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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벗이라는 말의 무게/김한원목사

작성자grace|작성시간26.06.23|조회수5 목록 댓글 0

<<하나님의 벗이라는 말의 무게>>

너무 기니 3문장 요약:
· 이사야 41장 8절의 "하나님의 벗"은 명사 같지만 본래 동사의 분사형(아하브)이며, 문법적으로는 "나를 사랑하는 자",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목적어적 이해가 더 가능성 높다.

· 칠십인역·불가타·KJV의 번역과 은혜를 강조하려는 신학적 정서가 이 표현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쪽으로 굳혔지만, 문맥으로 문법을 누를 것이 아니라 문법을 먼저 정직하게 세울 때 본문 이해가 교정된다.

· 하나님의 벗은 동등한 친구가 아니라 그분께 충성으로 응답하는 자이니, 이 표현은 일방적 사랑받음이 아니라 부르심과 응답이 마주 서는 언약 관계로 다시 읽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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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1장 8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시며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칭하신다. 우리말 성경은 대개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옮긴다. 야고보서 2장 23절은 이 전통을 받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어졌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신앙생활 안에서 매우 따뜻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이 구절을 "하나님이 나를 친구로 삼아 주셨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다"는 은혜의 선언으로 읽는다.

그 읽기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표현의 히브리어 원문 אֹהֲבִי(오하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 온 의미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바 사이에 미묘한, 그러나 묵상할 가치가 있는 간격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글은 그 간격을 짚어 보려는 시도다. 기존의 이해가 틀렸다고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단어의 문법을 정직하게 세워 볼 때 오히려 하나님의 벗이라는 말이 얼마나 더 깊은 곳을 가리키는지를 함께 보려는 것이다.


오해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 분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의 분사형이다

오하비라는 형태를 풀어 보면 오해의 첫 단추가 어디서 끼워졌는지 보인다. 이 단어는 "사랑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하브(אָהַב)의 칼 능동 분사에 "나"를 가리키는 대명사 접미사가 붙은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 분사라는 데 있다. 분사는 명사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동사다. "벗"이라는 명사로 옮기는 순간, 우리는 이 단어가 품고 있는 동사의 힘, 곧 "사랑한다"는 행동과 그 행동의 방향을 잃어버린다. 오해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살아 있는 동사의 분사형을 멈춰 선 명사로 고정해 버린 것이다.

분사가 동사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곧바로 질문이 생긴다. 그 사랑은 누가 누구를 향한 것인가. 거기 붙은 "나"는 사랑하는 주체인가, 사랑받는 대상인가. 우리말로 옮기면 두 길이 갈린다. 하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여기서 "나"는 사랑이라는 행동의 대상이다.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다른 하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로, 여기서 "나"는 사랑하는 주체다.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신다.

전통적인 "벗"이라는 번역과 그것을 둘러싼 신앙적 정서는 대체로 둘째 방향,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해 품으신 사랑 쪽으로 기운다. 그러나 분사가 동사의 분사형임을 기억하고 그 문법을 차분히 따라가면, 본문이 더 자연스럽게 가리키는 쪽은 첫째,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이다.


문법이 가리키는 방향

분사에 붙는 대명사 접미사는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다. 명사처럼 소유를 나타낼 수도 있고, 분사가 지닌 동사적 행동의 목적어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형태만 보고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칼 능동 분사처럼 동사의 행동성이 강하게 살아 있는 경우에는, 접미사가 명사적 소유격보다 동사적 목적어로 기능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그들을 먹이고 있다"라는 분사에서 거기 붙은 접미사는 분명히 행동의 대상이다. 능동 분사가 묘사하는 동작이 살아 있을수록, 거기 붙은 접미사는 그 동작이 향하는 대상을 가리킬 확률이 높아진다.

이 원리를 오하비에 적용하면, 가장 자연스러운 독해는 "나를 사랑하는 자",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쪽이다. 확률적으로 목적어적 이해가 우위에 있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같은 분사가 2인칭 접미사와 함께 쓰인 역대하 20장 7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영원히 주를 사랑하는 자"로 명시하여,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사랑하는 방향을 분명히 보여 준다.

여기서 한 가지 결을 더 보탤 필요가 있다. 아하브라는 동사는 고대 근동의 계약 문맥에서 단순한 내면 감정이나 사적 호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종주와 봉신의 관계에서 상대에게 충성을 다하고, 그 관계를 삶의 우선순위로 삼으며, 책임을 수행하는 의지적 신의의 언어로 쓰일 수 있다. 이 점에서 아하브는 헤세드(חֶסֶד)와 낱말 뜻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언약적 신실함과 충성, 관계적 헌신이라는 의미의 세계에서 깊이 접촉한다. 둘 다 관계를 끝까지 붙드는 신실함의 세계에 속한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하는 자"는 단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정서적 애착을 느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충성을 수행하고, 그 관계를 자기 삶의 중심에 둔 사람이라는 선언이다. 신명기에서 아하브의 분사형이 하나님의 "미워하는 자" 또는 "원수"와 대조되며 언약의 동반자를 가리키는 정형 표현으로 거듭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반대로 이해하게 되었는가

문법이 목적어적 이해 쪽으로 기우는데도, 신앙의 자리에서 이 표현은 자주 반대 방향, 곧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쪽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왜곡이 일어난 지점과 이유를 정직하게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번역의 매개다. 앞서 말한 대로 "벗"이라는 우리말 명사는 동사의 분사형을 명사로 굳히면서 사랑의 방향을 지워 버린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하는 방향성은 흐려지고, 친밀한 관계라는 정적인 그림만 남는다. 그 빈자리를 우리의 신앙적 기대가 채운다.

둘째는 고대 번역들의 해석적 선택이다. 이사야 41장 8절을 헬라어 칠십인역은 호 에가페사(ὃν ἠγάπησα), 곧 "내가 사랑한 자"로 옮겼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셨다는 방향이다. 라틴어 불가타 역시 이 자리를 아미쿠스 메우스(amicus meus), 곧 "나의 벗"으로 옮겨 능동인지 수동인지의 방향을 명사 안에 묻어 버렸다. 영어권에 깊은 영향을 끼친 KJV가 "Abraham my friend"로 옮긴 것도 이 라틴어 전통의 자장 안에 있다. 칠십인역과 불가타, 그리고 KJV로 이어지는 흐름은 단순한 직역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해석이 들어간 번역이며, 이후 헬라어와 라틴어와 영어를 통해 성경을 읽은 전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다"는 독법의 한 뿌리가 여기 있다. 그러나 번역이 한 방향을 택했다고 해서 원문의 문법까지 그 방향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순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 문맥이 문법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을 먼저 정직하게 세울 때 문맥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비로소 교정된다.

셋째는 은혜를 강조하려는 선한 신학적 의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복음의 핵심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 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능동적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본능적으로 불편하게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자"조차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 무의식중에 미끄러뜨린다. 의도는 경건하지만, 그 결과 본문이 실제로 증언하는 인간 편의 응답적 사랑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교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정의 방식이다. 우리는 흔히 두 극단 사이를 오간다. 한쪽은 문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며 문법을 신학적 결론에 맞추어 휘는 태도이고, 다른 한쪽은 문법이 전부라며 본문이 놓인 신학적 세계를 무시하는 태도다. 건강한 교정은 그 사이에 있다.

올바른 순서는 이렇다. 먼저 분사가 동사의 분사형임을 기억하고 그 문법을 정직하게 세운다. 오하비는 문법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이 더 가능성 높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다음, 그렇게 세운 문법 위에서 문맥을 다시 읽는다. 그러면 놀랍게도 문맥에 대한 이해 자체가 더 풍성해진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게 만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해 보인 언약적 충성과 신실함은, 그를 먼저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문법을 바로 세우면, 하나님의 벗이라는 말은 일방적으로 사랑받기만 하는 수동적 관계가 아니라, 부르심과 응답이 마주 서는 살아 있는 언약 관계로 다시 보인다. 사랑받았기에 사랑하는 자, 택함받았기에 충성하는 자, 그것이 하나님의 벗이다.

성경 본문은 이러한 양방향성을 의도적으로 품기도 한다. 히브리어 문법이 주격으로도 목적격으로도 읽힐 수 있는 자리에서, 그 모호함이 오히려 야훼와 사람 사이의 상호적 관계를 비추는 경우가 있다. 요나 2장 8절의 "그들의 헤세드", 시편 102편 13절의 "주를 기억함"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양방향성은 문법을 흐려서 얻는 것이 아니라, 문법을 정직하게 세운 뒤에야 비로소 신학적 깊이로 드러난다. 모호함은 문법을 포기할 핑계가 아니라, 문법을 끝까지 따라간 자에게 열리는 지평이다.


벗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여기서 한 가지 더 경계할 것이 있다. 벗이라는 말이 주는 친근함을 우리는 종종 동등함으로 오해한다. 친구이니 내가 하나님과 맞먹어도 된다고 여기거나, 친구이니 결정은 내가 내리고 하나님은 무조건 내 편을 들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는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벗은 동급의 친구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티끌과 재라 부르면서도 그분과 마주 대화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벗이라는 말의 따뜻함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이지, 우리가 그분과 동등해졌다는 증서가 아니다. 오히려 앞서 본 문법이 일러 주듯, 하나님의 벗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충성을 수행하는 자, 곧 자기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자기 삶의 우선순위로 삼는 자다. 친구이기에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이기에 더욱 그분께 신실한 것이다. 사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벗을 다시 묵상하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말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한다. 하나는, 이 우정이 우리 편의 능동적 사랑과 충성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문법은 우리에게 사랑받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서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이 결코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언약 안으로 이끄셨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쪽으로만 기울여 읽을 때, 우리는 은혜는 얻지만 응답을 잃는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쪽으로만 읽을 때, 우리는 응답은 얻지만 그 응답을 가능하게 한 은혜의 뿌리를 잊는다. 문법을 정직하게 세운 자리에서 비로소 둘은 하나로 묶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고, 그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를 먼저 택하셨기 때문이다.

한 단어의 문법을, 그것도 분사가 동사의 분사형이라는 사실 하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사소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정직함이 우리의 신앙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하나님의 벗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단지 위로를 주는 표현이 아니라, 부르심에 충성으로 응답하라는 초대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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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자료 분석과 정리에는 로고스가 수고해 주었다. 주로 스터디어시스턴트가 많은 도움이 되었음.

아래 그림은 아브라함과 세 천사 (Pieter Lastman 작, 1614년) - 작자가 램브란트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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