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 대한 새 관점들’은 바울을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사회학적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곧 루터파 또는 개혁파의 종교개혁 신학들이 바울을 읽어왔던 것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새 관점들’이라 불린다.
‘새 관점들’은 서로 다소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종교개혁신학이 전제하였던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는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하나의 통일된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신학적 구조 또는 패러다임을 갖는다. 샌더스(E. P. Sanders)는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율법주의(legalism) 종교’이기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내포하는 소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로 이해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던(James D. G. Dunn)과 라이트(N. T. Wright)는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여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를 넘어 신약의 복음의 해석에 있어서도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배경으로 삼으며, 그 결과들을 복음의 바른 해석으로 삼는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언약적 율법주의’는 개혁신학이 복음을 이해하는 구조적 틀인 은혜언약과 다르며, 그러한 만큼 ‘언약적 율법주의’는 성경적 의미에서의 ‘은혜의 종교’가 아니고, 신학 특성상 신인동력적(synergistic) 세미펠라기우스주의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새 관점들’은 교리사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새로운 견해는 아니다. ‘새 관점들’의 신학적 소재는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주의에 위치하며, 신학체계론적으로 중세 후기의 유명론 또는 ‘반 종교개혁 신학’(counter-Reformation theology)의 그것과 상당한 구조적 유사성을 갖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언약을 말하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의 신학적 평가만을 내린다면 언약적 율법주의와 ’새 관점‘의 신학적 주장들은 교리사적으로 이미 검토된 중세 후기의 옛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율법주의‘인 것이다.
주제어: 율법주의, 언약적 율법주의, 은혜언약, 반(半)-펠라기우스주의, 중세 후기 유명론, 의롭게 됨, 신인동력설
들어가는 말
바울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주장들, 곧 ‘바울에 대한 새 관점들’(이하 ‘새 관점들’로 줄여 씀)이라 일컫는 견해들은 교리사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새 관점들’은 루터파 또는 개혁파의 종교개혁 신학들이 바울을 읽어왔던 것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지만, 교리적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이미 종교개혁 당시에 루터파나 개혁파를 지지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개진되었던 것이며, 종교개혁자들과 이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새 관점들’이 주장하듯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도덕적 의미와 관련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할례나 절기 등과 관련한 의식법의 준수와 관련한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주석적 검토를 받아 거부된 것이었다. 더욱이 ‘새 관점들’이라는 신학적 흐름의 물꼬를 터놓았던 샌더스(E. P. Sanders)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해석 이전에도 샌더스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던 이들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과 상관없이 ‘새 관점들’은 샌더스를 이어 제임스 던(James D. G. Dunn)과 라이트(N. T. Wright) 등의 노력을 통해 신약학계를 망라하여 개신교 신학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새 관점들’이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샌더스의 해석을 긍정적으로 받아 신약의 복음 해석을 유대주의와의 연속적 맥락에 서 이해할 것을 나름대로의 주석적 작업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 관점들’은 서로 다소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를 하나의 통일된 범주로 묶는 신학적 구조 또는 패러다임은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종교개혁신학이 전제하였던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는 이해이다. 샌더스는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율법주의(legalism) 종교’이기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내포하는 소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로 이해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던과 라이트는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여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를 넘어 신약의 복음의 해석에 있어서도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배경으로 삼으며, 그 결과들을 복음의 바른 해석으로 삼는다.73)
그런데 신약의 복음을 ‘언약적 율법주의’의 배경 하에서 해석을 하여야 한다는 ‘새 관점’이 옳다면 그것은 종교개혁신학의 구원론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거나 또는 거부할 것을 요구하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루터파와 개혁파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신학은 성경해석 상의 오류를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됨의 교리와 속죄의 교리 등을 포함하는 구원론 전반에 걸쳐서 그릇된 신학을 성경적 복음으로 가르쳐 온 셈이 된다. 종교개혁신학에 대해 ‘아니요’라고 외치는 ‘새 관점’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하여 반립하고 있던 중세 후기의 로마 카톨릭의 유명론(nominalism) 신학과 비슷한 신학적 특징들을 갖는다. 실제로 ‘새 관점’ 신학은 스스로 자신들의 노력을 평가하기를 바울과 초대 교회에 대한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공하며, 성경적 기초가 튼튼한 교리를 제공하고,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신학적 동질성을 증진시켜 주며, 더 나아가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대화를 개선해 주는 등의 유익을 준다고 말한다.74)
본 논고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언약적 율법주의’는 개혁신학이 복음을 이해하는 구조적 틀인 은혜언약과 다른 것임을 설명하고, 그러한 만큼 ‘언약적 율법주의’는 성경적 의미에서의 ‘은혜의 종교’가 아니며, 신학 특성상 신인동력적(synergistic) 세미펠라기우스주의에 해당하며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율법주의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아울러 의롭게 됨의 교리를 비롯한 교리 상의 주요 특징들을 중세 후기의 유명론 신학과 비교하여 제시하고 개혁파 신학과의 뚜렷한 차이를 통해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所在)를 확정하고자 한다.
‘새 관점’의 새로움은 무엇?
‘새 관점’ 신학이 바울 해석과 관련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넓게 말하면 구원론에 관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의롭게 됨의 교리와 관련한 것이다.75) 이러한 신학적 전환은 바울 서신에 빈번히 언급이 되는 ‘율법의 행위’와 관련한 해석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바울 해석에 대한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적인 옛 관점은 ‘율법의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호의를 얻기 위하여 사람이 행하는 의와 관련한 행위로 이해를 하는 반면에, ‘새 관점’은 ‘율법의 행위’가 유대인들의 특권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이방인들과 구분하여 주는 표식과 같은 유대법적인 요소들을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
시몬 게더콜(Simon Gathercole)이 잘 정리하였듯이 ‘새 관점’이 ‘율법의 행위’에 대해 전통적인 종교개혁신학의 해석과 다른 새로운 해석을 주장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해의 요소들을 기저에 두고 있다.76) 첫째, 유대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바울 시대의 유대 종교는 자신들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쌓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전통적인 견해는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새 관점’에 따르면 유대 종교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며 단지 안식일, 할례 그리고 율법에 따른 정결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의식들을 통해 이방인들과 구별이 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였을 따름이다.
둘째, ‘새 관점’이 유대주의에 대한 새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되는 까닭은 이러한 유대주의의 이해를 바울 해석에 끌어와 바울을 해석한 데에 있다. 즉 바울이 비판한 유대 기독교인들의 ‘율법의 행위’란 유대주의 중심의 율법적 의식들이었으며, 따라서 유대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율법주의적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도덕적 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마치 유대주의가 의식법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 이방인들이 기독교인들이 되기 위하여서는 율법의 의식들을 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바울이 이를 가리켜 ‘율법의 행위’라 일컬으며 이에 대한 비판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새 관점’은 바울 신학의 탈 종교개혁신학화 또는 반 종교개혁신학화를 위한 신학적 전환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울의 구원론이 소위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이신칭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개혁신학은 사람이 자신의 의를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그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즉 종교개혁신학에서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고백이었다.
그러나 ‘새 관점’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할 때, 바울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바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받으시며, 또한 그것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을 한다.77)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와 관련하여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말한다는 것이다.78) 즉 ‘새 관점’에서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적 고백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새 관점’은 ‘이신칭의’를 통하여 교회에 가입이 된 자라 할지라도 육신으로 행한 일들에 대해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는 일에서 면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행한 대로 율법에 따라 갚으실 것이라는 것이 ‘새 관점’의 구원론이다.79)
‘새 관점’ 신학의 구원론적 배경: 언약적 율법주의
‘새 관점’의 구원론적 주장들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배경 하에서 개진이 된다. 샌더스는 말하기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는 종교개혁신학이 단정을 내렸던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전제로 하는 종교이다. 샌더스의 설명은 이렇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의 인간의 지위가 계약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고 계약은 그 명령들에 대한 순종을 인간의 합당한 응답으로 요구하는 한편 범법에 대한 속죄 수단을 제공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 순종은 계약 안에서 그의 지위를 유지시키지만, 하나님 의 은혜 자체를 얻지는 못한다 ... 유대교에서의 의는 택함 받은 자들의 집단 안에서의 지위의 유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용어이다.80)
샌더스가 보는 견지에서 유대주의는 항상 무엇보다도 은혜를 전제로 하는 종교였으며 인간의 순종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하였다. 샌더스는 이러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종교 패턴을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밝힌다. 샌더스가 정의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며, (2)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 율법은 (3) 그 선택을 유지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4) 순종하여야 할 요구를 내포하고 있다. (5) 하나님은 순종에 대해 상을 베푸시고 불순종에 대해 벌을 내리신다. (6) 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며, 이 속죄의 수단을 통하여 (7) 언약 관계의 유지와 회복이 가능하다. (8) 순종과 속죄와 하나님의 긍휼로 언약 안에 보존이 된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될 무리들에 속하게 된다.81)
이처럼 여덟 가지 항목들로 언약적 율법주의를 정의한 샌더스는 첫 번째 항목에서 보듯이 선택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며 또한 마지막 항목에서 보듯이 궁극적인 구원은 또한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는 인간의 성취나 업적에 의한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전제로 하는 종교라고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의 요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는(getting in) 것은 오직 선택에 의한 은혜이며, 그 가운데 머물며(staying in) 끝까지 구원을 받기 위하여서는 율법과 속죄의 요구를 행하여야 하며, 이러한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또한 본질상 은혜임을 말한다.82)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규정한 샌더스의 노력을83) 크게 반기면서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샌더스로 말미암아 바울을 16세기의 관점이 아니라 1세기의 정황에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평가를 내린다.84) 여기서 던은 흥미롭게도 샌더스가 바울의 종교 이해가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다르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고 지적하면서 그 결과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열어가는 데에 오히려 실패를 하였다고 지적을 한다.85)
반면에 던은 바울의 신학이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연속선상에 있음을 주장한다.86) 바울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 구조에 반대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던의 이해이다. 예를 들어 던에 따르면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처럼,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말한다는 것이다. 즉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 형태 안에서 유대주의 선택과 관련한 은혜의 신학을 은혜에 의한 유대-기독교적 선택의 신학으로 적용을 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의도라는 것이다.87) 바울은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인 할례나 절기와 같은 의식들을 언약백성의 특권으로 주장하면서 이방인들에게 강요함으로써 배타적인 유대주의화가 나타나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부정을 하였다는 것이 던의 해석이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란 영 단번에 모든 상황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던의 생각에 바울은 율법의 순종을 통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때에 완전히 의롭다함을 받는 일이 미래에 남아 있음을 말한다.88)
칭의는 하나님의 단번의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칭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회복된 관계로 맨 처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그 관계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심판과 무죄방면의 최후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그의 의롭다고 하시는 의(義)를 행사하지 않으시면 유지될 수 없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여 그 사람이 죄 없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여기서 우리는 단지 바울은 신자들이 그 최후의 심판을 면제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만을 지적하면 된다. ... 신자들은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 신자들은 그들이 ‘구원받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들의 도덕적 결과들로부터 면제받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범하였다고 바울이 비판하는(롬 2장) 그런 우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 은혜의 하나님은 공평한 심판자이기도 하다. ... 그리스도를 삶의 토대로 삼 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해서 심판을 면제받지는 못한다. 이신칭의는 율법에 따른, 그리고 육신으로 행한 일들에 의거한 심판을 배제하지 못한다.89)
바울에 대한 이러한 던의 해석은 바울이 끝까지 순종하는 자에게 최종적인 구원을 베푸신다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배경 하에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 신학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배경적 이해와 관련하여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새 관점’ 신학의 구원론은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과 관련하여 라이트(N. T. Wright)가 말하는 바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또한 보증하였던 바대로 바울 시대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을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일들에 대해 생각을 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인 까닭은 그들이 언약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선행을 하기 때문이 아니며 단지 선택과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즉 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혈통에 따른 자녀들로 태어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거의 확실하게 말하였을 것이다 - 이것이 ‘새 관점’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혹은 이것이 틀림없이 뜻하여야 하는 바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의 첫 단계에 유대인들은 은혜를 믿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언약에 들어온 것은 그들이 행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다), 구원의 서정의 세 번째 단계에 그들은, 예수님과 바울과 마찬가지로, 살아온 전 생애에 근거한 마지막 심판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교리는 중간 단계에 속한다. 바리새인으로서 그(바울)는 일단 사람들이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온 이후에는, 마지막 심판에 앞서 현재, 유대인의 율법인 토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특징이 지워져야 한다고 믿었다. 기독교인으로, 그(바울)는 일단 사람들이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온 후에 는, 마지막 심판에 앞서 현재,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믿음에 의하여 특징이 지워져야 한다고 믿었다.90)
라이트의 생각에 바울은 ‘의롭게 됨’이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믿음에 근거하여 선언하시는 것이며, 그런 후에 (마지막) 구원과 (마지막) 의롭다하심과 심판은 처음의 믿음과 육체적 죽음의 사이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전 인생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당시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마찬가지로 함께 가지고 있던 이해라고 판단을 내린다.91)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새 관점’은 바울의 신학이 언약적 율법주의의 중요한 구원론적 특징들, (1) 곧 은혜로 최초의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 - 유대인들은 선택에 의하여, 이방인들은 믿음에 의하여 - (2)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의 교훈에 순종을 함으로써 마지막 심판에서 의롭다함을 최종적으로 받는 두 단계에 걸친 의롭다함의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물론 이것은, 라이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바울이 단순히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92) 라이트는 샌더스가 ‘의롭게 됨’을 들어감(getting in)이나 머무름(staying in)이라는 구원론적 맥락에서 풀이한 것과는 다르게 이해한다. 샌더스는 의롭게 됨이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들어가는가에 관한 문제의 답으로 풀이하였지만, 라이트는 누가 그 공동체 안에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에 관한 문제의 답으로 이해한다. 즉 라이트에게 있어서 의롭게 됨이란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의 문제이다.93) 그런 맥락에서 라이트의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언약 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언약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가 더 이상 할례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고 말한 것이고, 이 사실로 인하여 당황한 유대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94) 하지만 의롭다함은 현재 의롭다함과 미래의 의롭다함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언약의 충실함을 통해 현재의 의롭다함이 미래에 궁극적으로 드러나 최종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구원론적 구조에 있어서는 라이트는 샌더스와 여전히 동일하다.
바울신학은 언약적 율법주의? - 방법론상의 문제
‘새 관점’ 신학은 바울신학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은 바울 당시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새 관점’에게 있어서 바울도 또한 바리새인 출신이므로 그도 또한 구원론의 구조 틀에 관한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조는 바로 언약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울 당시의 유대주의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규정한 샌더스 자신은 바울신학이 ‘언약적 율법주의’로 설명될 수 없다고 하였지만, 던과 라이트의 ‘새 관점’ 신학은 샌더스를 비판하면서 바울과 언약적 율법주의의 구조적 유사성을 강하게 확신한다.95)
그렇다면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구원론적 구조 틀이 과연 전통적 의미에서의 은혜언약과 일치하는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 관점’의 주장대로 만일 바울 신학이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신구약 성경의 신학적 통일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신약성경은 물론 구약성경의 언약들이 바로 ‘언약적 율법주의’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약적 율법주의’와 ‘은혜 언약’과의 비교를 요구한다. 적어도 개혁신학은 바울의 신학이 ‘은혜언약’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적 율법주의’와 ‘은혜언약’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새 관점’과 ‘개혁신학’ 가운데 어느 하나는 성경의 언약 신학을 바르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 된다. 양자의 차이는 단순한 해석의 차이를 넘어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바울 신학을 당대의 유대주의와 연속성에서 찾으려는 방법론과 그보다 훨씬 폭이 넓게 구약 성경과의 맥락 안에서 찾으려는 방법론의 차이이다.96)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신학이 살피는 바울신학은 성경해석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확실히 ‘새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다음의 메이천의 글은 도움을 준다.
회심한 이후 바울이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에 대한 증거들을 찾을 때, 당대의 유대주의가 아니라 구약성경을 살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여기서 바울신학은 후기에 나온 것들(곧 유대주의 문헌들)이 아니라 선지서와 시편의 종교에 기초를 하고 있다.97)
‘새 관점’에서 재해석을 요구하는 ‘율법의 행위’ ‘의롭게 됨’ ‘하나님의 의’ 등을 바울이 성경에서 언급을 할 때 그 의미 해석을 위하여 단 한 곳에서도 1세기 당대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문헌을 인용하여 참조한 적이 없음은98) 바울신학을 이해하는 ‘새 관점’의 방법론적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더욱이 뛰어난 유대주의 연구가인 뉴스너(Jacobs Neusner)가 샌더스를 비평하면서 이르기를, 샌더스가 1세기 유대주의를 연구하면서 그것과 구약성경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샌더스의 연구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지적을 한 사실은 ‘새 관점’의 방법론적 문제점을 잘 말해준다.99)
언약적 율법주의와 중세 후기 구원론
이러한 방법론상의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언약적 율법주의가 과연 성경적 의미에서의 은혜의 종교인가에 대해서 논하기로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샌더스는 바울의 신학적 배경이 되는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공로적 의에 근거하여 구원을 말하는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역설을 한다.100)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는 율법주의 종교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이며 그것은 곧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은혜를 전제로 하는 종교임을 말한다고 주장을 한다.
확실히 샌더스 자신이 정의한 율법주의에 따르면 언약적 율법주의는 율법주의가 아니다. 언약적 율법주의도 샌더스 자신이 율법주의와 구분하여 정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율법주의란 행위를 통해 구원을 획득한다는 견해이며, 자신의 죄과에 비교하여 순종의 성취가 능가하는 지의 여부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이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율법주의는 한 편으로는 율법에 명하여진 바를 행하여 선행을 쌓고 다른 한 편으로는 속죄의 행위를 통해서 범과를 줄여가기에 애를 쓴다. 율법주의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자기를 구원하는 종교이다.101) 반면에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는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긍휼에 의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며, 율법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102)
하지만 선택이라는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 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써 순종을 통해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다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그 구조가 너무 단순하여 그것이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완전한 신학적 결론에 이르기에 미흡하다. 율법주의를 엄격한 공로(exact quid pro quo)를 근거로 하는 구원론으로 정의한다면 언약적 율법주의는 신학적으로 율법주의라 할 수 없지만 - 이것이 샌더스가 주장하는 바임 -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더하여 인간의 노력과 성취가 조건적으로 필요하다는 신인동력적(synergistic) 요소를 담고 있다면 넓은 의미에서 율법주의라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샌더스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은혜로 선택을 받아 언약 관계에 들어가지만 언약적 지위는 계속적인 순종을 통해서 유지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적 율법주의가 율법주의가 아닐 수 있는 까닭은 언약적 지위를 유지하는 조건이 율법의 완전한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불완전한 성취라 할지라도 율법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03)
하지만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완전한 성취가 아니라 불완전한 순종의 의도라 할지라도 그것이 조건이 된다는 것은 종교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펠라기우스적인 오류는 피하였을지라도 중세 후기의 유명론의 신인동력적 오류를 피한 것은 아니다.104) 호튼은 언약적 율법주의가 종교개혁자들이 배격한 중세 후기 구원론 체계와 구조적으로 상당히 유사함을 지적한다. 우선 “은혜로 들어가고, 복종을 통해 유지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세례로 인하여 ‘첫 의롭게 됨’(first justification)이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한 편 은혜의 증가와 ‘마지막 의롭게 됨’은 인간의 협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중세의 견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105)
물론 이러한 비교 판단을 통해서 1세기 유대주의를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샌더스가 1세기 유대주의가 루터가 생각하듯이 율법주의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했을 때, 언약적 율법주의가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거부했던 중세 후기 구원론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또한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관찰에 주목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칼 쿠퍼(Karl T. Cooper)는 하이코 오버만(Heiko A. Oberman)을 참조로 하여 다음과 같이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중세 후기 유명론을 비교하여 제시한다.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그런 것처럼, 후기 중세 유명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긍휼을 가지고 끙끙거렸다. 유대주의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긍휼로써 그의 공의를 부드럽게 하신 언약의 흐름을 따라 해결책을 찾았다. 유대주의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러한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는 사실은 순전한 긍휼의 행동이다. 유대주의에서,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인 것처럼, 유명론에서도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유대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명론에서 복종은 언약 관계를 유지 하는 필요조건이다. 유대주의에서와 같이, 이 복종은 완전한 의가 아니어도 된다. 마음의 의도에 강한 강조를 두면서 최선을 다한다면 기본적인 요건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복종의 수준에 조차 못 미치어 떨어지게 되는 사람에게는 참회를 통해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하다. 여기서 다시 마음의 의도가 참회를 유효하게 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참회하며 복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베푸시는 받아주시는 은혜는 엄격한 공로에 근거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단지 적당한 수준의 공로(meritum de congruo)에 근거하여 주신다. 구원을 실제로 상실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뿌리 깊게 끝까지 거부하는 불순종을 범하는 자들에게만 나타난다.106)
샌더스가 제시하고 있는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나 오버만이 설명하고 있는 중세 후기 유명론에서나 모두 율법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한 수준의 엄격한 공로가 아니며 마음의 진정한 의도에 의하여 불완전한 복종이라도 구원에 이르는 가치로 인정이 된다. 이 점에서 언약적 율법주의와 중세 후기 유명론은 모두 엄격한 공로에 근거한 좁은 의미의 율법주의라는 비난을 면하게 된다.107)
이러한 관찰은 유대주의 신학과 중세 후기 유명론 신학은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균형을 세워가는 노력의 결과가 매우 흡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유대주의 랍비들의 노력과 관련하여 호튼은 샌더스의 글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제시하여 준다.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계명에 순종한 일에 상을 베푸신다는 성경의 증거 때문에 공로에 대한 보상의 개념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또한 공의로운 이유와 상관없이 선택을 하시는 교리에 내포될 법한 하나님의 변덕스러움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 랍비들은 선택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함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호소를 하면서 때때로는 공로의 개념에 호소를 하였다.108)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의 상관관계에 대한 유대주의 신학의 해법은 중세 후기 유명론에서도 그대로 발견이 된다. 오버만은 은혜로 언약 관계에 들어가며 순종으로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일과 관련하여 전자는 오직 은혜로만으로(sola gratia) 후자는 오직 행위로만(solis operibus)으로 중세 후기의 구원론을 요약한다.109)
언약적 율법주의와 중세 후기 구원론의 구원론적 구조의 유사성은 샌더스의 경우에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던과 라이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살펴본 바처럼 그들이 의롭다함을 믿음에 의한 첫 의로움(first justification)과 행위에 의한 마지막 의로움(final justification)으로 구분을 하는 것은 이들의 구원론이 신인동력설(synergism)을 따르고 있는 중세 후기 유명론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110)
언약적 율법주의와 은혜언약
종교개혁신학은 은혜로 인한 첫 의로움과 행위로 인한 마지막 의로움이란 중세 후기의 교리에 대해서 신인동력설이며 세미펠라기우스주의라는 이유로 확고한 반대를 표명했다. 만일 중세 후기 구원론이 구조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와 유사하다고 한 것이 옳다면, 설령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종교 형태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샌더스의 주장이 옳다하더라도,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후기의 정황을 1세기 유대주의에 덧입혀 바울을 잘못 읽었다는 주장은 성립이 되지를 않게 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엄격한 공로에 근거한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주의와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신인동력적이며 세미펠라기우스적인 중세 후기 유명론을 향하여 “아니요”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 구원관은 바로 중세 후기 유명론의 신인동력적 구원론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111)
특별히 개혁신학은 중세 후기 구원론과의 신학 논쟁에서 은혜언약에 기초한 구원론만이 성경적임을 분명히 하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샌더스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한 율법주의와 다름을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샌더스가 말하고 싶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은혜는 개혁신학의 은혜언약이 말하는 은혜와는 본질상 다르다. 이를 테면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안으로 ‘들어감’을 입고, 일단 들어온 후에는 자신의 책임에 의한 ‘머무름’ 또는 ‘유지’를 통하여 종말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공로와 상관없이 부여받음을 뜻한다. 던과 라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처음 의롭게 됨’(first justification)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것이니만큼 자신의 공로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또한 ‘최종 의롭게 됨’(final justification) 또한 자신의 행위로 심판을 받지만 완전한 의를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 순종 또한 성령의 인도함에 힘입은 것이므로 은혜의 요소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인가는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
결국 ‘언약적 율법주의’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그의 언약 백성이 되는 초기의 ‘의롭게 됨’을 받았으나, 율법을 불순종함으로써 종말론적 ‘의롭게 됨’을 누리지 못하는 위험성을 열어 놓는다. 이러한 위험성은 던이나 라이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종말에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최종적으로 확정을 받는 미래의 있을 궁극적인 의롭다 함을 받는 일은 자신의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하여 은혜언약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를 공로적 근거로 삼아 언약의 약속을 베풀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유일한 공로적 원인으로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은혜언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으로는 스스로 생명에 이를 수가 없게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는 이른바 은혜언약이라 불리는 둘째 언약을 맺기를 기뻐하셨다. 이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요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죄인들에게 주시며, 또 생명을 얻도록 예정이 된 모든 이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믿을 수 있도록 하신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3항)
은혜언약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생과 구원을 값없이 거저 주심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믿음일 뿐임을 가리킨다. 또한 그 믿음을 갖는 일도 생명을 얻도록 예정이 된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리킨다.
물론 은혜언약은 조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영생과 구원도 아무런 조건이 없이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조건적으로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 조건으로서의 믿음은 공로적 원인이 아니라 도구적 원인이므로 구원을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에 상충이 되지 않는다. 개혁신학 안에서 은혜언약의 대상자들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하여야 할 의무를 갖는다. 이 의무와 관련하여 튜레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가지 중요한 의무 사항들이 요구가 된다 - 믿음과 회개이다. 전자는 약속을 받아들이며 후자는 명령들을 성취한다. 전자는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은혜의 약속에 대답을 하며, 후자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는 복음적인 율법(the evangelical law)에 의해 명령이 내려진다. 하나님 편에서 언약하신 두 개의 특별한 은택들(죄 사함과 마음에 법을 쓰심)이 있는 것처럼, 사람 편에서 그것들에 응답을 할 두 가지 의무들이 있다. 죄의 용서에 응답하는 믿음과 명령에 따라 행함으로써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실행하는 회개 또는 성화의 열망 등이 그것이다.112)
은혜언약은 인간 편에서의 의무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무가 은혜언약의 약속을 받음에 있어 어떤 공로적 원인(meritorious cause)으로 작용을 하지 않는다. 오직 은혜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고 또 언약이 주는 약속들을 누리는 도구로서 조건적 기능을 할 따름이다. 믿음과 행함 가운데 믿음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며 그로 인한 은택들을 누리게 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은혜언약의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으로서의 조건이다. 그러나 행함이 믿음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볼 때 넓은 의미에서 행함도 은혜언약의 도구적 원인으로서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113)
이처럼 은혜언약은 언약에 참여하고 언약을 통해 베푸는 모든 은택들을 누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언약을 위한 공로적 원인으로 삼지 않는다. 은혜언약은 언약적 율법주의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지만 사람의 책임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신인협력적(synergistic) 설명을 용납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앞서 본 신앙고백서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은혜언약은 도구적 원인인 이 믿음과 행함조차도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은혜의 교리를 완성한다. 다시 튜레틴의 설명을 들어본다.
이러한 두 의무들은 사람이 행하여야 할 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물로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람이 행할 의무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들로 생각이 되어야 한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7) 조건들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으며 그러하기에 의무를 넘어 약속들이 된다는 것이 자연언약에 비하여 은혜언약이 누리는 단 하나의 특권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은혜언약은 인간의 힘에 근거하여 세워졌던 첫 번째 언약처럼 효력을 읽어버리게 되는 일이 없으며 영원히 계속적으로 효력을 갖는다. 은혜언약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으며 언약에 담긴 모든 것들은, 조건들도 또한 마찬가지로, 은혜로 주시는 것들이다.114)
요컨대 은혜언약이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영생과 구원의 약속들, 사람이 행할 의무들과 그 의무들을 행하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더해지는 약속들, 택한 자를 끝까지 구원하시는 성도의 견인 등을 담고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이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뜻한다. 사람이 행하는 어떤 순종도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 누림의 공로적 조건이 아니며 단지 도구적 조건인 믿음에 결과하여 따라 나오는 도구적 조건이며 그 자체가 복을 누리는 경로일 따름이다.
‘새 관점’ 신학이 행위의 심판을 말하지만 그 행위를 공로적 원인이 아니라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였다면 행위에 의한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새 관점’ 신학의 강조는 개혁신학의 구원론적 이해와 충돌을 상당히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 있어서 ‘새 관점’은 분명하지가 않으며, 오히려 이 점에 있어서 ‘새 관점’은 중세 후기 유명론과 더 유사한 신인협력적 특징을 보인다.
물론 라이트가 심판 날에 구원을 결정할 행위가 인간의 독립적인 자력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마지막 날에 “행위들”에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인정을 받게 된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돕는 도덕주의자들이 도움을 받지 않고도 행하는 행위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종적으로 독특한 유대인들의 경계 표지들(안식일, 음식법, 그리고 할례)을 행하는 것도 또한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 곧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역사의 결과로 자신의 삶 안에서 열매맺어진 것들이다. 이렇게 하여 로마서 8:1-17은 로마서 2:1-16에 대한 진정한 답을 제공해 준다. 왜 이제 “정죄함이 없는” 것인가? 그 까닭은 한 편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체에 죄를 정하셨기 때문이며 ... 그리고 다른 한 편 성령께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신자들 안에서 행하기 위해 - 궁극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에 순종함으로 따르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현재에 시작되고 있는 생명, 그 생명을 주기 위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115)
라이트는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될 행위들은 현재 신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음으로 가능케 된 결과들이라고 설명을 한다.116) 그런 만큼 행위에 대한 심판은 펠라기우스적인 의미에서의 구원론적 근거나 공로가 될 수는 결코 없으며, 그런 만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종말에 심판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할 행위가 성령님의 도움을 받은 것임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은혜언약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고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중세 후기 유명론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자력적인 공로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력적인 공로에 의한 구원은 일찍이 정죄를 받았던 펠라기우스적 오류이다. 종교개혁신학이 중세 후기 유명론에 대하여 반대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순종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117) 그것은 오히려 개혁신학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가르침 안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크게 인정을 하는 영적 사실이다. 예를 들어 개혁신학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칭의와 성화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교훈한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으며 우리에게 전가된 오직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가 보시기에 의로운 자들로 받아주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이다.118)
성화는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며, 죄에 대하여서는 더욱 더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하여는 더욱 더 산자가 되도록 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이다.119)
즉 칭의론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죄사함과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은혜를 다루는 반면에, 성화론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살아나는 은혜를 다룬다.120)
종교개혁신학이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이었던 중세 후기 유명론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성화를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근거로 이해하는 주장이었다.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천주교회가 트렌트 종교회의(1545-63)를 소집하여 1547년에 작성한 “칭의에 관련한 칙령”에서 천주교회가 정죄하고 있는 개신교 신학과 아울러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간명하게 살펴 볼 수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성령님께서 사람의 심령에 부으시고 또한 내재케 하시는 은혜와 사랑을 배제한 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거나, 죄의 용서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거나, 혹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은혜는 단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121)
중세 후기 유명론을 따라 천주교회는 그리스도의 의가 사람에게 실제로 주입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 곧 주입된 은혜(gratia infusa)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iustitia infusa)고 믿었다. 반면에 종교개혁신학은 ‘의롭게 됨’을 죄인의 죄책과 형벌을 제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히시는 ‘전가된 의’(iustitia imputata)로 고백을 하며, 주입된 은혜는 성화의 기반이라고 가르친다.122) 그렇지 않고 주입된 은혜에 대한 반응의 결과인 성화에 구원의 기초를 둔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사람의 행위에 의한 신인협동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신학에서는 “모든 구원의 과정의 시작이며 과정이며 또한 끝이 다 은혜이다. 그것에는 어떠한 인간의 공로다 완전히 배제가 된다. 마치 창조와 구속이 다 그렇듯이 성화도 또한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123)
이상에서 보듯이 은혜언약은 의롭다함을 받는 죄의 용서와 거룩함을 이루는 삶의 실제적 변화를 서로 구별을 한다. 따라서 라이트의 ‘새 관점’이 말하는 행위에 따른 종말의 심판과는 구원론적 구조가 전혀 다르다. 비록 라이트가 종말에 최종적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될 행위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증거이며 또한 열매라고 강조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의롭다함의 근거나 이유로 삼는 이상 라이트는 그 걸음을 중세 후기 유명론과 함께 가고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가 어렵다. 즉 여전히 라이트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구원론적 틀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124)
자기 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무엇일까? 그 답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그의 의를 전가받는 것뿐이라는 것이 종교개혁신학의 결론이다.125) 라이트와 던의 ‘새 관점’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해 태도가 불분명하고 의의 전가라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칭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신인동력적인 언약적 율법주의 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은 더욱 확고해진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세 후기 천주교 신학도 전가된 의를 부정하고 주입된 의를 의롭다함의 근거로 삼은 결과로 말미암아 신인동력적 구원론을 열어간 것이다. 예를 들어 던은 바울의 속죄 신학을 전통적인 대속의 죽음의 교리로 해석한다면 법정적 허구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주장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의 속죄 교리가 대속의 교리(예수가 죽고, 죄인은 형벌을 면하게 된다)라면, 그러한 주장(법적 허구라는 주장)은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든 죄악된 육체를 지닌 자들을 대표한 죽음이라고 가르친다. 그의 복음은 믿는 죄인들이 죽음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126)
대속의 교리에 의한 의의 전가를 부인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인을 대표하는 죽음으로 해석을 하며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의 실제적 적용의 의미는 무엇일까? 던의 답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삶으로 변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127) 그리스도의 죽음의 참여는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성령을 따라 살며 성령의 법을 성취하는 것을 포함한다. 요컨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로 구원을 위한 마지막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128)
라이트는 법정적 의의 전가 개념은 부정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수반하며 단지 은유적으로 말해질 뿐 실제적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단언한다.
만일 우리가 ‘의’(righteousness)의 개념을,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과거에 해왔던 것처럼, 단지 법정에서의 은유로만 남겨둔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받는 것은 법적인 일처리의 인상, 차가운 공무의 형태, 좀처럼 우리가 예배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논리적이며 교정적인 하나님에 의하여 행하여진 거의 생각의 장난과 같은 것이 된다.129)
만일 법정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재판관이 자신의 의를 원고에게든지 혹은 피고에게든지 전가하거나, 나누어주거나, 물려주거나, 전달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전이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의란 법정을 가로질러 넘겨질 수 있는 사물이나 실체 또는 가스가 아니다. ... 만일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여 풀어준다면 또 그렇게 할 때, 그의 백성들은 은유적으로 말해서 ‘의’의 지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이 갖게 되는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하나님의 것일 뿐이다.130)
결국 의의 전가는 은유적일 뿐이며 실제적인 결과를 낳을 수가 없기 때문에 - 이것은 던의 표현에 따르면 법적 허구일 뿐이기 때문에 - 결국 종말에 심판을 받을 때 구원에 이르는 의의 근거는 자신의 의 밖에 없게 된다.131) 그 의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새 관점’의 구원론은 결국 중세 후기 유명론의 신인동력적 구원론이며 종교개혁자들이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주의라 비판을 하였던 바로 그것이 된다.132)
나가는 말 - 성경의 ‘새 관점’과 신학의 ‘옛 관점’의 충돌?
어떤 이들은 ‘새 관점’은 성경에 대한 정직한 주석에 기초하여 제시하는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들의 생각에 종교개혁신학의 ‘옛 관점’을 고집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정직한 태도가 아니며 교리의 전통 안에 갇혀 있는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所在)에 대한 논고의 평가는 단지 성경 주석에 근거한 ‘새 관점’을 전통 신학에 근거한 ‘옛 관점’으로 제한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가 아니다. ‘옛 관점’도 성경의 근거한 신학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개혁신학은 철저한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의 기초 위에서 주석한 결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e)와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라는 해석의 원리는 개혁신학의 성경해석적 충실성을 잘 드러내 준다. 성경과 교리는 어떤 이들이 오해하듯이 그렇게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새 관점’ 신학은 정말로 성경 주석적으로 견고한가? 샌더스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과 바울의 논쟁 상대를 정확히 말해주는가?133) 만일 그렇다고 할지라도, 바울은 정말로 ‘언약적 율법주의’와 사상적 체계에 있어 근본적으로 동일성을 갖고 있는가?134) 그렇다면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을 전제로 할 때, ‘언약적 율법주의’의 언약과 종말론적 체계가 성경 전체의 복음인가? 신학적으로 말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의 행위에 근거한 신인협동론적인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주의 구원을 말하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본 논고의 판단은 ‘새 관점’이 제시하는 신학을 성경적인 답으로 받기에는 길이 너무나도 멀다는 것이다.
또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1세기 역사적 맥락을 살피기 위한 성경 외적 문서들의 연구에 의지하여 - 그것도 성경 해석을 지배할 만큼 확정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그것으로 성경의 해석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한가? 성경 자체의 해석적 음성은 없는 것인가? 왜 라이트와 같은 이가 ‘새 관점’을 논하면서 의롭게 됨과 율법의 행위에 관련한 중요한 본문들인 에베소서 2:8-9, 디모데 후서 1:9, 그리고 디도서 3:5 등은 다루지 않는 것일까? 그것들을 바울 저작으로 보지 않기 때문인가?135)
물론 본 논고는 ‘새 관점’을 성경주석적 논의를 통한 신약신학적 접근을 하고 있지 않다. 본 논고의 목표는 ‘새 관점’과 ‘옛 관점’이 성경에 대한 각각의 주석적 차이로 인하여 얼마나 다른 신학적 결과를 낳고 있는가를 규명해보고, ‘새 관점’의 신학과 비슷한 주장들이 옛 신학들 가운데 이미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를 규정하고자 하였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새 관점’과 비슷한 옛 신학들과의 논쟁 속에서 종교개혁신학 또는 개혁신학이 ‘옛 관점’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새 관점’의 성경적 주석의 주장들 가운데 여러 부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검토되었음을 암시하는 부수적 기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 현대 성경신학계의 ‘새 관점’에 대한 비평적 논의들은 제외하고서라도.
예를 들어 ‘새 관점’이 주장하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해석만 보더라도, 칼빈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주석 등에서 당시 천주교회의 주장, 곧 믿음의 반제로서의 율법을 단지 의식법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이에 대한 도덕법적 해석의 여지를 반대하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성경 주석적 노력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의롭게 됨을 초기와 종말의 것으로 구별하는 것과 관련하여서도, 칼빈은 그의 ‘트렌트 종교회의 교리강령에 대한 비판(Antidota)'에서 로마서 1장 16절, 하박국 2장 4절, 창세기 15장 6절과 갈라디아 3장 6절, 로마서 5장 1절 등을 언급하면서 분명하게 비평적으로 검토하였다.136)
결론적으로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는 교리사의 흐름 가운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성경적으로 고백해온 단일동력적 신학의 결과와 대척점에 있다. 종교개혁신학 특별히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설명하면서 구원의 공로적 원인(meritorious cause)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로만 돌린다(solo Christo). 인간의 순종은 결코 구원의 공로일 수가 없다. 또한 구원을 받는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 곧 방식에 있어서 오직 믿음만을 고백한다(sola fide). 만일 행함을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열매 또는 증거로서 믿음에 덧붙여지는 것이므로, 믿음의 필연적 결과로서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 원인으로 간주될 수는 있을 것이다. 행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런 제한 안에서만 도구적 원인으로서의 의미를 갖을 뿐이다. 그리고 구원의 실행을 위한 유효적 원인(efficient cause)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오직 은혜뿐임을 고백한다(sola gratia).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오직 성경의 주석적 근거에 기반을 둔다(sola Scriptura). 개혁신학은 이 모든 은혜의 고백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언약을 통해 풀어간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신학적 평가만을 내린다면 언약적 율법주의와 ’새 관점‘의 신학적 주장들은 교리사적으로 이미 검토된 옛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율법주의‘인 것이다.
English Abstract
'New perspectives on Paul' argues that Paul needs to be read in a sociological context of the first century Palestine Judaism. This leads to the another argument that Lutheran or Reformed reading of Paul is not acceptable exegetically. For this reasons, 'new perspective on Paul' is named to be 'new'.
Although 'new perspectives' are not univocal in their 'newness', they all have the common ground that Palestine Judaism is not a religion of legalism. In this sense, 'new perspectives' can hold one theological structure or paradigm that can be categorized in a unified system. E. P. Sanders argues that Palestine Judaism ought to be understood as a religion of 'covenantal nomism' in which salvation is asserted to be only based on the grace of God, let alone 'legalistic religion'. On the basis of Sanders' thesis, James D. G. Dunn and N. T. Wright furthermore argue for reading 'covenantal nomism' into the Paulin gospel of the New Testament. In their judgment, otherwise it would result in the misunderstanding of Paul.
'Covenantal nomism' is essentially different in theological structure than the gospel of a reformed theology. 'Covenantal nomism' cannot be taken as a monergistic religion of grace in a biblical sense, but as a mere synergistic semi-Pelagianism. The theological locus of 'new perspectives' is located in synergism such as semi-Pelgaism, and reveals a structurally similarity to late medieval nominalism or counter-Reformation theology in the 17th century. From the Reformed view point of the grace covenant in Christ, theological assumption of 'new perspectives' such as 'covenantal nomism' is a mere version of the old perspective of late medieval nominalism, which is to be rightly assessed in a legalism in a broad sense which includes in it synergism.
Keyword:
legalism, covenantal nomism, covenant of grace, semi-Pelagianism, late medieval nominalism, justification, synerg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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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최근 이런 전통적 관점을 대변하는 주요 연구서로는 T. Schreiner, The Law and Its Fulfillment (Grand Rapids: Baker, 1993): S. Kim, Paul and the New Perspective: Second Thoughts on the Origin of Paul's Gospel (Grand Rapids: Eerdmans, 2002): S. Westerholm, Perspectives Old and New (Grand Rapids: Eerdmans, 2004): “Justification by Faith Is the Answer: What is the Question?”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70 (2006)): 197-217 등을 들 수 있다.
2) E. P. Sanders, Paul & palestinian Judaism
3) 많은 학자들은 그들의 바울 이해가 샌더스의 유대교 묘사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곤 한다. 가령, J. D. G. Dunn, “New Perspective on Paul,” in Jesus, Paul, and the Law: Studies in Mark and Galatians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1990), 183-214; H. Räisänen, Paul and the Law (1987) 등.
4) 대표적으로, D. A. Carson et al. eds.,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vol. 1: The Complexities of Second Temple Judaism (2001). 또한 Frank Thielman, Paul and the Law: A Contextual Approach (1994), ch. 2.
5) 이 문장은 자주 인용된다. “In short, this is what Paul finds wrong in Judaism: it is not Christianity.” Palestinian Judaism, 552. 그는 바울이 유대교의 “난국”으로부터 “해답”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from plight to solution”), 그리스도라는 해답으로부터 유대교라는 문제로 이행했다고 말한다(“from solution to plight”).
6) Sanders,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Minneapolis: Fortress, 1983): idem Paul (Oxford: OUP, 1991).
7) Räisänen Law, 1987은 바울의 율법 비판이 전혀 일관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Kim, The Origin of Paul's Gospel (Tübingen: Mohr-Siebeck, 1984), 336-58; S. Westerholm, Perspectives Old and New (Grand Rapids: Eerdmans, 2004), 164-77.
8) Dunn, “New Perspective on Paul”; New Perspective on Paul: Collected Essays (Tübingen: Mohr-Siebeck, 2005): idem Romans. 2 volumes (Dallas: Word, 1988): idem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Peabody: Hendrickson, 1993):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Eerdmans, 1998). 새 관점의 대표주자들로는 Krister Stendahl, E. P. Sanders, J. D. G. Dunn, N. T. Wright, T. L. Donaldson, Don Garlington, C. Stanley, J. M. G. Barclay 등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9) F. Watson, “No New Perspective” (An unpublished paper delivered at the British New Testament Conference, Manchester, September 2001). TULIP으로 요약되는 칼빈주의 오대교리에 빗대어, 왓슨은 이런 다섯 가지 특징을 동일한 방식으로 요약한다 (Total Travesty, Unconditional election, Loyalty to the law, Inclusive salvation, Presuppositionless exegesis).
10) 새 관점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는 M M. Mattison, “A Summary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 D. Garlingto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n Appraisal Two Decades on” (모두 (http://www.thepaulpage.com에서 볼 수 있다).
11) 가령, 칭의론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에서 생겨난 개념임(Stendahl): 바울의 율법 비판은 배타주의라는 “사회적” 기능에 집중(Dunn), 칭의 개념 자체가 구원론 아닌 “교회론적” 개념으로 재정의 됨 (Wright).
12) 샌더스 이전의 사례로는 M. Barth, “Jews and Gentiles: The Social Character of Justification in Paul,” in 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5 (1968), 241-67; K. Stendahl,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Philadelphia: Fortress, 1976). 어떤 학자들은 Stendahl을 “새 관점”의 실질적 선두로 간주한다. 라이트 또한 자신의 관점이 샌더스 이전에 형성된 것임을 자주 강조한다. 물론 이 흐름은 브레데와 슈바이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Westerholm, Perspectives, 101-16.
13) 개역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3장 28절과 29절은 접속사 “혹은”으로 연결된 동일한 논증이다.
14) 물론 이는 사회학적 관점만으로는 로마서의 전모를 드러낼 수 없음을 의미한다. Cf. Kim, New Perspective, 55.
15) 라이트는 칭의론이 거의 대부분 유대교 비판 및 유대인/이방인의 하나됨이라는 문맥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이 “너무 뻔해서 오히려 잘 안 보인다”고 말한다. “New Perspectives,” 3.
유대인/이방인 문제는 초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난제 중 하나였다. 본래 구원은 유대인의 것이었고, 이방인 구원은 할례를 통한 개종을 전제했다(15:1). 최초의 선교 역시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었다(행 11:20). 하지만 무할례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역사는 유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수용하도록 이끌었다(11:18). 이때부터 교회 내에는 성령을 받은 이상 할례가 무용하다는 “열린” 입장과 일단 들어왔으니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고, 이것이 예루살렘 공회의로 이어졌다(행 15장). 바울서신들은 이 회의 하나가 모든 상황을 평정하기는 어려웠음을 잘 보여준다.
16) 가령 M. Seifrid, Christ, Our Righteousness (Downers Grove: IVP, 2000), 68: (행위와 할례라는) “two distinct issues”; Kim, New Perspective, 56: “the corollary of the main point”; S. Westerholm, Perspectives, 281, n. 46, 392; T. Schreiner, “An Old Perspective,” 145, 147. 그렇다면 바울이 두 가지 별개의 이슈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다 자세한 논증은 필자의 “‘율법의 행위’는 율법 준수를 포함하는가?” 『신약논단』 14/3 (2007), 특히 693-98 참고.
17) Cf. Leslie Newbegin, Signs and the Rubble: The Purpose of God in Human History (Grand Rapids: Eerdmans, 2003), 26: “We have to find a view [of salvation-history] which does justice to both aspects of the problem-individual and social-and which resolves the apparent contradiction between them.” N. Perrin, “Review Article: A Reformed Perspective on the New Perspective,” WTJ 67 (2005): 386에서 재인용.
18) Andrew Das, “Beyond Covenantal Nomism: Paul, Judaism, and Perfect Obedience,” Concordia Theological Journal 27 (July, 2001): 234-52; Mark A. Seifrid, Christ, Our Righteousness: Paul's Theology of Justification (Downers Grove, IL: IVP, 2000) 등.
19) D. Boyarin, A Radical Jew (1994): Terence Donaldson, Paul and the Gentiles: Remapping the Apostle's Convictional World (Minneapolis: Fortress, 1997): 프랑스의 철학자 Alan Badiou는 “보편주의의 정초”라는 관점에서 바울의 텍스트를 해석한다. 현성환 역, ������사도 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서울: 새물결, 2008). 아래 각주도 참고.
20) E. C. Park, Either Jew or Gentile: Paul's Unfolding Theology of Inclusivit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9-20.
21) D. Boyarin, A Radical Jew: Paul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Berkel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4)는 바울의 관점을 “특수한 보편주의”(particularistic universalism)이라고 불렀다.
22) Dunn, “New Perspective,” 200.
23) Watson, “Not the New Perspective,” 5. 물론 이는 전통적 관점에서 제기하는 전형적 비판이다.
24) 가령, Sanders, Law, 18, 20; idem Paul, 50.
25) Dunn, Theology of Paul, 632. 그는 M. Hooker, “Paul and Covenantal Nomism,” in M. Hooker et al. eds., Paul and Paulinism. C. K. Barrett FS. (London: SPCK, 1982), 47-56을 따르고 있다.
26) “New Perspective on Paul,” 183-214.
27) Wright, Climax, 137-56; What Paul Really Said (Grand Rapids: Eerdmans, 1997), 119, 130, 132; Paul: Fresh Perspectives (London: SPCK, 2004), 110-22, 139-40; “The Shape of Justification” (available online at http://www.thepaulpage.com/the-shape-of-justification): “not God's act of changing the heart or character of the person [but] God's declaration that the person is now in the right, which confers on them the status ‘righteous’.” 정확히 말하면, “칭의”가 구원론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 바울에게 구원론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 그는 자주 오해를 받는다. 가령, J. V. Fesko,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 T. Wright” available online at http://christianity.com. 구원론 자체를 상대화하는 일부 새 관점 학자들에 대해서는 라이트 자신도 비판적이다.
28) 권연경, Eschatology, 7. 또한 Peter Enns, “Expansion of Scripture,” in Variegated Nomism, 98.
29) Westerholm, “Justification by Faith is the Answer - What Is the Question?” Concordia Theological Journal 70 (2006), 197-217. Simon Gathercole은 새 관점 학자들이 칭의 교리의 신학적 “내용”(content)과 그 사회적 “적용”(application)을 혼동했다고 본다. “What Did Paul Really Mean?,” Christianity Today (November 27, 2007), 22-28(26). 새 관점 학자의 하나인 Don Garlington은 이 점에서 라이트를 비판한다.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n Appraisal Two Decades On,” 12-13; 최흥식, “왜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통한 칭의를 부정하는가?” 「신약논단」 11/1 (2004년 봄), 181-203 (186, 203).
30) Dunn, Theology of Paul, 372: “Paul expounds justification by faith in a way which not only addresses the argument over the terms of Gentile acceptance, but also presses beyond to provide a fundamental statement of human dependence on God.”
31) Dunn, “Works of the Law,” 113. Cf. Kim, New Perspective, 63.
32) J. M. G. Barclay, Obeying the Truth: Paul's Ethics in Galatians (Edinburgh: T&T Clark, 1988), 246-247. 새 관점주의자로서 그는 유대인/이방인 관계가 핵심 논지이며, 믿음과 행위에 관한 진술은 부차적인 것이라 여긴다. Bruce Longenecker, The Triumph of Abraham's God: The Transformation of Identity in Galatians (Edinburgh: T&T Clark, 1998), 180181. 제목이 시사하듯, 이 책은 전통적 읽기와 새 관점, 또 구속사적 관점과 묵시론적 관점을 통합하려는 시도다.
33) 구속사적 “연속성”은 던의 신학적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새 관점의 대표 주자로 거론되는 라이트의 경우 창조와 이스라엘 선택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는 하나의 큰 “스토리”라는 “언약적” 틀에서 바울을 해석한다. 박문재 역,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고양: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3): Climax; Paul: Fresh Perspectives (London: SPCK, 2004).
34) 권연경, ������행위 없는 구원? - 새롭게 읽는 바울의 복음������ (서울: SFC, 2006), 119-24 참고.
35) 칼빈은 믿음과 행위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함께 있는 것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이 구분은 여전히 추상적이다.
36) 권연경, Eschatology, 205, n. 100을 보라. Klyne Snodgrass, “Justification by Faith - To the Doers,” NTS 32 (1986), 72-93의 경우도 “율법주의적” 순종과 “성령의 인도에 따른” 순종이라는 추상적 이분법에 호소한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신한 개념이 아니라 양자의 실제적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37) Kim, New Perspective, 161.
38) C. K. Barrett, Freedom and Obligation (London: SPCK, 1985), 46; Barclay, Truth, 140-45.
39) 최근에는 옛 관점과 새 관점을 막론하고 이 진술은 종말론적 칭의로 해석된다. 가령, Westerholm,. Perspectives, 267.
40) 바울신학의 중심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being-in-Christ) 혹은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 mysticism)라고 보고, 칭의 교리는 “종속적 층”(subsidiary crater)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 슈바이처는 칭의 교리를 중심으로 삼으면 “윤리를 도출하기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속 개념”만 가질 뿐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행위 뿐 아니라 행위 전반을 거부하는 믿음 개념으로는 윤리 이론으로 가는 통로를 찾을 수 없다”(225). 이를 위해서는 “원래 선행을 산출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사람이 어떻게 칭의를 통해 선행의 능력을 얻게 되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지만” 칭의 교리 자체는 그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제시할 수 없다(295). 하지만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아무 염려할 것이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는 중심적 구속 교리에서 윤리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225). Tran. by W. Montgomery,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Baltimore/London: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8/1931). Schweitzer의 설명은 칼빈이 성화와 칭의를 구분하고, 이 모두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과 상통한다.
41) 새 언약의 “새로움”은 하나님의 태도가 요구에서 은혜로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가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변하는 것과 관련된다. 물론 이 변화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다. Cf. William Dumbrell, 장세훈 역, ������새 언약과 새 창조������ (서울: CLC, 2003/1985), 105-49. 전통적 관점을 옹호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이 점은 분명히 인정된다. 일부 개혁주의 학자들은 구약과 신약 계시의 연속성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구약 이후의 “유대교”에서 심하게 왜곡되었으며, 따라서 복음은 이렇게 왜곡된 종교와는 상반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R. Gaffin, “A Reformed Critique of the New Perspectiv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62 (2000), 121-41. 하지만 바울은 유대교 아닌 율법 자체를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런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유대교가 은혜를 몰랐다는 주장은 많은 경우 고대 유대교에 대한 “공감적 읽기”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
42) Dunn, Theology of Paul, 365-66; Wright, Climax, 156. 또 “An Evening Conversation on Paul with James D. G. Dunn and N. T. Wright” (http://www.thepaulpage.com/Conversation.html)에서 두 사람은 행위심판이라는 분명한 가르침이 개혁주의 진영에서 오히려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한다.
43) 칭의를 믿음과 연결하는 칼빈도 행위가 구원의 “종속적 원인들”(causae inferiors, inferior causes)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 혹은 구원의 서정에서 신자의 선행은 영생에 이르는 필수 단계이기도 하다. “행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도 아니라”(「기독교강요」3. 16. 1)는 칼빈의 말은 자주 인용된다. 졸저, “칼빈의 칭의론과 ‘행위’: 행위 관련 구절들에 대한 칼빈의 주석,” ������신학지평������ 22 (2009): 221-44. Cf. 칼빈에게서 “종속적 이행칭의 교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제안하는 Steven R. Coxhead, “John Calvin's Interpretation of Works Righteousness in Ezekiel 18” WTJ 70 (2008), 303-316; “John Calvin's Subordinat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Works,” WTJ 71 (2009), 1-19.
또한 Gathercole, Where Is Boasting (Grand Rapids: Eerdmans, 2002), 124-34; K. Yinger, Paul, Judaism, and Judgment according to Deeds (Cambridge: CUP, 1999), 143-82. 전통적 입장의 학자들도 대부분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가령, Schreiner, “Old Perspective,” 147-51.
44) 개혁주의의 이름으로 행위심판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이루어진다. 가령 Richard Phillips, “Five Arguments Against Future Justification According to Works,” Reformation 21 (2009). 라이트를 겨냥한 이 글에는 설득력 없는 자의적 주석이 많다. 그의 칼빈 읽기 또한 정확하지 않다. 가령, 그는 로마서 2:6-13 전체를 “맞지만 실현불가능한” 원칙으로 보는 것이 “개혁주의적” 입장이라 강변하지만, 칼빈은 이를 “율법”과 관련된 13절로 국한하고, 6-11절은 신자들의 선행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다. 7절에서 칼빈은 사탄의 공격 때문에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함을 역설한 후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T]he Lord will give eternal life to those who, by attention to good works, strive to attain immortality” (Battle 역). 행위의 필요성에 관한 칼빈의 단호한 입장에 비해,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루터란보다 더 루터란적인” 면모를 보인다.
45) 최근 일부 개혁주의 진영에서 라이트를 신학적 주적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듯하다. 물론 그 속에서도 그의 작업이 개혁주의의 지평을 넓히는 소중한 기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들린다. 가령, Douglas J. Green, “N. T. Wright-A Westminster Seminary Perspective” (March, 2004) available online at www.ntwrightpage.com/Green_Westminster_Seminary_Perspective.pdf; Rich Lusk, “A Short Note on N. T. Wright and His Reformed Critics” available at http://www.hornes.org/theologia/rich-lusk.
46) 이러한 작업은 더 나아가 마태복음, 히브리서, 야고보서 및 요한계시록과 같이 종말론적 구원을 위한 순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신약 내의 다른 전통들과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47) 가령, T. Schreiner, The Law. 앞에서 언급한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vol 1: The Complexities of Second Temple Judaism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다소 신중하다.
48) 가령 슈미탈즈(W. Schmithals)는 갈라디아서가 율법과 무관한 영지주의 논쟁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Judaisten in Galatien?,” ZNW 74 (1983), 27-58. 라이트는 갈라디아서 본문에 유념하면서, 선동자들이 요구한 “율법의 행위”는 바리새적 태도나 쿰란공동체가 요구한 “율법의 행위”와 달리 “the most basic and Israel-defining precepts of the written Torah itself: sabbath, food laws, circumcision”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 점에서 그는 바울서신의 구체적 정황에 한결 더 민감하다. “4QMMT and Paul: Justification, ‘Works,’ and Eschatology,” History and Exegesis: New Testament Essays in Honor of Dr E. Earl Ellis for His 80th Birthday, ed. Aang-Won (Aaron) Son. (New York and London: T & T Clark, 2006), 104-32.
49) 라이트 역시 로마서의 문맥에서는 이를 “토라 준수” 혹은 “토라의 실천” 개념으로 일반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QMMT,” 122, 130; Climax, 149-50.
51) Cf. P. J. Tomson, ‘If This Be from Heaven...’: Jesus and the New Testament Authors in Their Relationship to Judaism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1), 350.
52) Eschatology 214-12에서 처음 개진하였다. 사실상 같은 논점을 다소 다른 형태로 “갈라디아의 선동자들은 율법준수를 요구하였는가?” 「한국기독교신학논총」 56 (2008), 59-85에 소개하였다. 이 점에서 필자의 관점은 Michael Cranford, “The Possibility of Perfect Obedience: Paul and And Implied Premise in Galatians 3:10 and 5:3,” NovT 36 (1994): 242-58과 유사하다. 물론 필자는 구원론적 차원을 배제하려는 그의 경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53) J. Barclay, “Mirror-Reading a Polemical Letter: Galatians as a Test Case,” JSNT 31 (1987), 73–93; Obeying the Truth, 36-74. 이에 대한 필자의 비판은 졸저, Eschatology, 207-209. 6:12-14를 “율법 준수와 믿음의 대조”라 말하는 김세윤의 언급도 이해하기 어렵다. Kim, New Perspective, 152.
54) 6:13과 5:3에 대한 학자들의 모순된 주해를 지적한 것은 Eschatology, 209-11, 특히 각주 129.
55) 유대인들이 언약적 신분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do not)는 것이지 노력하지만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다”(cannot)는 말이 아니다. 주석가들은 자주 이 점을 곡해한다. 가령, D. Moo, Romans, 147-148; A. Das, “Beyond Covenantal Nomism,” 246; Kim, New Perspective, 58, 143; Westerholm, “Justification,” 214.
56) 권연경 ‘율법의 행위’는 ‘율법 준수’를 의미하는가?”, 「신약논단」 14/3 (2007 가을), 679-708; “마음의 할례와 행위”, 「신약연구」 7/2 (2008), 311-40. Cf. Cranford, “Abraham in Romans 4: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NTS 41 (1995), 71-88. (이 글 자체는 로마서 4장에 관한 것이다).
57) Dunn, Theology of Paul, 365: “분명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선행’을 결부시키지 않았으며, 이 두 표현들은 서로 다른 하부구조 속에서 작용하였다.”
58) 물론 바리새인들의 경우처럼 그들 나름의 “행위”로 구성된 윤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눅 18:11-12). 하지만 예수나 바울의 관점에 의하면 “사람에게 보이려는”(마 23:5) 혹은 “사람에게서 칭찬을 기대하는”(롬 2:29) 이런 태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마 23:3, 23; 막 7:6-13). 물론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의 상황에서는 그런 위선적 “덕목”조차도 전제하기 어렵다(롬 2:21-24).
59) T. Schreiner, “An Old Perspective on the New Perspective,” Condordia Jounal (Spring, 2009), 145: “Paul does not waste time in his letters to critique problems that did not exist.”
60) 바울의 주장은 모두가 죄 아래 있으므로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으며,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라는 외적 표지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죄의 심각성에 대한 그의 깨달음은 할례 등의 “외적” 자랑거리들(빌 3:4-6)이 무익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였다.
61) 이는 불순종의 삶을 화려한 종교성으로 포장하려 한 이스라엘에 대한 선지자들(가령 사 1:10-20; 렘 7:1-11), 유대인이기에 심판을 피하리라 기대했던 이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했던 세례요한(마 3:7-12; 눅 3:7-14), 그리고 “말만하고 행하지 않으며”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더러웠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곧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팽개치고”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막았던” 이들을 향한 예수의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62) Westerholm, Perspectives, 316.
63)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바울의 관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위 각주 61과 65에 제시된 Cranford의 논문들 참고. 할례와 같은 “외적” 조항들에만 집착하는 이들에게 율법 “전부”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순종의 수준이 “완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64) 가령, Wright, “Gospel and Theology in Galatians,” in L. A. Jervis et al. eds., Gospel in Paul: Studies on Corinthians, Galatians, and Romans for Richard N. Longenecker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222-239; Garlington, “New Perspective,” 10, 14, 18 등.
65) S. Westerholm, “Justification by Faith - What is the Question?”
66) 바울은 “무할례자”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행 16:3). 무할례자 아브라함은 칭의 후 할례를 받았지만(창 15:6; 17장), 이는 은혜로부터의 추락이 아니라 칭의에 대한 인증이었다(롬 4:11).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할례가 그리스도와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2:21; 5:2-4), 이는 교리적 원칙이 아니라 상황적 조치다. 곧 할례가 믿음의 부인을 의미한다는 교리적 판단이 아니라, 실제로 할례 때문에 정작 중요한 복음의 진리, 곧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5:6)과 “성령을 따르는 삶”(3:3)이 훼손당하는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할례가 실제로 교회의 건강을 해치는 상황이어서 할례를 금한 것이지, 할례 자체를 교리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권연경, Eschatology, 191-204.
67) Scot Hafemann, Paul, the Law, and the History of Israel (Tübingen: Mohr Siebeck, 1995), 438-51.
68) 바울은 자주 십자가를 새 생명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권연경, “죽음의 변형: 초대 부활공동체의 죽음 이해 -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신약연구」 8/4 (2009), 639-672 참고.
69) 바울은 성령을 이루어진 칭의의 증거로서가 아니라 “간절히 기다리는 의의 소망”의 열쇠로 묘사한다(5:5; 3:3과 빌 1:6). 칭의는 본래 미래적 개념이며, 바울서신에서도 이런 미래적 칭의 개념의 존재를 부인하기는 어렵다(갈 2:17; 5:5; 롬 2:13; 4:24; 5:19; [P46에 의하면] 빌 3:12. 또 “칭의”와 “구원”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약 2: 14, 24).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 갈라디아서에서는 “의의 소망”이 “하나님 나라 상속” 및 “영생”과 기능적으로 동일하다. 반면 칭의 개념을 현재로 확장하는 로마서에서는 “구원”이 미래적 의미로 사용된다(5:9-10). 물론 이는 사상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동일한 사상이 다소 다른 단어들로 표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복음서의 “지옥”이 바울서신에서 “죽음” “멸망” “썩어짐” 등의 개념으로 달리 표현되는 것과 같다).
71) 권연경, ������행위 없는 구원������, 235-85.
72) 권연경, ������행위 없는 구원������, 286-42.
73) 예를 들어 라이트는 샌더스의 연구가 이미 기본적으로 확립이 되었다고 믿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샌더스 혁명’의 여파가 계속 드러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흐름에 덩달아서 품격도 없이 서둘러 열렬하게, 그의 주석적 근거들이나 역사적 재구성 또는 ... 신학적 건축구조 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은 채, 샌더스의 상대주의적 결론들을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다. 다른 이들은, 특히 보수 진영에 있는 이들은, 적대감으로 대응을 하면서, 유대주의를 펠라기우스주의의 원형으로 보는 옛 관점과 인간의 자기노력(‘율법의 행위’)을 부인하는 구원의 방식의 의미로서 이신칭의를 설교한 자로 바울을 읽는 옛 해석을 다시 원상복귀시키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많은 바울신학자들이 샌더스를 그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위험스러운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판세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의 중심 논제를 무게 있게 반박하는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나 자신은 그럴만한 반박이 제공될 수 있거나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상당한 수정이 요구되겠지만 나는 그의 기본 요점이 기정사실화 된 것을 간주한다.” N. T. Wright, What St. Paul Really Said (Oxford, UK: A Lion Book, 1997), 20-21.
74) 예를 들어 ‘새 관점’ 신학을 소개하는 웹 사이트 www.thepaulpage.com을 볼 것.
75) 참고로 ‘새 관점’ 신학에 대한 논의들을 개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참고문헌 목록을 알고자 하면 다음의 것들을 볼 것. Jay E. Smith,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 Select and Annotated Bibliography," Criswell Theological Review 2/2 (Spring 2005): 91-111; Dennis M. Swanson, "Bibliography of Works o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The Master's Seminary Journal 16/2 (Spring 2005): 317-24.
76) Simon Gathercole, "What Did Paul Really Mean?" Christianity Today (2007 Aug.): 22-28.
77) 파이퍼(John Piper)는 라이트의 ‘새 관점’ 바울신학과 샌더스의 제 2 성전 유대주의와의 유사성을 밝히는 글에서 라이트가 유대주의의 ‘율법의 행위’를 바울이 ‘믿음’으로 대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해준다: “바울은 (쿰란 유대주의 공동체와) 언약 사상및 종말론적 구도를 동일한 체계로 가지고 있으며 단지 바울의 체계에서는 쿰란이 ‘토라의 행위’에 주었던 자리를 ‘믿음’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N. T. Wright, "4QMMT and Paul: Justification, 'Works,' and Eschatology," in History and Exegesis: New Testament Essays in Honor of Dr. E. Earle Ellis for His 80th Birthday, ed. Aang-Won (Aaron) Son (New York and London: T&T Clark, 2006), 112. John Piper, The Future of Justification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7)의 제 9장 “Paul's Structural Continuity with Second-Temple Judaism," 135에서 재인용. 보다 상세한 설명을 위하여서는 pp. 133-43을 볼 것.
78) James D. G.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박문재 역, 바울신학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영어원본, 1998), 467-537; N. T.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3), 137-56.
79) James D. G. Dunn, 『바울신학』, 88-94, 656-69; N. T. Wright, What St. Paul Really Said (Oxford, UK: A Lion Book, 1997), 126.
80)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Minneapolis: Fortress, 1977), 75, 420, 544. 한글 역은 James D. G.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박문재 역, 471에서 옮겼음.
81)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22.
82)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236.
83) 샌더스의 연구는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주전 70년 이전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이 시대와 관련한 문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샌더스는 생각하기를 2세기 초부터 2세기 후기까지 언약적 율법주의가 유대교에 문헌들에 나타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주전 70년 이전의 유대교의 상황도 상당히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을 내린다.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26.
84) James D. G. Dunn, Jesus, Paul and the Law: Studies in Mark and Galatians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0), 186.
85) Dunn, Jesus, Paul and the Law 186-88.
86) D. A. Carson, "Reflections on Salvation and Justification in the New Testament,"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40 (November 1997), 585-887.
87) Dunn, Jesus, Paul and the Law. 208.
88) Dunn, Jesus, Paul and the Law. 239.
89) Dunn, 『바울신학』, 533, 659-661. 던이 마지막 날의 심판이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장의 성경적 전거로 롬 2:1-16; 8:13; 고전 3:10-15; 고후 5:10 등을 제시한다.
90) N. T. Wright, "An Interview with N. T. Wright," interview by R. Alan Streett, Criswell Theological Review 2/2 (Spring 2005): 6. 종말의 심판이 행위에 따라 있을 것이라는 성경적 근거에 대해 라이트는 로마서 2장 13절을 지목한다. “무엇보다도 로마서에서 의롭게 됨을 가장 처음 언급하는 것이 행위로 의롭게 됨이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 이것을 이해하는 바른 길은 바울이 마지막 의롭게 됨(final justification)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N. T. Wright, What St. Paul Really Said (Oxford, UK: A Lion Book, 1997), 126. ( )의 글은 이해를 위하여 추가로 덧붙인 것임. 아울러 Surprised by Hope, 양혜원 역,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서울: 한국 IVP, 2009; 영어원본, 2007), 223-229를 볼 것. 라이트는 행위에 따른 미래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울을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91) Wright, "New Perspective on Paul," in Justification in Perspective: Historical Developments and Contemporary Challenge, edited by Bruce L. McCormack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6), 253.
92)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3), 156.
93) Wright, What St. Paul Really Said, 119.
94) Wright,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2), 241.
95) Wright, What St. Paul Really Said, 19.
96) Justification, Report of the Committee to Study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the Seventy-third General Assembly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Willow Grove, PA: The Committee on Christian Education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2007), 97.
97) J. Gresham Machen, Origin of Paul's Religion (London: Hodder & Stoughton, 1921), 180. Justification, Report of the Committee to Study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97에서 재인용. ( )는 이해를 위해 더한 것임.
98) E. Earles Ellis, Paul's Use of the Old Testament (Edinburgh: Oliver and Boyd, 1957), 10-37. Justification, Report of the Committee to Study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97에서 재인용.
99) 샌더스의 연구 결과에 대한 뉴스너의 강한 비평은 그가 샌더스의 연구 내용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미이크(James A. Meek)에 따르면, 뉴스너는 샌더스의 연구에 대하여 “무가치한” “무식한” “심각하게 오류를 범한” 그리고 “지적으로 매우 천박한” 등의 용어로 비판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각각의 시대의 문헌들은 각각 자기 시대의 문제와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2세기 문헌들이 주전 70년 이전의 유대교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뉴스너의 견해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1세기 유대주의를 대표한다는 샌더스의 견해는 믿기 어려운 것이라는 비평이다. 뿐만 아니라 1세기 유대주의가 하나의 유대주의 사상으로 통일이 되어 있었는가의 문제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샌더스는 그가 연구한 문헌들이 제시하는 범주대로 읽기 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범주를 문헌에 부여하여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한다. 뉴스너는 많은 문헌들의 구체적인 읽기에 있어서도 샌더스와 동의하지를 않는다. 뉴스너는 샌더스가 문맥을 떠나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으며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비판을 한다. 마지막으로 1세기 유대주의를 연구하면서 그들과 구약성경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도 샌더스의 연구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지적을 한다. 요컨대 샌더스의 연구를 기초로 바울 시대의 유대주의를 재구성하기 위하여서는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하며 충분한 답이 주어져야 할 문제들이 많다는 것이다. 뉴스너의 견해를 위하여서는 Jacob Neusner, Judaic Law from Jesus to the Mishnah: A Systematic Reply to Professor E. P. Sanders (Atlanta: Scholars Press, 1993); "E. P. Sanders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in Jacob Neusner, Ancient Judaism: Debates and Disputes, Brown Judaic studies, no. 64, 1994 등을 참조할 것. 뉴스너에 대한 인용은 James A. Meek,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n Introduction for the Uninitiated," Concordia Journal 27 (Jul 2001) 가운데 pp. 215-18에서 온 것임. 뉴스너의 신랄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도 제임스 던은 뛰어난 유대주의 연구가인 뉴스너(Jacob Neusner)가 샌더스에 대해 강한 비평을 하였지만 그것은 샌더스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것이었으며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이해하는 연구 내용에 대해서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하며 샌더스의 연구 내용에 커다란 신뢰를 둔다. 던은 뉴스너의 견해를 위해서는 "Comparing Judaism," History of Religions 18 [1978-79], 177-91을 참조할 것을 권한다. James D. G.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박문재 역, 470, n. 15를 볼 것.
100)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27. 아울러 Thomas F. Best, "The Apostle Paul and E. P. Sanders: The Significance of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Restoration Quarterly 25 (2nd Quarter): 65-74를 참조할 것.
101) 유대 랍비 종교를 행위-의를 추구하는 율법주의로 보는 많은 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소개와 이에 대한 샌더스의 비평을 위해서.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33-59를 참조할 것.
102) Thomas R. Schreiner, "An Old Perspective on the New Perspective," Concordia Journal 35 (Spring 2009): 140.
103)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93-94.
104) Michael S. Horton, Covenant and Salvation: Union with Christ (Louisville, K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7), 39-40. 또한 언약 안에서의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와 관련하여 ‘새 관점’ 신학을 비판한 호튼의 글을 참조할 것. “Which Covenant Theology?" in Covenant, Justification, and Pastoral Ministry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7), 197-227.
105) Michael S. Horton, "Paul and Covenantal Nomism," Modern Reformation 12 (Sep/Oct 2003), http://www.modernreformation.org/default.php?page=articledisplay&var1=ArtRead&var2=244&var3=issuedisplay&var4=IssRead&var5=25에서 볼 수 있음. 중세 천주교 신학에서 세례를 통해 얻는 첫 번째 의롭다함의 믿음은 아직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미형성된 믿음’(fides informis)이며, 마지막 심판 날에 최종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fides caritate formata)으로 구별이 된다.
106) Karl T. Cooper, "Paul and Rabbinic Soteriolog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4 (1982): 128.
107) 중세 후기 유명론의 ‘의롭게 됨’의 교리의 이해를 자세히 알기를 원하면 오버만이 정리하여 놓은 유명론자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의 견해를 살펴볼 것. Heiko A.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Durham, NC: The Labyrinth Press, 1983), 175-78.
108)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101, 106. Michael S. Horton, Covenant and Salvation: Union with Christ, 40에서 재인용. 이탤릭체는 호튼의 것임.
109)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76.
110) 이러한 결론은 ‘새 관점’ 신학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정반대이다. PCA 총회 보고서는 다양한 ‘새 관점’의 견해들 사이에 공통된 견해를 다섯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 중의 하나를 이렇게 말한다. “바울이 당시의 유대인들을 비판한 것은 신인동력적 구원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수용하지 못한 유대인들의 배타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Report of Ad Interim Study Committee on Federal Vision, New Perspective, and Auburn Avenue Theology, 2201-2236. 위의 인용문은 p. 220에서 볼 수 있음. http://www.pcahistory.org/pca/07-fvreport.html에서 전문을 볼 수 있음.
111) S. Horton, "Paul and Covenantal Nomism,"을 참조.
112)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ranslated by George Musgrave Giger, vol. 2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1994), topic 12, q. 2nd, 184.
113)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opic 12, q. 3rd, 185.
114) Ibid., topic 12. q. 2nd, 184.
115) N. T. Wright, "New Perspective on Paul,", 254.
116) 라이트는 바로 앞서 인용을 한 같은 곳에서, 바울이 다가올 심판날을 바라보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빌립보서 등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나 죽음에 근거하거나 또는 재판장의 긍휼에 전적으로 의지하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도적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호의적 판결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하게 언급이 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117)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신학이 당대의 천주교회의 구원론과 관련하여 비평한 요점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졸고, “개혁신학의 구원과 성화: 천주교회의 입장과 비교함,” 구원이후에서 성화의 은혜까지, 박영선 외 (서울: 이레서원, 2005), 117-163을 참조할 것.
118)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q & a. 33.
119)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q & a. 35.
120) 베르아워(G.C. Berkouwer)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러한 구별은 종교개혁자들 간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며, 아울러 또한 성경의 교훈에 일치하는 옳은 것임을 밝히는 논증을 제공한다. 그의 책, Faith and Justification (Grand Rapids, MI: Eerdmans, 1954)과 Faith and Sanctification (Grand Rapids, MI: Eerdmans, 1952)을 참조할 것.
121) Decrees of Council of Trent, sess. 6, can. 11. 트렌트종교회의의 신경과 칙령의 원문을 위하여서는 Henrich Denzing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Freiburg: Verlag Herder, 1965);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II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0 reprinted)과 Norman P. Tanner, ed., Decrees on the Ecumenical Councils vol. II (London and Washington DC: Sheed & Ward and Georgetown University Press, 1990) 등을 살펴볼 것.
122)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은혜언약의 두 가지 은택이며 또한 성령의 두 가지 은총이라고 말함으로써 불가분의 유기성을 말함과 동시에 반드시 구별이 되어야 함을 교훈한다. 기독교 강요 3권 3장, 11장 등을 참조할 것. 칼빈에게 있어서의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화에 관한 언약적 논의를 살피기를 원하면 Anthony A. Hoekema, "The Covenant of Grace in Calvin's Teaching," Calvin Theological Journal 2 (1967): 133-161; Lyle D. Bierma, "Federal Theology in the Sixteenth Century: Two Tradition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5 (1983): 304-321; Peter A. Lillback, The Binding of God: Calvin's Role in the Development of Covenant Theology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1); I. John Hesselink, Calvin's Concept of the Law (Allison Park, PA: Pickwick Publications, 1992) 등을 볼 것.
123) Horton, Covenant and Salvation: Union with Christ, 193.
124) 심판 날에 구원을 결정할 행위가 인간의 독립적인 자력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의 생각이 은혜의 신학을 말하고 있다는 어리석음에 대해 칼빈의 조소를 들어보자: “중생을 하여 영적인 삶을 살아 (도덕적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지껄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을 만한 은혜의 단맛을 전혀 맛보지 못한 자들이다.” 기독교 강요 3권 13장 5항.
125) Donald MacLeod, "The New Perspective: Paul, Luther, and Judaism,"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into the 21st Century, edited by J. Ligon Duncan, III (Fearn, Scotland: Mentor, 2009), 325.
126) Dunn, 『바울신학』, 533. ( )는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임.
127) Dunn, 『바울신학』 565.
128) Dunn, 『바울신학』 825-879를 참조할 것.
129) Wright, What St Paul Really Said, 110.
131) 이와 관련한 세밀한 논의를 위하여서는 John Piper, The Future of Justification을 볼 것. 아울러 클락의 글은 의롭다함의 근거로서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미에 대한 ‘새 관점’ 신학들의 이의제기와 이에 대한 개혁신학의 대응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참조할 것. R. Scott Clark, "Do This and Live," in Covenant, Justification, and Pastoral Ministry, edited by R. Scott Clark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7), 229-65.
132) 이러한 신학적 평가와 관련하여, ‘새 관점’의 신학을 따라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는 신자들의 비윤리적 양태를 비판하며 구원에 있어서 행위의 가치를 주장한 권연경의 행위없는 구원 (서울: SPC 출판사, 2006)을 비판한 졸고, “행위없는 구원에 나타난 권연경의 ‘주석적 회개(?)’와 종교개혁신학으로부터의 이탈,” 『신학정론』 26/2 (2008): 195-219를 참조할 것.
133) 예를 들어 슈라이너는 샌더스의 주장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간략하게 제시하면서 결론을 내리기를 샌더스가 한 편으로는 제 2 성전 유대주의에 있는 은혜의 주제는 과대 평가를 하였던 반면에 행위의 중요성은 과소 평가를 하였다고 쓰고 있다. 샌더스의 연구에 대한 의미있는 반론들은 샌더스으 견해가 아직 만족스러울만큼 모든 증거들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샌더스의 견해는 그 근거가 안정적으로 확립이 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올바른 공통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을 읽을 때에 끌어다 사용할 하나의 가설로 받지 않는 것이 더 옳다는 것이 슈라이너의 결론이다. Thomas R. Schreiner, "An Old Perspective on the New Perspective": 141-43을 볼 것. 아울러 샌더스의 말대로 개신교 학자들이 유대주의가 다양한 견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에서의 율법의 순종만을 과장하여 강조하였다는 일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개더콜의 비평도 참조할 것. Simon Gathercole, "What Did Paul Really Mean?": 26. 샌더스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 대한 학자들의 전문적인 평가를 보기 원하면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A Fresh Appraisal of Paul and Second Temple Judaism, 2 vols. (Grand Rapids, MI: Baker, 2001)를 볼 것. 특별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언약적 율법주의를 자신의 신학을 받고 있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것을 배격하고 있음을 말하는 주장을 보기 위하여서는 Dale C. Allison, Jr. "Jesus and the Covenant: A Response to E. P. Sanders,"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29 (1987): 57-78을 볼 것. 바울의 언약 이해를 위하여, Charles H. Talbert, "Paul on the Covenant," Review and Expositor 84 (Spring 1987): 299-313을 볼 것.
134) 여기서 유대주의와 (‘옛 관점’에 따른) 바울신학의 구원론이 어떻게 다른지를 네 가지로 요약해 주는 쿠퍼의 글을 참조할 만하다. (1) 유대주의는 행위의 순종을 언약 내에서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면서 불완전한 복종이라도 충분한 것으로 인정을 한다. 반면에 바울에게는 오직 완전한 순종만이 의미를 갖는다(갈 5:3). (2) 유대주의는 각 개인들에게 복종을 하도록 율법의 요구를 제시하지만, 바울은 이 요구가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하여 만족이 되었으며 신자들에게 값없이 전가됨을 말한다. (3) 유대주의는 구원의 근거를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 안에서 순종하고 회개하며 속죄를 드리는 사람의 반응 등 이 두 가지에 둔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가 단번에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며, 각각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의 성취를 위해 신자 개개인의 순종이 그리스도의 의에 더하여질 필요가 없음을 선포한다. (4) 유대주의에서는 범과와 죄책에 대한 문제가 다양한 속죄 수단에 의하여 해결이 된다. 물론 죄인의 회개가 중요한 요소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율법의 정죄가 이미 실행되었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그 결과 죄인은 이미 극한적인 율법의 정죄를 친히 담당한 분과 자신을 동일시하여서만 정죄를 피할 수가 있다. Karl T. Cooper, "Paul and Rabbinic Soteriology", 137.
135) Justification, Report of the Committee to Study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the Seventy-third General Assembly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76-80을 참조할 것.
136) John Calvin, Acta Synodi Tridentinae cum Antidoto in Calvini Opera, 7. 365-506 가운데 특별히 453-55을 볼 것.
김병훈 (합동신학 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한국개혁신학회/http://cafe.daum.net/phsb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