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란 무엇인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기독교 윤리의 특징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윤리는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제2장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때로부터 사람들은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원칙이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에는 과연 어떤 윤리적 대안들이 있는지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기독교 윤리의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우선 기독교 윤리가 가진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기독교 윤리가 여타의 윤리적 원칙들과 어떤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른지 그 출발점에 대한 이해가 선재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기독교 윤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독교 윤리가 가진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 윤리에 관해 논의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신본주의적이다
기독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의무는 인간의 어떠함에 기초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즉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언 1:8)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지으셨다는 사실은 윤리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이 사실은 인간이 누구인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준다. 그러므로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를 규정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인간 이해가 없이 기독교 윤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조물로서 인간의 바른 삶의 자세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자 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과 자신을 창조하셨음을 믿고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이다. 그것은 마치 자녀가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들의 뜻을 순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본주의적 윤리란 인간이 윤리적이어야 할 이유를 인간의 유익이나 인간 중심적 규율에서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피조물로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바른 도리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자체가 우리의 존재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존재자체가 불가능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 곧 호흡하고 사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신본주의적 윤리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바를 따르는 윤리이다. 신본주의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선지자, 그리고 신약의 베드로나 요한 같은 제자들은 직접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의 뜻을 물을 길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계시 중심적이다
기독교 윤리의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계시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천연계나 인간의 양심, 혹은 역사와 같은 일반 계시를 통해 알려주셨지만 인간이 타락한 후 이들만으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체적으로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특별 계시인 성경을 주심으로써 그분의 뜻을 보다 구체적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다름 아닌 성경이다. 기독교 윤리가 여타의 이론과 구별되는 점은 그것이 위대한 사상가의 이론이나 전통에 매이기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윤리의 신본주의는 불가피하게 계시의 내용인 성경 중심주의와 직결된다.
하지만 이 말이 성경 안에 모든 윤리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답이 제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성경엔 마약 문제나 유전공학의 윤리성, 트랜스젠더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없다. 비록 성경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원론적인 의미에서 우리 삶의 문제들에 대한 원리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명령하셨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셨다. 또한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 속성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도 요구하신다. 거짓말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히 6:18) 우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출 20:16).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요일 4:16) 우리도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마 22:39). 기독교 윤리는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지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책임은 단순히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 통해 우리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바른 뜻을 찾아내는 것까지 포함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자세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깨달아야 할 책임은 단지 지적 만족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윤리적 책임까지 깨달음으로써 그것을 우리 삶의 일부로 삼는데 있다. 즉 성경이 보여주는 윤리적인 원칙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올바른 태도이다.
절대적이다
기독교 윤리가 가진 세 번째 특징은 그것이 절대적이란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이 변함없는 것처럼(말 3:6; 약 1:17), 하나님의 도덕성에 뿌리를 둔 도덕적 명령 역시 절대적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윤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떤 명령은 그분의 속성과는 무관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담과 하와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지 선악과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문제 자체는 그분의 속성과 관련된 영원한 도덕법은 아니다.
하지만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창 9:6)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존재한 전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살인은 어느 시대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금지된 악한 행동으로서 살인금지 명령은 절대적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도덕적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은 생명을 억지로 빼앗는 살인행위를 금하셨다. 왜 이런 금지 규정이 인간 삶에 영원토록 구속력을 가진 도덕적 명령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하나님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창 1:27, 9:6). 생명과 존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의대로 하나님의 고유의 권한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서 나온 모든 것은 도덕적으로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살인 금지 규정을 단순히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에 대한 규범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살인금지 계명을 만약 생명을 뺏는 행위에 대한 금지로만 해석한다면, 실제로 성경에서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경우나 특정의 죄인들을 돌로 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에 대해 설명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부지중에 살인한 자들은 도피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고, 또 사형 집행은 율법이 공식적으로 명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인 금지 계명도 상대적인 계명이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생명을 다른 사람이 임의로 빼앗는다는 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로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가 곧 하나님의 존재와 비교되기 때문에 부지중에 행한 살인으로 또 다른 살인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옳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해 처형을 집행하는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윤리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긴 하지만, 신정(神政)체제 하에서 율법적으로 허용된 것이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에 의해 사형수로 판결 받은 사람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자 본분이라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도리다.
구약에 여러 법들이 있었는데, 제사법은 제사제도가 필요할 동안 유효했고, 민법은 이스라엘이 존속할 동안 필요했으며, 십계명 돌 판에 기록된 도덕법은 인간의 삶에 도덕이 필요한 한 영원토록 유효하며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진 법이다. 도덕법은 절대적인 법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가졌다.
의무론적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윤리 체계에는 두 범주, 곧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결과론적) 윤리가 있다. 이 두 범주 가운데 기독교 윤리는 의무론적 윤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로저 크룩같은 학자는 기독교 윤리를 목적론적인지 의무론적인지에 대해 확고한 입장 취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노르만 가이슬러를 포함한 대다수의 윤리학자들은 기독교 윤리를 의무론적인 것으로 분류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의무론적 윤리는 우리가 하는 윤리적 선택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된다고 본다. 기독교 윤리에서 이 원리를 적용할 경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선인데, 이것은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필요가 있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물속에 뛰어들었는데, 구조에 실패했다고 가정하자. 목적론적 윤리에 따르면 그는 익사자를 구조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이다.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어도 그의 행동은 선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결과가 행동의 선과 악을 결정하므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 그의 노력은 아무리 동기가 훌륭했어도 도덕적으로 선하게 평가받지 못한다. 물론 목적론적 윤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 행위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다. 비록 이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데는 실패했고, 또 그의 구하려는 행동 자체는 훌륭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결과를 낳았을 경우 훙륭한 행동으로 취급될 수 있다.
또한 다른 반대의 극단적인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익사 직전에 있던 그 사람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용기있는 사람의 행동은 목적론적 관점에서 선한 것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 사람이 히틀러였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행위가 그래도 옳은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이런 경우 그 용기 있는 사람의 행동이 선한 결과를 낳았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윤리적 판단은 이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난해한 부분은 목적론자들이 말하는 행위의 결과가 즉각적인 것인지 아니면 좀 더 먼 미래의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목적론적 윤리가 가진 한계점이기도 하다.
목적론적 윤리와는 달리 이런 상황에서 의무론적 윤리는 이와 정 반대의 견해를 내놓는다. 어떤 결과가 일어났든지에 상관없이 물에 빠진 상황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한 이 사람의 행동은 선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즉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한 이 사람의 행동이 비록 실패로 돌아갔다 할지라도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예수께서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요 15:13)다고 말씀하셨다. 그가 구하려고 했던 사람이 범죄자였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살리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그의 행위의 선악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의 옳고 그름은 인간으로서 어떤 행동을 했느냐 하는 내재적 의무를 수행한 여부에 달려 있다. 행위의 결과와 무관하게 그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 의무에 충실했기 때문에 옳은 행동을 한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무론적 윤리학이 모든 윤리적 선택에서 우리에게 단순한 대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의 윤리적 선택의 상황은 흑과 백의 선택처럼 단순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의무를 중심으로 윤리적 선택을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결과도 무시할 수는 없을 때가 있다. 의무론적 윤리가 결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앞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들 여럿 충돌하는 경우들이 발생할 경우 우리는 행위의 결과를 고려한 선택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 윤리학의 이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독교 윤리는 일반 윤리와 다른 점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여러 차이점들 중에 본질적인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것이 단순히 사람들과의 관계에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개는 사회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일반 윤리인데 비해 기독교 윤리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포함한다.
성경에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이러한 기독교 윤리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초대 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헌신에 동참한 경건한 부부였는데, 땅을 팔아 그 돈의 많은 부분을 제자들에게 구제를 위한 특별헌금으로 바쳤다. 다른 여러 신실한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론을 보면 실망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충격적이다. 자신의 재산을 헌신한 그 부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된다. 물론 이야기는 생각보다는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헌신적인 부부가 많은 헌신을 하고도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사건이다.
물론 이들 부부가 원래 드리기로 한 약속을 임의로 약간 변경한 면이 없잖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땅을 판 돈을 다 드리겠다고 했지만 막상 팔고나니 약간 부담스러웠던지 그 중 일부를 공제한 나머지 금액을 지도자들에게 바친다. 그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성경은 밝히고 있진 않지만 어쨌거나 딸을 판 돈을 전부 드리는 대신 일부를 빼고 드렸는데, 베드로는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행 5:3)다고 선언한다. 겉으로 보기엔 이 이야기를 이해하긴 쉽지 않다. 헌신하기로 약속한 것을 약간 축소한 것이 죽을 정도로 큰 죄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헌신을 거부한 것도 아니고, 헌신의 크기만 약간 줄인 것일 뿐인데, 죽음이라는 심판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윤리의 또 다른 범주로 우리를 인도한다.
기독교 윤리의 세 범주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 헌신의 양 때문에 그들이 급사(急死)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베드로는 그들이“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행 5:4) 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들 부부가 벌 받아 죽은 이유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기만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 윤리의 두 범주인 개인의 내면적 동기의 문제나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문제없지만 기독교 윤리만이 가진 또 다른 범주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돈을 기부한 행위는 선한 동기에 의한 것으로서 기독교의 목적론적 윤리의 기준에 의해서도 선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기만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냄으로써 즉결 심판이라는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윤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각 개인의 내부 문제라는 두 가지 범주에 국한돼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지만, 기독교 윤리는 C. S. 루이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에 덧붙여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 윤리는 신중심적 윤리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나 내면의 문제는 물론 불가피하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루이스는 우리 사회를 거대한 선단(船團)에 비유하는데, 안전한 항해를 위해 배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항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배들이 충돌 없이 항해한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개인들이 조화로운 질서를 유지해야 안전한 항해가 가능하게 되는데, 여기서 사람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도덕의 첫 번째 범주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윤리적 문제들이 이 범주에 속하는 문제들이다.
또 다른 윤리의 범주는 개인의 내면적 부분이다. 배가 아무리 조화롭게 항해하려고 해도 엔진이 고장나거나 배에 결함이 있어서 선장 맘대로 배가 제어되지 않는다면 배는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배들이 조화롭게 운행하는 법으로서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각종 윤리적 규범들이 아무리 잘 정비돼 있다 할지라도, 각각의 배라 할 수 있는 개개인들이 내적 도덕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안전한 항해를 통해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의 윤리적 결단이 필수적이다. 아무리 강한 도덕, 심지어 도덕보다 더 강력한 법이 있다할지라도 개인들의 자발적인 도덕 의식과 윤리적 결단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루이스의 말처럼, “법률로서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 수 없으며, 좋은 사람들이 없이는 좋은 사회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일반적 윤리학에서 주로 다루는 이들 두 요소만으로 과연 이상 사회가 만들어 질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심판 받아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은 윤리학의 두 요소와는 무관한 것으로서 세 번째 범주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세 번째 범주를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오케스트라에서 여러 종류의 악기들이 그 자체적으로 아무리 완벽하게 연주한다 할지라도 원무곡을 연주해야 하는데 장송곡을 연주한다면 그 연주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 선단의 항해도 배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안전하게 항해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혹은 각각의 배들이 고장 없이 운항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다. 선단에 속한 배들이 충돌없이 항해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이 인간 삶에서도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고려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학의 범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기독교는 이 범주를 인간과 그를 만드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코람데오
기독교 윤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 번째 범주에 대한 이해가 선재되어야 한다. 이 세 번째 범주는 ‘코람데오’(Coram Deo) 사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말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선 존재라는 뜻이다. 이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십계명의 첫 네 가지 계명에도 구체적으로 규정돼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할 필요가 있다. 일반 윤리학에서는 간과하는 이 세 번째 범주는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어쩌면 다른 모든 관계는 이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선 존재임을 자각하고 살 때, 자신의 내면은 물론 타인과의 관계도 제대로 설정될 수 있다. 이 원리는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에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짐으로써 인간은 자신과의 관계는 물론 타인과의 관계도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았던가?
기독교 윤리학에서 세 번째 범주를 보여주는 코람데오 정신은 윤리가 무너지는 세상을 향한 기독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윤리의 회복은 단순히 자기 내면적 문제 해결이나, 타인과의 관계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윤리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코람데오 정신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세 번째 범주가 바로 기독교 윤리학을 일반 윤리학과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윤리적 선택이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시작하여서 타인과의 관계로 규정되지만, 그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기독교의 세 번째 범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코람데오 사상은 인간이 홀로 있지도 않고, 또한 단순히 사람들 속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궁극적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고 이해로서 진정한 기독교 윤리를 위한 토대가 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지만 많은 사람은 이 사실을 거부하려 한다. 기독교인들이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가는데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행동하게 되는데, 이런 코람데오 정신이 바로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 된다. 미가의 표현처럼 선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이다.
이런 정신에 기초하여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 앞에선 존재로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는 삶의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을 명한다.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코람데오 정신을 실제 삶에 실천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결국 기독교 윤리가 가진 질문의 핵심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계시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를 얻을 수 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첫 번째 통로에는 천연계나 양심과 같은 일반계시가 있다. 특별히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 속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심어주셨다. 이 양심은 인간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도덕법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았던 무수한 백성들은 이 법에 따라 심판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롬 2:14, 15). 하지만 이 계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류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한계점들을 안고 있다. 우선 양심의 객관적 기준을 정하기가 불가능하다. 문화권마다 다양한 양심의 기준이 있고, 사람마다 그 기준은 다르다. 또한 양심의 정도도 천차만별이란 문제점이 있다. 민감한 양심이 있는가 하면, 아주 둔감해진 양심도 있다. 예를 들어 “양심이 화인”(딤전 4:2) 맞아서 더 이상 양심의 도덕법이 작동하기를 멈춘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이들을 향해 “성령을 훼방”(마 12:31)하는 죄를 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런 한계를 아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두 번 째 통로인 특별계시인 성경을 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이 인류를 향해 가지신 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당연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를 성경을 통해 받을 수 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런 이유로 기독교 윤리학은 하나님의 뜻에 기초했다는 의미에서 신본주의적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의 구체적인 계시인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성경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 윤리학의 전제들
지금까지 기독교 윤리학의 여러 가지 특징들과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았다. 이것들을 이해하기에 앞서 전제 되어야 할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할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기에 앞서 필요한 논의는 어떤 관점에서 그 논의를 하느냐이다. 즉 기독교인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윤리를 논할 것이고, 이슬람교도는 그들의 관점에서 윤리를 논할 것이다. 그들은 똑 같은 인간이지만 그들이 갖는 가치관과 도덕적 판단 기준은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도는 무고한 여자와 어린 아이들와 노인들과 같은 민간인들까지 포함하는 자살 폭탄테러를 윤리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으로 볼 뿐 아니라, 오히려 알라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추앙하기까지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 기독교도 이슬람이 차지한 성지를 회복한다는 명목 아래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 수많은 양민들을 희생시킨 경험이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작업은 그 사람의 종교나 문화 등의 다양한 배경까지 포함하는 가치관에 의해 좌우된다. 일반적으로 이런 가치관은 좀 더 큰 틀에서 볼 때 세계관을 기초로 꼴지워진다.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해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종교적 신념이 중요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어디로부터 온 어떠한 존재인지,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실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기초한 세계관이 기독교 윤리의 근거가 된다. 세상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가운데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세계관을 확립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여기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자연과 물질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로서 하나님께 그 존재를 의존하고 있다. 인간은 다른 짐승들이나 피조물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가장 특별한 피조물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가장 특별한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된 세상을 관리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청지기다.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았다면 죽음과 무관하게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지음받은 존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써 그 생명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담이 타락한 이래 인간은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은 상태 가운데 태어남으로써 죄와 사망의 종으로서 육신적으로 살아있긴 하지만 영적 사망 가운데 놓인 채 살아간다. 따라서 타락한 본성을 소유한 채 태어난 인간은 단순한 도덕적 행동만으로 선을 이룰 수 없다. 물론 구원론에서 더 깊이 다루어야 할 주제이긴 하지만 기독교 윤리의 세 번 째 범주인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선재되지 않은 상태로 인간이 사회적 선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께서도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마 7:17)는다고 하셨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존재인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서는 어떤 선도 불가능한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최고의 피조물로서 그런 세상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았다는 사실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자각시켜 준다. 일반 사회의 윤리에서 지구 환경은 잘 가꾸어서 유토피아를 건설할 공간으로 이해되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환경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환경은 인간이 청지기로서 망가뜨리지 않고 잘 보존해야 함으로써 건강한 생명 유지를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으로서 의미는 있지만 종말론적으로 볼 때 우리가 노력해서 건설할 유토피아는 아니다.
도덕률
이처럼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를 둔 기독교 윤리학은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절대적이니 도덕법을 강조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보여주셨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나타나는 이 도덕법은 인류 전체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성격을 띤다. 하나님의 뜻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으로 이해되는 십계명은 바로 그 도덕법의 근간이 된다. 인간의 삶의 도리를 보여주는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은 인간이 하나님과 또 다른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를 보여주는 규정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첫 넷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나머지 여섯은 인간과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들을 제시한다. 예수께서는 이들 열 가지 항목을 단 둘로 요약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 즉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서 단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사랑’이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식이고, 나머지 여섯은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인간에게 도덕이 필요한 한 이들 열 가지 계명은 도덕적 구속력을 가진 규정으로서 유효하다.
그런데 일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이 열 가지 도덕률 중 네 번째 것은 예외로 삼는 모순 속에 스스로를 빠뜨린다. 그들은 안식일 계명을 도덕률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특별히 기억하여 만남으로써 우리가 그의 피조물임을 재인식하도록 고안된 네 번째 계명을 알 길은 도무지 없었을 것이다. 십계명에 포함된 열 가지 항목들은 맘에 드는 것들만 골라서 우리 삶의 원칙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안식일 계명이야말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창조주 되심과 우리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는 날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도덕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전제는 바로 그것이 구체적이면 절대적인 규칙들로 구성된 도덕률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지
기독교 윤리학의 또 하나의 전제는 자유의지의 문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본능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이다. 물론 여기서 인간의 자유라 함은 인간이 가진 능력 안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의지의 자유이다. 새처럼 하늘을 날거나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살 수 있는 자유는 없지만,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연적 한계상황 속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자유로운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문제도 자유로운 윤리적 선택의 문제였다. 아담과 하와가 윤리적 선택을 직면했을 때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자유의지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감을 가질 수 있다. 왜 이런 자유의지를 주셨을까? 다른 것들은 다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만 못하도록 원천 봉쇄했으면 어땠을까 아쉽게 생각했던 때도 있다. 그리고 만약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미래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을 보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100%의 자유의지를 주시고 타락을 방조한 것은 하나님께도 타락에 대한 책임이 있지 않으신가하는 의심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을 보시고도 그 창조를 멈추거나 원래 계획을 수정하시기보다는 원안대로 창조하신 사실을 볼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다른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다.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는 인간이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즉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선택하진 못한다. 자유의 개념은 존재와 더불어 논의가 가능하다. 인간은 일정한 자연 질서와 사회 질서의 틀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이라는 환경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과도 같다. 물 밖에서는 물고기가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다. 부모에 의해 태어나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존재의 법칙에 따라 살게 된다. 비록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우리에게 없지만, 인간은 출생 이후에 부모를 어떻게 대하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결정할 자유는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바로 이런 존재의 이법 안에서 누리게 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책임과 의무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 인간은 자연적으로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된다. 성경에 계시된 도덕적 의무를 따르거나 따르지 않거나 하는 문제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지만,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은 개인 자신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뭔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임의로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따라 결정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을 어길 경우 그 행동으로 발생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도덕적 선택을 할 때는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임의로 행동하는 대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오해로 기독교인이 마땅이 감당해야 할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들이 기독교내에 있어왔다. 기독교 신학에서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에 이를 길은 없다고 성경은 단언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 것은 틀림없다. 이런 구원론에 근거하여 일부 신학자들은 율법의 의무를 우리가 따를 필요가 없다는 율법폐기론을 주장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도덕적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살아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사실이 우리를 모든 도덕적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된 자들은 의인으로서 살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로부터 벗어난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도덕적 교훈들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 의무를 순종하고 살아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야고보도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17).
이와 같이 믿음은 그리스도인 삶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윤리학은 인간의 분명히 자유로운 존재임을 강조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등한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자유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이지 결코 율법없는 방종이 아니다.
기독교 윤리학의 도전과 과제
윤리학은 마치 수학에서처럼 어떤 공식에 숫자를 넣어서 풀면 정해진 답이 나오는 것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학문이 아니다. 복잡한 인간의 삶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답이 나오질 않는다. 일반 윤리학이나 기독교 윤리학은 근본적인으로 인간의 실천적 삶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기독교 윤리학은 일반 윤리학에 갖지 않은 몇 가지 도전과 과제들을 안고 있다. 그들 중 중요한 몇 가지만 들자면 계시와 이성의 조화, 세상과 교회의 조화, 율법과 복음의 조화, 그리고 기독교 윤리와 다른 학문과의 관계 등이 있다.
계시와 이성의 조화
기독교 윤리가 신본주의적인 특성을 가졌기 때문의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계시의 말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성경 중심주의를 고수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우리가 가진 모든 윤리적 선택과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모두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윤리학 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다보면 곤란한 경우가 허다하다. 즉 성경에는 오늘날 우리가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포함한 구약의 족장들이 대부분 일부다처체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약에서 간음한 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해서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을 다 멸하라고 하셨는데 오늘날 이런 일은 용납될 수 없다. 이런 문제들을 접할 때 순순히 성경의 명령을 따르라는 대답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우리에게 있긴 하지만, 우리가 모든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따라야 할지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성경이 다 주는 것은 아니다. 윤리적인 선택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이성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담배나 마약을 금하라는 명령을 찾아볼 수가 없다. 게임중독, 인터넷중독, 스마트폰중독, 그리고 야동중독 등에 대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것들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안다.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서는 비록 구체적인 답이 주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이 보여주는 윤리적 원칙들을 찾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할 몫이다. 우리는 계시 못지않게 이성을 잘 활용해야 한다. 이성의 올바른 사용 없이는 계시도 무용지물일 수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올바른 이성의 사용을 통해서 성경의 문맥을 제대로 이해하는 훈련이다. 우선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문맥 속에서 본문을 읽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역사적 및 문화적 배경, 문법 등을 고려한다면 성경 본문을 보다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조화
기독교 윤리의 또 다른 도전적 과제는 세상과 교회, 곧 세속과 영적 삶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끌까 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세상이 아닌 천국의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세속의 삶과 부합되지 않을 수 있다. 기독교적 이상과 현실 세계 사이의 큰 간격을 경험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현실 세계를 악으로 규정하고 현실 도피를 선택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을 아예 등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탁발승으로 살면서 평생 고행의 길을 걸었던 수없이 많은 중세의 수도사들을 기억할 것이다.
비록 수도원으로 들어가진 않았어도 영적인 삶을 빙자하여 자녀 교육을 포기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특별히 진지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런 삶에 대한 로망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현실 사회에 대한 기피증이 심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생각하며, 육체적인 것을 죄악시하는 경향을 띤다. 이처럼 지나치게 영적인 삶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부부관계조차 죄악시하여 가정이 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삶의 부조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게 된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종류의 갈등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영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육체 혹은 물질적인 모든 것을 죄악시하는 이런 풍조가 왜 이렇게 기독교 사상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창세기 1장에서 6일 동안 창조의 사역을 이루시고 난 다음 매일 반복된 표현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물질을 악하게 보는 경향이 결코 성경적 사상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것을 죄악시하는 사상이 어디서 온 것일까? 플라톤 의 이원론 사상이 기독교 내에서 신플라톤주의로 발전하면서 어거스틴과 그를 따르던 중세의 기독교 사상가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다. 플라톤의 사상은 물질은 악하고 유한하지만 정신과 영의 세계는 선하고 영원하다고 가르친다. 영원한 것은 하늘에만 존재하고 이땅의 것들은 다 영원한 세계의 그림자들에 불과한 것들로 경시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무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19세기 후반부터 기독교 내에 세속주의적이고 사회복음적인 신학사상이 점점 중요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영적인 삶 못지않게 육적인 부분인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복음 운동이 일어났다. 기독교의 책임은 영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라는 세속적 영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영적인 삶에 대한 노력에만 치우치지 말고 세상에서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영성주의와 지나친 세속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조화를 유지해야 할 윤리적 책임이 있다.
율법과 복음의 조화
기독교 윤리학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 중 하나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의 계시인 도덕률은 전 시대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는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을 충실히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행위는 무의미하다고 강조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짐을 강조한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서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무것도 공헌하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지적하는 주장들이다. 틀린 말이 전혀 없다.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인간이 구원을 얻으려는 모든 노력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율법주의(legalism)라 부른다.
그렇다면 율법은 아무소용 없는 것인가? 율법폐기론자들은 율법이 십자가 사건 이후엔 율법은 쓸모없는 것이 돼 버렸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편다.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라는 야고보의 말은 틀린 것이다. 결국 율법과 복음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과 복음은 조화되는 것이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은혜의 경험에 참여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 즉 도덕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도덕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또한 도덕 없는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 윤리와 다른 학문의 관계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 신학과 따로 떨어진 학문으로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탈할 때, 기독교 윤리는 인본주의적 이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조직신학의 중요한 한 분야로 취급되며, 성서신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를 위해 기독교 윤리는 반드시 조직신학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인간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조직신학적 이해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이해가 없이는 기독교 윤리를 논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 그리고 불순종을 통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윤리의 논의를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된다.
그리고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보다 세세하고 정교한 논의를 위해서는 성서 신학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물론 조직신학 자체도 성서신학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임을 잘 안다. 시대적인 배경과 문맥 등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윤리적 원칙들을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어떤 이해들이 바탕이 되었는지 살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죄의식에 대한 도덕적 감각을 파악함으로써 불안과 좌절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목회 상담학이 필요하고, 이런 기독교의 사명을 사회에 선포하기 위해 선교학의 도움 역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윤리는 심리학과도 기본적인 관계를 가지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도덕적 기능이 그의 정신적 구조의 기초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 정신심리학자인 에릭 프롬(Erich Fromm)은 “노이로제 그 자체는 최종적인 분석에 있어서 하나의 도덕적 실패에 대한 증상” Erich Fromm, Man for Himself (New York: Rinehart & Co., 1947), viii.
이라고 주장한다. 심리학은 윤리학을 보다 실제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윤리학과 심리학은 인간을 보다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 외에도 기독교 윤리학은 사회학, 철학 등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는 깊은 윤리학적 논의는 불가능하다. 인간 이해와 인식론, 행복, 가치,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기초와 옳은 것과 그른 것의 성격 등은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기독교 윤리는 이들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철학적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생각해보기
1) 기독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제일 중요할까?
2) 왜 기독교 윤리는 의무론적 윤리일까?
3) 기독교 윤리의 세 범주에 대해 논하고,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범주가 무엇인지 토의해보자.
4) 코람데오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5) 자유의지가 기독교 윤리학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6) 오늘날 사회에서 이성과 계시가 충돌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7) 세속적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