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보수(개혁) 신학의 주축을 이뤄 온 거성巨星 가운데 한 분이 존 머레이(John Murray)이다. 그는 그레샴 메이천과 코넬리우스 반틸 등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칼빈 연구의 권위자로서 벤자민 워필드를 계승한 점에서 높이 평가돼야 할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우리 한국 교계에 알려진 것은 그의 이름과 몇 권의 저서 뿐, 그의 생애에 대한 소개가 별로 없다. 그러므로 그의 간단한 전기를 담은 책자, 이안 메레이가 편집하고 ‘믿음의 깃발 출판사’에서 1975년에 펴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존 머레이]에서 발췌해 머레이를 소개한다.
존 머레이는 아버지 알렉산더 머레이(1853~1942)와 어머니 캐서린 로간 사이에서 6 남 2 녀의 막내로, 스코트랜드 하이랜드에 있는 남부 수더랜드 현, 크레이크 교구 베드비아(Babea) 마을에서 1898년 10월 14일에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벚나무로 무성하게 뒤덮인 절경의 명소였다. 그의 아버지 알렉산더는 27세에 장로 안수를 받은, 신앙심이 깊고 경건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생업에도 충실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경건과 노동이 조화를 이뤘다. 이러한 아버지의 신앙과 생활의 일치는 아들 존에게 크게 영향을 줬다.
존 머레이는 1919년(22세) 가을에 글라스고우대학에 입학해 논리학, 도덕, 철학, 교육학, 수학, 라틴어, 영문학 등을 4 년 동안이나 공부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1 년 더 공부한 것이었다. 그는 1923년(26세) 6월 20일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시절에 수학과 신학을 특히 좋아해서 ‘수학을 계속 공부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9장 16절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는 말씀에 의해 목회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그는 그때 자유 장로교회 정회원이었고, 1922년에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할 것임이라.”[사 9:6]는 제목의 처녀 설교를 한 일도 있다.
그는 자기 교구 신학교에서 탁월했기에 교회 추천으로 1924년(27세) 여름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할 수 있게 됐다. 그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진을 보면 벤자민 워필드가 1921년에 소천 받아 없었지만, 찰스 핫지 손자 C. W. 핫지, 게할더스 보스, W.B. 그린 2세 O.T. 앨리스, 그레샴 메이천이 등이 있었다. ㅡ머레이가 수학한 때에 우리나라 박형룡도 함께 공부했다.ㅡ 머레이는 1927년(30세) 5월에 신학사 학위와 신학석사 학위를 함께 받았다. 그리고 그해에 본국 스코트랜드로 귀국했다.
1929년(32세)에 존 머레이는 프린스턴신학교 조직신학 강사직을 수락하고 미국으로 다시 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가 다시 왔을 때 프린스턴신학교는 이미 이전의 프린스턴신학교가 아니었다.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기본 진리 가운데 몇 가지를 부정하거나 파괴한 선언,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에 미국 장로교 교단 산하 천삼백 명에 달하는 목사들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장로교회에 자유주의 신학 물결이 거세게 일게 됐던 것이다. 프린스턴신학교 다수 교수들은 이러한 자유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린스턴신학교 J. 로스 스티븐슨 총장과 C.R 어드만 교수가 교단의 위험천만한 좌경을 묵인하며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두 자유주의자들은 미국 장로교회 총회로 하여금 프린스턴신학교 조사 보고 위원회를 구성하게 했다. 그리고 스티븐슨은 “프린스턴신학교가 전천년기론 근본주의 성경학교와 같은 우경화하는 학교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총회에 보고했다. 다수 교수들을 대표하는 가장 융변적인 대변인이었던 그레샴 메이첸은 그러한 스티븐슨의 비난을 논박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미국 장로교회에게 프린스턴신학교 교수단이 반대를 받고 있는 참된 까닭은 역사적 기독교로부터 일탈해 표류하고 있는 신앙의 순수성에 대한 열심이 지금은 반칙적인 죄과로 간주돼 버린 탓이었음을 천명했다.
다수의 교수단은 오직 지금까지 프린스턴신학교가 사투하면서 고수해 왔던 진리만을 위해서 투쟁하기를 원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정확무오성과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 체계인 개혁주의, 즉 칼빈주의의 교리 체계를 활발하게 변증하고 선포하는 일”을 고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메이첸은 예언하기를 “프린스턴신학교가 무너지면 그것은 현대 교회사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는 것이 되리라.”고 했다.
그런데 프린스턴신학교 이사회가 교수단을 지지하고 총장인 스티븐슨을 지지하지 않게 되자, 조사 위원회는 이사회 수를 늘릴 것을 건의했다. 그리해 1929년 미국 장로교 총회는 오번 선언의 두 서명자들을 새로운 이사회에 임명했던 것이다.
32세의 존 머레이가 조직신학 강사직을 수락하고서 뉴 저지의 프린스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케 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총회의 결정이 있기 전에 강사직을 수락한 까닭에 어찌할 도리가 없게 돼 버렸다. 그때 총회의 결정을 반대한 메이천과 R.D. 윌슨과 O.T. 앨리스는 1929년 7월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워 개강하기에 이르렀다.
존 머레이는 프린스턴신학교를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프린스턴신학교가 견지했던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 구원에서 부패한 인간의 완전 무능력,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기인한다.”는 교리 등을 전심으로 확신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필라델피아의 파인가(Pine Street)에서 시작했을 때였다. 교수진을 확보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게 됐다. 윌슨과 엘리스 박사가 구약 분야를, 폴 울리(1923년 프린스턴신학교 졸업)가 교회사를, 코넬리우스 반틸(1928년~1929년 프린스턴신학교 기독교 변증학 강사)이 기독교 변증학을, N.B 스톤하우스와 메이천이 신약 분야를 맡아 가르치게 됐다. 그런데 조직신학을 담당할 사람이 없었다. R.B 카이퍼 박사가 1 년 동안 조직신학을 임시로 가르쳤다. 이때 그레샴 메이쳊 박사는 직접 존 머레이에게 그를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한다는 서한을 1930년 7월 25일에 써 보냈다. 머레이는 그 서한을 받고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그해 9월 옮겨 왔던 것이다. 머레이 나이 33세였다.
존 머레이는 소원은 벤자민 워필드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주석가요, 성경 신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로마서 주석을 37세 때에 써 냈다. 그는 철저하게 성경을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힘쓴 개혁주의자였다. 한두 가지 실례를 들어보면:
...(실례 생략)...
1974년(77세) 연말 갑작스럽게 그의 건강은 악화됐다. 그는 이듬해인 1975년 4월 14일 자기를 방문해 준 멜콤 맥도날드에게 자기 임종을 임박했음을 알리면서 고향에 있는 크레이크 교회에 장사지내 줄 것을 부탁했다.
1975년 5월 8일 오전 7시이었다. 자기 가족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탁하는 한 마디 기도를 드렸다. 30 분 후 심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하나님이시여, 이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가 이렇게 최후의 기도를 드린 순간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 들었다. 낮 12시 30분 존 머레이는 주 예수님 품 안에서 잠들었다. 머레이 나이 78세였다. 장례식은 고향에서 5월 13일 화요일에 거행됐다.
머레이 대표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저서 생략)...
* 존 머레이 {칼빈의 ‘성경관’과 ‘하나님 주권사상’}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