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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3(Martyn Lloyd-Jones;1899-1981)

작성자한아름|작성시간12.08.25|조회수951 목록 댓글 0
D. M. Lloyd Jones 의 설교론

-황성훈




목 차

1.로이드 죤즈의 설교관

2.설교의 세가지 유형

3.신학과 설교와의 관계

4.설교행위

5.설교자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6.설교자의 준비

7.설교준비

8.매 설교에 있어서의 준비

9.설교의 조직

10.금기사항

11.무엇보다 설교자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해야 한다.




시작하면서



로이드 죤즈는 설교란 배울 것은 많지만 가르쳐 줄 것은 별로 없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국내에 소개된 많은 강해 설교자들에 비해 로이드 죤즈는 매우 특별한 인물에 속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설교론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설교집 때문에 유명해 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론을 논할 때 이론적인 측면 보다는 실제적인 측면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본 세미나에서는 2회에 걸쳐 그의 설교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발제자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연구는 불가능했고 현재 시중에 나와있는 두권의 책을 텍스트로 사용하였다. 한권은 로이드 죤즈가 직접 강의한 원고를 출판한 "목사와 설교"이고 또 한 권은 정근두 목사의 "로이드 죤즈의 설교론이다. 1부에서는 설교에 대한 전반적인 교훈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2부에서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본인이 발제를 준비하면서 얻었던 유익들이 모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진행해 나가고자 한다.



1.로이드 죤즈의 설교관



로이드 죤즈에 의하면 설교의 대부분의 문제는 잘못된 설교관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그는 설교에는 두가지 기본요소가 있다고 본다.1)설교문.(message) 2)설교문의 전달행위 (preaching) 설교문은 두가지로 구분된다. 1)설교의 내용 2)설교의 형태. 따라서 그의 설교관은 세 가지 주요한 측면으로 구분된다. 1)설교의 내용 2)설교의 형태 3)설교의 전달



설교의 정의 - 설교란 전인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이 설교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그 설교를 듣는 자 안에서 일어나고, 무엇인가가 체험되며, 그렇게 되어 설교가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2.설교의 세가지 유형



1) 세가지 유형의 설교의 기초로서의 청중분석

설교자는 청중들의 상태를 분석하고 설교를 준비할 때에 그리고 메세지를 전달할 때에 그것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청중 분석이 그들에게 어떵게 설교해야 하는가를 부분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청중의 상태에 따라서 성경의 모든 메세지를 세가지 특별한 유형에 담아서 전해야 한다. 로이드 죤즈는 이 청중분석이야말로 모든 좋은 가르침의 기초적인 부분이요, 제일 첫째가는 원리라고 생각한다.

로이드 죤즈는 먼저 청중들의 상태를 영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한다. 설교자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너무 쉽게 그들을 신자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그들릐 영적상태에 관한한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그들이 육신에 속했든지, 아니면 영에 속했든지 이다. 설교자는 이것을 올바로 분별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청중들의 상황과 현실에 민감해야 한다. 그들의 문화적 정신적 상태와 지적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특정한 상황에 있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적절한 것인지 알아야 하며 또한 진리의 특정한 측면이 특정한 경우에 적합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로이드 죤즈는 설교자는 자신의 진전 단계나 청중의 성숙도에 따라서 전달하는 방식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설교의 목적은 결국 사람들을 돕는 것이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끄는 것이며 우리의 거룩한 신앙 안에 그들을 세우는 것이기 때분이다.그러므로 재적응하도록 항상 준비하라고 강조한다.

그는 그의 이론과 실제를 바탕으로 세 가지 유형의 설교를 추천하고 있다. 1)불신자에게 하는 설교. 2)신자에게 경험적으로 하는 설교. 3)신자에게 순수하게 교훈적인 설교.- 복음의 전제성에 대한 교훈이다.



2) 전도설교

로이드 죤즈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 때분에 틀림없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추정하거나 신자들의 가정에서 세례를 받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경향에 대해서 개탄하고 있다.명목상의 기독교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적인 의미의 전도설교를 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절대적인 법칙으로 삼고 있다. 전도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근거로는 살전 1:9,10과 행 20:17 - 21을 들고 있다.



3) 체험적인 것으로서 교훈을 주는 설교.

오늘날 설교에는 경험적인 강조가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로이드 죤즈는 보았다.왜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그릇된 경향때문이다. 그 중의 하나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고도의 지적인 태도를 가지고 엡1장 3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축복을 구해야 할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이미 모든 축복을 다 받았다고 생각하는 무리이다.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경험에 대한 어떠한 강조도 싫어하며 대개 영적으로 건조하고 강팍하고 열매맺지 못하는 삶으로 귀착된다. 로이드죤즈에게는 기독교는 경험만은 아니지만 경험적이지 않은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자에게는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설교가 필요하다. 이 유형의 설교가 가지는 기본적인 성격은 신자의 경험 정황 속에서 진리를 설명하는데 있다. 그는 교리를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경험적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예는 엡 3장의 설교에서 발견된다.



4) 순수하게 교훈적인 설교

로이드죤즈는 그의 사역 초기부터 교리적인 설교에 강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교리적인 설교의 대표적인 경우는 금요일 저녁마다 정규적으로 설교한 로마서 강해를 들 수 있다. 이런 식의 연속 설교를 통하여 성경의 핵심 교리를을 독특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진리(교리)의 결여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요한 문제가 되어 왔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죤즈는 성경적 교리의 전 영역을 설교했지만 특히 이신칭의의 교리와 성경적인 거룩교리를 그의 교육적 설교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로이드 죤즈는 거룩교리에 관해서 웨슬레의 가르침을 알미니안 주의로서, 피니의 가르침을 펠라기안 주의로서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케직 메세지의 일반적인 경향도 불완전한 거룩 교리로 간주한다. 이러한 가르침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칭의와 성화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고 설교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제2의 경험, 제2의 축복을 강력하게 부인한다. 거룩은 느낌이나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 가운데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3.신학과 설교와의 관계



설교란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를 보편적인 명제로 한다. 설교자는 메세지의 통일성을 위하여 조직신학을 잘 알아야 하며 또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신학에 정통해야 한다. 조직신학의 바른 사용은 다루고 있는 본문 가운데서 특정교리를 발견할 때 그 교리를 중대하고 진수가 되는 전체 성경 교리에 비추어 보고 그것에 들어 맞는 가를 확인해 봄으로서 그 교리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설교의 형식



1) 설교는 수필이 아니다.- 수필은 읽도록 쓰여진 것이고 설교는 맨 먼저 말로 전해질 것과 들을 것을 의도한 것이다. 수필에는 문학적 격조와 독특한 형식이 있지만 있지만 설교에 있는 제일되는 절실한 요구가 하나도 없다. 수필은 반복이 금물이다. 그러나 설교는 반복하는 것이 좋다. 반복은 가르침과 설교의 진수가 된다. 반복은 요점을 강화하고 뚜렷이 해 준다. 설교자의 위험은 한 가지 사상만을 얻기 위해서만 본문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얻을려고 하는 사상을 얻고 난 다음에는 성경 본문이나 문맥을 떠나서 그 절이나 구절을 읽으므로 떠오른 생각에 대한 하나의 수필을 써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설교가 아니다.



2)설교하는 것이 강의하는 것과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 - 강의는 한 가지 주제를 시작하여 이 특정한 주제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주게 된다. 설교의 호소는 전부 마음에 하는 것이다. 강의의 목적은 교훈을 주고 어떤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의는 도전의 요소, 즉 청중에게 무엇을 해 주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결핍하고 있다.



3) 설교는 항상 해석적(강해적)이어야 한다. - 그러나 이것은 일련의 주해를 덧붙이거나 한 절이나 한 구절, 문단에 대해 주석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강해를 기초로 하여 이것을 메세지로 변환을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란 하나의 교향곡이 일정한 형식을 갖추는 것처럼 항상 분명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설교의 부분은 전체에서 일정한 의미를 가져야 하며 전체는 하나의 완성체로서 각각의 부분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형식을 갖추는 과정을 살펴보자.



1.강해 - 설교자는 강해(해석)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메세지의 소명은 강해로부터 떠오른다.

2.교리추출 - 본문을 정확히 이해했으면 본문의 의미와, 본문에 나타난 교리와 본문에서 말하는 특별한 메세지를 찾을 수 있다.

3.조직화 - 본문의 원리와 명제가 부각되었으면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 원리를 어떻게 밝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 일반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다.



A.개관적인 서론 - 주요 테마와 요지를 지적.

B.각 소제들을 논리적으로 배열 - 설교자는 자기가 뽑은 소소제목들이나 대지들을 연결시키는데 있어서 반드시 앞 뒤가 맞아야 한다. 즉 하나의 문제는 다음 문제로 이끌려가고, 다음 문제는 그 다음 문제로 자연스럽게 유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대지들이나 소제목들이 다음의 대지들이나 소제목들에 반드시 연결되어 결국에는 어떤 일정한 결론에 이르게 되어야 한다. 즉 생각의 진전이 있어야하며 각각의 요점은 서로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C.결론 및 적용 - 적용은 진리를 서술하는 각 단계에서 나타나야 하나 설교의 절정인 결론부분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목표에 맞추어져 다시 한번 적용을 해야 한다. 적용은 질문형식이나 일련의 간결한 질술형식을 취한 권고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적용은 항상 메세지의 핵심에 도달해야 한다.적용의 부분은 다음주에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한 편의 설교는 한개의 완전체여야 한다. 모든 설교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야 하고 반드시 어떤 형태로 모양지워져야 한다. 형식에 맞추는 일이 설교작업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4.설교행위



1)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whole personality)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 설교는 설교자의 품격을 통해서 존재하는 진리이다.



2)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이다. - 설교자는 강단에서 확실한 일을 선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사명을 띠고 권위로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회중에게 압도 당하지 말고 설교자가 회중에게 도전하고 압도해야 한다.



3)설교자는 자유로와야 한다. - 그 자유로움은 순간적인 영감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로움이다.설교하는 일이란 성령의 감화와 능력을 뒷받침하는 행위이고 설교 준비란 설교 내용의 준비를 끝마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는 언제나 성령의 능력과 지배 아래서 행해져야 한다. 설교자는 무엇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자유로와야 한다.



4)설교자는 반드시 진지한 자세로 전해야 한다. - 설교하는 것이 가볍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5)설교자는 열정적으로 설교해야 한다. - 자신이 그 진리에 붙잡혀 있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설교자는 냉담해서는 안된다.



6)설교자는 긴박감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7)설교는 언제나 설득력으로 특징지워 진다.- 설교 행위의 전체 목적은 청중들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8)설교자는 반드시 빛과 뜨거움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 - 뜨거움이 없는 빛은 어떤 사람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빛이 없는 뜨거움은 영구한 가치가 없다. 설교한다는 것은 불붙는 논리, 감동적인 이지가 되어야 한다.



5.설교자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1)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 만약에 설교자가 삶에 대한 경험이 너무 없으면 설교에서 너무 지적이고 이론적인 경향을 나타낼 것이기 때문.



2)성경 전반에 대한 지식이 필요. - 조직신학의 중요성.

성경 원문의 지식은 정확을 기하기 위해 큰 가치가 있다. 설교자는 정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성경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성경신학의 진수를 얻어내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시킬 수 있는 훈련을 샇아야 한다.설교자는 자기의 모든 설교를 그것에 의해 통제를 받는데 아주 익숙해 있어야 한다.



3)교회사에 대한 폭넓은 관심이 있어야 한다. - 역사는 우리를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 준다. 교회사는 교회 역사상 있었던 커다란 부흥에 관한 사실을 알게 해 준다.또한 역사에 나타난 신앙의 인물을 통하여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된다.



4)설교의 기교나 기술은 설교자에게 오히려 해로울 뿐이다. - 설교자는 언제나 꾸밈이 없어야 하며 자신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에 있어서 자기의 손을 의식하게 되고 자기의 머리로써 무엇을 한다는 의식을 하게 되면 크게 해로울 뿐이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방법이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영혼에 대한 사랑이요, 진리에 대한 앎이요, 그 안에 있는 성령이다. 이것이 설교자를 만드는 것이다.



6.설교자의 준비



1)좋은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는 항상 준비하는 자세로 생활해야 한다. 설교자는 그의 소명의 본질과 성격 때문에 자기의 사역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그의 준비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제일되고 가장 중요한 일은 그의 설교가 아니라 자신을 준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무엇인가?



1.아침을 보전하라.

2.자신이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연구를 계속하라.



이 말은 이 훈련의 문제가 그 사람 자신에게 돌려야 할 문제라는 뜻이다. 아무도 그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을 말할 수 없다. 그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려 하거나 하나님의 영광과 건덕과 영혼구원을 위해 목회하고 싶은 영적인 참된 설교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2)기도 - 기도하고 싶은 모든 충격에 대해 언제나 반응을 보이라.



3)성경공부

1.읽기(통독) - 맥체인의 성경읽기표에 의해 최소한 구약 1번 신약2번 시편2번.

2.연구 - 성경의 어느 한책을 놓고 참고서적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연구.



*설교본문을 찾으려고 성경을 읽지 말라. 자신의 선과 덕성함양을 위해 읽으라.

*만일 한 구절이 유별나게 부딪혀오면 거기서 멈춰서 그 구절에 귀를 기울이라. 설교의 뼈대를 완성할 때까지 본문과 대화하라. 그리고 그것을 종이에 기록하여 철을 해 두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힘을 낼 때에는 이런 자료가 많이 쌓이게 된다. 이것이 쌓이게 될때 우리 영혼이 메마르고 무기력해지고 클클할 시기에 의지할 무엇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우리의 생애에 다양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4)독서 - 독서를 위한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1.청교도에게 배우라.

john owen

richard

jonathan edwards

2.신학서적 - 특별히 성경신학

3.교회사 - 설교자에게 큰 가치가 있다.

4.변증학 - 신학의 조류를 알기 위해서

5.정기간행물과 잡지



*독서의 균형을 유지하라. 지나치게 지적인 독서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라. 이 모든 독서의 목적은 설교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 아니다. - 목회자의 직업병.

*우리가 독서를 하는 목적은 정보를 얻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독서가 우리 마음에 가장 훌륭한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극이다.

*일반적인 독서는 마음의 휴식을 위해 필요하다.



7.설교준비



1)연속설교를 할 것인가, 아니면 단편적 설교를 할 것인가? - 성령의 자유하심을 고수하고 그것을 다치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한때는 따로 떨어진 본문에 입각해 설교하게도 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연속된 설교를 하게도 하신다.



ex)영적 침체



2)우리가 설교하고 있을때 성령께서는 설교 준비 시간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많이 우리를 사용하신다.- 우리는 충분한 준비와 함께 성령의 자유로우심을 유지해야 하고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교는 언제나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3)어떤 특별한 절기나 사건이 있을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적당한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다. 이런 날들은 설교자를 위해 만들어진 기회이다.



*여러분이 세상이 다 아는 대연속설교를 계획했다 할지라도 지진이 나거든 그것을 멈추라. 만일 지진이 나도 여러분의 꽉 짜여진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희망은 절벽이다.



*목회 초기에는 하나님께서 설교본문도 주시고 설교 내용을 주실 것이고 때로는 완전한 설교 내용까지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간 다음에는 본문을 연구하고 땀과 노력을 쏟아야만 얻어질 것이다.



8.매 설교에 있어서의 준비



1)해당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취급해야 한다. - 본문에 정직하라.

본문의 의미의 일부만 잡아 낸다든지 주변 진리만을 뽑아서 사용해서는 안된다.



2)본문은 언제나 문맥 가운데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 본문에서 자기의 논리를 입증하는 아이디어만 을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정확해야 한다. 본문에 대한 영적의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설교자는 해당 본문과 대화해야 한다. 본문은 우리에게 말해야 하고 우리는 또 본문에게 말해야 한다. 본문에 질문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 무리를 가하면 안된다. 한 본문을 깍아 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설교를 희생해야 한다.



3)그 후에 원어 사전이나 주석들을 참고하여 얻은 본문에 대한 이해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설교는 본문에 있어서의 주요핵심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대원칙이다.



9.설교의 조직



1)서론 - 본문의 핵심 메세지를 발견한 다음 로이드 죤즈는 그것을 본래적인 정황과 적용 안에서 소개한다. 연속 설교의 경우에는 앞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함으로써 연속 설교 내에서 특정 설교의 정황을 소개한다.그는 또 자기가 설교하는 사람들의 현재적 정황 즉 오늘날의 관련성을 보여 준다. 전도 설교를 제외하고는 로이드 죤즈는 대체로 사람과 그들의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투사적 방법"을 채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강해적 방법을 따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의 상관성을 주어진 상황에 보여 주는 것이다.상황으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상황에서 끝을 내십시요." 다시 말해 그의 서론은 본문으로부터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분석을 설교의 서론으로 대개 활용한다.



2)본론전개 - 서론을 소개한 다음에 로이드 죤즈는 반드시 몇가지 대지로 나누어 주제를 발전시킨다. 설교 서론에서 밝힌 여러 주제들을 자세히 순서대로 다룬다. 다시 말해 서론에서 기본 원리를 설정한 다음에 설명과 적용에서는 여러가지 논증들을 자세히 전개한다. 주제들을 대지로 나눌때 그는 유기적인 혹은 자연스런 구분을 매우 강조한다. 그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유기적인 구분이라는 것은 대지 사이에 무게 중심이나 길이가 똑같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지마다 상당히 다르다. 왜냐하면 그의 대지구분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대칭적인 균형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문제에 대한 기계적인 법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이드 죤즈에게 있어서 이 문제에 관한 중심원리는 형태가 주인노릇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지 구분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중심주제를 분명히 하는데 있다.설교 준비의 수고가 필요한 곳이 바로 여기라고 그는 생각한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것을 전달할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의 주제를 망치질해서 설교의 틀에 맞추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3)결론 - 로이드 죤즈는 결론에 상당한 무게를 부여한다. 설교에 있어서 중심주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결론이 절정에 이르도록 하느 데 목표를 둔다. 그의 설교문에서 결론을 분석해 보면 결론을 내리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정해진 범주로 일률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동일한 결론 가운대도 여러가지 결론 방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형태를 말할 수 있다. 요약형태, 인용형태, 의문형태, 기도형태, 축도형태, 호소와 권면형태 등이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모든 설교는 절정에서 끝나야 한다.



4)몇가지 교훈

*준비하라. 그러나 지나친 준비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너무 완벽하게 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설교내용 자체가 목적이 될 정도로 과하게 준비하지는 말아야 한다.



*인용거리를 생각해 내려고 애쓰지 마라.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음 속에 인용구가 생각이 날 때만 사용하라. 그 인용이 진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만 사용하라.



*설교자는 언제나 성장하고 전진하고 발전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 젊은 날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중년이나 노년에는 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모방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매우 위험한 일이다.



10.금기사항



1)직업주의를 피하라. - 직업적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기술에 굉장한 관심이 있다. 다른 설교자를 모방하고 그가 본 것을 설교의 기교에 도입시키는데에 관심이 있다.



2)지식의 과시를 피하라. - 독서의 이유가 그것을 전시하고 지식을 선보이기 위해서라면 나쁜 것이다. 그중 가장 큰 위험은 준비한 것에 의지하는 것이다.



*자신의 강점에 주의하라. 우리의 강점,탁월한 점, 재능과 적성은 우리를 넝어뜨리기 가장 쉬운 것

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특이하려고 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3)설교내용 자체가 너무 지적인 것을 경계하라. - 청중들 가운데 지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4)지나치게 논증 가운데 빠져들지 말라. - 과도한 논증은 부정적인 영향만을 줄 뿐이다.



5)풍자를 할때 조심하라. - 청중들이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오해할 여지가 많다. 풍자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위험한 무기임을 인식하라.



6)전달방법에 있어서 부자연스럽거나 꾸며서 하는 행동을 피하라. 목사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말라.



# 자유로우라. 자신을 잊으라. 설교하는 일에 열중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존전이라는 것을 항상 의식하라. 전하고 있는 진리의 영광과 위대성에 몰두하라. 그러면 자신을 잊게 될 것이다.



*같은 설교를 반복하는 문제 - 한 설교를 되풀이할 때 설교가 더 좋아지고 진리가 더 잘 전달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면 같은 설교를 몇번이나 반복할 수있는가? 숫자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의 규칙은 그 설교가 설교자를 더 이상 사로잡지 못하고 감동시키는 것을 그 설교를 다시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한 설교를 반복할 때는 날짜와 장소를 기록해 두라. 그렇지 않으면 궁지에 몰릴지도 모른다.



11.무엇보다 설교자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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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설교 논문 자료
글쓴이: 김유미 번호 : 31조회수 : 172004.11.16 02:17
제 1 장 서 론


제 1 절 연구의 필요성




강단에서 설교의 영향력이 점점 사라져 가고, 설교에 대한 확신이 점점 더 모호해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조국 교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서,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으며, 실제로 설교문을 작성하고 설교하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귀감이 될 만한 설교자를 선택해서 그의 설교를 연구하는 것을 통하여 설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시 확인하는 작업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왜 이 작업이 필요한가? 지금 우리 나라에 출판되어진 책으로는 정근두 목사의 「마틴 로이드 죤스의 설교론」이라는 책과 토니 사전트의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라는 두 책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책은 어느 정도의 분량이 있기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그의 설교에 대해 집약적으로 한 눈에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논문은 로이드 죤즈에 대한 어떤 새로운 설교학적 발견물은 아니지만, 신학생들에게서 로이드 죤즈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고, 또 그에 대한 논문도 희박한 상태에서 그의 설교의 특징을 정리해보는 것 자체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로이드 죤즈의 설교를 연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논문은 입문서로서의 충분한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제 2 절 연구사




로이드 죤즈의 설교를 연구한 것으로는 그의 설교 방식을 연구한 정근두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이 있고, 그의 성령론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 박사 학위 논문이 토니 사전트에 의해 쓰여져 있다. 정근두 박사의 논문은 로이드 죤즈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분석한 반면, 토니 사전트의 논문은 주로 그의 성령론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정근두 목사는 그의 논문에서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데,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근본적인 특징, 로이드 죤즈 설교의 해석학적 원리, 로이드 죤즈 설교의 원리와 방법, 로이드 죤즈 설교의 영적 원리, 로이드 죤즈 설교의 영적 원리 등을 다루고 있다1).

토니 사전트는 그의 논문에서 로이드 죤즈의 설교 방법, 동기,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론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논문에서는 바울 신학이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 미친 영향, 로이드 죤즈의 진단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해석 원리, 로이드 죤즈의 사역의 배경등이 다루어져 있다2).

이 두 논문은 주로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 대해서 다룬 논문들로서 그의 설교 방법, 설교 원리, 해석 원리 등을 공통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제 3 절 연구 개요




우리는 먼저 로이드 죤즈의 생애를 살펴본 후에, 그의 설교의 근본적인 특징으로서 그의 설교관을 일반적으로 고찰하고, 그의 설교 원리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해석학적 원리를 성경 전반에 대한 접근, 본문의 의미에 대한 접근, 본문의 의의에 대한 접근, 특징적인 해석원리, 해석학적인 공헌, 그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으로서 고찰해 볼 것이다.



제 2 장 로이드 죤즈의 생애




마틴 로이드 죤즈는 당대의 지도급 의사요 왕실 주치의로 일하고 있던 토머스 호더 경의 지도 아래 런던 성바돌로매 병원에서 의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이때 성바돌로매 병원에서 받은 훈련은 나중에 그의 설교 테크닉과 목회 사역의 기초가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사로 사용하시기 위해 그때 이미 자기를 준비시키셨다고 믿었다.

호더 경은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에게 소크라테스식 진단법을 심어 주었다. 즉 사실들을 수집한 다음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그 사실들을 가지고 추론하라고 가르쳤다. 로이드 죤즈는 자신의 설교에서나 사람들의 영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목회자들에게 조언할 때 바로 이 방법을 썼다.

그는 1922년 호더 경의 임상 조교 장으로 임명되어 할리 가에서 돈벌이가 잘 되는 의사로 일할 전망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보다 사람들 자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18개월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하던 끝에 마침내 그 부르심을 받아들여 스물 일곱 살 때, 자신의 고향인 웨일즈의 포트톨벗 부두에서 가까운 샌드필즈에 있는 교회 목사로 취임한다.

로이드 죤즈는 처음부터 사회 활동을 벌임으로써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대신 복음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께 인도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노동자 계층도 다른 어느 계층과 마찬가지로 조리 있는 설교를 들을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기독교는 정말 이치에 맞는 종교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의학적 접근법”을 설교에 도입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심하라는 호소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래서 1929년에는 모두 70명이, 1930년에는 모두 128명이 회심한다. 샌드필즈에서 12년간 목회 하는 동안 교인 수는 93명에서 530명으로 늘어났으며 주일 예배 참석자는 약 850명에 달했다.

1932년 휴가 때에 카나다에서 로이드 죤즈는 낙스 신학교의 도서관에서 기름을 먹인 카트리지로 된 붉은 색 벤자민 워필드 저작 집 묶음을 발견했다. 그 저작 집은 새로 구입한 책들을 비치해 두는 선반 위에 꽂혀 있었다. 로이드 죤즈는 그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마다 그 워필드의 책이 꽂혀 있는 선반을 그냥 지나 넘어가는 적이 없었다. 그러기를 여러 날 계속했다. 그는 그 열 권의 책에서 다른 어느 현대 저작자가 쓴 책들 보다 더 큰 황홀감을 느꼈다. 그 책들 속에는 옛 개혁주의 저작들에서와 같이 성경에 뿌리를 박은 신학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 옛 저작들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한 주해를 담고 있었으며, 그 저작 전체를 단순한 학문의 수준보다 더 높이 끌어올린 경건이 배어 있었다. 로이드 죤즈 박사가 조직 신학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한 것이 이 때가 아닌가 싶다.3)

그는 1935년 IVF(현재의 UCCF)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남은 여생 동안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처음에는 그 해에 열린 IVF 대회에서 설교하는 것은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하며, 1939년에는 IVF 회장이 되어 일하면서 IVF에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 놓는다. 그는 성경의 확실한 교리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학생들을 반지성적 유형의 요란한 기독교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리고 정신을 강조하면서 학생들에게 그들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권면 한다. 또 학생들에게 그들 신앙을 그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문과 연결짓는 법에 대해 가르치면서 의학이나 전담 기독교 사역과 같은 전통적 소명뿐 아니라 모든 주요 전문직으로 다 파고 들어갈 것을 촉구했다.

그는 IVF 회장으로서 1939년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IFES) 설립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IVF 산하의 한 단체로 서로 다른 국가와 서로 다른 교단에서 온 기독 학생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이다. 그는 1947년부터 1959년까지 이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IFES로부터 그들의 신앙과 활동의 기초가 될 원리들을 작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의 많은 친구들은 이때 그가 만든 원리들 이야말로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 속에는 “참 교회”에 대한 복음주의 견해도 적혀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틴 로이드 죤즈를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목사로 기억하고 있지만 막상 그의 교인들에게는 “우리 박사님”으로 통했다. 그는 1939년 캠벨 몰간과 공동으로 사역하다가 1943년 캠벨 몰간이 은퇴하면서 담임 목사로 사역한다. 그 교회는 전쟁 중 파손되어 교인들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1945년 이후부터 차차 정상화되기 시작하더니 곧 주일 아침에는 평균 1,500명, 주일 저녁에는 2,000명이 넘게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한다.

그는 오직 성경 및 성경 본문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에 근거하여 설교함으로써 듣는 이들의 정신을 자극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영적 필요도 만족시키려 애썼다. 그는 굉장한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설교할 때는 농담이나 예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설교는 항상 듣는 이들의 필요에 해당되는 것으로 현대적이었다. 주일 아침에는 목회적 설교를, 주일 저녁에는 복음적 설교를 했다. 비록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호소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교인석에 항상 영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교회 부속실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의 쪽지를 붙여 놓았다. 그래서 매주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성경 공부를 인도했는데, 그때는 그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교외에서 온 사람 수 백 명에게 로마서에서 에베소서까지 한 절 한 절 강해해 주었다.

마틴 로이드 죤즈는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는 동안 목회 이외에 두 가지 일에 더 관여했는데, 그는 이 두 가지 일로부터 모두 만족감을 얻었다. 하나는 목사들로 구성된 형제회로, 그 회의 의장이 되어 목사들의 목사가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청교도 대회로, 거기서 해마다 마지막 강연을 했다. 그는 신자들은 절대 자기들이 믿고 있는 개신교의 기본 교리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교회사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충성스런 복음주의자라면 복음주의 신앙의 기본 신조들을 부인하는 교단에 계속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자기네 교단 통합 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보다 오히려 성경적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야기되는 문제점들에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건강이 나빠져 1968년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은퇴한 그는 남은 여생 동안 책을 쓰고 작은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격려하는 일을 했다. 사망하기 전날에는 치료받던 것도 중단하고 구독하던 신물들도 모두 사절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나를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붙잡지 마시오”라고 말했는데, 성데이비드 데이에 평화로이 잠든 채 운명했다.

마틴 로이드 죤즈의 손자이자 전기 작가인 크리스토퍼 캐더우드는 자기 할아버지가 웨일즈인 이라는 것, 칼빈주의 감리교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것, 거기다 대단한 지성과 불같은 감성을 함께 소유한 사람(그래서 그의 설교가 그처럼 폭 넓은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서는 마틴 로이드 죤즈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복음주의에 체계적인 강해 설교를 회복시킨 사람이다. 그는 20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청교도적이요 개혁주의적인 교리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한 사람이다.



















제 3 장 로이드 죤즈 설교의 근본적인 특징




그는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진정한 설교이며, 그것은 역시 명백하게도 세상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4) 그는 현대의 사회상태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은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때 교회가 말씀 전파의 임무를 떠난 데 있다고 한다.5)

그는 설교는 언제고 맨 앞에서야 하며 어떤 것에도 자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6) 그는 복음이 참되게 강론되어진다면 설교자가 전혀 모르는 개별적인 문제라도 성령에 의해서 다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7) 성경을 상세히 파헤쳐 전함으로써 한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8)




제 1 절 설교관의 일반적인 고찰



1. 설교라야만 할 이유




(1) 의문시되는 설교의 위치




로이드 죤즈는 모든 것이 의문시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 가운데서 설교의 위치와 가치 그리고 목적이 의문시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설교의 시대는 끝났고 강단은 과거를 가졌으나 미래는 없다는 말을 듣고 있다. 설교는 죽어 가는 예술이요 낙후된 의사 소통 방법이며 시대 양상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로이드 죤즈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오늘날 교회의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8)




(2) 설교 - 교회의 고유 직무



설교에 대해서 이러한 심각한 공격이 행해지는 시대에 로이드 죤즈는 교회의 기본적인 직무요 목사의 기본적인 직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교회의 고유 직무인 동시에 교회만이 세상의 가장 큰 필요를 채울 수 있고 그러므로 설교자만이 이것을 세상에 알릴 수가 있다. 설교자는 교회에 의해서 이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구별된 자이고 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자이다.9)




(3) 설교 - 교회의 대체할 수 없는 임무




로이드 죤즈는 반드시 설교가 먼저 와야만 하고 이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대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교회가 그 기본 임무를 수행할 때에 세기를 통해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최대의 공헌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죤즈에게 있어서 전도 설교야말로 이러한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실질적으로 다루는 것이지 다른 모든 것은 다만 말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와 의견을 같이 하지 않고, 현대 문제에 너무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지만 그의 논지를 사도들의 결단(행 6:4)과 비교해 볼 때 무시하기는 매우 어렵다.10)

설교는 교회의 기본적이며 가장 중대한 임무이고, 그러므로 목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밖에 다른 모든 것은 설교에 대하여 보조적이고 다른 모든 활동은 목사의 이 기본 임무를 완수하는 것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로이드 죤즈가 다른 목회 사역에 충분한 자리를 주지 않는다고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확신이 없는 로이드 죤즈를 생각할 수는 없다. 이 확신이 그를 탁월한 설교자로 만든 것이다.11)




2. 정의되어야 할 설교




(1) 왜 반드시 정의해야 하는가



그의 근본 주장인즉 강단이 바르고 설교가 참될 때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들으려고 몰려든다는 것이다. 참된 설교가 행해질 때 사람들은 반드시 오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근본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진정한 설교인지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설교문과 아울러 설교 행위에 대해서도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다. 여기에 오늘날 설교의 위치가 하강하는 주된 요인이 있다고 본다. 요약하면 설교관의 잘못 때문에 결과적으로 잘못된 설교가 행해진다. 그러므로 로이드 죤즈는 무엇이 설교냐 라는 핵심적인 질문에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기본 질문에 직면하기 전에는 설교의 기교나 방법 혹은 의사 소통의 문제를 급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달리 말해 참된 설교의 부흥이 있기 위해서는 이 기본 질문에 대한 답을 반드시 발견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참 설교는 설교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설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이 점에서 로이드 죤즈는 몇몇 현대 신학자들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12)




(2) 설교란 무엇인가




그는 설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의 정의는 최소한 설교의 세 가지 면을 포함하고 있다.




1) 설교자의 자질에 대해 함축적인 정의

2) 그의 메시지의 성격에 관한 정의

3) 청중의 신분에 관한 정의




첫째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그는 보냄을 받은 자요, 임무가 부과된 자이며 강단에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선다. 그는 평신도 설교라는 현대적 개념을 거부한다. 평신도 설교는 주로 감리교와 형제단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며 예외적 상황에서 평신도 설교가 행해질 수 있는 것을 수긍하지만 그것을 정상적인 활동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평신도 설교를 반대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거기에 소명의 문제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13)

둘째로, 설교자에게 그 메시지를 위탁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믿는다. 설교자는 자신에게 위탁된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메시지는 설교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개념을 가지고 서지 않는다. 설교의 임무는 하나님에 대해 사변적 사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강해 이며 말씀의 신실한 강해는 하나님 자신이 설교하는 것임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14)

셋째로, 청중의 신분에 관한 그의 정의는 훨씬 실제적이고 비교의적이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설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회중에게 한정한다. 이것은 교의적으로는 그럴 듯하지 못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너무 융통성이 없다. 여기에 로이드 죤즈는 훨씬 성경적인 입장을 따르고 있다. 그는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실천과 일치하는 의미에서 성경의 관습을 따르고 있다. 신약 성경은 소위 언약의 회중에게 한정하지 않고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다.15)

넷째로, 설교자의 임무는 그에게 있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이드 죤즈에게 있어서 설교는 심각한 작업이다.16)

다섯째로, 로이드 죤즈에게 있어서 설교의 참된 기능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신 의식, 하나님 임재 의식을 주는 것이고 진리의 영광스럽고도 감동적인 측면의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일이다. 설교의 임무는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의 충격을 강하게 주어 그 진리를 살아나게 만드는 것이다.17)

설교의 첫째되고 기본적인 목표는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인상을 심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 얻는 핵심적인 유익은 설교가 행해지는 순간 지성에 심기는 인상이다. 로이드 죤즈는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완전히 일치한다. 달리 말해 설교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소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만남이다. 하나님의 실재와의 살아 있는 만남이다. 인격적이고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다.18)




3. 구분되어야 할 설교




(1) 설교문과 설교 전달의 구분




설교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설교문 혹은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이다. 로이드 죤즈는 메시지와 메시지의 전달을 매우 분명하게 구분한다. 로이드 죤즈는 이 두 요소는 서로 다르며 참 설교는 설교문과 설교 행위라는 이 두 요소가 잘 섞여서 구성된다고 본다.19)




(2) 설교문의 구분 : 내용과 형태




로이드 죤즈는 설교문에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구분을 한다. 첫째는, 내용이고, 둘째는 그 내용을 담은 형태이다.20)




(3) 내용의 구분 : 케리그마와 디다케




성경의 메시지는 두 가지 주요 내용이 있음을 로이드 죤즈는 인식하고 있다. 첫째는 구원의 메시지인 케리그마로서 전도 설교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것은 주로 하나님의 존재와 성격에 관한 선포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는, 가르침의 요소, 디다케로서 이미 믿는 신자를 믿음에 굳게 세우기 위한 것이다.21)




제 2 절 로이드 죤즈의 설교 원리




1. 신학적인 설교




(1) 설교의 내용을 지배하는 원리


‘신학적’이라는 용어를 ‘교리적’이라는 용어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신학적 혹은 교리적 설교의 필요에 대한 강조는 그의 동시대의 많은 설교와는 메시지의 내용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 왔다. 그는 특정 본문에서 나온 각각의 메시지도 반드시 총체적인 진리의 한 측면 혹은 한 부분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특정 개별 본문이 지니는 논지의 예리함을 말살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22)



(2) 이 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



이 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① 단일체로 이루어져 있는 전 성경적 메시지를 잘 파악하라.23)

② 설교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고 배경을 구성하는 조직 신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라.24)

③ 개별 메시지를 분리된 것으로 취급하지 말아라.25)

④ 개별적인 본문에 담긴 각 메시지는 더 큰 전체의 한 부분임을 항상 명심하라.26)

⑤ 자가 가진 체계를 어떤 본문에든지 무리하게 적용하려고 하지 말라. 그러나 동시에 이 전체적인 진리로서 해석을 점검하고 통제하라.27)

⑥ 특정한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순간에도 항상 전체를 설명하라.28)

⑦ 알려지고 믿는 바에 근거해서, “그러므로”의 기초 위에서 적용하라.29)




2. 강해적인 설교




(1) 설교의 형태를 지배하는 원리




‘강해설교’라고 할 때 로이드 죤즈는 참 설교의 모든 측면을 서술하지 않고 참 설교의 한 측면인 형태에 관해서만 말한다. 로이드 죤즈에게는 모든 참된 설교는 강해적이지만 모든 강해설교라고 해서 참 설교는 아니다. 로이드 죤즈는 ‘강해’라는 용어를 가지고 참 설교의 중요한 한 측면을 의미하지 그 이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30)




(2) 이 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하지만 이것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요술 처방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① 한 본문의 강해로 시작하라.31)

② 그 특정 본문의 핵심 사상 혹은 교리에 도달하라.32)

③ 그 특정 교리의 상관성을 전개하라.33)

④ 그 특정 교리를 평행 구절로 강화하라.34)

⑤ 주제를 몇 가지 대지로 나누어 그 중심 교리를 분명하게 하라.35)

⑥ 이 대지들을 점진적으로 절정을 향하도록 배열하라.36)

⑦ 말하면서 계속 적용하라.37)

⑧ 설교는 반드시 적용과 권면의 논조로 끝나도록 하라.38)




3. 성령의 능력과 통제 아래서 행해져야 할 설교




(1) 설교의 전달 행위를 지배하는 핵심 원리




로이드 죤즈에 의하면 설교의 제2의 커다란 측면은 설교문의 ‘전달’, 즉 설교의 ‘행위’이다. 전달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움의 요소는 로이드 죤즈에게 매우 중요하다. 로이드 죤즈는 전달이라는 문제는 밝히기 매우 어려운 어떤 것임을 수긍한다. 그는 이것을 지침이나 규칙이나 규정의 문제나 혹은 해야 되고 안 해야 하는 문제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사람이 그것을 들을 때에 깨닫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에 관한 것을 말할 뿐이다.39)




(2) 성령의 지배 하에서 행해지는 진정한 설교에 수반되는 요소




이러한 요소가 진정한 설교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능력 아래서 행해지는 참된 설교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① 로이드 죤즈는 진정한 설교의 첫째 특성을 설교자의 전인격이 내포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필립스 브룩스가 한 ‘인격을 여과한 진리40)’라는 설교의 정의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설교가 효과 있으려면 행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41)

② 그가 강조하는 두 번째 특성은 예배하는 회중과 예배 순서를 지배하는 권위와 통제하는 느낌이다.42)

③ 그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번째 특성은 자유로움의 요소이다. 설교문이 주의 깊게 준비되어도 설교자는 반드시 설교할 때 자유로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설교를 성령의 능력과 영향 아래서 행해지는 활동으로 여기기 때문이다.43)

④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교환이 요소가 중요하다. 설교자는 말하는 중에 어떤 의미에서 영성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무언가를 이끌어 내어야만 한다. 이 상호 작용은 때때로 설교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44)

⑤ 진지함의 요소이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지금껏 생각해 온 것들 중에서 “가장 엄숙한 문제를 다루는” 진지한 자이다.45)

⑥ 활력의 요소는 진지함의 요소가 엄숙함이나 슬픔, 침울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설교자는 생동감이 있는 동시에 진지해야만 한다.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로이드 죤즈는 많은 젊은 개혁주의 설교자들이 매우 지루하고 따분한 설교자인 것을 우려한다. 만약 신자가 자기가 주창하는 교리를 참으로 이해했다면 성경의 그 위대한 주제를 가지고 따분하고 지루한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46)

⑦ 열심의 요소,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만 한다. 열심이란 설교자가 자기가 말하고 있는 바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는 인상이 전달되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그 주제에 의해서 감동되었기에 그는 이 진리를 다른 사람과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다.47)

⑧ 이것은 다음 특성인 뜨거움의 요소로 인도한다.48)

⑨ 다음은 설교자와 그의 회중 사이에 긴밀한 접촉이 있어야 한다.49)

⑩ 긴박감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50)

⑪ 설교는 반드시 설득력으로 특징지워져야만 한다.51)

⑫ 다른 특별한 요소는 감정적 요소이다. 로이드 죤즈에게 ‘파토스’는 참된 설교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부은바 될 때 감정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 감정적 요소, 정서적 요소는 이 세기에 있어서 특별히 개혁주의자들 사이에 심각하게 결여된 것으로 본다.52)

⑬ 진정한 설교의 마지막 요소는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한 능력이다. 로이드 죤즈에게는 능력이 없으면 설교가 아니다.53)




(3)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진정한 설교를 위한 몇 가지 제안




로이드 죤즈는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설교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들이 진정한 설교를 할 수 있는 요술적인 처방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설교하는 순간에 성령의 영향에 자신을 개방하기 원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는 제안이다.




① 기록된 원고를 암기하는 것보다 기록된 원고에서 요약을 하라.54)

② 이 요약으로부터 설교하라.55)

③ 여러분이 완전히 자유할 때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하라.56)

④ 설교문보다 성령을 신뢰하라.57)

⑤ 성령을 항상 구하라. 간절히 그를 구하라.58)




제 3 절 요약




로이드 죤즈는 오늘날 강단 사역의 근본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설교가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고 믿는다. 더욱이 그는 설교에 관해서 말해 주도록 사람들이 요청받을때 너무 쉽게 설교의 방법이나 기교를 생각하는 데로 급히 달려가는 것을 보곤 하는데, 그는 이것은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59)














































제 4 장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해석학적 원리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로이드 죤즈는 믿는다. 이 첫 번째 설교 원리는 설교학적인 특성보다는 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학문적인 강해 설교자로서 로이드 죤즈는 1930년대 초기에 이미 그 소문이 대서양을 넘어서 알려졌다. 후에 로이드 죤즈는 강해 설교의 왕자로서 인정받았고 그의 설교는 학적으로 손색이 없는 대중적 강해의 극치라고 여겨졌다. 오늘날 로이드 죤즈는 ‘독보적인 학자60)’로 인정받고 그의 로마서 설교는 ‘미래에 어떤 강해 설교자도 무시할 수 없는61)’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강해 설교자로서 그의 합법적인 위치가 인정되는 데 비해서 그의 설교의 해석학적인 평가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해석학적인 원리와 방법은 엄청난 양의 그의 설교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해석학적인 원리와 방법을 평가하기 위해서 출판된 설교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절대적이다.62)




제 1 절 성경 전반에 대한 접근




1. 고백적 접근




(1) 계시로서의 성경




로이드 죤즈는 성경을 기본적으로 칼빈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전통의 빛 속에서 이해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은 대략 840년 이후로 유럽의 신학교로부터 시작해서 학문과 학식이 계시의 위치를 점령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믿는다.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로 여겨지지 않고, 현대의 진보된 학문적 지식이 새로운 권위가 되었다. 이런 새로운 운동에 관련해서 특히 금세기에는 교회가 학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매우 존경하는 경향이 생겼고 그래서 학자가 최후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로이드 죤즈의 분석에 따르면 이 전적으로 다른 접근 방식이 교회 내에 영적 생명의 통로를 막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오늘날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호소한다. 이와 같은 로이드 죤즈의 호소는 최근에 개혁주의 학자들간에 재확인되고 있다.63)




(2) 성경의 영감




성경은 단순한 인간적 기록이나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숨결을 불어 놓으신 말씀이요 기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설교나 삶에 있어서, 교리나 세계관에 있어서 어떤 측면에서든지 권위를 가진다. 로이드 죤즈는 오늘날과 같은 교회 상태의 주요 원인은 성경의 신적, 만전적 영감에 대한 신념과 신앙과 행위, 모든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인 권위라는 믿음을 지난 세기에 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상황에 대한 로이드 죤즈의 평가는 성경의 성격에 대한 그의 고백적인 접근의 참된 가치를 인식토록 해 준다.64)




2. 경외적 접근



(1) 경건함과 거룩한 두려움의 영으로 접근하라




로이드 죤즈는 성경에 대한 바른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 사람이 성경에 접근하는 태도, 성경을 읽는 마음가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어떤 부분을 접근해도 바른 ‘정신’을 가져야만 한다. 두려움과 떨림, 겸손함이 없이는 성경을 풀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성경에 접근할 때는 상당한 주의와 듣고 배우려는 준비된 마음, 말씀을 받으려는 경건한 기대감을 가져야만 한다.65)




(2) ‘동일한 성령으로’ 접근하라




로이드 죤즈는 겸손을 자신의 자아에 대해서, 능력과 기능에 대해서 보잘 것 없다는 견해를 갖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존경, 자기 주장, 자기 자랑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덕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성경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로이드 죤즈는 이 문제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 제시된 진리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66)




(3) 충분한 기도와 열심 있는 연구로 나아가라




경외적 접근과 관련해서 오늘날 목회 훈련의 일반적인 경향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일반적인 목회 훈련은 성경에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성경을 판단하는 경향을 띠고 있으며, 본문을 학적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구실 하에서 ‘고등 비평 방법’에, 특히 전문적인 언어학자와 교회 ‘전문가’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킨다.67)

오늘날 많은 메마른 강단들과는 대조적으로 풍성한 그의 설교를 생각하면, 그 방대한 양과 그 질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야기에 우리가 귀기울일 필요가 충분히 있다. 그의 설교는 이런 경외적 접근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68)




3. 구원적 접근




(1) 성경이 주어진 목적을 기억하라




로이드 죤즈는 성경에 접근할 때마다 성경의 기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성경의 기본 의도는 인간에게 구원의 지식과 경건한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데 있다(딤후 3:15-16).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개인 구원의 교과서라는 좁은 의미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로이드 죤즈가 강조하는 바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인 자신과 인생의 ‘만남’과 교제에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접근할 때 이 기본 의도와 부합해야만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69)




(2) 지적이거나 이론적 접근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그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접근은 자신의 영적인 삶에 덫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성경을 바른 학문적인 자세로 읽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잘못된 의미로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70)




(3) 실제적인 유익을 기억하라




성경의 구원적 목적을 항상 염두에 두면 성경 연구에 있어서 몇 가지 실제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1) 해석자로 하여금 성경의 사소한 문제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더 중요한 메시지를 파악하도록 도와 준다. 학자들은 흔히 마태복음의 산상보훈이 누가복음의 평지복음과 동일한 것인지를 논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그러나 로이드 죤즈는 거기에 별로 관심이 없다.71)

2) 한 구절이나 한 단어에 한 가지 해석만 취하도록 해석자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다.72)

3) 성경을 단어 위주보다 교리 위주로 연구하도록 해석자를 도와 준다.73)




제 2 절 본문의 의미에 대한 접근




1. 만족할 만한 이해의 필연성




(1) 해석자의 임무는 무엇인가




설교자는 반드시 성경의 해석자이어야 한다. 그의 임무는 엄밀히 말해서 두 가지 과정을 포함한다. 그는 먼저 본문이 본래적인 청중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 다음에 본문이 신자들의 실존적 현재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해야만 한다. 대개 첫 과정을 해석, 두 번째 과정을 해설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의미에, 후자는 의의에 관심을 갖는다.74)




(2) 해석은 왜 필요한가




인간의 상황이 불변했다는 사실은 해석의 임무를 맡은 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전 2:26). 우리는 이것을 사도들이 그들과 문화적, 역사적 정황의 차이가 없는 동시대인에게 설교한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행 2:14 이하).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들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을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자연인의 영적 무지 때문에 “성령을 소유한 우리는”(고전 2:13) 이 진리를 그들에게 해석해 주어야 한다. 이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 탐구의 결과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이다(고전 2:12; 갈 1:12, 16). 그러므로 로이드 죤즈는 해석이 필요한 것은 두 정황의 문화적, 역사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불변하는 영적 정황의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물론 우리가 21세기에 살기에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인해 해석 작업이 더 복잡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로이드 죤즈는 두 정황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진리를 왜곡시키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해석 작업의 출발점을 바른 지평에 두도록 돕고 있다.75)




(3) 해석의 목표는 무엇인가




설교자가 설교하기 전에 본문에 대한 만족할 만한 이해를 해야 한다고 로이드 죤즈는 강조한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이해’라고 할 때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야말로 현대 해석학에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주제이다. 현금 해석학은 점점 더 이해 현상 그 자체를 다루고 있다. 이해의 본질을 논하고, 이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에 대해서 묻고 있다: 이해란 무엇인가? 언어의 본질은 무엇인가? 언어와 이해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을 논하고 있는 실정이다. 로이드 죤즈는 이 문제에 대해서 현학적인 대답을 직접 하지만 그의 설교를 통해서 실제적인 대답의 일말을 제시한다. 로이드 죤즈는 진리의 지적인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이해는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 이상으로 생각한다.76)

그에게 있어서 만족할 만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진리에 대한 포용을 의미한다. 본문의 진리를 참으로 이해한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로이드 죤즈에게 있어서 진리의 이해와 포용은 하나님 말씀의 만족할 만한 이해라는 나눌 수 없는 전체의 두 측면이다. 이렇게 해석의 목표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로이드 죤즈는 그의 스승인 조나단 에드워즈와 일치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본문의 의미는 객관적인 내용과 해석자의 개인적인 삶을 위한 의의라는 두 면으로 구성된다.77)

참된 개혁주의 해석학에 있어서 해석의 목표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의 만족할 만한 이해는 해석자의 전 인격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먼저 그의 지성에, 그리고 그의 감정에, 마지막으로 그의 의지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진리의 바른 이해는 경외심과 두려움, 기쁨과 찬양 속에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로이드 죤즈에 따르면 해석자의 가슴 깊숙한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토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사랑의 반응을 일으키기까지는 본문의 진리가 참으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78)




(4)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만족할 만한 이해라는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해석의 실제적인 과정이 요구된다. 로이드 죤즈에 의하면 이 실제 해석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하나 있다. 해석자는 반드시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인간은 모두 편견의 산물로 태어나기 때문에 편견이야말로 참 해석의 가장 큰 대적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로이드 죤즈는 문제를 어물거리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한다. 비록 입장을 달리하기를 주저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본문에 대한 정직성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할 때는 과거의 유명한 해석자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용기를 갖고 있다. 어떤 때는 칼빈, 카이퍼, 하지 등과 입장을 달리 하기도 한다. 그의 정직성의 결과로 전통에 덜 매인 해석을 했으며, 독창적인 해석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79)




2. 분석적 접근



(1)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라




로이드 죤즈는 특정 본문의 연구를 진행시킬 때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실질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잘 알려진 사전이나 주석을 포함해서 입수할 수 있는 도구들을 모두 활용한다. 그 본문에 관한 설교들과 거기에 대해 연구한 글들을 읽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몇 해고 보내기도 한다.80)




(2) 본문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라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는 본문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방법은 없다고 로이드 죤즈는 믿는다. 왜냐하면 예컨대, 바울의 편지들에는 반드시 특정한 구조가 있으며, 팔복에도 특정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우연히 거기에 배치된 것이 아니고, 영적, 논리적 귀결에 따라서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분석적 접근의 목적은 본문에 내재한 특정한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며 거기에 따라 본질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방법에 대한 많은 언급은 이런 빛 아래서 이해해야만 될 것이다.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주제를 다루시는 우리 주님의 방법에도 동일한 것을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 분석은 종속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이고 지적인 의미에서 분석 자체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잘못된 것이다.81)

로이드 죤즈에게 있어서 분해는 반드시 자연스러워야 하고 인위적이어서는 안되며 본문에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무리한 단계까지 나아가서는 안되지만 할 수 있는 한 세밀히 분석해야만 한다. 이 분석으로부터 로이드 죤즈는 본문의 개략적인 구조에 대한 관찰로 나아간다. 로이드 죤즈는 설교마다 대개 본문 분석을 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서 분해의 기능은 본문에 대한 배경과 해석적 정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분해하는 과정에서 로이드 죤즈는 일반적인 분석을 개별적인 분석보다 먼저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권하고 있다. 첫째로,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을 하고, 그 다음 문단에 대한 개략적인 분석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해야 한다.82)




3. 문법적 접근




(1) 유서 깊은 방법




로이드 죤즈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유서 깊은 방법인 역사적 문법적 해석 방법을 충분히 활용한다. 이 방법은 본문을 해석할 때 그 역사적 기원과 문법적 구조를 살피는 것이다. 문법적 접근의 목표는 문법의 규칙에 따라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2) 원본과 역본에 대한 그의 고려




로이드 죤즈의 문법적 접근은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의 단순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정상적이고 문자적인 뜻을 살피는 것이다. 그는 문자적인 의미가 뒷받침되지 않는 의미 부여를 하는 어떤 접근 방식도 그 타당성을 부인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원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찾아야 하며 평범하고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83)

로이드 죤즈는 설교자들에게 단어마다 살펴서 그 의미를 물으라고 호소한다. 동시에 그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관찰하는 것만큼이나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 말은 설교자들이나 본문에 대해서 자의적인 상상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본문에 있는 특정 단어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하라는 뜻이다. 그의 문법적 접근은 첫째로 사본에 대한 고려를 포함한다. 사본의 증거는 대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때로는 최선의 사본도 어떤 말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말들이 나타내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약 다른 곳에서 분명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그의 신학적인 입장을 본문으로 읽어 들어간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에는 사본학으로는 어떤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지 제외되어 있는지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해석의 실제 과정에서 원문을 계속적으로 살피며 생략되어 있는 단어를 알아낼 뿐 아니라 원본에 사용된 정확한 단어가 무엇인지 밝히기도 한다. 원본에 대한 고려와 함께 그는 여러 가지 번역본들을 살펴본다. 강단에서는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지만 연구를 할 때는 여러 가지 다른 번역들을 활용한다. 원문에 좀더 가까운 번역을 찾기 위해서, 또한 좀더 분명한 의미를 밝히기 위해 사용한다. 때로는 역본에서 생략된 단어들과 부정확한 번역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는 흠정역이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구절의 의미는 1611년 이후로 바뀌어진 것들을 인정하면서도 흠정역과 그 용어 사용을 대체로 옹호한다. 하지만 로이드 죤즈는 새 번역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새 번역들을 사용하지만 주의해서 그리고 비판적으로 사용한다. 사실 현대 번역뿐만 아니라 흠정역에서도 번역자의 신학적인 입장이 배제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학식이나 영성 면에서 볼 때 현대 번역자들이 흠정역 번역자들보다 더 나은 입장에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새 번역들을 사용할 때 조심스럽게 비판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84)




(3) 문법의 기본 사항들에 대한 그의 고려




로이드 죤즈는 헬라어의 뉘앙스를 알고 사용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헬라어의 성, 수, 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자주 동사의 시제나 태에 대해서 관심을 쏟는다. 동시에 이런 면에만 지나치게 관심 갖는 것도 위험하다고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원어 지식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85)




(4) 어휘론적 측면에 대한 그의 고려




개별 단어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로이드 죤즈는 어휘 의미론을 활용한다. 그의 설교에는 때때로 안트와 깅그리히의 헬라어/영어 사전이나 ‘권위 있는 그림-쎄이어 사전’으로부터 헬라어 단어의 실제적인 어원적 의미의 정의를 인용하기도 한다. 로이드 죤즈의 로마서 3장 25절 ‘화목’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보면 라더마헤르가 지적하듯이 단순히 한 단어의 가능한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살피므로 정당한 통시론적 언어학 연구의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다.86)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서 로이드 죤즈는 통시론적 언어학뿐만 아니라 공시론적 언어학도 활용하고 있다. 물론 그는 이와 같은 전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설교를 보면 이와 같은 활용을 여러 곳에서 하고 있다. 로이드 죤즈는 한 단어의 의미를 의미론의 동의관계나 반의관계에서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어떤 종류의 모호함은 유용할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다. 원 저자가 모호함을 선택한 곳에 정확함을 찾아서는 안 된다.87)




(5) 구문론적 측면에 대한 고려




로이드 죤즈는 ‘연결의 문제’, 즉 접속사에 특별한 주의를 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는 여러 가지 접속사의 기능들을 계속적으로 설명한다. 그의 해석 실제를 살펴보면 접속사는 때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접속사는 단어나 문장이나 문단에 포함된 사상들을 연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의 접속사에 대한 고려 즉 구문론적 측면에 대한 고려는 해석학에서 합법적이고 유용하다. 왜냐하면 접속사는 그들이 연결시키는 사상들의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88)




(6) 형태론적 측면에 대한 고려




로이드 죤즈는 헬라어 어순을 중요하게 파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로이드 죤즈는 바울의 서신에 나오는 파격구문이나 곡언법도 이런 범주 안에서 이해한다. 하지만 여기서 생길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기를 잊지 않는다.89)




(7) 해석 역사에 대한 고려




본문의 의미를 알기 위해 로이드 죤즈가 행한 문법적 접근의 흥미로운 요소는 어려운 구절에 봉착할 때 그 본문에 대한 해석 역사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90)




4. 문맥적 접근




(1) 두 가지 기본 문맥




문맥적 접근을 생각하지 않고 강해 설교가로서 로이드 죤즈를 떠올릴 수 없다. 그의 문맥적 접근에 대한 참고 구절을 일일이 대는 것은 실없는 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문맥적 접근을 하지 않는 설교를 발견하는 편이 오히려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문맥적 접근을 이해하는 데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로, 문맥이라는 말이 확실치 않다. 사람에 따라서 의미가 다를 수 있다. 둘째로, 설교자로서 로이드 죤즈는 그 말을 사용하지만 정의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마다 다른 문맥을 염두에 둘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두 가지 형태를 생각하는 것 같다: 하나는 역사적 정황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적 정황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겹칠 수밖에 없다.91)




(2) 역사적 정황




로이드 죤즈는 성경을 그 본래의 역사 정황 속에서 이해한다. 로이드 죤즈는 어떤 단어나 구절을 설명할 때 원 청중의 사고 세계라는 정황 속에서 한다. 본문이 형성된 역사적 정황에 대한 그의 고려는 저자와 원 청중의 상황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로이드 죤즈는 그의 산상보훈 설교에서 첫 설교를 산상보훈 전체의 배경과 서론을 제공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설교에서 로이드 죤즈는 본문을 그 특수한 역사적 정황 - 말하는 사람으로서 주님과 그의 청중의 역사적 정황에서 설명한다.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인 주해는 본문의 정확한 해석을 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92)




(3) 언어적 문맥



성경의 상이한 장르를 인정하는 것이 언어적 문맥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로이드 죤즈는 이러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 비유라든지, 예언이라든지, 혹은 시 등의 문학적인 장르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로이드 죤즈가 문맥을 언급할 때는 특정한 본문이 나타나는 언어적인 문맥을 주로 의미한다. 로이드 죤즈는 본문의 의미를 근접한 문맥에 비추어서 이해한다. 그는 본문 앞뒤의 문맥을 자세히 관찰한다.93)

때로는 몇 구절로서 하나의 주제별 문맥이 형성되기 하지만(마 5:3-10) 대개는 한 장을 이룬다(마 6장; 7장). 한 문단속에 있는 중심 주제에 의한 해석은 로이드 죤즈의 특징에 속한다. 로이드 죤즈는 즐겨 특정 저서나 저자 단위의 문맥을 해석학적인 배경으로 취급한다. 물론 이 부분은 마태복음의 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산상 설교집에서 마태복음 5장 3-7절은 하나의 단일한 해석학적 단위로서 취급한다. 로이드 죤즈는 자주 산상보훈을 세세한 부분을 다루기 전에 전체로서 고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94) 로마서와 에베소서에 대한 그의 설교에서는 동일한 저자의 평행 구절이나 전 정경적 문맥을 살피기 전에 특정한 저서 단위의 문맥을 해석학적 단위로서 먼저 살피고 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1장 19절에 나오는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에서 “따라”라는 단어를 살피기 위해 그는 먼저 동일한 1장에서 똑같은 단어가 똑같은 방법으로 쓰여진 곳을 먼저 살피고 그리고 나서 다음 장들을 살피며 끝으로 바울이 쓴 다른 서신서들에 나오는 평행 어구를 살피고 있다.95)

최종적이고도 가장 광범위한 언어적 문맥은 전 정경과 그 범위가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는 다루고 있는 본문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의 다른 부분을 자유롭게 활용한다. 그가 전 정경을 언어적 문맥으로 취급하는 것은 신앙의 유비와 성경의 유비에 대한 그의 확신에서부터 나온다. 그리하여 로이드 죤즈는 성경은 반드시 다른 성경과 조화되게 번역해야만 하고 또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비교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96)




(5) 근접한 문맥의 기능




로이드 죤즈는 사본상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근접한 문맥을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어떤 헬라어 단어가 순수히 언어적인 입장에서 두 경우로 번역이 가능할 때 택일하기 위해 근접한 문맥을 활용한다. 만약 한 본문을 해석하는 데 두 가지 선택이 있다면 로이드 죤즈는 근접한 문맥에 의해서 그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만약 한 단어가 성경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 그는 근접한 문맥이 그 의미의 정확한 측면을 보여 준다고 믿는다. 많은 잘못된 해석은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나 구절에만 집착한 결과라고 로이드 죤즈는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한 구절의 의미는 언제나 근접한 문맥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구절의 근접한 문맥은 바른 이해를 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것은 해석학의 공리이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맥을 살피는 것은 바른 성경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97)




제 3 절 본문의 의의에 대한 접근




1. 영적인 접근




(1) 영적인 의미와 본문의 교리




전문적인 의미에서 학자가 아닌 설교자인 로이드 죤즈가 사용하는 용어에 유동성이 있으리라는 것은 예견할 수 있다. 때때로 그가 본문의 영적 의미라고 부를 때는 그 의미를 결정짓는 방법에 관한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영적 직관이나 영적 이해를 통해서 의미를 파악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때에 본문의 교리라고 부를 때는 어떻게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하느냐 하는 규범을 강조한다.98)




(2)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영적 의미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사람들은 귀중한 진리를 이해하고 섭렵할 수 있으며 그것은 문법이나 지적인 영민함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부터 들을 준비를 하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해야 한다.99)




(3)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과 기도




본문의 영적 이해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와 묵상에 보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로이드 죤즈는 생각한다. 그는 에베소서 1장 18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그 말씀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드리고 있는 기도라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원리를 유추해 낸다.100)

첫째로, 신자들은 이 세상에 사는 한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이 항상 필요하다.101)

그가 유추한 두 번째 원리는 영적 지식은 분명히 점진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이 지식에 있어서 증가하기를 바라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점진적인 성장과 발달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들의 영적 이해가 항상 증가하도록 기도 드린다.102)

세 번째 원리는 우리의 이해의 눈을 밝혀 주시도록 계속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가 설명했듯이 우리의 제한된 능력 때문에, 우리의 유한한 조건과 죄의 결과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이 조명을 위한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다.103)




(4) 영적 의미와 성령의 동질성




성경 안에서 단번에 주어진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날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조명이라는 것을 로이드 죤즈는 분명히 한다. 하지만 이 조명은 해석자의 영성의 정도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본문을 쓰게 한 동일한 성령을 소유하지 않는 한 해석자는 결코 본문의 영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104)

오늘날 너무 많은 해석학에 관한 논의들이 기교의 문제로 전락되었기에 로이드 죤즈의 영적인 접근법은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전 세대와 비교해 볼 때 오늘날 우리는 해석에 있어서 기교의 부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은 것이 본문을 올바로 해석하는 데 실패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잔잔한 수면이 위에 있는 하늘을 아름답게 반영하듯이 성령에 의해서 들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성경을 기록한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해야 할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해석 작업을 수행할 때에 우리 자신과 성령과의 관계를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105)




2. 교리적 접근




(1) 주해적 연구의 목표




로이드 죤즈에게 있어서 주해적 연구의 목표는 교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로이드 죤즈는 주해적 접근을 한 다음에 교리에 강조를 둔다. 이 교리적인 접근 문제에 대해서 로이드 죤즈는 청교도 설교 방식과 사도 바울을 추종하고 있다. 그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접근을 하고 있는 점에 주의를 하고 있다. 이 교리적인 접근은 많은 현대 학자들에게 해석학의 적법한 절차로서 추천된다.106)




(2) 귀납적 방법



로이드 죤즈는 본문의 주해로부터 교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귀납적 방법을 채택한다. 그는 교리를 규명하기 전에 본문에 있는 여러 가지 단어들을 먼저 하나씩 고려한다. 달리 말해 그는 본문의 단어에 교리를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단어로부터 교리를 이끌어낸다. 이 방법은 그로 하여금 본문을 부당하게 왜곡시키지 않게 한다. 하지(Hodge) 이후로 이 귀납적인 방법은 교리에 도달하는 타당성 있는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다.107)




(3) 본문의 핵심




로이드 죤즈의 교리적 접근의 마지막 절차는 한 특정 본문의 핵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주어진 본문에 여러 가지 교리가 있을 수 있지만 로이드 죤즈는 먼저 어느 것이 본문의 가장 핵심 메시지인지를 묻는다. 만약 본문의 주된 핵심을 발견하면 그의 해석학적 임무는 사실상 완성되는 것으로 간주한다.108)




(4) 질문하는 기술




본문의 주된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본문을 향해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로이드 죤즈는 설교를 준비하는 전 과정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질문을 던지는 기술은 성경적인 해석학의 전통에서 귀하게 여겨져 왔다. 본문 연구에 있어서 이 방법은 좋은 결실을 가져다 주는 묵상 방법이다. 최근에 강조되고 있는 해석학적 순환 개념은 이 전통 있는 기술과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109)




3. 검증절차




(1) 검증 과정에서 주석의 위치




로이드 죤즈는 두 단계에서 주석을 사용하여 자신의 해석을 검증한다. 첫째는 해석 과정에서 - 본문에 나오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본문의 주된 핵심을 발견하는데 - 주석이나 사전을 사용해서 자신의 이해를 확증한다. 둘째로, 설교를 구성한 다음 정확성을 위해서 한 번 더 주석에 돌아가서 그가 작성한 메시지를 점검한다.110)




(2) 검증 과정에서 기독교인의 경험의 위치




그의 검증 과정에서 일반적인 고찰을 한 가지 하는 것이 몇 가지 부정적인 테스트를 하는 것보다 유익할 것 같다. 로이드 죤즈는 모든 가르침은 경험이나 느낌이나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약의 가르침에 의해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이단 학설과 종파들도 그들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구절들은 반드시 경험에 의해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로이드 죤즈는 문법적이나 문맥상으로 아니면 신학 전통상 두 가지 이상 해석이 가능할 때 기독교인의 경험을 타당한 시금석으로 사용한다. 로이드 죤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기본적인 시금석으로 사용하지 않고 부가적인 시금석으로 사용한다. 만약 특정 해석이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일치하면 그 해석을 올바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경험 자체는 충분한 시금석이 아니지만 각 주해의 정확성을 위한 부가적인 시금석으로는 불가결한 것이라고 본다. 이 점에 있어서 로이드 죤즈는 스펄젼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111)




(3) 몇 가지 부정적인 검증




로이드 죤즈의 산상 설교집을 보면 성경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부정적인 검증 방안을 제시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한 명제와 다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이든지 그의 해석이든지 둘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럽든지 실천하기에 불가능한 것이라면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112)




제 4 절 특징적인 해석 원리




1. 성경은 성경으로




(1) 이 원리의 정의와 설명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기본 원리는 그의 해석 실제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정의하면 어떤 성경도 다른 성경과 모순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정의한다면 성경은 성경과 비교해서 해설하고 밝혀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 원리의 배후에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와 신학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이 내재되어 있다. 그는 설교자가 단일체인 전 성경적 메시지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조직 신학에 대한 좋은 기반을 갖는 것이 설교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 조직 신학은 설교의 배경과 설교를 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113)




(2) 원리의 고찰




세밀하게 고찰해 보면 로이드 죤즈는 해석을 하면서 이 원리를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적용하고 있다.




1) 로이드 죤즈는 본문을 성경의 근본적 가르침 혹은 기본적인 교리와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한다.114)

2) 로이드 죤즈는 성경의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명료한 구절과 좀더 충분한 설명이 나오는 구절로써 본문을 해석한다.115)

3) 그는 먼저 동일한 저자, 다음 다른 저자가 말하는 유사한 구절로써 본문을 해석한다. 그는 성경의 난해한 구절을 다룰 때 주어진 구절의 증거만 가지고 배타적으로 결론을 내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116)

4) 그는 평행하는 구절로써 본문을 해석한다.117)




(3) 원리의 평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려운 구절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정통 신학자들의 노력을 조롱당하고 무시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원리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신앙에 의지하여 유추하는 이 원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이 원리를 내세우기 전에 대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현대의 주해자들은 과연 얼마나 많이 성경을 통독했는가? 한 부분도 생략하지 않고 매일 성경을 읽지 않고는 이 원리는 한갓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이드 죤즈가 이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한 비결은 그가 끈질기게 매일 성경을 읽었다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규칙적으로 맥체인 성경 읽기표에 따라서 해마다 구약을 한 번, 신약과 시편을 두 번씩 읽었다.118)




2. 문맥 안에서




(1) 원리의 설명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첫 번째 원리를 배타적으로 강조할 때 설교자는 손쉽게 그가 가진 교리 체계를 특정 본문에 강요할 위험이 크다. 그러므로 그의 첫 원리는 두 번째 원리에 의해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어떤 특정 구절을 해석할 때도 총체적인 진리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설교자는 그 해석이 특정 구절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해야만 한다. 어떤 해석은 성경 전체의 빛 속에서는 타당할 수 있지만 특정 문맥에서의 타당성 여부를 살펴야 한다. 달리 말해 설교자의 해석은 항상 성경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문맥에 적합해야만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가 가진 교리 체계를 특정 본문에 읽어 들어가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119)




(2) 원리의 고찰과 평가




로이드 죤즈는 해석 과정에서 두 가지 기본적인 해석 법칙을 사용함으로 이 원리를 구체화시킨다.

첫째, 더 큰 문맥의 주도적인 주제로써 모든 명제를 해석하라: 로이드 죤즈는 문단 단위의 문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문단의 특정한 본문의 해석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만약 주어진 본문의 어떤 명제의 해석이 더 큰 문단의 주도적인 주제와 모순될 때는 그것을 올바른 해석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이 법칙을 로이드 죤즈는 그의 해석 작업에서 보편적으로 적용한다. 그러므로 특정 경우를 별도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 법칙이 다른 경우보다 더 눈에 잘 드러나는 경우들도 있다.120)

로이드 죤즈의 마태복음 7장 주해는 이 경우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로이드 죤즈가 지적했듯이 이 장을 서로 내적인 관련이 거의 없는 격언체 구절들의 집합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로이드 죤즈는 7장을 내리 흐르고 있는 심판이라는 주도적인 주제를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견해의 피상성을 설득력있게 반박한다. 그러므로 7장의 모든 구절은 이 심판이라고 하는 주도적인 주제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법칙의 또 하나의 예증은 로마서 7장 1절에서 8장 4절에 걸친 그의 설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거기에는 율법 - 그 기능과 한계라는 주도적인 주제에 의해서 세세한 모든 주해가 결정된다. 이 법칙을 활용함으로써 로이드 죤즈는 로마서 7장의 해석 역사에 분명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이 방법이 가지는 확실한 이점은 세세한 문제에 빠져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121)

동일한 법칙을 그의 설교 에베소서 4장 1절부터 16절에서 분명히 추적할 수 있다. 거기에는 교회의 단일성이라는 주도적인 주제에 의해서 모든 말들을 해석한다. 로이드 죤즈의 이 법칙은 성경의 단일성이라는 그의 확신 위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적인 단일성은 어떤 구절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 구절의 주된 사상의 빛 속에서 보도록 요구한다. 반면에 그 구절은 더 큰 문맥의 중심 주제의 빛 속에서 차례로 고찰되어야 한다.122)

둘째, 세세한 부분을 살피기 전에 전체적으로 구절을 살펴라: 로이드 죤즈는 어떤 가르침을 살필 때에도 전체적인 데서 부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명한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나무로 인해서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산상보훈의 해석과 관련해서 이 법칙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이 법칙을 성경의 다른 부분을 해석할 때에도 일반적으로 적용한다. 로마서나 에베소서 해석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법칙을 적용하고 있다.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을 갖기 전에 세세한 특정 구절로 뛰어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확신한다.123)




제 5 절 해석학적인 공헌




첫째, 성경에 대한 첫 접근 방법이 정당하지 않으면 어떤 원리와 방법도 설교자를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적 이해라는 해석적 목표에 도달하는 데 도울 수 없다.124)

성경의 진리를 통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태초(창 3:24)부터 성령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다. 그분은 계시하시는 분인 동시에 숨기시는 분이시다(눅 10:21; 8:10). 만약 설교자가 이 기본 진리를 망각한다면 그는 성경으로부터 살아 있는 메시지를 결코 붙잡지를 못한다. 이 점에 대한 로이드 죤즈의 공헌은 그가 전문적인 해석자가 아니라 모든 전통적인 가치가 의문시되는 20세기 중엽에 살았던 한 설교자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성경 전반에 대한 로이드 죤즈의 접근 방식은, 많은 현대 해석자들이 그 임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하는 것은 그들의 첫 접근 방식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125)

로이드 죤즈에 따르면 해석학의 분수령에 속한 문제는 두 접근 방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성경을 종교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의 전집으로 보고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방식과 인간을 통해서 인간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으로 성경을 보고 경외심을 갖고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 결단으로부터 설교자는 어떤 해석 원리와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126)

둘째, 로이드 죤즈는 결코 해석의 기본 방법들을 어느 것 한 가지도 소흘히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방식들에 성실하게 집착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해석에 있어서 문법적이고 문맥적인 의미에 우선권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그 의미가 신자들의 삶에 주는 의의를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로이드 죤즈는 해석에 있어서 기본적인 단계를 신실하게 따랐기에 오늘 우리가 아는 설교자가 되었다. 여기에 다시 한 번 로이드 죤즈의 강점은 기본적인 방법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설교자로서 그것을 설교에서 보여 주느냐에 있다.127)

셋째, 로이드 죤즈는 새로운 해석 원리를 소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 원리를 새롭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128)

①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②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은 그 문맥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129)

그가 따르는 근본적인 해석 원리는 모두 성경적 해석학의 공리이다. 아무도 그 타당성을 반박할 자가 없다. 하지만 로이드 죤즈의 특징은 이 원리를 그의 실제 설교에서 해석학적 방식으로 적용하는 점에 있다. 로이드 죤즈는 이 해석학적 공리들을 그 자신의 성실한 실천에서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보여 주고 그 원리를 적용하는 방법론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균형잡힌 두 원리의 탁월한 활용은 그를 “강해 설교의 왕자”로 만들었다.130)

넷째, 몇 가지의 해석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명백해졌다.131)

① 로이드 죤즈에게는 성경에 관한 해석자의 신념은 그의 해석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어떤 해석도 전이해 없이 할 수 없다.132)

② 로이드 죤즈에게는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해야 할 필요는 근본적으로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인한 영적 무지 때문이다.133)

③ 로이드 죤즈에게는 해석의 최후의 목표는 본문에 대한 새로운 지적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대한 만족할 만한 영적 이해를 하는 것이며 관여한 해석자의 인격에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134)

④ 로이드 죤즈는 해석 과정에서 현대 해석학의 “맹점”이라고 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정당한 고려를 하고 있다.135)

⑤ 따라서 로이드 죤즈는 기도를 해석 과정에서 불가결한 것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를 통한 겸손한 청취를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조명하는 그분의 정상적인 통로이다.136)

⑥ 설교자를 위한 로이드 죤즈의 가장 실제적인 큰 공헌은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라고 부른 묵상의 방법이다.137)

⑦ 만약 설교자가 로이드 죤즈의 해석학적 원리와 방법에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는 현금의 당면한 딜레마로부터, 오늘날 “최대의 신학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경탄과 두려움과 기쁨과 찬양의 느낌”을 회복할 것이다.138)




제 6 절 로이드 죤즈 설교의 원리와 방법




설교는 반드시 강해적 이어야 한다고 로이드 죤즈는 믿는다. 이 명제는 설교문의 형태를 포함한 주해와 설교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이 문제를 가장 어려운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생각한다. 설교문은 수필도 아니며 강의도 아닌 동시에 그렇다고 성경 구절에 대한 가벼운 주석도 아니다. 설교문은 특정 형태를 가져야 하며 이 특정 형태가 설교문은 설교문으로 만든다고 믿고 있다. 설교는 강해에 기초하지만 이 강해가 특정 형태를 지닌 메시지로서 형태를 갖추게 될 때 설교문이 된다. 그러면 그의 설교문을 분석함으로써 이 특정 형태의 윤곽을 그려본 후 강해 설교의 두 가지 기본 요소를 평가해 보자. 이미 쓰여진 로이드 죤즈에 대한 두 논문은 어떤 의미에서 강해 설교를 다룬 것은 사실이지만 케이스(Keith)는 로이드 죤즈를 포함한 세 사람의 강해 설교자를 연구하므로 강해 설교 개념 정의에 국한된 반면 페니(Penny)의 연구는 그의 강해 설교를 연구하기는 했지만 그의 설교 자체를 살피지 않고 그의 책 「설교와 설교자」에 한정된 형편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론 뿐 아니라 그의 설교 자체를 연구함으로써 그의 설교학적 원리를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139)




1. 설교의 기초로서 청중 분석




(1) 설교자의 기본 의무




설교자는 청중들의 상태를 분석하고 설교를 준비할 때에 그리고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 그것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청중 분석이 그들에게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를 부분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청중의 상태에 따라서 성경의 모든 메시지를 세 가지 특별한 유형에 담아서 전달해야 한다.140)

이 문제에 관한 로이드 죤즈의 주장은 토론한 여지가 없이 정당하다. 설교자의 임무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중들이 얼마만큼 아는지에 대해서 파악해야 하고 그들의 상태에 따라 설교를 조정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로이드 죤즈는 청중들의 상태에 따라서 그 가르침을 조절했던 목회자의 마음을 가진 바울과 베드로와 예수 그리스도를 예로 들고 있다.141)




(2) 가장 치명적인 가정




청중 분석을 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이지만 그 청중 분석은 올바르고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잘못된 유형의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치명적인 가정의 하나는 등록된 교인이고 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석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금세기에 교회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로이드 죤즈는 이러한 가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자기 자신의 경험과 목회 경험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보여 주고 있다.142)




(3) 영적 상태에 대한 평가




이런 상황에 비추어서 로이드 죤즈는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설교자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너무 쉽게 그 사람들을 신자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설교자가 해야되는 첫째 일이 그들의 영적 상태를 분별하는 것이다.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 있다: 그들은 ‘육신에’ 속했든지 ‘성령에’ 속했든지 양자 중 하나이다. 설교자가 회중에게 나아갈 때에 그는 이 두 가지 범주를 사용해야 하고 다른 모든 범주들은 버려야 한다. 말하자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자유인이든지 종이든지, 세례를 받은 사람이든지, 신자의 자녀든지 불신자의 자녀든지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143)




(4) 청중의 능력의 수용




설교자가 이런 두 가지 기본적인 범주를 청중들에게 적용해야 하는 동시에 그는 또한 각 범주에도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유형을 구별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각 유형에 따라 주어야 할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에 설교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로이드 죤즈는 단 두 사람도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아니한 우리 주님이 경우를 본받아야 할 예로 들고 있다. 로이드 죤즈는 이것을 불신자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신자들에게도 허용하는데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이해의 정도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이런 문제를 잘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며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적절한 하나님 말씀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이드 죤즈는 이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서 고린도전서 3장 1-3절과 히브리서 6장을 들고 있다.144)

마지막으로 로이드 죤즈는 설교자는 자신의 진전 단계나 청중의 성숙도에 따라서 전달하는 방식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교를 준비하기에 앞서서 설교자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유형의 설교를 할 것인가? 그는 그의 이론과 실제를 바탕으로 세 가지 유형의 설교를 추천하고 있다. 첫째, 불신자에게 하는 설교, 둘째로, 신자에게 경험적으로 하는 설교, 셋째로, 신자에게 직접적인 교훈적인 설교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너무 절대적인 의미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설교자가 메시지를 준비할 때 필요한 일반적인 지침일 뿐이다. 이러한 서로 다른 유형들은 상호 관련되어 있고 의존되어 있다.145)




2. 전도 설교



(1) 전도 설교가 없는 교회




앞에서 살핀 잘못된 청중 평가는 필연적으로 잘못된 유형의 설교를 하게 되어 양육에만 전념하고 전도적인 요소가 완전히 무시된 설교를 낳게 된다. 그런 설교는 참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는 그런 대로 유용하지만 신앙의 근본 요소가 결여된 자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매우 위험한 장소로 전락될 수 있다.146)




(2) 명목상의 기독교




잘못된 유형의 설교로 말미암아 복음의 능력을 알지 못하며 죄를 깨닫게 해 줄 만한 설교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세대가 성장하게 된다. 로이드 죤즈는 설교자로 부름받았을 때에 아무도 명목상의 기독교를 참된 구원 경험으로 믿었던 자신이 했던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147)

복음의 능력에 다시 사로잡히지 않고 전도 설교를 들을 수 있다면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로이드 죤즈는 생각한다. 로이드 죤즈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 때문에 그러므로 틀림없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추정하거나 신자들의 가정에서 세례를 받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경향에 대해서 개탄하고 있다.148)




(3) 주 1회의 전도 설교




명목상의 기독교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적인 의미의 전도 설교를 하라고 로이드 죤즈는 권한다. 그는 이것을 ‘절대적인 법칙’으로 삼고 있다.149)

그는 목회를 하는 동안 언제나 주일 저녁에는 전도 설교를 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그의 관습을 추종하기보다는 설교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신축성 있는 적용이 필요할 것이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주일 저녁에 많이 오는 곳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고 오전 예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출석하는 곳에서는 주일 아침에 전도 설교를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전통적인 종교가 된 지역에서는 전도 설교를 하기 제일 좋은 기회는 성찬 때인데 그 때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도 설교는 선교지에서만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관습이다.150)




(4) 하나님의 거룩을 먼저 설교하라




로이드 죤즈는 전도 설교다운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도 설교는 우상의 헛됨과 공허함과 쓸모없음을 폭로시키며 우상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영광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또한 전도 설교는 하나님의 율법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에 관한 선포로 시작해야 한다.151)

전도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죄를 깊이 인식하는 것은 참된 회개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설교자의 엄숙한 임무는 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폭로시키고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거룩을 설교한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대비책을 선포하는 것 역시 설교자의 필수적인 임무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이 사랑을 동시에 설교해야 한다. 하지만 로이드 죤즈는 전도 설교에 있어서 메시지를 제시하는 바른 순서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152)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 20:21)을 선포한 바울의 메시지와 비교해 볼 때 로이드 죤즈는 신약의 전도 설교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153)




(5) 전도 설교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




처음에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가정하는 설교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여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성가시게 여기기도 한다.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설교를 들을 때에 진리에 대해서 적대적이 되기도 한다. 설교를 들으면서 불안을 느끼고 결국은 마지못해 자신을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진리인 것을 인식하고 계속해서 교회에 나온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이 영혼에 대한 심각한 고민 가운데서 때로는 몇 개월씩 걸리기도 하는 한동안의 회개 기간을 통과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종국적으로 진리를 분명하게 보게 되고 그 능력을 경험하게 되어 성령에 의한 중생의 결과로 참된 신자가 된다.154)







제 6 장 결 론




그의 설교의 세 가지 근본 원리는 그의 설교의 세 가지 측면에 따라서 지적될 수 있다. 설교의 내용과 관련해서 그는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설교의 형태와 관련해서는 설교문은 강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전달과 관련해서는 설교는 성령의 능력 아래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참된 설교에 귀착하기 위해서 이 세 원리들은 설교의 세 가지 측면을 각기 통제해야 한다.

로이드 죤즈의 해석학적 공헌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경 전반에 대한 로이드 죤즈의 접근 방식에 관한 우리의 연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시초부터 성경에 대한 접근이 정당하지 않으면 어떠한 해석 원리나 방법도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로이드 죤즈에 의하면 해석학적인 분수령을 만드는 문제는 두 가지 상반된 접근 방식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성경을 종교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의 작품집으로 보고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택하든지 사람을 통해서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으로서 성경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든지 택일해야 한다. 이 결정으로부터 설교자는 명백히 어떤 해석의 원리와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둘째, 본문의 의미와 의의에 관한 로이드 죤즈의 접근 방식으로부터 로이드 죤즈는 해석학적인 기본 방법을 소흘히하지 않고 거기에 집착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본문의 의미에 관한 한 그는 문법적이고 문맥적인 접근을 기본적인 것으로 강조한다. 본문의 의의에 관한 한 그는 영적이고 교리적인 이해를 강조한다.

셋째, 로이드 죤즈의 특징적인 해석 원리에 관한 연구로부터 그는 새로운 해석학적인 원리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역사 깊은 원리를 되풀이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아울러 성경에 나오는 모든 진술은 그 모든 문맥 내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로이드 죤즈는 이 원리를 신실하게 실천해서 그 적용 지침을 제공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강해 설교의 왕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의 특수한 해석학적 공헌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성경의 권위에 대한 해석자의 전 이해의 절대적인 중요성의 강조

② 해석의 필요에 대한 궁극적인 이유로서 인간의 타락에 대한 주장

③ 해석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본문의 영적 이해에 대한 재확인

④ 해석 과정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정당한 고려를 하도록 함.

⑤ 해석 활동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로서 기도를 주창

⑥ 본문의 묵상 방법을 소개

⑦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쁨의 회복




설교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설교의 미미한 영향력 아래 살고 있는 우리는 설교 사역의 존엄성을 확신하며, 실제로 높은 기준을 가지고 설교하며, 성공적으로 설교 사역을 감당한 로이드 죤즈의 설교관과 그의 설교의 원리를 통해서 성공적인 사역의 원리는 반드시 설교라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필자가 이 논문을 쓰면서 확신한 것은 앞으로의 사역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 대해 더 연구해야 될 분야는 그의 교리적 설교의 측면, 진단적 설교의 측면, 그리고 그의 설교에 있어서의 성령의 기름부음의 중요성 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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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죤즈의 설교 연구

김재윤, 019-9769-0977, 총신대원 3학년 재학중, 광야교회 교육전도사




1장 연구의 필요성




신학자와 목회자를 막론하고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했던 설교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설교자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는 정근두 목사가 포체프스트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인 ‘로이드 죤즈의 설교론’이라는 책과 토니 사전트 박사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인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죤즈’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다. 정근두 목사의 책에서는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을 그의 설교를 통해 고찰하고 있다. 또한 토니 사전트 박사의 책은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성령론에 주시하여, 그의 설교를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두 논문 다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된 특징들에 대하여 별 언급이 없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된 특징이라 함은 다른 설교자들과 비교할 때 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설교의 특성을 두고 한 말이다. 정근두 목사의 논문은 좋은 논문이지만, 주로 그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에 주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토니 사전트 박사의 논문도 훌륭한 논문으로서, 그는 이 논문에서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진단적 설교면에 두 장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를 이루는 진단적 설교의 면은 다루지 않겠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된 특성으로서 전도적 설교, 교리적 설교, 복음적 설교, 현미경적 설교, 송영적 설교, 균형적 설교, 전체적 설교 등의 측면이 실제 그의 설교들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고찰함으로써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의 주된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논문의 초두에서 필자는 로이드 죤즈 자신이 설교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와 로이드 죤즈 설교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해-정근두 목사, 토니 사전트 박사 두 분다 로이드 죤즈 이해에 있어서 그의 성령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1)-를 직접 그 자신의 말을 통하여 들어봄으로써 유익을 얻고자 한다.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하여 지난 세기의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설교의 방향성과 특성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설교보다 더 중요한 설교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설교자 자신의 신빙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로이드 죤즈의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로이드 죤즈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많은 지면을 이에 할애할 것이다.




2장 로이드 죤즈의 생애




1. 의사에서 설교자로




그는 호더 경 밑에서 지도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황실 주치의였다. 그러나 그는 목회에로의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소명을 받고 이러한 모든 세상부귀의 길을 버리고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확실한 소명없이 목회의 길로 들어서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그는 어려서 집의 화재와 형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덧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또 어린 시절의 그의 학교 선생님이나 교회의 설교자들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직해야 할 것을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그는 정규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신학교의 풍토는 자유주의 신학이 활계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존 칼빈이나 챨스 스펄젼 등 걸출한 설교가들이 다같이 신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은 점은 즐거운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구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의 책들을 독파해 여느 신학자 못지 않은, 다양하고 해박한 신학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설교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그는 헌 책방에서 구입한 죠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2권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죠나단 에드워즈는 멘토요 스승이었다.

그는 의사 시절에 배운 치밀하고 세밀한 진단 방식을 그의 설교에서도 활용하였다. 그래서 본문을 주의깊게 파헤치는 그의 설교 방식은 특별한데가 있다. 또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듯 그의 설교는 철저히 회중을 간파하고 진단한 설교이다. 그의 설교가 그처럼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실제적이고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육신을 고치려는 의사에서 영혼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병석에서 그리스도를 믿기를 맹세하다가도 건강해지면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영적인 죄의 본성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그의 27세의 나이로 이미 3개의 학위를 갖고 있는 의학박사였다. 평생 그는 박사라는 애칭으로 불리워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생활을 하고 주일학교 부장까지 지냈으나 자신이 회심하지 않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진로의 변화는 주위 사람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주위 사람들은 바울에게처럼 그를 미쳤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평생 의학 서적들을 읽었고, 의학 협회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의학계는 그와같은 인재를 잃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2. 샌드필즈의 특이한 설교자




그는 가난한 광부촌인 샌드필즈의 설교자로 부임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사역을 통해 그 지역사회가 바뀌게 된다. 그의 교회에는 술 끊기를 결심하고 갖다 논 술병도 있었다. 가장들은 가정적이게 되었다. 기도회는 사람들이 모였고, 기이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옛 방식을 굳게 믿었고, 세속적인 방식을 교회에서 제거하고, 설교와 기도에만 힘썼다. 그는 샌드필즈에서 전도 설교를 하였고, 그 지역에서 그는 그의 회중들에게 성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는 작은 키에 이마가 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청교도들처럼 검은색옷을 즐겨 입었다. 강단에서 내려오면 그는 친절과 유머와 따뜻한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있었던 웨일즈에서의 부흥을 다시금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의 설교에 심지어 취재 차 왔던 기자조차도 녹아 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회심자는 늘어가게 되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기도 했으나, 그것이 습관성이라는 것을 알고는 곧 끊었다. 그의 부인도 그와 결혼 후 그의 도움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3. 런던의 탁월한 설교자




그는 늘어나는 직무로 런던으로 그의 임지를 옮기게 된다. 그가 떠날 때 그의 회중들은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의 한 회중은 그가 떠나는 이유에 대해 그가 떠나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자기의 사익을 좇아 떠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그의 회중들에게 신뢰를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그는 뛰어난 강해 설교자 캠벨 몰간과 동사 목회를 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의 회중들은 계속해서 늘어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기념비적인 산상설교와 로마서, 에베소서 설교를 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조직신학 교수였던 싱클레어 퍼거슨 교수도 그의 로마서와 에베소서 설교를 수없이 읽었노라고 간증하였다. 또한 그는 그와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사람과도 우의적으로 토론하였고, 신참내기 설교자들에게 늘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잊지 않았다. 워런 워어스비도 그의 사역을 통해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와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던 존 스토트나 제임스 패커도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런던에 있을 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설교에 대해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영국의 버너 오브 트루스 출판사의 창립 멤버로 일하였고, IVF 총재로도 일하였고, 런던 신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버너 오브 트루스 출판사는 지금 개혁주의적인 책들과 청교도 작품들을 출판하는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출판사로 성장하였다. 그의 사역의 열매인 것이다.

그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는 수많은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게중에는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걷던 신학 교수가 그의 설교를 듣고 자유주의 신학을 버리게 된 일도 있었다. 제임스 패터도 그의 설교를 통해 설교를 배웠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채플 사임후에는 그의 저술을 정리하는 지혜를 통하여 지금까지도 설교집을 통하여 우리에게 설교하고 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세계 2차 대전을 겪었고, 이후에도 교회를 강건하게 결속시켜 목회해 나갔다. 그는 전쟁을 통하여 인생의 허상과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성을 고발하였다.




4. 그의 사상




그는 로버트 멕체인의 성경 읽기표를 통하여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주로 오전에는 신학적인 책을 읽었고, 오후에는 전기를 읽었다. 그는 힘들때마다 청교도 리챠드 십스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읽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비판했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했으며,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의 연합을 호소하였다. 그는 종말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고 고별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지속적이고도 집중적인 연구를 쉬지 않았다.

그는 칼빈주의적 감리교도였다. 칼빈주의 교리를 신봉하면서도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강조했다. 그는 죽은 정통을 혐오했다. 형식주의를 싫어했으며 설교를 굳게 믿었다. 그는 복음적인 설교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사역을 통해 이를 증명하였다.워런 워어스비는 그와 대화하노라면 위대한 사상가 앞에 있는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쉽게 설교한다고 주장했다. 어린 소녀도 그의 설교를 이해했다. 또 무식한 사람도 그의 설교를 좋아했다.

그는 부흥에 대해 중요시 생각했고, 제임스 패커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청교도들에 대한 컨퍼런스를 열어 직접 연설하기도 했다. 그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자신 부인의 말처럼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의 사역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는 그가 기도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로 판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회심을 중요시 생각했고, 회심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5. 그의 설교




그는 조직적이고도 성경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성경 전체를 설교하였다. 그는 구약도 신약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현대 교회의 설교에서 천대받는 구약 본문으로도 많이 설교했다. 윌버 스미스 교수는 그의 한 구약 본문 설교를 듣고 그 본문을 처음 대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일 오전에는 주로 체험적인 설교를 하였고, 주일저녁에는 전도설교를, 금요일 밤에는 연속 강해를 하였다.

그는 반드시 설교라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설교는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아무나 설교해서는 안된다고 하였고, 설교자는 지상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소명으로 여겼다. 그는 설교는 구분되어야만 한다고 말했고, 설교에서 의도적인 예화와 유머를 피했다. 그가 유머를 피한 이유는 천국이야 지옥이냐를 결정짓는 심각한 강단에서 행여 가볍게 보이는 인상을 줄까 우려했던 이유였다.

그는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 강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설교는 반드시 성령의 통제 아래서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강조했다. 그래서 제아무리 철저히 잘 준비한다 해도 강단에서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설교자는 무익하게 된다라고 생각했다. 그의 성령관은 개혁주의 성령관과 조금 다른데 그렇지만 오순절의 성령관은 아니다. 다만 그는 성령의 사역을 축소하는 것을 우려하고 늘 성령의 사역에 대해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령의 주권적이 사역을 중요시여겼다. 그는 설교에 대해서 철저히 준비하고 강단에 올라가되, 올라가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고 설교했으며 그가 큰 소리를 발할 때는 뇌성이 울리는듯했고, 실감나는 제스처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설교는 웅변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편당이 없는 지도자였으며 가정과 같은 교회로 만들었다. 집에서는 규칙적으로 가정 예배를 드렸고,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그의 독서의 양은 엄청나다. 그의 설교는 무언가 다른 설교였다. 그는 바울 서신들을 사랑했고, 바울 서신들을 또한 즐겨 설교했다. 그는 경건한 설교자였고, 균형잡힌 설교를 하였다. 그는 말로만 아니라 신실한 삶을 살았다. 그의 설교에는 그만의 독툭한 선부정 후긍정이 나타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주일 설교후에는 상담을 했다. 그의 상담을 통하여 많은 이들의 그들의 문제를 해결받았다.

그는 한 설교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교리를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 내용과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구별하였고, 회중들을 초청하는 제도를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십자가와 구속에 대한 일련의 연속 강해를 하기도 했고, 영적 침체에 대해서도 일련의 연속 강해를 했다. 또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연속 강해를 하였고, 부흥에 대해서도 일련의 연속 강해를 했다.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길은 그의 전도 설교를 살펴보는 일이다. 그의 전도 설교는 죄인의 회개를 요청하고, 그의 난제와 곤경, 회심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듣는 이에게 무언가에 영혼이 맞고 있는 듯한 압박을 가한다. 그는 20세기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그는 특히 교회의 상태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고,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파헤쳐 전하였다.




6.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설교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면 진정한 설교를 들어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또 이 시대의 한국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강단의 개혁이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설교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뛰어난 설교자이면서도 겸손하고 소탈했다. 또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는 목회 지망생들에게 개인적인 소명이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그에게 소명에 대해 묻는 한 학생에게 그는 헬라어를 공부할 것을 종용하고, 그것이 그 학생의 소명의 강도를 측정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뛰어난 헬라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진정 하나님께서 낳은 걸출한 설교가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설교자의 생애와 그의 설교를 시간을 두고 읽으며 주의깊게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익한 보고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서재에 꽂힌 많은 그의 설교집들을 보며, 한국 교회가 그래도 하나님의 많은 축복을 받은 것을 감사하게 된다. 그의 책은 세계 곳곳의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도 읽혀지고 있다. 우리는 그의 설교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배워야 할 것이다. 진정 로이드 죤스는 혼탁한 오늘날의 이 교계에 진정한 영적 표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그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 복음을 알게되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또한 그가 스승으로 두었던 훌륭한 청교도들에게서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거룩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고 그의 에베소서 강해에서 못박고 있다. 또 그리스도인을 세 부류로 나누는-이러한 가르침은 스코필드 주석성경의 영향으로 유입된 것으로 조국 교회에는 C.C.C의 사영리 교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광포되었고, 한국 교회의 강단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이 교리에서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 모두 사람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두 부류로 나누고 있으며, 보좌에 그리스도가 앉아있지 않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이 진리에 대해서는 양무리서원에서 나온 제프리 윌슨의 ‘뒤틀려진 복음’이라는 책에 수록된 어네스트 롸이씽거의 ‘거짓 신자’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을 보면, A.A. 핫지, 스펄젼, 매튜 헨리 모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또한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2)-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신 이 설교자와 같은 이가 다시금 한국 교회 가운데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팔을 불어주기를 소망한다.




3장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로이드 죤즈의 생각




그의 설교 이해에 선행하여 그렇다면 과연 그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 동시에, 가치 있는 일이다. 그 이유는 그가 설교와 설교자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상이 필연적으로 그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더 나아가 그의 설교를 이해하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로이드 죤즈 목사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직접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설교하는 일이 이제는 크게 직업적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심리학 강해를 전해 듣고 있는 셈입니다. 설교자들은 회중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설교자들이나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인 무서움입니까! 다니엘 로우랜드는 랭게이토에서 목회할 때에 지옥을 설교하곤 하였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후에 그의 설교와 같은 효과를 얻은 설교가 있었습니까? 그 이후에 그러한 설교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이 우리 중에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상태는 개선되기는커녕 더욱더 가속적으로 침륜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강단은 무능하게 되어 효력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대의 웨일즈의 비극에 있어서 가장 기막힌 문제입니다3)!




이 문제는 어렵습니다. 흥미없어 보이지만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목사는 목자이지 하나의 귀여운 어린 양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도적인 개념이어야 합니다. 그는 멋져 보이고, 인기를 얻고 싶고, 농담을 잘 할려고 노력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목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그가 교회 안에 있거나 어떤 예배를 집례하고 있을 때만이 목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기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목사는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게 하는 자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의 최고의 목적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정신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목사가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목사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그의 직위를 얻을 수 있고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4).




나는 하나님의 미소를 느끼지 못하고 홀로 강단에 서는 것보다 설교자에게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5).




세상에 설교다운 설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 볼 때, 또한 하나님의 대의를 전파할 사역자라고 자인하는 많은 사람의 자질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대의가 이 세상에서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은혜요, 신성한 능력이다. 이 점에서 내 활동은 나를 역겹게 한다. 나는 내 생애 동안 설교를 한 것은 고사하고 설교문을 만들어 본 적도 없으며, 내가 과연 그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있을 지에 대해서도 절망하기 시작한다6).




나는 이 말에 덧붙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약간이라도 이해한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자기는 한 번도 설교한 적이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언젠가는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7).




…오! 바울이 고린도전서 2:1-5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내 사역 속에서 경험하기를 얼마나 원하는지. 나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하여 지쳤다네, 휫필드의 설교를 읽을 때 나는 일생 동안 진정으로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느낀다네8).




나는 내 생애에서 단 두 번 진정한 설교를 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꿈 속에서였습니다. 나는 꿈속에서 그 두 번의 설교를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그 무서운 실망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내가 깨어 있을 때 강단에서 그렇게 설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9)?




나는 이전에 하나님에게 쓰임 받았던 어떤 목사들을 계속해서 인용합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강단으로 나아가 그들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생길 때까지 감히 강단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도달한 곳은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 능력이 필요함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10).




제가 설교를 하게 된 것이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님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만약 주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부르심을 거부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그 분의 길이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구별하시며, 그들에게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들에게 임재하여 진리를 조명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이 교회를 먹이시는 본질적인 방식입니다11).




우리가 일꾼을 밀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그들을 보내 달라고 주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육신적인 열심과 정열을 가지고 사람들을 불러내어 교회의 어떤 과업을 맡기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을 동원하여 그 일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역해야 한다든지 복음을 전파하거나 가르쳐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12)!




바로 여기에 교회가 개입됩니다. 이것은 전파와 가르침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 다양한 직책과도 관련된 신약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따라서 어떤 사람이 설교자로 부름 받았음을 당신이 명확하게 확신하려면, 먼저 교회가 그 부르심을 확증하고 검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13).




목사들은 하나님이 교회에 선물로 주신 것이며, 교회에 필요한 모든 은사와 도움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참되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말은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유창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설교가 아니며 그것은 아무 결과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사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언제나 성령을 통한 능력의 '역사' 곧 하나님의 '힘있는 역사' 때문입니다14).




만약 어떤 설교자가 나에게 하나님을 느끼게 해준다면, 만약 그가 내 영혼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제공한다면, 만약 그가 자신은 부적합하지만 매우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만약 그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구주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복음의 위대함에 대해 희미한 빛이라고 던져 준다면 나는 그 설교자의 다른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15).




설교자는 사로잡힌 사람이며 그는 이것을 의식합니다. 나는 주저 없이 이것을 단언합니다. 내가 방관하고 있는 때에 비로소 나는 설교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말하고 있지만 실은 구경꾼입니다. 나는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놀랍니다. 나는 아주 깜짝 놀라며 듣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참된 설교가 행해질 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처럼 구경꾼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 밖에 있을지라도 내가 그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단지 이 모든 것의 도구요 그릇이며 통로입니다16).




우리가 경험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습니까! 설교자에게, 설교 도중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느끼며, 영혼들이 죄를 깨닫고 그 결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 듣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17).




나에게 가장 큰 위험, 가장 큰 시험은 지난 주일에 내가 이번 주일에 두 번 강단에 올라갈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에 이번 주일에 두 번 강단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가 맺은 계약을 위반하지 않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은 바른 일입니다.…그렇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주일이 다가왔고 내가 두 번 설교를 한다고 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은 외적인 봉사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심령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 어떤 사람이 심령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 일을 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그의 존재 깊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18).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바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을 느끼지 못하고 설교한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첼텐함에서 있었던 일은 너무나 예외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내려오셨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와 복을 누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19).




나는 어떤 특정한 본문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주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시는 대로 자유롭게 설교하였다. 설교 주제는 미리 별나게 생각해 둔 것이 없어도 기이한 방식으로 나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내 기억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영혼 속에 느껴진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충동의 결과였다20).




나아가서, 나는 프로그램을 미리 밝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언제 공부가 끝나게 될지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는, 우리가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믿는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성령은 갑자기 우리 위에 임하신다는 것-그 분은 지성에 빛을 비추시고 마음을 움직이십니다-을 압니다. 나는 성경을 강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21).

만약 성령께서 갑자기 설교자에게 임하여 그를 사로잡으신다면 당신의 프로그램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당신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내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의 대답은 설교자가 화면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22)?

바울은 자기가 설교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으며, 성령께서 자기의 말하는 것을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깊이 들어 박히게 역사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켰던 그 능력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야말로 대언자요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긍휼하심 속에서 오늘 밤에도 그 일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성령의 능력과 그 복되고 은혜로운 감동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정말 어느 목사라도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역사하고 잇는 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임을 확신하게 될 때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23).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했던 사람들은 가장 많이 연구하고,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준비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였던 자들이었음을 여러분은 언제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24).




이상의 그의 말에서 보듯이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매우 높은 기준의 사람이 감당하기 벅찬 놀라운 일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그는 설교자의 중요성에 대하여 너무나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의 사후 어떠한 모임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던 것을 듣던 그의 아내가 나의 남편의 사역에 있어서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영역의 거룩한 일이었으며,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실존적인 존재였다.




4장 로이드 죤즈 설교의 특징

1. 전도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그의 전도 설교적 측면이다. 그는 아예 주일 저녁에는 전도 설교를 작정하고 계속하여 하였다. 그 이유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전파가 반드시 교회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도 설교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교회는 한 영혼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장소일수 있다고 보았다25).

요한복음 5:44절을 강해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의 죽음이 여러분의 속죄를 위한 것임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의로움과 공의로움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와 영광스러운 인격을 의뢰하십시오. 여러분의 생활을 그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유일하시며 진실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찬사와 영예를 받을 것입니다26).”

그는 매우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전도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구약을 사용해서도 전도 설교를 하였다. 그의 창세기 32:24절 강해에서 그는 이렇게 전도하고 있다.

“복음은 단순히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끌어내어 보다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본성을 여러분 안에 넣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제가 지금까지 미력하나마 이렇게 애써 설명드린 그 지복의 상속자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망이 더 이상 여러분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 못할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영화롭게 될 그날을 즐거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 우리 인생은 실패라는 것, 우리 영혼이 위험하다는 것, 이런 것들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27).”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인생의 오직 유일한 해결책임을 역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태복음 11:20-24절을 강해하며 임박한 심판을 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적하는 핵심적인 요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독교 이론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이것 저것에 대한 기독교관이 있으며, 그런 견해가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러 일들에 대한 기독교관에 관심이 쏠리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부터 확실히 해두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음은 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와의 개인적인 만남이며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촉구하는 초청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맺는 이 관계의 문제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바로 이 문제에 관해서 내가 마지막 심판 때에 조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당신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어떤 분입니까? 만약 그분이 역사에서 삭제된다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있을 것 같습니까? 그분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형성해 갑니까? 이것은 당신이 숙고해야 할 중대한 질문입니다28).”

그렇다면 왜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전도 설교가 필요한가? 사실상 오늘날의 현실은 교회에 출석하기만 하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고, 회개나 복음의 핵심에 대하여 피상적으로 강단에서 다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복음에 노출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도 설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정근두 목사는 로이드 죤즈에 대한 한국 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정기 세미나의 강연에서 한국 교회에서는 주일 오전에 전도 설교를 매주 하는 것이 너무나도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촉구했었다. 조국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명목상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도적인 메시지가 요청되고 있다.




2. 교리적인 설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교리적인 설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조국 교회 안에는 깊은 교리 설교가 사라져 가고 있다. 또한 교리 교육이 등한시 되고 있다. 또 교리가 혐오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교리라 하면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며, 교리를 따지지 말고 같은 믿음인데, 연합에 앞장서자고 주장한다. 일찍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였던 에드워드 영은 자신의 이사야 53장 주석에서 이렇게 교리 설교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교리적이라고 불리울만한 설교를 듣는 경우가 매우 희귀하다. 그리고 그토록 가치있는 제도인 요리문답 공부반은 교회들로부터 거의 완전히 추방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교리에 대해 무엇인가를 좀 알았다면, 그들은 교리란 것이 메마르고 흥미롭지 못하고 그들의 생활과 별로 연관성이 없는 것이기는커녕 모든 주제들 가운데서 가장 흥미롭고 연관성을 지닌 것이라는 놀랄만한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29).”

그는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이 세대에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은 교리적 가르침과 교리적 설교의 부흥이다30).”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 교수로 봉직했던 존 머레이 교수도 ‘기독교 교리와 삶’이라는 글에서 교리와 생활의 연관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 관심사와 관련된 위대한 교훈은 우리 신앙의 가장 신성한 진리들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더 중심적일 수 없는, 속죄의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겸손하고 헌신되고 자기 희생적인 섬김에 대한 자극이 된다31).”

로이드 죤즈도 자신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행한 일련의 설교에 대한 강의에서 본문에서 교리를 도출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의 설교의 제목과 그 안에 있는 교리는 본문과 그 문맥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과 문맥에 의해서 설명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잇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바로 그 교리는 본문의 특정한 배경 가운데서 다루어져야 합니다32)”.

그러면, 이제 직접 그의 설교속에 나타난 교리적인 설교의 면모를 살펴보자.

“본문에서 나타나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행해진 어떤 일의 결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의 결과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라고 합니다. 그 나무는 누군가가 거기에 심어 놓은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곧, 자연발생적으로 그 자리에 돋아나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33).”

로이드 죤즈 목사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통하여 중생의 교리를 도출해내고 있다.

그의 교리적인 설교의 면모는 산상설교 강해에 있어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산상설교 강해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만심의 완전한 결여, 자신과 자기 의존의 완전한 결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낳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에 느끼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에 대한 이 엄청난 인식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34).”

그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구절을 강해하면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의 교리를 끄집어 내고 있다.

왜 우리에게 교리 설교가 필요한가? 교리에 대한 가르침 없이는 기독교는 하나의 도덕 종교로 전락해버리기 십상이다. 또한 교리가 뒷받침 되지 않는 신앙은 사상누각과 같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많다.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 교인이면서도 장로교의 근본 교리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 즉 교회에서 성경에 담겨 있는 핵심적인 교리들을 가르치는 일에 등한시하고, 성경을 이야기 중심으로, 또는 도덕적 강화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교리가 한국 교회를 핍절시킨 것이 아니가, 교리의 결핍이 무지한 교인들을 산출했다는 것을 목회자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3. 복음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는 철저히 복음적이다. 이것은 그의 설교에 나타난 복음의 깊이와 일관성과 전체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복음을 가감하여 전하지 아니하였고, 철저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로 사용되기에 힘썼다. 그의 설교에서는 매우 두드러지게 그 설교의 복음적인 요소가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 기독교 메시지요 기독교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복락들을 받아 누리기 시작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35).”

그의 메시지는 철저히 복음적이다. 그는 유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원색적인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아니하셨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전해야 할 복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구원 사건입니다. 바로 그것은 우리 구원이 성취되는 행위였습니다36).”

그는 갈라디아서 6장 4절 한 구절을 가지고 일련의 연속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26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강단을 지켜오는 동안 참으로 어리석게도 여러 번 모든 것을 설교했으니 더 이상 할말이 없지 않는가 하는 의문에 빠지곤 했었습니다. 마귀는 내게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시작에 불과하다느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십자가에 대한 영광스러운 메시지에는 끝이 없습니다.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롭고 신선하고 황홀하고 감동적이고 심령을 높여주는 어떤 것이 항상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37).”

그는 자신이 복음의 기초로 돌아가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지적, 영적 교만의 모습도 없다. 오히려 겸손히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배우는 제자로서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왜 교회에서 복음적인 설교가 필요한가? 교회에는 복음이 실종되었는가? 조국 교회의 강단은 심각한 복음의 불균형의 병폐를 앓고 있다.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마치 기독교의 복음이 하나의 도덕강령, 또는 기복적인 메시지로 둔갑하고 있다. 죄인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설교 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위안하고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심리학적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4. 현미경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 설교의 강점은 그 깊이와 철저함에 있다. 그는 결코 본문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에베소서 강해나 로마서 강해, 산상설교 강해 등을 보면 그가 한 구절, 한 구절에 매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그는 한 구절을 가지고 여러번 연속 설교를 하기도 했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가 짧은 구절로 설교한 것이나, 한 구절을 가지고 여러번 설교한 것을 배우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처럼 주마간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지 아니하고, 그 본문이 의도하는 바를 철저히 추적하여 본문의 의미를 확연히 드러낸 것을 배우자는 것이다.

“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의 어리석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이것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력의 부재입니다. 참 이해와 명백한 사고력의 부재입니다38).”

그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결코 놓치지 아니한다.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 이 단어가 주로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합니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그리고 항상 우리는 이 의미를 첫 번째에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따로 떼어 둔다는 것입니다39).”

사실상 그의 모든 설교에서 그의 이러한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서도, 세부적인 의미를 놓치지 아니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숲을 보면서도 나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선지자들 자신도 그들 자신이 예언한 모든 것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에서 실제로 베드로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과 이야기를 그런 방법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 자신조차도 자기가 말한 것을 반드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어떠한 예언도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40).’”

그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확신하고 성경을 경외하며 평생을 산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성경 해석이란 문제는 씨름하는 작업이었고, 하나님과의 교통과 기도 없이는 불가능한 중차대한 과업이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는 로이드 죤즈의 이러한 성경을 현미경적으로 세밀히 관찰하고 깊이 있게 해석하는 작업이 참으로 필요하다. 사실상 오늘날 많은 설교들은 본문이 해석되어지지 않고 있다. 늘상 그 말이 그 말인 설교를 하고 있다. 어느 본문이든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내려오지, 그 본문이 담고 있는 복음의 광휘와, 그 풍성함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다. 로이드 죤즈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철저한 성경학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5. 송영적인 설교




고신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가르치고 있는 유해무 교수의 조직신학 책의 제목은 ‘송영으로서의 신학’이다. 로이드 죤즈의 설교는 ‘송영으로서의 설교’ 였다. 이 말의 의미는 그는 설교를 통하여 철저히 삼위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드높였다. 그의 모든 설교는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은 그의 설교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인 찬송시의 빈번한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주님, 살고 죽는 것은

제가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만이

제게 할당된 몫이며

이 일을 위해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만일 생명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만큼 순종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비록 생명이 단축된다 하여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감으로 인하여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이전에 통과하셨던 어두운 방보다

더 어두운 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오소서 주님!

그리고 저로 하여금 그 은혜를 인해

주님의 복된 얼굴을 대할 수 있게 하소서.




이 땅 위에서 주님의 사역이 참으로 아름다웠을진대

그 곳에서의 영광은 어떠하리오?




그 때에 저의 구차한 불평과 지루한 죄악된 날들이

끝을 고할 것이며

여호와를 송축하는 승리한 성도들과 더불어

주님을 찬양하는 무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생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이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도 흐릿하지만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심에 만족하며

또한 제가 그 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족하게 여길 것입니다41).”

그는 교리적인 로마서 강해에서도 찬송시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내 이름 주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으니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으리

지울 수 없는 은혜의 표

주님 마음에 새겨져 있으니




열심히 생겨난 것처럼

나 끝까지 참아 내리라

하늘에 있는 영화로운 영들보다 더 행복하네42).”

그는 알미니안으로 알려있는 챨스 웨슬리의 찬송시도 자주 언급한다.

“죽음보다 지옥보다 더 크신 주님이 사랑

그 풍성함을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네

빛의 아들들로 태어난 이들이 헛되게 세상을 좇네

그들은 그 신비에 이르지 못하네

그 길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를 모르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네

지금 위에서부터 빛이 비추네 가련한 이 마음속에43)!”

비단 이 뿐만 아니라 로이드 죤즈 설교의 내용 자체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영화롭게 하는 데에 깊은 주안점이 놓여져 있다.

왜 우리에게 이러한 로이드 죤즈의 송영적 설교의 태도가 필요한가?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모든 혜택들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설교자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야할 모든 영광과 찬송을 자신이 중간에서 갈취하고 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이 있었기에, 로이드 죤즈라는 설교자는 존재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소요리문답 1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의 실천 없이는 바른 설교자가 되기는 요원한 일이다.




6. 균형적인 설교




그의 설교의 또 하나의 강점은 복음에 있어서 균형의 문제이다. 그는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균형있게 강조했다.

“오늘날 심판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을 분석해 보면, 자기들에게 좋은 몇 가지의 개념들을 구체화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자기들에게 언제나 핑계를 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그를 경배하지 않습니다. 실로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소위 그들의 신은 그들의 대화 속에서 전혀 신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영원토록 심판하신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지 않아도 영원토록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믿는 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 개념입니까! 전적으로 얼마나 비진리이며 얼마나 무가치합니까! 오늘날 존재하는 새로운 이교도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44).”

설교자의 균형에 따라서 회중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적절히 전함으로써 설교의 균형을 이루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7. 전체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그가 구약 본문을 사용하여 설교한 것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그의 설교를 통하여 그가 마치 신약 본문을 가지고 대부분 설교한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가 아베라본에서 사역했을 때에 설교 본문중 4분의 3정도가 구약이었다45). 또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도 그가 사용한 구약 본문은 430여 개 정도로 비율은 약간 낮았지만 그 본문들을 구약 전체에서 뽑은 것들이다46). 윌버 스미스는 1955년 어느 주일 저녁 설교를 들은 다음, 그때 로이드 죤즈가 설교한 본문은 자기가 그때까지 그런 구절이 성경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구절이었다고 고백한다47). 그것은 예레미야 17:14-15 말씀이었는데(“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그의 주일 저녁 설교가 으레 그렇듯이 그 설교도 복음 전도를 위한 설교였다48). 여기서 스미스가 적어 놓은 글을 직접 인용해 보겠다.

“여러분은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삼 분도 지나기 전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인 성경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 그의 말씀은 무오하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진짜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그의 설교는 정말 내가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하던 설교였다. 그의 설교를 들으며 내 영혼 깊숙이 결심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설교를 하되 정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지 않는 설교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49).”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의 문제는 특히나 구약 복음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구약을 예화 자료의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구약 본문을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 일을 등한시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 그리고 스펄젼 같은 지난 세기 설교자들은 성경 전체를 아주 폭넓게 사용했다50). 스펄젼이 설교한 성경 본문에 대한 색인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것을 보면 그의 설교 본문 중 약 반 가량이 구약에서 뽑은 것들임을 알 수 있다51). 우리 모두는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 일에 칼빈과 로이드 죤즈처럼 균형을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5장 결론




이 부족한 논문에서 필자한 의도한 것은 로이드 죤즈 설교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더 깊은 연구에로의 동기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상의 로이드 죤즈 설교에 대한 부족한 연구를 마치면서 필자가 내리고 싶은 결론은 설교자 이전의 성도로서의 로이드 죤즈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훌륭한 신앙 인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포용력이 있었고, 그들과 친분관계를 맺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편당이 없는 지도자였고, 연합을 위해 진리를 양보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성도의 연약함과 영적 침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죽은 정통의 위험성을 인식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오해되고 있는 그의 성령론에 대한 문제도 그의 일생을 걸친 하나님과의 매우 깊고도 친밀한 교제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죽어가는 조국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받은 이같은 설교자를 일으키셔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과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본 논문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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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의 후예”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 리전트칼리지 조직신학 교수




“때로 보면 그는 청교도 같아요.” 판단의 근거는 전혀 잘못된 것이지만, 세익피스피어의 글에서 마리아가 심술 꽃은 익살광대 말볼리오를 가리켜 했던 말이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빗 마틴 로이드 존스에 대해서도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청교도’ 라고 부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의미의 청교도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청교도들이 남의 흥이나 깨고 항상 얼굴이 굳어 있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청교도들은 쾌락이 경건을 배제하거나 역(遊)으로 경건이 쾌락을 배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처럼 청교도들은 오히려 이런 자세를 정죄하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도 그들과 같은 노선을 걸었다. 금욕주의를 가장하는 것은 미신적인 어리석음 아니면 어린애처럼 미숙 한 것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 존스는 순수한 청교도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청교도 목사들은 언제나, 건전한 경건은 명랑하고기쁨이 충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이드존스박사는. 공적인 자리에서 엄숙해 보이고 카메라 앞에서도 보기 좋은 미소를 지은적은 없지만, 확실히 매우 명랑하고 상냥하며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즐거움이라는 하나님의 선물, 즉 피조물을 즐기는데서오는 기쁨과 구원의 즐거움, 이것 은 로이드존스가 늘 강조하던 바이다.








청교도의 노선을 따라

로이드 존스 박사는 역사적인 실제의 청교도 사상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사상의 대부분에 진심으로 공감하였다. 그는 자신이 17세기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18세기 사람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이 말은, 복음 전도와 부흥신학에 있어서 조지 횟필드 및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스타일이 교회를 위한 로이드 존스 자신의 최고 이상이자 자기 삶의 최고 목표라는 의미였다 .



그러나 그가 17세기의 청교도 자료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설교 시에 그가 청교도 저술가들의 글을 여러 차례 언급한점, 목회 초년병들과 심신이 지친 목회자들에게 청교도의 서적들을 읽으라고 끊임없이 권한 점, 그자신이 이 저술들을 탐독했다는 사실 (그의 결혼예물 가운데는 오웬과 백스터의 작품들도 있었다), 1950년부터 1979년까지 연례의 청교도와 개혁주의 연구모임(Puritan and Reformed Studies Conference, 나중에는 주관자가 바뀌고 Westminster Conference로 개칭됨) 을 주관했다는 사실, 출판사Banner of Truth Trust의 청교도 서적 복간 프로그램을 후원한 사실, 청교도들의 저술과 청교도에 관한 서적들을 주로 다룬 복음주의 문고 (Evangelical Library)의 사역을 뒷받침한 점 퉁이 그런 사례들이다 . 또한 1971년의 "청교도사상과 그 기원” (Puritanism and its Origins)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기도 했다. 1925년부터 “청교도들과 그들의 작품들에 관한 살아있는 진정한 관심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사역 전체가 지금까지 이것의 지배를 받아왔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그가 일생 동안거의 언제나 청교도사상에 의존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놀랄 만큼 독자성이 강한 사상가였으나 자신이 받은 유산(웨일즈인, 비국교도, 개혁주의)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 유산에 대단한 매력을 느끼고 이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리고 이 유산들 중에서도 역사적 청교도들이 대단히 영예로운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내가 로이드 존스 박사를 처음만난 것은, 레이몬드 존스톤과 내가 둘 다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서 , 연례 청교도 연구모임에 관한 우리의 비전을 박사님 앞에 펼쳐 보이고 이를 실현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그의 교회 집무실로 찾아갔을 때였다. 당시 이 아이디어를 환영하면서 그가 보여준 침착한 모습 속의 상기된 표정에, 그리고 극도로 친절한 그의 태도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 그는 우리를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손님으로 환대하면서 우리 모임의 영구의장직을 수락하고, 교회의 여성도들을 통해 점심식사와 차까지 대접하였다. 그 후 해마다 그는 이틀간의 이 모임을 어길 수 없는 중대한 약속으로 간주하였다. 어느 해에는 내가 하루 밖에 참석하지 못하자 나의 우선순위가 잘못됐다며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책망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 회의의 참석 인원이 1950년의 20 명에서 200명 이상으로 늘어났을 때 박사님은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즉 그때까지 박사님은, 레이몬드와 내가 청교도 신앙과 경건의 표준을 세상에 알리고자 애쓰면서 보여준 이러한 열성(熱誠)을, 하나님께서 영국에서 영적 사역을 부흥시키고 있다는 일련의 징후 가운데 하나로 생각해왔으므로, 그 자신도 이 회의에 할 수 있는한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



청교도사상연구모임에서 그는 탁월한 기억력으로 연사가 발표한 내용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모임의 참석자 대부분은 목사들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토론문제들은 목회 지향적이었다. 1959년부터 1978년까지 그가 폐회강연을 맡았는데, 이때 발표한 주제들이 대단히 흥미롭고 다양하다. 그 중에는 “부흥 : 역사적, 신학적 조망” (1959), “존 칼빈과 조지 휫필드” (1964), “프랑스혁명과 그 후” (1975) 등 도 있다. 이런 것들과 기타 많은 주제들은 사건과 인물, 역사에 대한 그의 놀라운 식견과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폐회강연을 통해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영적 건덕을 위한 열정적인 지혜와 비전, 정신적 지극과 도전을 주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여러 면모들

우선, 그는 웨일즈인이었다. 웨일즈인답게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민감하고 따스하며 매력적이고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전형적인 웨일즈인처럼 감상적이지는 않았다. 또 전형적인 웨일즈 설교가처럼 설교에서 제멋대로 상상의 비약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법정의 변호사처럼 말하며 사고했다.



둘째로, 로이드 존스는 훈련을 잘 받은 유능한 의사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과거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신학적 영적으로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 하고서, 여기에 근거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조직적으로 분석하며 고장난 것과 결여된 것을 찾아내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남이 말하지 않은 것이 실제적인 죄나 오류 못지않게 중요한 영적, 신학적 허약의 표정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바트 병원(Bart's Hospital)과 할리가(Harley Street) 시절에 도 의학적인 면에서 명석한 진단자였듯이 그는 신학적, 영적으로도 명민한 진단자였다. 그의 마음을 끌었던 청교도 저술가들의 뛰어난 장점 가운데 한 가지도 이것이었다. 그들 역시 영혼의 의사로서 성경에 따라 신학적, 영적으로 바른 것을 깊이 이해하고 , 이틀 속에서 영혼의 문제를 철저히 진단하며 분석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 로이드 존스 박사는 걸출한 은사와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성경적, 합리적, 실천적, 목회적신학자였다. 그는 신학교를 다닌 적이 없지만 뜻을 다해 독학하며 끊임없이 독서하고 이슈들을 철저히 사고, 묵상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와 만난 이후를 보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보수주의적 개혁주의를 견지하며, 어느 신학적 모임에서든 탁월한 식견으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였다. 그는 책을 속독하지 않고 천천히 읽었다고 하나 각 주제에 관한 주요한 서적들을 정기적으로 탐독 하고 그들의 견해가 자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검토하였다.



넷째 , 그의 목회사역에는 선지자적특질(quality)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내가 그와 만난 이후 그는 종교적 제도권으로부터, 그리고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종교적 주류문화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는 웨일즈 교회들의 모호한 감상주의와 잉글랜드 복음주의자들의 반지성주의 및 성경과 복음에 대한 양쪽의 불신앙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물론 평신도들과 성직자들 가운데 그에게 경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공식적인 기독교계안의 그의 동배들은 그를 유능하지만 매우 유별난 괴짜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진보주의적인’ 입장에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로이드 존스를, 오래 전에 그 생존력을 상실한 사역 형태로 후퇴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그의 능력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행동에 찬성할 수도 없었다. 주류를 거스려 헤엄치며, 인기 없는 진리를 옹호하고, 제도권의 인습적인 만족을 비판하며, 세상과 교회 안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라고 재촉하며, 현대주의의 파산을 선포하고, 현대주의의 교만한 대표자들에게 옛 길을 지적한다는 것은, 권력의 회랑에서 한번도 인기 있는 처방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



하지만 분명 그에게는 이런 고립에 대처할 역량이 있었다. 스펄전이 세속화논쟁(Downgrade controversy)에서 패배하고, 케직대회의 가르침이 국교회의 칼빈주의를 침몰시키며, 자유주의와 사회복음이 웨일즈의 강단들을 점령한 이후 개혁주의 신학의 실(絲)은 사실상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2차 세계대전 후에 개혁주의 신학의 실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복음주의를 엮음으로써 이것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의 사역이 이런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데는 기독학생회 (Inter-Varsity Fellowship)의 초대 회장 더글라스 존슨(Douglas Johnson)의 공헌이 컸다. 로이드 존스 박사를 후학 양성 사역에 끌어들인 이가 그였다. 이를 통해 로이드존스는, 부상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복음주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식견을 갖추어 줄 수 있었다. 또한 로이드 존스를 설득해 로이드존스 유력한 목회자 친교단체, 웨스트민스터 펠로우집을 만들게 한 이도 존슨이었다. 이 단체를 통해 로이드 존스는 사실상 초교파적으로 수백 명의 성직자들에게 주교와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사는 일생 동안 교계의 동배들 대다수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살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때문에 그가 유달리 청교도들에게 친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청교도들은 종교개혁 이후 국교회가 설립될 당시 따돌림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가 아는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성경적인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떤 형태의 비인기나 거부당함도 사양하지 않는 결단력 있는 사람들 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골수 개혁파, 교회 중심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교회 중심주의자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진작시키는 핵심기관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는 항상 교회의 상태였다. 전반적으로 그의 설교는 시종일관 두 가지 분야에서 출발하고, 그 분야에서 맴돌며, 그 분야에 안착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두 가지 분야는 이것이다. 그 하나는 교회의 상황이었다. 교회의 상황에 대한 그의 최종적 처방은 교회가 옛날의 신앙과 실천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성령의 부흥이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세상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그의 최종적 처방은 3R(Ruin 멸망. Redemption 구속, Regeneration 중생)의 성경적 복음이 성령의 권능으로 선포되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박사는 일차적으로 스스로를 전도자로 생각했으나 사실 교회의 상태는 잃어버린 자들의 상태 못지않게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떤 국교도도, 심지어 국교파 청교도도 그 자신처럼 교회에 대해 진지하게 염려하지 않았으며 염려할수도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1960년대에 그는 이에 관해 나에게 자주이야기 했었다.



그의 교회론은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 하였다. 장로교 목사로 안수 받고 죽는 날까지 공식적으로 장로교인이었지만 그는 교회정치체제와 관련해 ‘확신 있는 독립교회주의자’ (그가 나에게 말할 때 사용한 표현임)가 되었다. 그리고 성인 세례방식과 관련해, 침례 아닌 관수식(뿌리거나 적시기)세례를 끝까지 견지하였지만 언약의 자녀들에 대한 유아세례는 중단하였다. 신조와 의식 절차의 이러한 혼용은 그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흔하지 않은 행위였다. 그러나 그는결코 교회정치 체제를 이슈로 삼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서로 간에 다양한 조직과 관습을 성경에 직접 반하지 않는 이상 이의 없이 용납하고, 힘을 한데 결집해,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지도와 권위 아래 교리적 순결, 영적 깊이, 선교적 생명력을 공동으로 추구하자고 역설하였다. 이렇게 하면 기독교의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교회의 실질적 건강이 촉진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처음에 그는 교파에 관한 문제를 한 켠에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주요개신 교단들이 성경적 개혁신앙과 삶을 받아들이고 영적 부흥을 함께 도모할 가망이 보이지 않자, 그리고 그들과 WCC의 연계가 그들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리라는 판단이 들자,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이들 교파에서 탈퇴해 옛날식 독립교회 형태의 새로운 ‘무교파’ 연합회를 결성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고 그는 생각하게 되었다. 1960년대 에, 2천명의 청교도 목사에 대한 1662년도의 추방사건을 기념하는 집회 이후 로이드 존스 박사는 자신의 이런 견해를 공표하고 복음주의 내의 교단 동료들에게 분리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제스처는 양면으로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66년 런던에서 열린 비분리주의적 복음주의 동맹의 대규모 집회에서 박사는 힘을 다해 이를 호소하였으나 존 스토트가 이를 논박하고 나섰다.



본질적으로, 이 분리에 관한 로이드 존스 박사의 논증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주류 교단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에큐메니칼의 곱지 않은 친선 정책에 비추어볼 때 이 분리가 지혜로운 처사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이 분리가 복음주의의 하나됨을 보여주는 효과적이고 영광스러우며 그리고 필수적이기까지 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하나됨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종파분립적인 행위라고 보았다. 셋째는 복음주의자들이 현재 자 교단 내의 온갖 악과 연합해 죄를 짓고 있으므로 분리야 말로 당연한 임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복음주의 목사들의 대부분은 자 교단 안에 머물며, 그 안에서 계속 투쟁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결론을 내렸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생애의 마지막 15년간 이 이슈를 역설하고 이에 대해 특히 국교도들에게 압력을 넣게 되자 개인들 간에 소원(陳遠)현상이 발생하였다. 필자도 이를 면하지 못했다. 박사의 그런 주장은 복음주의 공동체를 분열시켰다. 박사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은 분리하지 않는 형제들과 협력하는 것이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그의 전반적인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이해하기에는 이것이 성경적이고 청교도적인 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즉 이것은, 미봉책을 거부하는 거룩한 열심, 그리고 교회의 사태가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체 없는 개혁’을 역설하는 거룩한 갈망이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이런 정신이 청교도 사상의 실질적인 핵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로이드존스박사의 분리운동은교회의 순결에 대한 청교도적 이상을 따르고자 한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분리운동과 관련해 그가 현실주의적 태도를 결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해 볼만하다. 박사는 원칙적인 이슈에 관해서 공적으로 강력히 설파하였으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유사교단(‘비교파적인’ 교파)의 청사진을 만들어 자기 비전을 구체화 시킨 적이 없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요구된다는 점을 제외하고 대안이라 할만한 것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조직하는 일을 싫어하였으며, 어떤 모험적 사업이 지나치게 고도로 조직화될수록 영성이 저하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는 점을 언제나 잊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확실히 유능한 경영자였다. 그 리고 분명 새로운 집단을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솔직히 고백하고 싶은 점이 있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분리 주장의 성공적 결실을 바랐다기보다 분리 요구의 제스처만을 보이고, 이에 따라 복음주의적 국교도들 과 침례교 연맹안의 침례교도들,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하는 일 그 자체에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처럼 남에게 거부당할 것을 얘기하면서, 당대에는 망각된다 하더라도 후대에는 알아줄지도 모를 어떤 의의 깊은 증언을 남기는데 지신의 주된 목적을 두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나에게는 있다. 계획 없는 말만의 이 분리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아마도 옳은 판단 일 것이다. 즉 폭넓은 지지를 얻어내고 광범위한 행동 욕구를 일으키기 위해 그 자신이 말했던 내용을, 성령께서 과연 사용하실 것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그는 직접 현장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교파의 우두머리가 되려 하는 듯한 어떤 모습을 비침으로써 자신의 선지자적 역할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 그를 비난 할 수 있겠는가?








로이드존스가 본 청교도 사상의 본질

로이드 존스 박사의 강연 “청교도와 그 기원”, “청교도 사상의 창시자 존 낙스”에서 청교도 사상의 본질에 관한 그의 견해가 분명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는 청교도 사상을 하나의 ‘정신적 성향’으로 보았다. 이것은 독자적인 성경연구에서 출발하고, 연구결과를 교회생활에 적용할 것을 강조하며, 교회에 대한 행정당국의 통제에 도전하고, 개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할 때는 언제나교회 제도권과 결별하는 그러한 정신이다. 성경 진리의 적용에 언제나 청교도 신앙의 핵심이었 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청교도가 없다.… 적용은 진정한 청교도의 특정이다.” 요컨대 “청교도는 주로 순수한 교회,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청교도들이 가르친 것들과 은혜의 교리를 강조한 점, 그리고 목회신학을 강조한점 등을 좋아하고, 이런 면들에 아무리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하더라도 순수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에 일차적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확실히 청교도임을 지칭할 자격이 없다.… 교회론을 핵심에 두지 않는다면 진정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견해, 청교도 정신, 청교도의 이해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이런 견해는 백번 타당하디만 여기에 추가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극히 현대적이었던 선대의 사람 칼빈처럼 중세의 유산을 물려받은 청교도들도 교회의 신앙고백, 질서, 권징, 예배 및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경건과 정직, 그리고 인간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와 중용, 이 모두를 단일한 완전체의 구성 요소로 보았다는 점이다. 청교도들의 마음에서는 개인과 사회와 교회 공동체의 모든 요소가 상호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 모두가 ‘여호와께 성결’ 해야 했다. 두 번째는, 특정의 정책적 문제나 기타 많은 문제들에 관해 청교도사상 내에서도 견해가 다양했다는 점이다. 로이드 존스박사 자신이 말한 대로, “대략 1640년 무렵에는 본질적으로 국교도적인, 원래의 청교도가 나타났다. 물론 이들은(영국국교회로부터) 비분리주의적이었다. 다음에는 역시 비분리주의적인 장로교 형태의 청교도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다른 극단에서는 아주 명백하고 뚜렷하고 공공연한 분리주의자들이 등장하였다.” 그 외에도 국교회에 ‘수시로 순응하는’ 반(半)분리주의자라 할 만한 이들도 있었다.



교회정치 체제와 정책에 대해 로이드 존스 박사와 나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청교도정신이 본질적으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기독교이며, 우리가 오늘날 공감해야 할 대상이라는데 우리는 생각을 같이 했다.








로이드존스의 사역에 나타난 청교도적 요소들

그렇다면 그 자신의 사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청교도적 요소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학을 합리적, 실천적 학문으로 보는 그의 견해는 신학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한 학문, 이라고 말한 윌리엄 퍼킨스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신학의 원천으로(즉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로), 그리고 기타 성경적 사상체계의 근원으로 본점은 청교도신학의 고전,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둘째로, 그의 설교 행위는 스타일과 언어 형태가 완전히 20세기 적이었으나 그 철학과 방법, 내용면에서는 전적으로 청교도 적이었다. 교리와 추론 그리고 ‘사용’ (본문에서 진리를 끌어내어 다른 성경 구절과 합리적 고찰로 이를 확증한 다음 이를 적용하는 일), 이 삼단계가 그의 일반적인 설교패턴이었다.

그는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행위로서, 찬양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행위로서, 양식이다. 설교는 공적 예배의 정점이며,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와 복음의 은혜가 설교의 핵심 이어야한다. 적용에서 (그는 서론도 사실적용의 일부로 사용했다) 설교자는 이 시대를 향해 말해야하며, 청중의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가 하나님 앞에 놓인 그들의 죄와 그들의 근심을 직접 다루어야한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상상의 나래가 없는, 단순하고 진지하며 직설적인 언어가 이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다. (리차드 백스터의 저술을 가리켜 처음 사용 되었던 ‘고상한 무관심’ 이라는 표현이 로이드 존스 박사의 문자화된 설교와 강연에도 몹시 잘 어울린다. 설득력 있는 1대1식의 명료한 언어, 청교도적 의미에서의 ‘친숙한’ 언어를 그는 언제나 추구하였다. 말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설교자에게 자유와 직설, 감정이입과 에너지, 열정과 긍휼을 주며 청중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 갈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기름 부으심을, 설교자는 설교 전과 설교 중에 매번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백스터의 말처럼 설교자는 ‘두 번 다시 설교하지 못할 자처럼 ,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설교했노라“ 말할 수 있어야한다. 각 본문에 대한 설교와 함께 성경의 장들과 책들을 계속하여,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강해하는 것이 훌륭한 설교방식이다.



셋째,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영적인 경험을 청교도적인 관점에서 풀이하였다. 이에 관한 그의 이해는 두 가지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는 인간 지성의 지고성이다. 그에 의하면, 지성은 의지의 안내자이며 감정의 판단자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간접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고 움직일 때 먼저 우리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배우게 하고, 우리를 지극해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신다. 성령이 역사하여 지식을 주실 때 지성과 감정을 함께 자극해 신적인 실상들 즉 하나님, 그리스도, 은혜, 용서, 양자삼기, 새 창조, 안식 등을 효과적으로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청교도의 단어인 ‘체험적’이라는 말을 자체의 본질적 용어로 사용해야 한다. 또 최소한의 감정만이 개입되는 기독교가 최상의 기독교라는 관념은, 강력한 감정들에 대한 불합리한 잉글랜드 중류층의 반발일 뿐이다. 그러한 관념은 어리석기 때문에 조소거리에 불과하며, 성령을 소멸하기 때문에 참으로 서글픈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에 의하면, 회심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항해 언제나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 이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데는 회개(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심) 와 믿음(죄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심) 이 포함된다. 설교자들은 청중에게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지적해 주어야 하며, 그리스도께 오는 자들이 얻게 될 평화 와 기쁨, 마음의 변화, 삶의 새 자원을 찬양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틀에 박힌 20세기식 복음 전도는 세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지성적 설득을 대신하는 조작적인 감정주의는 거짓 회심을 격려하는 일종의 세뇌이다. 둘째로, 설교자가 마치 성령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결산의 촉구 (일반적인 형태는, “이제 여러분에게 결단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믿기 원하시는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도 역시 그와 동일한 좋지 못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회심과 관련해 언제나 철저하고 근본적인 회개를 역설하지 못하므로 진정한 회심자들이 믿은 후에도 영적 성장을 하지 못하고 얕고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문다. 이러한 약점들 때문에 로이드 존스 박사는 현대의 제도화된 복음 전도 방식을 멀리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 즉 성결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 박사는 정적주의적(靜寂主義的) 수동 상태를 복음주의적 지성의 현대적인 귀신들림으로 보고, 여기에는 분명한 축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놓아드림으로써 하나님이 하시게 하라”, “노력하기를 멈추고 신뢰하기 시작하라’ 등과 같은 표어들은 이런 견지에서 그가 볼 때에 수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성결에 대한 판에 박힌 말들은 ‘이것을 하 라’, ‘그것을 다시는 하지 말라, ’먼저 기도한 다음 행동하라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청교도들처럼, 영육간의 갈등이 일생동안 지속됨을 강조하면서, 이를 초월 할 수 있다는 완전 주의적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다.



영적 침체도 로이드 존스 박사가 주의를 기울인 문제였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의사들과 정신병 의사들이 다루는 정신적 우울증과 종종 관련되면서도 그와 다른 상태이다. 이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에 대한 불신이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불신앙에서 오는 감정들과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때 당사자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연단시키면서도 자신의 약속에 언제나 신실하다는 사실에 영적인 눈을 고정하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리라는 사실을 시편 42편 같은 형태로 고백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 박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량에 대한 확신과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은 그의 삶의 최고 축복이었다. 또한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후사임을 직접 증언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할 최고의 위안이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로마서 8장 15~17절이 말하는 이 증언을, 성령의 인침(엡 1:13, 4:30)과 동일시하고 또 사도행전의 몇 구절에서 말하는 성령을 받는 것과 동일시하면서, 언제나 이를 어떤 특정한 체험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 파스칼로부터 에드워즈, 무디, 특히 존 플레벨 같은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강렬한 확신과 변화의 순간에 관해 기록한 여러 성도들의 체험을 실례로 들었다.



그 자신도 천국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런 체험을 한 번 했다고 한다. 이것은 30년 전 내가 그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제 1차 청교도 연구 모임에서도 이 주제에 관해 강연하면서 직접적 확신에 관한 청교도 교리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간과된 진리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의 런던사역 후반기에는 로마서, 에베소서, 요한복음에 대한 정교한 강해에서(지금은 모두 책으로 출간됨) 이 문제를 길게 다루었다.


청교도들도 로마서 8장 16절과 에베소서 1장 13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였지만, 혹자들은 성령의 증언이 단일순간의 체험이라기보다 끊 임 없는 질적 체험을 가리킨다고 보고, 에베소서 1장 13절은 믿은 후와 어느 시기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라기보다 믿을 때에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모든 청교도들은 양자됨에 대한 지극히 분명한 체험적 확신을 구하고 남에게도 이를 구하도록 촉구하였다.


마지막으로, 청교도들은 금세기를 포함해 여느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경건한 삶의 면류관으로 보았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종종 설교 시에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함을 강조하였으며, 한 동료에게 자기 삶의 종말은 유종의 미를 거둘, 자기 사역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면에서는 그도 영적인 체험에 관한 17세기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초월하였다. 즉 주기적인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하시는 주요 수단이라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소신을 수용한 점이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부흥이란 영적인 체험이 매우 깊은 교회에 내리시는 성령의 쏟아부어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 쏟아부어짐이 일어날 때를 결정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하지만 그 때를 앞당길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대로 일하신다. 이상이 로이드 존스 박사의 견해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서는 이런 사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청교도들 모두가 종교개혁을 참된 신앙의 부흥으로 인식하였지만, 청교도들은 어느 시기에도 자신들의 사역과 당대의 역사(歷史)를 주기적 부흥의 비전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에서 1931년의 남부 웨일즈 목회에서는 그가 이런 부흥을 어느 정도 맛 보았으나,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는 이 부흥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 에게 슬픔의 한 근원이었다. 하나님이 부흥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그의 신념과, 개개교회들이 연합하면 특이한 영적 생명력과 권능을 얻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로 그가 설명한 적이 없다. 어쨌든 에드워즈의 부흥교리가 일생 동안 그의 가슴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영적 거인들이 다시 일어나길 바라며

‘청교도 같은 사람?’ 그렇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일생의 대부분을 그렇게 살았다. 스펄전은 자기시대에 마지막 청교도라고 일컬어 졌거니와, 이 칭호는 로이드 존스 박사의 생전에도 그에게 붙여졌다. 아마 지금도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칭호는 다른 사림들에게도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 가운데는, 그의 청교도 사상을 이어받은 젊은 목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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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존스는 신학교에 다닌 적이 없지요.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평소에 늘 신학서적을 읽었죠.
특별히 찰스 하지의 조직신학을 텍스트로 삼아서 언제나 이 책을 참고하였던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하지의 조직신학을 언젠가 정독을 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로이드존스의 신학 강의도 1,2,3권으로 나왔지만요.
아무튼 찰스 하지의 조직신학은 참으로 추천할만한 책이지요.




--------------------- [원본 메세지] ---------------------
찰스 하지 조직신학

19세기 최고의 미국 칼빈주의 신학자 찰스 하지가 쓴 전 3권의 "조직신학"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이후 지금까지 500여년 동안
대표적인 개혁주의 조직신학서중 하나로 손꼽힌다. 하지는 50년 이상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교수 생활을 했으며, 오랫동안 투
레틴의 교의학 책을 조직신학 교재로 사용해왔다.
1872-1873년, 하지는 자신의 평생의 연구를 마감하며 "조직신학"을 출판하였다. 그 후 찰스 하지의 "조직신학"은 정통 칼빈주의
신학의 주 교재로서 미국에서 100년이 넘도록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개혁주의 조직신학서들은 17세기에 볼레비우스(1626)와 투레틴(1688), 퍼킨스(1590), 에임스의 "신학의 정
수"(1623)가 있고, 18세기에는 픽테트(1696)와 윌라드(1726)가 있으며, 19세기 이후에는 찰스 하지, A.A.하지(1860), 댑니(1878
년), 쉐드(1888년), 스트롱(1906), 바빙크(1895~1901), 베르카워, 루이스 벌코프와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오토 베버 등이 있
다.



찰스하지
Charles Hodge, 1797-1878
19세기 최고의 미국 칼빈주의 신학자.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1815년에 프린스턴 대학을, 1819년에 동 신학원을 졸업하였다. 2년간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하였고,
1822년부터 1878년까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교수였다. 그의 신학은 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신학이었고, 스콜라적 칼빈
주의, 특히 투레틴(Turretin)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의 사상은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존중하는 시각에 의하여 지
배되었다. 정통 칼빈주의가 미국의 사상계일반에서 쇠퇴하고 진화론적 사상이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고 있을 때 하지는 초자연적
으로 영감된 성경을 확고하게 옹호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프린스턴 신학'이라고 불려지게 될 신학에 자신의 흔적을 새겨두었
다. 프린스턴 신학은 그 자신이 속한 구파장로교파 뿐 아니라 다른 교회들에도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저서들은 반 세기 동안 그가 가르쳤던 3천명의 학생들을 포함하여 일반 대중들에게도 그의 영향력을 전달하였다.




플라톤의 우주기원론

플라톤의 우주기원론과 인간론은 그의 신학의 범신론적 견해를 확증해 준다. 지금까지 창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는 모
든 것이 영원하다. 참으로 그것은 형식이 아니라 실체에 있어서 그렇다. 물질 곧 물질적인 어떤 것이 항상 존재하였다. 이것은
본질상 생명이 없지만 그것은 "영혼" 곧 혼돈적이거나 무질서한 동요나 운동을 결과하는 비지성적 힘을 갖고 있다. 이 비지성
적 힘을 신은 그 자신의 지성 즉 누스의 한 부분으로 부여하였고, 그것은 세계영혼 즉 세계의 형성원리인 데미우르고스
(Deminurgos)가 된다. 그러므로 신 자신은 심지어 세계의 구성자도 아니다. 이것은 데미우르고스의 작품이다. 이 세계영혼은 가
시적인 우주 속에 충만해 있고, 하나의 생명적이고 활력적인 전체를 구성한다. 이 "세계영혼"은 별신들(stare-gods), 마귀들, 그
리고 인간의 영혼들 속에서 개체화된다. 따라서 플라톤의 체계는 다신론에 자리를 내준다.

- 본문 402




서론

제1장 방법론
제2장 신학
제3장 합리주의
제4장 신비주의
제5장 신앙의 규칙에 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
제6장 개신교의 신앙의 규칙

제1부 신론
제1장 하나님 관념의 기원
제2장 유신론
제3장 반유신론적 이론
제4장 하나님에관한 지식
제5장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제6장 삼위일체
제7장 그리스도의 신성
제8장 성령
제9장 하나님의 작정
제10장 창조
제11장 섭리
제12장 이적
제13장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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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화론


통달의 경지에 달한 성경 지식과 정연하기 이를 데 없는 논리가 낳는 그의 설교와 저서의 고품질과 방대한 양은 그가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 성령 충만한 말씀의 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화론을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앞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하는 이 글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Great Doctrines of the Bible 중의 18 Sanctification ?the Different Views 및 19 Sanctification ?God뭩 Work and Ours 20 The mighty Process of the Holy Spirit 21 Sanctification in Romans 6 To 8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서적이 한국어로 이미 번역되어 있다면, 그 번역본을 올려 주시면 저의 수고가 절감됨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 영어 본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는 번역에 동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어 본이 없더라도 번역에 동참하실 의향이 있으신 분이 연락 주시면 영문을 팩스로 보내 드리겠습니다.(byungkukim@hotmail.com)젨

영어 원본이 약 44 페이지의 분량(30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됨)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8 성화 ?상이한 견해들


여기서 다시 주의를 환기 시키지만, 교리에 관한 이 강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상이한 국면들 간의 연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교리와 관련하여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 이기 때문에 이 강의에서 크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성화의 교리에 이르렀다. 우리가 얻게 된 신분을 이렇다: 우리는 새 품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거듭 태어났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 받았다; 우리는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렇다, 그렇다면, 죄의 문제는 어떻게 된 것 인가? 우리들은 별안간에 온전하게 만들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아직도 신자의 생활 속에 죄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성화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에 대하여 무엇을 하시는가를 다루는 교리이다.

이 교리에 대해서는 수 많은 상이한 견해와 이론들이 있기 때문에 매우 논쟁이 많으며, 성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보다 성화가 정확하게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련하여 쟁론이 많다, 성화는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특히 지난 200여 년 동안 많은 쟁론이 있어왔는데 그 주된 원인 제공자는 다름이 아니라 위대한 존 웨슬레 이다. 존 웨슬레는 그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성화 및 거룩함에 관한 이론을 발의하였다; 그는 자신이 나서서 이를 가르쳤으며 그의 설교자들이 그것을 설교하도록 가르쳤다. 그것은 위대한 토론을 낳았는데 나는 똑같이 선량하고 똑같이 복음주의적인 크리스천들 간의 표독스런 토론을 낳는 것은 두려워한다.

신학과 이 일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편의 존 웨슬레와 그의 보좌인 이며 조력자인 마델레이의 존 훌레처, 그리고 다른 한편의 조지 휘트휠드, 아우구스투스 톱레디 그리고 기타 신학자들 간의 위대한 토론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크리스천 신앙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중요하다. 그 때 시작된 토론은 그 후로도 다소간에 지속되어 오고 있는데, 이는 존 웨슬레가 여러 가지로 그 이래로 주장되어오고 있는 성화에 관한 여러 인기 높은 견해들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구세군의 교리도 존 웨슬레로부터 직접 도입한 것이다. 윌리암 부스는 감리교인 이었는데 그는 감리교회의 교리를 인수하여 그 교리를 수정하였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 중에 생긴 여러 가지 성화 운동들 모두가 존 웨슬레의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들을 때, 어떤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어떻게 믿든 뭐가 중요한 일인가? 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음을 잘 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당신은 존 웨슬레가 조지 휘트휠드 만큼 크리스천이었다고 믿는가??#45208;의 대답은 ?#44536;렇게 믿는다?#51060;다. 나는 나아가서 조지 휘트휠드가 한 유명한 행사에서 받은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을 인용하고자 한다. 어느 날 오후 조지 휘트필드의 매우 힘있고 적극적인 지원자가 물었다, ?#55064;트휠드 선생님, 우리가 조지 웨슬레를 천국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에 대하여 조지 휘트휠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50500;마 그렇지 않을 것이요, 그는 매우 높고 고상한 신분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나 나는 거기서 그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44536;러한 태도가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화론(II)

그 견해가 어떤 것이 던 간에 성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의하여 우리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화에 대하여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신자인 크리스천은 항상 성경을 연구하여 교리라는 진리의 가장 성서적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연구를 하지 않는 다면,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귀찮다면, 그러한 일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진리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주장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47932;론 우리는 그런 사람의 신학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군중들을 모우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대려 온다면 그의 신학이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사실상 진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은 오직 결과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 당신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단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그럴듯한 교리가 당신 앞에 제시되면 당신은 그것을 평가할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그것을 믿게 될 위험한 지경에 자신을 집어 넣고 있는 것이다. 인기 좋은 여러 가지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성공하는 것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올바른 논거를 공부하는 고통스러움을 회피하는 데 있다. 우리의 문전에 그들의 서적과 그들의 이론을 가져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논거를 알고 그것에 관하여 연습하고 훈련을 받았으며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교리를 모른다면 크리스천으로서 창피한 일이다. 우리가 ?#49324;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상관할게 무어냐??#54616;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러한 결과를 피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려는 성화론은 사람들이 성화에 관한 생각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오류가 종국적으로 그들의 성화를 막지는 못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이 강의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성화에 접근함에 있어서, 정의(definition)를 내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자. 성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구 약 성경에서 성화라는 단어를 매우 많이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의미를 간략하게 요약하자. 신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완전하게 동의하지를 않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밝은 광선처럼 ?#48731;난다?를 의미한다고 하고 다른 이들을 그것은 ?#51096;라 낸다? ?#44396;별한다?#47484;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의미 모두가 성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련이 된다고 생각되므로 나는 두 가지 의미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라 내는 것이다. 구별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진정한 성화는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산에 있었던 후에 모세의 얼굴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빛남을 수반한다. 거룩함에는 빛남, 영광 그 자체와 같은 어떤 것이 있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 둘 다가 구약 성경에는 있다. 신약에서도 성화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 단어가 구별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음에 유념해야 한다.

성화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위한 구별함이다. 이는 신구 약 모두에 걸쳐서 성화의 중대한 의미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만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에도 사용됨은 참 흥미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산은 ?#49457;산?또는 성화된 산으로 불린다. 그것이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구별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거룩한 산이 되었다. 성전 건물은 거룩한 것으로 불리며, 그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다. 성전의 즙기, 도구 등은 모두 성화된 것으로 구별되어 거룩하게 만들었다.

구별됨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세속적이거나 불결하거나 부정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다. 그러한 즙기는 일반적인 용도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일단 성화가 되면, 일반적인 용도로부터 구별되었다. 그러나 둘째로 그것은 또한 적극적인 의미로 성화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용도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에게만 헌신되고, 받쳐지고, 제공되었다. 그런 의미에 관련하여 ?#49457;화시키다?#46972;는 말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련하여 실제로 사용되었음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요한복음에서 두 번에 걸쳐 그것이 발견된다. 첫째로 요한 10:36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정체에 대하여 주님에게 묻고 있는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시는 가운데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아버지께서 나를 성화시키셨다,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50500;버지가 사용하시기 위하여 구별하였다?#47484;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 17:19, 주님은 말씀하신다. ?#46608;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기 위하여 필수적인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용하심에 맡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구별함과 하나님에게만 쓰여짐 이라는 이중 의미 속에서, 이 성화라는 단어는 움직이지 못하는 물건과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까지 사용된다.


신분적 성화와 윤리적 성화(로이드 존스 성화론 III)


또한, 당신은 ?#49457;화시키다?#45716; 단어가 신자들에 대한 의미로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약간의 예를 들어보자. 다메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큰 사명을 주셨다. 사도행전 26장 중 특히 18절에서.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44536;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말씀 중의 거룩케된 무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무리를 의미한다.

가장 흥미 있고 중요한 절인 고전 6:11을 보자. 우리들은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성화가 칭의를 뒤따르는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고전 6:11은 ?#45320;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44256; 말씀한다. 여기서 거룩함이 의롭다 하심을 선행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고린도 크리스천들을 세상 밖으로 취하여, 타락한 고린도 사회로부터 끄집어 내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씻고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소용으로 구별된 것이다.

히브리서 10:10에서도 거룩함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51060;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여기서 거룩함은 구별됨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히브리서 10: 14을 보자. ?#51200;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제물로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여기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님께서는 구별된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 중의 거룩하게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것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예를 찾아보자: 베드로 전서 1:2,?#44263;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이 말씀 중에서도 거룩하게 하심은 세상으로부터 취하여 구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베전 2:9,?#50724;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뀉?베드로는 여기서 출애급기 19장에서 사용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하여 사용한 단어를 적용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성화된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구별하셨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사역으로 이미 단번에 영원히 거룩하게 성화되었다.

그러나 성화는 신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의미인 두 번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걸 맞는 우리들을 만드는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윤리적 의미,?#44144;룩하게 만든다?#47484; 의미한다. 하나님을 위한 구별이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거룩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의미는 우리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어 지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들을 더욱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우리들을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우리 속에서 진행되는 순결케 함과 정결케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이 성화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이다. 사람들이 ?#49457;화에 관하여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 어떤 사람이 성화되었음을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라고 물을 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내부 청결화와 내부 순결화를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만들어 짐을 의미한다.

역자 주: 칭의 ?#50689;화라는 값싼 은혜론의 근저에는 신분적 성화를 윤리적 성화로 생각하는 오류가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의화와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로이드 존스 성화론IV)



그리하여,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이 성화를 정의한다: 성화란 그 분께서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가 선한 일을 하도록 그의 모든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는 성령님의 은혜스럽고 지속적인 일하심이다. 분명하게 해두자: 그것은 그분이 칭의된 죄인 ?이미 의롭다고 여김 받은 자 ?을 ?#51396;의 오염으로부터??이미 이루어진 바, 더 이상 죄로부터가 아니라 - 구하는 성령님에 의한 은혜롭고 지속적인 일하심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칭의가 해결하였다. 그는 의롭다고 선언되었다. 죄는 처리되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세력과 오염에 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44536;가 선한 일을 하도록 그의 모든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칭의란 간편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칭의를 통하여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된다. 우리가 번 것이 아닌데 우리 구좌에 입금시켜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자들을 용서하고 받아드리신다. 그분은 온전히 성화될 때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드리신다. 카톨릭은 의화와 성화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번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역자주. 하나님께서는 죄 중에 빠져있는 남녀를 보시면서도, 그들이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다. 그것은 전가된(imputed) 의로움이다. 그러나 성화는 나눠진(imparted) 의로움을 이야기 한다. 성화는 우리의 구좌에 입금되어진 의로움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생산된 의로움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명백한 구분이다. 교부들은 전가된 의로움과 나눠진 의로움 간의 차이에 대하여 거의 습관적으로 많이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이 우리들에게 친숙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이 얼마나 저속해 졌는가를 말해준다. 그 용어들은 17세기, 18세기, 그리고 19세기 까지도 매우 중요한 용어들이었다. 금세기의 우리들은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 우리들은 왜 위대한 용어들과 그들의 위대한 의미들을 상실하였는가?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들의 거듭남과 칭의 이후 죄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님의 도이다. 성화에 관한 정의의 문제를 떠나기 전에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 있다. 우리들은 항상 성화를 정의함에 있어서 우리의 윤리적 상태와 상황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우리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 우리의 윤리적 상태와 상황의 관점에서 성화를 정의하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도덕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그들이 성화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성화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의 개념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화란 도덕성과 순결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도덕성과 순결이다. 그래서, 내세울 수 있는 최고로 도덕적인 사람과 성화 되어 가고 있는 크리스천간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3가지 다른 견해 (로이드 존스 성화론 V)

성화의 정의에 대해선 이 정도로 끝내고 다음으로 가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성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청결하게 하고 순결하게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차적으로 일치시켜가는 과정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상이한 견해들의 핵심이 있으며 세가지 주된 그룹으로 분류되는 사상이 있다.
첫째로 내가 온전주의자(perfectionist) 견해라고 묘사하는, 어떤 형태로든지 이 세상 속에서 온전한 크리스천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견해가 있다. 나는 정확을 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언어로 묘사함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이 순간에 여러분은 무엇이 온전함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상이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음에 무관하게,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의 온전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이 이 첫 번째 그룹이 갖는 사상의 내용과 분파들을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을 시도해보자. 그들 중에는 크리스천으로부터는 죄가 온전하게 제거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의 정원에 들어가서 잡초를 보고 잡초의 보이는 부문만이 아니라 삽으로 잡초를 뿌리까지 파 내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화는 어느 주어진 순간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항상 온전하게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들은 한 해 또는 십 년의 기간 동안에 훨씬 많이 할 수 있으나, 온전함이란 당신이 이 순간에 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온전함의 슬라이딩 스케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예를 들면 유명한 Charles G. Finney과 그의 동료, Ezra Mayhem과 같은 소위 미국의 Oberlin School에 속하는 이들에 의하여 주장된다. 그들은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존 웨슬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란 크리스천 남녀가 주어진 순간에 죄로 알고 있는 죄를 고의로 짓지 않는 것이다. 존 웨슬레에 따르면,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죄를 범할 수 있으나, 이미 죄라고 일고 있는 죄는 고의로 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간과 순간의 상태이다라고 웨슬레는 말한다; 당신은 다음 순간에 범죄할 수 있으나 당신은 이 순간에는 온전하다. 그리고 그것은 죄라고 알고 있는 죄에만 해당된다. 웨슬레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 모르고 죄를 짓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나중에 당신에게 알려 질 것이고, 그리고 당신이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순간에 그 죄를 당신은 버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온전하다. 그러므로 성화는 온전함을 의미하지만 절대적인 온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이들은 죄로부터 온전하게 씻김을 받은 정결한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성화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도 죄라고 알고 있는 죄 그리고 마음 먹고 짐짓 지은 죄로부터의 씻김을 받은 마음을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달리 표현한다. 여기서 나는 다시 성화를 ?#50728;전한 사랑?#51004;로 묘사하기를 좋아하는 존 웨슬레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크리스천들은 죄인지 모르고 범죄할 수가 있다. 그들은 아직 연약하며 많은 면에서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온전하다 할 수 있는가?뮔?#44536;는 만일 그들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이 생활과 행실에서 비록 온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다. 그들은 그 순간에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다 들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웨슬레는 말한다. 나중에 더욱 큰 사랑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순간에 있어서는 그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웨슬레는 순간 순간에 있어서 온전함과 성화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온전주의자들의 견해의 특징은 성화는 순간적으로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화를 열망하는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화를 간구하면, 그분께서 성화를 우리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화를 순간에 눈깜짝하는 사이에 받을 수 있다. 온전주의자들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를 즐긴다: ?#45817;신이 칭의를 받을 때에 당신의 성화도 받아야 한다.?#44536;것은 어느 한 순간에 완전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경험적인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소위 반작용의 법칙(the principle of counter-action)에 의하여 성화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17 및 18세기에 널리 퍼졌으며, 이직도 인기가 있다. 이 견해는 죄의 제거는 믿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하게 죄의 제거를 가르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패배하기 위하여 일생을 통한 투쟁을 하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법칙이 있다. 이들의 가르침은 로마서 8:2를 기초로 한다. ?#51060;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44536;들은 말한다. 그렇다 ?#51396;는 신자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리고 믿음으로 그분에게 의지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죄지음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다. 크리스천 속에는 죄의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것을 없에는 반작용을 하고 남을 정도로 더 크다. 그리고 많은 예화들이 사용되었다.

Evan Hopkins 목사가 그러한 예화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 유명한 두 개를 소개한다: 첫째는 부지깽이 예화이다. 부지깽이는 차갑고, 까맣고 단단하다. 그러나 이 부지깽이를 불 속에 넣으면 어떻게 변하는가? 빨갛게 되고, 뜨겁고 말랑 말랑해 진다. 그것을 불에서 꺼내면 다시 차갑고, 까맣고 단단해 진다. 이것이 이 학파의 성화에 관련한 가르침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당신은 빨갛고, 뜨겁고 말랑 말랑하다; 당신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전과 똑 같은 상태로 되돌아 간다.

다른 하나의 예화는 구명대에 관한 것이다. 중력의 법칙은 무거운 몸을 물 속으로 가라 앉힌다, 한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수영할 줄을 모르면 가라 앉는다. 그런데 반작용의 법칙이 있다. 공기로 부풀린 구명대를 그 사람에게 입히면 어떻게 되는가? 그를 가라 앉게 한 법칙에 반작용이 일어난다. 그 사람이 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명대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옛 법칙이 작용하여 그는 가라 앉게 된다! 그는 구명대안에 있어야만 한다. 그는 계속 바라보고 신뢰해야 한다. 그것이 전체적인 영적 상태이던, 특정의 죄이건 간에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 안에 거하며, 그분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가 항상 승리하도록 지켜주실 것이다. 온전주의자들의 견해와 같이 이 가르침은 그것은 정상적인 경우, 경험으로 시작하여 과정으로 계속된다. 다시 말하면, 성화란 수령해야 하는 것이며, 순간에 받을 수 있고, 그리고 나서는 그 경험 속에 거하는 것이 당신이 해야 할 전부이다.

세 번째 가르침은 성화란 우리의 거듭남의 순간에 시작되는 과정이며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지속되며 죽음을 지나서만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견해가 앞의 두 견해와 크게 다른 점은 이 견해는 성화를 칭의에 뒤이어 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생각하지 않는 점이다; 이 견해는 성화는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에 시작되어 우리의 육신이 최종적으로 영화를 입어 타락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진행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로마서 8:22-23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는 것은 우리의 몸이 종국적으로 구속될 때인 것이다.

이 가르침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Holiness by Bishop Rile를 읽을 것을 권면한다. 이 책은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한 여러 가지 다른 아이디어와 이론들을 다루고 있다. 내가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다시 말하거니와, 이런 가르침들을 검토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들을 분파 의식을 가지고 검토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방위하며 다른 가르침을 비난 하는 자세로 읽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자주 말하지만, 나는 존 웨슬레에게 크게 빚진 자이다. 나는 그의 성화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빚진 자이다. 나는 그의 가르침 전부를 받아드리지는 않는다. 이것은 반드시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 중에는 있다. 그러나 나는 온전주의자들의 성화 및 거룩함에 관한 서적들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된 강조점들을 믿지 않고 거절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그들의 저서를 읽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내 속에서의 성화가 진척되었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간증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게 한 것을 감사 드린다.

그러므로 온통 성경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의 저서들을 읽자. 그리고 성경으로 가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냉정하게 그들의 가르침을 검토하여 이 문제에 관한 진리에 도달하도록 애쓰자. 우리들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복을 받아 풍부해지며, 우리들은 성화의 교리를 공부하는 데 시간을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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