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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혁교회 역사적 측면에서 본 시편찬송가 / 서창원 목사

작성자이지명|작성시간13.02.21|조회수342 목록 댓글 0

 

개혁교회 역사적 측면에서 본 시편찬송가 / 서창원| 더.배.섬.
송영찬 조회 100 |추천 0 | 2008.09.09. 10:58

 

 

 

 

첨부파일 서창원.hwp


 

 서창원, 삼양교회 목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사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대표
 

 

 

이끄는 말

 

시편 찬송가, 과연 필요한 것인가? 이 질문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 정작 필요한 질문은 개혁교회에 찬송가가 필요한가? 일 것이다. 이것이 20세기 직전까지 무려 40년 동안 스코틀랜드 개혁 장로교회 안에서 다루어졌던 것이다. 그들에게 아주 당연시 했던 시편 찬송가, 개혁교회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개혁교단에서 시편찬송가가 필요한가? 라는 제하의 공청회를 가진다는 것이 참으로 어색한 일이다. 이 일은 한국교회 앞에 없었던 새것을 내놓는 일이라기보다는 한국교회가 잊고 있었던 개혁교회의 중요한 유산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일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구약 시대에서부터 신약의 예수님 당시와 사도들 및 그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예배 음악은 설교와 더불어 예배의 중심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제도에 등장하는 웅장한 찬양대의 역할에 대하여 신약 성경에서는 이상하게도 단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천상에서 있는 찬양 외에(계시록)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서로 화답할 것을 언급한 것이 전부이다. 혹자는 그것이 신약교회 예배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언급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다고 추측한다. 그렇다면 구약의 찬양대 문제는 당연한 것이 아니어서 특별하게 언급한 것인가? 그것이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라면 신약의 교회 예배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언급되었어야만 했다. 없다는 것은 그것이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더구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라고 한 본문의 문맥을 보면 교회 예배를 언급하면서 한 내용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서 있어야 신앙생활을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삶 속에서 드려져야 할 노래가 그러해야 한다고 한다면 교회 예배 음악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였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예배 음악은 특별한 찬양대 중심의 음악이 아닌 온 회중 중심의 음악이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요 찬양하라고 주신 시편 찬송가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편 자체가 찬양대를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주님의 은혜를 인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로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찬양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하고 있는 이유가 그러하듯 말이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비록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산물일지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성경적 교회 예배 음악을 찾아 예배모범을 제시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1. 개혁 교회 예배 음악에 대한 정의

 

일반적으로 교회 음악이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 사용되어지는 모든 음악을' 뜻한다. 그러나 개혁교회 예배 음악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하는 성경을 근거로 한 교회의 공적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을 말한다. 적어도 이 정의는 예배 요소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배의 요소는 우리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항의 기록에 보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꺼이 수납될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되어서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이나 사단의 시사(示唆,suggestions of Satan)에 따라, 어떤 유형한 표현이나 기타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 받지 않게 하셨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배에 있어서 회중이 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가? 예배 자체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예배의 모든 요소도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규정대로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고 인간의 상상이나 고안에 의하여 사용되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격되어야 함을 개혁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찬양을 하는 행위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이 행위는 성경 읽기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도 구분되는 독특한 행위이다. 특히 일부 지도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가르치고 있는 <곡조 있는 기도>라는 정의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물론 찬송에는 기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실지로 시편의 상당수가 하나님과 교통함에 있어서 즐겨 사용되는 기도문구들이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에 찬양과 감사의 내용들이 풍요롭게 들어간다. 그러나 노래의 내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도가 예배의 한 요소이듯이 찬양도 예배의 또 다른 요소라는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찬송을 곡조있는 기도로 단언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송으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자들은 어떻게 가르쳤는가?

칼빈은 교회 음악 혹은 예배 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에 대한 그의 철저한 순종에서 비롯된 것' 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가 음악에 대한 신학적 관점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를 가장 중요시하면서 '허영심과 욕심에 차 있는 인간의 음악에 대한 오용의 위험성과 가능성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칼빈의 이 사상은 성 어거스틴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 받은 것 외에로는 주님께 합당한 것으로 노래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음악은 가볍거나 경박해서는 안되며 권위와 위엄을 지녀야 하고 온건한 것으로 절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회 음악은 단지 듣기에 감미롭게만 작곡되어서는 안되고...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사람의 마음에서 최상의 것은 음악이 아니라 무엇이 노래되어지는가 하는 가사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개혁교회 전통에 있어서 예배 음악은 반드시 그 내용에 있어서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야 함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인간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은총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인간이 부여받은 재질의 우수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초대교회는 시편을 찬양하였으며 중세교회가 사장시킨 시편 찬송을 종교개혁자들은 회중찬송으로 자리 잡게 한 것이다.

 

2. 시편찬송가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 아래 교회를 개혁한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노래는 시편이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직접 작곡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케 하며 그의 행하신 일들을 묵상케 하는 하나의 자극제와 같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존경하고 영광을 그에게 돌리게 하는 것이다. 칼빈이 직접 제작한 제네바 시편송가 서문에서 칼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성령께서 만드시고 다윗이 노래한 시편 이상으로 좋은 노래나 찬송의 목적에 부합한 노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시편을 노래할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입에 친히 이 시편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토록 노래하게 하시는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칼빈은 시편을 가리켜 '영혼의 해부학'(An anatomy of all the parts of the soul)이라고 하면서 시편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든 경험들, 슬픔, 두려움, 의심, 소망, 기쁨, 걱정 및 혼동 등을 끄집어내어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시편에 사람이 의식할 수 없는 어떤 감정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마치 우리의 양심을 낱낱이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다고 했다. 다른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군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선언하라고 주신 명령들이지만 시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주신 것이며, 이 시편은 성도들의 내적 생각들과 감정들을 들춰내며 우리들 각자의 상태를 점검하도록 촉구한다고 했다.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는 연약한 부분들에게 사로잡히거나 수많은 악에 잠식되지 않도록 주의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은주씨는 자신의 논문에서 칼빈의 예배 음악에 대한 연구 조사 결과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하였다:
① 음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용력이 있다. ② 성경으로부터 비롯된 가사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시편이야말로 교회에서 부르기에 가장 합당한 것이다. ③ 예배 시에 사용되어지는 음악은 말씀과 결합되어 있는 성악 음악이어야 하며 다성 음악은 가사의 의미를 혼란시킬 위험이 있기에 제창으로 부르는 단선율 시편가인 제네바 시편을 채택하였다. ④ 교회 음악에서의 악기 사용을 구약 시대의 그림자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여 폐지하였다. ⑤ 교회 음악은 선교적 임무와 교육적 임무를 지닌다고 보았다.

이러한 음악적 역할을 최대한으로 만족 시킬 수 있는 노래는 시편뿐이다. 칼빈이 예배요소로 시편 찬양을 포함시킨 것은 성경에 없는 것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중세교회가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찾은 성경적 가르침 때문이었다. 코터링 목사가 지적한 것처럼 '배교한 로마 카톨릭은 일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였고 회중의 노래를 사제들과 훈련받은 찬양대 즉 전문적인 사람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회중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찬양대인 것을 개혁자들은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칼빈 이후 성경에 신실하기를 원하는 모든 개혁교회들이 시편 찬송을 하나의 중요한 영적 유산으로 간주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 개혁자요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낙스 역시 칼빈과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칼빈과는 달리 낙스는 종교개혁 초기에 시편찬송을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로는 보지 않았을지라도 시편찬송을 신앙생활에 아주 유용한 힘을 주는 것으로서 성도들, 특히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도록 권장하였다. 1556년 낙스가 만든 제네바 예배 모범에 보면 운율적 시편(Metrical Psalms)이 개혁교회 예배에 있어서 회중들이 해야 할 의무조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존 낙스가 아직 살아 있을 때 1564-65년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공예배 지침서(Book of Common Order)에 들어가 있는 찬송 편에 다윗의 노래인 시편 외에 다른 언급이 전혀 없다. 이것은 공 예배에서 회중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시편찬송을 사용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5항에서 성경봉독과 말씀강론 및 마음에 감사함으로 부르는 시편가에 대하여 명시함으로써 시편찬송이 장로교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문제는 예배모범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배당에서 공동으로나 혹 한 가족끼리나 시와 찬미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마땅한 본문이니 성경에 합한 말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언사를 사용하라'(4장 1항).

이러한 가르침은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스코틀랜드를 휩쓸면서 일반 찬송가가 공 예배 용 음악으로 채택이 되기까지 예배음악의 유일한 찬송으로 간주되었다. 칼빈이 주장한 것처럼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제외하고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 찬송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교회들은 그리 많지 않을지라도 장로교 전통은 시편 찬송을 공 예배 음악에서 제외시킨 적은 없다. 이 외에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에 대한 글은 최근 <진리의 깃발>지 통권 84호에 기고된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의 Reimer A. Faber교수의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3.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견해

 

 1947년 미국 정통장로교회 총회 석상에서 공예배 음악에 대한 보고서에서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존 머레이 교수는 영감되지 않은 것으로 노래하는 것과 영감된 말씀인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한 논증을 특히 신약성경의 여러 사례를 연구하여 이렇게 발표하였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머레이 교수의 지적에 의하면 이 본문은 오늘날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찬송과 복음송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용도를 보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의 말씀은 분명 시편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방식임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① 시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과 구약에서 사용된 '시'라는 단어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발견하였듯이 그 단어들은 한결같이 다 시편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사용된 단어들의 참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히브리어 '미스모르'를 번역한 사례들 대부분이 시로 번역되었고 극소수만이 다른 히브리어 단어를 시로 사용하기도 했다. '살모스'라는 뜻은 '찬미의 노래들'이라는 말이다. 제목들에 자주 등장하는 시라는 말은 시편을 70인역에서 '살모이'(PSALMOI)로 부르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tehillim'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기자들이 헬라어로 된 구약 성경에 친숙한 그들로서 '살모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마음에 구약의 시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약의 사용된 단어 시편들(살모이)이라는 말이 분명히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 시들을 시편으로 불렀다.
따라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사용된 시가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사례들이 다 영감된 것으로 하나님을 노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라는 말은 다 영감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린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힘노스'라는 말도 70인역에서 17번 사용되었다. 그 중 13번이 시편에 있다. 그 중 대 여섯 번이 히브리어 '네기노쓰'(Neginoth) 혹은 '네기나'(Neginah)에서 번역되어 시편 제목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의 본문에 언급된 대부분의 찬미라는 단어가 쓰인 사례들은 시편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테힐림이라는 단어에서 번역된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시편이 찬미로 찬미가 시편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시편과 찬미가 서로 전적으로 다른 분류의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의 시는 단순히 시만을 의미하지 않고 찬미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찬미라는 말 자체가 영감되지 않은 어떤 노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오데' 역시 힘노스보다도 더 많이 시편의 제목들에서 사용되었다. 36번이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대부분이 '삼노스'를 가리키고 있다. 이같은 사례에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구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단어들이 여러 시대 여러 장소에서 영감 받아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에 의해 사용된 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시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구성된 유일하고도 독특한 찬양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은 구약의 시편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단어인 것이다. 더구나 신령한 노래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 즉 영감되지 않은 것에 신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② 따라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말은 찬양의 세 가지 다른 유형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를 결코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 더 놀라운 것은 시편의 몇몇 제목들에 보면 세 가지 단어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음율적인 작품들이 시와 찬미와 노래로 동시에 불려진 것이다. 물론 이 세 단어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노래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즉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께 사용될 찬양의 풍부함을 나타내고 있는 세가지 유형의 표현인 것이다.
③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신령한 노래'(ODAIS PNEUMATIKAIS)라는 노래의 특성을 눈여겨보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페뉴마티카이스라는 말이 신약에서 성령을 지칭하고 있는 단어이며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을 뜻하고 있는 단어인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사람들이 작사한 것이나 영적인 분위기에서 주어진 것들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F B Meyer의 지적대로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 즉 'theopneustos'을 의미한다(엡 5:19절 참고). 이 문맥에서 신령한 노래라는 말은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의미한다. 마치 고린도 전서 2:13절에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서 영감된 말씀과 성령에 의한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한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페뉴마티코스'라는 말이 시나 찬미라는 말에는 붙지 아니하고 '오다이스'(노래)라는 단어에만 붙었는가? 이다. 이 질문에 합당한 답변은 이것이다. '페뉴마티카이스'는 모든 세 여격 명사에 해당되나 그 여격 명사의 성(여성명사)은 그 명사와 제일 가까운 명사의 성에 끌리는데 기인한 것이다.
골로새서와 같이 접속사를 빼고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신령한 노래는 시와 찬미와 같은 유형에 속한 형태의 노래로 보는 해석이다. 이것이 마이어 목사의 견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시와 찬미와 노래들은 다 신령한 것들이라는 말이다. 즉 성령에 의해서 감동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령에 의해 영감되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신령한 이라는 단어가 노래에만 해당된다고 할지라도 그 말이 성령에 의해서 감동된 것 혹은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와 찬미는 신령한 것이 아니라도 괜찮으며 오직 노래만 신령한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와 찬미도 다 하나님의 감동을 주어진 성경의 시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시와 찬미를 한 종류로 신령한 노래를 다른 종류로 분류해서 설명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시도 찬미도 영감된 것이며 노래도 영감된 것인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신령한 것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영감되지 않는 노래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
둘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다 성령에 의해 감동된 것들임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예배에 있어서 영감된 말씀으로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셋째, 시편이 우리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도와준다. 에베소서 5:19절과 골로새서 3:16절은 바로 시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감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찬양해야 함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예배에 있어서 무엇을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반드시 성경에 한정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4. 시편찬송의 유익

 

칼빈은 시편 찬송을 부르는 목적을 세 가지로 언급하였다. 하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둘째는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과 셋째는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기를 기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실지로 칼빈은 찬미의 제사를 올바르게 드리는 올바른 방법에 관해서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원칙이 시편에 있다고 믿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히브리서 13:15절에 나오는 "찬미의 제사"(thusian ainesews)라는 표현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항상 우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히브리서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여전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 제사가 있다면 하나님을 찬미하는 제사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이미 송아지를 잡아 제사하는 대신 우리 입술의 제사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호 14:2). 칼빈은 이 사실을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신약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정직하게 부를 입술이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가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찬양을 부르는 일은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칼빈은 찬미의 제사가 다른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외형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임을 지적하였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이 부분을 강해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인하여 복음에 순종하는 삶에는 반드시 감사가 포함되는데 이처럼 순종과 감사를 다 포함하여 찬미의 제사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제사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볼 때, 제사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집전되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에 찬미의 제사 역시 사람들의 고안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노래되어져야 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반드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찬양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임의로 지어내서 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보다 이미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인지 계시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행해지는 찬양이 주님의 교회에서 불러져야 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제사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받은 아론의 두 아들들(나답과 아비후의 사건, 레 10:1-3)의 경우처럼 비록 우리들이 주님이 합당치 않게 여기는 것들로 하나님을 찬양해도 당장 징벌하지 않는다 고해서 시편찬송이 없어도 된다고 할 수 없다. 가장 성경적인 찬양은 무엇보다도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반드시 개혁주의의 바른 신학과 신앙을 담고 있는 합당한 가사여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으시고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을 이렇게 단언하셨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어 '테힐라티'(Tehilati, my praises)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시편을 가리키는 테힐림에서 나온 단어로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공적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들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찬양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백성이 되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다. 찬양은 그들이 지은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찬양을 불러야 하는 것이다. 이 말과 가장 가까운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E. J. Young박사가 이사야서 주석을 쓰면서 언급한 것과 같이 베드로전서 2:9절 말씀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
여기서 대다수의 영어 성경은 우리말에 덕으로 번역된 '아레아테스'를 하나님의 찬송들로 번역하였다. 즉 하나님께 가장 영광을 돌리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그의 하신 일들을 온 땅에 선포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도록 지음을 받았고 우리의 택함과 구속함의 목적 역시 주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성도들의 삶에서 이루어져야할 특별한 것이라면, 성도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음악에 있어서 하나님의 찬송 즉 시편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마땅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가는 말

 

시편찬송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이해가 충분하지 못할지라도 한국교회 특히 정통보수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개혁교회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주신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우리의 신학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와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까지도 아무런 제재가 없이 허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맡은 지도자로서 회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한 것은 이번에 총회 신학부에서 시편찬송가에 대한 공청회를 주관하고 그 필요성을 역설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보다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가고자 하는 총회의 노력에 미말에 처한 종이 기여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됨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드린다. 조국 교회 안에 시편찬송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몇몇 교회들에서 개별적으로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는 시점에서 총회가 이 일에 앞장서 보급한다면 하나님의 진리가 온 성도들의 입술과 가슴에 새겨지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것이며 동시에 교단의 경제적 수익성 측면도 크게 기여하리라고 본다. 같은 신학과 신앙을 가진 교단들과 그 외의 성도들이 시편 찬송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본 논고를 마치면서 총회적으로 시편찬송가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국 교회에서도 시편이 예배 음악으로 시편이 불려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날이 속히 오기를 열망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기도한다. 더욱이 우리 교단의 헌법에 실려 있는 예배 모범에서도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다루면서 시편을 부르라고 권장하고 있음같이 시편 찬송가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주의 백성들의 손에 쥐어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끝으로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시편이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올바른 방식을 완벽하게 가르치는 책'이라고 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종교적 의무를 바르게 수행하도록 강력하게 자극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과 교통할지를 가장 정확하게 지도해 준다'고 했다. 이 놀라운 시편의 능력을 온 성도들의 입속에서 경험되어지며 삶에서 배어나게 하는 신학교육적 효과를 만끽하는 날이 오게 되길 기대한다. 시편찬송을 통해서 경건과 거룩과 의로운 삶을 형성하며 날마다 져야 할 십자가를 우리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감당케 되는 참 성도들로 가득한 조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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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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