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서론
1. 유일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비록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고대 교회 때부터 이미 존재했다. 이 같은 주장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필연적이라는 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하여 박형룡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비롯된 “필연적 사건(必然的事件)”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겸허(謙虛)의 행위”, 즉 하나님의 자기 제한의 행위라고 주장한다.1)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방도(唯一方途)”이다.2)
제2위의 하나님의 성육신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시킴이었고, 불화(不和)한 당사자들을 화목시키는 것은 중보의 일인고로” 박형룡은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중보”라고 부른다. 또한 박형룡은 화목이 “대언(代言)”에 의해서 성취되기 때문에 “효과적인 대언자”, 즉 대언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를 “중보”라고 명명한다. 박형룡에 의하면, 화목의 사역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인한 공의의 만족을 포함하는 경우에는 속죄를 행하는 자만이 중보자인 것이다. “이 일은 그리스도만이 능히 행하셨으므로 그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시다. 그는 십자가의 속죄로 유대 사람과 이방(異邦)사람을 하나님께 화목시키는 평화공작자(平和 工作者)이시다(엡2:16).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중보자가 계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딤전2:5)이시다.3)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자직을 훼손하는 주장을 펴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데, 여기에는 소위 성직자에 해당되는 사제(司祭)뿐만 아니라, 평신도도 해당된다.4) 첫째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사제들의 중재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성례(聖禮)를 통해서 흘러나오며, 성례는 “법규적(法規的)으로 임직(任職)된 인물들”, 즉 서품 받은 성직자가 집행하여야 유효하다는 이론, 즉 소위 “사효론(事效論)”(ex opere operato)을 주장한다. 사제들은 미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반복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성도들의 죄를 사면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참된 중보들”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자직을 심히 훼손시키는 중보자들로 나타난다. 둘째,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성도들은 선행을 통해서 자신의 공로를 쌓을 수가 있으며, 이 공로는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담임(擔任)되어 그들을 중보들로 만든다. …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 중보시니 성경이 그렇게 가르칠 뿐 아니라 오직 그만이 능히 하나님과의 화목에 필요한 바를 성취하신 때문이며 오직 그만이 이 일에 적합한 인격적 품질(人格的品質)을 가지신 때문이다.”5)
박형룡은 유일한 중보자의 자격을 세 가지로 제시하는 데, 유일한 중보자는 우리와 똑같은 완전한 인간이어야 하고, 죄가 없어야 하며,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한다.6)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직(仲保職)에 요구되는 이 모든 자격들은 성경이 선언하는 바로서 전부가 그리스도에게만 집합되어 있었다. 그는 한 위(位)에 신인이성(神人二性)’을 가지신 신인(神人)이신고로 상술한 모든 요구에 응수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을 완성할 수 있는 유일중보자이시었다.”7)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 사역을 “신인(神人=ϕεἀνφρωπο )의 사역”이라고 말한다.8) 박형룡은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지만, 신인(God-man)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창조, 보존 등의 사역은 신성에 해당되는 사역이고, 일반 사람들의 능력에 해당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성에 해당되는 사역이며, 어떤 것은 양성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의 관계를 한 인간 속에 있는 “마음과 몸”의 연합의 관계라는 유비(analogia)를 사용한다.
박형룡은 제2위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었다고 할 때, 교리사에서 논쟁이 되었던 ‘안히포스타시스’(anhypostasis)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엔히포스타시스’(enhypostasis)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중보적 사역의 주체를 위(位)의 명사로 표시하려면 그는 그리스도의 신적 위(神的位)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위는 신적이시므로 그의 사역의 주체는 그의 신위(神位)이시다. 그의 신성과 인성은 그의 신적 위에 연합한 것이다. 영원부터 하나님 안에 한 신적 위이시던 성자(聖子)께서 인성을 취하시어 이성(二姓)의 연합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한 위, 변치않으신 성자 로고스가 계신다.”9)
박형룡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삼중직(munus triplex), 즉 지혜와 지식의 보화인 선지자직, 대속물을 바치는 제사장직, 왕권을 가지신 왕직 속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리스도의 선지직(先知職)은 그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셨다는 것을 추측하며, 그의 제사적 사역(祭祀的事役)은 그의 사역을 유효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존엄을 요약하였으며, 신적 위만이 중보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위임된 주관권(主管權)을 능히 행사하실 수 있었다. 영원한 성자만이 능히 우리를 사단의 속박(束縛)으로부터, 죄의 멸망으로부터 구출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영생을 주시고 그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실 수 있었다. 우리가 수요(需要)하는 구주는 다만 거룩하시고 죄없으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신 자이실 뿐 아니라 또한 「하늘보다 높으신」자이시었다.”10)
2.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munus triplex)에 대한 예비적 고찰
⑴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munus triplex)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신학에서 하나의 관례에 속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요소는 교회사에서 이미 오래 전에 발견되었는데, 유세비우스 시대 이후로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의 삼중직의 관점, 즉 “선지(先知), 제사(祭司), 왕(王)의 사역”으로 간주하였다. 비록 이 당시 삼중직이 용어상으로 사용되었지만, 삼중직이 조직신학적 내용을 포함하면서 사용되지는 않았다.11)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인식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최종판(1559)에서 독립된 한 장(제2권 15장) 전체를 할애했다. “칼빈은 처음으로 삼직의 관념을 발전시켰고 그리스도의 사역의 위대성을 전시(展示)하려는 유일목적을 가지고 그리하였다.”12) 그리스도께서 왜 성부의 파송을 받으셨으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성취하셨는지 알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지직, 제사직, 왕직을 고찰해야 한다.
루터파에서 게르하르트(Gerhard)는 삼중직론을 최초로 발전시켰고, 크벤쉬테트(Quenstedt)는 삼중적 구별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어떤 루터파 신학자들은 선지자직과 제사장직을 합하여 이중직만을 구별하기도 했다.13)
종교개혁시대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구별은 신학에서 일반적 작업으로 통용되어왔지만, 각 직의 중요성에 대한 비교 평가와 상호 관계에 대해 일반적으로 일치된 견해는 없었다. 때로는 선지자직이 때로는 제사장직이, 때로는 왕직이 중요성을 가졌고, 때로는 세 직분 중에 한 직분만을 취하여 다른 직분으로부터 고립시키기도 하고, 다른 직분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또한 삼중직을 연대기적으로 적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애 기간에는 선지자직이 적용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수난과 십자가상의 고난에는 제사장직이 적용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양상태에는 그의 왕직이 적용되었다. 또한 보다 더 정확하게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 상태와 승귀 상태 모두에 삼중직을 적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삼중직을 가지시며, 그 삼중직을 수행하신다고 주장했다. 소치누스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직만을 인정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는 선지자로 계셨고, 지금 하늘에서는 왕으로 계신다는 것이다. 소치누스주의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으로 간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에 포함시킨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제사장직을 인정하지 않았다.14)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론은 교회와 신학의 역사에서 주요 논쟁점이 되었다. 특히 루터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는데, 에르네스트(Eernesti)에 의하면, 어떤 루터파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구분은 순전히 “인조적(人造的)”이며, 성경에서 발견되는 선지자, 제사장, 왕의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지 비유적으로 적용되었기에 구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루터파 신학자들(Reinhard, Doederlein, Storr, Bretschneider)도 삼중직의 구별을 반대하였고, 리츨(Ritschl)은 “직임”(office)이라는 단어 대신에 “소명”(voc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헤링(Haering)도 리츨을 따라 삼중직을 부정하고, 소명이라는 말을 강조하였다.15)
또한 리츨은 왕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을 이차적이며,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리스도의 왕직을 사람의 세계에 대한 관계에 적용시키고,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을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적용시켰다. 또한 그는 “선지적 제사적 왕격”을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 상태와 승귀 상태 모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이성주의(理性主義)”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만을, “신비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만을, “시대주의”, 즉 세대주의(dispensation)의 천년왕국설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적 왕직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했다. 일부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구별의 개념 자체를 싫어한다. 그 중에 일부는 삼중직이라는 용어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고,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의 “직임적” 인물로 묵상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이상적 인물”, “사랑하는 원조자”, “형님”으로 존경하고, 그를 “정신적 직임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비인생화(非人生化)”될 것을 두려워한다. 박형룡은 베르까우어(G.C. Berkouwer)의 말을 인용하여, 이 같은 사상에는 “직임”에 대한 과소평가 사상이 담겨져 있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구별의 타당성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구별을 반대하는 자들을 비판한 뒤에, 삼중직의 구별의 타당성을 두 가지, 즉 창조된 인간 본성과 성경 주석을 통해서 주장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구별에는 합리성이 있다. 박형룡은 “그리스도가 삼중직임을 가지게 된 이유는 사람이 본래 이 삼중직무를 행하기로 의도되었던 사실에 의하여 설명된다.”고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창조된 인간의 본래적 기능 속에서 찾는다. 박형룡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선지자, 제사장, 왕이어서 지식과 오성, 의와 성(聖), 하급 피조물에 대한 “주장권”, 즉 통치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을 삼중직과 결부시킨 바빙크(Herman Bavinck)의 글을 박형룡은 직접 인용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참된 지식, 의, 거룩으로 창조되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왕으로서 피조물들을 의롭게 치리하며 제사(祭司)로서 그 자신과 그의 전소유를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제물로 바치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의 개진(開陳)에, 그의 모든 재능들과 능력들의 조화적 발전에, 선지, 제사, 왕의 세 직임의 수행에 사람의 목적과 목표가 놓여있었다.”16)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인간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통해서 그 기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는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표하시고, 제사장(祭司長)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을 대표하시고, 왕으로서는 인류의 “대표적 원수(代表的元首)”이시다. 이성주의는 선지자직만을, 신비주의는 그의 제사직만을 인정하고, 세대주의의 천년왕국설주의자들의 그의 미래적 왕직에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반대하여, 박형룡은 우리의 무지의 죄로부터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필요함을 역설한다.17)
둘째, 박형룡은 성경주석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타당성을 주장한다.18)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구약성경에서 유형론적으로(typologically) 계시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후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무로 부름을 받았다.(출19:6) 그러나 삼중직의 의무는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특별한 사람들, 즉 선지자들, 제사장들, 왕들을 통해서 수행되었다.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유형론적으로 예표한 것이다. “전구약 계시의 성취로서 모든 이스라엘과 그 모든 선지자들, 제사장들, 왕들의 실상(實狀)이시다. 사실상 그는 그들 안에서 또는 그들을 통하여 자신을 증거하시고 자신의 오심을 준비하신자이시다.(벧전1:11).”19) 다윗은 선지자직과 왕직을 겸직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한 직분만을 가졌다. 그러나 메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 직분을 모두 가지셨다.(신18:18,시110:4,시2:6, 슥6:13; 구약에서 “삼직은 그리스도의 활동의 예표요, 장차 그에게서 연합될 것이었다.)20)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받으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직분에 임명되신 것이라는 사실을(4:34; 요5:20, 30; 요7:16; 요8:28; 요10:18; 요12:49-50; 요14:10, 24; 요17:4)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셨고(요5:46) ‘ 시18:18; 마22:44; 마16:27), 사도들이 증언했고(히3:1; 히4:14; 히5:5),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삼중직을 실행하셨다.(고전1:30)21)
핫지(A. A Hodge)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 직분을 그의 한 중보자직에 포함된 세 작용으로 이해하였다. 영어의 ‘office’는 일반적으로 법정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관계하여 그 사람이 수행하는 활동들을 포함하는 전체의 직분을 가리키거나 고전적 의미에서 직임에 포함된 활동이나 의무를 뜻하기도 한다. 라틴어에서는 어떤 사역의 완성을 위한 목표와 본래적 의무를 포함하는 법정 지위를 의미하는 ‘munus’와 활동의 개념을 나타내는 ‘officium’의 두 단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직을 받으셨고, 이 중보자직에 포함된 모든 일들을 성취하셨다. 중보자직의 의무가 바로 선지자직, 예언자직, 왕직이었다. 이 삼중직은 민주국가의 삼권분립으로서의 입법, 사법, 행정처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중보의 한 직무에 속한다. 이 삼중직으로 서로 분리된 가운데서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 직임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서로 포함되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선지적 제사(先知的祭司)와 제사적 선지(祭司的先知)이시며 왕적 제사(王的祭司)와 제사적 왕(祭司的王) 이시니 세 작용은 함께 한 구속을 성취하므로 구속에 동등으로 중요하다.”22)
B.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先知者職, The Prophetic Office)
1.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先知者職, The Prophetic Office)
⑴ ‘선지자'에 대한 신․구약 성경적 용어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크게 세 가지, 즉 ‘나비’(אי ; 창 20:7), ‘로엫’(ה ; 삼상9:9), ‘코젷’(ה ; 미3:7)가 있다. ‘나비’(출7:1; 신18:18)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신(使信)을 가지고 백성에게 오는 자”이며, ‘로엫’와 ‘코젷’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형(幻像形)의 계시를 받는 자”이다. 또 선지자를 가리키는 다른 용어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 ‘주의 사자’, ‘파수군’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봉사를 책임지며,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득실’(靈的得實), 즉 영적 상태를 감시하는 자라고 박형룡은 주장한다.23)
신약성경에서 ‘선지자’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프로페테스(προϕήτη )는 그리스어 전치사 ‘프로(πρὀ; 前)’와 그리스어 ‘페미(ϕημί; 言)로 합성된 단어인데, ‘프로페미’는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여 내는 것’(to speak forth)이기 때문에, 선지자는 ‘말하여 내는 자’이다. 선지자는 사물들을 보는 자, 계시를 받는 자, 사자(使者)로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 하나님의 의지를 통변(通辯)하는 자, 계시(啓示)하는 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를 중개하는 자이다.24)
박형룡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기 위해, 소명 받고 또한 “영감되었으나 전도자들은 그리 되지 못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구약성경의 선지자들과 오늘날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들 사이에는 질적 차이기 있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하나님의 영감(靈感)을 받은 자들이며, 오늘날 우리들은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선지자들의 글인 구약성경과,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을 이해하여 선포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성경을 기록할 수는 없는 것이다.25) 선지자 직에는 피동적인 측면과 능동적인 측면이 있다.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것이 선지자직의 수동적 측면이라면,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것은 선지자직의 능동적 측면이다. 선지자는 “받지 않고는 주지 못하며 또 받은 것보다 더 주지 못한다.”26)
선지자의 의무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백성에게 전하는 것인데, 그 내용과 형태는 교훈, 경계, 권면, 약속, 책망 등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주로 훈계자, 율법의 해석자의 기능을 담당했다.27) 박형룡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로 불린 최초의 사람은 아브라함(창20:7)이며, 구약성경에서 가장 표준적인 선지자는 모세라고 주장한다.(신18:15-19; 신34:10) 바로 이 표준적인 선지자 모세 속에서 장차 오실 선지자들 중에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이 예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일천 오백년 후에 성취되었고 베드로와(행3:22-24) 스데반에(행7:37) 의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28)
⑵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되심에 대한 증거로서 성경 본문을 통한 증거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성경을 통한 증거와 관련하여, 특히 구약성경 신명기 18장 15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 되심을 예언하고 있고, 이 내용이 사도행전 3장 22-23절에서 적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눅13:33)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되심이 기록되어 있다.29)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확증되었다. 그의 사역은 하나님께 기초를 두고 있는 동시에 능력과 기적을 동반하는 사역이다. 이 사실이 그의 선지자직을 더욱 확증시켜 주었던 것이다.30)
첫 선지자 아브라함으로부터 구약에 나타난 가장 표준적인 선지자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선지자들과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표준적 선지자인 “모세보다 더 숭고(崇高)”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주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자요(사11:1; 눅4:16이하), 하나님의 아들(마21:37)이시요, 유일한 교사(마2:38; 요13:13-14)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 받으심은 “영원부터이고 그의 성별(聖別)과 준비는 일찍이 성령에 의한 잉태에서 시작하였고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시고 하늘로부터 소리 있어 성부께서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로 환호(歡呼)하였고 그는 이따금 계시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으로서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며 성부의 품에 계속하여 계시이며 전생애(全生涯)에서 명령을 받으신 것 밖에 아무 것도 말하며 행하지 않으셨고 결국 그가 주신 바는 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확충(擴充)될 계시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시며 이전 모든 예언을 성취하시고 결론짓는 계시”(히1:1-2)라고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의 탁월성과 독특성을 말하는 동시에 계시 자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완전성과 충분성을 말한다.31)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계속되고 있는가? 성육신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선지자직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영원한 말씀, 즉 ‘영원한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반은총(common grace) 또는 자연은총을 통해서 창조사역과 섭리사역을 하셨다. 그리고 구약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때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때로는 천사들을 통해서 특별계시의 영역에서도 선지자직 사역을 수행하셨다.32) 다른 선지자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선지자직을 수행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영감을 주시는 자로서 “모든 지식과 권능의 원천을 자기 안에” 가지고 계셨다.33)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심으로써, 선지자직을 수행하시고, 또한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 관한 기록된 성경말씀을 사용하시고, 성령으로 내적 조명을 받은 교회를 사용하여 자신의 선지자직을 계속적으로 수행하신다.3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속성을 갖고 있다.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의 선포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자기계시(自己啓示)”였다.35)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자체가 선포였다.36)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포를 통해서 “그 나라의 기원(起源)과 성질, 그 나라에 인도되는 길과 그것이 포함하는 혜택들, 그것의 점진적 발전, 그것의 최종성취를 개진하셨다.”37) 하나님의 나라의 계시는 항상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그 신비들의 명령자(命令者)와 분배자(分配者)시며 계시자(啓示者)와 해석자(解釋者)”이시다.38)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들은 “언사적(言辭的)이며 사실적(事實的) 교훈들”로 이루어지며,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행사된다. “언사적”이라 함은 특별계시의 세 방식, 즉 신현(神現), 예언(豫言)과 이적 중에서 예언은 그리스도의 언사적 표현이다. “사실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섭리적 지로(指路), 구속역사위에 이적들, 구약시대의 의식(儀式)들과 예표들, 성육신, 속죄의 죽음, 부활, 승천은 그리스도의 사실적 교훈들이다.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의 직접적으로 행하심은 “구약시대에 여호와의 천사”로서 성육신 후에 그의 교훈들과 모범으로 하셨다(요13:15, 빌2:5, 벧전 2:22). 또한 그리스도의 선지직의 간접적으로 행하심은 성령의 도움으로 구약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교훈들을 방편으로 수행하셨으며, 신자들의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하여 복음의 사역자들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수행하셨다.39)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자체에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에 대한 자유주의신학자들을 비판한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은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사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자체는 강조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박형룡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윤리 교사 이상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선생되심을 크게 강조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파의 주요특성이니 … 그의 선생으로서의 의의(意義)가 치중되는 동시에 그의 다른 방면들은 제외된다.”40)
C.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祭司長織, The Priestly Office)
1. ‘제사장’ 또는 ‘제사장직’에 대한 용어
박형룡에 의하면, 제사장이나 제사장직에 대한 “관념과 제도”는 모든 종교 속에서 발전되었으며, 특히 “제사(祭祀)”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 가족의 가장(家長)이 제사장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종족이나 민족의 통치자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여, 제사장의 직분이 발전되었다. 이집트, 미디안, 블레셋, 그리스, 로마와 같은 고대민족 속에서 제사장직은 분명한 계급을 형성했다.(창47:22; 출21:6; 삼상6:2; 행14:13)41)
언제 어디서나 인간은 항상 죄를 의식했고, 죄책과 오염 때문에 스스로 신(神)에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양심과 도덕은 항상 신적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죄책이 속상(贖償)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간들의 노력으로는 속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얻기 위하여 자신들은 무가치하고 무능하다고 가르치고 고백했다. 마침내 인간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신에게 대신 제사를 드릴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반열(班列)”. 즉 계급이나 계층의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공동체를 위하여 임명된 제사장은 그 공동체를 대신하여 “제단과 기타 의식(儀式)들에 봉사하는 신격의 흠정성역자(欽定城役者)이다. 제사장의 근본적 관념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仲保)라는 관념이다.”42)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은 히브리어로는 ‘코헨’( )이요, ‘코헨’의 본래적 의미는 확실치 않으나 “직임자(職任者)”를 가리켜 사용된 말이다. 이 용어는 항상 존귀하고 책임 있는 지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관리하는 자를 가리키며, 이 단어가 초기에는 종교계의 “직임자”와 함께 일반 사회 속에서의 “직임자”에게도 사용되었으나, 이 용어는 항상 존귀하고 책임 있는 종교계의 “직임자”와 다른 사람들을 관리하는 자에게 사용되었다. ‘코헨’이란 말이 “묘사적 제한(描寫的制限)을 요하는 듯이 성소 봉사자들은 자주 「레위인 제사장들」로 묘사되었다.”43) 신약성경에서 제사장은 ‘히에루스(ίερύ )’인데, 이 말은 본래 ‘강자’를 의미하고, 후에 ‘신성한 인물’, ‘하나님께 봉사된 인물’로 해석되었다.44)
히브리서 5장 1절은 제사장의 직무를 잘 표현하는 성경구절인데, “대제사장마다 사람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라는 상반절의 말씀은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자임을 가리키고,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라는 하반절의 말씀은 “제단에 봉사함”이라는 제사장의 직무를 가리킨다.45)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드림과 대도(代禱)”의 직무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은 백성의 죄로 인하여 예물(禮物)들과 제물(祭物)들을 봉헌하며,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케 하며, 죄를 속하기 위하여 간구하며(히7:25),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인을 축복한다. “그의 대도(代禱)는 다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제사드림과 직권의 효과를 근거로 하여 백성을 위한 자기의 기도가 응답될 것을 요청함이었다. 이리하여 제사장의 특이한 직무는 제사드림과 중재(仲裁)의 두 가지”이다.46) 박형룡은 페어베리언(Fairbarian)과 스트롱(A.H. Strong)의 말을 mg) 직접 인용하여 제사장이 가지는 중요한 두 가지 직무를 강조했다.
박형룡은 제사장이 가지는 다섯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첫째,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자이며, 둘째로,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며, “중재”기도드리는 자이며, 셋째, 제사장은 백성으로부터 뽑힌 자이며(히5:1-2; 출28:9, 12, 29), 넷째, 제사장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하게 선택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이며(민16:5; 히5:4), 다섯째, 제사장은 도덕적으로 순결(純潔)하여, 하나님께 거룩히 드린 자(레21:6, 8; 시106:16; 출39:30-31)이다.47)
2.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祭司長職)과 “제사적(祭司的)” 사역(事役)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주석적으로 증명한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구속주의 “제사격(祭司格)”을 예언하고 예표하였다.(시110:4; 슥6:13) 구약의 제사장, 특히 대제사장직은 “제사적 메시야”를 예표하였다. 성전과 성전의 모든 봉사와 효력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제사적으로 예표하는데 있었다. 구약의 제사장의 “제사드림과 대도(代禱)”의 활동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려진 것은 더욱 중요하다.(사53:10, 12)48)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이라고 칭한다.(히3장; 4:14; 5:5; 6:20; 7:26; 8:1) 또한 히브리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 중에서 취하여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하여 대표하기로 작정된 분이며(히2:16; 히4:15),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분이며(히5:5-6), 완전히 거룩하신 분이며(히7:26),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가실 수 있는 권리와 가장 큰 감화력을 가지신 분이다.(히1:3; 히9:11-14, 24) 이 사실을 통하여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특히 “제사장의 이대직무(二大職務)인 제사장의 제사와 중재기도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렸다.(히9:26; 히7:25; 히10:12)49) 히브리서 이외에 다른 신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적 사역”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특히 요한일서 2장 1-2절과 로마서 8장 34절은 “그리스도의 제사드림과 대도(代禱)”의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적 사역”으로 소개하고 있다.
박형룡에 의하면, 구약성경에 나타난 제사직은 “그리스도의 제사직에서 체현”되었다는 것이다. “전자에서 그림자뿐이었던 것이 후자에서 실상(實狀)으로 나타났다. 일반적 제사직의 가장 근본적인 중심되는 요의는 제사드림과 중재기도를 제사장의 이대직무(二大職務)로 긍정함에 있었으니 그리스도의 제사직도 이 두 가지를 주요직무로 가진다는 것은 예기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과연 그리스도의 제사직이 이 예기대로 실현되었음을 명확히 증언한다.”50)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적 사역”은 그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속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지만, 그의 제사적 사역은 그의 성육신을 시작으로 전(全) 생애를 통해 수행하신 사역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그는 세상죄를 끊임없이 지셨다. 그의 비하(卑下)는 그의 성육신(聖肉身)에서 시작하였고 수난에 의한 순종의 계속적 생활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 장사(葬事)되심으로 마치었다.(빌2:8, 히5:8). 성부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제사장(祭司長)으로 임직(任職)되셨고 그의 일생을 통하여 그의 제사직을 성취하셨다.”51)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모두 구속과 치료의 이적들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제사직의 사역에 속한다.(마8:17; 요1:29) 긍휼이 많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질병과 비참을 제거하시고, 귀신을 몰아내시는 제사장적 사역을 하셨다. 그의 생명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이었다.(마20:28)
3.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드리는 사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적 사역(祭司的事役)” 중에서 중요한 두 가지, 즉 제사드림과 중재기도 중에서 먼저 제사(祭祀)에 대하여 업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충분한 제사(祭祀)를 드린 것이다. 예물과 제물을 드리는 것이 제사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⑴ 성경에 의한 ‘제사’ 개념
박형룡은 그리스도의 제사직에 대한 기원과 발전에 나타난 제 학설들을 소개한 뒤, 그 중에 ‘속죄설’이 성경에 가장 부합된다고 주장한다.52)
첫째, “선물설(膳物說)”에 의하면, 원시시대에 인류는 신(神)을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여, 마치 원시인이 그들의 추장(酋長)에게 선물을 선사하듯이, 신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신의 총애(寵愛)를 얻기 위하여 선물의 차원에서 제사(祭祀)를 드린다는 것이다. 박형룡은 이 학설에 나타나는 신관은 저급한 신관(神觀)이어서 성경에 나타나는 신관과 전적으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선물이 왜 항상 잡아 죽인 동물의 형식으로 신에게 바쳐야하는 점을 납득시키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은 예물드림을 언급하고 있으나(히5:1), 그 예물을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드리는 것이지, 하나님의 총애를 얻을 목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교훈하고 있다.
둘째, “성례적 교제설(聖禮的交際說)”은 신성(神性)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물을 숭배하는 토탬 사상에 기초해 있다. 거룩한 절기에 이 같은 동물을 잡아 죽여서 음식을 만들어 제공할 경우, 사람들이 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숭배하는 신(神)을 취하여 먹는 것이 되어, 결국 “신적 성질”에 자기 자신을 동화시키게 된다. 이 같은 주장은 이교도들 중에서 발견되는 개념일 수 있으나, 성경이 계시하는 제사의 본래의 개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특히 창세기는 “비정신적(非精神的)”이고도 물질적인 개념을 암시하는 곳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숭배설(崇拜說’에 의하면, 제사는 근본적으로 “숭배(homage)와 의존”의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로 간주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추구할 때, 죄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의존감과 하나님께 대한 숭배의 마음을 가진다. 그래이(Buchanon Gray)에 의하면, 인간은 번제(燔祭)를 제사의 기본으로 이해하면서도, 제사의 기본적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숭배이며, 선물로서 드린다는 것이다. 박형룡에 의하면. 이 견해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노아와 욥의 제사와 같은 고대제사들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했으며, 왜 고대제사들에서 동물을 잡아서 제사가 드려졌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다.53)
넷째, ‘상징설(象徵說)’은 제사를 단지 하나님과 회복된 교제의 상징으로 보는 학설이다. 동물을 잡아 죽이는 것은 피를 취하기 위한 목적뿐인데, 피는 생명의 상징으로서 제단에 드려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의 교제를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제사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 생명을 드리는 것이다. 이같이 예배자 자신의 생명을 드릴 수 없는 이유는 예배자가 죄로 더러워진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우리의 생명 대신에 동물의 생명을 대신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 경우 제사는 본질적으로 “피의 수합(收合)과 봉헌”이 되는 셈이다. 이 견해에서 박형룡은 제물을 제단 위에 불사르는 일이나 죄를 자백하는 일과 모순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 이론은 노아와 욥의 제사와 이삭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의 제사와도 불일치하며, 동물을 잡아 죽이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54)
다섯째, ‘공식설(共食說)은 사람이 신에게 제사할 때, 그 신이 예배자와 식사를 함께 한다는 주장이다.(Welhausen)55)
여섯째, 엄호설(掩護說)에 의하면 사람이 신에게 나아갈 때,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엄에 압도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이 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신의 압도적인 위엄으로부터 보호받을 수가 있다. 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인간을 엄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56)
일곱째, 속죄설(贖罪說, Piacular Theory)에 의하면, 제사의 목적은 죄를 속상하는데 있다. 속죄를 위해 드린 동물의 죽음은 “헌제자(獻祭資)를 대신한 죽음”이기 때문에, 동물의 죽음은 “헌제자”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 된다.57) 박형룡은 제사를 속죄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속죄론은 보편교회가 믿어온 교리이며, 성경에 일치하는 교리다. 제사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과의 교제와 같은 요소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속상적”(贖償的, expiatory) 요소이다. 노아의 번제에 대한 말씀의 효과는 속상적인 것이며(창8:21), 욥의 제사도 자녀들의 범죄와 결부되어 속상적이다.(욥1:5) 속죄설은 이 같은 제사들 속에서 왜 동물을 잡아 죽이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백해지며, 이방 종교에서도 행해지는 동물의 희생을 통한 속상적이라는 사상 속에서도 밝혀진다.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모든 제사들은 벌써 모세 이전에도 장차 도래할 구속주 메시아에 대한 약속들이었음을 유형론적(예표적)으로 또는 예기적(豫期的)으로 알려준다. 그러므로 모세 이전에 메시아에 대한 속상적 개념이 없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마침내 모세가 소개한 다양한 제사의식 속에서 제사의 속상적 요소가 매우 탁월하고도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그러나 모세의 제사 의식(儀式)에서 나타난 속상적 요소에 대한 개념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에게서도 나타났던 것이다.58)
⑵ 제사의 기원
모세 이전 시대의 제사들 속에서도 속상적 요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제사들의 기원(起源)에 관하여는 의견이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하여 제사들이 제정되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자연적 “충동과 숙고(熟考)”가 함께 작용하여 제사들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박형룡에 의하면, 인간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는 의미에서 특별한 진술이 성경에 발견되지 않는 동시에,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 “고무”(鼓舞)되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헌심”(獻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써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박형룡은 “타락 이후의 속상적 제사(贖償的祭祀)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으로만 기원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59)
박형룡은 핫지(A.A. Hodge)의 글을 인용하여 제사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예배와 봉사의 방법과 그 수납의 방법을 지시하셨다. 하나님께 열납(悅納)된 최초의 예배는 “아담의 가정에서 드린 받으실만한 예배의 최초 기록된 실례는 피제사”였다. 이 예배는 창세기 4:3-4절에 나타난다. 또한 모세의 제사들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60)
⑶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적(祭祀的) 사역(事役)의 상징(象徵)과 예표(豫表)
일반적으로 제사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과 희생되는 제물이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그는 제사장인 동시에 희생 제물이 되신다. 여기에 대한 주석학적 근거를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히브리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히5:1-10; 7:1-28; 9:11-15, 24-28; 10:11-14, 19-22; 12:24; 5:5; 7:26; 9:14)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9:12) 바울서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이라고 직접 칭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제사적(祭祀的) 사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롬3:25), “유월절 양”(고전5:7)이 되시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고전15:3)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엡5:2)이 되셨다고 말한다. 요한서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요1:29), 구리뱀처럼 들림받은 “인자”(요3:14), “화목제물”(요일2:2; 4:10)로 소개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을 말하였고(벧전2:24; 벧전3:18),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자신의 십자가에서 드려진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이해하셨다.(막10:45)61)
모세가 가르친 구약성경의 제사들은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제사(祭祀)들은 상징적 대속적 의의(象徵的 代贖的 意義)만 아니라 또한 예표적 예언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62)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적(祭祀的) 사역은 모세가 가르친 제사들 속에 서 상징될 뿐만 아니라, 예표(豫表)되었다. 구약성경에서 동물을 통한 제사들의 속죄적 성격은 상징과 예표로 나타났다. 동일한 제사가 한 관점에서는 상징으로 나타나고, 다른 관점에서는 예표로 나타나는 셈이다. 종교에서 “상징”은 영적 성질의 어떤 사실이나 원리나 관계를 볼 수 있는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상징이 지시하고 있는 사물들은 현재 존재하며, 현재 적용되고, 이 사물들은 그 상징이 작용하는 때에 효과를 나타낸다. “예표”는 “전망적(展望的)”인 것으로 간주되어 장래에 실제로 이루어지거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63)
먼저 박형룡이 이해한 구약성경의 동물 제사들의 “상징적, 대속적” 성격을 살펴보자. 비록 구약성경에서 제사들의 종류(속제죄, 속건제, 번제, 평안제 등)가 다양하고, 제사의 속제의 정도가 다를지라도, 모든 동물 제사들은 속제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범죄시 제사가 수행되며(레5:17-18; 레4장-5장), 제사 의식(儀式)은 일정한 절차가 있었다. 제사하기 전에 제주(祭主)가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바, 죄책의 이전(移轉)을 표시하게 한 것은 제물이 제주의 죄를 대속한다는 의미의 의식이었다.(레1:4; 3:2; 4:4; 16:22; 대하29:23)64) 성경에서 안수는 항상 안수자로부터 안수 받는 자에게 “직권(職權)”(신34:9; 행6:6)이나 “능력”(마9:18; 행9:12, 17)이나 “죄의 이전”(레16:4-22)을 표현한 것이다.65) 일반 제사들의 경우, 제단 뿔에 희생의 피를 뿌리고, 속죄일(贖罪日)에는 희생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 시은좌(施恩座)에 뿌려 죄를 속하였다.(레4:5; 레17:11) 제사들의 효과는 사죄(赦罪)이다.(레4:20-31; 6:7) 죄를 “사함” 또는 “가리움”의 히브리어 “카펠”이나 헬라어 “카탈라게”로 표현되는데, 이 뜻은 “말소적”(obliterative)이라는 뜻과 “보호적”(protective)이라는 뜻을 가진다. 다시 말하면, 제주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서 피의 중재를 통하여 죄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완전히 보호되며, 또한 죄의 오점과 불결이 덮는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시야로부터 없어진다는 것이다.66)
박형룡은 구약성경의 동물제사들의 “예표적, 예언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모세가 가르친 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수난과 그의 속죄적 죽음을 예표 하는 것으로 의도되었으며, 율법 중에서 복음을 구성하는 예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67) 박형룡은 하지(A. A. Hodge)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수소와 산양의 제사들은 보상일까지 권면액(券面額)에 의하여 수납되는 우리의 보상약속증서(報償約束證書)들과 같은데 대용화폐(代用貨幣)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내재적 가치에 의하여 모든 부채를 절대적으로 소멸한 금전이었다.”68) 구약성경의 제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의 예표라는 사실을 구약성경이 증언한다.(시40:6-8; 히10:5-9) 신약성경도 여기에 대하여 똑같이 증언한다.(골2:17; 히9:23-24; 10:1; 13:11-12)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구약성경의 제사들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고후5:21; 갈3:13; 요일1:7)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표되었다.(요1:29; 사53장; 고전5:7; 벧전1:19)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하우젠 학파들이 구약의 제사들의 “형벌적 대용적(刑罰的代用的)” 성격을 부정한다고 박형룡은 비판한다.69)
상징적, 대속적인 동시에 예표적, 예언적인 구약성경의 제사들의 목적은 이중적이다. 구약의 제사들은 범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 자녀의 신분을 잃어버린 자에게 제사를 통하여 다시 외면적 지위와 특권을 회복시켜준다.(히9:9; 10:1, 4) 또한 구약의 제사들은 영적 차원에서 회개와 신앙을 통해 영적 사죄와 구원을 제사 드리는 자에게 가져다준다.70)
4.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仲裁代言事役)
우리는 여기서 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중요한 두 번째 사역인 중재 대언사역에 대하여 언급한다.
⑴ “중재”(仲裁)와 “대언”(代言)에 대한 용어 정의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은 중보기도, 즉 “중재(仲裁)” 또는 “중도(仲禱)”로 부를 수 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중재” 대신 “간구(懇求)”로 번역되어 있다. 또한 우리말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언자(代言者)”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큰 사역이 “제사적(祭祀的)” 사역이라면, 우리가 지금 언급하고자 하는 두 번째 큰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을 세 가지, 즉 성경에서 발견되는 “향단분향(香壇焚香)”과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 )와 사역의 어원적 명칭들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향단분향과 관련하여 제단에 드린 피의 사용과 제단불의 사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과 결부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은 속죄제의 피를 금향단의 뿔에 바르고 휘장에 향하여 뿌리는 일과 대속죄일(代贖罪日)에는 그 피를 지성소 안에 들어가 시은좌에 뿌리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피의 적용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을 상징하였고, 지성소는 “네모가 반듯한” 천성(天城)인 예루살렘의 상징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적 사역은 주로 놋제단에서의 제사장의 직무와 그 위에 봉헌된 제사들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중재 대언사역은 금향단 위에서 매일 드려지는 분향으로 예표 된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향연(香煙)은 이스라엘의 기도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예표였다. 이 분향의 상징적 행위는 놋제단에서 제사 드리는 일과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다.
놋제단의 제사적 사역과 금향단의 중재 대언사역 사이에는 또 다른 한 가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향은 오직 번제단에서 취한 숯불로만 연소(燃燒)되었다는 사실은 대언은 제사에 기초를 두며, 제사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대언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71)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은 그의 지상 생애 동안 성취하셨던 제사적 사역에 기초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금향단이 있고, 천사가 그 곁에서 금향로를 가지고 향을 받아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그 향단에 드리니 향연(香煙)이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고 요한계시록은 기록하고 있다.(계8:3-5) 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상징하는 바, 그 향이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중재 대언사역이 그의 지상 생애 동안 성취하셨던 제사적 사역에 기초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계시임을 말해준다.72)
신약성경은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 )”라는 명사를 사용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다른 보혜사”(保惠師)(요14:16, 26; 요15:26; 요16:7)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혜사”로 번역하며, 요한일서 2장 1절은 “대언자”로 번역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73) 다수의 헬라 교부들은 능동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파라클레토스’를 “보혜사(comforter)”로 번역하는 바, “돕기 위하여 불리어온 자, 대언자, 다른 사람의 사건을 변소(辯疏)하며 또한 그에게 지혜로운 조언을 주는 자”, 대체로 위안을 주는 자로 사용된다.74) 박형룡은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는 말씀 속에서 보혜사를 그리스도와 성령에게 모두 적용하여 “두 대언자가 계셔서 부분적으로 동일하고 부분적으로 상이(相異)한 사역을 하신다.”고 주장하고 있다.75)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 생애 시에는 제자들의 대언자로 세상에 대항하여 제자들의 사건을 “변소”(辯疏)하고, 지혜로운 조언으로 그들을 도우셨다. 비록 지금 성령께서도 교회에서 이 사역을 계속하고 계실지라도(요16:18), 예수 그리스도 역시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대언자로서 참소자(讒訴者)인 사단에게 대항하여 성부에게 신자들의 사건을 변소하신다.(슥3:1, 히7:25, 요일2:1)76)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성령과 함께 지금도 중재 대언사역을 계속하신다.(롬8:24; 히7:25; 히9:24)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우편에서 자기백성의 보혜사와 대언자로서 하시는 사역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仲裁)하시는 일이다.”77) 히브리어 ‘파가’는 ‘중재하는 것’(to make intercession)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라틴어 ‘인테르세도’(intercedo)는 ‘중재하는 것’, ‘사이에 가는 것’(to go or pass between)을 뜻하고, 헬라어 동사(ἐντυϒχανω)는(행25:24; 롬8:27, 34; 롬11:2; 히7:25) ‘간구하심’ 등으로 번역되었다.78) 바울서신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딤전2:1)고 말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사이에 서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진정함을 뜻한다. 구약성경에서도 가령 사사, 제사장, 선지자인 사무엘은 백성을 위한 중재자로 나섰다.(삼상15:11)79)
⑵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의 구성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은 그의 제사적 사역의 계속이며, 그것의 완성을 지향하며, 중재 대언사역의 기초이므로 속죄적 제사와 절대로 분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종종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은 그의 제사적 사역보다 덜 중요시되었다. 그 이유는 중재 대언사역은 기도로만 구성되는 것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 전체는 아니다. “중재와 속죄는 그리스도의 동일한 구속사역의 두 방면뿐이어서 둘이 하나로 합체(合體)될 수 있으니 둘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는 항상 명심할 것이다.”80)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이 제사의 요소, 재판의 요소, 성화(聖化)와 애호(愛護)의 요소, 기도의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첫째, ‘제사의 요소’라 함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완전한 제사를 가지고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 하나님께 드린 것 같이, 그리스도는 자기의 완전하고도 충족된 제사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 성부께 드리셨다.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이를 때에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지파들을 그의 가슴에 품은 것 같이,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심으로써 인류를 하나님 앞에 회복시키셨다. 박형룡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한때만 충족하고 갱신을 요하는 제사를 가져오지 않고 영생하시는 그 자신이 우리의 영원히 임재하시는 제사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81)
둘째, ‘재판적 요소’라 함은 그리스도가 땅에서 속죄를 통하여 율법의 모든 공의로운 요구에 응답하셔서 그가 대가를 지불하신 자들에게 아무 법적 논죄도 올 수 없게 하셨다. 하늘에서 참소자인 사단은 선택된 자들에게 대항하여 그들을 고발하고, 정죄하지만, 그리스도는 자기의 완성된 사역을 지향함으로써 사탄의 모든 참소에 응수하시며, 답변하시고, 변호하시는 바, 그것이 곧 재판적 요소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에는 ‘성화와 애호의 요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법적 신분과 관계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 상태와 성화에도 관계된다.82) 박형룡에 의하면,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와 불순한 동기로 물들어 있는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재 대언사역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와 봉사를 성화시키시기 때문이다.(계8:3; 히13:15; 벧전2:4-5)83)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의 또 다른 요소는 우리에 대한 사랑하심과 보호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곤란과 시련과 시험 속에 있는 신자들을 능히 도우신다.(히2:18; 히4:15)84)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은 특별히 기도의 요소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중재 기도를 하신다.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에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 자신이 기도를 등한시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미쳐 간구하지 못했으나, 영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갑작스런 위험들과 강한 원수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갑자기 다가 올 때, 예수 그리스도는 중재 대언사역으로서의 중재 기도를 하신다.85)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중재기도를 드리시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은 속죄사역에 대한 보충이므로, 그 범위 안에서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속죄하신 모든 사람들, 즉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하여 기도하신다.(요17:20) 여기서 박형룡은 제한속죄설의 입장에 서 있다.(롬8:29, 히7:2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족의 행복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박형룡에 의하면, 다른 행복들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내리시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특별히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은 중생(重生), 회개(悔改), 신앙(信仰), 칭의(稱義), 성화(聖花), 영화(榮化)인데, 이것들을 위해 기도하신다.86)
⑶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의 특성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의 첫 번째 특성은 영속성(永續性)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제사장 아론 계통의 일시적인 제사사역에 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상대적으로 더 길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에 끝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반대하여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변소”(辯疏)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변소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히 정지될 것이며, 항상 새롭게 되는 은혜가 베풀어 질 것이다.(히7:25)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영원하며(시110편; 히7:3, 24), 그의 제사는 단 번에 종결되었다. 교회가 영화된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가 계속된다는 성경의 증언도 있다.(계7:17)87) “우리의 수요(需要)하는 구주는 과거에 우리를 위하여 객관적 구속사역을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성취하신 제사(祭祀)의 과실(果實)들의 주관적 적용을 지금에 매일 시행하고 계시는 자시다. 천만사람이 그의 항시 주목을 요하나니 일순간의 중단이 그들의 복리에 큰 손상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경성(警醒)하시어 그들의 모든 수요에 주목하고 계시나니 그들의 기도들이 하나도 그를 피하지 않는다.”88)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의 두 번째 특성은 권위성(權威性)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의 기도는 애걸복걸하는 자의 기도가 아니다. 그의 기도는 “그의 대리적 의를 근거로 한 권위적인 일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흠정대언자(欽定代言者)로, 또는 능히 법적 청구를 제출할 수 있는 자로 서신다. 그의 기도는 창조주에게 피조물의 진정(陳情)이 아니라 성자의 성부에 대한 요청이다.”89)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어 자신의 우편에 앉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청구”(請求)를 단번에 받아드리신 것이다.90)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의 셋째 특징은 유효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의 기도는 항상 효과가 있는 기도이다.(요11:42; 요일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율법에 순종하시고, 율법의 충분한 형벌을 우리 대신 받으심으로써 이룩하신 자신의 의를 근거로, 우리의 죄의 사면(赦免)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그의 사면의 주장은 반드시 효과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부 하나님 앞에서 이 같이 유력한 대언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큰 위안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 기도는 “자기의 속죄사역(贖罪使役)에 기초하였으니 그는 자기의 요청하는 모든 것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으매 거기에 그의 기도들이 유효하다.”91)
5.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된 제사장직
제사장직의 성질과 의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도 참된 제사장임이 밝혀진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아무도 하나님께 자유롭게 접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이외에 다른 어떤 제사도 죄를 제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신을 죄인들과 화목시키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총의 호의가 그의 백성에게 전달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사장직에 대한 상징과 예표일 뿐이다.92)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는 영원하며, 왕적인 제사장이심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아론의 계통을 잇는 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예표 하였으나 중요한 두 가지 점에서 최고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지 못하였다. 즉, 아론의 계통을 잇는 제사장직은 죽을 사람들을 대대로 계승하는 것이며, 왕의 신분을 겸하지 않고 다만 제사장 신분만을 갖는 제사장직이다. 구약의 족장들의 역사에서 “의의 왕”이며 “평화의 왕”으로 칭해지는 “왕적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나타난다. 개인적 인물로서 멜기세덱은 다른 사람들처럼 “불성문역사(不成文歷史)”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부모도, 기원도, 계보도, 끝도 없이 영원 무궁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영원성을 주장한다.(히7:3; 시110:4) 또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은 왕직을 겸하고 있는 제사장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제사장직”을 예표한다. 결국 멜기세덱의 왕적 제사장직은 영원한 제사장직이며, 왕직과 제사장직이 한 인격 속에서 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제사장직의 예표인 셈이다.93)
아론 계통의 제사장직은 일시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단일회적 제사를 통해 신자들을 영원히 완전케 하기 때문이요, 그는 영원히 살아 계셔서 신자들을 위하여 중재 대언하시기 때문이며,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납과 교제를 영구히 계속적으로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서 시작된 제사장적 사역은 그의 십자가위에서 자신을 드리신 제사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그는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우편에서도 여전히 제사장으로 사역하신다.(히8:2) “그는 그의 제사적 사역(祭司的事役)을 땅에서 시작하시고 하늘에서 완수하시는 것이다.”94)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땅에서도 이미 그의 제사장직의 중재 대언사역을 행하셨으나(눅23:34; 요17:20; 히5:7), 부활과 승천 이후 승귀 상태에서 중재 대언사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 사역이 그의 제사장적 사역 중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은(히7:25) 중보자로서 그가 구원의 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에게 주신 자들을 실제적으로 구원하기 위하여 각 사람을 성부 하나님께 인도하고, 소개하고, 중재해 주시기 때문이다.(요17:12; 엡2:18; 엡3:12)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교제는 “중보적 제사장(仲保的祭司長)”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유지될 것이다.(시110:4; 계7:17)95)
중재자의 필요성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만유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아담은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통할 특권을 가졌으나,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특권을 잃어버렸다.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족장시대의 제사나 모세의 제사 의식들은 임시적 방편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드린 제사의 그림자들이었다.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우편에서 계속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사역은 그의 제사직의 수행이다.(롬8:24)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연합에 의하여” 우리의 제사장이 되기에 적당하게 되셨다.(히7:25; 사53:32)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으로 인하여 우리를 대신하실 수가 있었고(히4:15), 신성으로 인하여 귀중한 봉헌을 통해 그의 중재 대언을 전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만드셨다.(히9:14)96)
6.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교회의 직제, 만인제사장직
로마 가톨릭교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장직과 교회의 직제와 만인제사장직 사이에 혼돈과 오해가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사제(司祭; priest)들이 성례전을 통하여 대신 행사한다. 여기서 사제들은 참된 제사장이 된다. 왜냐하면 사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 중재하며, 화목제사를 드리는 일을 수행하며, 사면(赦免)에서 사면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권위적으로 중재하여 죄인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인들의 죄를 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은 중보자들이 된다. 여기서 죄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접근하여 사죄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다만 죄인인 평신도들은 중보자들인 사제들의 중재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사제들이 제사장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미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를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속상(贖償)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차원에서 이해된 중재자들이 아니라, 사죄권(赦罪權)을 가진 차원에서 이해된 중재자들이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생사권(生死權), 즉 천국의 열쇠권을 가지고 있다. 사제들이 매면 아무도 풀지 못하고, 그들이 풀면 아무도 매지 못한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 같이 악한 쇠 멍에를 깨뜨렸던 것이다.97)
성경에 의하면, 사제들은 “직임적 의미(職任的意味)”에서 제사장들이 아니다. 성경에서 복음사역자들을 사자(使者), 파수군, 사신(使臣), 교사, 감독, 치리자, 목자, 장로 등으로 부르지만, 결코 사제나 제사장(ίερύ ; 히에루스)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복음사역자를 통한 사역은 결코 “제사적 작용(祭祀的作用)”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사제들이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린다거나 각 신자에게는 없는 중재 대언의 권위를 사제가 가진다고 말씀하는 성경 구절은 없다. 모든 복음 사역자들의 의무는 복음 선포(교훈)와 치리이다.(고전12:28; 엡4:11-12; 딤전3:1-13; 벧전5:2) 아론 계통의 인간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예표로서만 가능했다.(히10:1, 9, 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아직도 아론 계통의 제사장직은 영원히 폐지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에 시행하고 있는 인간 제사장직은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다.(히10:14; 골2:10)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요14:6; 마11:28; 요5:40; 요7:37; 계3:20; 계22:17)98)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칭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해하는 “직임적 의미”에서 이해된 제사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사이의 “언약적 또생명적 연합”이 존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와 중보사역과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들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신자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지성소에 이르고(히10:19-22), 성화되고, 영적으로 준비되어 “거룩한 제사장”, “왕적 제사장”으로서 찬송, 감사, 간구의 제사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며, 지상에 살고 있는 교우들을 위하여 대도(代禱)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히13:15; 딤전2:1-2; 벧전2:5-9) 위와 똑같은 관점에서 그리스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속에서 선지자들이며, 왕들이 된다.(요일2:20; 요16:13; 계1:6; 계5:10)99) 박형룡은 핫지(C. Hodge)의 글을 인용하여 “만인제사장직”(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다음과 같이 확정한다. “모든 신자들은 사람들이 복음아래 제사장들이라는 의미에서만 제사장들이다. 즉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갈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의 모든 백성을 하나님께 왕들과 제사장들로 만드셨다.”(C. Hodge, op. cit., II, 467)100)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 중보자이시고, 우리가 그만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이시다. 중재 대언 사역은 “제사적(祭司的) 작용”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재자이시다. 비록 구약시대에 신자들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는 드릴 수 있었지만, 대제사장만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 백성을 위하여 사제적 직임을 수행했듯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제적 직임을 수행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나타나 자신의 공로를 근거로 자기 백성을 위한 기도가 응답될 것을 변소(辯疏)하신다. 그러나 신자들의 경우, 중재 대언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나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신자들은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대언할 수 있다.101)
현대신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중에서 특별히 선지자직은 강조하되, 제사장직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죄의 책임성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부패로서의 죄의 임재를 인정하나 사람이 성장해감에 따라 일종의 약점으로서의 죄가 제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한다는 것은 이성에 배치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통한 속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강조하되, 그의 공의를 무시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적 사역의 실재성과 중요성이 무시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102)
D.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
일반적으로 개혁파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삼중직 중에서 왕직을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인간, 사회, 국가, 자연, 우주 등과 관계된 창조와 섭리의 영역에 속하는 ‘자연(능력)의 나라’(regnum naturae 또는 regnum potentiae)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둘째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와 관련된 선택 또는 구속의 영역에 속하는 ‘은혜의 나라’(regnum gratiae)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마지막 셋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 최종적으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종말론적 나라에 해당되는 ‘영광의 나라’(regnum gloriae)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103)
박형룡도 위와 동일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면서도, 번역문제로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능력의 나라’(regnum potentiae)를 ‘정권의 왕국’(regnum potentiae), ‘정권적 왕국’(regnum potentiae), ‘신적 왕권’ 등으로 표기하고, ‘은혜의 나라’(regnum gratiae)를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 ‘영적 왕국’, ‘영적왕권’, ‘중보적 왕권’ 등으로 표기하고, ‘영광의 나라’(regnum gloriae)를 ‘영광의 왕국’으로 표기한다.
박형룡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격이시며, 말씀이시며,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창조 사역과 섭리 사역에 동참하시는데, 이 통치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본래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나라’의 통치권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나라’의 통치권은 성육신하셔서 신인(神人)으로서 중보자에게 주어지는 권한이다. 이 왕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명령을 받아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 명령을 완성하심으로써 얻어지는 통치권이다. 권능의 왕권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왕권과 다르니 후자는 인출되고 제수(除授)되고 경륜적인 왕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신성(神性)으로만 아니라 신인(神人)으로서 행사하시는 것이다. 후자는 본래적 권리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한 왕권이 아니라 그가 자기의 순종과 수난과 상급으로 성부(聖父)의 부여를 받으신 왕권이다. 이것은 그의 백성의 구원과 은혜언약의 집행에 관계를 가진 특별한 왕권이니 그의 신적 본성(神的本性) 자체에 결착(結着)된 것이 아니라 중보의 직임을 띤 그의 신인(神人)으로서의 위(位)에 결착된 것이다.”104)
박형룡은 특별히 영광의 나라와 은혜의 나라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왜냐하면 이 두 나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는 최종적으로 완성될 영광의 나라를 다스리실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과 정권의 왕국(regnum potentiae)을 구별해야할 것이다. 전자는 교회를 포용하는 특별행정(特別行政)이요, 후자는 우주전체를 포용하는 일반적 행정(一般的行政)이다. … 두 왕국의 완성으로서 영원히 계속할 「영광의 왕국」을 말함도 있다.”105)
우리는 ‘은혜의 나라’, ‘능력의 나라’, ‘영광의 나라’의 순서로 기술하기로 한다.
1. “은혜의 나라”(regnum gratiae)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
은혜의 나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은 메시아로서 왕직이다. 메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은 그의 선지자직과 제사장직과 똑같이 구약에서 유형론적으로 예표된 왕직이라고 박형룡은 말한다.(민24:17; 삼하7:16; 사9:6-7; 시2:6; 시45편; 시110편; 단7:13-14; 미5:2; 슥9:9) 신약도 메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을 구약의 예언과 결부시켜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눅1:31-33; 마3:2; 막1:14)106)
은혜의 나라의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다스리신다. “이 왕권은 폭력이나 기타 외면적 방편에 의해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동작되는 것이다.”107)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의 성령에 의해서 통치되기 때문에 영적이며, 그의 은혜를 통해서 다스려지기 때문에 은혜의 나라이다. 박형룡은 은혜의 나라와 교회를 거의 일치시킨다. “그 왕국은 교회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아니 이것은 교회와 하나다.”108) 여기서 박형룡이 이해한 은혜의 나라로서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 모두 관련된다. 은혜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참 백성(무형교회)에 대한 그의 관계와 그의 신앙공언(信仰公言)하는 백성(유형교회)에 대한 그의 관계를 아울러 포함한다.”109) “유형교회는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왕국의 유일한 외적 조직체이다. 동시에 그것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탁월한 수단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때로는 유형 교회와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마8:12; 13:24, 47:50).”11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의 나라의 왕이신 동시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교회의 머리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주시는 성령도 또한 그가 교회위에 자기의 왕권을 행사하시는 방편이 되신다. 그런즉 교회의 원수격(元首格)과 이렇게 밀접하여 있는 왕권이 영적이라는 것”이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111)
박형룡은 구속의 은혜에 참여하는 은혜의 나라와 창조와 섭리의 은혜에 참여하는 능력의 나라 사이의 극명한 차이점을 지적한다. 은혜의 나라는 “구속의 사역(事役)에 기초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보혈로 그의 백성을 매수(買收)하신데, 죄와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구속하신데 기초를 둔 나라이다. 이 나라는 모든 구속받은 자들 곧 전교회를 포함하며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은혜의 나라」(regnum gratiae)는 하나님의 창조적 작업(創造的作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그의 구속적 은혜에서 기원하였다. 아무라도 단순히 인류된 효능(效能)으로 이 왕국의 공민이 될 수 없고 구속된 자들만이 그 존귀와 특권을 가진다.”112)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은 “그 본질에 있어서 영원히 계속할 것이요, 세계의 종국(終極)에 이것의 공작(工作)하는 양식(樣式)이 중요한 변동을 받을 것”이라고 박형룡은 말한다.113)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의 영속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투레티니(Turetini)는 영적 왕국이 완성된 후에도 신인(神人)으로서 그리고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이 지속될 것으로 간주하지만, 딕(Dick)과 아브라함 까이뻐(Abraham Kuyper)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은 그의 백성의 구원이 완수된 때에는 중지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박형룡은 성경에 기초하여 주석학적으로 투레티니의 견해에 동의한다.114)
2. “능력의 나라”(regnum potentiae)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
“중보적 왕(仲保的王)으로 임명받으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적 왕국인 교회를 치리하시는 동시에 우주 위에 왕권을 가지어 교회의 보존과 성장에 유익하도록 만사 만물을 섭리하시는 것은 그가 반드시 하실 일이다.”115) 능력의 나라(regnum potentiae)는 창조와 섭리의 영역에 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인데, 신인(神人)으로서 그리고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에 대한 통치이고, 둘째는 은혜의 나라와 관련되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창조와 섭리를 통한 통치이다.
“정권적 왕국(regnum potentiae)이란 신인(神人)예수 그리스도의 우주 위에 통치, 교회의 이익을 위한 그의 섭리적 심판적 행정(攝理的審判的行政)이다. 이 왕국은 그리스도의 원수의 굴복(히10:12, 13, 고전15:25), 신적 의(神的義)의 증명(요5:22-27, 9:39), 그의 교회의 완성을 목적으로 한다.”116)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나라는 “하나의 물리적 도덕적 체계를 구성하므로 그리스도의 중보로서의 왕격(王格)은 전 우주에 확장되어 만사 합력하여 그의 백성의 선을 이루게 하며(롬8:28), 그들을 위하여 왕국을 세우며” 모든 악의 세력을 격파하고 만인으로 하여금 그에게 예배하게 하며, 요약하면, “우주의 왕으로서의 중보는 개인들, 사회단체들, 민족들의 모든 사건들을 섭리하시되 자기의 보혈로 구속하신 백성의 성장, 정화(淨化), 최종완전을 조장(助長)하도록 하신다.”117)
그러면 능력의 나라와 관계된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권은 언제 시작되었으며, 언제까지 지속되는가? “이 우주 위에 왕권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시기 직전에 공포하셨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는 때에 정식으로 부여(賦與)받으셨”고, 이것은 그의 지상사역에 대한 약속된 상(賞)이며, 승귀(昇貴)의 한 부분인데, 인류의 구속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이 왕권의 사명은 마침내 끝난다.118)
3. “영광의 나라”(regnum gloriae)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나라”와 “권능의 나라” 이후에 최종적으로 완성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광의 나라”이다. 박형룡은 앞에서 언급한 두 나라와 영광의 나라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의 문제는 논쟁점 중에 하나로 파악한다. 영광의 나라가 완성될 때, 권능의 나라에 끝이 온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하지(A.A. Hodge)는 은혜의 나라와 권능의 나라, 이 두 나라의 완성을 통해서 영원히 계속될 나라가 영광의 나라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스트롱(A.H. Strong)은 은혜의 나라와 연속선상에서 완성되는 나라를 영광의 나라로 이해하든지 또는 은혜의 나라와 창조주와 섭리주 하나님께 속하는 주권인 우주 통치권, 즉 권능의 나라를 합한 것이 영광의 나라라고 이해한다. 스트롱의 견해에 대하여 박형룡은 “이것을 무리라고 반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는 스트롱이 주장한 창조주 및 섭리주 하나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를 선호하지 않고, 신인이시며,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주적 왕권뿐만 아니라, 은혜의 왕권을 돌리기를 원한다. 박형룡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나라와 권능의 나라의 완성을 통해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119)
E. 속죄론
박형룡은 어느 누구보다도 속죄론을 매우 중요한 교리로 간주한다. 그 결과 박형룡은 속죄론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에 의하면, 속죄론은 조직신학의 각론들(loci)의 내용적인 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서 제사장직과 관련하여 취급되어야 하지만,120) 서술 분량상의 이유로 그는 따로 다루고 있다.121)
박형룡은 속죄론을 다섯 부분, 즉 속죄의 가치와 원인과 필요성, 속죄의 성격, 속죄론에 대한 비판, 속죄의 다양한 이론, 속죄의 한계에 대해서 취급한다.
1. 속죄의 가치, 원인, 필요
⑴ 속죄의 교리적 가치
박형룡은 성경내용과 대표적 학자들의 주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교리적 가치의 중요성을 논증하는 동시에 일부 잘못된 자유주의적 속죄 개념을 비판한다. 바울신학의 핵심은 “십자가의 도”(고전1:18)인 동시에,122)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애가 기록된 4복음서의 4분의 1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도할 만큼,123) 신약성경은 “십자가의 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교리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고 박형룡은 주장한다.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교리적 가치를 강조하는 대표적 학자로서 데니(James Denny), 고구엘(Mourice Goguel), 핫지(A.A. Hodge), 바빙크(H. Bavinck), 아담(Karl Adam), 브룬너(E. Brunner)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구겔에 의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진수(眞髓)이고 그리고 구원과 사도의 전도의 진수”이며, 핫지에 의하면, “속죄 교리는 분명히 루터가 참으로 교회의 성패가 달려있는 신조라고 단언한 칭의 교리(稱議敎理)의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요소”이며, 바빙크에 의하면, “사도들의 전도중에 십자가는 그 중심부분이었으며 구원의 모든 원천”이며, 브룬너에 의하면, “십자가는 예수의 생활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이다.124)
그러나 박형룡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贖罪)를 통한 복음을 사회개선이나 교훈 정도로 이해했다고 비판한다. “그의 수난은 교회로 하여금 인류의 모든 수난들에 민감하여 각종 수요(需要)를 가진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한다.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사람에 향한 사람의 비인도적인 행위 위에 하나님의 심판과 그것 자체가 비공의(非公義)에 연루(連累)되는 무서운 결국(結局) 등을 교회에게 드러낸다.”125)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교리는 단지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적 지식이나 철학적 이해를 통해서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고, 다만 성경이 증거하는 내용을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여야한다고 바빙크의 주장을 인용하여 힘주어 강조한다. “성경 말씀을 편벽됨이 없이 읽는 자로서는 그 속에서 대신적 속죄(代身的贖罪)에 대한 교회의 교리를 발견할 것이다.”126)
⑵ 속죄의 원인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동적 원인(鼓動原因)”(Moving Cause), 즉 “근본적 원인”을 무엇으로 이해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127)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원인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 사실을 박형룡은 성경구절들(사53:10; 눅2:14; 갈1:4; 골1:19-20)을 통해서 주장한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과 희생을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근거하여 이해하지 않고, 이와는 별도로 이해할 경우, 하나님의 삼위성 안에서 모순이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시는 성부 하나님이 무자비한 하나님으로 이해되고, 결국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빼앗아 버리는 오류를 비판하는 동시에, 박형룡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형벌적 대상적 속죄(刑罰的代償的贖罪)” (Substitutionary Atonement)설에게 이 같은 혐의를 부여하는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도 비판한다.128)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도 매우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의 뜻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그의 사랑의 동기로 된 것은 사실이나 그 사랑의 배면(背面)에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 움직인 것이다.”129) 박형룡은 여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서 특히 요한복음 3장 16절과 요한일서 4장 10절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즉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며, 사역이다. “속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事役)이다. 속죄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근원이 있으니 그 중에 어느 한 위(位)에게서 그 고동적인 원인이 독립적으로 발견될 바 아니다.「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생각되었다. 아버지는 구원을 계획하셨고, 아들은 그것을 집행하셨고, 성령은 그것을 적용하신다」”130) 존 머리(John Murray)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근원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절대 주권적(絶對主權的)인 사랑”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 박형룡은 동의하고 있다.131)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역동적인 원인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과 사역임을 가장 먼저 주장한 다음,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근거된 하나님의 속성인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뜻과 의지는 전횡적(專橫的), 다시 말하면 전제적이거나 독재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불가분리의 관계성 속에 있다는 사실의 근거를 로마서 3장 24-25절을 통해서 제시한다. “속죄를 위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전횡적(專橫的)(필자, 독재적)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공의를 기초로 하였다.”132)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기초로서의 신적(神的) 사랑과 신적 공의는 긴밀히 연합되어 나누일 수 없다. … 속죄의 한 일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함께 연합되어 있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133)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박형룡은 핫지(A.A. Hodge), 포사이드(P.T. Forsyth), 그리고 브루스(F.F. Bruce)를 통해서 논증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고 유한자가 아니시니 그의 진노는 인생의 분노처럼 그릇된 감정에 치우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에 포섭(包攝)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의 사랑과 공의의 통일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 안에 모순과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는 모든 속성이 조화되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의 사랑과 공의의 연합에 대립하여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함을 요한다.”134)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통일성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 둘 중 어느 쪽도 무시하지 말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중에 어느 한 쪽만을 주장한 대표적인 속죄론의 예를 들면서 이들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안셀름의 만족설 또는 객관설은 하나님의 공의를 일방적으로 주장했다면, 아벨라르의 도덕감화설 또는 주관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안셀름의 만족설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의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여기에다가 하나님의 사랑의 요소를 첨가시켜서, 정당하게도 형벌대속설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동반하여 속죄의 근본적 원인을 구상한다는 것은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다. 하나님의 이 두 속성 사이에 적성(敵性)이나 반항이 있을 수 없다. 그 하나에 치중하고 그 다른 것을 무시함은 원만한 고찰이 아니다.”135)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적대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와 주권적인 뜻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모순이나 충돌은 생기지 않는다고 박형룡은 주장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박형룡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기초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중예정론(二重豫定論)과 결부시킨다. 박형룡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차별적이다. “속죄를 결정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밑에 있는 사랑은 차별 없는 사랑이 아니라 구원 얻을 자들을 선택하며 예정한 사랑이다.… 구원을 모든 인류에게 차별 없이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고유적(固有的)으로 속하는 것이 아니다.”136)
⑶ 기독교회사에서 속죄의 필요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필요성을 중심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만족 또는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견해와, 둘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만족 또는 보상, 즉 법정적인 방법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하다는 견해이다.
① 속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입장
중세기의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에서, 특히 유명론주의자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는 속죄의 필요성을 하나님의 속성에 결부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와 연결시켜서 이해하였다. 박형룡에 의하면, 스코투스의 경우, 속죄는 고유하게 필요치 아니하였으나,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전적으로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무한한 가치를 부정하고, 다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받아들이시기로 임의로 결정하신 만족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스코투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다른 어떤 대용적 방법이라도 사용하실 수 있고, 또 다른 대용적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고도 구속사역을 얼마든지 수행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137)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소치누스(Socinus)는 하나님 안에 죄를 반드시 처벌하시는 공의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필요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로티우스(Hugo Grotius)에 의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의 산물인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약화시키시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선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법정적인 방법이 아니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38)
만족설에 반대하고, 도덕감화설 또는 주관설의 입장에 서 있는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와 리츨(Ritschl)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인류위에 머물지 않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의 유일한 장애물은 사람의 죄책감과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39)
② 속죄의 필요성을 긍정하는 입장
박형룡은 속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다시 두 가지, 상대적 또는 가설적 입장과 절대적 입장이다. 상대적 또는 가설적 입장의 경우, 하나님은 속죄 없이도 능히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지만,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와 작정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속죄 없이는 구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박형룡에 의하면,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어거스틴(Augustinus), 아퀴나스(Aquinas), 루터(Luther), 츠빙글리(Zwingli), 칼빈(Calvin) 등이다.140) 절대적 필요성의 입장의 경우,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원래적으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이미 계획되었으므로 오직 대속적 희생제사와 속죄적 보혈로 구속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 구속을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만족 또는 보상이 비로소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안셀름 등이 이 입장에 서 있다. 박형룡은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다.141)
⑷ 속죄의 필요성의 성경적, 신학적 근거
비록 속죄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신학적 작업 가운데서는 어느 정도 추론적 성격이 나타날 수 있을지라도, 속죄의 필요성 자체는 쓸모없는 사변이 아니라, 성경에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속죄의 필요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박형룡은 주장한다.
박형룡에 의하면,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결정하신 죄인의 구원을 이룩하심에 죄의 형벌과 대속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성경을 통하여 여섯 가지로 제시하는데, 네 번째와 여섯 번째의 언급은 앞에서 제시한 것과 중복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죄의 필요성의 네 가지 이유와,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에 반대하는 두 가지 견해에 대한 박형룡의 비판에 대해서 살펴보자.
속죄의 필요성의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의 거룩과 의의 요구”142)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과 의 때문에 자신의 무한한 위엄에 대한 도전을 간과하실 수가 없고, 여기에 대해 진노하시고, 그 죄를 반드시 형벌하신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에 대한 표현이 하나님의 율법인데, 하나님은 우리가 이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義)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인간의 죄책을 해결하여, 인간을 속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시며, 예수 그리스도도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의롭게 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단지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시켜서 이해한 소치누스(Socinus)와, 속죄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순종을 속죄에 기초시킨 입장은 비성경적이라고 박형룡은 비판한다. 박형룡은 스트롱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 바, 속죄는 죄인이 교란시켰던 율법에 대한 복종의 행위, 죄책을 없애기 위하여 가해지는 형벌, 죄인의 용서와 회복의 과정에 필요한 하나님의 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143)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칭의를 위한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만족(代理的滿足)”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144)
속죄의 두 번째 필요성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확증” 때문이다.14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혹독한 죽음과 수난이 동반되어 일어난 사건으로서 평범한 일이 아니라, “초비상사(超非常事)”이며,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통해서만 속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유일한 방법이다.146)
속죄의 세 번째 필요성은 “신적 정리(Proprieties)”(神的 正理), 즉 하나님의 고유성에 근거한 수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147) 예수 그리스도는 형제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만 했는데(히2:10, 17),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구원의 주장의 수난에 의한 속죄는 신적정리에 의하여 강요된 절대필요의 사건이었다.”148)
속죄의 네 번째 필요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효과가 그의 위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에, 그의 보혈을 통해서만 속죄가 가능한 것이다. 즉 “예수의 피가 수요되는 효능과 효력을 가진 피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의 본체(本體)의 형상”이신 그가 신자들의 혈육의 동참자가 되시어, 단번에 거룩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선택된 자들을 거룩하게 하며, 완전케 하실 수가 있다.149)
박형룡은 속죄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죄인들이 직면한 영원한 위험을 방지할 수 있었고, 죄인에 대한 칭의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음을 강조하고,150) 레위기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의 모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히9:9-14, 22-28)라는 것이다.151) 이것은 속죄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부정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를 박형룡은 정당한 근거를 통해서 반박한다.
박형룡이 먼저 비판하는 견해는 소위 (속죄) “필요설(贖罪必要說)”인데, 속죄 필요설에 의하면, 만약 하나님이 만족을 받기 전까지 죄인을 용서하시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보다도 열등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도 종종 자신에게 손해를 끼진 자를 값없이 용서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악한 인류만큼 선하지 못하며, 인자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오해에 비롯된 것임을 전제하고, 박형룡은 여기에 대하여 반박한다. 박형룡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공의의 심판주”이시다.152)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세계를 공의로 심판하신다. 그러나 주권적이며, 자유로우신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선택된 사람들을 그의 사랑과 자비로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독생자의 희생을 통하여 공의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긍휼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박형룡이 비판하는 두 번째 견해에 의하면,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주장할 경우, 삼위일체 하나님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화목제를 받으시는 한편, 그리스도는 화목제를 드리시고, 하나님은 형벌을 가하시는 한편, 그리스도는 그것을 받으시며, 하나님은 부채의 보상을 강요하시는 한편, 그리스도는 그것을 보상화 하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가 되지 않고, 분열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153)
이 주장 역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한 후, 박형룡은 성경주석을 근거로(벧전1:20; 시40:6-8; 눅1:47-50, 78; 엡1:3-14, 2:4-10) 삼위는 자유와 자원하는 가운데서, 각각의 사역을 분담하시고, 상호 참여하시고, 상호 협력하시기 때문에, 분열은커녕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있으며, “속죄의 사역이 삼위일체의 분열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협력사역”이라고 주장한다.154)
2. 속죄의 성격
속죄의 다양한 성격을 중심으로 박형룡은 존 머리(John Murray)의 견해(제사성, 유화성, 화목성, 구속성)를 먼저 다루고, 곧 이어 벌콥(L. Berkhof)의 주장(객관성, 대리성, 순종성, 완전성)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이 두 주장을 종합하고 있음을 밝힌다.155)
⑴ 속죄의 제사성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제사사역과 중재․대언사역으로 나누어 길게 취급한다.156) 우리가 지금 속죄론을 중심으로 다루고자하는 속죄의 제사적 성격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사역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이 “제사성(祭祀性)”이라는 제목으로 취급하고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적 성격은 제사로서의 속제사역에 포함된 다양한 측면들 중의 하나에 해당되는 “속상”(贖償, expiation)을 가리키는 것이다.157) 비록 속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사역의 한 측면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박형룡은 주장한다.158)
박형룡은 구약에서 시행된 제사는 십자가에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의 모형이지만, 구약의 제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모두 “속상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성경주석(히9:6-15, 23-24; 히13:10-13)을 근거로 밝힌다. “구약의 제사들은 기초적으로 속상적이었다. 제사는 죄를 가리우고 신적 진노와 저주를 멈추기 위하여 신적으로 제정된 규례였다. 구약의 예배자는 제단에 제물을 가져올 때에 동물희생을 자기 대신으로 사용하여 자기의 죄책과 그 결과인 사형(死刑)을 제물에게 전가하였다.”159) 구약제사의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를 드리시되, 가장 특수하게 “레위기적 경륜(經綸)의 속죄”에 의해 제공된 모형 아래 하셨다. 그는 자신으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죄책을 속상하시고 죄를 제거하시어, 신자(信者)로 하여금 마음에 피 뿌림을 받고 몸의 씻음을 입어 신앙의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며, 그의 피로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160)
그러면 모형적인 구약제사와 원형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박형룡에 의하면, 비록 두 제사 속에 동일한 속상적인 요소가 있을지라도, 구약제사가 일시적, 잠정적, 예비적, 부분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영원하고, 불변하며, 최종적이고, 완전하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제사에서 제주(祭主)와 제사(祭祀) 사이 그리고 제주의 부담과 제물의 피흘림 사이에는 불균형이 발견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에서는 제주와 제물이 동일하여 불균형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으신 영원한 제사장이시며,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지금도 중재사역을 계속하고 계시는 대제사장이시다.161)
⑵ 속죄의 유화성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성격 중에 하나인 “유화성”(宥和性, Propitiation, ἱλασμός)을 기술하기 위하여, 유화성과 제사와의 긴밀한 관계, “유화”에 대한 정의, 유화와 하나님의 사랑과의 관계, 하나님의 진노의 필연성으로 인한 유화의 중요성을 논의한다.
제사와 유화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구약성경(신21:8; 레4:35; 10:17; 16:30)과 신약성경(롬3:25; 히2:17; 요일2:2; 4:10)에서 “유화”에 해당되는 구절들을 주석적으로 종합 검토한 박형룡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구약성경에서는 유화의 개념이 제사의식과 관련하여 자주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헬라어역 구약성경에 나타난 “유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적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은 구약의 레위기에 나타나는 제사의식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의 모형으로 정당하게 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레위 속죄제사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는 유화와 상호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162)
박형룡은 유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구약의 히브리어 “카팔”(ר )은 “가리우는 것”으로 번역되는 바, 세 가지 주요 내용을 내포하는데, 즉, 가리우는 것은 죄와 관계하여 생기는 일이며, 이를 통해서 생기는 결과는 정결과 용서이며, 주 하나님 앞에서 가리우는 것이며, 이에 따른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구약에서 제사의식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유화”는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불쾌(不快) 혹은 진노(震怒)를 격발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보복(복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반동(反動)이며, 가리우는 것은 죄가 격발시킨 하나님의 불쾌를 멈추기 위한 것이다.163) “유화는 하나님의 진노와 불쾌를 예상하고 유화의 목적은 이 불쾌를 없이 하는 것이다. … 유화의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하셨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백성에게 호의적(好意的)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164)
하나님의 진노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는 유화교리는 과연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는가? 유화교리는 신화적(神話的)인 신개념(神槪念)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마음과 신적 위격들 사이에 부조화와 알력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유화교리가 거부되었다. 박형룡은 이 같은 견해는 유화교리에 대한 오해와 오전(誤傳)에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유화교리와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유화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이며, 유화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움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165)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죄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받아야할 진노를 대신 받아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시키신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자신을 유화적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단번에 성취하신 유화의 모든 효과를 이룩하셨다.(요일2:1-2)166)
⑶ 속죄의 화목성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유화”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진노의 멈춤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화목(和睦)”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우리의 소원(疏遠)과 하나님의 사랑에로의 우리의 회복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분열된 관계를 전제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적의(敵意)와 소원(疏遠)을 전제한다. “이 소원은 이중이니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원과 하나님의 우리로부터의 소원이다.”167)
화목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적의와 소원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화목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원(疏遠)의 제거만을 뜻하는가? 박형룡은 성경주석을 근거로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성경의 주요 구절들에 의하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원이 생긴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우리의 적의가 화목의 전면(前面)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의 우리로부터의 소원이 화목의 전면에 오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일어나는 소원은 우리의 죄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반동(反動)으로서의 소원을 격발하는 것은 우리의 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로부터의 소원, 하나님 편에 있는 거룩한 적의이다. 행동으로서의 화목은 하나님의 우리로부터의 소원의 근거를 제거함이며, 그 결과 화목은 하나님의 우리로부터의 소원의 근거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수립된 조화와 평화의 관계이다.168)
따라서 화목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며, 화목은 종결된 사역이며, 화목은 예수 그리스께서 대리적으로 죄를 지심으로써 이루어진 사역이며, 화목은 법정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성취된 화목의 사역은 복음 전파자들에게 위탁되었다.169) 화목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미 완성된 객관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복음전파를 통한 화목의 효과와 적용이다. “우리가 죄인의 하나님에게 화목됨으로 제이의적(第二義的)으로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화목되신 하나님은 죄인을 칭의하시고, 그의 마음에 성령으로 공작하시어 그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의 이반(離反)을 중지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열매를 취하게 하신다.”170) 화목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인간으로부터의 하나님의 적의와 소원의 제거이지만, 이차적으로 인간의 하나님으로부터 적의와 소원의 제거를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 조화와 평화의 관계의 회복이다.
⑷ 속죄의 구속성
“구속(救贖)”(redemption)이란 말은 매우 포괄적이다. 히브리어 “게울라(ה )”는 토지를 무르는 것(레25:24; 룻4:7), 토지를 속하는 것(레25:51-52)을 뜻하고, “푸드트”는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을(시119:9; 130:7), “피둄(ם י )”은 처음 난 사람의 속전을(민3:49), “피됴욘”은 생명의 구속을(시49:9) 뜻한다. 헬라어 “아폴류트로시스(άπολύτρωσις)”는 신자들의 구속을(눅21:28; 롬3:24; 롬8:23; 고전1:30; 엡4:30), “류트로시스(λύτρωσις)”는 성도의 구속을(눅2:38) 뜻한다. 구속은 종교적 차원에서 사용되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한 전(全) 과정과 전 내용을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171)
또한 구속은 좁은 의미로 속죄와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하고(엡1:7; 골1:14; 히9:12, 15), 속량으로(마20:28; 막10:45; 딤전2:6) 사용되기도 한다. 속죄의 구속성과 관련하여 구속의 주된 의무는 속량이며, 구속성은 속죄의 속량성을 뜻한다.172)
구속의 주된 의무인 속량은 이미 속박(束縛)과 수금(囚禁)을 전제하기 때문에, 구속은 속박과 수금의 해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속과 중요 관계 속에 있는 율법과 죄에 대하여 박형룡은 취급한다.
⑸ 속죄의 객관성
이제 우리는 벌콥이 주장한 속죄의 네 가지 성격들 중에서 첫 번째 성격에 해당되는 속죄의 객관성을 다루고자 한다. 박형룡에 의하면, 인간이 죄를 지은 결과, 인간은 가해자가 되고, 하나님은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만족이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형룡이 의도하는 속죄의 객관성이다.
박형룡은 우리가 앞에서 이미 논의한 존 머리의 주장, 즉 속죄의 “제사장직”, “제사”, “유화”, “화목”, “속량”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속죄의 객관성을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의 사역이 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제사장직은 객관적 측면이 있으며,173) 성경에서 제사는 물론 다른 종교에서 의도하는 제사도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드린다는 점에서 제사는 객관적 측면을 갖고 있으며,174) 유화(propitiation)는 죄인에 대한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시켜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호의를 베푸신다는 점에서 유화는 객관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175) 속죄의 화목(reconciliation)에서 하나님이 죄인과 화목되신 결과로 죄인이 하나님에게 화목된다는 주관적이며, 제2차적인 측면도 있지만, 속죄의 화목은 주로 하나님을 죄인과 화목시킨다는 제1차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176) 그리고 대가를 지불하여 획득한, 즉 매수(買收)한 속량은 대가를 지불한 자를 전제한다. 속량에서 대가를 지불한 자로부터 속량의 객관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177)
⑹ 속죄의 대리성
대리적(代理的, substitutionary) 속죄란 무엇인가? 박형룡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자(vicar)로 임명하여, 사람을 대신하게 하심으로써, 대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하시고, 사람의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박형룡은 인간 법정에서 대리적 속죄의 가상적(假想的) 가능성과 도덕적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하면서도, 결국 권한과 능력의 차원에서 대리적 속죄가 국법적(國法的)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신정적(神政的)으로는 가능하다는 점을 논증했다.178)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대리적이었으며, 그가 죄인의 자리를 취하셨으며, 죄인의 죄책이 그에게 전가되었으며, 죄인에 대한 형벌이 그에게 이전(移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어떤 인간이 자기 친구를 동정(同情)하여 그 친구의 수난에 참여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그 반대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특별계획에 따른 세상 죄를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의 대속적(substitutionary) 수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79)
박형룡은 속죄의 대리성을 성경 주석을 근거로 제시한다. 여러 성경구절(사53:6, 12; 요1:29; 고후5:21; 갈3:13; 히9:28; 벧전2:24)에 나타나는 “우리의 죄의 「담당」”에 대한 개념은 형벌 받을 책임으로서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전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헬라어 전치사 “페리(περί=인하여)”, “휘펠(ύπέρ=위하여)”, “안티(άντι=대신)”는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리적 사역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롬8:3; 갈1:4; 벧전3:18; 요일2:2; 고전15:3) 특히 마태복음 20장 28절과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사용된 “‘안티”라는 전치사는 “대속”(substitution)과 “속상적”(expiatory)이라는 뜻을 지닌다.180)
성경에 나타난 용어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리성을 논증한 박형룡은 제사장직과 제사를 통해서 속죄의 대리성을 증명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만족을 행하셨다.”(민16:5)181) “구약은 제단에 드린 제물을 대리적으로 간주할 것을 가르친다.”(레1:4)182)
⑺ 속죄의 순종성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순종의 사역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의 속죄적 순종 사역은 두 가지, 즉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이 있는데, 이 양자는 상호 구별될 뿐, 상호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자원하여 수난과 죽음에 굴복하신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한 부분이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8). 다른 편에 그가 율법에 굴복하여 사신 것은 또한 그의 피동적 순종의 한 부분이었다.”183) 그의 능동적 순종은 그의 대리적 사역에 해당되는 생애와 죽음의 전부를 포함하고, 그의 수동적 순종은 그의 대리적 수난에 해당되는 생애와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을 포함하였다.184)
⑻ 속죄의 완전성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세례받기 전에 범한 죄만이 속함 받고,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는 신자들이 현세에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나 고행(苦行)을 통해서 그리고 임종 후에는 연옥에서의 고초(苦草)를 통해서 속함 받는다. 아르미니안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만족은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충족한 은혜를 제공하지만, 대속의 적용과 효과는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좌우된다는 것이다.185)
속죄에서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위의 두 진영에 반대하여, 개혁교회는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만족은 구원의 제시를 받은 자들의 구원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고 주장한다. 개혁교회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박형룡은 성경 주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입증한다. 비성경적인 만족 개념을 주장하게 되면, “구원의 은혜성”의 맑은 시냇물에 “인력구원주의”의 흐린 물을 혼합시키는 결과가 된다.186)
존 머리의 주장에 의존하여, 박형룡은 네 가지 측면, 즉 역사적 객관성, 종결성, 독특성, 내재적 효능성을 설명함으로써 속죄의 완전성을 증명한다.
속죄가 완전하다는 첫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만족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박형룡은 역사적 객관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신적경륜(神的經綸)에 의하여 시간의 한 점에 생기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속죄는 반드시 완성된 일이요” 미완성된 것이 아니다.187)
속죄가 완전하다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단번성(單番性)”(once-for-allness)을 통한 “종결성”(finality)을 갖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미사를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이해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단번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바로 이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 개념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내에서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단번성을 희생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지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고양하신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단번성과 고양 이후의 속죄의 적용을 혼란시켰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단번성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희생제사의 반복성을 가진 속죄 개념에 반대하여 박형룡은 속죄의 단번성을 통한 최종성을 강하게 변호한다. “그리스도 대제사장의 제사 드리심과 그 후 활동은 명백히 구별되고 혼동되지 않아야 된다. 신약은 죄책을 속상하고 하나님께 화목시킨 제사의 단번성(單番性)을 강조한다(히1:3, 9:12, 25-28). 이 단번성과 이것이 함의하는 종결성(finality)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속죄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함이다.”188) “성경이 말하는 속죄는 영광의 주께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고 하늘위 위엄의 우편에 앉으심으로 성취된 일이다.”189)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다는 세 번째 이유는 속죄의 독특성(uniqueness) 때문이다. 속죄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Vorbild)으로 이해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독특성 내지 유일성을 손상시킨 부쉬넬의 견해를 비판한 박형룡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지만, 속죄 사역에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한다.190) 속죄의 독특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品位), 사명(使命), 직임(職任)같은 것들의 독특성과 마찬가지로 불가침적(不可侵的)”이다.191)
속죄가 완전하다는 네 번째 이유는 속죄의 내재적 효능성 때문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을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성부 하나님의 주도권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속죄는 성부의 사랑과 은혜의 발로(發露)”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서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도권을 강조한 「도르트 신조」(1618-1619)를 반대한 “항명파”(Remonstrants)를 비판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부를 권면(勸勉)하여 사랑하시며 은혜로우시게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착(誤錯)”이라고 비판하고,19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옹호한다. “주 예수는 자기의 완전한 순종과 그가 영원한 성령을 통하여 단번에 하나님께 드리신 자신의 제사로 그의 성부의 공의(公義)를 충분히 만족시키고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목만 아니라 천국에 영원한 기업(基業)을 매수하였느니라.”(8장 5조)193)
3. 속죄론의 불필요성에 대한 비판
비록 박형룡은 속죄론의 불필요성에 대한 아홉 가지 항목으로 기술하여 비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중복된 기술을 피하여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종합하여 기술하기로 한다.
속죄가 전혀 필요치 않는 이유는 죄는 죄책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속죄가 요구되지 않으며, 사랑의 하나님 안에는 사죄(赦罪)를 방해(妨害)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조차도 회개하는 자에게 만족의 요구를 하지 않고도 회개하는 자를 용서할 수 있다면, 하물며 인간에게 완전한 모범이 되시는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만족의 요구 없이도 인간을 능히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형룡에 의하면, 위의 견해에 반대하여 성경은 죄책(罪責)을 가르치고 있으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안에 사랑과 공의가 서로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194)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한 자신의 진노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전(移轉)하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죄인의 형벌을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전하였다는 것은 “비법적(非法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하여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형벌이 그리스도에게 이전되는 것은 비합법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합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과 연합하여 자신을 그의 백성과 동일시 하셨기 때문이다.195)
율법에 상응하는 형벌은 통회(痛悔)와 영사(永死)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죽지 않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형벌은 형벌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하여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神人)이시기 때문에, 죄악을 포함하는 영적 죽음이나 무궁한 고초를 의미하는 영사(永死)에까지 가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신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일시적 수난은 만민의 죄과와 법적으로 충분한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196)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행위는 자신을 위하여 순종적 생활을 당연히 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행위는 구속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하여 박형룡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만이 하나님 앞에 청구권(請求權)을 구성하여 죄인들의 구속을 위한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셨을지라도, 신성(神性)을 가지셨기 때문에, 율법에 근거한 행위언약에 굴복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제2의 아담으로서 제1의 아담의 자리를 취하셨던 것이다. 제1아담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그가 하나님께 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지만, 제2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명령하신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의 청구권을 주장할 수가 있었다.197)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주장할 경우, “유신앙론(唯信仰論)”, 즉 “신앙유일주의”(fideism)에 빠져, 그리스도인의 선행과 윤리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이신칭의 교리는 윤리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칭의”에 반대하여 “신앙에 의한 칭의”를 주장하였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참 신앙의 열매로서의 선행도 강조했던 것이다. 박형룡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무시하지 않는 “이신칭의론”과,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무시하는 경향을 가진 “신앙유일주의”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198)
복음서나 성경 속에 속죄론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박형룡은 복음서(요1:29; 요3:16; 마20:28; 요10:11; 요15:13)나 심지어 “속죄”라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 조차 “하나님의 어린양”, “대속물”, “유월절 양”이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성취하셨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성경이 가르치는 속죄에서 박형룡은 부스웰(J.Oliver Buswell)의 다음의 말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신앙을 강조한다. “어느 속죄론이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된 대로의 그의 거룩한 성질의 정식적(正式的) 논리적옹호(論理的擁護)를 제외하는 이론은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신앙을 통한 구원의 복음의 전도를 무가치하게 만든 것이다.”199)
4. 속죄론의 다양한 이론들
속죄론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성경 전체에 근거하여 올바르게 알고 믿을 것을 박형룡은 역설한다. “인생의 제한된 지적 이해력과 영적통찰력(靈的洞察)으로 속죄 진리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함에는 믿지 못하는 바가 너무 많다.”200) 그는 크게 세 가지, 즉 고대교부들의 속죄론, 주관적 속죄론, 객관적 속죄론을 나누어서 기술한다.
⑴ 초대교부들의 속죄론
① 배상설(The Ransom Theory)
박형룡은 고대교부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한 “배상설”을 “사단 배상설(賠償說))”이라 칭한다. 오리게네스(Origenes)는 그리스도께서 “송아지 머리에 그의 손을 얹으셨다. 곧 그는 자기 자신의 머리에 인류의 죄를 얹으셨으니 대개 그는 신체인 교회의 머리이신 때문이다.”라고 말했다.(“Homil. ad Levit” I)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성육신하신 로고스λὀγος의 죽음은 사람의 죄와 사망의 사망을 위한 배상이다.”(“Contra Arianos”)201)
안셀름 이전(以前)에 위와 같은 속죄에 대한 개념 이외에 소위 “사단 배상설”이 지배적이었다. 저스틴(Justine, 185-254)이 최초로 이 주장을 했고, 오리게네스와 이레네우스(Irenaeus, ?-200)가 이 견해를 특별히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을 위한 “배상”으로 “사단”에게 헌납한 결과, 사단은 정복의 권세를 가지고 그 백성을 잡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이론은 사단이 사람에 대하여 소유한 정당한 청구권을 없애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단에게 보상한 속전(贖錢) 또는 “속가(贖價)”였다는 개념에 기초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배상(賠償)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석방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보다 강하심으로써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이 이론이 내세우는 성경적 근거는 골로새서 2장 15절과 히브리서 2장 14절 등이다.202)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사단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배상계획에 속아 넘어간 것은 사단이 거룩하신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이 불가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손에 보유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닛사 그레고리우스는 “하나님은 사단으로부터 그와의 조치(措置)에 불공평하다는 불평의 근거를 전부 제거하려 하셨다.”는 것이다.203)
대표적 교부들은 “천박(淺薄)하고 학문적이 아닌 방식”으로 속죄론을 전개했다고 고대교부들의 속죄론을204) 평가한 박형룡은 “사단 배상설”은 “매우 그릇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속물은 사단에게 준 바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림 바 된 것이며, 청산이 요구되는 부채(負債)는 하나님의 공의에 기인한 것이요, 사단은 죄인에 대한 법적 청구권을 가지지 못했는데, 죄인의 해방을 위하여 보상을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205) 박형룡은 안셀름, 쉐드(Shedd), 찰스 핫지(C. Hodge), 워필드(B.B. Warfield) 등의 주장을 인용하여 배상설을 비판한다.
안셀름(San Anselm, 1033/34-1109)은 그의 유명한 저서『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에서, 그리스도가 사단에게 배상을 주셨다고 하는 이론은 궤변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마귀에게 형벌 밖에 아무것도 빚지지 아니 하셨다. …… 무엇이든지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에게 빚진 것이요 마귀에게 빚진 것이 아니었다.”206)라고 말한다. 사단 배상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사단에게 준 배상으로 기술하고 있다. 쉐드(Shedd)는 “하나님의 긍휼은 사람을 하나님의 공의로부터 속량한다.”207)라고 말했다.
② 요점 재현설(Recapitulation Theory)
배상설을 주장한 이레네우스는 “요점 재현설”을 주장한 바, 이 속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에 인생생활의 모든 계단(階段)들을 요점 재현하시되 죄인으로서의 우리의 상태에 속하는 계단들까지 포함하셨다.”고 한다.208)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시작으로 인간이 겪는 일상생활에 의하여, 아담이 시작한 죄된 삶의 모든 진행과정을 바꾸시고, 인류의 생활에 새 누룩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자들에게 불멸성을 주시고, 그들의 삶의 윤리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시며, 자기의 순종으로 아담의 불순종을 보상하셨다는 것이다.209)
⑵ 주관적 속죄설
박형룡은 주관적 속죄설을 다섯 가지, 즉 도덕감화설(道德感化說, Moral Influence Theory), 모범설(模範說, The Example Theory), 신비설(神秘說), 동일시설(同一視說), 패괴점차근절설(敗壞漸次根絶說, Theory of Gradually Extirpated Depravity)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주관적 속죄설이 대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객관적 속죄설은 대체로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① 도덕적 감화설
소위 “신애설(神愛說)”로도 불리는 도덕감화설은 오리게네스에게 그 싹이 보이지만,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가 최초로 분명하게 주장하였고, 영(Young), 모리스(Maurice), 라버트슨(F.W. Rabertson), 칼러리쥐(Caleridge), 부쉬넬(Bushnell), 뉴톤 클라크(W. Newton Clarke), 스티븐스(Stevens), 스미쓰(David Smith), 슐라이에르마허(F.D. Schleiermacher), 리츨(Ritschl) 등은 이 학설의 지지자들이다.
박형룡에 의하면, 이 이론의 근본적 관념은 “그리스도는 자아희생의 사랑으로 죄인을 감동하여 회개시키시는 구주라는 것, 하나님의 성질에는 죄인편의 만족을 요하는 원리가 없다는 것,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를 위한 보속(補贖)으로 보지 말 것”이라는 점이다.210) 가령 칼러리쥐는 한 과부의 탕자는 그의 친구의 사랑에 감동하여 집에 돌아왔기 때문에, 공의에 의한 보속(補贖)이나 만족(滿足)의 개념은 여기서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라버트슨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게 노하셨다.”고 말하지 말라고 주장함으로써, 속죄론에서 하나님의 진노나 공의의 개념을 철저하게 부정한다.
도덕감화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보속적(補贖的祭物)이 아니시며 사람의 대용이 아니시며 형벌을 보상하신 것이 아니며 공의에 만족을 행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오직 선생이며 모범(模範)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나심이다. 그는 그의 죽음으로써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生)으로써 구원하신다. 그는 사람의 마음에 도덕적 효과를 산출하신다.”211)고 박형룡은 주장한다. 박형룡은 이 속죄설을 “신신학(新神學)”이라는 체계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다음 몇 가지 근거를 내세워 이 이론을 비판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사역이기 때문에, 그의 수난은 유화적(宥和的), 형벌적(刑罰的) 수난이다. 여기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나고, 그 사랑이 죄인에게도 도덕적 감화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도덕적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의 부산물이 되는 셈이라는 것이다.212)
둘째,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계시는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보혈을 통해서 속죄의 효과를 나타내고, 그의 죽음에 기초하여 과거 범죄들의 죄책이 제거되고, 죄가 용서되며, “칭의는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고함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을 위한 동정적(同情的) 죽음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용서(容恕)는 만족을 드리지 못하고, 죄인이 그리스도의 동정에 감동되어 회개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은 성경을 왜곡한 결과이므로 박형룡은 도덕감화설을 비판한다.213)
셋째, 도덕감화설에서는 가령 자선가, 리빙스톤, 나이팅게일 등이 남을 위하여 희생 적 사랑의 봉사를 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위한 대리적 수난 개념은 있지만, 신인(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는 수난 개념은 없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속죄를 행하셨기 때문에 대리적 희생(代理的犧牲)이었다.”214)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는 표현은 도덕감화설 입장에서 이해될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의 오해”이다.215)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라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죄인들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고 보는 형벌적 대속론의 관점에서만 가능한 것이다.”216)
다섯째, 어떤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필연적 수난”만이 죄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회개에 이르게 할 수가 있지만, “필연적”이지 않고, “요청되지” 않은 “자원적 수난”은 죄인에게 인상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도덕감화설은 잘못된 것이다.217)
여섯째, 도덕감화설은 “객관성(客觀性)없는 거짓 속죄론”218)이다. 이 이론은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전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속죄의 객관성을 모두 제거하여 참된 속죄를 멈추게 한다. 도덕감화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에게 감화를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과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경험 사이를 상호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일곱째, 박형룡은 대표적 도덕 감화설주의자들(L. W. Munhall, Horace Bushnell, Ritschl, Schleiermacher)이 자신이 평소에 주장하던 이론과 정반대되는 객관설적인 고백이나 자세를 가지고 임종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도덕감화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객관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219)
② 모범설(The example theory)
모범설은 “순교설(殉敎說)”로도 불리는데, 모범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가르치신 진리들을 위하여 순교한 “교사”로 간주한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되, 그의 죽음의 의미를 순교자의 죽음으로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신실성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사죄의 방법에 관한 진리들을 증명하심으로써, 구주의 자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박형룡은 이 같은 주장은 성경에 배치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교”가 아니라, “속상적” 죽음이라는 것이다. 렐리우스 소치누스(Lelius Socinus, 1525-1562)와 파우스투스 소치누스(Faustus Socinus, 1539-1604)는 종교개혁자들의 대리적 속죄론에 반대하여 모범설을 주장하였고, 유니테리안도 이 이론을 수용하였다.220) 소치누스에 의하면, “속상적” 교리는 이교적(異敎的)이며,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 유니테리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의 유일한 방법은 사람의 도덕적 상태의 개선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오로지 그의 진리와 의무에 대한 충성과 그의 인간적 모범을 통해 사람들에게 도덕적 감화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신앙과 순종의 방도를 영생얻는 방도로 제시(提示)하심으로 또는 자기의 생 (生)과 죽음에서 진정한 순종의 모범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 그와 유사한 생활에 나가게 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가 사람들을 구원하심은 오로지 그의 진리와 의무에 행한 충성의 인적 모 범(人的模範)이 사람들의 도덕적 개선(道德的改善)에 큰 감화력을 가지는 때이다.221)
박형룡에 의하면, 모범설은 “고대 이단들의 부흥과 혼합”이라고 주장한다.”222) 즉, 이 이론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고, 자연적 재능을 통한 인간의 자력구원을 주장한 고대 펠라기우스주의의 부흥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메시아적 하나님의 아들로 “수양(收養)”, 즉 입양되었다는 양자설(Adoptionism)의 부흥이며, 율법을 하나님의 전행적인 의지로 간주했던 스코투스의 주장의 부흥이며, 그리스도의 모범이 인간을 구원하는 효능이 있다고 주장한 일부 교부들의 주장의 부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은 이 이론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이다.223)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2의 하나님의 성질을 가진 인물 정도로 간주되어, 그의 신성이 부정되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의 형벌을 반드시 동반한다는 사상에 배치되며, 속죄는 사람들을 위하여 죄의 형벌을 대리적으로 지고, 대리적으로 받음으로써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는 사상을 부인하며, 그 결과 속죄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에서 찾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224)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순한 순교자의 죽음으로 간주할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단순한 순교자 이상의 고뇌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는 고통과 고뇌인 것이다. 모범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보다는 그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생애를 강조하고 있는데, 신약성경은 그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 제서(諸書)에 그리스도의 생애의 3년만을 기술하고 그 생애의 종말 광경(光景)에의 묘사에 우위(優位)를 준 것은 그의 생활보다도 죽음이 그의 큰 사역이었다는 증거라는 사실에 자주 주의를 촉(促)하였다.”225)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의 감화가 그의 죽음의 주요 결과라는 사상은 성경과 배치되는 사상이다.226) 성경에서(계12:11; 벧전2:21-24) 십자가가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이유는 십자가가 사람들의 죄에 대한 만족(satisfaction)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227)
박형룡이 모범설을 반대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모범설로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구약시대의 성도들이나 영아들의 구원을 얻는 방법을 설명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228)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활과 수난만이 그 모범적 성격으로 사람을 구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구약성도들과 영아들로서 죽은 자들은 구속의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그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성화의 과정을 걸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범설의 경우,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는 비기독교인들이 곧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229)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가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모범설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실망의 사신(使信)”, 즉 절망적이며, 슬픈 메시지가 된다.230) 왜냐하면 “타락이후에 아무도 사람만으로는 금생(今生)에 하나님의 계명(誡命)들을 완전히 지키기 불능하고 오직 날마다 생각, 말, 행위로 그것들을 범”231)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기록같이 “영웅적 행위의 자극을 위한 기록”이 아니다.232) 비록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영웅적이며 자극적인 죽음으로 간주될 수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였을지라도,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 그의 제자들도 구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소크라테스와 같은 영웅적 죽음과 전적으로 다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신 “대속적 죽음”이라는 점이다.233)
③ 신비설(The Mystical Theory)
박형룡은 벌콥의 말을 인용하여 신비설을 정의한다. 신비설은 속죄를 오직 인간에게만 영향을 주어 인간 안에서 변화를 초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점에서 도덕 감화설과 일치한다. 그러나 인간 속에 일어난 변화를 일차적으로 의식적 생활의 도덕적 변화가 아니라, 신비적으로 잠재의식적 생활 속에 일어난 보다 심오한 변화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신비설은 도덕 감화설과 차이를 보인다. 신비설의 기본 원리는 성육신 사건 당시 신적 생명이 인성을 신성의 수준에까지 고양시키기 위해 인적 생명 속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태어나실 때부터 부패성과 도덕적 죄악으로의 성향을 지닌 인성을 소유하셨지만, 성령의 감화로 이 같은 부패성이 실제 범죄로 나타나지 않도록 보호되었고, 점진적으로 인성을 순화시켰으며, 사망 시에 이 같은 본래적 타락성을 완전히 근절시켜 이를 하나님과 재결합시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생활에 변화시키는 누룩으로 들어오셨고, 그 결과 빚어진 변화가 구속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세부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슐라이에르마허, 어빙(Edward Irving), 멘켄(Menken), 스티어(Stier) 등이 이 학설의 지지자들이다.234)
신비설은 주관적 이론의 성격을 가지는 바, 속죄의 객관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리스도께서 대리적으로 형벌 받으심으로써 신적 공의를 만족시켜, 신적 진노를 유화(宥和)하고, 죄의 용서를 가져온다는 내용과는 전연 다르다.235) 이 이론은 “성육신에 있어서 신적 생명이 인적 생명에 들어가 후자를 전자의 수준에 들어 올리려하였다.”236) 박형룡은 신비설을 몇 가지 관점에서 비판한다. 첫째, 신비설은 범신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 경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유비(analgia entis)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유신론 사상에는 사람과 하나님의 사이에 아무리 친밀한 영교(靈交)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식(意識)은 판연히 하나님의 의식일 것이요 사람의 의식은 판연히 사람의 의식(意識)이니 두 가지가 어떻게 본질적으로 융합하여 하나가 될는지 상상할 수 없다.”237)
둘째, 신비설은 죄론에서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신비설은 죄를 우주의 자연 질서와 연결시키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 셋째, 신비설은 구원론에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사람의 오염이 제거되기 위하여, 그의 죄책의 제거를 요구하지만, 신비설은 죄의 오염의 제거에만 관심을 갖는다. 넷째, 신비설은 기독론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신비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죄한 자로 보지 않고, 유죄한 자로 본다.238) 다섯째, 신비설을 받아들일 경우, 구약시대의 신자들의 구원의 문제가 불투명해진다.239)
④ 동일시설(同一視說, Theory of Identification)
박형룡에 의하면, 성경적 동일시는 우리의 대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대용적 수난”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트롱(A. H. Strong)이나 플라톤적 동일시주의자들은 “대용적 속죄” 대신에 “대표적 원리”에 입각하여 속죄론을 주장한다.
“그의 견해들은 문자적으로 진화론적 범신론(進化論的汎神論)이다.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활기 (Vitality)시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류로 더불어 이 동일시의 관계를 가짐으로 인류의 죄를 위 하여 책임이 있다고 반복선언(反復宣言)되었다. 이것이 인격적 의미로 선언되지 않고 보편적 총칭 적 의미(Generic sense)로 선언되니 명확히 범신론적이다.”240)
“동일시는 수적 동일시(數的同一視)의 문자적 범신론적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야 곱․뻬메(Jacob Boehm) 같은 신비가는 말하기를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된다. 나 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나는 하나님으로 된다」하였다. 저들은 범신론적 신비주의(汎神論的神 秘主義)의 정서(情緖)들의 얼마를 가진 모양이다. 신플래토주의가 어떤 때에 저들의 감정에 임재 한다.”241)
⑤ 패괴점차 근절설(敗壞漸次根絶設, Theory of Gradually Extirpated Depravity)
박형룡에 의하면, 어빙(Edward Irving)이 주장하는 패괴점차근절설이란 그리스도가 타락이후에 아담안에 있는 것과 같은 죄성을 취하셔서 더럽혀지고 악한 성품을 소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본래적 죄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노력과 수난을 통하여 점차 정화(淨化)하시어 그의 죽음을 통해서 죄를 근절하고 하나님께 연합하셨다고 주장한다.242) 멘켄(Menken)과 디펠(Dippel)도 이 이론을 주장했다.
박형룡은 이 이론을 몇 가지로 비판한다.243)
첫째, 이 이론 속에 “객관적 속죄의 부정”이 나타난다.244) 주관적 적용을 가능케 하는 객관적 속죄를 부정함에서 오류를 범한다. 어빙은 “신약경륜(新約經綸)은 끝나고 구약경륜(舊約經綸)은 남아있음이 가하다.”라고 주장하는데,245) 이것은 성례중시주의(聖禮重視主義) 곧 내적 은혜보다도 외적 의식(儀式)을 구원에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둘째, 이 이론은 죄에 대한 “그릇된 원리들에 의지”246)한다. “율법은 우주의 자연적 질서와 동일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지와 성질의 개진적 표현(皆盡的表現)”이며, 죄는 다만 영혼 안에 도덕적 고통과 악의 세력이요 객관적 죄책과 형벌 받을 공과(功過)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 형벌은 위법자에게 대항하는 율법의 반응이요, 죄에 대항하는 인격적 진노의 계시가 아니라는 것, 인성의 고통과 악한 오점(汚點)은 그것의 자연적 결국들을 경험함으로 능히 제거될 수 있다는 것, 형벌은 이 방식으로 위법자를 개선한다는 것이다.247)
셋째, 이 이론은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본다.”248) 즉 그리스도가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자신의 죄와 악으로 인한 것이며, 육체는 우리와 같은 반역으로 타락했고, 그의 인성은 전적으로 우리와 같이 죄인이며, 십자가에서 자신을 구원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하여 박형룡은 철저히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한다.
넷째, 이 이론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의 인성의 주관적 정화를 그의 사역의 주요부분으로 삼는데 반해, 박형룡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형벌의 피동적 부담(被動的負擔)을 더 많이 말하며 그는 전적으로 순결하지만 죄책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자로 제시한다.249) 다섯째, 이 이론에서는 “하나님의 거룩은 자연의 질서를 통해서만 표현되는 것이니 범신론”250)적이라고 박형룡은 말한다.
⑶ 객관적 속죄설
속죄의 객관설에 대하여 미리 언급한 바 있어서 본장에서는 안셀름의 만족설, 그로티우스(Grotius)의 통치설, 어빙의 대신 회개설, 변사설을 고찰하고, 형벌 대속설의 우월성을 논하기로 한다.251)
① 만족설(Satisfaction Theory)
만족설은 안셀름(Anselmus)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그는 그의 저서『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에서 속죄의 교리를 논의했다. 즉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에게 당연히 드릴 영광(honor)을 드리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침해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dishonor)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찬탈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형벌이 뒤따르거나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의 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천사를 비롯하여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께 “만족”(satisfaction)을 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밖에는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없다. 결국 성육신 하신 하나님, 즉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속죄물이 되셨다.252)
박형룡은 만족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이 설은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속죄의 필연성을 공의에 근거시키기보다는 회복을 요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에 근거시킨다.
둘째, 이 이론에서는 그리스도가 수난으로 죄의 형벌을 대리적으로 담당하셨다는 관념이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만 성부의 존영을 위하여 자원적으로 드릴 헌물(獻物)뿐이다.”253)
셋째, 이 이론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속을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에 집중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서 능동적인 순종의 측면을 간과했다.
넷째, “상거래설”(Commercial Theory)로 불리는 이 설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전달의 내면적 근거를 명백하게 진술하지 않고, 속죄사역의 과정이 인격적이지 않으며 상거래적으로 보인다.254)
② 정치설 또는 통치설(Governmental Theory)
네덜란드 법학자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가 정치설을 창시했다. “이것이 도덕적 우주의 정치주(Governor)로서의 하나님의 성격에 치중하여 그의 본체적 실유에서의 거룩한 성질을 거의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그의 거룩한 성질과 그의 창조에 대한 그의 근본적 관계(根本的關契)의 표현으로 보다도 우주적 공적 사건들의 형식적 기구(機構)로 간주된다.”255)
그로티우스는 “성부의 이 행위는 율법에 관한 한 관대(reloxation)이나 죄인에 관한 한 특사(remission)다.”라고 말함으로 우주의 통치자로서 그의 도덕적 정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율법의 불가침성(不可侵性)과 죄에 대한 자기의 거룩한 불쾌를 계시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고 주장한다.256) 즉, 무차별적인 용서는 범법(犯法)을 격려하게 될 것임으로 정치적 공정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인의 용서에 조건을 붙여 죄인과 하나님 자신에게 관계를 가진 희생의 수난으로 죄는 벌 없이 너그럽게 용서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257)
박형룡은 정치설의 그릇된 이의(異議)를 제기한다. 첫째, 이 이론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무시하는 그릇된 원리에 의존한다.”258)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의 표현이 변경되기 쉬운 율법은 영구한 권위 없는 율법이요, 공의의 만족이 없는 형벌은 진정한 형벌일 수 없다.259) 둘째, 그리스도의 형벌은 신적 정치의 이권을 보장함이라고 하는 데, 이것은 잘못이라고 이의(異議)를 제기한다. 즉 형벌의 목적인 정치의 안전을 보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유익한 효과가 미치게 하려고 어떤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형벌은 죄 있는 사람이 받아야 하는데 무죄한 사람이 형벌을 받는 것은 사회에 불안과 불편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260)
셋째, 이 이론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신적공의의 표현임을 알지 못한다. 즉 율법과 형벌, 사람의 양심과 그것의 형벌을 위한 요구는 하나님의 내재적 공의의 유한한 반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실질적으로 부정한다.261)
넷째, 이 이론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율법의 집행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존중에 대한 전시로 만든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벌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가 신적 공의를 만족시킴도 아니요 죄인의 형벌을 대신 받음도 아닌 허위의 형벌을 죄의 경고의 목적으로 받으셨다면 그 일이 죄인에게 경고하는 효능을 기대하기 어렵다.262)
다섯째, 이 이론은 하나님을 불신실한자로 묘사한다. 그는 본래 사람을 위협하여 그 범죄를 방지하려 하셨으나 그 위협적 선고(威脅的 宣告)를 집행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그리스도에게 형벌을 베푸는 것으로 위협적 선고를 재발하셨다.263)
여섯째, 십자가 위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수난의 처참한 모습은 속죄가 하나님의 자기 정치에 대한 존중의 전시뿐이었다는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불가능하다. 즉 그리스도가 인생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셨다고 설명해야 한다.
일곱째, 이 이론은 성경의 교훈을 외면하고 우주의 도덕적 이권(利權)의 옹호라고 주장하므로 성경에 배치된다.264) 즉,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하나님의 공의의 필연적 계시이며, 율법을 범한 죄의 형벌의 집행이다. 속죄는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시키는 제사이며, 죄인 구원의 공로적 원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으며, 현실적으로 구원을 조성하셨으며,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③ 대리 회개설(Theory of vicarious Repentance)
대리 회개설은 주로 캠벨(J. Campbell, 1800-1872)과 모벌리(R.C. Mobely)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대리 회개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통회(痛悔)하셨으며, 죄를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리 회개설은 대리적 통회라는 관점에서 하나님과 관계된 객관적, 대리적 속죄를 주관화 내지 도덕화한 시도이다.265)
“만일 사람이 상당한 통회의 재량을 가지기만 하였다면(그는 이를 가지지 못하였다) 완전 한 통회가 속죄로 이용될 수 있었다는 무리한 추상 위에 진행한다. 그런데 성육신(成肉身)하신 그리스도는 능히 죄에 관하여 인류와 동료감(同僚感)을 가지시고 인류를 위하여 필요한 통회를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사죄의 조건을 성취하셨다.”266)
박형룡은 대리 회개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제외하고 모든 시험과 우리의 연약함에 참여하셨을지라도, 그는 도덕적으로 자신을 우리와 동일화하시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무죄한 인간이며, 그의 생애에서 죄를 알지 못하셨기 때문이다.267) 둘째, 이 이론은 하나님의 응보적 공의(應報的公義)와 죄의 가증(加增)함을 인정하면서도, 형벌적 대속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부인했다.268) 셋째, 죄의 필연적인 결과로 형벌을 불러오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은 사실상 필연적 속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도덕 감화설이나 모범설의 원리와 대동소이하다.269) 넷째, 죄의 고백이란 전적으로 주관적인 일이기 때문에, 이 이론은 언어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270) 다섯째, 이 이론은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죽음으로 성부의 죄의 저주에 동정적으로 참여하신 것이 죄의 고백으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회의 완전한 고백으로 간주되었다.271) 그러나 박형룡은 성부의 죄의 저주에 동정적 참여나 우리의 죄와 죄책에 동정적 참여가 어떻게 완전한 통회로 간주되며 우리의 불완전한 통회의 대용이 되는 것은 범신론적이라고 비판한다.272)
④ 변사설(Accidental Theory)
변사설(變死說)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또한 사람들을 위해서 살해된 것은 불행이며, 그러므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청년혁명가로서 실패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273) 이 이론에 대하여 박형룡은 성서주석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우발적인 변사가 아니라(시22, 사53, 슥11장), 구약에서 예언된 사실이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마16:21-23, 17:22-23, 20:17-19, 막9:30-32, 눅9:44-45, 22:19-23, 요16:32-34, 13:20)274)
⑤ 형벌대속설(Vicarious atonement theory or substitutionary atonement theory
박형룡은 다양한 속죄설을 소개하고, 비판한 뒤에, 각 속죄설은 얼마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 후에,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형벌대속설”이 제 속죄설 중에 가장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초대교부의 사단배상설은 죄인을 사단의 세력에서 구출하는 것이며, 도덕적 이론들과 신비설은 개인의 생활에 선한 주관적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안셀름의 만족설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만족시키는 것이며, 정치설은 하나님의 도덕적 정치를 유지하는 것이고, 대리 회개설은 하나님의 죄의 저주에 동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속죄로 지적함으로 특별한 장점을 가진 것이다.275)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속죄는 하나님의 공의 혹은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케 했다. 하나님의 응보적 공의(應報的公議)로 인하여 죄인들이 반드시 받게 된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피흘림으로 대신 받으셨다. 여기서 범죄에 대하여 형벌을 반드시 시행하심은 신적 공의를 만족케 함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의 대신 벌 받으심은 신적 사랑의 만족을 행함이다. 이 견해는 만족론(satisfaction theory)과 깊은 관계가 있고, 형벌대속설, 즉 “대리적 속죄론”(Vicarious atonement theory or substitutionary atonement theory)이다.276) 박형룡은 형벌대속설에 속죄의 객관성, 구속성, 대리성, 순종성, 완전성을 성경에 계시된 속죄의 성질을 가장 잘 나타났다고 평가한다.277)
5. 속죄의 한계
박형룡은 속죄의 범위를 중심으로 논쟁이 있어왔음을 지적하고, 자신은 성경의 교훈과 일반 경험적 관찰에 비추어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제한속죄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영원부터 선택과 유기를 정하시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다고 믿는 반면, 아르미니안주의는 제한 속죄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사명과 사역은 모든 인류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보편속죄론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박형룡에 의하면, 속죄의 한계는 하나님의 뜻대로 주권적으로 자유롭게 정하신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의 제사(祭祀)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객관적으로 충분하고, 하나님의 권능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에 능력이 있을지라도, 제한적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폭적인 뜻이다.278)
⑴ 제한속죄의 타당성
박형룡은 제한속죄의 타당성의 소극적인 이유를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과의 충족성(充足性) 여부가 제한 속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만족은 그 자체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적용의 적당성(applicability) 여부가 제한 속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만족의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될 만한 의로운 인간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현실적 적용 여부가 제한 속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르미니안파 조차도 대다수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복음전파의 신실한 제공의 여부가 제한 속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실하게 전파된 복음을 듣는 모든 자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열매의 이용 여부가 제한 속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구속의 열매를 받아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79)
① 제한 속죄설
㉠ 개혁파의 주장
개혁파처럼 형벌대속설을 주장하는 루터파는 속죄의 의도된 한계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모든 인류와 관계시킴으로써, 개혁파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피택자들게만 특별히 관설을 가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개혁파의 독특한 교지(敎旨)이다. 개혁파의 교지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택하신 백성만을 현실적으로 또는 확실히 구원하려는 기도를 가지고 죽으셨다함이다.”280)
개혁파에서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현실적으로 확실히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죽으셨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자기의 구속 사역의 효과를 현실적으로 적용하셨다는 주장이다. 칼빈은 요일2:2절을 주석하며, 어거스틴주의적 스콜라학자들의 양식을 따라서 “그리스도는 충족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나 효과적으로 피택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였다.281)
㉡ 개혁파의 주장에 대한 수정의 시도들
비록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구원이 가능할 목적으로 죽으셨다고 네덜란드 아르미니안파는 주장하였다. 구원이 아담에게 보다 낮은 조건 아래 제출된 바,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부여되는 “보통 은혜”의 효력에 응답하는 신앙과 복음적 순종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이다.282)
개혁파의 제한속죄설과 아르미니안파의 주장을 통합한 주장, 다시 말하면 “가설적 또는 조건적 보편구원설”을 주장한 “칼빈주의 보편적 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의 이중예정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다.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조건 하에 그의 속죄적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구원을 확실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목적이 실패된 것을 아신 하나님은 첫 번째 작정(제일 작정) 후에 제이 작정을 하셨다는 것이다. 선택된 일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어 그들을 신앙으로 인도하여 그들의 구원이 실패 없이 확실케 하려고 작정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상당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는데(Saumer, Cameron, Amyraldu, Testardus, Wardlaw, John Brown, James Richards, Baxter, Emmons, Taylor, Beman 등), 박형룡은 이 주장을 애매하고도 만족스럽지 못한 주장이라고 비판한다.283)
② 제한 속죄설의 증명
박형룡은 제한속제설의 타당성을 열 가지 관점에서 증명한다.
첫째,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예외 없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인간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만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기 때문에, 선택된 자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 당연한 추론의 결과이다.
둘째,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의 만족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제한속죄설은 성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것을 박형룡은 “선택교리에의 조응성(照應性)”(consistency)이라고 명명했다. “선택의 교리와 그들만을 위한 만족의 교리는 나눌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284)
셋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모두 구원받지 못할 경우, 하나님 자신이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제한속죄설은 하나님의 예지교리에 일치한다. 이것을 박형룡은 “조응성”(consistency)이라고 부른다.285)
넷째, 만약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만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죄에 버려두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혜택은 당연히 선택된 자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분명하다.286)
다섯째,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보편적이었으나, 그의 속죄의 적용은 특수하며, 하나님께서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케 하셨으나, 오직 제한된 수만이 현실적으로 구원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형룡은 성경주석을 토대로(롬5:10; 고후5:21; 갈1:4; 갈3:13; 엡1:7)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한 구원의 매수와 그것의 현실적 실시 사이에 가히 나눌 수 없는 연락”이 있음을 주장한다.287) 박형룡의 주장 속에서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과 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사이에 존재하는 통일성이 발견된다.
여섯째,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은 구원을 사람의 신앙과 순종에 의하여 우발적이 되게 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계획은 조건적 계획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반대하여 박형룡은 성경주석을 근거로(롬2:4; 고전1:30; 갈1:13-14; 엡1:3-4; 엡2:8; 빌1:28; 딤후2:25; 딛2:14; 딛3:5-6) 구원을 얻는 과정의 필요조건인 신앙, 회개, 성령의 감화는 사람의 의지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계획에 포함된 하나님의 “은사물(恩賜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에게 구원의 조건에 필요한 이 같은 은사물을 수여하시는 것이다.288)
일곱째,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사역, 즉 “제사적 사역(祭祀的事役)”과 중보자직의 사역, 즉 “중재 대언적 사역” 상호간에 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박형룡은 성경주석을 근거로(요17:9)로 주장한다. 만약 이 두 사역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모순이 발생할 것이다.289)
여덟째,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할 경우,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보편적 구원설”로 인도하기 때문에 제한 속죄설이 타당하다는 것이다.290)
박형룡이 제한 속죄설을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요10:26; 골1:24; 롬8:21; 롬8:33; 마1:21; 요10:15; 행20:28; 롬8:31-39)291)
③ 제한 속죄설에 대한 반대 이유들
박형룡은 제한 속죄설에 대한 다양한 반대설들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한다.
제한 속죄설에 대한 첫 번째 반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을 위한 죽음(요1:29, 3:16, 요일2:2, 4:14)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관건은 ‘세상’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이다. 제한 속죄설을 반대하는 자들은 ‘세상’을 항상 “모든 인류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로 이해한다. 박형룡에 의하면, ‘세상’은 다양한 뜻으로(눅2:1; 요1:10; 행11:28; 행19:27; 행24:5; 롬1:8; 골1:6) 사용된다. ‘세상’이라는 말이 사람들에 관하여 사용될 때조차도,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이 보편적 속죄를 지지하는 본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상 요한일서 2장 2절의 “온 세상의 죄”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의 혜택의 범위가 세계의 모든 민족들에게 미쳐서 그 범위가 넓은 것을 뜻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의 배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이다.292)
제한 속죄설에 대한 두 번째 반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롬5:18, 고전15:22, 고후5:14, 딤전2:4-6, 딛2:11, 히 2:9, 벧후3:9) 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모든”(all)이라는 말은 때로는 제한된 의미를 가지면서 한 특수 계층의 전체 숫자를 가리키기도 하고(고전15:22; 롬5:18), 여러 종류의 계층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딛2:11) 다시 말하면, 고린도전서 15장 22절과 로마서 5장 18절에서 “모든” 또는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조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만을 포함함을 나타낸다. 디도서 2장 11절의 “모든 사람”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디모데전서 2장 4--6절과 히브리서 2장 9절의 “모든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함께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보편적 구원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293)
제한 속죄설에 대한 세 번째 반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들이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들의 멸망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은 가정적(假定的)인 본문과 경고의 본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294)
제한 속죄설에 대한 네 번째 반대이유로서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구원의 보편적 제시”, 즉 복음전파를 말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을 위하여 속죄하셨다면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도(傳道)하여 구원을 얻으라고 권면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하면서 제한속죄설을 반대하는 아르미니안주의자들에게 박형룡은 반대 이유 몇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구원의 보편적 제시”, 즉 복음전도는 신비한 구원계획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복음전도와 제한 속죄설은 상호 모순되지 않으며, 구원을 얻으라고 권면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임무이다.295) 둘째, 복음전도는 보편적이지만, 구원을 얻기 위하여 신앙과 회개가 전제된다. 더구나 신앙과 회개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령의 감화는 “우발적(偶發的)” 사건이므로, 보편적 형식을 취하면서도 하나님의 신실성을 해치지 않는다.296) 셋째,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복음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죄하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의도하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복음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자체가 모든 사람을 구속하기에 충족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서 신앙과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참 신앙과 회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는 확실한 약속의 말씀이다.297) 넷째,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교회를 통한 보편적 복음전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언적 의지(宣言的意志)”를 조화시키는 것은 전도자의 의무가 아니다. 비록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구원의지 사이에 모순이나 상충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복음전도자는 양자를 조화시켜서 상호간의 모순이나 상충을 제거할 의무가 없다. 다만 우리는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지를 받들어 수행하는 의무를 지닌 “공직적 사신(公職的使臣)”일 뿐이다.298)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보편적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에서 비롯되었다.299) 여섯째, 보편적 복음전파는 복음에 반항하는 자들의 증오심과 완악성을 폭로시키고, 그들에게 핑계거리를 빼앗기 위하여 사용된다.300)
제한 속죄설에 대한 다섯 번째 반대이유는 선택되지 않아서, 결국 믿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를 거부하는 것은 불신자 자신의 악한 성향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배척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정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그가 믿지 아니하여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그로 하여금 믿지 않게 하는 것은 그의 악한 성향(性向)이니 그 믿지 않음의 책임이 그 자신에 있는 것이다.”301)
⑵ 속죄의 효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목적은 선택된 자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 즉 하나님, 그리스도, 일반 인류, 천사세계 등 모든 피조물에게 일정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302)
속죄는 하나님과 구속의 대상들 사이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즉 하나님은 그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자들에게 화목되셨다. “죄인들에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의 죄를 제사로 가리움에 의하여 방지되고 그의 호의(好意)와 총애(寵愛)가 대입(代入)되었다.” “속죄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그의 의와 조응하는 그의 사랑의 시행을 활발하게 하셨다.”303)
속죄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영광을 포함하여 그에게 속하는 모든 영화를 가져오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상급으로 부여하시는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충만히 받게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에 대한 소유권과 세상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셨다.304)
박형룡은 일반 인류에 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에 대하여 몇 몇 학자의 견해를 통해 소개한다. 스코틀랜드교회에 의해서 정죄된 한 견해에 의하면, 모든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언약아래 유산을 받는 사람들인데, “그 은혜언약의 본질에서가 아니라 집행에서” 그렇다는 것이다.305) 몇 몇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하면,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지만, 그의 십자가의 다양한 혜택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미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반은총(common grace)의 혜택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결과로 간주한다. 찰스 핫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로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 위에 내려진 하나님의 율법의 형벌의 즉각적 집행이 정지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수많은 행복을 누리게 되었으며, 신앙과 회개를 조건으로 하는 사죄와 하나님과의 화목에 대한 기초가 놓였다는 것이다. 에이 에이 핫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로 모든 사람들이 “현세적 행복”을 섭리적으로 받는 것이 더욱 가능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306)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이 천사세계를 위해서도 의의(意義)를 가진다.(엡1:10, 골1:20) 까이뻐는 천사세계는 사단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 머리를 잃었다가 그리스도의 머리아래 재조직(再組織)되었다고 말한다. 이 일은 천사세계와 인류세계를 하나의 머리 아래 화합 또는 연합하였을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가 동일한 의미에서 이 두 세계의 머리는 아니다.307)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역의 최종결과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성되어 그곳에 의가 거하고 영화된 인류가 살기에 적당한 곳이 될 것이며, 낮은 피조물들도 그 영광스런 자유에 참여할 것이다.(롬8:19-21)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