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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Galatians)

갈라디아는 어디에 있었는가?/변 종 길 교수

작성자이지명|작성시간13.03.18|조회수4,155 목록 댓글 0

 

서 론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를 두 번 방문한 것으로 나온다. 첫 번째 방문은
2차 선교여행 때인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
디아 땅으로 다녀갔다”고 말한다(행 16:6). 두 번째 방문은 3차 선교여행 때인데 “얼마 있
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 굳게 하니라”고 한다(행
18:23). 사도행전에 ‘갈라디아’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갈
1:2). 그리고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한다(갈 4:13). 그런데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 아니하
고 도리어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갈 4:14). 그랬
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제는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고 있다(갈
1:6). 그래서 바울은 놀라움과 탄식으로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는 어디인가? 전통적으로는 아나톨리아
중부 내륙에 있는 ‘갈라디아 지역’(Region Galatia)을 생각해 왔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
로마의 행정 구역인 ‘갈라디아 주’(Province Galatia)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곧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던 ‘갈라디아 지역’ 남쪽에 있는 비시디아(Pisidia)와 이사우리아
(Isauria)와 루가오니아(Lycaonia)와 동부 브루기아를 포함하는 로마 속주 ‘갈라디아’를 생
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방문한 ‘갈라디아’는 중부내륙 지역이 아니라, 그 남쪽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는 중
요한 이유는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아나톨리아 중부내륙 지역 방문에 대한 구체적인 기
록이 없다는 것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방문했던 남부 도시들을 가리켜 ‘갈라디아’라고 불
렀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의 위치에 관한 이런 새로운 견해를 ‘남갈라디아설’(South Galatian hypothesis)
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전통적인 견해를 ‘북갈라디아설’(North Galatian hypothesis)이라
부른다. 물론 이 명칭은 정확한 것은 아니다. 로마의 행정구역으로서의 ‘갈라디아 주’는 전
통적인 갈라디아 지역의 남쪽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그리고 전
통적인 지역 명칭으로서의 ‘갈라디아 지역’은 중부 내륙 지역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남갈
라디아’와 ‘북갈라디아’라는 명칭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 두 지역의 위치를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남갈라디아설 과 북갈라디아설 ‘ ’ ‘ ’이라는 용어를 오늘날 많이 사용하고 있다.
18세기 전반까지는 ‘남갈라디아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748년에 요하네스 슈미트
(J. J. Schmied)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며,1) 1825년에 J. P. 뮌스터(J. P. Mynster)에 의
해 뒤따랐다고 한다.2) 그러나 이들의 견해는 ‘남갈라디아설’이라고 부르기보다 ‘범갈라디아
설’(Pan-Galatian position)3) 또는 ‘속주 가설’(Provinzhypothese)4)라고 부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그러다가 윌리엄 램지(W. M. Ramsay)5)가 1892년에 사도 바울이 방문한 ‘갈라디아’는
로마 행정구역상의 명칭인 ‘갈라디아 속주’로서의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
을 가리킨다고 주장한 이후로 ‘남갈라디아설’은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20세기에 들
어와서는 테오돌 찬(Th. Zahn), 거쓰리(D. Guthrie), 브루스(F. F. Bruce), 펑(R. K. Fung)
등이 남갈라디아설을 따른다.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윌리엄 헨드릭슨(W. Hendriksen)과 흐
로쉐이드(F. W. Grosheide) 등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당연히 ‘갈라디아 지역’을 생각해 왔다. 예를 들면 조셉 바버 라이트
푸트(J. B. Lightfoot), 제임스 모팻(James Moffatt) 등이 ‘갈라디아 지역’ 곧 ‘북갈라디아설’
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또한 에두아르트 쉬러(E. Schürer), 슈타인만(A. Steinmann), 리
츠만(H. Lietzmann), 프리츠 바르트(F. Barth), 파울 파이네(P. Feine) 등이 이 견해를 따랐
다. 근래에는 큄멜(Kümmel), 마륵센(Marxen), 베츠(Betz), 그랜트(Grant) 등이 북갈라디아
설을 지지하며, 개혁주의 주석가들 중에는 흐레이다너스(S. Greijdanus)와 판 브루헌(J. van
Bruggen)과 화란의 가톨릭 주석가인 껄러르스(J. Keulers) 등도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오늘날 다수를 차지하는 남갈라디아설의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나서, 그 논거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다. 본 논문에서는 고고학
적인 자료들을 자세히 검토하지는 못하고, 성경을 중심으로 주요한 논점 몇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본 론


I. 전통적인 견해
전통적으로 ‘갈라디아’에 대해 가졌던 견해를 알기 위해 먼저 ‘갈라디아’란 명칭과 그 역
사, 그리고 갈라디아의 위치와 민족적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갈라디아에 대한 명칭
‘갈라디아’(Galatia)란 말은 라틴어 ‘갈로그라이키아’(Gallograecia) 또는 헬라어 ‘헬레노갈
라타이’에서 왔다. 이것은 서쪽에 있는 ‘켈트족’(Celts = Galli)과 구별하기 위해 ‘그리스 쪽

1) Cf. W. G. Kümmel,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21. Aufl. (Heidelberg: Quelle & Meyer, 1983),
258.
2) Cf. J. Keulers, De boeken van Paulus, I (Roermond en Maaseik: J. J. Romen & Zonen, 1953), 88.
3)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0), 7.
4) Kümmel, Einleitung, 258.
5) W. M. Ramsay,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 (New York/London: G. P. Putnam's Sons, 1893),
13-15, 97-102.

의 갈리족의 땅’ 또는 ‘헬라의 갈리족의 땅’으로 부른 것이다.

6) 따라서 ‘갈라디아인들’은 켈트(갈리)족의 한 분파로서 동방에 거주하던 켈트족을 가리킨다.
켈트족(Celts)은 고대 저술가들에 의해 ‘켈타이’(Celtae), ‘갈라타이’(Galatae) 또는 ‘갈
리’(Galli)로 불렸다.7) 이 중에서 ‘켈타이’가 가장 오래된 이름이며, 아마도 처음으로 이 민
족과 접촉하게 된 마르세이유(Marseilles)의 식민자들에 의해 헬라어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
된다.8) ‘갈라타이’(Galatae)는 후대의 명칭으로서 주전 3세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에 반
해 로마인들은 이 민족을 대개 ‘갈리’(Galli)라고 불렀다. 로마인들이 가끔 ‘갈라타이’라는 용
어를 사용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에는 항상 소아시아의 켈트족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 그리스인들은 ‘갈라타이’라는 용어를 넓은 의미로 곧, 갈리아의 사람들을 가리키
거나 또는 아시아의 사람들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하였다. ‘켈타이’라는 단어는 ‘갈라타이’와
‘갈리’라는 단어와 함께 계속 사용되었다.9)


2. 갈라디아의 역사
켈트족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했다고 보는데,10) 유럽 대륙의 서쪽 끝까지 갔다가 대
양에 막혀서 다시 동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주전 4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반도로 휩
쓸고 들어왔으며, 3~4 세대 후에 또다른 이주의 물결이 있어서 마게도냐(Macedonia)와 데
살리아(Thessaly)로 밀려 들어왔다.11)
주전 280년경에는 약 2만명의 켈트족이 마게도냐와 데살리아 지역에서 소아시아로 건너
왔다. 이 중 절반은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이들이
건너온 이유는 당시 형제간의 분쟁을 겪고 있던 비두니아(Bithynia)의 왕 니코메데스
(Nicomedes)가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12) 그러나 그들은 전쟁 후에도 소아시아에 계속
눌러 살았다. 그러다가 버가모(Pergamus)의 Attalus I세(주전 241~197년)에 의해 여러 차
례의 전투 끝에 정복되었으며, 브루기아(Phrygia)의 한 지역을 정착지로 배정받아 거기에
거주하였다.
그 후 로마인들과의 만남은 주전 190년의 마그네시아(Magnesia) 전투에서였다. 그 때 갈
라디아인들의 부대가 안티오쿠스(Antiochus) 편에 서서 로마 군대와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이듬해에 로마의 집정관(Consul) 만리우스(Gnaeus Manlius)가 갈라디아 전체를 복종시켰으
며, 그 후로 갈라디아인들은 평온하게 살았다. 그들은 로마 치하에서 독립을 유지했으며 자
치권을 얻었다. 주전 25년에 그들의 통치자인 아뮌타스(Amyntas)가 죽자, 갈라디아는 아우
구스투스에 의해 로마의 속주(a Roman Province)로 편입되었다.13)
로마 속주로서의 갈라디아는 원래의 갈라디아 외에 루가오니아(Lycaonia)와 이사우리아


6) Cf. S. Greijdanus, De brief van den apostel Paulus aan de gemeenten in Galatië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36), 22.
7) Cf. J. B. Lightfoot, The Epistle of St. Paul to the Galatians (Grand Rapids: Zondervan, 1957), 2.
8) Lightfoot, Galatians, 2.
9) 이상은 Lightfoot, Galatians, 2-4를 보라.
10) Lightfoot, Galatians, 4.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중앙아시아 가설’보다는 성경을 따라 홍수 후에 아라랏 산
에서부터 퍼져 나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
다.
11) Lightfoot, Galatians, 4f.
12) Greijdanus, Galaten, 21f.
13) Lightfoot, Galatians, 7.

(Isauria)와 브루기아의 남동쪽 지역(the south-eastern district of Phrygia)과 비시디아의
한 부분(a portion of Pisidia)을 포함하였다.14) 루가오니아는 갈라디아 주에 속하는 것으로
분명히 언급되었으며, 더베(Derbe)와 루스드라(Lystra)도 이에 포함되었다는 증거가 있
다.15)
3. 갈라디아의 지리
갈라디아인들이 지정받은 땅은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중부내륙 지역인데, 동서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 형태이다. 브루기아 동쪽에 위치했으며 가로 약 300여 km, 세로 약 150 km
가 되었다.16) 이 갈라디아 지역은 그들의 부족의 이름을 따라 다음 세 지역으로 나뉘었
다.17)
1) 트로크미(Trocmi) 지역: 제일 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타비움(Tavium)이 그
중심지였다. 동쪽으로는 갑바도기아(Cappadocia), 북쪽으로는 본도(Pontus)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2) 톨리스토보이(Tolistoboi) 지역: 남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퀴벨레(Cybele) 신전이
있는 페시누스(Pessinus)가 그 중심지였다. 서쪽으로 비두니아와 브루기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3) 텍토사게스(Tectosages) 지역: 다른 두 부족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앙키라(Ancyra)
가 그 중심지였다. 앙키라는 갈라디아 전체의 중심도시로 여겨졌다.


4. 갈라디아인들의 특징
이들은 주위의 동양계 계통의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일종의 인종의 섬을 이루고 있었
다.18) 4세기 말에 제롬(Hieronymus)이 앙키라(Ancyra)에서 헬라어 외에 트리어(Trier)에서
들었던 말과 거의 다르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19) 곧, 서쪽의 갈리아와 소아시아의 갈
라디아를 다 방문했던 제롬은 이 두 지역의 언어의 관계를 페니키아인들의 언어와 그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사람들의 언어의 관계로, 또는 라틴어의 다른 방언들 사이의 관계로 설명
하였다.20) 이 사실은 최초의 정착 후 600년이 지난 후에도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갈리아 전쟁기」를 쓴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유럽의 켈트족에 대해 “켈트
족의 모든 나라는 온통 종교적인 일들에 몰두하였다”(natio est omnia Gallorum admodum
dedita religionibus)고 기록하였다.21) 이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켈트족(갈라디아인들)은


14) Lightfoot, Galatians, 7.
15) Lightfoot, Galatians, 7.
16) Greijdanus, Galaten, 21.
17) Lightfoot, Galatians, 6; Greijdanus, Galaten, 22.
18) Greijdanus, Galaten, 21.
19) Greijdanus, Galaten, 22.
20) Lightfoot, Galatians, 12.
21) J. Caesar, Bell. Gal. VI,16(Greijdanus, Galaten, 22에서 인용). 박광순 씨가 번역한 「갈리아 戰記」(서울:
범우사, 1998)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갈리아의 부족은 모두 종교에 깊이 젖어 있었고, 그 때문에 중병
에 걸린 사람이나 전쟁 또는 위험에 직면한 사람들은 제물로 산 사람을 바치거나 바치기로 맹세하고, 그 승려
가 이것을 집행했다. 생사가 걸린 일에는 사람의 생명을 바쳐야만 불멸의 신들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었기

브루기아인들의 정열적인 ‘퀴벨레 종교 의식’(the cult of Cybele)을 받아들였다. 이 종교는
기묘한 음악과 역동적인 춤과 같은 매우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서 단순한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런 종교 의식에 매료되었으며, 그들의 지도자들도 이내 페
시누스(Pessinus)에 있는 큰 신전에 원주민 지도자들과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22)
켈트족들은 이처럼 쉽게 받아들이고,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감수성이 크고, 무언가 알기를
사모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 반면에 불안정하고, 싸우기를
잘하고, 거래할 때 배반을 잘 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부족하고, 실패하면 쉽사리 낙심하는
것 등은 어두운 부분이다.23) 카이사르의 책에 의하면, 어떤 상인이나 여행자가 오면 갈리아
인들이 모여들어서 그를 붙들고 억지로 무슨 소식을 받아내려 했다고 한다.24) 또 후대의 어
떤 그리스의 수사가는 갈라디아인들에 대해, 순수한 헬라인들보다도 받아들이기를 더 열심
히 하고 빨리 하였다고 칭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이 어떤 철학자를 보는 순간,
마치 쇠가 자석에 달라붙듯이 그의 외투자락에 달라붙었다.25) 그러나 변덕스러움
(fickleness)과 불안정(instability)은 그들 성격의 큰 특징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
리아인들이 새로운 것 좇기를 좋아한다고 불평한다.26)
이러한 갈리아인들(켈트족)의 성격은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의 전체적 분위기와 잘 맞다.
그들은 처음에 사도 바울을 열렬히 환영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바울을 마치 ‘하나님의 사
자(使者)’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한다(갈 4:13). 할 수만 있었더
라면, 그들은 바울을 위해 눈이라도 빼어서 주었을 것이라고 한다(갈 4:15). 그러나 얼마 지
나지 않아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고 있었
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
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말하였다(갈 1:6). 감정적인 사람들은 이처럼 쉽게
받아들였다가 쉽게 떠나며 안정성이 없다. 이것이 갈라디아 사람들의 문제였으며, 이 점에
대해 바울이 놀라고 있는 것이다.


II. 남갈라디아설의 주장
윌리엄 램지는 그의 책 「로마 제국 안의 교회」에서 남갈라디아설에 대한 논거 열 가지를
제시하였다.27) 램지는 여기서 립시우스(Lipsius)가 제시한 논거들을 간단히 요약하는 형태
로 제시하는데, 이 중에는 근거가 부족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들도 더러
있다. 이 열 가지 논거를 여기에 다 열거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중의 여섯
개를 F. F. 브루스(F. F. Bruce)가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요약해 주고 있다.28) 그는
요약과 함께 간단한 반대논거를 덧붙이고 있다. 이 여섯 가지 논거를 반대논거와 함께 여기
때문에 부족의 이익을 위해 희생물을 공공연히 정해 놓았다. 큰 상(像)을 만들고, 살아 있는 사람의 사지를 가
는 가지로 묶은 후 불을 댕겨 그 불길에 휩싸인 채 죽게 했다. 도둑질이나 강탈, 그 밖의 다른 죄로 잡힌 자
의 형벌을 불멸의 신들이 특히 기뻐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런 범죄자가 없는 경우에는 죄 없는 자까지
희생물로 삼았다.”(p.212)


22) Greijdanus, Galaten, 22.
23) Lightfoot, Galatians, 14.
24) Julius Caesar, Bell. Gall. iv. 5(Lightfoot, Galatians, 15에서 인용).
25) Cf. Lightfoot, Galatians, 15.
26) Cf. Lightfoot, Galatians, 15.
27) Ramsay,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 97-102.
28) Bruce, Galatians, 9.

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바울은 대개 로마 제국의 1)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 그러나 그렇다면 갈라디아
주의 주민들은, 민족적 갈라디아인들을 포함해서, 바울에게는 ‘갈라디아인들’이었을
것이다.
2)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헬라어로 편지를 쓴다. -- 그러나 헬라어는 적어도
앙키라와 페시누스에서는 친숙했을 것이다.
3) 바울은 바나바에 대해 말하는데(갈 2:11ff.), 그는 남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개인적
으로 알려졌지만, 북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아는 한) 알려지지 않았다. --
그러나 바울은 바나바를 또한 고린도후서 9:6에서도 말하는데, 바나바가 고린도인들
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졌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4) 사도행전 20:4에 나오는 바울의 여행 동료들은, 아마도 그들은 교회 헌금을
예루살렘 구제를 위해 가지고 가는데, 남갈라디아 사람들(더베의 가이오와
루스드라의 디모데)을 포함하고 있지만 북갈라디아 사람들은 없다. -- 그러나
그러한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은 믿을 수 없다(고린도의 대표 이름도 없다).
5) 유대인 사절들의 존재는 북갈라디아보다 남갈라디아에서 더 그럴 듯하다. --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교회를 설립한 곳이라면 어느 도시든 방문하는 것을 그들의
임무로 삼았을 것이다.
6)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처럼’ 영접하였다(갈 4:14). 이것은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를 헤르메스(Hermes)와 동일시한 사건과 주목할 만한 일치를 보여 준다
(행 14:11ff.). -- 그러나 그러한 일치는 루스드라 사람들이 후에 바울을 죽이려고
공격한 사실(행 14:19)에 의해 좀 망가지고 말았다.
물론 브루스 자신도 조심스럽게 남갈라디아설을 지지하고 있긴 하지만,29) 램지가 제시한
논거들은 다 허술하며 반박될 수 있는 것임을 스스로 보여 주고 있다. 브루스 자신의 근거
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독일의 베르너 게오르크 큄멜(W. G. Kümmel)은 윌리엄 램지와 테오돌 찬에 의해 주도된
남갈라디아설의 주요 논거들을 다음 네 가지로 소개해 준다.30)
1) 바울은 그가 여행한 지역들을 지칭할 때 지역명이 아니라 ‘로마의 속주명’을 사용
하는 경향이 있다. 루가오니아와 비시디아도 갈라디아 주에 속하였다.
2) 갈라디아 교회들에는 거기에 태어난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것은 갈라디아 주에서만
해당된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지역의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3) 바울은 사도행전 20:4에 의하면 갈라디아 주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더베의 가이오,
루스드라의 디모데)를 헌금을 가져가는 자들 중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갈라디아 지역
출신의 대표들은 없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6:1에 의하면, 갈라디아에서도 헌금을
모았다.


29) Bruce, Galatians, 11-13.
30) Kümmel, Einleitung, 258f.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사람들의 활동은 4) 접근하기 어려운 소아시아 내륙 지역보다도
타우루스 산맥의 남쪽이 더 그럴듯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큄멜은 “이 논거들 중의 어느 것도 실제로 결정적이지는 않다.”(Aber
keines dieser Argumente ist wirklich durchschlagend)고 말한다.31) 그러면서 위 네 가
지 논거에 대해 각각 반대논거를 제시하고 있다.32)
조금 전에 말했듯이 독일의 테오돌 찬(Theodor Zahn)은 남갈라디아설을 강력하게 주장
하고 있다.33) 화란의 흐레이다너스(S. Greijdanus)는 이것을 9개의 논거로 정리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두 개 논거를 더 보태어 총 11개의 논거를 소개하면서, 이에 대해 일일
이 반대논거를 제시하면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34) 이것들을 여기에 소개하지는 않고,
다만 그의 결론만 소개하고자 한다. “제시된 이 모든 논거들은, 이 편지에서 말하는 갈라디
아의 교회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여행 때 소아시아에 세운 교회들이라는 것과 남갈
라디아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35)


III. 남갈라디아설의 주요 문제점
위에서 남갈라디아설의 주요 논거와 또 그에 대한 반대논거들을 조금 소개하였다. 여기에
서는 그런 논거들과 반대논거들을 다시 소개하지는 않겠다. 다만 남갈라디아설이 가지고 있
는 중요한 문제점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1. 사도행전 16:6-8에 보면, 사도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므로 “무시
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갈라디아’를 남부의 비시디아 지역으로 본
다면, 거기서 ‘무시아’36)로 바로 갈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금 ‘브루기아’와 ‘아시
아’를 지나가든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중간의 땅을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행
기가 없었으며, 중간에는 ‘브루기아’와 ‘아시아’가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남갈라디아’에서
‘무시아’로 바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에 ‘갈라디아’를 전통적으로 이해해 오던 대로
중부내륙 지역(갈라디아 지역)을 가리킨다고 보면, 거기서 ‘무시아’로 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37)


2. 사도행전 19:2에 보면 바울은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왔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31) Kümmel, Einleitung, 259.
32) Kümmel, Einleitung, 259.
33) Th. Zahn,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Wuppertal/Zürich: R. Brockhaus, 1994; Nachdruck der
3. Aufl., Leipzig, 1906/1907), 123-38.
34) Greijdanus, Galaten, 12-19.
35) Greijdanus, Galaten, 19.
36) ‘무시아’(Mysia)는 전통적인 ‘갈라디아’에서 북서쪽 방향의 해안 지역에 있으며 ‘드로아’가 중심 도시이다.
37) Kirsopp Lake는, 처음에는 Ramsay의 견해를 따르다가 나중에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루
트를 제안한다. 사도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북쪽으로 가서 브루기아를 통하여 갈라디아인들이 살고 있는 땅으
로 갔다. Laodicea -> Amorion -> Orkistos(분명히 갈라디아인들의 마을이다) -> Nakoleia -> Dorylaeum
(-> Troas). Cf. Bruce, Galatians, 11f.

앞의 에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와 18:23 , “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
였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갈라디아’가 남부 지역을 가리킨다면 ‘윗 지방’을 다녀왔다고
말하기가 어렵게 된다. ‘동쪽에서’ 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이 경우엔 아마도 라오디게아를
거쳐서 왔을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가 아나톨리아 중부내륙 지역을 가리킨다면 ‘윗 지
방’을 다녀왔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게 된다.


3. 남부 지역은 ‘밤빌리아’, ‘비시디아’,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의 지명을 가지고 있
었으며,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행 13:13,14, 14:24). 그런데 이런 지명을 두고
서 이들 지역을 ‘갈라디아’라고 불렀다면 수신자들에게 혼란이 생겼을 것이다.38)


4. 베드로전서 1:1에 보면 베드로는 수신자들을 열거할 때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
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한다. 아나톨리아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본도
(Pontus) 바로 밑이 전통적인 갈라디아 지역이다. 그리고 그 갈라디아 동쪽이 갑바도기아이
다. 따라서 베드로는 ‘본도’ 바로 남쪽에 ‘갈라디아’가 있었다고 본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갈라디아’가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남쪽 지역을 뜻했다면,39) 북쪽 해안 지역인 ‘본도’
에서 남쪽 지역인 ‘갈라디아’로 뛰어넘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다면 차라리
본도 -> 갑바도기아 -> 갈라디아 -> 아시아 -> 비두니아의 순서가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
다(그러면 하나의 원을 그리는 구조가 된다).
물론 베드로가 꼭 지리적 위치를 따라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본도, 갈라디아, 갑
바도기아”를 말한 다음에 뛰어 넘어서 “아시아, 비두니아”를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본도’
에서 중부내륙 지역을 뛰어넘어서 ‘남쪽 갈라디아’를 말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동북쪽으로
올라가서 ‘갑바도기아’를 말하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램지의 연구에
의하면, ‘본도’(Pontus)의 상당한 부분이 주후 2-35년경에 로마의 ‘갈라디아 주’로 편입되었
다고 한다. 그래서 갈라디아 주에 편입된 본도 지역을 ‘갈라티쿠스’(Galaticus)로 불렀다고
한다.40) 그렇다면 ‘본도’도 대부분은 행정구역상으로 ‘갈라디아’인데, ‘본도’를 별도로 말했다
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본도’와 ‘비두니아’는 당시에 행정구역상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었는데,41) 여기에는 따로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본도’ 다음에 나오는 ‘갈라디아’
는 행정구역이 아니라 지역으로서의 ‘갈라디아’(중부내륙 지역)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5. 남쪽 지역 사람들은 인종적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니다. 갈라디아인들은 머리가 노
랗고 눈이 파란 ‘켈트족’이다. 그런 켈트족들이 원래 마게도냐와 데살리아 지역에 살다가 아
나톨리아에 들어와서 브루기아 지역에 살고 있다가, 후에 버가모의 아탈루스(Attalus) 왕에
의해 중부내륙의 갈라디아 지역으로 밀려나서 그곳에 살게 된 것이다. 남쪽 지역에는 인종
적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따라서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


38) Cf. J. van Bruggen, Galaten (Kampen: J. H. Kok, 2004), 15.
39) 물론 로마의 행정구역상의 ‘로마 주’로 보면 중부내륙 지방을 포함하여 남북으로 걸쳐 있는 넓은 지역이 되
겠으나, 남갈라디아설 주장자들은 사도 바울이 북쪽 갈라디아에는 간 적이 없다고 한다. 물론 갈라디아서 기
록 후에 베드로전서가 기록될 때까지의 사이에(약 10여년?) 교회들에 의해 전도가 되었다고 볼 수는 있다. 그
래서 만일 여기의 ‘갈라디아’를 로마의 속주 갈라디아로 보면 중부내륙을 포함하여 남북으로 긴 지역을 가리
킴으로 소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게 된다.
40) Ramsay,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 14.
41) S. Greijdanus, De brieven van de apostelen Petrus en Johannes, en de brief van Judas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29), 11.

베의 사람들을 인종적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cf. 갈 3:1).


6. 갈라디아인들의 성격은 정열적이고 감정적이었다. 이들은 쉽게 마음을 열고 환대하다가
쉽게 떠나서 이단들의 미혹에 빠지고 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쉽게 마음을 열었
다가 쉽게 떠나는 갈라디아인들의 성격은 페시누스(Pessinus)를 중심으로 하여 퀴벨레
(Cybele) 신을 섬기던 중부내륙 지역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잘 어울린다. 남부 지역 사람
들의 경우에는 맞지 않다. 남갈라디아설에 의하면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특징들을 바로 이해
할 수 있는 열쇠들을 놓치게 된다(특히 1:6, 3:1-4, 4:13-15 등).


7. 그 외에도 판 브루헌(Van Bruggen) 교수에 의하면, 남갈라디아설을 취하면 연대와 관련
하여서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고 한다.42) 갈라디아서 4:13에서 바울은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한다. 여기서 ‘처
음에’라고 한 것을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를 적어도 두 번 방문하였다고 한다.43) 그러면 갈
라디아서 2:1의 “그리고 나서 14년 후에”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바울의 연대에 피할 수 없
는 어려움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의 ‘토 프로테론’을 ‘전에’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
기 때문에 이것은 좀 복잡한 문제이다.


8. 마지막으로 램지의 논거들에 대해서는 반대논거들을 제시하면서 신뢰성이 없다고 본 F.
F. 브루스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들’(hard facts)이라고 제시한 논거를 살펴보면, 그 핵심
주장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곧,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의 목적이 사도행전
15:36에 있는 대로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브루스는 이 목적을 따라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서쪽으로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도행전 16:6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루스드라’를 떠난 후에 통과한 지역 곧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이 위치한 땅을 의미한다고 본다.44)
그러나 브루스의 이러한 추론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루
스드라’에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갔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45)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러


42) Van Bruggen, Galaten, 15f.
43) 그러나 ‘토 프로테론’은 단순히 ‘전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문맥상 여기서는 맞지 않다고 한다.
Cf. Greijdanus, Galaten, 4. Van Bruggen 교수는 이 Greijdanus의 견해를 이어받아서 여기서 자기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Greijdanus의 이 견해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Greijdanus는 ‘첫 번째에는’
육신의 약함을 인하여 복음을 전했지만 ‘두 번째’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여기서 자세히 논하
기는 어렵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Greijdanus는 여기서 갈 4:13-15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 의하면, 바울은 ‘처음에는’ 육신의 약함을 인하여 복음을 전했지만 ‘두 번째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이해
한다. 그리고 이 두 번째의 복음 전파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가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13-14절에서
바울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약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였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을 뜨겁
게 환영하였음을 말한다. 그런데 15절에서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말한다. “너희의 복이
어디 있느냐?”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그의 전의 복음 전파 때의 갈라디아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과 지금의 냉
랭한, 변화된 상황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첫 번째 복음 전파와 두 번째 복음 전파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갈라디아 교회들을 꼭 두 번 방문하였다고 볼 필요는 없
고,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한 번 방문했다고 볼 수도 있다.


44) Bruce, Galatians, 12.
45) 그런데도 불구하고 Ronald Fung은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남갈라디아설’을 주장할 때 핵심 논거 중의
하나로 F. F. Bruce의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아 바울이 북갈라디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면 ‘루스드라’에
서 출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Cf. R. Y. K. Fung,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8), 2.

디모데를 제자로 삼은 후에 여러 “ 성으로 다녀갔다”고 말한다(행 16: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고 말한다(4-5절). 따라서 바울은
‘루스드라’를 떠난 후에 ‘여러 도시들’(타스 폴레이스)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을 알 수 있
다. 이 ‘여러 도시들’ 가운데는 물론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6절에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
라디아 땅으로 다녀가”라고 말한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루스드라’를 떠나 ‘이고니온’과 ‘비
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아시아의 경계’까지 갔으나, 장애물이 있어서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46) 그래서 그들은 갈라디아의 서쪽에 있는 ‘브루기아’를 거쳐 ‘갈
라디아’로 갔다.47) 그들은 ‘갈라디아 지역’을 지나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성령이 허락지 않아서 ‘드로아’로 내려간 것이다(7-8절).


결 론
따라서 윌리엄 램지 이후로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남갈라디아설’은 근거가 약한 가설임
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 자체의 증거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의 성
격과도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갈라디아 사람들의 열정적이고 변덕
스러운 성격은 켈트족(갈라디아 사람들)의 성격과 잘 부합하는 것이며, 비시디아나 남쪽의
다른 민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램지의 스승이었던 J. B. 라이트푸트가
잘 설명하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자세한 기록이 없다고 해서 바울이 ‘갈라디아 땅’으로 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구절들(행 16:6, 18:23)을 무시하거나 다르게 해석하면 안 된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모든 여정을 자세히 다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간단
히 기록하고 있으며, 중간의 수많은 사건들과 활동들이 생략되고 있다. 예를 들어 3차 선교
여행 때 사도 바울이 헬라에 이르러 석 달을 머물렀는데(행 20:2-3), 이 기간의 활동에 대
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 후의 빌립보 방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6절). 따라서 구체
적인 기록이 없다고 해서 사실 자체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것이다. 누가는 바울의 소아시아
중부내륙 지역에서의 복음전파 활동에 대해 간단히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
시아 앞에 이르렀다”고 간단히 말한 것이다(행 16:6-7). 이것은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에서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http://cafe.daum.net/mrbible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 방문과 관련하여 중요한 논점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300
년 전에만 해도 이름도 없던 ‘남갈라디아설’이 윌리엄 램지 이후 불과 100여년만에 마치 정
설(定說)처럼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새로운 주장의 빠른 전파도 놀랍지만, 더 이상 그런
주장의 논거를 따져 보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놀랍다. 우리는 어떤 주
장이 아무리 널리 퍼져 있고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논거가 든든한지, 확실한 기
초 위에 서 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논거가 빈약하고 유지될 수 없다면 과
감하게 그 주장을 버리고 다시금 성경에 합당한 견해를 찾아야 할 것이다.


46) Van Bruggen, Galaten, 21.
47) Van Bruggen, Galaten,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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