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에 대한 오해
중생을 별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중생이라는 말을 여기다가도 둘러씌우고 저기다가도 둘러씌워 혼동이 생기고 있는데 매우 심각한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귀중한 도리를 그만 적당히 생각해서 개과천선하는 것도 중생이고, 부흥회를 통해 죄를 느끼고 마음이 찔려서 울고 난 다음에 이제 조금 의롭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하는 감상적인 심정도 중생이라고 하면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부흥회에 가서 “중생하게 해 줍소서.” 하기도 했는데, 여러분 이런 것들도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모여서 특별기도회를 가졌는데, 거기서 모두 울고 일어나서 중생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더란 말입니다. 그런 현실의 교회라면 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명확하게 쓰여 있는 거룩한 도리를 혼동해서 자기 기분대로 말쟁이같이 아무것에나 그런 말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죄라는 말도 주의해야 하고 중생이란 말도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은 명확한 개념을 규정해 가지고 그런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한 발을 내딛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느 때에 중생했느냐 하는 것을 규정하기가 어렵고 그렇게 못할뿐더러 또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중생한 사람으로서 몇년 몇월 며칠 몇시에 중생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혹시 맞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많은 경우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중생에는 사람의 어떤 공로도 거기 가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어떤 작용도 가담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도리를 믿었다는 것도 중생을 일으키는 대가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중생을 일으키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시는 것뿐이지요. 중생의 사실 가운데 먼저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속에다 심어 주신다면 우리로서는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를 뭐라고 표시할 수 없는 어린아기나 또는 의식이 전혀 없이 숨만 쉬고 있는 환자에게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중생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 그렇습니다’ 하고 받고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울어야 중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대권의 행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권 행사에는 사람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을 붙인다면 그것은 개혁 교회가 가지고 있는 바른 신앙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거스틴을 대적했던 펠라기우스의 생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르미우스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 교회는 아르미니우스의 그런 생각을 정죄하는 도르트 총회의 결의를 신조로 받아들인 것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뿐 아니라 도르트 교회 회의 결정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대권 행사에 의한 것인즉 사람의 어떠한 조건도 거기에 용훼(容喙)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의 성화의 생활에서는 명백하게 사람의 의식 활동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화는 그것 자체가 성신님께서 내 안에서 내 의식의 발전과 함께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 자체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음 시간에 좀 더 구체적인 데로 들어가서 영생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들을 읽어가면서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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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전 {그리스도 안의 유아}(서울: 성약출판사, 1998) 175~177쪽. *
*) 이 글은 2011년 12월 초에 네이버 {SDG 개혁신앙연구회}에서 있었던 연중론 비평 토론 때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