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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거듭남)

[스크랩] “중생” - 안토니A.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중에서 (요약 발췌)

작성자한아름|작성시간12.08.14|조회수134 목록 댓글 0

 

중생(총신학점제 성령론6)
keeper77 | 조회 39 |추천 0 |2005.04.24. 17:48 http://cafe.daum.net/keeper77/B5TQ/35 

 

 

 

 “중생”

 - 안토니A.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중에서
 요약발췌


(요약)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한 사람'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들일 뿐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조에(ζωη)는 영적인 생명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말한다 - 이 생명은 영원히 계속되는 삶이다. 중생(거듭남)혹은 신생이라는 주제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이 하사하신 선물이다. 중생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구원의 과정의 첫 출발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성경은 세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요 3:3,5); (2)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 1:18; 벧전 1:23); (3)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마 19:28; KJV, ASV, NASB 참조). 마지막으로 언급된 구절에는 팔링게네시아(palingenesia)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위에서 언급된 영어 번역본에는 중생 혹은 거듭남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는 디도서 3:5에만 사용되고 있는데 온 우주가 새롭게 갱신되는 것을 칭하고 있다. 즉 베드로후서 3:13과 요한계시록 21:1 - 4에서 말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2. 인간 부패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중생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인간의 부패성에 관한 이해에 거의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말로 전적으로 철저하게 부패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몇몇 구절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예레미야 17:9에 의하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이것을 이해하리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철저하게 부패하였다는 신약성경의 가르침도 간과할 수 없다. 로마서 7:18에서 바울은 그의 중생치 못한 상태를 가리켜 고백하기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하였다. 그 다음 장에서 바울은 한층 더 생생하게 이 점을 묘사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나"(롬 8:7 - 8).


  단순히 영적으로 병들었거나 절반쯤 죽었다는 사상을 철저하게 배격하였던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너희는 죽었다"(엡 2:1). 그러나 몇 절 내려가서 다시 확신에 찬 어조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4 -5절)라고 선언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본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의 지도 아래 중생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역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3.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중생에 관해 성경은 무엇이라 가르치고 있는가? 이미 구약성경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으며 비로소 그때에야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중생 혹은 신생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 신약의 저자는 아무래도 사도 요한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요한복음 1:12 - 13을 보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분명하게 가르치는 성경은 요한복음 3장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께 찾아왔다. 니고데모의 말을 미루어 보건대, 그는 예수를 선생님이라 높이 존경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이해 부족이었다: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임을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행하신 표적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요 3: 2). 예수의 대답(3절)은 전체의 논의에 기조음처럼 들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다시 태어나다는 말은 "위로부터"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헬:gennethe anothen). "게네데"(gennethe)는 "출생하다"' "태어나다"라는 동사 "gennao"의 부정시제 수동형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번역본들이 두 번째 의미, "태어나다"로 번역하고 있다; 4절은 여기서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노덴"(anothen)은 문자적으로 "위로부터"라는 뜻인데, "다시"' "새롭게"라는 의미도 갖는다. 요한복음서에는 "anothen"이 3장에서만 세 번 사용되고 있다(3,7,31절); 19:11과 19:23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 세 번의 경우들에서의 의미는 의심할 여지없이 "위로부터"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3절과 7절의 예수의 말씀은 마땅히 "위로부터 태어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결론짓겠다. 그렇다면 본절이 제시하고 있는 사상은 사람은 마땅히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이 새로운 출생은 위로부터의 출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태어날 것을 결정하여 택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태어남은 우리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의 자연적 출생에서도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이처럼 영적 출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부사 "anothen"이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새로운 출생은 위로부터 난 것이며 땅으로부터 나는 보통의 출생과는 전혀 다른 하늘로부터의 출생이다. 이러한 신생에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의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생은 우리의 본성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다.

 

   "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나의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7절). 이 말씀은 종종 거듭나기 위하여서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지곤 한다. 그러나 예수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의 참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또한 들어가려면 사람들은 마땅히 위로부터(아노덴)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에 관해 바울은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바울의 글 중에서 "중생"(palingenesia)이란 단어가 꼭 한 번 나온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도다"(참고, 딛 3:5; RSV).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중생이란 죄로부터의 정결케 됨 뿐만 아니라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역사하여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지속되게 될 영적인 새로워짐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중생"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곳이 유일하게 이 곳이긴 하지만 중생을 언급하고 있는 곳은 많이 있다. 에베소서2:5에서 바울은 우리가 범죄함으로 죽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고 확인하고 있다. 에베소서 2:10과 고린도후서 5:17에서도 바울은 중생을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의 새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한 생명이다. 베드로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중생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 생명의 시작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게 하는 영광스런 전망대 역할을 하게 된다.

 

  요한일서 2:29에 보면 거듭난 사람은 옳은 일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이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3;9에는 거듭난 사람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한일서 4:7에는 한 번 거듭난 사람은 자기의 동료 신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게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일서 5:1은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믿음을 소유한 자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박하면서 사도요한은 믿음이란 거듭남의 외형적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일서 5:4에는 중생한 사람은 세상을 이긴다고 선언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요한은 요한일서 5:18에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호하심을 받기 때문에 결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ouch hamartanei; 현재형 동사)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한일서로부터 우리는 중생한 자가 다음과 같은 특성으로 옷입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특성이란 옳은 일을 행하며, 죄 가운데 계속적으로 살지 않으며, 동료 신자들을 사랑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으며, 계속적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들이다.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해서 정리해 보자: 중생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전적인 변화이며,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에 의해 역사되며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본성의 내면적 새로워짐을 말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일어난다. 중생에 있어서 인간은 수동적이고 하나님만이 일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구원론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배운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모든 찬양을 드리자!

 

 4. 중생의 본질

 

  중생은 매우 신비스럽다. 첫재로 그 정의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사람이 중생을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의 결과들을 관찰할 뿐이다.

 

  (1)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사도행전 16;14에는 루디아의 개종이 기록되고 있는데,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주께서 그녀의 마음 문을 여셨다"고 하였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분명히 중생을 가리킨다.

 

  (2)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이 중생은 외적인 가르침,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작은 하시되, 거듭나고 돌이키는 것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다.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역사이다.

 

  (3)중생은 근본적(radical)변화이다

 

   (a)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을 의미한다. 중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피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이다.
   (b)중생은 한 인격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화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은 전적 변화로서 한 인격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적 용어를 빌리자면, 중생은 새로운 마음을 부여받는 것이다. 성경에서 마음은 한 인격의 중심부이며, 모든 내적 기능의 중앙으로 정신적, 영적 경험들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c)중생은 의식 밑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중생시에 일어나는 변혁이 너무도 근본적이라서 우리라는 존재의 무의식의 뿌리로부터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에 있어서 인간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칼빈주의자들은 소위 "불가항력적 은혜"를 믿는다. 이 문구는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지칭하는 영어의 TULIP(튤립) 문자 중 네 번째 약어에 속한다: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용어는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담고 있다.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의 사용에 대해,

  헤르만 바빙크는 이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은 "너무도 강력하여서 결코 진화될 수 없으며, 너무도 강렬한 사랑이기에 모든 세력들을 물리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실상 거역될 수 있으나 세상의 창조 전부터 구원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헤를 거역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코넬리우스 플란팅가 박사가 이 점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끝가지 막아설 수가 없다. 아무도 그 분을 능가할 수 없다. 모든 선택받은 자들은 앞으로 나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인정하도록 되어 있다."

 

 6.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

 

  (1)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의 관계: 루이스 벌코프는 효력적 부르심은 좁은 의미의 중생을 뒤따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죤 머레이는 효력적 부르심이 중생을 선행한다고 주장하였다.

 

  (2)중생과 돌이킴과의 관계: 중생은 돌이킴에 이르게 된다(즉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다시 말해서 돌이킴은 중생이 일어났다는 외형적 증거라 할 수 있다. 루디아의 경우에서처럼, 중생과 돌이킴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신 후에야 비로소 사람은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수도꼭지를 틀면 수돗물이 나오는 것과 같다 할수 있다.

 

  (3)중생과 성화의 관계: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 두 가지는 동일하다. 앞으로 보겠지만, 성화는 단회적(definitive)이다. 단회적 성화는 한 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특정한 한 순간에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게 일으킴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죄없는 완전한 상태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죄의 영역과는 근본적으로 철저한 결별을 하여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성화가 이해되어질 경우 중생과 성화는 동일한 것이다.

 

  (4)중생과 세례와의 관계: 신약성경은 종종 세례를 새로운 영적생명과 관련을 맺고 있다. 로마서 6:3-4에서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례전에 관한 개혁주의의 입장은, "그것들이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룩한 증표요, 인들이며,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성례들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좀더 분명하게 복음의 약속을 이해하도록 하시며 그 약속 위에 그 분의 도장을 찍게 하시기 위함이다."

 

  세례는 우리의 중생에 대한 증표와 인이라 생각되어진다: "세례는 신약성경의 성례이다. 이 성례를 통해 세례는 세례받는 자에게 은혜의 언약, 또 그가 그리스도께 접붙임바 되었다는 사실, 중생했고,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 가운데 걷게 된다는 증표와 도장으로 주어진다. 세례는 중생의 축복들을 그려주고(증표로서의 기능) 확인해 준다(인으로서의 기능).

 

  유아시에 세례받은 자들에게 성례는 그들이 받은 세례가 의미하고 있는 것을 훗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얻게되는 축복들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유아세례에 대한 근거로서 세례 전 중생을 전제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자녀들은 세례받기 전에 이미 중생했고 그래서 그들의 세례는 이미 받은 것으로 추정된 은혜의 표식으로 그는 가르쳤다(see Smilde, Eeuw van Strijd, pp.107, 114, 116 -17)., 그러나 이런 견해는 대부분의 개혁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개혁신학의 일반적인 입장을 유아세례는 그들의 은혜언약의 일원이기 때문에 베풀어지는 것이다.

 

 7. 중생과 설교자

 

  중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며 결코 사람의 사역이 아니라면, 설교자는 중생에 관해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는가? 중생은 일반적으로 설교시나, 성경을 가르침받는 동안, 성경을 읽을 때 등에 일어난다. 사도행전 16:14에서 본 것처럼 루디아가 중생하게 된 것은 그가 바울의 복음 메시지를 듣고 있을 때였다. 야고보서 1:18을 보자: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apekyesen)우리로 그의 피조물 중에 첫열매가 되게 하심이라."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신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새생명의 부여)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생, 다시 말해서 돌이킴을 통해 나타나게 된 새생활의 첫 번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넓은 의미의 중생은 진리의 말씀, 성경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된다.

 

  넓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을 통한 설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돌트신경에는 복음을 가리켜 "중생의 씨앗"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철저하게 우리 안에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일으키시긴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영적 생명의 최초의 외적 표출은 말씀을 - 그것이 전파된 말씀이든, 가르쳐진 말씀이든, 읽혀진 말씀이든 상관없이 -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에도 예외는 있다. 유아시에 죽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 반응할 수 없었던 신자들의 유아들은 말씀을 떠나서도 중생을 받을 수 있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3항을 보라: "택함입은 유아가 죽었을 경우 그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으로 그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고 중생함을 받는다. 또한 말씀의 사역에 의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음에 응답할 처지가 못된 모든 택정함을 입은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Cf. Canons of Dort, I, 17을 보라

 

  중생에 관한 설교자의 의무는 무엇인가? 그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한 설교와 가르침은 필수적 요소이다: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중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청중들에게 복음을 믿고 죄로부터 회개하라고 외쳐야 하는 것이다.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질문,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 30 - 31)였다. 니고데모와 빌립보 간수가 복음의 메시지를 믿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중생을 통하여 새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중생의 결과들을 통하여 그들이 받은 중생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 사람에게 행하라고 어찌 요청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좋은 예가 예수께서 고치신 중풍병자의 경우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마 9:6)고 명하셨다. 예수는 그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셨다. 그가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힘까지 부여하셨다. 이처럼 설교자들도 하나님께서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복음에 반응하도록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청중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주시어 믿는 마음으로 전파된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설교자는 중생에 관한 성경의 온전한 가르침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잘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중생이란 새 생명(삶)을 의미한다. 거듭난 백성으로서 우리는 이제 빛 안에서 살고 행한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요 3:21).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는 자마다 "빛 가운데 걷나니 이는 그가 빛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라"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 가운데 한 부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았다(엡 2:10) "할레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음받은 자 뿐(새로운 창조)이로다" (갈 6:15). 우리가 현재 이렇다. 바울의 영광스런 트럼펫 소리를 들어보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라(new creation)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왔도다"(고후 5:17).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빛을 바라보게 하자. 이것이 바로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다. 물론 죄가 없는 완전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진정으로(genuinely) 새로워졌다. 물론 전적으로(totally)새로워진 것은 아직도 미래에 속하여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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