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연구 -
최갑종 교수
1. 문제점 제시
바울의 율법관을 이해하지 않고는 바울의 신학 전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바울 신학 이해에 있어서 율법이해는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현금의 바울 신학 연구에 있어서 그의 율법관처럼 신약학자들 사이에 통일된 의견을 산출하지 못하고 계속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주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2. 출발점
바울의 율법관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대한 그 자신의 해명이 어디서 출발하고 어떠한 상황에서 전개되고 있느냐 하는 점을 주시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율법과 관련된 바울 자신의 진술과 그러한 진술을 하게된 역사적 삶의 자리를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궁극적으로 바울 자신의 글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율법관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체계적인 논문이나 서신을 써서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고 다만 특수한 상황과 관련되어 쓰여진 여러 서신들, 특별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관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바울의 복음전파와 반위관계에 있던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관(한 때 그 자신이 선봉해 왔던)을 올바르게 규정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게 된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관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요지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Sanders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사실상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의와 공로의 수단, 말하자면 이미 그들이 오는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신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 안에 있는 악의 충동성을 제어하고 모든 죄의 위협을 적절하게 대처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삶의 보루요 도구로 간주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울의 율법관은 이와 같은 유대주의 율법관에 대한 도전과 그의 십자가 복음의 변증에서 전개된다.
3. 율법은 구원(의)의 수단이 될 수 없다.
바울의 유대인의 율법관, 즉 율법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와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 대해서 그것이 현실적인 면에서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바울이 율법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나쁘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바울이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롬 7:2)고 믿고 있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신령하며"(롬 7:14), 신적인 영광으로 말미암은(고후 3:9-10, 참조 출 34:29-35) "하나님의 법"(롬 7:22)이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율법은 본래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에 이르도록" 하기위해 주어졌다(롬 7:10). 그리고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를 수 있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롬 10:5 참조, 갈 3:12 ; 롬 2:7,10).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특권마저 인정하고 있다(롬 9:4).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절대적인 반대의 근거는 율법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실에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옛것을 가리우고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빛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는 율법의 절대적인 무능력과 불충분성의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바울의 자서전적인 고백인 빌립보서 3:4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의가 율법을 통한 의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한 의의 절대적 불가능성의 발견으로 인해 의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의 절대적인 거부이다. 바울이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는, 로마서 2:1-3:20절에 있는 유대인의 위선적인 범죄에 대한 고발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선언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한 의를 추구하면서도 실상은 율법을 범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 그들에게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그 율법을 그 모든 면에서 철저히 지키고 있지 못하므로 인해 율법이 그들에게 의를 가져다 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율법은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심 자체가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의 행위나 공로를 근거로 하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세우거나 자기 의를 세우는 외람되고 교만된 행위가 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하나님의 방법까지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려는 인간의 노력 그 자체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신뢰하는 교만된 행위일 뿐 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를 거부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만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의의 방도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거슬리는 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볼 때 유대인들은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이중적인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4. 율법은 죄와 악을 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없다
바울은 다시 율법이 악의 경향성을 제어시키고 죄를 대항하는 무기가 되어진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율법은 그 반대로 인간 안에서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죄되게 하고, 죄를 불러 일으키고 죄를 증가시켜 인간을 죄의 노에가 되게 하고 마침내 인간을 사망으로 끌고 가는 점을 지적한다(롬 3:20; 5:20; 7:5,7,9-10 ; 고전 15:56).
율법은 그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나타날 때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육의 연약성 때문에 오히려 율법은 인간을 율법의 저주 아래로, 절망과 사망으로 끌고가는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참조 롬 4:15; 8:3; 7:10-14).
율법에 관한 바울의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가 유대주의에 대항하는 그의 정치적 열심이나 구약에 대한 연구나 자신의 교의학적 전개나 혹은 당대 유대주의에 대한 실망이나 율법의 무능력에 관한 심리적 좌절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사건과 그 의미에 기인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5. 율법은 종국적으로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
바울은 이제 인간의 본성과 죄의 심각성을 폭로하여 율법에 근거한 인간의 행위를 통한 구원의 절대적인 불가능성을 천명하고 있는 그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 안에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율법의 종국적인 긍정적 기능을 발견한다. 바울은 롬 4장, 9-11장, 갈 3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한 의를 예로들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율법을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했으나 그것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길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기리 율법보다 먼저 주어졌음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련하신 의의길, 구원의 길은 율법을 통한 길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과 믿음을 통한 길이라는 것이다(롬 4:9, 20-22; 갈 3:6-7). 즉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하여졌다"(갈 3:19). 그는 더 나아가 율법이 범죄를 더 하기 위해 왔다는 것은 이미 존재해 왔으나 아직 율법 아래서 범하지 않은 죄를 그 절정에 도달하게 함으로써(롬 5:13) 그와 족히 비교될 수 없는 약속을 따라온 은혜의 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믿음의 길의 위대함을 드러내는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롬 5:21; 갈 3:19). 이처럼 바울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오히려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속박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율법의 부정적 기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보다 더 찬란히 드러내고, 인간에게 믿음을 통한 구원의 특수성을 더욱 강하게 일깨워주는 긍정적 묵적을 발견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19-24절에서 바울은 거듭 "범법함을 더하는" 그리하여 인간을 죄 아래 가두고 노예화 하는 율법의 그 부정적 기능이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경륜 가운데서 약속과 믿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방을 만들며,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종국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24절).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종국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지향하고,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구원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지향점이요, 목표요, 성취요, 최고 절정임을 뜻하고 있다.
6.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크리스천의 새로운 삶의 윤리가 된다
크리스천은 한편으로 율법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이며,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롬 7:4-6; 갈 2: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갈 3:13) 크리스천은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롬 8:2-3). 그래서 크리스천은 더 이상 율법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에서 친히 우리를 위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아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에 크리스천은 더 이상 정죄와 죽음을 가져다 주는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롬 10:4) 율법의 전 요구를 성취하심으로(롬 8:2,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의 표현으로서 율법의 본래적인 기능을 회복시키셨다는 사실을 또한 상기해야만 한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율법은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을 계속 정죄와 죽음에로 이끌지만,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으로서 크리스천들에게 이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는 자들과 달리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은 오히려 율법을 그리스도의 법으로 받아 거기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정죄의 대상이 되었던 율법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적인 기능으로서가 아닌 크리스천의 삶의 새로운 윤리로서 크리스천의 삶을 인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크리스천은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며(고후 5:17), 성령이 그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이러한 순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 부정적인 기능을 통하여 종국적으로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구원역사적이며 선교적 의미를 가지며 그러한 관점에서 율법은 복음과 은혜의 반대 측면으로 구약과 신약시대를 막론하고 유효한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으로써 성령의 지배를 받는 크리스천들에게 새로운 긍정적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