화 속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인 번영을 이루었고 특히 헬라니즘과 로마니즘의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진 문화 속에서 안정과 발전을 거듭하였다.
로마의 집권자들은 정복지를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하여 정복지들에게 군사적,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한 자유를 보장해 주었으며 외국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여 그들의 로마생활을 허락하였다. 로마는 특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 정복지의 종교를 로마에 영입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유대인들의 유대교와 기독교는 로마에서 각각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교적 자유는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로마의 종교적 자유보장은 장차 유대교와기 독교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③ 로마교회 설립
로마교회의 설립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다. 첫째는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설립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울이 로마교회를 설립했다는 것이며, 셋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하여 로마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A. 베드로 창립설
로마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창설했고 로마교구의 첫 번째 감독(주교)으로서 25년간 로마교회를 통치하다가(A.D.67년)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창설했다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주장들이다.
a.베드로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서 선교하다가 로마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갔는데(사도12:17) 역사의 증언(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의하면(A.D.42-43년)에 로마에 가서 로마교회를 창설하였고 거기에서 그의 첫 번째 편지를 썼으며(1베드 5:13) 네로의 박해 때인(A.D.64년)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한국 가톨릭 대사전 편찬위원회편. 한국 가톨릭대사전.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2.P.134)
b.로마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전설과 전승된 증언들에 의하면 베드로사도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고 보고 있다. 그는(A.D.43년) 옥중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가(행 12:17) 49년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하였다.(행 15:7) 성문헌은 43년부터 49년사이의 베드로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체사레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260-340)에 의하면 44년에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25년간 머물러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로마교회는 43-49년에 베드로에 의해서 설립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베드로는 다시 로마에 거주하면서 63-64년에 그의 첫 번째 편지를 썼고(벧전 5:19) 네로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베드로는 로마주교들의 모든 명단에서 첫 자리에 놓여 있는 로마교회의 창설 사도로서 언급되고 있다.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서울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를 역임한 김성태 신부의(세계교회사 I)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90. pp104-105)
c. 그러므로 벌써 오래전부터 로마에 신자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신자집단을 창설하였을까? 로마교회의 가장 오랜 전통은 그 창설을 항상 베드로에게 돌렸다. 베드로는 42/43년에 예루살렘에서 도망한 다음 다른 곳으로 갔다.(사도12:17)고 하는데 곧바로 로마로 갔던 것일까? 아니면 조금 후에 간 것일까? 이러한 사실은 비록 베드로가, 예컨대 50년 사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다시 왔을지라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또 바울이 그의 로마서를 썼을 때(57/58) 또는 그가 로마에 잡혀 있을 때 베드로가 로마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로마교회를 창설한 다음 전도열에 자극되어 곧 다른 데로 떠났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의 교회사 교수였던 아우구스트프란쯘 신부의 교회사. 최석우 역편-왜관. 분도출판사.1990-p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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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베드로의 초대 교황권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조작한 편법과 오류들이다. 우리는 저들의 편법과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로마 가톨릭의 많은 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의 회심기를 기원 36년경으로 추산한다. 또한 그들은 갈라디아서의 집필 년대를 기원 56-57년경으로 추정하며(갈 2:1-10)의 시기를 기원49년경으로 추정한다. 한편 바울은(갈 1:18)에서 회심 후 3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에서 사도베드로를 만났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갈 2:1-10)에서 회심 후 14년이 지난 후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사도베드로를 만났다고 증언한다. 한편 많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25년간 주교로 있었고 기원67년에 순교했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근거로 하여 베드로가 기원42년경에 로마교회를 창설한 후 25년간 주교로 있다가 기원 67년경에 순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49년경까지는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를 만났던 것이 39년과 49년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 가톨릭의 주장대로라면 42년경에 로마에 가서 로마교회를 창설한 후 49년에 잠시 예루살렘에 갔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추론일 뿐 사도들의 역사 어디에도 그러한 이야기는 없었으며 당시의 복음전파 역사도 그러한 상황을 변호해 줄 수 없다. 반면에 바울사도의 로마서 기록 년대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대략56-58년까지로 추정한다. 그러나 바울은 (롬16:3-16)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도 유독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만약에 베드로가 그때에 로마에 있었다면 바울은 틀림없이 베드로에 대한 인사를 했을 것이며 베드로가 그때에 로마에 없었다 할지라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설립한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틀림없이 베드로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고 위로 하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이 베드로에 대한 경쟁의식 때문에 베드로에 대한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에 대한 모독이며 조잡스러운 편견이다. 바울의 신앙이나 인격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한편(행 28:15-16)은 사도바울의 로마 도착을 증거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그 시기를 기원61년경으로 추정한다. 이때에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이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고 증언했는데 여기에서도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에 베드로는 그 기간에 로마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창설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증거들이 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로마교회는 지도자가 그토록 수시로 또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B. 바울 창립 설
바울을 추종하는 자들은 바울의 로마순교를 근거로 내세워 바울에 의해서 로마교회가 설립되어 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교회를 설립했다는 주장은 성경의 증거와 전혀 맞지 않는다. 성경(롬 1장)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이 로마서를 보냈을 때(A.D.57년경) 로마에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로마서를 보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롬 1장)의 서두에서 자신이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힘쓰고 기도하였음을 말하면서 로마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찬사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에 의해서 로마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오류이다.
C. 디아스포라 창립 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하여 설립되어졌음이 분명하다. 당시의 로마에는 로마의 식민지 유화정책에 따라 많은 민족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많았다. 역사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에 로마에는 약 4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거주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이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철학자인 필로(Philo-B.C.20/30-A.D.45/50)에 의하면 로마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며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Pompeius Magnus Gnaeus-B.C.106-48)의 군대가(B.C.63년)에 팔레스티나를 침공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을 로마에 포로로 압송하여 로마시 건설에 노예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들은 나중에 석방되었는데 그들 중에 다수가 로마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탁월한 상술을 가진 자들이 로마에 몰려들었을 것이며 도시지향적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로마에 이주하여 정착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로마에 기독교를 최초로 전파한 것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로마로 통하는 많은 그리고 편리한 도로와 해상을 통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를 왕래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로마에 전파되었고 따라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하여 로마교회가 구성되고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견해는 성경(행 2:10)에 의하여 보증 받는다.
(행2:10)에 의하면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성령임재 사건 당시에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 기독교 개종자들이 있었다. 때문에 학자들은 이미 예루살렘 왕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거나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또한 오순절 마가 다락방 사건을 직접 경험한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그 소식을 전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로마교회가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쿼바디스 도미네ㅡ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소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 소설에는 로마의 카타콤교회를 처음 방문한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때에 베드로는 로마의 카타콤 교회성도들에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했던 자라고 고백한다.]
④ 로마교회의 성장
베드로나 바울이 로마교회를 설립한 것은 아니었으나 로마교회를 성장 시킨 장본인은 분명히 베드로와 바울이었다. 물론 베드로나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이전에도 로마교회는 날로날로 발전하고 있었고 로마시 외각에 까지 복음을 전하였지만 베드로와 바울의 로마방문으로 인하여 로마교회가 더욱 크게 발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직접 목격하고 사사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그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특히 예수 그리스께서 잡히시던 날에 자신이 직접 세 번씩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었다는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로마법정이야기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 고난과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살인강도를 비롯한 적대자들을 용서하신 이야기, 또한 그가 운명하시는 순간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과 그의 부활을 전후한 사건 등등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들이 말로만 전해 들었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보증하는 감동적인 실화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틀림없이 그러한 이야기들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죄송함으로 목이 메었을 것이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 자신에게 베푸신 사랑과 자비에 흐느껴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로마의 성도들도 감격하여 함께 울었을 것이다.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 때문에도 울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던 시절 기독교인 들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이야기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바울인들 어찌 통한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바울의 간증을 들으면서 로마의 성도들인들 어찌 감격하여 울지 않았겠는가? 로마교회 성도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생생하게 전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자신들의 개인적인 신앙발전은 물론이요 교회적인 발전과 성장을 크게 진작시켰던 것이다.
(로마교회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세계화 되는 과정을 통하여 다시 상세하게 고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