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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마음" 읽기 / 김한원교수

작성자grace|작성시간26.06.23|조회수8 목록 댓글 0

<<로마서의 “마음” 읽기>>



마음이라는 말의 그늘

성경을 오래 읽어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이라는 단어와 친숙하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이 익숙한 구절들이 우리 신앙의 언어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로마서를 다시 읽으면서, 이 친숙함이 도리어 우리를 어떤 그늘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의 로마서에서 “마음”으로 옮겨진 자리를 헬라어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기에는 한 단어가 아니라 적어도 세 단어가 숨어 있다.
가장 많은 것은 카르디아(καρδία), 그다음이 누스(νοῦς), 그리고 한 번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다.
세 단어가 모두 “마음”이라는 하나의 우리말 옷을 입고 있다.
같은 옷을 입었다고 해서 같은 몸은 아니다.
오히려 그 옷이 너무 잘 맞는 바람에, 우리는 그 안에 서로 다른 세 사람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음은 본래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가 “마음”이라고 말할 때, 한국어 화자의 가슴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이 아프다, 마음을 주다, 마음이 따뜻하다, 마음이 무겁다.
이 표현들이 알려 주듯, 우리에게 마음은 일차적으로 ‘느끼는 자리’다.
정(情)이 머무는 곳, 사랑과 슬픔과 그리움이 오가는 곳, 곧 심정(心情)의 영역이다.

이것은 한국어가 가진 고유한 결이며, 그 자체로 아름답다.
문제는 이 아름다운 결이 헬라어의 어떤 단어와는 잘 맞고, 어떤 단어와는 엇나간다는 데 있다.
카르디아를 “마음”으로 옮길 때, 그 번역은 상당히 성공적이다.
히브리어 레브(לֵב)의 전통을 이어받은 카르디아는 단지 감정의 자리가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정서와 신앙적 결단이 모두 솟아나는 인간 내면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피시는 곳도 마음이요(로마서 8장 27절), 사랑이 부어진 곳도 마음이며(5장 5절), 믿음이 자리 잡는 곳도 마음이다(10장 9절~10절).
이만큼 통합적인 단어이기에, 우리말 “마음”의 폭넓음이 오히려 카르디아를 잘 담아낸다.

그런데 바로 그 성공이 함정이 된다.
카르디아를 잘 담아낸 “마음”이라는 그릇이, 정작 성질이 다른 누스와 에피그노시스까지 같은 그릇에 담아 버리는 것이다.
같은 그릇에 담겼으니 같은 것이려니 한다.
여기서 오해가 시작된다.



누스, 이성으로 인정한다는 것

누스는 지성이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정신의 기능이다.
조금 풀어 말하면 이렇다.
사람의 속에는 무언가를 느끼는 힘도 있고, 무언가를 헤아리고 따져서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힘도 있다.
카르디아가 이 둘을 모두 품은 ‘속사람 전체’, 곧 내면이라는 ‘집’이라면, 누스는 그 집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을 맡은 한 방’이다.
그래서 누스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마음”보다 ‘생각, 정신, 사고방식, 이성’이 훨씬 가깝다.

로마서 7장 25절을 보자.
“그러므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읽는가.
한국어의 직감으로 읽으면,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온 마음을 바쳐 섬긴다’는 헌신의 고백처럼 들린다.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결의의 언어로 읽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쓰인 단어는 누스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성으로 하나님의 법을 옳다고 인정하고 동의한다’는 뜻이다.
뒤에 이어지는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와의 대조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이 대조는 ‘뜨거운 마음 대 차가운 육체’의 대립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옳다고 인정하는 이성 대 그것을 거스르는 지체’의 대립이다.
바울이 절규하는 것은 느끼는 것과 사는 것의 분열이 아니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분열이다.
나는 분명히 안다, 옳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한다.
이것이 7장의 깊은 탄식이다.
그런데 누스를 “마음”으로만 받으면, 이 인식과 행위의 분열이 슬그머니 감정과 삶의 분열로 미끄러진다.
바울의 칼날 같은 자기 인식이 무뎌지는 것이다.

12장 2절은 더욱 그러하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 구절의 “마음” 역시 누스다.
이것을 ‘마음가짐을 다잡고, 결심을 새로이 하라’는 정서적 분발로 읽으면, 그 깊이가 도덕적 다짐 수준으로 쪼그라든다.
누스의 갱신은 마음을 고쳐먹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보고 분별하는 가치판단의 기준 자체, 사고의 틀 자체가 새로 짜이는 일이다.

여기서 ‘사고의 틀’이라는 말을 조금 더 친절히 풀어 보자.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나름의 안경을 쓰고 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하찮은지,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자기도 모르게 가늠하는 기준의 틀이다.
대개 이 틀은 우리가 자란 시대와 문화, 곧 “이 세대”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끼워 준 안경이다.
누스의 갱신이란 바로 이 안경을 바꾸어 끼는 일이다.
결심을 단단히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δοκιμάζειν)” 된다고 바울은 말한다.
여기서 ‘분별한다’는 헬라어 도키마조는 본래 금속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시험하여 가려낸다는 뜻이다.
즉 새로워진 누스란,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인지를 시험하고 가려낼 수 있는 새 눈을 갖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마음을 고쳐먹는다’와 ‘세상을 분별하는 눈이 새로 열린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11장 34절도 다시 보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여기서 “주의 마음”을 하나님의 ‘속마음, 심정, 애틋한 속내’로 읽기 쉽다.
그러나 이 단어도 누스이며, 그 뜻은 하나님의 ‘생각, 지혜, 뜻, 계획’이다.
인용된 이사야의 맥락 역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과 경륜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심정이 깊어 알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판단이 너무 높아 누구도 그 사고의 깊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찬탄이다.
14장 5절의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정서적 확신이 아니라 ‘각자 자기 판단으로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라’는 이성적 판단의 요청이다.



에피그노시스, 안다는 것의 책임

오해가 가장 깊은 자리는 에피그노시스다.
이 단어는 애초에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단어의 생김새부터 보자.
헬라어에 그노시스(γνῶσις)라는 말이 있다.
‘앎, 지식’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에피(ἐπί)라는 접두사가 붙어 에피그노시스가 된다.
이 에피는 ‘위에, 더하여, 충분히’라는 뜻을 보태는 말이라서, 그노시스가 그냥 ‘앎’이라면 에피그노시스는 ‘제대로 된 앎, 분명하고 충분한 인식, 똑바로 알아차림’이 된다.
스쳐 지나가듯 아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파악하여 그렇다고 인정하는 데까지 이른 앎이다.
어디에도 ‘마음’이라는 정서의 그림자가 없다.

그런데 로마서 1장 28절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듣는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려, 정 주지 않으려, 곁에 두지 않으려 했다’는 정서적 거부로 듣는다.
마음이 식어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로 듣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직역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참된 지식으로 인정하기를 합당하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애정의 철회가 아니라 인식의 거부다.
정을 거두어들인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를 의도적으로 마다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음에도 그 앎을 거절한 책임이 여기 있다.

이 점이 결정적인 이유는, 1장 전체가 ‘앎의 책임’이라는 한 줄기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21절은 “하나님을 알되(γνόντες)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로 시작한다.
분명히 알았다.
그런데 그 앎에 합당하게 살지 않았다.
그 흐름이 28절에 이르러 “하나님을 인식하기를 마다함”으로 귀결된다.
죄의 뿌리를 바울은 ‘마음이 식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함’에서 찾는다.
인간의 타락은 감정의 냉각이 아니라 인식의 반역이다.
이 인식론적 축, 곧 ‘알 수 있었고 알았으나 알기를 거부한’ 책임의 구조가, “마음”이라는 한 단어 때문에 통째로 사라질 위험에 놓인다.

‘인식론적’이라는 말이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사람이 죄에 빠지는 길에는 두 갈래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마음이 차가워져서, 사랑이 식어서” 멀어졌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알면서도, 진리를 똑똑히 알 수 있었으면서도, 그 앎을 일부러 밀어냈다”는 이야기다.
바울이 1장에서 들려주는 것은 두 번째 이야기다.
그래서 변명할 수 없다고 그는 못 박는다(1장 20절,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알고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의 책임’이며, 에피그노시스라는 단어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다.

3장 20절의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에피그노시스)이니라”, 10장 2절의 “올바른 지식(에피그노시스)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도 같은 계열이다.
이 모든 자리에서 문제는 ‘느낌’이 아니라 ‘앎’이다.



형용사도 우리를 시험한다

명사만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검색해 보니 로마서에는 “마음”과 함께 붙어 다니는 형용사와 동사도 있는데, 이것들 역시 우리말의 정서적 결을 따라가다 보면 본뜻을 비껴가기 쉽다.

11장 20절을 보자.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여기 “높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휩셀로스(ὑψηλός)다.
본래 ‘높은’이라는 뜻이지만, 마음과 결합하면 단순히 ‘이상이 높다, 포부가 크다’는 긍정적 의미가 아니다.
이 자리에서는 ‘오만하다, 거만하다, 우쭐대다’는 뜻이다.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큰 뜻을 품지 말라’가 아니라 ‘교만한 생각을 품지 말라’이다.
이방인 신자들이 꺾여 나간 가지(유대인)를 보며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우쭐대는 그 태도를 겨냥한 말이다.
우리말 “높은 마음”은 자칫 ‘고결한 뜻’처럼 들릴 수 있으나, 본문은 정반대로 ‘콧대 높은 교만’을 가리킨다.
한 글자 차이로 칭찬이 경고로 뒤바뀌는 셈이다.

12장 16절도 보자.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여기 “마음을 같이하며”의 바탕에는 프로네오(φρονέω)라는 동사가 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같은 감정을 느끼다’가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생각하다, 같은 태도와 지향을 갖다’에 가깝다.
즉 정서적으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권면을 넘어, 생각의 방향과 삶의 지향을 함께 맞추어 가라는 더 깊은 요청이다.
바로 뒤에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는 말이 이어지는데, 여기서도 ‘마음을 둔다’는 것은 감정을 둔다기보다 ‘무엇을 추구하고 어디를 지향하느냐’의 문제다.
프로네오는 12장 2절의 누스의 갱신과 깊이 맞닿아 있다.
새로워진 생각의 틀을 가진 사람은, 높은 자리를 좇는 대신 낮은 자리를 향해 자기 지향을 맞추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형용사 휩셀로스와 동사 프로네오까지 들여다보면, 로마서가 “마음”이라는 말 주변에서 한결같이 묻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지향하느냐’이다.



세 겹의 착시를 넘어서

이제 정리해 보자.
한국어 “마음”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적어도 세 겹의 착시로 이끈다.
첫째, 누스를 정서로 바꾸어 ‘이성의 인정’을 ‘진심의 다짐’으로 읽게 한다.
둘째, 같은 누스를 결심으로 바꾸어 ‘사고 틀의 재편’을 ‘마음가짐 다잡기’로 축소한다.
셋째, 에피그노시스를 애정으로 바꾸어 ‘참된 인식의 거부’를 ‘사랑하지 않음’으로 옮겨 놓는다.
여기에 형용사 휩셀로스와 동사 프로네오까지 더하면, ‘교만한 생각’이 ‘고결한 뜻’으로, ‘같은 지향을 가짐’이 ‘사이좋은 감정’으로 미끄러지는 또 다른 착시가 보태진다.

이 모든 착시에는 공통의 방향이 있다.
모두 ‘인지(認知)에서 정서(情緖)로’ 미끄러진다.
다시 말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인정하고 지향하는 일’이 자꾸만 ‘느끼고 사랑하고 정 주는 일’로 바뀌어 읽힌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토록 힘주어 말하는 ‘앎과 인정의 책임’, ‘분별과 판단의 갱신’, ‘지향의 방향’이라는 인지적 축이, 번역어 하나 때문에 정서적 축으로 기우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정서가 신앙에서 가볍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 그것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다만 바울이 그 자리에서 말하려던 것이 ‘느낌’이 아니라 ‘앎’이고 ‘지향’이었다면, 우리는 그가 말한 것을 그가 말한 대로 들어야 한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을 그의 입에 넣어 주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원어를 향한 우리의 겸손한 자세가 요청된다.
헬라어를 밝히 알지 못해도 좋다.
다만 우리가 읽는 “마음”이라는 단어 뒤에 서로 다른 얼굴들이 서 있을 수 있음을, 적어도 의심할 줄은 알아야 한다.
좋은 주석 하나, 원어를 밝혀 주는 도구 하나를 곁에 두고, “여기 이 마음은 어느 마음일까” 하고 한 번 더 물어보는 것.
그 한 번의 물음이 본문의 결을 살린다.

성경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결국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 앞에 더 정직하게 서는 일이다.
익숙함은 은혜이지만, 때로 익숙함이 우리의 눈을 가린다.
“마음”이라는 그 정겨운 단어가, 어쩌면 우리가 가장 자주 머무는, 그러나 가장 자주 오해하는 그늘일지도 모른다.
그 그늘을 알아차리는 순간, 로마서는 우리에게 한 겹 더 깊은 얼굴을 보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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