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분명 난처해져 있다.
"우리는 분명 난처해져 있다. 우리의 딜레마는 해묵은 것이며, 뿌리 깊은 것이고, 쉽게 치유되지 않는 만성적인 악순환과 비슷하다." 이 딜레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은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요, 우주적이고 포괄적"인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신앙 영역에만 가둬 놓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송인규는 왜곡된 경건 생활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애통해 한다. 찰스 콜슨 역시 기독교를 총체적 진리의 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기독교를 절름발이로 만든 원인이라고 규정한다. "최근 수십 년간 교회가 저지른 단 하나의 잘못은 기독교가 존재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삶의 체계, 혹은 세계관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총체성과 전일적인 주되심을 가로막는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바로 이원론이다. 이원론은 "무엇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화된 대답은 '성'과 '속'의 거짓된 구분을 하는 경향이다." 이원론은 유한과 무한,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체, 시간과 영원, 현세와 내세, 교회와 국가, 성과 속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동등하거나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 구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왜곡이자 제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이원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삶의 영역에 한 부분에서만 순종과 구속과 관련되고 다른 영역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이고, 특별히 개혁주의 세계관이다. 신국원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시작을 한편으로 7 80년대의 독재 정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면서도 학생 운동권이나 이념적 토대와 투쟁 방식이나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을 지향하는 진보적 기독교 운동 양식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의 모습에도 충격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사회 개혁에 참여하는 대신에 복음 전도와 개인 구원에만 치중하는 것이 "현실에 무책임하며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열등감마저 느"껴야 했던 젊은이들이 새롭게 찾아낸 대안이라고 전한다. 다시 말해서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제반 현실에 대해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는다는 실제적인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필자가 첨가한 것이다.) 한국의 80년대 '세계관 운동'"이다. 이 기독교 세계관은 "1980년대에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 전통에 서 있는 문화 변혁의 비전이었다."
송인규와 신국원, 김헌수의 글에서 명백히 보이는 것처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한국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이원론을 극복하고, 신앙적 관점에서 사회와 역사도 변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논의를 정리하면, 80년대 수입되고 환영받았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내적으로는 이원론이라는 보호막으로 세상의 타락을 수수방관한 채 내세와 초월, 개인의 지복만을 추구하는 한국 교회에 경종을 울리고, 외적으로는 사회 변혁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응하는 보수 기독교 내부의 대항 이론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성패는 결국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의 실제적인 이론 지침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세계관 운동을 평가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 교회의 내적인 문제가 과연 이원론에 기인한 것인가?" 그리고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이론과 실천이 과연 한국 사회의 변혁을 담보해 낼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의와 화평의 샬롬의 비전을 따라 교회 내적으로는 거룩한 삶을 회복하고, 외적으로는 대중문화를 변혁하는 비전의 회복이 시급할 것이다. 그리고 김헌수가 지적한 것처럼 세계관에 대한 빈약한 이해, 즉 '오해'를 탈피하고, 여타의 세계관을 기독교로 옷을 입히는 '오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과 상황]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기독교 세계관 논쟁은 과녁을 빗나간 것이며, 안 그래도 빈약하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빈사상태의 한국 기독교의 지성 운동을 어 더욱 압살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개혁주의의 문화 전략과 사회 변혁 이념은 최소한 수정되거나 용도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도 난처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해묵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런데 우리의 난처함은 해묵은 것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온 것이다. 즉, 주되심을 개인에게만 국한하고 공적 삶에서는 세상적 방식으로 사는 이원론적 행습이 아니라, 그 반대로 공적이고 사적인 영역을 포괄하는 신앙 영역을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따르지 않고 세상적 방식으로 추종하는데서 온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내면의 영역에만 제한하고, 공적인 영역은 세상의 방식을 추종하는 이원론적 행습 또한 비판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난처함은 주되심을 세상으로 확장하지 못하는 무기력과 함께 주되심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나의 이런 판단이 옳다면, 그 동안 전개되어 왔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많은 방향 수정 보완하거나 내용을 교정해야 할 것이다.
2. 왜 기독교 세계관 논쟁인가? : '파르마콘'으로서의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본래 의도와 달리 난처함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독교 세계관은 유효한가? 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공로가 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필요하다. 대다수의 보수적인 한국 교회가 오직 복음 전도와 교회 성장만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있을 때에, 그리고 그 결과 한국 교회가 맘몬주의의 노예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교회 밖의 사회적 영역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는 점에서 여전히 필요하고, 잠자는 한국 교회를 일깨우는 양식과 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점, 세상에 대한 남다른 책임 의식, 그리고 복음이 현재 질서에 적용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는 점에서 아직도 타당하다.
둘째, 기독교의 사회 운동은 애초부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모든 입장은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독점할 수 없으며, 각각의 세계관은 한계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어느 한 유형만이 독점적으로 진리를 독식하는 것으로 자신을 타락하게 할 뿐 아니라, 타인을 기만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서로 다른 것은 부정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대화와 상호 비판을 통해서 성숙할 수 있는 계기요 디딤돌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이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기는 하지만, 다양한 변혁 틀 안에서 하나의 입장으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나는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심각한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용도 폐기되어야 할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한편으로 개혁주의가 갖고 있는 장점 또한 역사적으로 크고 놀라운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어느 일방이 상대에 대해 지적으로나 실천에 있어서 다른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고 본다.
셋째, 새로운 사상은 과거와의 대화와 투쟁을 통해서만 전개된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전통을 절대화하여 그 안에 안주하는 것과 전통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다. 도리어 격렬한 투쟁이 없다면 강한 진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맥클랜던은 "신학은 투쟁을 의미한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신학은 고요한 내적 성찰과 관상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 주류 신학과의 고된 싸움을 통해서, 그 싸움의 주체이며, 그 싸움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신학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해체론자로 알려진 자크 데리다의 학문 자세와 방법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뜻 보기에는 그는 서양 철학의 전통을 뒤흔드는 기괴한 철학이지만, 그가 추구하고 수행하는 것은 자신이 비판하는 플라톤과 후설, 그리고 루소를 다르게 읽어내자는 것이다. 그들은 '파르마콘'이다. '약'이자 '독'이며,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인 파르마콘은 야누스와 같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독이자 저주인 서양의 철학을 약이자 축복으로 다시 읽어내는 것이 그의 해체론이라고 본다면, 해체는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복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플라톤의 부정이 아니라 긍정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탈주의 철학을 감행하는 이진경도 지배적인 철학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철학을 기존 철학과 사상가들과의 싸움을 철학의 본령으로 이해한다.
"그 때까지 지배적이던 철학 밑에서 사고되지 못했던 것, 또는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을 찾아내고 열어젖뜨리는 것이다. 이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 지배적인 사상 때문에 사고되지 못하는 영역을 찾아내고 확보하는 투쟁이 바로 철학이다. (중략)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사상은 대개 다른 앞선 사상과 대립하고 투쟁하면서 형성된다. 그것은 앞선 사상, 특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사상이 은폐하거나 사고하지 못한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벌어지는 투쟁이다."
과거 전통에 대해 일견 부정적이고 파괴적일 것 같은 해체주의 역시 용도 폐기하지 않는다. 역사와 전통을 해석하고 독해하는 당대의 문제의식과 시각으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인식 틀과 관점으로 새롭게, 그러나 다르게 읽어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교 세계관의 죽음을 선언하고 간단히 쓰레기통에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재활용하는 지혜라 할 수 있다.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을 위한 기독교의 운동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진 모순과 억압된 사상을 찾아냄으로써만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사고하지 못했던 것, 은폐했던 것을 들추어냄으로써 의도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역사는 역사를 망각하는 자가 아니라 역사를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세계관이 유효하다고 판단하는 까닭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한다. 보수적 기독교 내에 소위 386 혹은 광주 세대라 불리는 이들이 대학에서 한편으로 사회 참여의 문제에 눈을 뜨도록 해 준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 참여의 문제 의식을 갖고 있을 때에 처음 접했던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기도 하다. 기독교 세계관 서적들은 사회 참여에 무관심했던 이들을 사회 참여를 격려했고, 그 고민의 출발점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 기독교 세계관의 수혜자로 자라났지만, 이제는 그 지점으로부터 너무 멀리 또는 아주 다른 곳으로 안착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기독교 세계관은 나와는 애증 관계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미워할 수만도, 그렇다고 사랑할 수도 없는 형국이다. 나는 나의 정신과 영혼을 자라게 해 주었던 위 세대의 주장과 논증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배타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단지 불필요한 걸림돌로 치워버리기 보다는 디딤돌로 삼고자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다시 읽되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3. 개혁주의 세계관 비판
나는 여기서 개혁주의 세계관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세계관의 개념은 이론보다는 보다 실천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사회 참여의 근거는 창조가 아니라 십자가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창조의 강조는 곧 콘스탄틴주의에 함몰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개혁주의는 문화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속당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또한 개혁주의의 핵심인 주되심을 일관되게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전쟁의 문제를 통해서 비판한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원론과 분리 보다는 혼합과 정체성 상실이 더 큰 문제 요인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세계관은 이론인가? 실천인가?
그들은 변혁의 출발점을 이성에서 찾는다. 생각이 바뀌어야 삶과 문화가 변한다. 이것은 세계관 개념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개혁주의자들은 세계관을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 혹은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 그리고 "세계관은 인식의 틀이며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세계관에 있어서 이성이 근본적인 우선권을 갖는다. 하지만 세계관을 이성과 이론적인 어떤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본래 추구하는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을 실현하는데 제약이 된다.
첫째, 세계관을 사유 작용으로 제한하는 것은 본래의 취지인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 현실과 유리될 가능성이 높다. 세계관 운동의 중요한 문제점은 실천과의 관련이다. 최태연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처음부터 단순한 지식 체계의 성립보다는 삶 한가운데서의 실천을 목적으로 해왔다"라고 하였지만, 이승구처럼 기독교 세계관을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그 관점으로 이 세상을 파악한 결과물 모두를 뜻"한다고 정의할 때, 그것은 세계관을 이미 실천과 괴리된 관념적 구성물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아무리 실천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세계관 정의 자체가 실천을 배제하지는 않더라도 실천과는 거리가 멀다면 세계관 운동은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둘째, 세계관을 철학과 다른 것이며, 전과학적이라고 하지만 주지주의적 성격을 피할 수 없다. 세계관 책인지, 철학 책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다. 예컨대 아더 홈즈의 기독교 세계관은 철학 개론 책과 같고,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와 현대 사상은 철학사 책으로 읽혀진다. 제임스 사이어가 잘 갖추어진 세계관의 요건으로 제시한 일곱 가지 질문은 세계관이 하나의 철학이라는 뉘앙스를 확연히 준다. 최고의 실재는 형이상학적이고, 인간은 무엇인가는 인간론, 죽음 이후의 문제, 도덕의 기초는 윤리학,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 등은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을 위한 학습이 아니라, 학습을 위한 학습이 되기 십상이다.
찰스 콜슨과 낸시 피어시는 진정한 기독교는 개인 경건의 차원 이상의 것이고, 제자도와 교리를 믿는 것을 뛰어 넘는 것,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는 모든 현실을 보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세계관이다." 하지만 문제는 성서가 말하는 세계관은 세상을 인식하는 전제나 틀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세계관의 변화요, 기독교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세계관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또는 거듭남은 방향의 전환이다. 삶의 방식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개혁파 그리스도인이 정의하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다르게 살기이다. 존 스토트는 한 인터뷰에서 개신교는 영성이라는 말보다는 제자도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관이라는 개념보다는 제자도라는 단어가 세계관을 대체하는 좋은 용어라고 본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세계관 = 제자도이거나 혹은 세계관 < 제자도가 될 것이다. 관점의 변화는 삶의 방식의 전환에 철저히 종속되며, 귀결의 산물이다.
셋째, 성서가 말하는 세계관은 인식의 변화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은 삶의 변화를 지칭한다. 갱신된 교회와 변혁된 사회적 삶의 방식은 지성이 아니라 삶, 더 정확히 말해서 순종하는 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삶의 방식은 교리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삶의 방식은 신앙 안에서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행정 또는 지적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것은 세계관이 변하지 않았거나, 또는 세계관 학습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또는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적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삶의 형식과 우리의 실제 삶의 형식과의 불일치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사자가 인간의 말을 한다 해도 우리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 까닭은 삶의 형식의 불일치이다. 삶의 방식이 다르면, 삶의 헌신과 지향이 다르면 외견상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의견들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을 소유한다는 것은 7가지 질문에 대해 일관되게 답변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소유한다는 것은 일관되게 실천하는 것이다. 비기독교적 세계관과의 관계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7가지 질문을 조리있게 대답함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답에 합당한 삶을 삶으로써 가능하다.
넷째, 윤리가 교리에 선행한다. 윤리는 교리를 확증할 뿐 아니라 검증한다. 더 나아가 교리는 윤리로부터 발생한다. 즉, 실천이 이론에 앞선다. 실천의 관점과 자리에서 교리와 공동체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맥클랜던은 그의 조직 신학 3부작의 첫 번째 책을 윤리학, 두 번째 책을 교리, 마지막 책을 소위 프롤레고메나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윤리는 전통적 접근과 달리 교리의 부록이 아니며, 칼 바르트와 같이 교리의 일부가 아니라, 교리의 출발이자 원천이다. 그런 점에서 하우어와스의 말은 적절하다. "윤리학은 신학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서가 지향하는 세계관은 한 마디로 관점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변화이다. 찰스 콜슨과 낸시 피어시는 진정한 기독교는 개인 경건의 차원 이상의 것이고, 제자도와 교리를 믿는 것을 뛰어 넘는 것,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는 모든 현실을 보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세계관이다." 하지만 문제는 성서가 말하는 세계관은 세상을 인식하는 전제나 틀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세계관의 변화요, 기독교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세계관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또는 거듭남은 방향의 전환이다. 삶의 방식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개혁파 그리스도인이 정의하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다르게 살기이다. 존 스토트는 한 인터뷰에서 개신교는 영성이라는 말보다는 제자도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관이라는 개념보다는 제자도라는 단어가 세계관을 대체하는 좋은 용어라고 본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세계관 = 제자도이거나 혹은 세계관 < 제자도가 될 것이다. 관점의 변화는 삶의 방식의 전환에 철저히 종속되며, 귀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처음부터 실천을 목적으로 하였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한다면, 세계관 운동 자체 또는 세계관 개념과 이해를 제자도와 실천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관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지적 유희가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세계관 운동은 잠자는 지성을 깨우는 운동과 함께 죽어 있는 의지를 살려내서 순종하는 제자로 만들어야 한다. 세계관 운동이 키워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학생인가 아니면 제자인가? 그러므로 세계관 운동은 '반지성주의'와 투쟁을 자기 본연의 사명으로 삼기보다 영생과 구원의 길을 알면서도 전혀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는 '지성주의'와 싸워야 할 것이다.
2) 콘스탄틴주의
개혁주의 세계관이 창조를 강조하는 것은 특정한 사회 문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보다는 수용하는 결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합법화하고 고무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이것을 콘스탄틴주의(Constantinianism)라고 명명할 수 있다. 콘스탄틴주의는 한 마디로 교회와 국가의 동일시이다. 국가의 가치를 기독교적 가치로 환원할 수 있고, 기독교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의 동일시가 전혀 거리낌이 없다. 더 나아가 국가의 가치를 방어하고 변호하는 것이 기독교의 중요한 의무와 책임이 된다. 이러한 콘스탄틴의 길을 배격한 그리스도의 길을 버리고 콘스탄틴을 종교적으로 재가한 기독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교가 아니라 콘스탄틴의 종교이며, 이교적이고, 반기독교적이다.
계시의 원천으로서 콘스탄틴과 그리스도, 제자의 삶의 방식으로서 십자기와 십자가의 혼합은 사회 문화의 변혁이 아니라 사회 문화의 승인이다. 알리스터 키에 따르면 제국의 가치를 합법화하기 위해 기독교는 내적인 변화가 필연적인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역사적 예수가 더 이상 교회를 위한 행동이나 가치와 규범"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 신학의 과제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콘스탄틴의 영향을 받아 제거되기 시작한 것을 폭로하고, 전도된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다.
실제로 바로 특정한 국가의 이익과 가치관을 마치 기독교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흔하다. 엘룰에 따르면, 이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취하는 두 가지 전략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리하여 오직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분리와 다른 하나는 세상의 활동들을 '도덕화' 또는 '기독교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악마에게 금색 물감을 칠하고 흰옷을 입혀라. 그러면 천사가 될 것이다!"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사회적 무질서와 인간적 비극마저도 정당화하기도 한다. 세상과 천국 사이에 선행, 윤리, 이성 등과 같은 다리를 놓아 그 사이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이 시도를 엘룰은 "가장 반기독교적인 태도"라고 맹비난한다. 십자가가 아니라 창조에 기초를 두는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을 기독교로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미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3) 사회 참여의 근거는 창조가 아니라 십자가이다.
이러한 콘스탄틴주의는 개혁주의 세계관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콘스탄틴주의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그리스도인의 행동 규범으로 삼는 것을 약화시켰다. 그 사례가 교회의 사회적 책무의 출발점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이 아니라 창조에서 찾는 것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의 사회 참여의 독특성은 그 출발점을 일반 은총 혹은 창조론에서 시작한다는데 있다. 신국원에 의하면, 일반은총론이 "개혁주의 문화론을 다른 기독교의 전통들과 구분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주장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창조 신앙에는 하나님의 주권의 보편성과 포괄성, 우주적인 차원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 신앙에 의해서 성과 속의 이원론은 단번에 혁파되며, 비개혁주의 세계관은 창조 세계를 거룩과 무관한 세속 영역에 속하도록 방치한다. 따라서 창조의 계시를 무시하면 타락의 심연과 구속의 범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세계관은 그리스도 및 구원과 함께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
우리는 이 주장에 대해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자연이며, 구속이 아니고 창조에서 시작하는가? 물론 이 물음이 창조주와 구속주를 분리하거나 대립시키는 것은 아니다. 창조를 강조하는 헤르만 도예베르트는 일반 은총을 배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귀속시키는 것은 창조와 구속을 분리하는 것이다. 또한 구속에서 사회 변혁을 주장하는 존 요더 역시 "사회 질서를 위한 규범들이 창조의 일부 질서 안에 계시되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 의도 안에 인간 사회의 토대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창조의 강조는 실천적으로 콘스탄틴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있다. 그 이유는 현존하는 사회 질서의 억압과 왜곡을 타락한 질서로 보고 구속의 대상으로 삼기 보다는 신성한 창조의 질서 일부로 용인하기 때문이다. 존 요더에 따르면, 창조 개념 자체는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타락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승인할 가능성이 많다. 가부장적 사회 질서, 노예 제도 등이 창조 질서라는 이름으로 종교적인 승인을 받았다. 창조 신앙이 미국 남부에서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노예제도와 인종 분리 정책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하였다. 미국 독립 선언서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주장은 창조 질서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 선언서에서 말하는 평등한 인간은 모든 여성과 흑인,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가난한 자를 제외한 백인 중산층을 가리킨다. 따라서 요더는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로운 미국은 창조를 통한 평등의 개념이 아니라 구속의 복된 소식에서 시작하라고 제안한다.
4) 구속(救贖)하는가? 구속(拘束)되는가?
개혁주의 세계관은 변혁 모델이 아니라 종합이나 일치 모델의 유혹에 자주 노출되어 있다. Snyder는 개혁주의 세계관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너무 쉽게 수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 모델은 문화의 제약을 받는 기독교가 될 위험을 동반한다. 문화에 대한 관심은 어떤 특정 문화에 대한 승인으로 쉽게 이어진다. 특히 그 문화가 여러 가지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미 기독교적이거나 기독교화 되었다고 보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 비판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상당히 많이 있다. 그 좋은 예가 프란시스 쉐퍼와 찰스 콜슨과 오스 기니스이다. 기독교가 이성으로부터 도피하는 역사를 추적하면서 쉐퍼는 기독교의 합리성 망각이 기독교의 변질과 왜곡을 낳았다고 통탄해 마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이성은 서양 근대적 이성에 다름 아니다. 근대적 이성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기독교의 합리성을 곧 데카르트적 합리성으로 치환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이는 기독교와 근대의 결탁이다. 쉐퍼가 근대를 비판하지만, 결국 근대적 정신에 굴복하여 근대적 관점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또 하나의 콘스탄틴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콜슨은 우리의 부르심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함께 문화 명령, 즉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질서에 순복하도록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예방차원에서 이라크에 대한 선제 공격을 지지하는 것에서 보듯이, 그가 꿈꾸는 하나님의 질서가 곧 미국의 패권적 질서이며, 그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과 제국의 요청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스 기니스는 미국적 이상이 곧 기독교에 근거한 것이며, 진리의 객관성이 약화되면서 서방에 대한 미국의 지도력도 함께 약화되고 있다고 개탄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에 따르면 미국의 전쟁 야욕은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 선언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미국의 대외 정책을 휘리릭 훑어보기만 해도 우리가 국가를 형성한 초기부터 줄곧 침략성과 폭력, 기만이 그와 동일한 국내적 전개 과정에도 동반됐으며 이것이야 말로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원형을 이뤘다." 그러므로 진이 내린 "결론은 미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더 악하다는 게 아니라 단지 똑같이 악하다는 것이었다(그렇지만 미국은 때로 더 교묘한 술책을 부렸다)."
진의 주장이 옳다면, 기니스의 주장은 부정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미국의 기독교적 이념은 폭력을 기만하는 포장지에 불과했던지, 아니면 그 폭력과 기만이 기독교와 전혀 상충하지 않기에 미국 이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목도하는 미국은 지향으로부터 왜곡되고 일탈된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의 주장처럼, 미국 역시 하나의 국가이며 더 악하지도, 덜 악하지도 않은 단지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악하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미국을 악마화하는 것도 잘못일는지도 모르지만, 미국을 신격화 또한 잘못이다.
결국 문화를 변혁하는 개혁주의는 문화에 의해 변혁되는 개혁주의가 되었다. 세상의 기독교화는 곧 기독교의 세상화로 변질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과 세상을 변혁하여 더 좋은 나라를 지향하는 개혁주의는 콘스탄틴주의에 함몰하게 된다. 자문화를 기독교 문화로 착각하거나 복음의 전도를 문화 확장으로 혼동한다. 개혁주의가 겉으로는 변혁을 외치지만, 콘스탄틴주의에 젖어드는 것은 변혁이 그처럼 어려운 과제라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라는 가스펠 송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를 보여 준다. 즉, 우리가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다. 존 피셔는 교회가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는 말은 문화적 거짓말이라고 단정한다.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반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불신했다." 그 결과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사실을 마치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듯이 세상의 도덕적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라는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세상과의 차별성을 보이라는 요구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것과 세상을 선하게 하는 것, 이 양자를 혼동한다. 우리는 결코 세상을 선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수는 있다." 우리는 창조의 영역을 회복함으로써 세상을 구속하는 자가 아니라, 맛을 잃어버린 교회를 회복함으로써 세상을 구속하는 자가 된다. 따라서 우리의 소명의 근거는 창조 질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르심이다. 구속할 것인가? 구속될 것인가?
5) 개혁주의는 주되심에 충실한가? : 정당한 전쟁론
개혁주의자들은 하나같이 기독교 세계관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되심은 포괄적이고 총체적이다.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주권이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평화주의자의 시각으로 보면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을 지지하는 개혁주의는 주되심을 전쟁과 폭력의 문제에서는 제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당한 전쟁론은 그리스도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법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정당한 전쟁론의 기초자라고 할 수 있는 어거스틴이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성서가 아니라 플라톤과 키케로였다. 전쟁이 평화를 이루는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플라톤의 그리스 전통과 전쟁은 권리 행위라는 로마 사상에 근거해서 어거스틴은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는 평화의 사상을 성서에서, 전쟁의 정당성은 이교도의 사상에서 도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예수의 윤리와 정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규범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삶에서의 적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성, 현실, 자연 등과 같은 자연 신학을 통해 보충하게 된다.
현재 우리 나라의 상황이 최후의 수단이나 불가피한 선택으로도 전쟁이 결코 언급될 수 없는 엄중한 상황에서 개혁주의의 정당한 전쟁론은 부당하다. 이 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한 전쟁론이 개혁주의 세계관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이 정녕 주되심을 온전히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 외의 계시와 철학에 기초한 정당한 전쟁론을 거부하는 것이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며, 우리의 상황에도 적절한 선택일 것이다.
6) 문제는 이원론보다 혼합주의이다.
이상에서 나는 개혁주의 세계관이 문화와 종교의 혼합을 추구하는 콘스탄틴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비판하였다. 지금까지 개혁주의의 논리적인 측면과 서구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면, 이제는 우리 한국과 한국 교회 정황에서도 개혁주의 세계관은 동일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개혁주의가 인식하는 것과 달리 한국 교회와 우리가 처해 있는 난점은 이원론이 아니라 세상과 교회의 혼합이다.
한국 교회가 예수의 정치가 아니라 콘스탄틴의 정치를 따라 사는 것을 입증할 자료는 몇 가지 있다. 첫째, 한국 교회는 상당히 깊숙이 현실 정치에 개입했다. 그럼에도 복음주의 윤리학자들은 교회가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말한다. 지나친 무관심이 문제이므로 이제는 교회가 사회 경제적 영역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교회는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 일제 시대의 신사 참배,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적 정권으로 옹호하고 3 15 부정선거를 가장 앞장 서서 공명선거라고 억지 주장을 한 것을 기독교 단체였다. 10월 유신을 지지하고, 광주의 희생을 제물삼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그것도 아직 대통령으로도 취임하지 않는 그를 위해 조찬 기도회를 하고, 더 이상 청와대에서 목탁소리를 듣지 말자고 설교하는 것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변화와 갈등의 길목에서 늘상 보수와 정권 이데올로그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준다.
나는 지나간 한국 교회가 정치 참여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성서와 조선일보, 예배와 반상회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똑 같은 방식으로 정치를 하였다. 비정치적 외피와 달리 국가주의와 지역주의, 정권 안보의 이데올로그였던 한국 교회는 세상과 철저히 일체화된, 콘스탄틴 종교의 육화라 아니할 수 없다. 교회의 정치 참여는 마땅한 것이다. 문제는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교회는 예수의 정치를 선 보여야 한다. "교회와 국가의 차이 혹은 신실한 교회와 신실하지 못한 교회의 차이는 하나는 정치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상이한 방식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가장 좋은 예가 국가시험을 주일날 시행하지 말고 평일에 치러야 한다는 교회의 목소리이다. 주일날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는 날이므로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집회 등의 다양한 집단적인 힘의 행사를 통해 이 주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콘스탄틴적 기독교의 전략이다. 이런 행동은 교회를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이익 집단으로 비처지게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비기독교인의 피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서 속물적 기독교의 모습을 확인하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하기에 시험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초대 교회와 한국 교회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은 완전히 상반된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길을, 한국 교회는 콘스탄틴의 길을 추종한다. 콘스탄틴은 칼을 든 십자기의 종교를 구현한다면, 그리스도는 비폭력의 십자가의 종교를 체현한다. 콘스탄틴의 길은 강함과 무력을 지향하지만, 그리스도의 길은 약함과 무력함을 추구한다. 콘스탄틴의 전략은 강한 군대를 통해서 약자와 빈자의 억압을 통해서 평화와 승리를 쟁취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전략은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통해서 도리어 빈자와 약자가 높아지는 승리를 갈구한다. 콘스탄틴의 종교는 나를 위해 남의 피를 흘리는 종교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종교는 남을 위해 내가 피를 흘리는 종교이다.
초대교회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길을 따랐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국가 정책을 변경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초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비폭력 평화주의 원칙에 따라 공무원과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자, 로마 체제가 위협받게 되었다. 로마 사회에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전부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시험 거부로 공무원과 군인의 질적으로 저하되었던 것이다. 결국 콘스탄틴은 이전의 황제와 달리 탄압과 박해가 아니라 기독교에게 사회 보호에 동참케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상의 두 가지 사례는 한국 교회가 개혁주의 세계관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세상과 교회의 분리와 이원론이 아니라, 세상과 교회의 혼합, 그리고 일원론이 비판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죄 많은 이 세상이 아니라 죄 많은 이 교회가 문제임을,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일체를 이룬 교회가 문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사는 것을 변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문화의 그리스도 모델을 숭상하거나 대립과 일치 모델이 기이한 형태로 섞여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국원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개혁주의를 오해한 한 대학원생이 자신에게 한국의 장로교는 말로만 개혁주의를 주장할 뿐 실상은 니버가 말하는 반문화론자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다수 한국 기독교는 입으로는 변혁 모델을 주장하지만, 실상은 니버에 따르면 두 번째 유형인 "문화의 그리스도"에 가깝다. 니버는 근본주의를 문화적 신앙을 변호하는 일치론자라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금주와 금연의 실천을 예수에 대한 순종과 일치시키는 것,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미천한 자들보다는 사회 지도층에 호소하려는 경향 등은 정확히 한국의 개신교회와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근본주의는 자신이 그렇게도 거부하고자 한 자유주의와 함께 당대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한 배를 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개혁주의에 대한 이해는 아무래도 이원석이 더 통찰력 있는 비판을 제시한다. 그는 한국 교회는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모델과 문화의 그리스도 모델이 혼융되어 있고, 그것도 두 유형의 단점만이 결합되어 있는 기괴한 형태라고 지적한다. 문화적 보수주의를 마치 기독교적 시각인양 혼동하고 더 나아가 대중문화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대립 유형이고, 보수적인 정치와 문화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어서 그 독특한 맛을 상실하였다는 점에서 일치 유형이다. 한국 교회가 무관심과 분리가 아니라 철저히 세속적 관심과 방식으로 참여하였다면, 대안 모델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4. 세계관은 다양하다.
이 지적에 대해 개혁주의 세계관주의자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변혁적이지 못한 한국 교회를 깨우기 위한 개혁주의 세계관에 온통 잘못의 멍에를 뒤집어 씌우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2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혁주의 세계관의 공 보다는 과를 지적한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세계관 운동이 서로를 견인하면서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 개혁주의 세계관은 우월하지 않다.
개혁주의 모델이 유일한 변혁 모델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 대안으로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여 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개혁주의가 변혁 모델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개혁주의 전망이 늘 변혁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제네바의 칼빈이나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은 우리에게 칼빈주의적 모델의 적합성을 여실히 보여줄 뿐 아니라, 강력한 대안임을 보여준다.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점. 세상에 대한 남다른 책임 의식과 남다른 추진력과 "복음이 현재 질서 속에 적용될 수 있다는 확신"이 가져다 주는 대중적인 호소력을 기억한다면, 개혁주의 세계관 역시 변혁 모델의 한 형태이다. 문제는 개혁주의만이 옳다는 인식이다. 나는 다양한 변혁 모델의 공존을 강조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의 우위는 리처드 니버의 역작인 [그리스도와 문화]가 남긴 그늘로 보인다. 물론 니버 자신도 다섯 가지 유형의 모델들이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고, 그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우월한 모델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 책 안에 다양한 장치를 통하여 개혁주의 모델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다.
첫째로 각각의 모델에 대한 명명이 공정하지 못하다. 변혁 모델을 개혁주의에만 명명함으로써 다른 모델은 변혁적이지 못하다는 인상과 개혁주의만 변혁 모델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버가 문화와 대립하는 모델이라고 지칭한 대안 모델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안 모델이 자신들은 마치 고고하게 세상의 문화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척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문화를 피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실제로는 그들이 표면적으로 배척하는 문화의 일부분을 이용하거나 이용당하고 있다. 하지만 분리 모델의 주장은 세상과 문화로부터의 분리가 아닌 다름을 추구한다.
둘째, 변혁 모델이 가장 우월하다는 니버의 암시는 책의 구성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적 구조를 활용하고 있다. 정(thesis)과 반(antithesis)의 대립을 통해서 합(synthesis)에 이르듯이 니버의 다섯 유형은 마치 정반합의 상승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발전된 대안으로 제시된다. 다섯 유형에서 제일 먼저 "분리 모델"을, 그리고 "일치 모델"을 설명한다. 이 두 모델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에 있어서 양극단에 속한다. 다음의 세 모델은 양 극단에 빠지지 않는 것들이다. 뒤의 세 모델은 앞의 두 모델에 대해 '합'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 세 모델의 관계도 동일한 방식을 취한다. 종합과 역설 모델이 서로 대립한다면, 마지막 변혁 모델은 다시 이 양 모델을 새로운 단계로 종합한다. 따라서 니버는 책의 구성을 통해서 개혁주의 모델이 다섯 가지 모델 중에서 최고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
셋째, 변혁 모델에서만 단점이 지적되지 않고 있다. 다른 유형의 모델들은 성서적 근거와 대표적인 주창자들, 그리고 장점과 단점에 대한 일련의 평가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유일하게 변혁 모델에서 만큼은 단점이 지적되지 않았다. 이는 니버가 개혁주의 모델을 지지한다는 증거이다.
넷째, 내가 보기에 다른 모델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분명한데, 변혁 모델의 성서적 근거는 취약해 보인다. 니버는 변혁 모델의 근거로 요한복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요한의 교회 공동체는 종파적(sect) 공동체라는 것에 대개의 신약 학자들은 대개 일치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18:36)라는 예수의 선언을 보건대, 세상과 분리된 교회로 보는 것이 적절하며, 요한의 교회관은 반문화 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비전은 "유대교와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로마 권력이나 문화와의 관계에서도 반문화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여기서 변혁 모델의 정당성을 찾는 것은 요한복음서에 대한 오해로 보인다. 물론 니버는 요한복음이 개변주의와 분리주의를 결합한 것이라고 한다. 최소한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사회 참여의 모델은 변혁 모델과 대안 모델 모두를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대안 모델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각 세계관은 특정 공동체의 전통을 반영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개혁주의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는 전통의 산물이다. 그 어떠한 이론도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문화, 심지어 지역적 특성과 기후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민족성과 기질에 따라 학문하는 방법론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세계관은 개혁주의 공동체의 산물이자 반영일 뿐, 다른 세계관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최태연은 세계관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꿈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이 살아있는 기독교 세계관이 되려면 오늘의 역사와 상황에 응답해야 한다. 19세기의 화란 개혁교회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성립된 개혁주의 세계관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적용되고 생동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한국에서 개혁주의 세계관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이 19세기 화란 개혁 교회의 역사적 산물이고, 그 상황에서 아주 적합하였다면, 최태연의 주장처럼 우리 상황에 가장 맞는 세계관이 개혁주의 모델의 '리모델링'이 되어야 할지, 아니면, '재건축' 수준으로 바꾸어야 할지는 또 다른 판단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시대의 반영물인 특정 모델을 일방적으로 우위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변혁 모델은 다양하다.
나는 이상에서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 변혁 모델로 알려진 개혁주의 모델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하였다. 이 비판이 옳다면, 그럼 진정한 변혁 모델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역사를 살펴 보면 다양한 변혁 형태를 발견할 수 있고, 우리는 다양한 모델의 공존과 긴장 속에서도 우리 시점에 가장 적절한 형태의 모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모델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와의 관계를 적절히 묘사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각 모델들은 각각 기독교적 사회적 책임의 여러 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를 얼핏 살펴보면, 다양한 변혁 모델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혁주의 모델의 논리 적합성과 현실 적절성은 탁월하다. 다른 어떤 교파와 신학보다도 뛰어난 학자와 실천가를 배출한 것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모든 시대에 개혁주의 세계관이 변혁을 위한 적합한 모델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로마로부터의 엄청난 핍박 상황에서 로마의 문화를 완전히 거부하였던 대립 모델은 가장 탁월한 대응 방식이었고, 변혁 모델이었다. 그리고 고대가 멸망하고 민중의 생명과 문화가 소위 야만족에 의해서 파손될 위기 상황에서 교회는 문화의 수호자가 되어야 했다. 당연히 문호의 그리스도 모델이 가장 적절하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모든 것을 신앙의 체계 아래에 모아 두었던 문화와 세속의 영역이 12-3세기에 발전된 시장과 대학, 그리고 고대 헬라 철학의 재발견으로 한계를 드러내었다. 아퀴나스는 종합 모델을 통해서 이 문제를 극복한다. 즉,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궁극적으로 신앙의 우선을 주장하면서도 이성의 독자성을 확보하는 종합 모델을 제시하여 프란시스 쉐퍼가 생각과 반대로 이성을 신앙의 영역 안으로 가두고자 하였다. 그리고 중세 교회가 신앙과 이성의 종합이 마치 짬뽕이 되어서 신앙의 독특성을 상실할 때, 루터는 이원론 모델을 통해서 복음의 독자성과 순수성을 회복하려 하였다. 따라서 각각의 모델들의 역사적 상황과 대처 방식을 살펴본다면, 그 누구도 어느 한 모델만이 일방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그 모델들을 공부하는 우리는 한 모델을 선험적 혹은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모델들은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려는 유아적 발상은 중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논리적 차원에서 세계관은 다원적이다. 데이비드 노글은 세계관이라는 개념은 개신교 복음주의와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도 사용되는 용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 세계관의 다양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세계관의 다원성을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신국원, 이승구, 최태연 등은 기독교 세계관은 단일하지도 않으며, 개혁주의가 절대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단,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통과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그럼에도 세계관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은 개혁주의가 외부에서 보면, 지나치게 위압적이며, 다른 여타의 세계관 운동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성의 옹호는 개혁주의와 아나뱁티스트들에게도 유익하다. 어느 한 모델이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것을 타자와 자신에게 백해 무익하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안 사회 모델과 변혁 모델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가지 견해가 함께 공존할 때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문화 승인과 문화 비판, 그리고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교회의 위치 사이의 양극성을 계속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치 빛이 파동이면서도 입자인 것이 상호 모순되어 보이지만, 서로 공존하는 것처럼, 기독교 세계관 안에 일견 상호 대립되는 다양한 모델의 상생이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이라는 목표 달성에 한걸음 더 다가 설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나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변혁 모델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상대주의적 다원주의 모델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모델이 항상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다고 해서 다양한 패러다임들이 동등하게 그리고 모두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모델들이 각 시대 마다 자신들의 변혁적 사명을 감당하였다. 각 세계관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며, 분명한 역사적인 컨텍스트를 갖고 있다. 세계관의 다원성은 성경의 다양성과 함께 우리 삶의 역사적 다양성에 기인한다. 성서적 근거와 함께 역사적 상황에 따른 선택과 결단을 감행해야만 한다.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모델이 정당하다는 것은 그 모델이 전적으로 완전히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시대의 문제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모델이 존재한다.
웨버는 복음주의자들이 채택 가능한 모델을 분리 모델, 동일 모델, 그리고 변혁 모델이라고 한다. 그는 어떤 모델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려할 때, 주의해야 할 세 가지를 제안한다.
⑴ 이들 각 모델의 기본적 주장은 모두 다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⑵ 다른 모델에 대한 적절한 고려 없이 한 모델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균형한 접근이 될 위험성이 있다. ⑶ 문화적 상황은 때때로 다른 모델보다는 한 모델을 강조할 것을 요구하거나, 지지한다.
즉, 다양한 변혁 모델 속에서 단 하나의 모델이 독존하는 것은 불균형의 위험이 있으므로, 시대사적 과제를 극복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특정 모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한국 교회가 특정한 정치 프로그램과 문화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너무 쉽게 미화하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시점에서 아나뱁티즘에 기초한 대안 모델의 강력히 요청된다.
5. 교회는 세상이 아니다.
교회가 사회 문화의 변혁자가 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이 교회가 세상의 논리와 메커니즘을 벗어나야 한다.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제자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제 맛을 내는 소금이고, 산 위의 동네가 감출 수 없는 빛이라면, 우리는 선지자적 비관주의에 기초한 의무와 사명으로 사회 참여와 비판을 전개하지 않게 된다. 이미 교회 안에 실현된, 그리고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분명한 실재를 바탕으로 우렁찬 증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대안이다.
1) 사회 변혁의 전제는 교회의 회복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회복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선결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를 묻기 전에 "죄 많은 이 교회로 충분한가?"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성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또한 "'당신이 사회를 개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능력이 당신들 속에서 일하고 있는가?'이다." 변혁된 교회를 전제하지 않는 교회의 정치는 본래적인 "교회의 정치학과는 전혀 다른 정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할 뿐이다."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의 전제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현실을 요구한다. 만약에 교회가 교회의 참된 본질과 맛을 잃어버려서 밖에 버리게 되었다면, 사회 참여 논리는 공허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명백하게 보듯이,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한기총의 친미 시위와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설교들에서 우리는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아니라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 나아가 세상의 이데올로기와 국가 이익을 마치 기독교 신학인양 설교하고, 신봉하는 모습에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변화 - 더 정확히 말한다면, 타락이다. - 시키는 역삼투압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사회 변혁 주체가 아니라 변혁 대상이 되고 있다. 성서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상식으로 보아서 지나치게 많은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계관의 시급한 과제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누릴 거룩한 문화를 만드는 것" 보다 교회 자체가 거룩한 문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거룩한 문화는 다양한 문화의 장르를 교회 안에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우리에게 명백히 요구하는 산상 수훈의 삶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가 거룩한 문화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문화 공동체이어야 한다. 세상의 삶의 방식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이 땅에서 실천하고 구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수행해야 할 가장 효과적인 사역은, 교회는 세상 안에서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구별되는 삶의 방식을 창조해내는 일이 가장 우선되는 것이다. (중략) 기독교의 삶의 방식으로 창조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기독교 고유의 삶의 방식을 창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통합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안에서 창조적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의 사회 참여 내지는 사회 변혁자로서의 교회의 전제는 교회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전제 위에서 타당하다.
이런 점에서 화란 개혁파 신학자인 아브라함 반 드베크의 자기 성찰적 논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교회의 사명은 교회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교회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결여된 채 사명의 추구는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의 본질마저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사명은 교회의 정체성의 반영이어야 한다.
이런 시점에서 적절한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 전략을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 윤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회 윤리이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어둠을 질책하는 빛이 되고, 교회의 삶과 증언이 부패하는 세상을 부끄럽게 하는 소금이 되는 것이 중요한 전략이다. 이것은 시대적 상황이 요청하는 하나의 전략일 뿐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교회의 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세상이 아니다."는 이 슬로건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핵심 구호가 되어야 한다. 송인규의 탄식처럼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에서 "죄 많은 이 교회를 충분한가?"라는 물음과 실천의 변화가 요청된다. 세상을 빼다 박은 교회로 사회 변혁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교회는 정치적 책임이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정치적 공동체이다.
2) '선지자적 비관주의'에서 '메시아적 공동체의 증언'으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략 자체라는 것은 선지자적 비관주의를 거절한다. 사회 정의를 위한 기독교의 사회 윤리 운동의 이념적 근거는 지금까지 손봉호가 말하는 선지자적 비관주의에 기초해 있었다. 선지자적 비관주의란 이상 사회의 실현이 인간에 의하여 결코 이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사회적 책무를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열광주의와 숙명론이나 타협에 함몰되는 것을 방지해 준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사회적 보수주의에 빠질 우려가 많으며, 무엇보다도 교회를 망각하고 있다. Snyder의 지적처럼 개혁주의는 "교회를 사회 재건이라는 목표를 위한 수단 (심지어는 방해물) 이상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손봉호의 선지자적 비관주의가 놓치고 있는 것도 바로 교회론이다. 우리는 비관적이고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목도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부활을 통해서 승리를 확인하였고 또한 확신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파자이자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이 세계 가운데서 구현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이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의 성품과 삶을 이교도의 문화 속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세상과 다른 질서와 세계관을 따라 사는 삶을 미리 맛보고, 세상을 향해 증언한다. 이러한 "반문화로서의 교회, 즉 대안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세계를 전복한다." 따라서 교회는 반문화 제자도 공동체이다.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웅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케 하는 대리인이자, 화해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그 샬롬을 온전히 누리는 교회야 말로 세상을 정죄하며, 세상을 비추는 빛임을 역설한다. 끊임없는 이 세상의 폭력과 전쟁의 소문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세상이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구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가능한 이상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말하거나 사회 변혁을 몽상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경험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증언하는 것이다.
6. 썩은 사과에서 썩은 밀알로
신국원은 기독교와 특히 개혁주의는 벌레 먹은 썩은 사과를 통째로 버리거나 도려내고 먹지 않고 벌레까지 통째로 먹어 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썩은 문화라도 삼켜 변혁시킬 정도로 튼튼한 위장을 가져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직면한 난처함은 '벌레 먹은 문화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벌레 먹은 썩은 기독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썩어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썩은 사과가 되어 먹는 이들을 아프게 하는 상황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삶의 전 영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가? 대답은 의외를 우리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다. 교회와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다. 문제의 원인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수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이다. 이름만 걸어 놓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뚜렷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문제의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믿고 그 분이 사신 대로 살아가는 무리가 아주 조금만 있으면 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가 된다면, 누가 우리를 감당하겠는가? 우리가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전혀 다른 삶 - 하나님 나라 - 의 가치관과 표준을 따라 일상 속에서 영적 제사를 드리는 것이 곧 기독교 세계관이다. 썩은 사과 공동체에서 썩어가는 한 알의 밀알 공동체가 되는 것,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