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전 < semen fidei, habitus fidei, actus fidei >

작성자사계四季|작성시간13.12.28|조회수223 목록 댓글 1

 

 

 

    {양무리 마을}에서 홀리조이 님이 조엘 비키 ‘준비 은혜’에 대한 글에서 나오는 용어 “semen fidei, habitus fidei, actus fidei”를 가지고 연중론을 다루고 계시는군요. 다음 글은 그러께 12월 {양무리 마을}에서 성경의 인물들을 두고 이른바 “연속적인 중생 실전 예제”가 한창일 때 {강릉예명}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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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jesuname/BsLS/68

 

 

 

김홍전 <신앙의 씨(semen fidei)>

 

 

 

나그네 2011.12.24. 20:50

 

 

    다음 강설은 {SDG 개혁신앙연구회}에 산본 님이 올린 강설, 김홍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 (서울: 성약출판사 2004) 85쪽~86쪽에 나오는 강설입니다. {양무리 마을}에 <김홍전 목사는 연속적인 중생론자 2>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강설입니다. 읽기 쉽게 제가 문단을 나눠 칸을 띄웁니다.

 

 

신앙의 씨(semen fidei)

 

    우리가 그동안 배운 것을 기초로 수학 공식을 내듯이 한번 내어 봅시다. 세멘 피데이(semen fidei)라는 말을 우리가 배웠습니다. 신앙의 씨, 신종입니다. ‘믿음의 씨’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한두 사람이 한 시기에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랜 신학의 역사 가운데 몇 백 년 내려오면서 결국 이것이라고 찾아 낸 것인데, 처음부터 세멘 피데이를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하비투스 피데이(habitus fidei), 즉 항상 신앙이라는 사실을 발휘하는 아주 정상적이고 관성적인 신앙이라는 말로 표시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관성적인 신앙은 왜 생기느냐 하고 연구한 결과, 신앙의 씨라는 것이 중생할 때에 생긴다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씨’라는 표상 용어는 단순히 한 가지만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8장 11절에는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비유해서 쓰기도 했고,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셨는데, 여기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희를 구원해서 중생했다는 그런 의미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엄격하게 자꾸 해석해 보면 중생의 새 생명을 심어 주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차츰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왜 그것을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자꾸 나오는데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면 큰 착오가 생기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신앙의 씨’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씨입니다. 이 신앙이 씨가 있으면 씨에서부터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관성적 신앙이라는 사실이 나옵니다. 하비투스 피데이(habitus fidei)라고 하는 것인데 영어로 하면 habitual faith 혹은 habit of faith라고 해서 신앙의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악투스 피데이(actus fidei)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처음에는 이 두 가지만으로 나눠서 생각하고 나가다가 나중에 개혁신학에서 깊이 생각한 결과 ‘이 두 가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하비투스 피데이가 아니다. 그것이 나오는 데는 기본적으로 세멘 피데이라는 것이 있다.’ 하고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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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전 목사님 이 강설이 왜 {양무리 마을}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연속적인 중생론”을 뒷받침하는 강설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속적인 중생론인가, 순간적인 중생론인가?” 하는 논쟁과 관련해 이 강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른바 “순간 중생론자”로서 저에게는 김홍전 목사님 이 강설은 ‘세멘 피데이(신앙의 씨)는 중생으로 표현할 수 있고, 하비투스 피데이(신앙의 습관)는 세멘 피데이(중생)의 발현, 즉 성화의 과정으로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악투스 피데이(신앙의 행동)은 중생자가 성화의 삶을 살면서 맺는 열매다.’로 이해가 됩니다.

 

    다음은 위 강설과 바로 이어지는 강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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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왜 씨라는 말로 표시했을까요? 씨라는 것은 심으면 자라나는 것입니다. 자라나면 씨만 있는 것이 아니고 줄기가 나오고 가지가 나오고 순도 있고 잎도 피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사람에게서 씨와 같이 시작해서 나중에는 신앙의 줄기가 나오고 가지가 나오고 잎도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서 풍성하게 돼 나가는 것입니다.

 

    씨가 땅속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처음에 받았을 때 상태 그대로 확대돼서 커 가는 것은 아닙니다. 씨가 확대돼서 점점 크는 것이 아니라 씨 자체는 없어지고 씨와는 다른 형태의 나무줄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씨와 비교하면 모양이 아주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잎이나 줄기나 가지나 꽃은 열매가 아니니까 주의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드렸습니다. 언제든지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열매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굉장하게 가지가 무성할 수가 있고, 잎이 무성할 수가 있지만 열매를 안 맺으면 무성한 이파리를 가진 무화과나무같이 저주를 받기 쉬운 것입니다.

 

···(하략)···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열매임

 

    이와 같이 신앙의 씨에서도 무엇이 나오는데 그것은 첫째로 신앙을 늘 관성적으로 작용시키고 발휘시키는 것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신앙의 구체적인 행동이 나옵니다. 이 ‘악투스 피데이’라는 것은 훨씬 결정적이고 현저하게 신앙으로 자기를 보여주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결실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행동 그것 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고 그로 말미암은 결실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니까 신앙을 “씨”라고 할 때에는 결국 열매를 상상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열매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네가 열매를 맺어라. 너를 밭으로 해서 씨를 심고 열매를 맺도록 하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신앙의 관성이 생기고 행동이 생겨서 이런 관성과 행동이라는 것은 주로 외부에 무엇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데에서 신앙을 입증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신앙에 관해 설명할 때에는 주로 행동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신앙에 대해서 신학적인 이론을 하실 때에 신앙의 기본과 여기서 말하는 ‘세멘 피데이’ 문제 같은 것도 들어 가지고 척척 이야기해 나가셨지만, 그것의 실효성에 관해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을 늘 열매를 가지고 따지십니다.

 

    야고보서는 독특하게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아무 행동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씨가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앙에 대해 말할 때에는 신앙의 행동에 관해 말합니다.

 

    신앙에 대해서 제일 알기 쉽고 파악하기 쉬운 것이 행동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께서도 ‘멍에를 메라. 내 짐을 져라.’ 하는 어떤 독특한 행동과 일생의 행보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구원의 신앙’ 확증으로 삼으시고 이런 ‘구원의 신앙’ 확증이라는 것이 그에게 참된 평안을 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된 평안이 확실한 기초적인 사실로서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신 말씀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같은 심정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네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저절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인격을 가지도록 성경이 가르쳐 준 그 방법에 의해서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터득해야지 강제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히 구별해 놓고 내가 중생케 했으니까, 다 예수같이 만들어 준다.’ 그렇게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할 때에 다른 여러 가지 속성을 다 말하지 않고 온유와 겸손,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하필 이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가 하면 이 평안에 그것과 관계된 조건들이 붙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그런 것에 대해서 더 공부를 하겠습니다.

 

기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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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무리 마을} 연속적인 중생론 관점에서는 위 “씨 자체는 없어지고 씨와는 다른 형태”라는 김홍전 목사님 말씀을 ‘제2의 중생’을 뜻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홍전 목사님 ‘신앙의 씨’에 대한 위 강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이와 관련된 김홍전 목사님 강설들을 시간이 나는 대로 싣겠습니다.

 

 

댓글 9

 

 

    강릉예명 11.12.24. 21:54

 

    피상적으로 얼렁뚱땅보면 이상의 신학적 진전을 통해 ‘세멘 피데이-하비투스 피데이-악투스 피데이-열매’라는 일련의 과정 곧 연속적 단계를 구원의 속성으로 재발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전에는 하비투스 피데이, 악투스 피데이가 열매를 내는 것처럼 생각했는데 성경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이 아니라 세멘 피데이가 바로 열매를 내는 근본임을 개혁자들이 새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 강릉예명 11.12.24. 21:55

 

    그래서 하비투스 피데이, 악투스 피데이는 그것이 참된 생명의 씨인 세멘 피데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면 죽은(생명이 없는) 근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결코 열매를 낼 수 없고 그러므로 열매를 내지 못하는 어떤 하비투스 또는 악투스 피데이도 참된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와 같은 신학적 발견은 소위 연속적 중생에의 발견이기보다는 열매에 이르는 참된 생명의 근원이 하비투스나 악투스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강릉예명 11.12.24. 23:00

 

    여기 하비투스와 악투스야말로 구도와 애씀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자의 개혁주의가, 중생(과 회심)은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이 세멘 피데이의 발견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발견들을 특정한 주장에 일치하려는 것에서 좀 아전인수식의 얼렁뚱땅 해석들이 많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나그네 11.12.25. 14:34

 

    목사님께서는 <왜 나는 피터 마스터스의 소위 연속적 중생관을 반대하는가?>에서 ‘구도(애씀) 과정을 중생자의 성화 과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동의합니다.

 

    개혁 신학은 ‘불신자(중생하지 못한 자)에게도 구도(애씀)의 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 과정을 개혁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 부르심에 속한 과정이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이런 구도(애씀)을 길을 걸었던 불신자의 경우를 들자면,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아덴 사람들입니다.

 

┗ 나그네 11.12.25. 14:39

 

    바울 사도께서는 아덴 사람들을 두고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고 말씀하시며 그들 역시 하나님 “그분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걷는 구도(애씀)의 과정은 하나님 “율법의 일이 그들 마음에 새겨진”(참고: 로마서 2장 15절) 불신자가 “본성으로 율법의 일”(참고: 로마서 2장 14절)을 행하는 과정입니다.

 

    물론 이 과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의 은혜인 ‘유효한 부르심’이 아닌, 불신자가 핑계치 못하게 하는 ‘보편의 부르심’에 속한 과정입니다.

 

┗ 나그네 11.12.25. 14:40

 

    또한 주님의 공생애 때 이 과정을 걸었던 사람은 ‘구약성경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보편의 부르심’에 속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적극 나섰던 사울 역시 이 구도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께서 복음 전하기 전까지 복음과 접촉이 없었던 아덴 사람들’과 다르게 니고데모는 주님과 직접 접촉해 복음을 들은 사람이었고, 사울은 스데반 집사께서 전하신 복음을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 나그네 11.12.25. 14:41

 

    제가 여기에서 말씀 드리고 싶은 요점은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아덴에서 전하신 복음은, 아덴에 이른바 “초기 중생자”가 있다고 바울 사도께서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 초기 중생자를 이른바 “제2의 중생자”, 이른바 “참된 중생자(완전한 중생자)”로 낳으려고 전하신 복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데반 집사께서 전하신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나그네 11.12.25. 19:27

 

    즉, ‘{양무리 마을}<연속적인 중생론>은 불신자(중생하지 못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케 하시는 <보편의 부르심>에 속한 복음 전도를, 이른바 “초기 중생자”를 이른바 “제2의 중생자로서 참된 중생자”로 낳기 위한 전도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나그네 11.12.25. 19:29

 

    물론, ‘교인들을 상대로 교회에서 복음 전도가 있어야 한다.’는 {양무리마을} 이른바 “연속적인 중생론”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교인들 가운데 이른바 “연속적인 중생” 과정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동의하는 것이 아닌, ‘교인들 가운데 유사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생하지 못한 불신자, <보편의 부르심> 과정에서 구도(애씀)의 길을 걷고 있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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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씨’에 대한 김홍전 목사님 강설은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4ux/167

 

김홍전 <단번에 주신 믿음: 믿음의 씨(semen fidei)>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4ux/152

 

김홍전 <믿음의 씨(semen fidei):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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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강요된 은총 | 작성시간 13.12.29 중요한 예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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