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팔공산(八公山)에 수도(修道) 주석(駐錫)한 고승(高僧)
1. 원효(元曉)
2. 의상(義湘)
3. 심지(心地)
4. 인혜(因惠)
5. 원종국사(元宗國師) 찬유(璨幽)
6.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지눌(知訥)
7.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8. 원진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
9.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
10. 자정국사(慈淨國師) 자안(子安)
11.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
12. 홍진국사(弘眞國師) 혜영(惠永)
13.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
14. 원참(元?)
15. 우운(友雲)
16. 부용(芙蓉) 운관(雲觀)
17. 환적(幻寂) 의천(義天)
18. 월하(月荷) 계오(戒悟)
19. 유정(惟政)
20. 영파(影波) 성규(聖奎)
21. 인악(仁岳) 의소(義沼)
22. 김문옥(金文玉)
1. 고려국(高麗國) 보조국사(普照國師) 법어(法語
2. 진각국사(眞覺國師) 어록(語錄)
1. 부인사(符仁寺)
2. 동화사(桐華寺)
3. 파계사(把溪寺)
4. 은해사(銀海寺)
5. 송림사(松林寺)
6. 기타(其他)의 사찰(寺刹)
7. 없어진 사찰(寺刹)
제 5 장 팔공산(八公山)과 불교(佛敎)
팔공산은 한국에 있어 제일가는 불교성지다. 팔공산에는 성간자(聖簡子)를 봉안하던 동사(桐寺;藪), 석굴암(石窟庵;제2석굴암이라 한다),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을 봉안한 부인사(符仁寺), 대장경낙성대법회(大藏經落成大法會)를 열었던 운해사(雲海寺;해안평에 있었던 銀海寺의 고려시대 절이름),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이던 미리사(美理寺), 석가진신사리(釋迦眞身舍利)를 봉안한 동수원당(桐藪願堂;지금의 동화사 비로암),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하여 도를 증도(證道)한 오도암(悟道庵)ㆍ불굴사(佛窟寺),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수도하여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한 거조사(居祖寺)와 온 산 도처에 조성된 석불 불상으로 장식된 약사신앙(藥師信仰)의 중심지와 송림사(松林寺) 전탑(塼塔)과 사리(舍利)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불교의 사원, 탑파(塔婆), 부도(浮屠), 불상(佛像)으로 수놓인 불국(佛國)이다.
팔공산에 불교가 들어와 개산(開山)된 것은 신라시대부터다. 팔공산은 한국 불교와 역사를 같이해 내려왔기에 여기서 불교사를 한번 훑어보기로 하겠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오기는 384년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이다. 그 후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불교가 전해졌다.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에 의하여 일선군(一善郡)에 전해져 도리사(桃李寺)는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 되었다. 그 후 527년 원종왕(元宗王;法興王) 14년에 이차돈의 순교(殉敎)로 불교가 공인 홍포(弘布)되었고 영흥사(永興寺), 흥륜사(興輪寺) 등이 칠처가람(七處伽藍)이라는 성지(聖地)에 세워졌고, 원종왕(元宗王)은 흥법(興法)하여 법흥왕(法興王)이 되고 스님이 되어 법운(法雲)이라 했다. 진흥왕(眞興王)도 삼맥종(三麥宗)이란 스님이었다. 이흥왕(二興王)의 불교진흥으로 신라의 국교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신라는 호국불교를 이룩했다. 왕즉불(王卽佛)이라는 사상은 성골왕시대(聖骨王時代)를 개막하고 신라불국토(新羅佛國土思想)을 창조하여 동천축(東天竺)을 자부했다. 신라의 왕가는 석가족(釋迦族)이며, 불(佛)의 가족이요, 천축찰제리종왕(天竺刹帝利種王)이란 성골설(聖骨說)을 창조하고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座石)이 있는 전불(前佛)시대의 불교성지인 황룡사(皇龍寺)에 황룡사장륙불상(皇龍寺丈六佛像)은 서축(西竺;신라를 東竺한데서 인도를 西竺이라 한다) 아육왕(阿育王;아소카)이 황철(黃?;銅) 57,000근과 황금 30,000푼으로 석가(釋迦) 삼존불(三尊佛)을 주조(鑄造)하려다 세 번이나 실패하자 이 동금(銅金)을 거선(巨船)에 실어 인연(因緣)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불상(丈六佛像)이 이루어지라고 축원했다. 이 배가 남염부제(南閻部堤) 16 대국(大國)과 500 중국(中國), 1,000 소국(小國) 8,000 촌락(村落)을 널리 돌아 신라에 닿으니 1,300여 년 만에 신라에 의하여 진흥대왕(眞興大王)때 이룩되어 안치되었다.【삼국유사(三國遺事)】 즉 신라 동축(東竺)은 서축(西竺)을 능가하는 불국토설(佛國土說)을 신라인이 창조했다.
신라는 불교가 왕실(王室)과 귀족의 숭상으로 발달하여 탑파(塔婆)도 목탑(木塔)과 모전석탑(模塼石塔)ㆍ전탑(塼塔)에서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 발달하였고, 전국 명산대천(名山大川) 방방곡곡에 사원이 세워져 사사성장(寺寺星張)하고 탑탑안행(塔塔雁行)의 장관을 나타내었고 향화(香花)와 독경(讀經). 범패(梵唄), 성종(聲鐘)소리가 끊이지 않는 불국(佛國)을 이루었다.
법화경(法華經)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과 화엄종(華嚴宗)의 통일적 질서와 전제왕권의 미화(美化)와 화쟁(和諍)사상은 신라의 통일과 전제왕권(專制王權)의 수립에 기여하였다. 화엄종(華嚴宗)의 의상(義湘), 원효(元曉;海東宗), 법상종(法相宗)의 진표(眞表), 계율종(戒律宗)의 자장(慈藏), 법상종(法相宗;海東宗)을 창시한 원효(元曉)와 그 문인(門人), 열반종(涅槃宗)의 보덕(普德) 등이 나와 오교(五敎)가 크게 떨치고 신라 말에는 선종(禪宗)이 들어와 지방 향호(鄕豪)의 후원으로 크게 떨쳐 신행(神行), 도의(道義)에 의하여 전래된 선종(禪宗)이 계속 당(唐)에서 구법(求法)하고 돌아오는 고승(高僧)들에 의하여 선종(禪宗)의 산문(山門)이 개창(開創)되니, 소위 북산의(北山義)ㆍ남악척(南岳陟)이라 한 도의(道義)ㆍ염거(廉居)ㆍ체징(體澄)에 의한 가지산문(迦智山門), 홍척(洪陟)에 의한 실상산(實相山), 혜철(惠哲)에 의한 동리산(桐裡山), 무염(無染)의 성주산(聖住山), 범일(梵日)의 도굴산(??山), 도윤(道允) 절중(折中)의 사자산(師子山), 도헌(道憲)의 희양산(曦陽山), 현욱심희(玄昱審希)의 봉림산(鳳林山), 이엄(利嚴)의 수미산(須彌山)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성행했다.
화엄종(華嚴宗)에서는 의상(義湘)의 십덕(十德)이 나와 십산(十山)을 개산(開山)했고, 유식학(唯識學)엔 경흥(憬興), 대현(大賢), 원측(圓測) 등이 나왔다. 고려(高麗)에 오면 화엄(華嚴)에 균여(均如) 탄문(坦文)이 나오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나와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 교선(敎禪)을 통합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열었다. 이는 교(敎)로서 선(禪)을 병합(倂合)한 것이다. 이어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나와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여 선(禪)으로 체(體)를 삼고 교(敎)로 용(用)을 삼아 선교(禪敎)를 통합하여 조계종(曹溪宗)을 개창했다.
의천(義天)은 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과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하여 공산(公山)의 부인사(符仁寺)에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과 함께 봉안하였다. 지눌(知訥)은 공산(公山) 거조사(居祖寺)에서 불교통합개혁의 혁명선언에 해당하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했다.
팔공산(八公山)은 한국 불교의 중심지였다. 고려불교에 있어서 법상종(法相宗)의 거봉인 홍진국사(弘眞國師) 혜영(惠永)은 동화사 주지로서 전국 불교를 지배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군림했다. 또한 법상종(法相宗;瑜伽宗)의 쌍벽(雙璧)을 이루던 자정국사(慈淨國師) 자안(子安)은 유식학(唯識學)의 거장으로 동화사의 주지로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전국불교를 호령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는 탄압과 쇠퇴로 얼룩졌다. 도첩제(度牒制)는 승려의 생산을 억제하는 멍에가 되었다. 태종(太宗)의 배불(排佛)은 가혹하여 종파(宗派)를 병합하고 사원(寺院)의 수를 대폭 줄이고 도첩제(度牒制)를 엄행하고 사찰의 노비를 몰수했다. 세종(世宗)은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분립을 인정하였으나 사원의 수는 크게 줄였다. 세조(世祖)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불경(佛經)을 번역 간행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여 숭불(崇佛)정책을 취했으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호불(護佛)로 보우(普雨)를 기용, 양종제(兩宗制)를 부활시키고 그를 판선종사도대선사봉은사주지(判禪宗事都大禪師奉恩寺住持)를 삼고 도승법(度僧法)과 승과(僧科)를 시행 불교를 진행시켰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별세로 이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다시 법난(法難)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임진대란(壬辰大亂)이 벌어지자 구국성전(救國聖戰)에 서산대사(西山大師)ㆍ송운대사(松雲大師)ㆍ기허당(騎墟堂) 영규대사(靈圭大師)가 승병을 이끌고 싸워 위대한 공훈을 남겨 호국에 공헌했다. 조선조의 고승으로는 무학자초(無學自招)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왕사(王師)요 창업에 크게 도왔다. 영관(靈觀)은 미천한 출신으로 조선조 불교의 태두(泰斗)가 되어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선수(善修;浮休)를 문하에 배출했다. 휴정(休靜)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전국 승려에 격문을 날려 거의(擧義)를 호소하며 노구(老軀)로 1,500명을 거느리고 일어서니 제자 유정(惟政)은 금강산에서 800명, 처영(處英)이 호남서 1,000명 등 5,000 승병을 지휘했다. 그의 문하에서 1,000명이 나왔고 70여명이 출세했다. 선수(善修)는 송운(宋雲)과 함께 이난(二難)의 칭을 듣던 명승(名僧)으로 그의 문하에서 700의 제자를 배출하여 서산문하(西山門下)와 더불어 선수(善修;浮休)의 법맥(法脈)은 양대 산맥의 승단을 지휘했다. 서산문하(西山門下)의 유정(惟政)은 임진왜란에 활약한 걸승(傑僧)으로 공산(公山) 동화사에서 영남의 승병을 지휘한 것은 유명하다.
난후(亂後) 조선사회의 문란 해이와 함께 불교는 심한 탄압을 받아 양반과 관아의 가렴주구의 대상으로 승려는 사역(使役) 당하고 사원은 지묵(紙墨) 등 공출을 강요당하였다. 그리하여 사원을 이들의 침탈로부터 방지하기 위하여 왕가(王家)의 원당축수(願堂祝壽)의 사원으로 만들어 명맥을 유지해왔다. 팔공산 은해사는 인종태실(仁宗胎室) 수호사찰(守護寺刹)로, 파계사(把溪寺)는 영조(英祖)의 축수원당(祝壽願堂)으로 관(官)의 보호를 받은 것은 유명하다. 파계사(把溪寺)에 숙종(肅宗)ㆍ영조(英祖)ㆍ정조(正祖)의 어필(御筆)을 모시고 성수만세(聖壽萬歲)를 빌었으며, 영조(英祖)의 어의(御衣)를 불상복장(佛像腹藏)에 넣어 왕가(王家)의 원당(願堂)으로 화(化)하여 사찰(寺刹) 입구에 「대소관원개하마(大小官員皆下馬)」 비(碑)를 세워 관(官)과 양반(兩班)의 수탈로부터 보호받았다.
불교음악인 범패(梵唄)는 신라 말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초(慧超)에 의하여 전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世祖)가 불교음악인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을 작곡하여 종묘제(宗廟祭)의 정악(正樂)으로 삼았다. 범패(梵唄)의 계보는 조선초의 모범국융(模梵國融)을 1세(世)로 하여 2세(世) 응준(應俊), 3세(世) 혜운(惠雲), 4세(世) 천휘(天輝), 5세(世) 연청(演淸), 6세(世) 상환(尙還), 7세(世) 설호(雪湖), 8세(世) 운계당(雲溪堂) 법민(法敏), 9세(世) 혜감(惠鑑)이 나왔다. 혜감(惠鑑)의 문하에서 대성(大盛)하여 보림사(寶林寺)의 대휘(大輝)와 미황사(美黃寺)의 시명(始明) 등이 나왔다. 대휘(大輝)는 영조 24년(1746년)에 범음종보(梵音宗譜)를 지어 범패(梵唄)의 연원(淵源)을 밝혔다. 시명(始明)의 제자는 공산 동화사와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를 지배하여 계승했다.
근대에 와서 불교는 광무(光武) 3년(1898년)에 불교개혁을 단행하였다. 배불론(排佛論)을 폐기하고 국가적 관리를 도모하게 되었다. 국내수찰(國內首刹) 원흥사(元興寺)를 대법산(大法山)으로 정하고 도내수찰(道內首刹)로 중법산(中法山)을 정하여 경상좌도중법(慶尙左道中法)은 동화사(桐華寺)로 하고, 경상우도(慶尙右道)는 해인사(海印寺)로 경상남도(慶尙南道)는 통도사(通道寺)로 했다. 조선조 후기에 있어 수도(修道) 공부승(工夫僧)을 이판승(理判僧)이라하고 사무(寺務)를 관장하는 사무승(寺務僧)을 사판승(事判僧)이라 하여 이 두 교단(敎團)이 분화되어 전자는 법도(法道)를, 후자는 권익을 유지 계승하는데 공헌했다.
드디어 고종 32년(1895년)에 승려의 입성(入城) 금령(禁令)의 악법이 폐지되고 개화의 물결을 따라 불교의 박해도 걷히게 되었다. 이때 이동인(李東仁)이란 개화(開化) 걸승(傑僧)의 활약은 눈부셨다. 국권이 일본의 마수에 넘어갈 때 1908년 융희(隆熙) 2년에 일본(日本) 조동종(曹洞宗)의 조종을 받는 친일파 원종(圓宗)의 결성은 해인사(海印寺) 주지 이회광(李晦光)을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하여 장차 일본(日本) 조동종(曹洞宗)으로 개종시키려는 음모 하에 이회광(李晦光)은 획책했다.
이에 박한영(朴漢永), 한용운(韓龍雲) 등은 이를 개종역조(改宗易祖)의 매교행위(賣敎行爲)라 통매(痛罵)하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1910년 조선의 일본병합으로 조선총독부에서 1911.6.3. 사찰령(寺刹令)이 제정 반포되어 조선 불교 30본산(本山;1924년 화엄사(華嚴寺)가 승격되어 31본산이 됨)으로 정해지고 30개(個) 교구성(敎區城)으로 편성되었다. 경북인 금룡사(金龍寺), 고운사(孤雲寺), 은해사(銀海寺), 기림사(祈林寺)의 5대본산이 있고, 팔공산에 2대본산이 서게 되었다. 불교교단은 조선총독부 지배하에 장악되었다. 동화사는 말사(末寺) 56, 은해사는 말사(末寺) 32를 거느리는 대사원으로 발전했다.
30본산 연합중앙기관으로 1921년 각황사(覺皇寺)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총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中央總務院)과 1922년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中央敎務院)이 결성되어 상호 정통성을 주장 대립했다. 그러나 1925년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中央敎務院)으로 통합되었다. 1926년 일제는 조선에 대처승제도(帶妻僧制度)를 실시 대처육식(帶妻肉食)을 합법화하여 비구(比丘)ㆍ대처승(帶妻僧)의 분혈ㆍ반복ㆍ대립을 낳게 했다. 대처승(帶妻僧)은 사판승(事判僧)이 대부분이었다. 비구승(比丘僧)은 이판승(理判僧)이었다.
1955년 5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와 대처승(帶妻僧)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유시로 자유당(自由黨) 정권의 권력의 비호를 받는 비구승단(比丘僧團)은 1956년 동화사, 은해사를 접수하고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으로 통일되었다. 1954년 11월 비구승단의 태고사(太古寺;曹溪寺)의 실력 점령과 대처승의 승려자격 박탈로 발단된 싸움은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으로 전개되어, 1970년 5월 대처승은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으로 등록되어 싸우고 있다.
팔공산도 훨씬 뒤에까지 산중말사(山中末寺)는 대처승(帶妻僧)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분쟁으로 인하여 사찰의 재산, 보물의 도난ㆍ매각, 일실(逸失) 등의 손실과 불교의 퇴보와 폐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Ⅱ. 팔공산(八公山)에 수도(修道) 주석(駐錫)한 고승(高僧)
1. 원효(元曉)
속성(俗姓)은 설씨(薛氏), 조부(祖父)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 하며, 부(父)는 담날(談捺)으로 관직은 내마(柰麻;신라 17관등 중 11관등)이다. 진평왕(眞平王) 39년(617년) 상주(尙州;?州) 압량군(押梁郡;지금의 慶山)의 남불지촌(南佛地村) 또는 발지촌(發智村;弗等乙村ㆍ불들믈) 북쪽 밤실(栗谷)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新)幢)이었다. 그의 집이 이 고을 서남(西南)에 있었는데 모(母)가 만삭(滿朔)이 되어 그 남편과 함께 외출 갔다가 이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별안간에 산기가 있어 미처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해산하니 그 남편이 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 가리고 여기서 잤다. 그래서 그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하고 그 나무의 밤은 사라율(娑羅栗)이라 하여 유명했다. 그 뒤에 원효가 출가(出家)하여선 그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 초개사(初開寺)라 하고, 그가 탄생한 밤나무 곁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娑羅寺)라 했다.
어러셔 불교에 들어가 스승을 좇아 글을 배웠다. 공전절후(空前絶後) 한국제일의 천재인 그는 화랑(花郞)에 속한 승려(僧侶) 낭도(郎徒)가 되어 풍류도(風流道)를 닦아 전국의 명산대천에 유오(遊娛)하고 무예(武藝)와 수련(修鍊)을 닦고 유(儒)ㆍ불(佛)ㆍ선(仙) 삼교(三敎)에 통달하여 용맹호장(勇猛豪壯)하여 그의 개세기개(蓋世氣槪)를 따를 자 당대에 없어 일당만인적(一當萬人適)이라 했다.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648년) 32살에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불교를 전심(傳心)으로 공부하였다. 진덕여왕(眞德女王) 4년(650년)에 의상(義湘)과 함께 34살에 당(唐)나라에 구법(求法)가기로 결심하여 떠났다. 해로(海路)인 당항포(唐項浦)가 백제에 점령되어 해로(海路)가 막혀 육로(陸路)로 당나라에 가다가 고구려(高句麗)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포로로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래서 구법 유학을 단념하고 10년간 공산(公山)에 들어가 불굴사(佛窟寺) 석굴(石窟), 오도암(悟道庵) 석굴(石窟) 등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수도 공부했다. 다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8년(661년)에 백제가 멸망되고 해로(海路)가 트이자 다시 당(唐)에 구법(求法)가기 위한 소원을 가지고 현장삼장자은(玄?三藏慈恩)의 문(門)을 흠모하여 길을 떠나 당주계(唐州界;지금 水原 南陽) 해안(海岸)에 이르러 당(唐)나라에 가는 큰 배를 기다리다 날이 저물고 심한 풍우를 만나 추워 비를 피하기 위해 길가 움짐에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 허기가 져 지쳐 곤히 자다가 목이 몹시 말라 머리맡을 더듬다가 바가지에 고인 물을 맛있게 마시고는 갈증을 풀고 자고나서 날이 밝아 아침에 일어나보니 움집은 허물어진 무덤의 석실이요, 마신 물은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는 더럽고 아니 꼽아 구역질을 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에 진리를 터득하니 마음이 후련했다.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 三界唯心萬法唯識 心外無法胡用別心 我不入唐 마음이 일어나므로 온갖 법(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뿐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식(識) 뿐이다. 마음 밖에 법(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唐)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 【송고승전(宋高僧傳)】 |
하고는 바랑을 지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전심(傳心)으로 수도 공부하며 내 뱉는 말이 해괴망측하여 미치광이 같고 행적이 무상하고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창녀집에 들어가 자기도 하는 패륜아처럼 행동하고 보지(寶誌)처럼 쇠칼과 철석장(鐵錫杖)을 지니고 다니며, 혹은 불경(佛經)의 소(疏)를 짓고 화엄경(華嚴經)을 강하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를 치며 사우(祠宇)에 음악을 연주하고, 혹은 산수(山水)에 좌선(坐禪)을 하기도 하며 뜻대로 마음가는대로 멋대로 때에 따라 행동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원효가 환향(還鄕)한 후 문무대왕(文武大王)께서 국가의 태평과 수호를 위하여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를 열었을 때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강할 고승대덕(高僧大德)을 전국에서 구함에 압량군(押梁郡)이 소속된 상주(尙州)에서 원효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이 날 모든 고승(高僧)들은 하나같이 대사의 자유분방한 행동에 반발하여 왕에 청하여 참석시키지 못하게 하여 불참하게 되었다.
원효는 당시 계율을 지키는 근엄한 승려들의 눈에는 타락자요, 광패한(狂悖漢)이요, 이단자(異端者)였다. 당시 기괴한 걸승(傑僧) 3인이 있었으니 다 헤진 옷을 걸치고 징을 치면서 대안(大安)대안(大安)하며 다니는 대안대사(大安大師), 부개(큰 자루)를 메고 저자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 부르고 다니던 부궤화상(負?和尙)과 노래를 부르며 이 마을 저 마을, 이 거리 저 거리를 다니던 원효대사였다. 무열왕대(武烈王代)에 원효가 춘의(春意)가 발동하여 음탕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다녔다.
뉘가 자루 빠진 도끼를 |
이 외설적인 노래를 들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대사 귀부인과 정사를 맺어 국가의 기둥감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하고 국가 동량지재목(棟樑之材木)이 될 대현(大賢)을 낳아 얻는다면 국가에 이익이 막대하리라 하고 관원을 보내 원효를 맞아오게 하였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원효를 칙사(勅使)가 데리고 월성(月城) 궁궐로 데려올 때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시니 대왕(大王)이 요석궁(瑤石宮)으로 모시고 가서 옷을 갈아입혀 모시도록 했다. 요석궁에는 홀로된 공주가 있었다. 둘은 사랑하고 결합했다. 그래서 이 두 연인의 몸에서 낳은 천재가 홍유후(弘儒候) 설총(薛聰)이었다. 그는 신라 제일의 유학자(儒學者)로 구경(九經)을 우리말로 훈독(訓讀)한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
그로부터 원효는 파계(破戒)했다고 속복(俗服)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혹은 卜性居士라 했다. 卜字는 下子의 下半身 곧 下之下란 뜻이요, 下半身의 卜은 남자의 상징이기도 했다)라 했다. 하루는 배우(광대)로부터 큰 바가지를 하나 얻으니 형상이 얄궂었다. 이로써 악기를 만들어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따서 무애(無碍) 박이라 이름 붙이고 이를 가지고 울리며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나무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민간에 전파시켰다. 그는 민중불교를 널리 폈다.
문무왕(文武王)의 왕비 자의왕후(慈儀王后)가 뇌종(腦?)을 앓게 되어 백약(百藥)이 무효하고 온갖 치성이 허사임에 칙사(勅使)를 해외에 파견하여 방약(方藥)을 구하던 중에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얻어 이를 강설하여 왕후의 병을 고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강설할 고승은 원효 외는 없었다. 대안대사(大安大師)의 추천에 의하여 원효(元曉)가 궁중에 불려왔다. 그러나 원효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임금으로부터 받아가지고서도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였다.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걸어두기를 청하여 소로 수레를 끌게 하여 수레를 타고 놀러 다니면서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 5권을 완성하여 임금께 올려 날을 청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강설토록 할 계획이었으나 어느 사람이 이를 훔쳐가 버렸으므로 대사는 3일을 연기하여 약소(略疏) 3권을 이루어 올려 황룡사에서 국왕, 문무백관, 고승대덕 앞에서 위풍당당하게 등단하여 현하(懸河)의 대강연을 토했다. 그의 광휘(光輝)는 민중을 압도했다. 모두 합장배례하고 정금경청(正襟傾聽)했다. 그는 강의를 마치고 득의만면(得意滿面)한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의며,
日採百椽時 雖不預會 今朝橫一棟處 唯我獨能 |
고 외쳤다. 지난 날 인왕반야경법회(仁王般若經法會)의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에 고루한 소물(小物)들이 알아주지 못하고 방해하여 참석치 못한 치욕을 설분한 것이다. 그는 이로써 단연 신라 제1의 불교학자(佛敎學者)임이 증명되었다. 그는 『법화경(法華經)』의 회삼귀일론(會三歸一論)과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으로 신라 일통삼국(一統三國)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는 이후 불교의 연구와 저술(著述)로 일생을 보내었다.
그의 저술은 99부(部) 240여권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는 화엄(華嚴)ㆍ법화(法華)ㆍ열반(涅槃)ㆍ삼론(三論)ㆍ법상(法相)ㆍ정토(淨土)ㆍ율성실(律成實)ㆍ아비담(阿毘曇) 등 각부(各部) 제종(諸宗)에 통달한 인류 역사상(歷史上) 가장 위대한 불교학자(佛敎學者)였다. 그는 인류 최고의 불교천재로 경탄의 적이었다. 그의 저서(著書)로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당나라 화엄학(華嚴學) 완성에 공헌했으며, 『금강삼매경약소(金剛三昧經略疏)』 3권도 중국에 들어가 숭앙되었다. 그는 해동종(海東宗)이란 독자적인 총화(總和)불교 이론을 제창했으며, 황룡사 주지, 분황사(芬皇寺) 주지를 역임하며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찬술할 때 제 40 회향품(回向品)에 이르러 절필(絶筆)했다 한다.
고선사(高仙寺;현재 경주 덕동댐에 수몰되었다. 삼층석탑이 경주박물관에 있다.)에 주(住)하고 있을 때 사복(蛇福;童 혹은 巴)이 그 어미가 죽자 장례를 치를 때
막생혜기사야고(莫生兮其死也苦) 막사혜기생야고(莫死兮其生也苦) |
라 했다. 만년에 남산(南山) 혈사(穴寺)에 안주(安住)하다가 여기서 70살, 신문왕(神文王) 6년(686년)에 입적(入寂)했다. 그의 유골을 수습하여 분황사(芬皇寺)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안치하고 아들 설총(薛聰)이 경모종천(敬慕終天) 배례(拜禮)함에 끔찍한 아버지의 자정은 죽어서도 외아들 설총을 못 잊어 문득 고개를 돌려보았다는 상(像)이 고려 말까지 있었다.
원효는 후대에 대성인(大聖人)과 보살(菩薩)로 추앙되며 고려 숙종(肅宗) 6년(1101년) 화쟁국사(和諍國師)의 칭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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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이름이 서당(誓幢;新幢)이라 한 것은 그가 군대(軍隊)에 있었던 이름과 같다. 그는 서당(誓幢)이란 군대에 소속했었다. 그래서 서당화상(誓幢和尙)이라 한 듯 하다. 그리고 그의 학설(學說)과 취사(就師)는 전주(全州) 고대산(高大山)에 가서 고구려의 망명승(亡命僧)인 백제의 보덕(普德)에게 열반경(涅槃經)을 배웠고, 흥륜사(興輪寺) 법장(法藏)의 문하에서 배우고 영취산(靈鷲山) 번고사(磻高寺)의 양지(良智)를 찾아 배웠다.
원효의 고향 압독군(押督郡)은 강력한 신라의 군단(軍團)이 주둔하고 있었다. 김서현(金舒玄)이나 김유신(金庾信)의 군단(軍團)도 이곳에 있었다..
○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분황사 원효성사께 올리는 제문) 維年月日 求法沙門某 謹以茶菓時食之尊 致供于海東敎主元曉菩薩 伏以理由敎現 道藉人弘 逮俗薄而時?乃 人離而道喪 師旣各封其宗習 資亦互執其見聞 至如慈恩百本之談 唯拘名相 台嶺九旬之說 但尙理觀 雖云取則之文 未曰通方之訓 唯我海東菩薩 融明性相 隱括古今 和百家異諍之端 得一代至公之論 而況神通不測 妙用難思 塵雖同而不汚其眞 光雖和而不?其體 令名所以振華梵 慈化所以被幽明 其在贊揚固難擬議 某夙資天幸 早慕佛乘 歷觀先哲之閒 無出聖師之右 痛微言之?繆 惜至道之能夷 遠訪名山遐求墮典 今者鷄林古寺 幸瞻如在之容 鷲嶺舊峯 似値當初之會 聊憑薄供 敢敍微誠 仰冀厚慈 俯垂明鑑【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분황사 원효성사께 올리는 제문) 자은대사의 100권의 책 같은 것도 오직 이름과 모습에만 얽매였으며, 천태산에서의 90일간 이야기도 단지 오히려 진리보기(이관)뿐이었습니다. 비록 집착하는 글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두루 통하는 가르침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 통해서 가늠하기 어렵고, 묘하게 작용해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티끌과 함께하나 그 진실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비록 빛과 어우르나 그 몸체를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의천)는 일찍이 하늘의 도움이 있어, 어려서부터 불법을 사모해서, 옛 어진 이들의 모습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원효성사의 오른 쪽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모름지기 적은 공양을 빌어, 감히 작을 정성을 펼치오니, 우러러 바라옵건대 넓은 자비로서 밝게 굽어 살펴 주십시오.【 http;//blog.naver.com/kp8046 원효전기】
<참고문헌:삼국유사, 송고승전, 대각국사문집, 조선불교통사(李能和)> |
2. 의상(義湘;相);운부사(雲浮寺) 창건(創建)
아버지는 한신(韓信), 속성(俗姓)은 김씨(金氏) 혹은 박씨(朴氏;宋高僧傳)이며 진평왕(眞平王) 47년(625년)에 태어났다. 나이 29살인 선덕여왕(善德女王) 13년(644년)에 경주의 황룡사(皇龍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때에 당(唐)나라에 현장법사(玄?法師)의 자은종(慈恩宗)을 흠모하여 진덕여왕(眞德女王) 4년(650년)에 원효대사와 함께 대당(大唐)에 구법하고자 육로(陸路)로 요동(遙東)에 갔다가 군경순찰대에 잡혀 간첩으로 혐의 받아 옥에 수십 일 갇혔다가 겨우 돌아왔다.
661년(文武王)에 다시 원효와 같이 당진(唐津)에서 해로(海路)로 당나라에 가려고 배를 기다리다 허물어진 옛무덤의 석실에서 잤는데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신 원효는 이로 인하여 유심(唯心)에 도달하여 원효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의상은 뱃길로 당에 이르러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현수국사(賢首國師)와 함께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학(華嚴學0을 전수받고 문무왕(文武王) 11년(671년)에 귀국했다. 해동(海東)에 화엄종(華嚴宗)을 전하니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의상이 당(唐)에 당도하였을 때 처음 양주(楊洲;登州하고도 한다)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아내(衙內)에 맞이하여 유(留)하게 하고 후하게 대접했다. 이때 그의 딸 선묘니(善妙尼)와 숭고성결(崇高聖潔)한 사랑이 꽃피었다. 둘은 생생세세(生生世世) 영겁(永劫)에 함께 하기로 맹세했다. 의상이 법장(法藏;賢首)과 함께 공부할 때 신라의 김인문(金仁問;金歆純, 金良圖라는 설이 있다)을 만나보니 당(唐)이 대군으로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세우니 빨리 고국에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달라 했다. 이 때 김인문(金仁問) 등은 하옥(下獄)되어 있었다. 이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왕명을 받아 채백(彩帛)으로 절을 가구(假構)하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유가명승(瑜?明僧) 12인으로 하여금 명랑(明朗)이 주재하여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을 지어 당군을 격퇴했다.
문무왕(文武王) 16년에 왕명을 받들어 태백산(太白山)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했다. 이때 선묘니(善妙尼)가 죽어 용(龍)이 되어 와서 이 절을 수호했다. 문무왕(文武王) 21년 왕이 수도(首都)를 재건하려 하면서 의상에게 자문함에 대사가 말하기를, 「초야초옥(草野草屋)에 있더라도 정도(正道)를 행하면 복업(福業)이 장구할 것이요, 참으로 그렇지 않으면 인민(人民)을 괴롭혀 성(城)을 지어도 유익할 것이 없다」함에 이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의상이 태백산(太白山) 부석사(浮石寺), 원주(原州)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伽倻)의 해인사(海印寺), 비슬(毘瑟)의 옥천사(玉泉寺), 금정(金井)의 범어사(梵魚寺), 남악(南岳)의 화엄사(華嚴寺) 등에 영(令)을 내려 화엄종(華嚴宗)을 크게 홍포(弘布)했다. 그의 문하에서 고승대덕(高僧大德)이 많이 나왔으니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도(良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을 십대덕(十大德)이라 한다. 의상을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현신(現身)인 성(聖)이라 하고 십대덕(十大德)을 아성(亞聖)이라 한다. 오진(悟眞)은 하가산(下柯山) 골엄사(?嚴寺)에서 밤마다 부석사(浮石寺) 석실등(石室燈)에 불을 켰고, 지통(智通)은 추동기(錐洞記)를 지었고, 표훈(表訓)은 불국사(佛國寺)에 있어 탑(塔)을 돌 때 허공을 돌았다 한다.
법장(法藏)이 20년 만에 귀국한 신라의 의상에게 간절한 편지를 승전법사(勝詮法師)의 귀국 편에 보내고 자신이 지은 심현기(深玄記) 20권, 교분기(敎分記) 3권, 현의장등사잡의(玄義章等寺雜義)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화엄기신소(華嚴起信疏) 양권(兩券), 십이문(十二門) 1권, 법계무차별논소(法界無差別論疏) 1권을 주어 승전법사가 베껴왔다. 법장은 상인(上人;의상)에게 비판 교정을 간청하고 신라에 전파하기를 원했다. 의상은 효충대사(孝忠大師) 편에 금구분(金九分)을 보냈다. 고려 숙종(肅宗) 6년에 해동화엄시조(海東華嚴始祖) 원교국사(圓敎國師)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는 낙산(洛山)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 진신(眞身)을 보고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하고, 공산(公山)에 들어가 공부 수도할 때 운부사(雲浮寺)를 지었다. 지금도 운부암(雲浮庵)에는 의상이 지팡이를 꽂아 살아났다는 보리수(菩提樹)가 있다. 저서(著書)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ㆍ백화도량발원문(百花道場發願文)ㆍ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ㆍ입법계품묘기(入法界品妙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삼국유사, 송고승전, 조선불교통사(李能和)>
3. 심지(心地):동화사(桐華寺;桐寺) 창건(創建)
신라 헌덕왕(憲德王;809~825년)의 왕자,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수제자인 속리산 법주사 창조(創祖) 영심대사(泳深大師)의 제자다. 15살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중악(中岳;公山)에 들어가 중암암(中岩庵)에 살았다. 영심(泳深)이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전수한 불골간자(佛骨簡子)를 받아와서 동화사(桐華寺;桐寺)를 창건하여 주존불(主尊佛)을 미륵(彌勒)으로 하는 대가람을 세우고 민애대왕(閔哀大王)의 원당(願堂)과 탑(塔)을 세웠다. 희강왕(僖康王)ㆍ민애왕(閔哀王)ㆍ신무왕(神武王)ㆍ문성왕(文聖王)ㆍ헌안왕(憲安王) 대를 지나 경문왕(景文王) 대까지 생존하여 동수원당(桐藪願堂)의 주지로 있었다. 공산(公山)에 있으면서 중암암(中岩庵),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寺) 등 제사(諸寺)를 창건했다.
<참고문헌: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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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혜(因惠)
중악(中岳)에 주석(駐錫)하고 있었다. 김유신(金庾信)이 한 노거사(老居士)와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세인을 알지 못했다.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의 친척 김수천(金秀天)이 오랫동안 병환에 시달려 김유신이 노거사(老居士)를 보내어 치료하게 했다. 이때 인혜대사(因惠大師)가 공산(公山)에서 내려와서 거사(居士)를 보고 모욕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모습을 보니 간사한 사람이다. 어찌 남의 병을 고치겠소」라 함에 거사(居士)가 말하기를, 「내가 김공(金公)의 명(命)을 받고 마지못해 왔을 뿐이다」고 함에, 인혜(因惠)는 자기의 신통을 믿고 거사(居士)를 업신여겨 「그대는 나의 신통력을 보아라」하고 향로(香爐)를 받들고 향(香)을 피운 뒤 주문(呪文)을 외우니 별안간 오색(五色)구름이 정상(頂上)을 둘러싸고 천화(天花)가 쏟아져 내렸다. 거사는 이를 보고 「화상의 신통력은 신기하구나. 제자도 변변치 못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한번 시험해 보겠다. 청컨대 대사는 잠깐 앞에 서 있으시오」라 함에 인혜(因惠)가 그렇게 섬에 거사(居士)가 손가락을 튕기는 바람에 인혜(因惠)는 공중에 높이 한길이나 거꾸로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와 머리가 땅에 박혀 말뚝과 같이 거꾸로 쳐 박혔다. 사람들이 잡아 당겨도 끄떡도 하이 않았다. 거사(居士)가 그 곳을 떠나가니 인혜(因惠)가 거꾸로 박힌 채 날을 새었다. 그래서 이튿날 김수천(金秀天)이 사람을 김유신에게 보내어 부탁하니 거사(居士)를 보내 풀어주었다. 이로부터 인혜(因惠)는 다시는 재주를 자랑하지 않았다.
그는 7세기에 신통력과 방술(方術)을 부리던 괴승(怪僧)으로 이름이 높았다.
<참고문헌:삼국유사>
5. 원종국사(元宗國師) 찬유(璨幽)
자(字)는 도광(道光), 성(姓)은 김씨(金氏)로 경문왕(景文王) 9년(869년)에 출생하여 13살에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 봉림산파(鳳林山派)의 융체선사(融諦禪師)에게 가서 중이 되어 제자가 되었다. 선사(禪師)는 찬유(璨幽)에게 「참으로 일불(一佛)이 출세(出世)하여 동화주(東化主)가 오종(吾宗)의 대종사(大宗師)로 혜목산(慧目山)에 심포(審布)란 선사(禪師)가 있으니 그분은 나의 스승이시다. 가서 스승으로 섬겨라」함에 혜목산(慧目山)에 가서 심포(審布)의 자(資)가 되어 선종을 공부하여 묘리(妙理)를 궁구(窮究)하여 현기(玄機)에 통했다. 22살에 양주(楊洲)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본사(本師) 심포(審布)가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이주함에 불원천리를 가서 뵈옵고 원유범람(遠遊泛覽)의 뜻을 말하여 허락을 받고 진성왕(眞聖王) 1년(892년)에 상선(商船)을 타고 당(唐)에 가서 서주(舒州) 동성현(桐城縣) 적주사(寂住寺)에 가서 투자선화상(投子禪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화상(和尙)은 법호(法號)을 대동(大同)이라하여 석두산(石頭山) 법손(法孫)인 취미무학대사(翠微無學大師)의 적윤(適胤)이다. 찬유는 화상(和尙)의 극진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밀전(密傳)을 받아 두루 승우(勝友)를 구하고 고사(高師)를 알현하고 성지를 순례한 뒤 경명왕(景明王) 5년, 태조 4년(921년)에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로 귀국했다. 봉림사(鳳林寺)로 스승 심포(審布)를 찾아가 근성(覲省)했다.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포(審布)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공산(公山)의 삼랑사(三郞寺)에 가서 주석(駐錫)케 하여 선백(禪伯)이 되게 하였다. 여기서 3년을 나고 큰 뜻을 품고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불법을 숭상하고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일으킬 성왕(聖王)임을 듣고 개경(開京)에 가서 태조(太祖)를 만났다. 태조는 대사의 학덕을 추앙하여 광주(廣州)의 천주사(天主寺)에 주석(駐錫)케 했다. 그 후 옛 공부한 고산(故山)인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에 들어가서 이주(移住) 선거(禪居)하니 전국에서 선사의 명성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혜종(惠宗)의 융숭한 귀의(歸依)를 받고 대사도 성심껏 섬겼다.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대사에게 최대의 예우를 아끼지 않고 증진대사(證眞大師)의 호를 내리고 불러 자안(慈顔)을 만나보고 왕성의 사나원(舍那院)에 있게 하고 제자의 예를 올렸다. 정종(定宗)이 사나원(舍那院)에 행행(行幸)하여 존경하고 곧 국사에 임명되었다. 광종(光宗)의 존숭(尊崇)을 극진히 받았다. 그는 국왕께 노년(老年)을 송문(松門)에 들어가 쉬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국왕의 간절한 전송을 받고 혜목산(慧目山) 고달선원(高達禪院)에 가서 광종(光宗) 9년(958년)에 열반하니 나이 90살, 법랍 69였다. 시호(諡號)는 원종국사(元宗國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혜진(惠眞)이라 했다.
<참고문헌>高麗國廣州慧目山高達院故國師制贈諡元宗大師惠眞之塔碑銘ㆍ朝鮮金石總攬上
6.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지눌(知訥)
속성(俗姓)은 정씨(鄭氏), 아버지는 광우(光遇),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며, 동주인(洞州人;瑞興人)으로 의종(毅宗) 12년(1158년)에 출생, 호(號)는 목우자(牧牛子), 어려서 다병(多病)하여 백약(百藥)이 무효함에 그 아버지가 부처님 앞에 빌어 맹세하기를 자식을 출가시키겠다고 서원(誓願)함에 병이 낫게 되었다. 8살에 조계(曹溪)의 운손(雲孫)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나아가 축발(祝髮)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명종(明宗) 12년에 승선(僧選)에 급제한 후 개경(開京)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많은 가르침을 받고 동학(同學) 10여 인과 더불어 정혜사(定慧社)를 맺어 습정균혜(習定均慧)로써 업무를 쌓을 것을 서로 약조하였다. 그 후 창평(昌平)의 청원사(淸源寺;羅州)에 가서 주석(駐錫)하다가 어느 날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다가
眞如自性起念, 六根雖見聞覺知, 不染萬像, 而眞性常自在 진여(眞如)의 자성(自性)이 생각을 일으켜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지만 만상(萬像)에 물들지 않고 그러면서 진성(眞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 |
라는 구절에 활연(豁然)히 자득(自得)하는 바 있어 이로부터 명리(名利)를 싫어하고 임학(林壑)에 숨어 살며 구도에 힘썼다.
명종(明宗) 15년 예천(醴泉)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읽다가 이통현(李通玄) 장자(長子)의 화엄론(華嚴論)을 읽고 더욱 신심을 발하여 잠심궁구(潛心窮究)하여 지혜(智慧)가 더욱 밝아지게 되어 원돈(圓頓)의 관문(觀門)에 나아가게 되었다. 여기에 3년을 있으면서 화엄경(華嚴經) 중에서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도 여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으나 다만 범부들이 이를 깨닫지 못한다」는 경문을 읽고 환희에 젖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에 있는 옛 동지 득재(得才)란 자의 초청과 간청에 의하여 공산의 거조사(居祖寺;현재 居祖庵)에 있으면서 널리 제종(諸宗)의 고사(高士)들을 초치하여 옛 동학(同學)들을 소집하니 이미 죽은 이, 사문(沙門)을 떠난 이가 있어 겨우 서너 사람만이 법석(法席)을 열었다. 그는 숙원이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고 명종(明宗) 20년(1190년)에 그 유명한 근수정혜결사문(勤修定慧結社文)을 천하에 발표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 습정균혜(習定均慧)를 실천에 옮겼다.
여기서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정립하고 수년간 주석(駐錫)하다가 신종(神宗) 원년(元年;1199년)에 선려(禪侶) 수자(數子)와 더불어 지리산(智異山)에 올라가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숨어살았다. 경치유적(境致幽寂)하여 참으로 안선(安禪)의 적소였다. 이에 외연(外緣)을 끊고 오로지 내관(內觀)을 정진하여 근원을 찾아 궁구(窮究)하고 현지(玄旨)에 묵계(?契)했다. 대혜(大慧)의 어록을 읽다가 선(禪)은 정처(靜處)에도 있지 않고 또한 분요한 곳에도 있지 아니하며, 일월응연처(日月應緣處)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에도 있지 않는다는 문장에 이르러 계회(契會)하여 이로 인하여 혜해(慧解)가 더욱 높아져 대중이 숭앙하는 바 되었다. 여기서 3년간 참선하여 선(禪)의 참뜻을 깨치고 이제부터 절세속적(絶世俗的) 생활에서 적극적인 보살행(菩薩行)으로 나아가 현실참여를 계획했다.
그 후신종(神宗) 2년(1200년)에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에 이거(移居)하여 승도(僧徒)를 거느리고 법을 행함이 11년에 사방의 승속(僧俗)이 풍(風)을 듣고 모여들어 울연(蔚然)히 대총림(大叢林)을 이루었다. 왕공사서(王公士庶)가 이름을 버리고 입사(入社)하는 이가 수백 명에 달했다.
지눌은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금강경(金剛經), 육조단경(六祖壇經), 화엄경(華嚴經), 대혜록(大慧錄) 등으로서 우익(羽翼)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는 삼문(三門)으로써 사람을 제접(提接)하였으니 일(一)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이(二)는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삼(三)은 경절문(經截門)이라 한다. 이에 의하여 수행해서 신입(信入)하는 이가 많았다. 그리하여 선학(禪學)의 성함이 근고무비(近古無比)였다. 억보산(億寶山)의 백운정사(白雲精社), 적취암(積翠庵), 서석산(瑞石山)의 주봉난야(主峰蘭若), 조월암(祖月庵) 등은 다 그가 창건해서 왕래하면서 수선(修禪)한 곳이다.
희종(熙宗)이 즉위하자 명하여 송광산(松廣山)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길상사(吉祥寺)을 수선사(修禪寺)로 개호(改號)하고 제방(題傍)을 친서(親書)해서 이를 하사(下賜)했다. 또 만수가사(滿繡袈裟)를 하사(下賜)하여 이를 포이(褒異)했다. 희종(熙宗) 6년(1210년) 법연(法筵)을 베풀기 수순(數旬)전에 그 어머니를 천도하고 대중에 말하기를, 「네가 세상에 주(住)하여 법(法)을 말하는 것이 오래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각자 노력하다」하고 3월에 몸져누운 지 8일에 모욕재결하고 아침 일찍 의자에 앉아 향을 피우고 설법(說法)하듯 장(杖)을 짚고 고히 시적(示寂)했다. 세수(世數) 53, 법랍(法臘) 36년이며, 시호(諡號)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고 탑(塔)을 감로(甘露)라 했다.
그는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다 하고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 선(禪)으로서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禪敎)의 통합을 주장했다. 의천(義天)이 교(敎)로서 선(禪)을 합일(合一)하려 한데 대하여 그는 선(禪)으로서 교(敎)의 합일(合一)을 주장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조계종(曹溪宗)으로 통합하여 크게 종윤(宗胤)을 떨쳤다. 그의 저술은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ㆍ수심결(修心訣)ㆍ진심직설(眞心直說)ㆍ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ㆍ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ㆍ법어(法語) 등이다.
<참고문헌> 普照語錄, 東文選, 朝鮮佛敎通史
7.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속성(俗性)은 서씨(徐氏), 신번현인(新繁縣人;宜寧)으로 호장(戶長) 필중(必中)의 아들이다. 자(字)는 안빈(安貧), 어머니는 서씨(徐氏)로 같은 향리사람이다. 의종(毅宗) 17년(1163년) 대정(大定) 계미동(癸未冬) 10월에 탄생했다.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고 용의괴위(容儀魁偉)하였다. 12살에 강양(江陽) 천락사(天樂寺) 사문(沙門) 균정(均定)에 의하여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처음으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명종(明宗) 4년(1174년) 22살에 승과에 합격하여 오로지 교의(敎義)의 연구에 잠심(潛心)하며 널리 강사(講肆)에 참석하여 수년 안에 제경(諸經)에 효통(曉通)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다.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신종(神宗) 1년(1198년) 가을에 동지(同志) 10여인과 함께 명산에 유력(遊歷)하고 처음으로 영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 주(住)하여 개당(開堂) 설법(說法)하여 후진을 유도했다. 각처에서 배움을 청하는 자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이때에 목우자(牧牛子) 지눌(知訥)이 공산(公山)의 회불압(會佛押)에 있어 동학(同學)을 초치(招致)함에 선풍(禪風)을 듣고 아계(暗契)하니 게(偈)를 대사에게 보내어 수선(修禪)을 권했다.
파란월난제(波亂月難題) 실심등편광(室深燈便光) |
대사가 수선(受禪)을 권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여 달려가서 이에 따르고 법우(法友)가 되어 도(道)를 올리는 것을 도왔다. 여기서 수년간 같이 수도하다가 지눌(知訥)이 강남에 이사(移徙)함에 요세(了世)도 따라갔다.
희종(熙宗) 4년 월생산(月生山) 약사난야(藥師蘭若)에 살면서 계산(溪山)의 청절(淸節)을 보고 당우(堂宇)를 수용(修茸)해서 여기에 있었다. 일일일실(一日一室)에 연좌(宴坐)해서 정관(靜觀)하고 문득 스스로 염(念)하길, 「만약 천태(天台)의 묘해(妙解)를 발하지 못하면 영명수(泳明壽)의 이백병(二百病) 무엇으로 말미암아 내쫒을꼬…」 인하여 묘종(妙宗)을 강(講)하여 「시심작선(是心作仙) 시심시불(是心是佛)」의 구절(句節)에 이르러 활연(豁然)히 깨달아 이로부터 변혜(辯慧)가 더욱 나아갔다. 탐진(耽津)의 신사(信士) 최표(崔彪)의 청에 의하여 옛 만덕사(萬德寺)의 옛터에 절을 지었는데 문인(門人)들에게 그 일을 맡겨 당우(堂宇) 80여 칸을 세워 고종(高宗) 3년에 마쳤다. 뒤에 남원(南原)의 고을 원님 복장한(卜章漢)의 청에 의해서 그곳의 백련사(白蓮寺)에 머물기를 수년에 탐진(耽津)으로 돌아갔다. 원근(遠近)에서 풍(風)을 듣고 와서 업(業)을 청하는 자 매우 많았다. 성(性)이 연식(緣飾)이 없고 순후정직(純厚正直)하며 눈에 사(邪)를 보지 않고 망언(妄言)을 하지 않고 잠에 이부자리가 없고 얻는 것은 모두 이것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방장(方丈;방) 안에는 오직 옷 세벌, 바루(鉢) 하나뿐이었다.
일찍이 교해(敎海)가 호한(浩瀚)해서 학자들이 진(津)에 닿지 못해 헤맬 것을 근심해서 강요(綱要)를 적촬(摘撮)해서 『심대부절요(三大部節要)』를 지어 간행했다. 후진이 많이 이에 의뢰함이 컸다. 고종(高宗) 32년(1245년)에 원문(院門)의 일을 수제자 천인(天因)에게 부탁하고 물러나와 별원(別院)에 있었는데, 이해에 시적(示寂)하니 나이 83살, 법랍 70이었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고 국사(國師)에 책(冊)하고 시호(諡號)를 원묘(圓妙)라 하고 탑(塔)을 중진(中眞)이라 했다. 이를 만덕사(萬德寺)의 제일세(第一世)라 한다.
<참고문헌>白蓮寺圓妙國師中眞塔(崔滋撰), 東文選
8. 원진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
속성(俗姓)은 신씨(申氏), 상락산양인(上洛山陽人;尙州屬縣), 자(字)는 영회(永廻), 명종(明宗) 1년(1187년)에 탄생했다. 가문(家門)이 유가(儒家)의 집이었다. 아버지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있다가 금성(錦城)에 지방장관으로 나갔다가 임지에서 죽고 어머니 또한 일찍 죽어 세 살에 고아가 되어 숙부(叔父)인 시어사(侍御史) 신광한(申光漢)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일찍 천재숙성(天才夙成)하여 7살에 운문사(雲門寺)의 연실선사(淵實禪師)에게 가서 배움에 발언거사(發言擧事)가 사람의 의표(意表)에서 나와 중인을 경탄시켜 신동이라 했다. 13살에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동순사(洞純師)에 나아가 체발(剃髮)하고 이듬해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로부터 계주명랑(戒珠明朗)하고 법기홍등(法器泓燈)하여지니 동순(洞純)이 더욱 애중(愛重)했다. 동순(洞純)이 늙어 갈 수가 없어 그가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나아갔다가 동순사(洞純師)의 부고를 받았다.
명종(明宗)이 평소에 그의 도행(道行)을 듣고 묘선(妙選)에 미쳐서는 유사(有司)에 조(詔)해서 특히 초록(抄錄)을 가하게 하니 이는 범례(凡例)를 초월한 것이다. 이해 가을에 종문(宗門), 시숙(蓍宿) 등의 간절한 권고에 의하여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감에 대문(對問)이 민첩하고 비변현하(飛辯懸河)의 쏟아지는 물과 같아 이를 듣는 장내의 중사(中使), 증관(證官), 석덕(碩德) 등이 탄복하여 모두 상에서 내려서서 들었으며 발탁하여 상상품(上上品)으로 했다.
그러나 그는 명리를 싫어했고 명산에 유력(遊歷)함을 희망하였다. 조계산(曹溪山)에 가서 보조국사(普照國師)에게 법요(法要)를 자결(咨決)하고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진용(眞容)을 예식(禮識)하고 청평산(淸平山)에 가서 진락공(眞樂公)의 유적을 찾아 문수사기(文殊寺記)를 보고 문인에게 말하기를, 「수능엄경(首楞嚴經)은 곧 인심종(印心宗) 발명(發明)의 요로(要路)라는 어(語)에 이르러서 측연(惻然)이 이에 감동하여 드디어 이 절에 주석(駐錫)하여 능엄경(楞嚴經)을 다 읽고 그 묘지(妙旨)를 궁구(窮究)하여 홍양법교(弘揚法敎)에 반드시 이것으로 머리를 삼았다. 이 법이 세상에 성행한 것은 그로부터 비롯한다.
희종(熙宗) 4년에 왕명에 의하여 개골산(皆骨山) 유점사(楡岾寺)에 주(住)하였고, 6년에 귀척(貴戚)이 경기(京畿)의 연법(演法)을 수리하여 법회(法會)를 열매, 승형(承逈)을 법주(法主)로 천거하니 왕명으로 경사(京師)에 나아감에 상국(相國) 청하공(淸河公)이 수천의 진신(縉紳)을 거느리고 성동(城東) 곽주사(郭住師)에서 환영하고 구의지례(?依之禮)를 올려 온 개경(開京)을 기울였다. 이에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강종(康宗) 2년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임명하고, 고종(高宗)이 대선사(大禪師)를 가(加)하였다. 왕명으로 청하현(淸河縣) 보경사(寶鏡寺)에 주지로 명하였다.
대사가 공산(公山) 염불난야(念佛蘭若)에 있을 때 양삼도(兩三道)의 고승을 동봉(東峯)에 모아 반회(伴會)를 열어 차(茶)를 다릴 때 대한(大旱)으로 모든 곡식이 다 타들어감에 차(茶) 한 잔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아라한(阿羅漢)께 기도드리고 선월화상(禪月和尙)으로 하여금 예참문(禮懺文)을 지어 범창(梵唱)케 함에 곧 비가 쏟아졌다. 이와 같은 영이(靈異;영험과 이적)는 비일비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태산북두로 추앙하고 제자를 청하는 자 구름 같았다.
고종(高宗) 5년에는 태상왕(太上王)의 친속(親屬)에 의하여 그 제4자(第四子)를 체도(剃刀)하여 제자로 삼으니 뒤의 진구사(珍丘寺) 주지(住持) 경지선사(鏡智禪師)가 그 이다. 고종(高宗) 7년(1221년) 7월에 공산(公山) 염불사(念佛寺)로 옮겨 원정(元正)ㆍ춘림(春林) 두선사와 조용히 담도(談道)하고 8월 28일에 머리를 깎고 깨끗하게 목욕하고 9월 2일에 시자(侍子)로 하여금 옷을 갈아입히게 한 뒤 승상(繩床)에 앉아 창범(唱梵)을 명하니 시자(侍子)가 임종에 게(偈)를 청하니 그가 눈을 들어 빤히 쳐다보고는 「이 어리석은 놈아. 내 평생에 일찍이 일게(一偈)도 짓지 않았거늘 무슨 게(偈)인가」하고 조용히 시적(示寂)했다. 이에 10월 10일에 문도(門徒) 50여인이 공산(公山) 남록(南麓)에서 다비(茶毘)했다. 때는 보령(寶齡) 51이요, 법랍(法臘) 24였다. 왕이 듣고 슬퍼하고 국사(國師)를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원진(圓眞)이라 했다. 영골(靈骨)을 수습하여 보경사(寶鏡寺)에 이장(移葬)하고 입탑수비(立塔竪碑)했다.
<참고문헌>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圓眞國師碑銘幷序
9.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
휘(諱)는 혜심(惠諶), 자(字)는 영을(永乙), 호(號)는 무의자(無衣子), 명(名)은 식(寔),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 명종(明宗)8년(1178년)에 나주(羅州) 화순현(和順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향공(鄕貢) 진사(進士) 완(琓)이요,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어머니에게 출가(出家)하기를 빌었으나 허락지 않고 유업(儒業)에 힘쓰게 했다. 신종(神宗) 4년(120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어머니의 병보(病報)를 듣고 고향에 내려와 모친의 병을 간호하면서 정신을 통일하여 관불삼매경(觀佛三昧境)에 들어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다.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寺)로 보조국사를 찾아가 참례(參禮)하고 재(齋)를 올려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여 출가(出家)했다. 오산(蜈山)에 들어가 선정(禪定) 수도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금대암(金臺庵)에서 연좌(宴坐)할 때 이마까지 묻힐 만큼 눈이 쌓여도 꼼짝하지 않았다. 희종(熙宗) 1년(1205년)에 억보산(億寶山)으로 보조국사를 찾아가 산 아래 1㎞ 거리에 왔을 때 보조국사가 암자 안에서 시자(侍子)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게(偈)를 지어
호아향락송나무(呼兒響落松蘿霧) |
이라 하고 보조국사에게 참례할 때 이야기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보조국사가 손에 쥐었던 부채를 그가 게(偈)를 지어
석재사옹수이(昔在師翁手裏) |
이라 하니 보조가 큰 인재로 여겼다. 보조(普照)는 그를 불러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겠다. 너는 마땅히 불법(佛法)을 펼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 본원(本願)을 폐하지 말라」했다. 희종(熙宗) 4년(1208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그에게 사석(師席)을 계승시키고 안규봉(安圭峰)으로 물러가라 하니 그는 굳이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가서 수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1210년 보조(普照) 지눌(知訥)이 입적(入寂)하자 왕명으로 수선사(修禪寺)에 들어가 그를 계승함에 조계종(曹溪宗)의 2세(世)가 되었다. 그의 덕풍(德風)을 사모하여 사방의 인사가 구름처럼 모여드니 당(堂)이 좁아 강종(康宗)이 이를 듣고 증축케 하고 공사를 독려했으며, 준공되자 만수가사(滿繡袈裟)와 마납(磨衲) 각 한 벌과 차(茶)ㆍ향(香)ㆍ보병(寶甁)을 내리고 법요(法要)를 구했다. 이때 왕에게 올린 『필요(必要)』가 지금도 전한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진양공 최우가 당대 하늘의 새도 떨어뜨릴 권좌에 앉아 그를 여러 번 개경으로 맞이하려 했으나 그는 끝내 이르지 않았다. 최우(崔瑀)가 두 아들을 보내어 그를 모시게 하고 일용(日用)을 성의껏 공급했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선사(禪師)가 되고 이어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고종(高宗) 6년(1219년) 단속사(斷俗寺)의 주지에 임명되었다. 뒤에 월등사(月燈寺)에 이주(移住)하고 고종(高宗) 18년(1231년)에 공산(公山) 청량암(淸凉庵)에 주석(駐錫)했다. 고종(高宗) 21년(1234년) 웃으면서 오늘은 이 늙은이가 매우 바쁘다 하고는 월등사(月燈寺)에서 시적(示寂)하니 시호(諡號)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원소(圓炤)라 했다. 향년은 57이고 승랍(僧臘)은 32이다. 저서는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ㆍ선문염송(禪門拈頌)ㆍ선문강요(禪門綱要)』가 있다.
<참고문헌>東國李相國集 第35券 所載 曹溪山第二世斷俗寺主修禪寺主贈眞覺國師碑銘幷序
10. 자정국존(慈淨國尊) 자안(子安)
이름은 자안(子安), 개명(改名) 미수(彌授),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며 본관(本貫)은 일선(一善;善山)이다. 아버지는 한제(漢?), 어머니는 문씨(文氏)로 고종(高宗) 27년(1240년)에 탄생하여 9살에 취사(就師)하여 시서(詩書)를 배우매 일문첩송(一聞輒頌)하여 총민절륜(聰敏絶倫)했다. 13살에 원흥사(元興寺) 종연(宗然)의 당하(堂下)에 나아가 체도(剃度)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고종(高宗) 45년(1258년) 19살에 승과(僧科)에 상품(上品)으로 급제하여 국녕사(國寧寺) 주지가 되었다. 원종(元宗) 9년(1268년) 29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임명되어 유식론(唯識論)을 강설(講說)했다. 이에 일종(一宗)의 기사(耆師)ㆍ석덕(碩德)이 모두 좌하(坐下)에 경(經)을 잡어 희대의 학자라 탄복했다. 젊은 나이에 박학(博學)으로 일세의 표준이 되었고, 삼중(三重)으로서 법(法)을 주(主)함이 전고미증유(前古未曾有)의 일이었다.
능신사(能神寺)에 주(主)함에 수좌(首座)에 오르고 장의사(莊義寺)에 옮기매 승통(僧統)을 가(可)하고 법주사(法住寺)의 주지가 되었다. 왕명으로 불려 하산함에 대장군 김자정(金子廷)이 왕지(王旨)를 전하고 강론무한(講論無閑)에 수불석권(手不釋卷)하고 일대에 불교를 홍양(弘揚)함을 자기의 사명으로 자임(自任)하고 경론(經論)의 해(解)를 찬술(撰述)함이 92권(券)이나 되었다. 중흥사(重興寺)로 옮겨 석교도승통중흥사주지행지원명대사(釋敎都僧統重興寺住持行智圓明大師)를 받고 유가사(瑜迦寺)로 옮겼다가 장의사(莊義寺)로 옮겨 충렬왕(忠烈王) 34년(1308년) 대자은종사개내삼학도단주대장의사주지오교도승통광지묘변불각보명대사(大慈恩宗師開內三學都壇主大莊義寺住持五敎都僧統廣智妙辯佛覺普明大師)의 호를 받고 충선왕(忠宣王) 5년(1313년)에 대자은종사삼중대광양가도승통보리살타마하나국일대사우세군(大慈恩宗師三重大匡兩街都僧統菩堤薩?摩訶那國一大師祐世君)에 제수(除授)하고, 충숙왕(忠肅王) 4년(1317년)에 불해징원홍자광지대도사(佛海澄圓弘慈廣智大道師)에 가봉(加封)했다. 익년에 법가(法駕)를 갖추어 대민사강원(大旻寺講院)에 맞아들여 삼가장소(三家章疏)를 강설케 했다. 곧 동화사(桐華寺) 주지로 옮겨 1324년에는 오공진각묘원무애국존(悟空眞覺妙圓無?國尊)을 올렸다. 익년에 다시 법주사(法住寺) 주지로 옮겨 충숙왕(忠肅王) 14년(1327년)에 시적(示寂)했다. 향년 88, 수납(受臘) 75, 증시(贈諡) 자정국존(慈淨國尊). 탑호(塔號) 보명(普明).
<참고문헌> 高麗國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幷序
11.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 청풍군인(淸風郡人), 자(字)는 구을(丘乙), 구명(舊名)은 청분(淸?), 아버지는 김홍부(金弘富)이고 어머니는 민씨(閔氏)로 고종(高宗) 37년(1250년)에 출생하였다. 호(號)는 무극노인(無極老人). 어려서 뭇 아이들과 놀때도 돌로 탑을 쌓았으며 쉴 때 벽에 면(面)하여 생각하는 것 같이 하였다. 10살에 무위사(無爲寺)의 천경선사(天鏡禪師)에 나아가 머리를 깎고 구산(九山)의 선(選)에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다. 그러나 명도(名途)를 버리고 보각국존(普覺國尊) 일연(一然)을 좇아 사사(師事)하여 전지의발(傳之衣鉢)의 수제자가 되었다. 충렬왕(忠烈王)이 대선사(大禪師)를 제수하고, 충선왕(忠宣王)은 양위도승통(兩街都僧統)을 제수하고, 충숙왕(忠肅王)은 왕사(王師)를 책(冊)하여 구의지례(?衣之禮)을 올렸다. 만년에 늙어 걸퇴(乞退)하여 밀양의 형원사(螢源寺)에 주(住)했다. 절은 본시 선원(禪院)이 있었으나 원정년(元貞年) 중에 지자종(智者宗;天台)의 소유에 속했으나 이에 이르러 대사 때문에 다시 선원(禪院)으로 복귀했다. 충숙왕(忠肅王) 9년(1322년)에 병이 들어 송림사(松林寺)에 이석(移錫)해서 치료하다 이해에 송림사(松林寺)에서 시적(示寂)했다. 향수(享壽) 73, 승하(僧夏) 63, 시호(諡號)를 보감국사(寶鑑國師), 탑호(塔號)을 묘응(妙應)이라 했다. 시문담부(時文膽富)하며 학제가(學諸家)에 관통(貫通)했다. 저술(著述)에 『어록양권(語錄兩券)ㆍ가송잡저(歌頌雜著) 2권ㆍ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 2권ㆍ중편지송사원(重編指頌事苑) 30권ㆍ삼국유사(三國遺事)을 증보하여 무극기(無極記)』라 했음.
<참고문헌>螢源寺寶鑑國師妙應塔碑, 益齋亂藁
12. 홍진국존(弘眞國尊) 혜영(惠永)
속성(俗姓)은 강씨(康氏)로 문경인(聞慶人)이다. 아버지는 내원승겸한림원(內園丞兼翰林院) 자원(子元)이요, 어머니는 홍씨(洪氏)로 조산대부호부시랑충사관수찬관(朝散大夫戶部侍郞充史館修撰官) 홍인연(洪仁衍)의 딸이다. 고종(高宗) 15년(1228년)에 출생하여 11살에 수좌(首座) 충연(沖淵)의 당하(堂下)에 투(投)하여 남백월사(南白月寺)에서 체발(剃髮), 17살에 왕륜사(王輪寺) 선불장(選佛場)에 뽑혀 처음으로 흥덕사(興德寺)에 주석(駐錫)했다. 고종(高宗) 46년(1259년) 삼중대사(三重大師)를 받고, 원종(元宗) 4년에 수좌(首座)에 나아가고 8년에 속리산(俗離山)에 (住)하고 10년에 승통(僧統)을 가(可)했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류경(柳璥)이 백의예참(白衣禮懺0을 청함에 대사는 경문을 방인(旁引)하여 해일권(解一券)을 찬(撰)하니 전하여 귀감(龜鑑)으로 했다. 갑술(甲戌)에는 불국사(佛國寺)에 이주하고 병자(丙子)에는 통도사(通道寺)에 이르러 사리(舍利) 수매(數枚)를 구득하여 좌우에 두었더니 분신(分身)이 많이 생겨 나누어 달라는 이에게 주어도 줄지 않았다. 중흥사(重興寺)에 옮겼다가 왕명으로 경연(京輦)에 머물기를 무릇 9년, 다시 유가사(瑜迦寺) 주지로 옮겼다. 충렬왕(忠烈王) 16년 사경승(寫經僧) 100원(員)을 거느리고 원나라 대도(大都)에 가서 세조(世祖) 쿠빌라이칸의 각별한 위로를 받고 경수사(慶壽寺)에 우(寓)하여 대장경(大藏經)을 금서(金書)로 필사(筆寫)하는 역(役)을 마치고 원사(元使)의 호송을 받으며 귀국할 때 원황제(元皇帝)의 사유(賜遺)가 매우 많았다.
1292년 국존(國尊)으로 책봉(冊封)되어 내의직장(內議直長) 민적(閔?)을 파견하여 호송하여 개경(開京)에 들어옴에 10월 8일 대장군(大將軍) 황원길(黃元吉)에 며앟여 내마(內馬)로 천수사(天壽寺)에 나아가 숭교사(崇敎寺) 별원(別院)에서 환영하고 22일, 국존(國尊)에 책명(冊命)하고 법호(法號)를 보자(普慈)라 했다. 26일, 수녕전(壽寧殿)에서 왕이 군신을 이끌고 친히 오배지례(五拜之禮)를 행하고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을 가(加)하고 동화사(桐華寺) 주지에 임명했다.
계사(癸巳)에 국왕을 배알함에 성도사(成道寺)에 주석(駐錫)하여 주법(主法)을 청했다. 충렬왕(忠烈王) 20년(1294년) 5월 19일 몸이 불편하자 대소롭잖게 여기고 24일에 유서(遺書)와 봉인(封印)을 행이별감(行李別監) 최홍단(崔洪旦)에게 부탁하고는 단정히 앉아 화엄경십지품(華嚴經十地品)을 거양(擧揚)하고 조용히 장서(長逝)했다. 용수산(龍首山) 남강(南岡)에서 다비(茶毘)하여 영골(靈骨)을 수습하여 공산(公山) 동화사(桐華寺)에 탑을 세웠다. 향년 67, 법랍 56, 시호(諡號)를 홍진(弘眞)이라 하고, 탑호(塔號)를 진응(眞應)이라 했다. 국가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김훤(金?)이 왕명에 의하여 비문(碑文)을 찬(撰)했다.
<참고문헌>高麗國大瑜伽桐華寺住持五敎都僧統普慈國尊贈諡弘眞碑銘幷序
○ 弘眞國尊碑銘(篆題) 高麗國大瑜伽桐華寺住持五敎都僧統普慈國尊贈諡弘眞碑銘幷序 師諱惠永俗姓康氏聞慶郡人也考內園丞兼直翰林院諱子元?洪氏朝散大夫戶部侍郎充史館修撰官仁衍女也師生於戊 子歲年至十一投首座?淵堂下剃髮于南白月寺十七中王輪寺選佛場初住興德寺己未歲批授三重大師仍爲乙丑選座 主中統癸亥加首座至元四年移住俗離寺己巳加僧統卒中?柳公璥請釋白衣禮?師旁引經文撰解一?傳爲龜鑑甲戌移 住佛國寺丙子到通度寺乞得舍利數枚常置左右復分身多矣每有乞之者?與之亦不減數是年移住重興寺命留京輦凡九 年?獻詩乞退云戀君可忍辭金闕臨老長懷漱石泉日月瞻光無遠邇願歸林下祝高年乙酉移住瑜伽寺庚寅領寫經僧衆一 百員到 大元國大都以金字法華經爲贄拜見 世祖皇帝特承勞慰寓慶壽寺?衆嚴肅無不敬服一日萬安寺堂頭以種種幢盖莊嚴道場請師講仁王經師陞座演說快若懸河 四衆景仰如見佛日至翌年以金泥寫大藏經事畢 帝乃嘉之賜遺甚厚遣使伴還本國師之顯美於 大國爲所敬重如是曾賈勇於自家射工穿葉又游心於諸法理入忘筌壬辰 上欲封師爲國尊命近侍內衣直長閔?往迎於瑜伽寺師愕然不悅意欲避之緣督强起十月入京師 上命大將軍黃元吉持 內馬出天壽寺迎入崇敎寺別院二十二日?爲國尊法號普慈二十六日於壽寧殿上率群臣行納拜之禮又加五敎都僧統 命住桐華寺癸巳 三殿朝覲請師駐錫成道寺主法至元三十一年正月十九日師示微恙會下明德問疾師云但飮食不調且 對衆從容談笑自若至二十四日寅末喚侍者修遺書封印付囑行李別監崔洪旦振身端坐擧揚華嚴經十地品俄頃泊然而逝 色貌鮮白三日不改大地遍白二月初二日茶毗于龍首山南岡拾靈骨立塔於桐華寺享年六十七法臘五十六時 上適赴會同朝在上都覽遺書震悼贈諡弘眞塔號眞應師天?秀拔?敏過人慈悲爲體矜恕爲心嚴毅寡辭慢無彼此但隨處講授後進爲業嗚呼眞一國所尊之法王也其平生德感靈應不爲不多皆眞境細事又恐落於怪誕此不具載門人金山寺住 持僧統孝楨等瀝哀悰而淚滴重泉呈行狀而情陳九?欲傳鴻迹請立龜趺爰命小臣?揚景行於不朽第虞淺藝具述眞猷之 未當然有勅義不辭難斯强顔撰之以實銘曰 衆生差別 妄見生滅 覺雄出現 隨機演說 權實頓漸 同軌殊轍 慈恩奧旨 尤難析理 慈氏傳之 無著得體 奬基宣布 ?于東土 哲人相繼 稱爲八祖 師其嫡嗣 不愧於古 道彌輿蓋 學通內外 福利無窮 邦家所賴 以仁接物 去華取實 匿己之長 護人之失 隨處弘眞 學者咸歸 惟德是依 禮展?衣 强膺厥命 位是心非 眞風大扇 佛日增輝 預識其時 示寂如怡 天容亦慘 物色含悲 大德二年十月 日 [출전:韓國金石全文』 中世下(1984)〕 |
○ 동화사홍진국존비(桐華寺弘眞國尊碑) ○ 홍진국존비명(弘眞國尊碑銘) [전액(篆額)] ○ 고려국(高麗國) 대유가(大瑜伽) 동화사(桐華寺) 주지(住持)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 보자국존(普慈國尊) 증시홍진비명(贈諡弘眞碑銘)과 아울러 그 서문(序文) 봉익대부(奉翊大夫)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 문한학사(文翰學士) 신(臣) 김훤(金?)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정의대부(正議大夫) 밀직사(密直司) 좌승지(左承旨) 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 문한학사(文翰學士) 충사관(充史館) 수찬관(修撰官) 지제고(知制誥) 신(臣) 김순(金恂)은 교지(敎旨)에 따라 비문을 쓰고, 문인(門人)이며 동화사 주지인 심지동해(深智洞解) 오명대사(五明大師) 효정(孝楨)은 입비공사(立碑工事)를 맡아 보았다. 스님의 휘는 혜영(惠永)이고, 속성은 강씨(康氏)니, 경상북도 문경군(聞慶郡) 출신이다. 아버지는 내원승(內園丞)에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임하였는데, 휘는 자원(子元)이다. 어머니는 홍씨(洪氏)니 조산대부(朝散大夫)이며 호부시랑(戶部侍郞) 충사관(充史館) 수찬관(修撰官)인 인연(仁衍)의 딸이다. 스님은 무자세(戊子歲)에 탄생하였다. 11살 때 충연수좌(?淵首座)의 당하(堂下)를 찾아가서 있다가 남백월사(南白月寺)에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17살 때 왕륜사(王輪寺) 선불장(選佛場)에서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처음으로 흥덕사(興德寺)에 머물렀다. 기미세(己未歲)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받았으며, 을축년(乙丑年)에는 좌주(座主)에 선출(選出)되었다. 중통(中統) 계해년(癸亥年)에 이르러서는 수좌(首座)의 법계를 첨가(添加)받았으며, 지원(至元) 4년에는 보은 속리사(俗離寺)로 이주(移住)하였고, 기사년(己巳年)에는 승통직(僧統職)에 올랐으며, 중찬(中贊)유경(柳璥)이 국사에게 백의예참(白衣禮懺)을 주석해 줄 것을 요청하므로, 국사는 여러 경문(經文)을 인용 참고하여『백의예참해(白衣禮懺解)』1권을 찬술하였는데, 후세에 전하여 귀감이 되었다. 갑술년(甲戌年)에는 불국사(佛國寺)로 옮겨갔으며, 병자년(丙子年)에 양산 통도사(通度寺)로 가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몇과를 기도 끝에 얻어서 항상 좌우에 모시고 있었는데, 다시 그 사리가 분신(分身)하여 여러 개가 되었다. 수시로 누구나 모시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나누어 주어도 또한 그 본래의 수효는 전혀 줄어들지 아니하였다. 이 해에 다시 중흥사(重興寺)로 이주하였는데, 왕이 경련(京輦)으로 초빙하여 개성에서 9년간 주석하고 산중(山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비는 다음과 같은 걸퇴시(乞退詩)를 지어 바쳤다. 님을 위해 참고 참아 축리(祝釐)했으니 을유년(乙酉年)에는 유가사(瑜伽寺)로 옮겼다가, 경인년(庚寅年)에 이르러 사경승(寫經僧) 일백명(一百名)을 거느리고 대원국(大元國)의 대도(大都)에 가서 금자(金字) 법화경(法華經)을 사경하여 선물로 올리자 세조황제(世祖皇帝)가 크게 기뻐하면서 그 노고를 치하하고, 경수사(慶壽寺)에 머물게 하였다. 이 때 국사께서 대중 지도를 엄숙히 하여 모범을 보였더니, 모두 경복(敬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어느 날 만안사(萬安寺)의 당두(堂頭)가 여러 가지 깃발·일산·의장(儀仗)·당(幢)·다라니(陀羅尼) 등으로 도량을 장엄하고, 국사로 하여금『인왕경(仁王經)』을 강설해 주기를 청하였다. 국사께서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법상(法床)에 올라 연설(演說)하시니 그 명쾌함이 마치 현하(懸河)의 변재(辯才)와 같았다. 청법한 사부 대중들은 크게 앙모(仰慕)하여 마치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과 같이 기뻐하였다. 그 다음 해에 이르러 금니(金泥)로 대장경(大藏經)을 쓰는 사경 불사를 마치니, 세조(世祖)가 크게 가상히 여겨 귀하고 소중한 많은 선물을 하사(下賜)하고, 사신(使臣)을 보내어 국사의 귀국 길에 동반하여 호송케 하였다. 국사께서 두드러진 아름다움을 대국(大國)에 선양하여 이와 같은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국사는 더욱 힘찬 용기를 자신에게서 얻어 마치 사공(射工)벌레가 풀잎을 갉아 먹는 것과 같이 일이 순조로웠고, 또 항상 마음을 교법(敎法) 연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이입망전(理入忘筌)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 임진년(壬辰年)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자 근시(近侍)인 내의(內議)직장(直長) 민적(閔?)에 명하여 스님을 유가사(瑜伽寺)로 영접하니, 스님께서는 깜짝 놀라 국존 추대를 싫어하여 마음으로 이를 피하여 도망하려 했다. 그러나 왕도 물러서지 않고 연독(緣督)에 맞추면서 억지로 추대하려 하였다. 10월에 경사(京師)에 들어가니, 임금께서 대장군(大將軍) 황원길(黃元吉)에게 명하여 내마(內馬)를 가지고 천수사(天壽寺)로 가서 국존을 숭교사(崇敎寺) 별원(別院)으로 영입하고, 22일 국존으로 모시는 책봉식(冊封式)을 거행하였으니, 법호는 보자(普慈)이시다. 그리고 26일 수녕전(壽寧殿)에서 임금께서 군신(群臣)들을 거느리고 국존의 직인을 드리는 납배(納拜)의 예를 행하고, 또 이어서 오교도승통직(五敎都僧統職)을 제수(除授)하고, 동화사 주지로 임명하였다. 계사년(癸巳年)에 삼전(三殿)을 찾아 배알(拜謁)하였더니, 스님을 청하여 성도사(成道寺) 주법(主法)으로 추대하였다. 지원(至元) 31년 1월 19일 스님께서 가벼운 병을 보였다. 회하(會下)에 있는 명덕(明德)이라는 스님이 국존에게 병세를 물으니, 국존께서 이르시기를 「다만 음식의 소화가 잘 안될 뿐이다」라 하였다. 또 대중(大衆)을 상대함이 종용(從容)하며 담소(談笑)도 자약(自若)하였다. 24일 연시(寅時) 말(末)에 시자(侍者)를 불러 유서(遺書)와 직인을 함께 봉하게 하고, 행이(行李) 별감(別監)인 최홍단(崔洪旦)에게 부탁하여 임금님께 전하도록 하고는 단정히 앉아『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십지품(十地品)을 거양(擧揚)한 다음, 조금 있다가 조용히 입적하였다. 얼굴빛과 모양이 선백(鮮白)하여 3일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대지(大地)는 눈으로 덮여 백은색(白銀色)이었다. 2월 2일 용수산(龍首山) 남쪽 산기슭에서 화장하여 영골(靈骨)을 수습하고 탑은 동화사(桐華寺)에 세웠다. 세수는 67세요, 법랍은 56하(夏)였다. 이때 충렬왕은 원(元)나라 세조(世祖)를 만나기 위하여 원의 서울인 상도(上都)에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국존의 유서(遺書)와 부음(訃音)을 받아 보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시어 시호를 홍진(弘眞), 탑호(塔號)를 진응(眞應)이라 추증하였다. 국존께서는 천품(天?)이 수특(秀特)하여 총명과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자비로써 몸을 삼고 긍서(矜恕)로써 마음을 삼았을 뿐 아니라, 엄격하고 강직하여 과묵(寡默)하며 피차(彼此)에 대하여 전혀 교만한 마음이 없었고, 다만 어디에 있던 후진(後進)에게 강수(講授)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슬프도다! 참으로 일국(一國)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법왕(法王)이시다. 국존께서 평생 동안 도덕으로 말미암아 감득(感得)하신 영험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는 모두 진리의 세계에서는 세세한 말변사(末邊事)에 속하는 것이며, 또 보는 사람들이 괴이(怪異)하고 허탄하게 여길까 염려되어 이 비문에는 모두 기록해 두지 않는다. 문인(門人)으로 금산사 주지이며 승통(僧統)인 효정(孝楨) 등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종(哀悰)으로 떨어지는 눈물이 깊은 샘을 채웠다. 스님의 행장(行狀)을 모아 구달(九?)에 진정하여, 위대한 홍적(鴻迹)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귀부(龜趺)를 세우도록 허락을 청하였으므로, 임금님께서 소신(小臣)에게 명하여 스님의 경행(景行)을 돌에 새겨 크게 천양토록 하라 하였으나, 다만 학예(學藝)가 천박하여 스님의 참된 자취를 구술(具述)할 능력이 부족함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 내리신 조칙(詔勅)을 끝내 사양할 길이 없어서 뻔뻔한 얼굴을 무릅쓰고 사실대로 명(銘)하여 이르기를, 중생근기(衆生根機) 상중하(上中下)로 차별이 없고 대덕(大德) 2년 10월 일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 |
13.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
호(號)는 설산(雪山)이며 흥해인(興海人)이다.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충렬왕(忠烈王) 33년(1307년)에 태어났다. 나이 13살에 화엄반룡사주(華嚴盤龍寺主) 일비대사(一非大師)에게 나아가 축발(祝髮)했다. 충숙왕(忠肅王) 12년(1325년)에 승과(僧科) 상품(上品)에 급제했다. 이어 금생사(金生寺), 덕천사(德泉寺), 부인사(符仁寺), 개태사(開泰寺) 등 10여 절에서 주석(駐錫)했다. 지조가 심히 높아 멀리 선지(禪旨)를 참구(參究)하고자 중국에 건너가 구법(求法)하려고 강남(江南)에 유학(遊學)하여 휴휴암(休休庵) 몽산진당(蒙山眞堂)에 이르러 몽산화상(蒙山和尙)의 의발(衣鉢)을 전수(傳授)받고 성안사(聖安寺)로 만봉(萬峰)을 참배했다. 뒤에 귀국하여 치악산에 숨어 수행을 하다가 동해(東海)로 옮겨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 진신(眞身)을 만나보고 치악(雉岳)에 들어갔다.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맞이하여 국사(國師)에 대배(大拜)하고 대화엄종사선교(大華嚴宗師禪敎) 도총섭(都摠攝)이 되었다. 금강산(金剛山)에 유력(遊歷)하다가 돌아와 치악(雉岳)에 들어 가기를 간청하여 국왕의 윤허를 받고 돌아와 뒤에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고 주(住)하다가 우왕(禑王) 8년(1382년)에 시적(示寂)했다. 우왕(禑王)이 시호(諡號)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대각원조(大覺圓照)라 했다.
<참고문헌> 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
14. 원참(元?)
고려(高麗) 충렬왕대(忠烈王代) 고승으로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거조사(居祖寺)에 주석(駐錫)했다. 충렬왕(忠烈王) 24년(1298년) 대덕(大德) 2년에 거조사(居祖寺) 도인(道人)으로 정월 초8일 반야(半夜)에 낙서(樂西) 도인(道人)으로부터 법(法)을 전수받아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을 지었다. 그것은 아미타불본심미묘진언(阿彌陀佛本心微妙眞言)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을 일천 번 외운 뒤에 간자(簡子;?)를 던져 후생의 수생처(受生處)를 점지(占知)하여 정토왕생(淨土往生)의 참법(懺法)을 닦는 것을 내용으로 한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관계있는 점찰경(占察經)이다. 이 경(經)을 강희(康熙) 10년(1710년) 신묘년(辛卯年)에도 지리산(智異山) 쌍계사(雙溪寺), 칠불암(七佛庵)에서 간행되기도 했다. 이를 『현행서방극락경(現行西方極樂經)』이라고 칭한다.
정통(正統) 13년(1448년) 무진본(戊辰本)과 가정(嘉靖) 10년(1531년) 신묘년(辛卯年)에 칠불암(七佛庵) 개간본(開刊本)이 세전(世傳)한다.
15. 우운(友雲)
속성(俗姓)은 김씨(金氏), 관향은 언양(彦陽)이다. 우정승(右政丞)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 김륜(金倫)의 아들이며, 수사도상주국언양백(守司徒上柱國彦陽伯) 검교(檢校) 시중(侍中) 김경직(金敬直)의 형이다. 어려서 화엄종(華嚴宗)에 투탁(投托)하여 축발(祝髮)해서 현수교관(賢首敎觀)을 배웠다. 화엄학에 통달하자 압록강을 건너 요동(遼東)ㆍ심양(瀋陽) 등을 거쳐 연경(燕京)에 구법(求法)하고 멀리 강절(江浙), 오회(吳會) 등지에까지 몇 만리를 순례하여 불적(佛跡)과 명산대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구법(求法)하고 고승과 교유하여 바랑 가득히 이심전심게(以心傳心偈)와 증별(贈別)한 시가 차 있었다.
귀국 후 아우 조계잠공(曹溪岑公)과 함께 화엄종(華嚴宗)의 고승대덕으로 이름이 높자 공민왕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경주(鷄林)의 단암(檀菴)으로 은퇴하여 5~6년간 산수를 즐기고 숨어살았다. 조정에서 왕명으로 간청하여 팔공산(八公山) 부인사(符仁寺)의 주지에 임명했다. 그뒤 개경(開京) 법왕사(法王事)에 맞아 화엄종사(華嚴宗師)로 삼아 화엄종풍(華嚴宗風)의 크게 일으키고 후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겨우 일년 만에 간청하여 산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부득이 떠나보냄에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 당대의 명현이 모두 이별의 시를 지어 떠나보냈다. 유명한 두시(杜詩) 시승(詩僧) 의침(義砧)이 그의 제자이다.
<참고문헌> 三峰集
16. 부용(芙蓉) 운관(雲觀)
호(號)는 은암(隱菴), 연선도인(蓮船道人), 부용당(芙蓉堂)이며 진주인(晋州人)이다. 성종(成宗) 16년(1485년)에 출생하여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낚시질에 갔다가 고기 다래끼를 메게 했더니 운관(雲觀)이 살아있는 고기를 골라 이를 모두 방생(放生)했다. 아버지가 크게 노여워하며 그를 때렸다. 운관(雲觀)은 울면서 말하기를, 「사람이나 동물이나 목숨을 사랑하는 것은 똑같은데 용서하세요」함에 아버지가 노여움을 그쳤다. 13살 때 밤에 몰래 집을 나가 홀로 가서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 고행선사(苦行禪師)에 나아가 3년 동안 법(法)을 배우고 머리를 깎았다. 17살에 신총법사(信聰法師)에 나아가 배우고 위봉대사(威鳳大師)에게 절하고 선추(禪樞)에 들어갔다. 구천동(九泉洞)에 들어가 손수 여(廬;오두막)을 짓고 9년을 살다가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조우대사(祖愚大師)를 찾아 토선(討禪)의 여가에 노장(老莊)을 섭렵했다.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배우고 학매선자(學梅禪子)를 찾아 선학(禪學)을 배우고 금강산 대존암(大尊庵)에 이르러 조운대사(祖雲大師)와 함께 결하(結夏)하기를 2년, 미륵봉(彌勒峰)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 묵좌(?坐)하기를 9년, 뒤에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 지엄(智嚴)ㆍ벽송(碧松)의 문을 두드려 20년의 숙제(宿題)가 얼음 녹듯이 풀려 정례(頂禮)하며 감탄하기를, 이 분이 참으로 내 스승이라 했다. 3년 동안 집시(執侍)한 뒤에 황룡산(黃龍山)에 있다가 팔공산에 와서 여러 해 주석(駐錫)했다. 혹은 대승동(大乘洞)에, 혹은 의신동(義神洞)에, 혹은 연곡동(燕谷洞)에서 있으면서 수도정진(修道精進)했다. 선조(宣祖) 5년(1571년)에 입적하니 나이 87, 법랍 72였다.
대사(大師)는 단연 교계(敎界)의 대종사(大宗師)로 추앙받아 문하(門下)에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휴정(淸虛休靜), 사명당(四溟堂) 송운유정(宋雲惟政), 선수(善修) 등의 걸승(傑僧)이 배출되었다.
<참고문헌>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17. 환적(幻寂) 의천(義天)
속성(俗姓)은 문씨(文氏), 자(字)는 지경(智鏡)이며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문두성(文斗成)의 아들로 선조(宣祖) 37년(1603년)에 출생하여 11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이사 가서 보은의 종곡(鐘谷)에 살았다. 이 해 가을 속리산(俗離山) 복천사(福泉寺)에 들어가 진정당(塵靜堂) 탁린선사(琢璘禪師)를 좇아 출가하고 14살에 사(師)를 따라 금강산 정양사(正養寺)에 들어가 서산(西山)의 문인 편양당(鞭羊堂) 언기선사(彦機禪師)에게 나아가 수학하고 일 년 뒤에 돌아와 속리산(俗離山) 동관음(東觀音) 봉서암(鳳栖庵)에 있었다. 나이 16세에 처음으로 낙발(落髮)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에 들어가 송계당(松溪堂) 성현대사(性賢大師)에 나아가 5년간 경학(經學)을 배우고 21살 청량산중(淸凉山中)에 들어가 서(誓)를 세워 곡식을 끊고 솔잎을 먹고 벽곡(?穀)하기를 31년에 이르렀다. 노자모(老慈母)의 강권(强勸)에 의하여 처음으로 곡식을 먹었다. 나이 88살에 해인사(海印寺) 백련암(白蓮庵)에서 입적했다. 대사(大師)는 석장(錫杖)이 표연(飄然)하여 정착하는데 없으며 팔도명산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데가 없었다. 환적암(幻寂庵)을 세운 것이 4군데나 되었다.
<참고문헌>楓溪集
18. 월하(月荷) 계오(戒悟)
속성(俗姓)은 권씨(權氏), 자(字)는 붕거(鵬擧), 안동인(安東人)이다. 나이 11살에 부모의 뜻에 따라 팔공산(八公山) 산월암(山月庵)의 수좌(首座)에 나아가 중이 되어 법을 지봉화상(智峯和尙)으로부터 받고 침허법사(枕虛法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 식해초절(識解超絶)하여 선지(禪旨)에 투오(透悟)했다. 출가 후에는 사실(士室)을 주(住)하는 가람(伽藍) 옆에 짓고 어머니를 받들어 성의(誠義)를 다했다. 어머니가 늙어 눈이 멀었다가 홀연히 다시 눈이 밝아지니 세상에서 이를 효감(孝感)의 결과라 했다. 여가에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섭렵해서 문(文)이 담민호창(膽敏豪暢)하고 시(詩)는 매우 고고(高古)하여 조탁(彫琢)의 흔적이 없으며, 필법 또한 묘하여 일로(一路)의 비판병장(碑板屛障)이 거의 그의 솜씨였다. 계율(戒律) 또한 매우 엄하여 명리(名利) 때문에 행각(行脚)하지 않았다. 당세(當世)의 진신(縉神)들이 모두 대사(大師)와 창수(唱酬)했다. 나이 60이 넘자 시문(詩文)을 악업마장(惡業魔障)이라 하여 일도단제(一刀斷除)하고 향(香)을 피워 면벽(面壁)하여 전심염송(專心念誦)하다가 헌종(憲宗) 15년(1849년) 가지산(伽智山) 연등정사(燃燈精舍)에서 시적(示寂)하니 년(年) 77, 법랍(法臘) 66이며, 유고(遺稿)를 『가산고(伽山稿)』라 한다.
<참고문헌>伽山集
19.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자(字)는 이환(離幻), 호(號)는 사명당(四溟堂)ㆍ송운(松雲)ㆍ종봉(鐘峯)이며 속성(俗姓)은 임씨(任氏)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아버지는 교생(校生) 수성(守成), 할아버지는 유학(幼學) 종원(宗元), 증조할아버지 효곤(孝昆)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달성서씨(達成徐氏)로 중종(中宗) 39년(1544년)에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7살에 할아버지 종원(宗元)의 밑에서 공부했다. 어려서부터 총명 준수하여 범상한 아이는 아니었다. 놀 때는 늘 모래로 탑을 쌓고 돌을 세워 부처를 만들고 꽃과 밥을 가져다 공양했다. 하루는 그물질하는 이가 큰 자라를 잡아 가지고 가는 것을 보고 밤을 주어 값으로 치르고 물에 놓아 주었다. 13살에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에게 나아가 맹자(孟子)를 배웠다. 어느 날 책을 덮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세속의 학문은 비루해서 세상 인연에 얽매었도다. 어찌 빈틈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만 같으랴」하고는 곧장 황악산(黃嶽山) 직지사(直指寺)에 가서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처음으로 『전등록(傳燈錄)』을 읽어 아직 다 끝내지 못했으나 대사는 이미 깊은 뜻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여러 노승들도 모두 그에게 묻게 되었다.
명종(明宗) 16년(1561년) 신유(辛酉)에 선과(禪科)에 급제했다. 이로부터 그의 문명(文名)은 천하에 알려져 일시의 학사(學士)ㆍ대부(大夫)ㆍ시인(詩人)들인 사암(思庵) 박순(朴淳)ㆍ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ㆍ제봉(霽峯) 고산명(高散命)ㆍ하곡(荷谷) 허봉(許?)ㆍ 백호(白湖) 임제(林悌)ㆍ손곡(蓀谷) 이달(李達) 같은 이들과 교환(交驩) 창화(唱和)하여 문원(文苑) 사림(祠林)에 명성을 용동(聳動)했다.
허봉(許?)과 한퇴지(韓退之)의 문장 외우기에 이긴 천재인 기대승(奇大升)의 간곡한 충고를 받아들여 자자(孜孜)히 공부하여 사자(四子)와 이두(李杜)를 노수신(盧守愼)에게 배워 시문(詩文)이 빛나고 내전의 천 상자 책을 모두 읽어 통달했다. 이에 이 고승(高僧)에게 사사(師事)하려는 학승(學僧)이 산문(山門)에 운집했다. 선조(宣祖) 8년(1575년)에 선종봉은사(禪宗奉恩寺) 주지로 추천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서산대사(西山大師;淸虛休靜)에 사자(師資)하여 학(學)을 배웠다. 3년간 고행(苦行) 수학(修學)하고 선조(宣祖) 12년(1578년) 무인(戊寅)에는 노사(老師) 청허(淸虛)를 작별하고 풍악(楓岳)에 들어가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선조(宣祖) 15년(1581년) 신사(辛巳)에 팔공산에 와서 동화사 등지에서 수년 간을 수도하고 청량산, 태백산 등지에서 수도하고 선조(宣祖) 20년(1586년) 병술(丙戌)에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庵)에 이르렀다.
선조(宣祖) 22년(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관련된 혐의로 강릉부(江陵府)에 투옥되었으나 선비들의 구원으로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주(住)했다.
선조(宣祖)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수백을 모집하여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거의승병(擧義僧兵)이 수천에 이르렀다. 선조의 명으로 청허휴정(淸虛休靜)에게 제도승병(諸道僧兵)을 총섭(總攝)케 했으나 늙어 유정(惟政)을 천거하여 대신케 했다. 이에 그는 수천 승군(僧軍)을 이끌고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 휘하에 들어가 명(明)나라 원군과 합동 작전하여 평양을 수복했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을 따라 영남(嶺南)으로 내려가 의령(宜寧)에 주둔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선조(宣祖)는 이에 그를 포상하여 당상(堂上)의 품계(品階)를 주었다.
선조(宣祖) 27년(1594년) 명총병(明總兵) 유정(劉綎)의 명(命)으로 부산(釜山)에 입성하여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세 번이나 회담차 내왕하면서 적정(敵情)을 탐지했다. 이때 가등이 「조선에는 무슨 보물이 있소」함에 「조선에는 보배가 없고 일본에 보배가 있다」하니 「그게 무슨 말인가?」함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너의 머리를 보배로 알고 있다. 그러니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하며 가등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선조대왕(宣祖大王)이 그를 대궐로 불러 평생(平生)의 일을 묻고 하교하기를, 「옛날 중국의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는 모두 산 사람으로 뛰어난 공을 세우고 이름을 후세에 전했다. 만일 그대가 머리를 기른다면 마땅히 백리의 땅을 다스릴 책임을 맡기고 삼군(三軍)을 거느릴 일을 줄 것이다」고 권함에 그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 하고 사양하고 나왔다. 임금이 하사하는 갑옷과 무기를 받고 영남(嶺南)으로 내려와 승군(僧軍)을 지휘하며 왜적과 싸워 전과를 올리며 동화사(桐華寺)에서 승군(僧軍)을 조련하면서 지휘하여 공산성(公山城)을 쌓고 또 금오산성(金烏山城)ㆍ용기산성(龍起山城)을 쌓아 왜구에 대항했다.
선조(宣祖)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명장(明將) 마귀(麻貴)와 연합하여 울산(蔚山) 도산(島山)에 입성하고 이듬해에는 유제독(劉提督)과 합동작전으로 순천예교(順天曳橋) 작전에 수공(首功)을 세웠다. 그는 4,000섬의 군량미와 1만의 병기를 비축했다. 왕은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제수했다. 선조(宣祖) 38년(1604년) 종전(終戰)으로 국서(國書)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만나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었다. 일본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우리나라 포로 1,500명을 쇄환(刷還)했다.
이에 선조는 가선대부행용양위대호군(嘉善大夫行龍?衛大護軍)을 제수하고 어마(御馬)와 모시옷을 하사했다. 1605년 묘향산에 가서 1604년에 입적한 스승 휴정(休靜)의 영탑(影塔0에 배례(拜禮)하고 보현사(普賢寺)에 유(留)하면서 복상(服喪)하고 선조(宣祖) 40년(1606년) 영선군(營繕軍)을 지휘하여 궁궐중건에 힘쓰다 1607년 벼슬을 내놓고 치악산(雉岳山)에 돌아왔다. 1608년 선조(宣祖)의 휘음(諱音)을 듣고 한양(漢陽)에 올라와 배곡(拜哭)하고 이내 병을 얻어 신음했다. 광해왕이 서쪽에 가서 오랑캐를 막으라는 명령을 받들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병을 조리함에 광해왕이 여러 번 약을 하사했다. 광해군 2년(1610년) 국왕이 방백에 명하여 상경시켜 명의로 하여금 치병케 하라는 조치를 취했으나 이 해에 해인사(海印寺) 홍제암(弘濟庵)에서 시적(示寂)했다. 시호(諡號)를 자통홍제존자(自通弘濟尊者)라고 하며, 밀양(密陽) 표충사(表忠祠), 묘향산 수주충사(酬州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참고문헌>有明朝鮮國自通弘濟尊者四溟松雲大師石藏碑銘, 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碑堂碑銘, 四溟堂集
20. 영파(影波) 성규(聖奎)
속성(俗姓)은 전씨(全氏), 아버지는 만기(萬紀)이며 영조(英祖) 4년(1728년)에 출생하여 청량암(淸凉庵)에서 글을 읽었다. 공불(供佛)의 시(時)에 제승(諸僧)이 회선막배(回旋膜拜)하는 것을 보고 곧 사신(捨身)의 원(願)을 발하여 4년 뒤에 집을 하직하고 비슬산 용천사(湧泉寺)에 가서 출가(出家)하기를 청했다. 환응장로(喚應長老)는 이를 사랑하여 허락하고 머리를 깎고는 계율(戒律)를 주었다. 이로부터 사방(四方)에 참심(參尋)하고 운유(雲遊)하며 도(道)를 찾아 해봉(海峰), 연암(燕巖), 용파(龍坡), 영허(影?) 등 제 명사(諸名師)에 역참(歷參)해서 사자(師資)했다. 하루는 꿈에 일실(一室)에 들어가니 꿈에 서가에 불경이 가득 찬 것을 보았다. 장황선정(粧潢鮮淨)한 것이 모두 화엄경(華嚴經)이었다. 옆에 노승이 있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도(道)는 이곳에 있노라 했다. 월(越) 9년에 황산(黃山) 퇴은장로(退隱長老)가 일견(一見)해서 심계(心契)하여 화엄경(華嚴經) 전부를 가져다 그에게 주었다. 책 모양이 과연 전번 꿈과 같았다. 이를 열심히 읽어 중현(重玄)의 이(理)를 탐(探)하고 최묘(最妙)의 지(旨)를 구(究)함이 30년을 하루같이 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공(禪工)은 지송(持誦)을 제일로 한다」하고 보현관음(普賢觀音) 양보살(兩菩薩)로서 원불(願佛)을 삼아 치재(致齋)에 힘썼다. 무술(戊戌)로부터 신축(辛丑)에 이르러 대비주(大悲呪) 십만편(十萬遍)을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갑술(甲戌)이래 설파(雪坡)ㆍ함월(涵月) 두 화상(和尙)에게 나아가서 화엄(華嚴)의 종지(宗旨)와 선교(禪敎)의 요령(要領)을 얻고 신의(信衣)를 받아 등단(登壇) 설법(說法)했다. 순조(純祖) 12년(1812년)에 시적(示寂)했다. 년(年)은 85, 승랍(僧臘) 66이며 은해사(銀海寺)에 비(碑)가 있다.
영파(影波)는 서산(西山)의 6세(世)이니 이를 계보화(系譜化)하면 청허(淸虛;西山)-편양(鞭羊)-풍담(楓譚)-명담(明潭)-환성(喚醒)-함월(涵月)-영파(影波)이다.
<참고문헌>朝鮮佛敎通史(李能和), 朝鮮金石總攬
○ 有明朝鮮國禪敎兩宗正事華嚴大講主影波大師碑銘幷序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奎章閣提學南公轍撰 我東方佛法之盛昉自羅麗名藍巨刹相望諸道逮至本朝儒賢輩出斥佛之論始盛而間有樹立傑然者則士大夫公言顯誦而進之若西山大師休靜是己?在宣廟壬辰倭充斥車 駕播越當是時西山慨然倡義旅談笑而揮之又進其弟子惟政奉使日本和議遂成社稷賴以復安其忠君?國之誠固己令冠儒服儒者吐舌矣厥後衣鉢相傳六世而有影波大師焉?受戒珠密傳心印其誦經之勤持律之嚴非徒軌範禪門矜式僧徒況聞其恭具香燭每夜頂禮仰祝聖主之壽至老不廢如非君臣之大義根於秉?者鳥能與於此乎大師法名聖奎字晦隱俗姓全氏高麗玉山君永齡之十六世孫也父曰萬紀母凝川朴氏夢大星入懷而有娠以英廟戊申十一月十一日生兒時命名泰夢以表其異大師生標奇骨卓越凡流年十五讀書於淸凉菴見供佛時諸僧?旋膜拜若有妙悟宿因忽發捨身之願越四年辭家至湧泉寺自投五體虔請出家喚應長老愛而許之遂令削染遽授戒律是夜夢見披緇老釋立于階前鳴磬作禮者三自是四遠?尋雲遊訪道歷?海峰燕巖龍坡影?諸名師服膺其敎勤苦得力一日忽思曰釋門闡敎者以頓悟爲先乃於金剛臺設伊蒲盛供滌潔道場仰祈觀音法力旣罷齋夢入一室見佛書滿架裝潢鮮?盡是華嚴經傍有老僧指曰道在是矣越九年黃山退隱長老一見而心契以華嚴全部授之摩?粧卷果符前夢讀之旣熟仍探重玄之理究衆妙之旨者三十年如一日譬之儒家其所謂眞實心地刻苦工夫者耶?謂禪工持誦爲最以普賢觀音兩菩薩爲願佛致齋尤勤又自戊戌至辛丑誦大悲呪十萬遍日以爲課自甲戌以來?雪坡月二和尙盡得華嚴宗旨及禪敎要領仍受信衣登壇盖空門之淵源有自來矣壬辰七月二十七日以微疾示寂報齡八十五僧臘六十有六先是夢見天狗星問己窮達壽夭則答曰名滿東國達而不窮壽至八十加五至是果驗火浴之夕靈雨?微祥 雲?空于時慕義者寄聲相吊受業者銜悲以泣是豈無所以而然哉噫師之?性溫柔志氣淸明喜怒不形於色貨利不?於懷由是早棲?土久離客塵慈航寶筏普濟衆生貧病到門若?在己或有來?者則隨力?給少無難色故食客之?恒滿戶外自少律己最嚴每日必整衣跏趺不設惰容平生不言人是非恂恂退讓非其義則一芥不以取諸人尤豈不難哉至若西經千?腹貯其?東南名刹足跡殆遍所化徒衆不翅千百師之風聲無往不布若此者雖古之名釋無以加此矣前後夢徵頗異且念大師必不虛張而欺世此亦略書焉弟子知添卽其高足也自??時常遊其門有所觀感者?今焉永切追攀謀樹?碑撮其耳目之所睹記走其徒夢弼碩旻等?足千里請文於余閱累年而益勤余於禪家文字未?數數爲之而至如西山泗溟竊有曠感者存曾撰紀績之碑矣大師之於西山泗溟寔爲嫡傅而且其中有貞不絶俗者存焉鳥可無述乎遂不辭而爲之文係之以銘曰 維此禪伯沙門之傑?嶺宿根華嚴妙訣水月澄懷烟霞怡神莊蝶??非幻卽眞密受秘印旋登法壇?室止水作如是觀上溯淵源旁逋津筏一念慈悲不自爲伐律身之嚴無愧吾儒仁者必壽理不可誣因果方圓法棟俄?人亡道存緇素興哀?彼山門龜頭十尋我作銘辭永垂祇林 崇禎紀元後三丙子六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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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선교양종정사(禪敎兩宗正事) 화엄대강주(華嚴大講主) 영파대사(影波大師) 비명(碑銘) 서문을 병기함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겸(兼) 이조판서(吏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知經筵) 춘추관성균관사(春秋館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남공철(南公轍)이 찬술하였고, 봉렬대부(奉列大夫) 행 전생서부봉사(行典牲署副奉事) 심의경(沈宜慶)이 글씨를 썼고, 장사랑(將仕郎)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 유한지(?漢芝)가 전액(篆額)을 썼다. 우리 동방에 불법(佛法)이 성대하였던 것은 신라와 고려 때로부터이니 이름나고 거대한 사찰들이 여러 도에 즐비하였다. 그런데 본조(조선)에 이르러 유학자들이 출현하여 척불론(斥佛論)이 비로소 성대해 지기 시작하였지만, 스님들 중에서 간간히 대단한 업적을 수립한 자가 있으면 사대부들도 그 공적을 말하고 드러내 칭송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같은 이가 바로 그 분이시다. 선묘(宣廟)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왜군이 쳐들어오니 임금의 거가(車駕)가 몽진을 떠나시게 되었다. 바로 이때에 서산대사께서는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담소를 나누듯 순조롭게 그들을 지휘하였고 그의 제자 유정(惟政)을 천거하여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보내서 화의(和議)가 드디어 이루어지자 사직(社稷)이 그것에 의거해 평안함을 회복하였다. 그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보호하려는 참된 마음은 진실로 유자들로 하여금 이미 여기저기서 칭찬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 뒤에 의발(衣鉢)이 전해져 내려가기를 6세가 지난 뒤에 영파대사(影波大師)가 이를 이어 받았다. 은밀히 계주(戒珠)를 이어받고 또 심인(心印;불교 선종에서 사용하는 말.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심상으로 인증하여 돈오를 기약하는 것을 말한다.)을 전수받았다. 그는 경을 열심히 외었으며 엄격히 율을 지켰으니 선문(禪門)의 궤범이 될 뿐만 아니라 승도들의 모범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향촉(香燭)을 공경히 갖추어 놓고 매일 밤 성주(聖主)의 장수를 위하여 부처님께 절하며 빌었는데 늙도록 그만두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이는 만일 군심의 대의가 떳떳한 이치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대사께서는 법명(法名)이 성규(聖奎)이고 자(字)가 회은(晦隱)이며 속성(俗姓)은 전씨(全氏)이다. 고려(高麗) 옥산군(玉山君) 영령(永齡)의 16세손이었다. 아버지는 만기(萬紀)이고 어머니는 응천(凝川) 박씨(朴氏)이다. 어머니는 꿈에 큰 별이 품 안으로 들어와서 회임하였으므로, 영묘(英廟) 무신년(戊申年;영조 4, 1728년) 11월 11일에 아이를 낳았을 때 태몽(泰夢)이라고 명명(命名)하여 그 기이함을 드러내었다. 대사께서는 날 때부터 타고난 기골이 일반 사람들보다 탁월하였다. 나이 15세에 청량암(淸凉菴)에서 독서하였는데 부처님에게 예를 올릴 때 여러 스님들이 둘레를 돌며 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마치 묘한 묵은 인연이 있는 듯이 홀연히 몸을 버리겠다는 원(願)을 내었다. 4년 뒤에 집을 떠나 용천사(湧泉寺;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최정산(崔頂山)에 있는 사찰.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옥천사(玉泉寺)라고 하였다가 고려 원종 2년(1261년)에 보각국존(普覺國尊)이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용천사로 고쳤다)에 이르러 스스로 오체(五體)를 던져 정성스레 출가(出家)를 청하니, 부름을 받아 응하였던 장로(長老)가 그를 사랑하여 허락하였다. 그로 하여금 드디어 삭발하게 하고 갑자기 계율(戒律)을 받게 하였다. 이날 밤 꿈에 검은 옷을 입은 늙은 스님이 계단 앞에 서서 경쇠를 울리고 예를 행한 것이 세 번 올리는 것을 보았다. 이때부터 사방으로 멀리 스승을 찾아서 구름 따라 다니며 도를 물었다. 해봉(海峰), 연암(燕巖), 용파(龍坡), 영허(影?) 등 여러 유명한 스님들을 찾아가서 열심히 고생하며 그들의 가르침에서 득력하였다. 어느 날 홀연히 생각이 떠올라 말하기를, 「불가에서 가르침을 펴는 것은 돈오(頓悟;불가의 말로 점수와 대비되는 말로서 불성을 단번에 깨치는 것을 말한다)를 우선으로 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금강대(金剛臺)에 부들을 깔고 성대한 음식을 차려 놓고 도량을 청결히 하고나서 관음(觀音)의 법력(法力)을 우러러 기원하였다. 재를 마친 뒤에 꿈에서 「한 방으로 들어가서 보기를 불서(佛書)가 책꽂이에 가득하고 장황(粧潢)이 선명하고 깨끗하였으니 전부 화엄경(華嚴經)이었다. 곁에 노승(老僧)이 있어서 가리켜 말하기를, 「도는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9년 뒤에 황산(黃山)에서 물러나 숨은 장로가 한번 만나 마음이 맞자 화엄경 전부를 주었는데 마사장권(摩?粧卷)으로 과연 전에 꿈과 딱 들어맞았다. 읽으니 이미 익숙하여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였고 여러 묘한 뜻을 본 지 30년이 지내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유가에서의 이른바 진실한 마음으로 각고로 공부한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선공부에는 지송(持誦)이 제일이므로 보현(普賢)과 관음(觀音) 두 보살(菩薩)을 원불(願佛)로 삼아서 치재(致齋)하는데 더욱 열심히 하였고 또 무술년으로부터 신축년(辛丑年) 대비주(大悲呪)를 외기를 10만 번 하였는데 날마다 과제를 정하였다. 갑술년 이래로 참여한 설파(雪坡)와 ▨月 두 화상(和尙)이 화엄(華嚴)의 종지(宗旨)와 선교(禪敎) 요령(要領)을 다 터득하고서 신의(信衣)를 받아서 단에 올랐다. 대개 공문(空門)의 연원(淵源)이 이로부터 있었다. 임진년 7월 27일에 작은 병으로 입적하셨으니 연세가 85세였고 승납(僧臘)은 66세였다. 이에 앞서 꿈에서 천구성(天狗星)을 보고 자기가 장수할 것인지 일찍 죽을 것인지를 자신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이름이 동국에 가득 차서 달하여도 다하지는 못할 것이다. 85세까지 살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이르러 보니 과연 맞아떨어졌다. 화욕(火浴;火葬을 말한다)의 저녁에 영험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상서로운 구름이 허공을 가렸다. 이때에 의를 사모하는 자는 소리를 내어 조문하였고 업을 받은 사람들은 슬픔을 삼키고 흐느껴 울었으니 이것은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희(噫)라 스님은 품성이 온유하였고 지기가 맑고 밝았으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재화에 대한 욕심이 마음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일찍이 깨끗한 땅에 머물면서 오래도록 객진(客塵)을 떠나서 자애로운 항해에 보배로운 뗏목을 타고 두루 중생(衆生)을 구제하였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문에 이르면 진심으로 상심하였고 혹시라도 와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었으며 조금이라도 난색을 표시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식객의 신발이 항상 집밖에 가득 찼다. 어렸을 적부터 자기를 단속하기를 매우 엄격히 하여 매일 반드시 옷을 바르게 입고 가부좌(跏趺坐)하여 앉아서 게으른 용모를 보이지 않았다. 평생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언급하지 않았고 진실로 물러나 겸양하였다. 그 의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지 않았으니 더욱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서경(西經) 천착(千?)은 그의 책 상자에 보관되어 있고 동쪽과 남쪽의 명찰에도 그의 족적이 두루 거쳐 갔고 교화 받은 승도와 대중들만도 천만이 될 뿐 아니라 스님의 풍성이 유포되지 않은 곳이 없다. 이와 같은 자는 비록 옛적의 명승이라고 하더라도 더 더할 것이 없다. 앞뒤의 꿈에서 나타난 징조는 자못 기이하고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대사는 필시 허장하게 세상을 속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도 대략 썼다. 제자(弟子) 지첨(知添)은 곧 그의 고족이다. 다박머리를 내리고 있을 때부터 늘 그의 문을 들락거렸으므로 보고 느낀 바가 깊었으므로 지금 영원하고 절실하게 옛일을 추모하며 풍비(?碑)를 세울 것을 모의하여 그가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뽑아서 그의 제자인 몽필(夢弼)과 석민(碩旻) 등을 다리를 싸매고 천리를 달리게 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수년을 거치는 동안 더욱 열심히 하였으므로 나는 선가(禪家)의 문자(文字)에 일찍이 자주 쓴 적은 없었지만 서산(西山)과 사명(泗溟)에 대하여 삼가 감동한 바가 있어서 일찍이 찬술한 그들의 비적비를 보존하고 있었다. 대사(大師)는 서산(西山)과 사명(泗溟)에 대하여 적적(嫡傳)이고 또 그 가운데 올곧아 속세와 끊지 않는 점이 있으니 어찌 서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사양하지 못하고 글을 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이 선백(禪伯)께서는 사문(沙門)의 위대한 분이시니 숭정기원후 세 번째 병자년(순조 16년(1816년) 6월 일에 비를 세웠다.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 |
21. 인악(仁岳) 의소(義沼)
속성(俗姓)은 이씨(李氏)로 본관(本貫)은 성산(星山)이다. 휘(諱)는 의소(義沼)이며 자(字)는 자의(子宜)이고 호(號)는 인악(仁岳)으로 영조(英祖) 22년(1746년) 달성(達成) 인흥촌(仁興村;지금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인흥촌. 고려때 유명한 仁興寺가 있던 곳이다)에서 출생했다. 8살에 향학(鄕學)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읽음에 깊이 그 뜻을 깨닫고 한번 들으면 곧 깨닫고 백 줄이나 되는 그 책을 세 번 읽고는 곧 외워버리니 신동(神童)이란 재주의 이름이 인근 고을에까지 소문났다. 비단 그 재주뿐만 아니라 그 사람됨이 매우 뛰어나 향인(鄕人)이 다투어 칭찬했으며, 너무 준수하여 장래 대성(大成)치 못할까 걱정까지 하였다.
15살에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역경(易經)을 다 읽고 글을 잘 지어 천재라 했다. 18살에 향객(鄕客) 제자(諸子)와 용연사(龍淵寺)에 가서 공부함에 승(僧)의 제제(濟濟)함을 보고 마음에 느낌이 있어 가선헌(嘉善軒)에서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벽봉화상(璧峯和尙)에게 받았다. 화상(和尙)이 그를 보고 큰 그릇임을 알고 금강(金剛), 능엄경(楞嚴經) 등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서악(西岳)ㆍ추파(秋波)ㆍ농암(聾巖) 제 명사(諸名師)에 나아가서 배우게 하여 그 학(學)이 더욱 밝게 되었다. 무자년(戊子年) 봄(春)에 다시 벽봉화상(璧峯和尙)을 만나 신구(信貝)를 받으니 나이 22살이었다.
그의 계보(系譜)는 임제(臨濟) 34세(世), 서산(西山)에 있어서는 8세(世), 상봉(霜峯)의 5세손이다. 뒤에 화엄(華嚴)의 종사(宗師) 설파(雪坡)를 영원정사(靈源精舍)에 알현(謁見)하여 잡화(雜華)를 듣고 또는 선송(禪頌)을 강(講)함을 들었다. 화상(和尙)은 그를 당금(當今)의 동량(棟樑)이요, 후세의 규거(規?)로 지목했다. 그 후 비슬(琵瑟)과 공산(公山), 황악산(黃岳山), 계룡산(鷄龍山)과 불령산(佛靈山) 등 제산(諸山)을 돌아 행화(行化) 불경을 강(講)하고 팔공산에 돌아와 동화사에 주(住)하여 설법(說法)했다. 정조(正祖) 14년(1790년) 정조(正祖)가 그 아버지의 원당(願堂)으로 수원에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여 불상을 만들게 명함에 당세(當世)의 명승(名僧)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主管)케 하니 대사(大師)가 증사(證師)로 뽑혀 불복장문(佛腹藏文)ㆍ용주사제산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짓게 하였으며, 정조대왕(正祖大王)이 그 글을 보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정조(正祖) 20년(1796년)에 포산(苞山) 비슬산(琵瑟山) 명적암(明寂庵)에서 입멸하니 세수 51, 법하는 34였다. 저서에 『화엄사기(華嚴私記)ㆍ원각사기(圓覺私記)ㆍ금강사기(金剛私記)ㆍ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ㆍ인악집(仁岳集)』등이 있다.
<참고문헌>朝鮮佛敎通史(李能和), 朝鮮金石總攬, 仁岳集
○ 扶宗樹敎華嚴講主仁嶽大師碑銘幷序 如是我聞儒敎旣衰佛法亦微狐禪羊僧稗販博易惑業襲習妄爲六塵六根埋沒此一段靈光若非快登般若慈舟續佛慧命者疇能爲人解粘去縛直下明了自性也海東有大禪師曰仁嶽俗姓李氏法名義沾麗朝司空星山府院君能一二十三世孫也父徽澄母達城徐氏 英廟丙寅九月九日誕師于達州之仁興村是晨室中有光幼而?慧異凡兒稍長能通外典長於記誦讀無過三遍其後不忘?讀書龍淵之山房見佛家淸?法心生感念遂?染于嘉善軒受戒具於碧峰師而因遵善財南詢故事歷?西岳秋波聾巖諸名師自是輯會玄記開鍵啓?蔚爲敎宗戊子再期于碧峰受信具登壇時年才弱冠加三庚寅三期于雪坡遂傅禪衣得爲臨濟西山霜峰之元孫承師唯諾爲後模型眞所謂華嚴法界中分身接踵乘願輪而至者非耶爾時行化於嶺湖諸山而若夫開堂竪拂堅持智刃則八公山乃其歸正也於是瞥生異見進步無門者皆使之聊通一線良馬見?而追風者衆矣鳴呼師以?然七尺之軀當法城頹倒之日唱道東南以慈悲普濟爲己任其有功於佛門亦多矣庚戌抵隋城之龍珠寺爲證師賦佛藏腹文得被 宸賞是又佛家之勝事也丙辰端陽之月望示疾入滅於苞山之明寂菴世壽五十一法夏三十四聞者莫不太息曰嶽師逝矣時方暑肉身有三日香豈不異哉?弟子相與茶毗於負坎之麓就龍淵落紺之地而建影堂又留一像於桐華說法之所二寺在達邱之南北也余儒名者盖自聖遠言湮異端朋興佛法亦其一也其始敎也未?不以卽心見性方便救人爲法門而其衰也邪師魔弟扇狂鼓?左道惑衆而己則師之持守善戒?通迷蒙亦可謂墨穴之電光狂水之聖藥也己余與師之友冠月相遇嶺外聞師之行甚詳今又因其徒求師之銘甚勤遂刊華除蔓庾詞而?刻之後之緇白四衆讀此碑者其亦有深意密行鉥心而?俗者乎銘曰」 有大比邱在達之南聲光熊熊法幢深深作證明師發音天鼓正法眼藏孰敢不慕華嚴樓閣自有源委以身示化衆竗在?祖燈再?佛日重新身雲心月長護金輪兀彼龍刹有儼其幀悲憫末法我勒斯銘 崇禎紀元後三戊辰三月 日立 金羲淳撰竝篆書」 |
○ 부종수교화엄강주인악대사비명병서(扶宗樹敎華嚴講主仁嶽大師碑銘幷序).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 유교가 이미 쇠하고 불법 또한 미미해져 호선(狐禪)과 양승(羊僧), 패판(稗販 ; 돌팔이)이 널리 활개 치고 다니니 혹업(惑業 ; 미혹)이 습성을 엄습하여 허망하게 육진(六塵) 과 육근(六根)을 파묻어버렸다. 여기에서 한 부분 밝은 심령이 흔쾌히 반야(般若)의 자비로운 배에 올라 부처의 혜명(慧命 ; 지혜를 터득함)을 잇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가 능히 사람들에게 들러붙어 있는 굴레를 없애 곧바로 자성(自性 ; 변함없는 본성)을 밝히겠는가? 해동에 인악(仁嶽)이라고 하는 대선사가 있었는데, 세속의 성씨는 이씨(李氏)이고 법명은 의첨(義沾)이다. 고려시대 사공(司空)을 지낸 성산부원군 이능일(星山府院君李能一)의 23대손으로 아버지는 이휘징(李徽澄)이다.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인데, 영조 병인년(영조 22, 1746년,) 9월 9일에 달주(達州 ; 대구)의 인흥촌(仁興村)에서 대사를 낳았다. 이날 새벽 방안에 빛이 서렸다. 대사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랐고, 조금 자란 뒤에는 외전(外典 ; 유교 경전)에 능통했다. 암기를 잘해 세 번만 읽고도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일찍이 용연(龍淵)의 산방(山房)에서 글을 읽었는데, 불교의 청정한 법을 보고 마음이 일어 마침내 가선헌(嘉善軒)에서 머리를 깎고 벽봉대사(碧峰大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선재(善財 ; 화엄경에 나오는 구도자)가 남쪽에서 구도하며 다닌 고사를 따르기 위해 계룡산의 서악(西岳)·추파(秋波)·농암(聾巖) 등 유명한 대사들을 찾아다녔다. 이때부터 『회현기(會玄記)』를 모아 빗장을 풀고 열쇄를 여니 교종(敎宗)이 무성해졌다. 무자년에 벽봉대사에게 재기(再期)하여 신구(信具 ; 신표)를 받고 등단하였는데, 이때 나이 겨우 23살이었다. 경인년에는 설파대사(雪坡大師)에게 삼기(三期)하니 마침내 선의(禪衣)를 전해 주었다. 이리하여 임제(臨濟)·서산(西山)·설봉(霜峰)을 잇는 원손(元孫)을 얻게 되었으므로 스승의 뒤를 이어 후세의 전형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정말로 이른바 화엄법계(華嚴法界) 속의 분신(分身)이 뒤를 이어 원륜(願輪)에 올라타 도달한 것이 아닐까? 그때 영남과 호남의 여러 산에서 교화를 행하였으나 주지로서 설법하고 총채를 세우며 지혜의 칼을 견지한 곳은 팔공산으로서, 이곳이 바로 돌아가 멈춘 곳이다. 이곳에서 갑자기 이견이 생겨 무문(無門)으로 진보한 사람은 모두 '좋은 말은 채찍만 보고도 달린다.'는 한 가닥을 통하게 만든 경우가 많았다. 아아, 대사는 흔연히 7척의 몸으로 법이 무너진 때를 만나 동남 지방에서 도를 부르짖어 자비와 구원을 자기 임무로 삼았으니 불가에 대한 공 또한 지대하였다. 경술년에 수원의 용주사(龍珠寺)에 당도하여 증사부(證師 ; 증명의 임무를 가진 법사)가 되었는데, 불장복문(佛藏腹文)을 지어 임금의 칭찬을 받았으니 이 또한 불가의 훌륭한 일이었다. 병진년(정조 20, 1796년) 5월 15일 병이 나 포산(苞山)의 명적암(明寂菴)에서 입적하였다. 세속 나이 51세, 법랍 34세였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한숨을 쉬며 "인악대사가 세상을 떠났구나"하였다. 더위가 한창인 때였는데 3일 동안 향기가 났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여러 제자들이 북쪽을 등진 언덕에서 다비식을 행하고 용연(龍淵)의 머리를 깎은 곳에다 영당(影堂 ; 화상을 안치한 건물)을 세우고, 또 화상 하나를 동화사(桐華寺)의 설법하던 곳에 두었다. 두 절 모두 대구의 남쪽과 북쪽에 있다. 나 자신 명색이 유학자인데, 성인의 시대가 멀어지니 말이 시들고 이단이 떼로 일어났다. 불법 역시 그 중의 하나로 종교가 창시된 처음에는 마음에 나아가 자성을 보고 방편을 세워 사람을 구제하는 법문(法門)이었는데, 쇠퇴한 뒤로는 사악한 스승과 마귀 같은 제자가 거짓된 사도를 미친 듯이 선동하여 많은 사람을 현혹할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대사가 선계(善戒)를 지키고 미망 중에 창문을 냈으니 이 또한 캄캄한 굴속의 전광이요 광수(狂水) 중의 성약(聖藥)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대사의 벗인 관월(冠月)과 영남 밖에서 만나 대사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들었는데, 지금 또 그 제자들이 대사의 명문(銘文)을 간절히 구하니 이윽고『화제만유사(華除蔓庾詞)』를 간행하여 새기게 해서 나중에 승려와 속인, 사부대중이 이 비문을 읽도록 하면 그 또한 밀행(密行)하고 마음을 인도하는 깊은 뜻이 있어 세속을 고치는 것이지 않을까? 명(銘)하기를, 큰 비구승이 있어 달성의 남쪽에 있었으니 숭정기원후 세 번째 무진년[순조 8, 1808년] 3월 일 세움. 문인(門人); 도경(度慶), 계주(戒?), 혜기(慧玘), 승징(勝澄), 벽잠(碧岑), 승홍(勝洪), 대여(大如), 우인(宇印). |
22. 김문옥(金文玉)
자(字)는 인우(寅羽). 군위군 효령면 화계동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 출중한 재주를 아낀 파계사 승려(僧侶)에 발탁되어 파계사(把溪寺)에 들어가 출가하여 불교를 공부하고 이어 동화사 학림(學林)에서 공부했다. 이때 대구 남문시장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체포, 투옥되어 10개월 형의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절에서 파견하여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코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불교철학(佛敎哲學)을 전공 졸업하고 동화사(桐華寺)에 있을 때 체포하러 오는 고등계 형사 2명을 개굴창에 메치고 도망쳐 평양에 가서 영명사(永明寺), 법흥사(法興寺)의 대교사(大敎師) 겸 대선사(大禪師)로 있다가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에서 대선사(大禪師) 겸 조실(祖室)로 있었다. 이때 만주 등지의 독립지사들과 내왕했다. 유럽 유학을 불교재단의 후원으로 가게 되었으나 김법린(金法麟)에게 양보하고 불교연구와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팔공산 고승(高僧) 중에 독립투쟁과 일본 불교대학을 졸업한 열혈 애국 승려로 이채였다.
1. 고려국(高麗國) 보조국사(普照國師) 법어(法語)
○ 근수정혜결사문(勤修定慧結社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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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恭聞) 인인지이도자(人因地而倒者) 인지이기(因地而起) 이지구기(離地求起) 무유시처야(無有是處也) 미일심이기무변번뇌자(迷一心而起無邊煩惱者) 중생야(衆生也) 오일심이기(悟一心而起) 무변묘용자(無邊妙用者) 제불야(諸佛也) 미오수수(迷悟雖殊) 이요유일심즉이심구불자(而要由一心則離心求佛者) 역무유시처야(亦無有是處也)
삼가 들으니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난다」하였다. 땅을 떠나서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한 마음이 미혹해서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사람은 중생이고, 한 마음을 깨달아서 한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사람은 부처이다. 미혹됨과 깨달음이 비록 다르지만 요는 마음이므로 마음을 떠나 부처를 찾는 것은 또한 있을 수 없다.
자묘년(自妙年) 투신조역(投身祖域) 변참선사(遍參禪肆) 상기불조(詳其佛祖) 수자위물지문(垂慈爲物之門) 요령아배(要令我輩) 휴식제연(休息諸緣) 허심명계(虛心冥契) 불외치구(不外馳求) 여경소위(如經所謂) 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등지위야(當淨其意如虛空等之謂也)
나는 소년시절부터 조사문에 투신하여 두루 선방을 찾아다녔는데, 불조(佛祖)께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신 문을 살펴보건대,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반연을 쉬고 마음을 고요히 비워서 밖으로 구하지 않게 함이었다. 말하자면 경에서 「만일 사람이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기를 허공처럼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범견문송습자(凡見聞誦習者) 당기난우지심(當起難遇之心) 자용지혜관조(自用知慧觀照) 여소설이수즉가(如所說而修則可) 위자수불심(謂自修佛心) 자성불도(自成佛道) 이친보불은의(而親報佛恩矣) 연반관아배(然返觀我輩) 조모소행지적(朝暮所行之迹) 즉빙의불법(則憑依佛法) 장식아인(裝飾我人) 구구어이양지도(區區於利養之途) 골몰어풍진지제(汨沒於風塵之際) 도덕미수(道德未修) 의식사비(衣食斯費) 수부출가(雖復出家) 하덕지유(何德之有)
무릇 보고, 듣고, 외고, 익히는 자가 마땅히 만나기 어려운 마음을 찾아 스스로 지혜로써 관조하여 말한 것처럼 닦아간다면, 참으로 스스로가 불심을 닦고 스스로가 불도를 이루어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돌이켜 우리 무리들이 조석으로 하고 있는 행적을 보면 불법을 빙자해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꾸미고 이해득실의 길에만 매달리며 세속적인 일에만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다시 출가한들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슬프다.
희부욕리삼계(噫夫欲離三界) 이미유절진지행(而未有絶塵之行) 도위남자지신(徒爲男子之身) 이무장부지지(而無丈夫之志) 상괴홍도(上乖弘道) 하궐이생(下闕利生) 중부사은(中負四恩) 성이위치(誠以爲恥) 이시장탄(以是長歎) 기래구의(其來久矣)
삼계를 여의고자 하나 번뇌를 끊으려는 수행이 없으니 한갓 남자의 몸일 뿐 대장부의 뜻이라고는 없다. 그래서 위로는 큰 도를 어기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이 없고, 가운데로는 네 가지 은혜를 저버리는 꼴이니 참으로 부끄럽다. 내가 이를 장탄식하여 온 지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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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재임인정월(歲在壬寅正月) 부상도보제사담선법회(赴上都普濟寺談禪法會) 일일여동학십여인(一日與同學十餘人) 약왈파회후(約曰罷會後) 당사명리(當捨名利) 은둔산림(隱遁山林) 결위동사(結爲同社) 상이습정균혜(常以習定均慧) 위무(爲務) 예불전경(禮佛轉經) 이지어집로운력(以至於執勞運力) 각수소임이경영지(各隨所任而經營之) 수연반성(隨緣養性) 방광평생(放曠平生) 원추달사진인지고행즉기불쾌재(遠追達士眞人之高行則豈不快哉)
나는 임인년 정월에 서울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나아갔다가, 어느 날 동학 십여 인과 함께 약속하기를 「이 법회가 끝나면 응당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숨어서 함께 한마음이 되어 항상 선정을 익히고 지혜 닦기를 힘쓰며, 예불하고, 경 읽으며, 울력하는데 이르기까지 각자 소임에 따라 경영하여 인연 따라 성품을 기르며 평생을 걸림 없이 살면서 멀리로는 달사와 진인의 높은 행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제공문어왈(諸公聞語曰) 시당말법(時當末法) 정도침은(正道沈隱) 하능이정혜(何能以定慧) 위무(爲務) 불여근념미타(不如勤念彌陀) 수정토지업야(修淨土之業也)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이런 뜻으로 말했다. 「지금은 말법(末法) 시대라 정도가 숨었는데 어찌 선정과 지혜 닦기에 힘쓰겠는가. 차라리 아미타불을 부지런히 염불하여 극락정토의 업을 닦는 것만 못하리라.」
여왈시수천변余(曰時雖遷變) 심성불이(心性不移) 견법도지흥쇠자(見法道之興衰者) 시내삼승권학지견(是乃三乘權學之見) 유지지인(有智之人) 불응여시(不應如是) 군아봉차최상(君我逢此最上) 승법문(乘法門) 견문훈습(見聞薰習) 기비숙연(豈非宿緣) 이불자경(而不自慶) 반생절분(返生絶分) 감위권학인즉가위고부선조(甘委權學人則可謂睾負先祖) 작최후단불종인야(作最後斷佛種人也)
이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은 비록 변천한다지만 사람의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다. 법도(法道)에 흥쇠가 있다고 보는 것은 삼승권학(三乘權學;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 등 삼승인을 위하여 방편으로 가르친 것)이며, 지혜 있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그대들과 나는 가장 훌륭한 교법(敎法)을 만나서 보고, 듣고, 익히니 어찌 과거로부터 쌓아온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경사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그런 인연을 끊어버리고 권학인(權學人;삼승의 근기를 가진 사람)으로 만족한다면 이는 선조의 뜻을 저버리고 끝내는 부처의 종자마저 끊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만다.
염불전경(念佛轉經) 만행시위(萬行施爲) 시사문(是沙門) 주지상법(住持常法) 기유방애(豈有妨碍) 연불궁근본(然不窮根本) 집상외구(執相外求) 공피지인지소치의(恐被智人之所嗤矣) 화엄론운(華嚴論云) 차일승교문(此一乘敎門) 이근본지위소성(以根本智爲所成) 명일체지승(名一切智乘)
염불하고 독경하고 만행(萬行)을 닦는 것은 사문(沙門)으로서 항상 행하는 법이니 어찌 서로 방해가 되겠는가. 그러나 근본을 공부하지 않고 형상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한다면 지혜 있는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화엄론>에도 보면 「일승교문(一乘敎門;일체 중생이 성불한다는 입장에서 그 구제하는 교법이 하나뿐이고 또한 절대 진실한 법의 문)은 근본지(根本智;일체 현상은 본질에서는 차별이 없는 것을 아는 지혜)로써 성취하는 것이므로 일체지승(一切智乘;모든 존재에 관해 포괄적으로 아는 대승적인 지혜를 이름)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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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세계(十方世界) 양동허공(量同虛空) 위불경계고(爲佛境界故) 일체제불(一切諸佛) 급이중생(及以衆生) 소유심경(所有心境) 호상참입(互相參入) 여영중중(如影重重) 불설유불무(不說有佛無) 불세계(佛世界) 불설유상법말법(不說有像法末法) 여시시분(如是時分) 상시불흥(常是佛興) 상시정법(常是正法) 차내요의경(此乃了義經) 단설유차방예토(但說有此方穢土) 별방정토(別方淨土) 불무불처소(有佛無佛處所) 급상법말법(及像法末法) 개위불요의경(皆爲不了義經)
시방세계란 곧 허공과 같아 전부가 부처의 경계가 된다.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이나 중생의 마음과 그 경계가 서로 합쳐지는 것이 마치 그림자처럼 겹쳐지는 것이니, 부처가 있고 없음의 세계를 말하지 않으며, 상법(像法;부처님 입멸 후 1천 년의 정법시기가 지난 후의 1천 년 기간)이나 말법(末法)이 있음도 말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항상 부처님이 출현하며 항상 정법이라 한 것이 요의경(了義經;절대 진리를 말한 경. 一乘實敎)이고, 더러운 세계나 깨끗한 세계가 있다거나 부처님이 계시는 곳, 안 계시는 곳, 또는 상법과 말법이 있다고 말한 것은 불요의경(不了義經;진실의 세계로 유인하는 방편의 가르침. 三乘權敎)이 된다 하였다.
우운여래(又云如來) 위일체사견전도중생(爲一切邪見顚倒衆生) 시현출흥(示現出興) 약설소분복덕경계(略說少分福德境界) 이실여래(而實如來) 무출무몰(無出無沒) 유여도상응자(唯與道相應者) 지경자회(智境自會) 부작여래출흥멸몰지견(不作如來出興滅沒之見) 단자이정관이문(但自以定觀二門) 이치심구(以治心垢) 정재상존(情在相存) 아견구도(我見求道) 종불상응(終不相應) 수의지인(須依智人) 자최교만(自?驕慢) 경심철도(敬心徹到) 방이정혜이문결택(方以定慧二門決擇) 선성교지여사(先聖敎旨如斯) 기감조차(豈敢造次) 첩유낭진(輒有浪陳) 서준요의간고지언(誓遵了義懇苦之言) 불의권학방편지설(不依權學方便之說)
또 이르기를 ,「여래가 사견(邪見)에 빠진 일체 중생을 위해 출현하여 복덕의 경계에 대해 간략히 말씀했으나 실제로 여래는 나타나거나 사라짐도 없다. 오직 도(道)와 더불어 상응하는 자만이 지혜와 경계가 스스로 융합하여 여래는 출현하거나 사라진다는 소견을 내지 않는다. 단지 스스로 선정(禪定)과 관조(觀照)의 두 문에 의해 마음의 때를 다스리는 것이다. 생각이 있고 형상이 있어서 아견(我見)으로 도를 구한다면 끝내 상응하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지혜 있는 사람을 의지하여 스스로 교만함을 꺾고 공경하는 마음이 사무쳐야만 비로소 선정과 지혜의 두 문으로써 결정한다」하였다. 옛 성현의 가르친 뜻이 이러한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헛되이 보내리오. 맹세코 절대 진리의 간절한 말을 따르고 방편으로 베푼 말에는 의지하지 말지어다.
아배사문(我輩沙門) 수생말번(雖生末法) 품성완치(稟性頑痴) 약자퇴굴(若自退屈) 착상구도즉종전학득(着相求道則從前學得) 정혜묘문(定慧妙門) 갱시하인(更是何人) 소행지사(所行之事) 행지난고(行之難故) 사이불수즉금불습고(捨而不修則今不習故) 수경다겁(雖經多劫) 미재기난(彌在其難) 약금강수(若今强修) 난지수행(難修之行) 인수습력교(因修習力故) 점득불난(漸得不難)
우리 사문들이 비록 말세에 나서 품성이 둔하고 어리석다 해서 만일 스스로 물러나서 형상에 집착하여 도를 구한다면 전부터 배워온 선정과 지혜의 묘문(妙門)은 누가 행해야 할 일인가. 행하기 어렵다 해서 버리고 닦지 않는다면 현재 익히지 않으므로 다겁을 지낸다 해도 더욱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만일 지금 억지로라도 닦는다면 그 닦기 어려운 행도 닦고 익힌 힘 때문에 점점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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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위도자(古之爲道者) 환유부종범부래자야(還有不從凡夫來者耶) 제경논중(諸經論中) 환유불허말세중생(還有不許末世衆生) 수무루도호(修無漏道乎)
예로부터 수도하는 자가 범부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모든 경론 중에 말세 중생에게 출세간의 도(道) 닦기를 허락하지 않은 데가 있던가.
원각경운(圓覺經云) 말세제중생(末世諸衆生) 심불생허망(心不生虛妄 불설여시인(佛說如是人) 현세즉보살(現世卽菩薩) 화엄론운(華嚴論云) 약언차법(若言此法) 비시범부경계(非是凡夫境界) 시보살소행(是菩薩所行) 당지시인(當知是人) 멸불지견(滅佛知見) 파불정법(破滅正法) 제유지자(諸有智者) 불응여시(不應如是) 불근수행(不勤修行) 설행부득(設行不得) 불실종선(佛失善種) 유성내세적습승연(猶成來世積習勝緣) 고유심결운(故唯心訣云) 문이불신(聞而不信) 상결불종지인(尙結佛種之因) 학이불성(學而未成) 유개인천지복(唯盖人天之福)
<원각경(圓覺經)>에 「말세 중생이 마음에 헛된 망상을 내지 않으면 부처님은 이런 사람은 현세의 보살이다」 했고, <화엄론(華嚴論)> 에는 「법(法)은 범부들이 미칠 경계가 아니고 보살들이 행할 일이라 한다면 이런 사람은 불지견(佛知見)을 소멸시키고 정법을 파괴할 자임을 알아야 한다」했다. 그러니 지혜 있는 자는 이런 걸 알고 부지런히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수행을 하고 깨달음이 없더라도 선종(善種)을 잃지 아니하여 오히려 내세에 좋은 인연을 쌓고 익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유심결(唯心訣)>에는 「듣고 믿지 않는다 해도 부처가 될 씨앗의 인을 맺을 수 있고, 배우고 이루지 못했다 해도 오히려 인천(人天)의 복을 덮는다」 하였다.
유시관지(由是觀之) 불론말법여정법시수(不論末法與正法時殊) 불우자심매지여명(不憂自心昧之與明) 단생앙신지심(但生仰信之心) 수분수행(隨分修行) 이결정인(以結正因) 원리겁약(遠離劫弱) 당지세락비구(當知世樂非久) 정법난문(正法難聞) 기기인순(豈可因循) 허송인생(虛送人生) 여시추념(如是追念) 과거구원이래(過去久遠已來) 허수일체신심대고(虛受一切信心大苦) 무유이익(無有利益) 현재즉유(現在卽有) 무량핍박(無量逼迫) 미래소고(未來所苦) 역무분제(亦無分齊) 난사난리(難捨難離) 이불각지(而不覺知) 황차신명(況此身命) 생멸무상(生滅無常) 찰라난보(刹那難保) 석화풍등(石火風燈) 서파잔조(逝波殘照) 부족위유(不足爲諭) 세월표흘(歲月飄忽) 암최노상(暗?老相) 심지미수(心地未修) 점근사문(漸近死門)
이렇게 본다면 말법과 정법의 때가 다름을 말하지 말며, 자기 마음의 어둡고 밝음을 근심하지 말고 단지 신앙의 마음을 내어 연분을 따라 수행함으로써 정인(正因)을 맺고, 겁약한 마음을 멀리해야 한다. 마땅히 알라. 세속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고, 정법은 듣기 어려운데 어찌 하루하루 헛되이 보낼 것인가. 생각해 보면 아득한 과거부터 몸과 마음의 온갖 괴로움을 받아 아무 이익이 없었고, 현재에는 한없는 핍박을 받고 있고, 미래에 받을 괴로움 또한 끝이 없으나 이를 버리고 멀리하기가 어렵구나. 그런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하물며 이 목숨의 생멸이란 무상하여 한 순간도 보전키 어려운 것이 반짝이는 불빛, 바람 앞의 등불, 흘러가는 물결, 낙조(落照) 등에도 비유하지 못할 것이다. 세월이 급하고 빨라서 늙음을 재촉하는 데도 마음을 닦지 않고 점점 죽음의 문으로만 다가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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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석동류(念昔同遊) 현우잡환(賢愚雜還) 금조굴지(今朝屈指) 구사일생(九死一生) 생자여피(生者如彼) 차제쇠잔(次第衰殘) 전거기하(前去幾何) 상부자의(尙復恣意) 탐진질투(貪瞋嫉妬) 아만방일(我慢放逸) 구명구리(求名求利) 허상천일(虛喪天日) 무취담화(無趣談話) 논설천하(論說天下) 혹무계덕(或無戒德) 공납신시(空納信施) 수인공양(受人供養) 무참무괴(無慙無愧) 여시등참(如是等僭) 무량무변(無量無邊) 기가복장(其可覆臟) 불위애통호(不爲哀痛乎)
옛 동지를 생각해보면 현명한 이, 어리석은 이도 있었고, 지금도 손가락을 꼽아보니 아홉은 죽고 한 사람만 남았으나 산 사람도 이처럼 쇠약해졌는데 앞으로 얼마나 남았기에 방자한 생각을 내어 탐욕부리고, 화내고, 질투하고, 아만심과 방일로 명리를 구해 헛된 세월 보내고, 쓸데없는 말로 천하를 논하며, 계덕(戒德)도 없이 공연히 보시만 받으며, 남의 공양을 받되 아무 부끄러움도 없구나. 이런 온갖 허물이 한없고 끝없는데도 덮어버리고 애통히 여기지 말란 말이냐.
여유지자(如有智者) 당수긍신(當須兢愼) 책발신심(策發身心) 자지이과(自知已過) 개회조유(改悔調柔) 주야근수(晝夜勤修) 속리중고(速離衆苦) 단의불조성실지언(但依佛祖誠實之言) 위명경(爲明鏡) 조견자심(照見自心) 종본이래(從本而來) 영명청정(靈明淸淨) 번뇌성공(煩惱性空) 이부근가결택사정(而復勤加決擇邪正) 부집기견(不執己見) 심무난상(心無亂想) 불유혼체(不有昏滯) 불생단견(不生斷見) 불착공유(不着空有) 각혜상명(覺慧常明) 정수범행(精修梵行) 발홍서원(發弘誓願) 광도군품(廣度群品) 불위일신(不爲一身) 독구해탈(獨求解脫)
만일 지혜 있는 자라면 응당 조심하고 삼가서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고, 자기 허물을 알아 뉘우치고 고쳐서 조화로운 마음으로 밤낮 부지런히 수행해서 빨리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조(佛祖)의 성실한 말에 귀의하여 거울로 삼아서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신령하고 밝고 청정하여 번뇌의 성품이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 거기에 다시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가려서 선택하되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말라. 그리고 마음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되 흐리멍덩해서는 안되며, 단견(斷見)을 내어서도 안되며, 공(空)과 유(有)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깨달음의 지혜가 항상 밝아서 정밀하게 청정한 행을 닦으며 큰 서원을 세워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이는 홀로 해탈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여혹세간사무(如或世間事務) 종종견전(種種牽纏) 혹병고소뇌(或病苦所惱) 혹사마악귀(或邪魔惡鬼) 소능공포(所能恐怖) 유여시등신심(有如是等身心) 불안즉어시방불전(不安則於十方佛前) 지심세참(至心洗懺) 이제중장(以除重障) 예념등행(禮念等行) 소식지시(消息知時) 동정시위(動靜施爲) 혹어혹묵(或語或默) 일체시중(一切時中) 무불료지자타신심(無不了知自他身心) 종연환기(從緣幻起) 공무체성(空無體性) 유여부포(猶如浮泡) 역여운영(亦如雲影) 일체훼예시비음성(一切毁譽是非音聲) 후중망출(喉中妄出) 여공곡향(如空谷響) 역여풍성(亦如風聲)
만일 세간의 갖가지 일에 얽매이거나 혹 병고의 괴로움을 받거나 또는 사마악귀(邪魔惡鬼)의 공포를 받아 몸과 마음이 불안하거든 즉시 시방 부처님 앞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을 덜어야 한다. 이때, 예불과 염불을 평등하게 행해야 하며, 업장소멸과 잡념 쉬는 것을 때를 맞추어 하라.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하거나 침묵할 때나 언제든지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은 다 인연 따라 생긴 허망한 것이어서 비어서 주체성이 없음이 마치 물거품 같고, 구름의 그림자 같으니, 칭찬하거나 헐뜯거나 시비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소리와 같은 줄을 깨달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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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허망자타경계(如是虛妄自他境界) 찰기근출(察其根出) 불수경동(不隨傾動) 전신정질(全身定質) 수호심성(守護心性) 증장관조(增長觀照) 적이유귀(寂爾有歸) 활연무간(活然無間) 당시시야(當是時也) 애오자연담박(愛惡自然淡薄) 비지자연증명(悲智自然增明) 좌업자연단제(罪業自然斷除) 공행자연증진(功行自然增進) 번뇌진시(煩惱盡時) 생사즉절(生死卽絶) 생멸멸이(生滅滅已) 적조현전(寂照現前) 응용무궁(應用無窮) 도유연중생(度有緣衆生) 시위요사인분상(是爲了事人分上) 무점차중점차(無漸次中漸次) 무공용중공용야(無功用中功用也)
이렇듯 허망한 자타(自他)의 경계, 그 근원을 살펴서 치우치게 움직이지 않고 몸을 안정하여 심성(心城)을 잘 지키면서 관조(觀照)해 나간다면 결국 고요한 데로 돌아가서 우주의 진리와 하나가 될 것이다. 이때 사랑하고 미워함도 담박해지고, 자비와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죄없이 사라지고, 공행(功行;공덕이 되는 수행)이 자연히 불어나서 번뇌가 다하게 되면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도 사라져서 고요함과 밝은 지혜만이 앞에 나타나서 무궁무진하게 응용할 수 있어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은 사람의 점차(漸次;순서를 밟아나감)가 없는 가운데 점차이며, 공용(功用;언행 일체를 말함)이 없는 가운데 공용이니라.
문왈여금해설자(問曰汝今解說者) 선수신해자신(先須信解自身) 성정묘심(性淨妙心) 방능의성수선(方能依性修禪) 시내종상이래(是乃從上已來) 자수불심(自修佛心) 자성불도지요술야(自成佛道之要術也) 하고범견수선지사(何故凡見修禪之士) 불발신통지혜호(不發神通智慧乎) 약무통력가현(若無通力可現) 즉하명여실수행자야(則何名如實修行者也)
그들이 물었다. 「그대가 말한 대로라면 먼저 자신의 성품이 청정하고 묘한 마음임을 알고는 그 성품을 의지해서 참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예로부터 스스로 불심을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요긴한 방법인데, 어째서 참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신통 지혜를 일으키지 못하는가. 만약 신통력을 나타낼 수 없다면 어찌 참다운 수행자라 하겠는가.」
여소왈신통지혜(予笑曰神通智慧) 수자정신불심법력(隨自正信佛心法力) 가행용공이득지(加行用功而得之) 비여마경(比如磨鏡) 구점진이점명(垢漸盡而漸明) 명현즉영상(明現則影像) 천차약야신해미정(千差若也信解未正) 공용미심(功用未深) 혼혼좌수(昏昏坐睡) 이수묵위선즉하유신통자발야(以守默爲禪則何有神通自發也) 선덕왈여등(先德曰汝等) 단향자기성해(但向自己性海) 여실이수(如實而修) 불요삼명육통(不要三明六通) 하이고(何以故) 차시성말변사(此是聖末邊事)
나는 웃으며 말했다. 「신통지혜는 자기가 불심과 법력을 바로 믿고 실천하는 공에 따라 얻는다. 비유하자면 거울을 닦을 때, 때가 차츰 벗겨지면서 밝음이 점점 드러나 그 밝음 속에 천 가지 물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만약 믿음과 견해가 바르지 못하고 공을 들이는 것이 깊지 못하여 멍청하게 앉아 졸기만 하고 침묵하는 것을 선(禪)으로 삼는다면 어찌 신통이 일어나겠는가.」 선덕께서 「너희들은 단지 자기 성품의 바다를 향해 수행해 나갈지언정 삼명과 육통을 바라지 말라. 이런 것은 성인의 일 중에 가장 하찮은 일이기 때문이다」하였다.
여금차요식심달본(如今且要識心達本) 단득기본(但得其本) 막수기말(莫愁其末)
그러니 당장 마음을 알고 근본을 통달하여 단지 그 근본을 얻는 일이 중요하지 하찮은 일에 근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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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인(史山人) 문규봉종밀선사(問圭峰宗密禪師) 범수심지지법(凡修心地之法) 위당오심즉요(爲當悟心卽了) 위당별유행간(爲當別有行門) 약별유행문(若別有行門) 하명선문돈지(何名禪門頓旨) 약오심즉요(若悟心卽了) 하불발신통광명(何不發神通光明)
사산인(史山人)이 규봉 종밀선사에게 묻기를 「마음을 닦는 법이 바로 마음을 깨닫게 합니까? 아니면 별도로 수행하는 문이 있습니까? 만약 별도로 수행하는 문이 있다면 어떻게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돈지(頓旨;수행 단계를 뛰어넘어 단번에 깨닫는 종지<宗旨>)라 할 수 있겠으며, 만약 마음을 깨달았다면 왜 신통광명을 일으키지 못합니까?」하였다.
답왈식빙지이전수(答曰識氷池而全水) 자양기이용소(藉陽氣而鎔銷) 오범부이즉진(悟凡夫而卽眞) 자법력이수습(資法力而修習) 빙소즉수류윤(氷銷則水流潤) 방정개척지공(方呈漑滌之功) 망진즉심영통(妄盡則心靈通) 시발통광지응(始發通光之應) 수심지외(修心之外) 무별행문(無別行門)
이에 대답하기를 「얼은 연못이 다 물임을 알지만 빛을 받아야 녹는 것처럼 범부가 곧 진리인줄 알지만 법력을 빌려 닦고 익혀야 한다. 얼음이 녹으면 흐르는 물이 되므로 물을 대고 씻는 보람이 있고, 망념이 다하면 마음이 신통하므로 비로소 신통과 광명이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을 닦는 외에는 따로 수행하는 문이 없다」하였다.
이시당지(以是當知) 불수상호(不愁相好) 급여신통(及與神通) 선수반조자심(先須返照自心) 신해진정(信解眞正) 불락단상(不落斷常) 의정혜이문(依定慧二門) 치제심구(治諸心垢) 즉기의의(卽其宜矣) 약야신해미정(若也信解未正) 소수관행(所修觀行) 개속무상(皆屬無常) 종성퇴실(終成退失) 시위우부관행(是謂愚夫觀行) 기위지인지행재(豈爲智人之行哉)
그러므로 상호(相好)나 신통에 대해서는 근심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마음을 관조하여 믿음과 견해를 참되고 바르게 가져 단(斷)이나 상(常)에 빠지지 말고 선정과 지혜의 두 수행문에 의지해서 마음의 때를 다스림이 옳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믿음과 견해가 바르지 못하면 수행하는 관행(觀行)이 다 무상에 속하여 마침내 물러나 상실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의 관행이요, 지혜로운 사람의 수행은 아니다.
타교가(他敎家) 역유간변관행(亦有簡辨觀行) 심천득실(深淺得失) 기의심상(其義甚詳) 위학인(爲學人) 유습언설(唯習言說) 혹고추성경(或高推聖境) 불능내구자심(不能內求自心) 역불(亦不) 능연마일구(能鍊磨日久) 지기공능이(知其功能耳) 차여원효법사운(且如元曉法師云) 여제세간(如諸世間) 우부관행(愚夫觀行) 내계유심(內計有心) 외구제리(外求諸理) 구리미세(求理彌細) 전취외상고(轉取外相故) 환배리거원(還背理去遠) 약천여지(若天與地) 소이종퇴몰(所以終退沒) 수무궁생사(受無窮生死)
교종에서도 관행(觀行)의 깊고 얕음과 잘되고 잘못됨을 잘 분석하여 그 뜻이 자상하건만 학인들은 오직 언어만 익히고 혹은 성인의 높은 경계로만 미루어 둔 채 안으로 자기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또한 오래 연마하지도 않고 단지 공능만 알려고 한다. 이래서 원효법사는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의 관행은 안으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모든 이치를 찾되 그 이치를 아주 세밀하게 찾다가 그만 바깥 현상계를 취하게 되기 때문에 도리어 이치를 등져서 하늘과 땅처럼 멀어진다. 이 때문에 타락하여 끝없는 생사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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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관행(智者觀行) 여차상반(與此相反) 외망제리(外忘諸理) 내구자심(內求自心) 주심지극(求心至極) 망리도진(忘理都盡) 진망소취(盡忘所取) 취심도멸(取心都滅) 소이능득지무(所以能得至無) 이리지리(理之至理) 필경무퇴(畢竟無退) 환주무주열반(還住無住涅槃) 우부소성계심(又復小聖計心) 선유생성고(先有生性故) 과미심득심멸무(過微心得心滅無) 무지무조(無智無照) 불이공계(不異空界) 대사해심(大士解心) 본무생성고(本無生性故) 이세상부득멸무(離細想不得滅無) 진조지재(眞照智在) 증회법계(證會法界)
그러나 지혜 있는 이의 관행은 이와 반대이다. 밖으로 모든 이치를 잊고 안으로 마음을 찾되 찾는 마음이 지극하므로 이치를 다 잊어버리고 취해야 할 대상도 잊어버리므로 취해야 할 마음마저 없어진다. 이 때문에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를 얻게 되고 마침내 물러남이 없게 되어 도리어 머무름이 없는 열반에 머물게 된다. 또 소승의 성인은 마음이 있다고 헤아린다. 그래서 먼저 성품(性品)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너무 미세한 마음으로 마음이 아주 없어지는 경지에 들어가서 지혜도 없고 비춤도 없어서 허공의 경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보살은 본래 성품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미세한 생각을 버리지만 마음이 아주 없다는 생각도 없이 참되게 비추는 지혜가 있어 모든 법의 경계를 증득하게 된다.
여시변별우부여지자(如是辨別愚夫與智者) 소승급대승인(小乘及大乘人) 관행득실(觀行得失) 불은미호(不隱微毫) 시지약선약교(是知若禪若敎) 고금득의관행지인(古今得意觀行之人) 개달자심(皆達自心) 망상반연(妄想攀緣) 본자무생(本自無生) 지지용중(智智用中) 무유간단(無有間斷) 증회법계(證會法界) 영여우부소승(永與愚夫小乘) 도로차별(途路且別) 기가불관자심(豈可不觀自心) 불변진망(不辨眞妄) 미적정업(未積淨業) 이성색신통도력야(而先索神通道力耶) 비부미해승주이욕원기수곡자재(比夫未解乘舟而欲怨其水曲者哉)
이와 같이 어리석고 지혜로운 이와 소승과 대승의 관행에 대해 그 득실을 분별하여 털끝만큼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선종이나 교종에서 고금을 통해 관행의 의미를 바로 안 사람은 다 자기 마음을 통달하여 망상과 반연이란 본래 일어난 곳이 없다. 그래서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의 작용이 끊임이 없어서 법계를 증득해 알므로 영원히 어리석은 이와 소승과는 그 길이 다르다. 그런데도 어찌 자기 마음을 관하지 않고 진실과 허망을 분별하지 않아 깨끗한 업을 쌓지 않고 먼저 신통과 도력만을 찾는가. 마치 배를 부릴 줄은 모르면서 물굽이를 원망하려는 이와 같구나.」
문약약자기진성(問若約自己眞性) 본자원성(本自圓成) 단임심자재(但任心自在) 합타고철(合他古徹) 하수관조(何須觀照) 이무승자박호(而無繩自縛乎) 답말법시대(答末法時代) 인다건혜(人多乾慧) 미면고륜(未免苦輪) 운의즉승허탁가(運意則承許託假) 출어즉월분과두(出語則越分過頭) 지견편고(智見偏枯) 행해부등(行解不等) 근래선문(近來禪門) 범학배(汎學輩) 다유차병(多有此病) 개운기자심본정(皆云旣自心本淨) 불속무유(不屬有無) 하가노형(何假勞形) 망가행용(妄加行用)
또 물었다. 「만약 자기의 참 성품이 본래부터 원만히 이루어졌다면 자재롭게 자기 마음에 맡겨 두어도 옛 법에 부합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관조함으로써 노끈도 없는데 스스로 결박을 받으려 하는가.」하니,
나는 대답하였다. 「말법 시대의 사람은 꾀 많은 지혜만 많아서 고통의 굴레를 벗지 못하며 마음만 내면 곧 허망하고 거짓된 것을 받들고 말을 내면 곧 분수를 지나치고, 지견이 모자라고 메마르고, 행과 앎이 같지 않다. 요즘 선문에서 공부하는 자들은 흔히 이런 병이 많아서 「마음은 본래 청정해서 유무(有無)에도 속해있지 않는데 왜 몸을 수고롭게 하여 억지로 수행할 필요가 있는가」하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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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효무애자재지행(是以效無碍自在之行) 방사진수(方捨眞修) 비유신구부단(非惟身口不端) 역내심행우곡(亦乃心行迂曲) 도불각지(都不覺知) 혹유집어성교(或有執於聖敎) 법상방편지설(法相方便之說) 자생퇴굴(自生退屈) 노수점행(努修漸行) 위배성종(違背性宗) 불신유여래(不信有如來) 위말세중생(爲末世衆生) 개비밀지결(開秘密之訣) 고집선문(固執先聞) 담마기금야(擔麻棄金也) 지눌빈우여차지류(知訥頻遇如此之類) 수유해설(雖有解說) 종수불수(終不信受) 단가의방이이(但加疑謗而已) 하여선수신해심성본정(何如先受信解心性本淨) 번뇌본공(煩惱本空) 이불방(而不妨) 의해훈수자야(依解薰修者也)
이 때문에 걸림 없고 자유로운 행만 본받고 참된 수행은 버리니, 몸과 마음이 단정치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구부려졌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어떤 이는 경전에서 말한 법상(法相)의 방편설에 집착하며 스스로 퇴보하는 마음을 내고, 점수(漸修)의 행에만 애를 쓴다. 그러니 성종(性宗;만법의 근원인 진실한 본성을 종지로 하는 선종을 뜻함)을 어기고 부처님이 말세 중생을 위해 열어 놓은 비밀한 말씀(오묘한 진리)을 믿지 않고 먼저 들은 것만 고집하니 이는 삼(麻)은 등에 지고 금덩이는 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자주 이런 유의 사람을 만나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그들은 믿지 않고 도리어 의심하고 비방할 뿐이었다. 다시 한번 「심성은 본래 깨끗하고 번뇌란 본래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의지해 수행하는 것이 어떠한가.
외섭률의이망구집(外攝律儀而忘拘執) 내수정려이비복날(內修靜慮而非伏捺) 가위어악단(可謂於惡斷) 단이무단(斷而無斷) 어선수(於善修) 수이무수(修而無修) 위진수단의(爲眞修斷矣) 약능여시(若能如是) 정혜쌍운(定慧雙運) 만행제수즉기비부공수묵지치선(萬行齊修則豈非夫空守默之痴禪) 단심문지광혜자야(但尋文之狂慧者也)
밖으로는 계율을 지키면서도 구속이나 집착을 잊고, 안으로는 선정(靜慮)을 닦되 억지로 생각을 눌러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른바 악을 끊되 끊으면서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되 닦으면서도 닦음이 없어야 참으로 닦고 끊음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으면서 아울러 온갖 행을 닦아 나간다면 헛되이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나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에 어찌 견주겠는가.
차수선일문(且修禪一門) 최위친절(最爲親切) 능발성상무루공덕(能發性上無漏功德) 약득의수자(若得意修者) 어일체시행주좌와(於一切時行住坐臥) 혹어혹묵(或語或默) 염념허현(念念虛玄) 심심명묘(心心明妙) 만덕통광(萬德通光) 개종중발(皆從中發) 안득구도(安得求道) 시본성이자안(恃本性而自安) 부전정혜호(不專定慧乎)
또 참선 수행은 가장 친절한 문이다. 성품에 갖추어져 있는 무루(無漏)의 공덕을 개발해주니 만일 뜻을 내어 닦는 자는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또는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언제고 간에 생각 생각이 비고 심오하며, 마음 마음이 밝고 오묘하여 온갖 덕과 신통 광명이 이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도를 구함에 있어 어찌 선정과 지혜 닦기에 전념하지 않고 본성만 믿고 안주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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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진기운(翼眞記云) 정혜이자(定慧二字) 내삼학지분칭(乃三學之分稱) 구운계정혜(具云戒定慧) 계이방비지악위의(戒以防非止惡爲義) 면타삼도(免墮三途) 정이칭리섭산위의(定以稱理攝散爲義) 능초육욕(能超六欲) 혜이택법관공위의(慧以擇法觀空爲義) 묘출생사(妙出生死) 무루성인(無漏聖人) 인중수행(因中修行) 개수학차(皆須學此) 우차삼학(又此三學) 유수상칭성지별(有隨相稱性之別) 수사여상설(隨相如上說) 칭성자(稱性者) 이본무아계자(理本無我戒也) 이본무란정야(理本無亂定也) 이본무미혜야(理本無迷慧也) 단오차리(但悟此理) 즉진삼학이(卽眞三學耳)
<익진기(翼眞記)>에 보면, 「선정과 지혜라는 두 말은 바로 삼학(三學;계, 정, 혜)의 준말로서 갖추어 말하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이다. 계율은 잘못을 막고 악을 고친다는 뜻이니, 삼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게 함이요, 선정은 진리에 부합하여 산란한 마음을 수습한다는 뜻이니, 여섯 가지 욕망을 뛰어넘게 함이요, 지혜는 법으로 공(空)을 관(觀)한다는 뜻이니 이는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성인은 처음 수행할 때 다 이것을 배웠기 때문에 삼학이라 한다」하였다. 또 이 삼학은 상(相)으로 따지는 것과 성품으로 따지는 구별이 있다. 상으로 따지는 것은 위에 말한 것과 같고, 성품으로 따진다면 「진리에는 본래 나가 없다는 것이 계율」이고, 「진리에는 본래 어지러움이 없다는 것이 선정」이며, 「진리에는 본래 미혹됨이 없다는 것이 지혜」이다. 이런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삼학이다.
선덕왈(先德曰) 오지치문(吾之法門) 선불전수(先佛傳授) 불론선정정진(不論禪定精進) 유달불지지견(唯達佛之知見) 차즉단파수상대치지명(此卽但破隨相對治之名) 불괴칭성삼학(不壞稱性三學) 고조계운(故曹溪云) 심지무비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 심지무란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 심지무치자성혜(心地無痴自性慧) 차지시야(此之是也)
또 옛 스님은 「내 법문은 과거 부처님이 전해주신 것이지만 선정과 정진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통달하게 할 뿐이다」하였으니, 이것은 상(相)으로 따지는 이들의 삼학을 깨뜨린 것이지 성품으로 따지는 삼학을 부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계 스님이 「마음에 잘못이 없음이 자성(自性)의 계율이요,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며,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지혜이다」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우소언선자(又所言禪者) 유천유심(有淺有深) 위외도선(謂外道禪) 범부선(凡夫禪) 이승선(二乘禪) 대승선(大乘禪) 최상승선(最上乘禪) 광여선원제전집소재(廣如禪源諸詮集所載) 금지소(今之所) 논심성본정(論心性本淨) 번뇌본공지의(煩惱本空之義) 시당최상승선(是當最上乘禪) 연어용공문중(然於用功門中) 초심지인(初心之人) 불무권승대치지의(不無權乘對治之義) 고차권수(故此勸修) 문내(文內) 권실병진(權實幷陳) 불가부지야(不可不知也)
또 말한 선(禪)에도 얕고 깊음이 있다. 말하자면 외도선, 범부선, 이승선, 대승선, 최상승선 등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에 실려 있는 것과 같다. 지금 말한 「심성은 본래 깨끗하고, 번뇌란 본래 없다」고 하는 이 이치는 바로 최상승선(가장 근기가 뛰어난 선, 즉 조사선을 뜻함)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차츰 공덕을 쌓아가는 수행의 문이 있어야 하겠기에 권승(權乘;근기가 얕은 이를 위해 방편으로 가르침)과 대치(對治;서로 대칭되는 것을 나타내어 가르침)의 뜻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권수문(勸修文)에는 방편과 절대의 진리를 아울러 말했으니 그렇게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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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명의수수(定慧名義雖殊) 요당재인(要在當人) 신심불퇴(信心不退) 극기성판이(剋己成辦耳) 지도론운(智度論云) 약구세간근사(若求世間近事) 불능전정(不能專精) 사업불성(事業不成) 황학무상보리(況學無上普提) 불용선정(不用禪定) 게운(偈云) 선정금강개(禪定金剛鎧) 능차번뇌(能遮煩惱) 선위수지장(禪爲守智藏) 공덕지복전(功德之福田) 효진폐천일(?塵蔽天日) 대우능엄지(大雨能淹之) 각관풍산지(覺觀風散心) 선정능멸지(禪定能滅之) 대집경운(大集經云) 여선상응자(與禪相應者) 시아진자(是我眞子) 게운(偈云) 한정무위불경계(閑靜無爲佛境界) 어피능독정보리(於彼能得淨普提) 약유훼방주선자(若有毁謗住禪者) 시명훼방제여래(是名毁謗諸如來) 정법염경운(正法念經云) 구사천하인명(救四天下人命) 불여일식경(不如一食頃) 단심정의(端心正意) 기신론운(起信論云) 약인문시법이(若人聞是法已) 불생겁약(不生怯弱) 당지시인(當知是人) 정소불종(定紹佛種) 필위제불지소수기(必爲諸佛之所授記)
선정과 지혜의 이름은 다르나 요는 본인의 신심이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데 있다. <지도론(智度論)>에 「세상의 하찮은 일도 전념하지 않으면 사업을 이룰 수 없는데 하물며 위없는 도를 배우면서 선정과 지혜에 힘쓰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고 그 게송에
선정금강개(禪定金剛鎧) 선정은 금강의 갑옷이라
능차번뇌(能遮煩惱) 능히 번뇌의 화살을 막고,
선위수지장(禪爲守智藏) 선정은 지혜를 지키는 창고라서
공덕지복전(功德之福田) 온갖 공덕의 복 밭이로다.
효진폐천일(?塵蔽天日) 분주한 티끌이 하늘 해를 덮으면
대우능엄지(大雨能淹之) 큰비가 그것을 씻어주고,
각관풍산지(覺觀風散心) 망상의 바람이 마음을 흩뜨리면
선정능멸지(禪定能滅之) 선정이 그것을 없애준다.
하였고, <대집경(大集經)>에는 「선정에 든 사람이 나의 참된 아들이다」 하고 그 게송에
한정무위불경계(閑靜無爲佛境界) 한적하고 고요한 무위(無爲)의 부처 경계여,
어피능독정보리(於彼能得淨普提) 거기에서 깨끗한 지혜를 얻는다.
약유훼방주선자(若有毁謗住禪者) 만일 선정에 머무는 이를 비방하면
시명훼방제여래(是名毁謗諸如來) 여래를 비방함이다」
했고, <정법염경>에는 「온 세계의 인명을 구제해도 잠시 마음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바르게 가지는 것만 못하다.」 했고, 또 <기신론(起信論)에는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 나약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부처의 종자를 이어가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예언을 내릴 것이다.
가사유인(假使有人) 능화삼천대천세계만중중생(能化三千大天世界滿中衆生) 영행십선(令行十善) 불여유인(不如有人) 어일식경(於一食頃) 정사차법(正思此法) 과전공덕(過前功德) 불가위유(不可爲諭) 시지의차수행(是知依此修行) 제선공덕(諸善功德) 불가승언(不可勝言) 약불안선정려(若不安禪靜慮) 업식망망(業識茫茫) 무본가거(無本可據) 임명종시(臨命終時) 풍화핍박(風化逼迫) 사대이산(四大離散) 심광열민(心狂熱悶) 전도난견(顚倒亂見) 상무충천지계(上無衝天之計) 하무입지지모(下無入地之謀) 장황공포(惶恐怖) 실소의빙(失所依憑) 형해소색(形骸蕭索) 유여선태(猶如蟬?) 미도면막(迷途綿邈) 고혼독거(孤魂獨逝)
가령 어떤 이가 온 세계의 중생을 교화하여 열 가지 선행을 하게 해도 잠깐 이 법을 올바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못하며, 이는 앞에 말한 사람의 공덕보다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하였으니 이로써 선정에 의해 수행하면 선(善)의 공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선 수행을 잘하지 못하면 업식(業識)이 아득하여 의지할 근본이 없다. 임종 시에는 병고에 시달리고 육신이 무너질 때는 마음은 미친 듯이 극도의 괴로움에 휩싸이고 소견은 뒤바뀌고 어지러워 하늘에 오를 꾀도 없고 땅에 들어갈 방도도 없다. 그리하여 당황하고 두려움에 질려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형색은 매미 껍질처럼 쓸쓸해지고, 아득하고 망망한 길을 외로운 혼이 홀로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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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보완진재(雖有寶玩珍財) 일무장거(一無將去) 수유호족권속(雖有豪族眷屬) 경무일인추수구호자(竟無一人追隨救護者) 시위자작자수(是謂自作自受) 무인체대의(無人替代矣) 당시시야(當是時也) 장하안목(將何眼目) 이위고해지진량(以爲苦海之津梁) 막언유소분유위공덕(莫言有少分有爲功德) 면차환란(免此患難)
재산이 많으나 하나도 못 가져가고, 귀한 종족의 권속들이 있으나 한 사람도 따라와 보호해줄 이도 없다. 이는 제가 지어 제가 받는 것이니 대신할 사람이 없다. 이 때 어떤 안목(眼目)으로 이 고해(苦海)를 건너는 다리로 삼겠는가. 약간의 유위(有爲)의 공덕이 있다 해서 이 환란을 면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백장화상운(百丈和尙云) 종유복지다문(縱有福智多聞) 도불상구(都不相救) 위심안미개(爲心眼未開) 유연념제경(唯緣念諸境) 부지반조(不知返照) 부불견불도(復不見佛道) 일생소유악업(一生所有惡業) 실현어전(悉現於前) 혹포혹환(或怖或?) 육도오온현전(六道五蘊現前) 진견엄호사택(盡見嚴好舍宅) 주선거여(舟船車輿) 광명현혁(光明現赫) 위종자심(爲縱自心) 탐애소견(貪愛所見) 실변위호경(悉變爲好境) 수소견(隨所見) 중처수생(重處受生) 도무자유분(都無自由分) 용축양천(龍畜良賤) 역총미정(亦摠未定)
백장(百丈) 스님은 「복과 지혜가 있고 많이 들은 것만으로는 구제되지 않는다.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바깥 경계에 끌려 마음을 비춰볼 줄 모른다. 결국 불도를 알지 못하므로 일생의 악업이 앞에 나타나면 두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육도와 오온이 앞이 나타나면 모두가 아름다운 좋은 집이나 배나 수레나 빛나는 광명으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함부로 굴려 탐애하는 소견이 일어나 모두가 좋은 경계로만 변하게 되고 그 소견을 따르다 보면 마침내 죄업이 무거운 곳에 태어나므로 전연 자유가 없다. 그래서 용이나 축생, 양민이나 천민으로 태어나도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한다」하였다.
시이범유고식원지지인(是以凡有高識遠志之人) 선수심관삼세업보(先須深觀三世業報) 호발불차(毫髮不差) 무지가도(無地可逃) 금약연차(今若緣差) 불능수진(不能進修) 후필수고(後必受苦) 양가상재(良可傷哉) 즉어초중후야(卽於初中後夜) 격이망연(?爾忘緣) 올연단좌(兀然端坐) 불취외상(不取外相) 섭심내조(攝心內照) 선이적적(先以寂寂) 치어연려(治於緣慮) 차이성성(次以惺惺) 치어혼침(治於昏沈) 균조산혼(均調昏散) 이무취사지염(而無取捨之念) 영심역력(令心歷歷) 확연불매(廓然不昧) 무념이지(無念而知) 비피소문(非彼所聞) 일체경계(一切境界) 종불가취(終不可取) 약수세연(若隨世緣) 유소시작(有所施作) 실당관찰응작불응작(悉當觀察應作不應作) 만행무폐(萬行無廢) 수유소작(雖有所作) 불실허명(不失虛明) 담연상주(湛然常住)
그러므로 높은 식견과 원대한 뜻이 있는 사람은 먼저 삼세의 업보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어 도망할 곳이 없으니, 만일 지금의 인연을 어그러뜨려 마음을 닦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괴로움을 받을 것이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깊이 관찰하여 항상 고요히 하여 온갖 인연을 잊고, 단정하게 앉아 바깥세상을 버리고 안으로 마음을 비춰보되, 먼저 고요함으로써 생각을 다스리고, 다음에는 깨어있음으로써 혼미함을 다스려야 한다. 혼미함과 산만함을 다스리되 취하고 버리는 생각이 없이 마음이 밝고 확 트이어야 생각 없이 알게 되고,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경계도 취하지 않아야 한다. 혹 세상 인연 따라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관찰하면서 수행을 폐하지 않는다면 비록 하는 일이 있더라도 밝음을 잃지 않고 고요히 머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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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숙각운(一宿覺云) 적적위불념외경선악등사(寂寂謂不念外境善惡等事) 성성위불생혼주무기등상(惺惺謂不生昏住無記等相) 약적적불성성(若寂寂不惺惺) 차내혼주(此乃昏住) 성성불적적(惺惺不寂寂) 차내연려(此乃緣慮) 불적적불성성(不寂寂不惺惺) 차내비단연려(此乃非但緣慮) 역내입혼이주(亦乃入昏而住) 역적적역성성(亦寂寂亦惺惺) 비우역력(非唯歷歷) 겸부적적(兼復寂寂) 차내환원지묘성야(此乃還源之妙性也)
일숙각(一宿覺)이 「고요함이란 외부의 선악 등을 생각하지 않음이요, 깨어있음은 혼미한 마음을 막는 것이다. 만약 고요함만 있고 깨어있지 않으면 그것도 혼미함이요, 깨어있되 고요하지 않으면 그것도 세속의 생각일 뿐이며, 고요하지도 않고 깨어있지도 않으면 그것은 세속 생각일 뿐 아니라 혼미에 빠지는 것이다. 고요하고 깨어있으면 그것은 또렷이 밝을 뿐만 아니라 겸하여 고요함이니, 이것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묘한 성품이다」하였다.
십의론주운(十疑論註云) 무념자(無念者) 즉시진여삼매(卽是眞如三昧) 직수성성적적(直須惺惺寂寂) 불기반연(不起攀緣) 실상상응(實相相應) 선덕운(先德云) 범부유념유지(凡夫有念有知) 이승무념무지(二乘無念無知) 제불무념이지(諸佛無念而知) 여상언교(如上言敎) 시수심인(是修心人) 정혜등지(定慧等持) 명견불성지묘문야(明見佛性之妙門也) 유지지인(有智之人) 절수심상(切須審詳) 기가도표대의(豈可徒標大意) 이편기수행야(而便棄修行耶)
<십의론주(十疑論註)>에는 「무념(無念)이 바로 진여삼매이다. 고요하고 깨어있어야 반연을 일으키지 않아 실상과 서로 응한다」하였고, 또 옛 스님은 「범부는 생각도 있고 아는 것도 있고, 이승(二乘)은 생각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부처님은 생각이 없이 안다」고 하였다. 이런 가르침이 바로 마음 닦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져서 불성을 밝게 보는 묘문(妙門)이 되는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세밀히 살펴야 하는데 어째서 대의만 표방하고 수행을 버려서야 되겠는가.」
문왈제불묘도(問曰諸佛妙道) 심광난사(深曠難思) 금지영말세중생(今只令末世衆生) 관조자심(觀照自心) 이희불도(而希佛道) 자비상근(自非上根) 미면의방(未免疑謗) 여소왈전래문의(予笑曰前來問意) 하위자고(何爲自高) 차문하위자비(此問何爲自卑) 차막초초(且莫草草) 오어여(吾語汝) 마명보살(馬鳴菩薩) 촬요백본대승경전(撮要百本大乘經典) 조기신론(造起信論) 직표운(直標云) 소언법자(所言法者) 위생중심(謂衆生心) 시심즉섭일체세간(是心卽攝一切世間) 출세간법(出世間法) 의어차심(依於此心) 현시마하연의(顯示摩訶衍義) 개공중생(蓋恐衆生) 부지자심(不知自心) 영묘자재(靈妙自在) 향외구도이(向外求道耳)
또 물었다. 「부처님의 심오한 도는 깊고 넓어 생각하기 어려운데, 지금 말세 중생들에게 자기 마음을 관조하여 불도를 이루게 하니, 그가 높은 근기가 아니고는 의심하고 비방할 것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전에 물은 뜻은 그리도 높더니 지금 묻는 것은 왜 비속한가? 너무 경솔하지 말라. 그대에게 말하리라. 마명보살은 백 권의 대승경전을 추려서 <기신론>을 지었는데 그 벽두에 「법이란 것은 중생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세간과 세간을 벗어난 법을 포섭하였으므로 이 마음에 의해 마하의 큰 뜻을 나타낸다」하였다. 이는 중생이 제 마음이 신령스럽고 자재함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도를 찾을까봐 걱정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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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경운(圓覺經云) 일체중생(一切衆生) 종종환화(種種幻化) 개생여래원각묘심(皆生如來圓覺妙心) 유여공화(猶如空花) 종공이유(從空而有) 배상국운(裵相國云) 혈기지속(血氣之屬) 필유지(必有知) 범유지자(凡有知者) 필동체(必同體) 소위진정명묘(所謂眞淨明妙) 허철영통(虛徹靈通) 탁연이독존자야(卓然而獨尊者也) 배지즉범(背之卽凡) 순지즉성(順之卽聖)
<원각경(圓覺經)>에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한 모습들이 다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심오한 마음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마치 눈병 때문에 나타나는 허공 꽃이 허공에서 생겨난 것과 같다」하였으며, 배상국(裵相國)은 「생명이 있는 자는 반드시 아는 것이 있다. 아는 것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 바탕이 같은 것이니, 이른바 진실하고 깨끗하고 밝고 심오하며 텅 비었으며 신령하고 통달하여 홀로 높은 존재로다. 이것을 등지면 범부요 그것을 따르면 성인이다」하였다.
운개지선사(雲盖智禪師) 상위문인왈단막만심(常謂門人曰但莫瞞心) 심자영성(心自靈聖) 차등시제경론(此等是諸經論) 급천하선지식(及天下善知識) 소유언구중미지야(所留言句中微旨也) 단시인(但時人) 자기자만(自欺自瞞) 일용이불자신자수이(日用而不自信自修耳) 탈혹유신지자(脫或有信之者) 불가결택(不加決擇) 수정향배(隨情向背) 미면단상(未免斷常) 이견집이견(而堅執已見) 기가여지어도야(豈可與之語道也)
운개(雲盖) 지(智) 선사는 제자들에게 「마음을 속이지 않으면 마음은 스스로 신령하고 성스럽다」하였다. 이런 말들은 여러 경론과 선지식들이 남긴 말 가운데 핵심이 되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스스로 속이기 때문에 나날이 마음을 쓰면서도 믿지도 않고 닦지도 않는다. 혹 믿는 이가 있어도 가려서 결정하지 못하고 감정에 따라 따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여 「없다. 있다」하는 생각에 빠져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니, 어떻게 그들과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문왈수다라중(問曰修多羅中) 연설백천삼매(演說百千三昧) 무량묘문(無量妙門) 포망장라(布網張羅) 해천괄지(該天括地) 제보살(諸菩薩) 의교봉행(依敎奉行) 자어단증계위즉수(至於斷證階位則遂) 유삼현십지(有三賢十地) 등묘이각(等妙二覺) 금단의성성적적이문(今但依惺惺寂寂二門) 대치혼침연려(對治昏沈緣慮) 종기구경위자(終期究竟位者) 여인일미구(如認一微) 이위궁진(以爲窮盡) 영발(瀛渤) 불기혹호(不其惑乎)
또 물었다. 「경전 가운데 여러 가지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법을 연설한 것이 그물처럼 덮여 하늘과 땅을 다 둘러쌌으니, 모든 보살이 그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여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하는 지위에 오르게 되는 삼현·십지(둘 다 보살 수행의 지위를 뜻함)와 등각ㆍ묘각(등각은 제51위, 묘각은 최고 지위인 佛果의 자리임)이 있는데, 단지 성성(惺惺)과 적적(寂寂)의 두 가지 법에 의해 혼미함과 번뇌의 생각들을 다스려 최종의 지위를 얻겠다는 것은 마치 작은 물거품을 보고 바다를 보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잘못된 것 아닙니까.」
답금시수심인(答今時修心人) 구불종성(具佛種性) 의돈종직지지문(依頓宗直指之門) 발결정신해자(發決定信解者) 직료자심상적(直了自心常寂) 직연성성(直然惺惺) 의차이기수고(依此而起修故) 수구수만행(雖具修萬行) 유이무념위종(唯以無念爲宗) 무작위본야(無作爲本也)
대답했다. 「현재 마음을 닦는 사람은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어서 바로 깨달음을 가르치는 돈종(頓宗)의 문에 신해(信解)를 가진 이는, 자기 마음이 본래 고요하고 깨어있음을 알고 거기에 의해 수행하기 때문에 비록 만행을 한다 해도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고, 무작(無作)으로 근본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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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념무작고(以無念無作故) 무유시겁지위(無有時劫地位) 점차지행(漸次之行) 역무법의차별지상(亦無法義差別之相) 이구수고(以具修故) 진수법문(塵數法門) 제지공덕(諸地功德) 묘심채구(妙心體具) 여여의주(如如意珠) 차중성성적적지의(此中惺惺寂寂之義) 혹직약리념심체(或直約離念心體) 혹약(或約) 용공문설지(用功門說之) 고수성구원(故修性俱圓) 이행겸창(理行兼暢) 수행경로(修行徑路) 막사위최(莫斯爲最)
무념, 무작이기에 시간과 지위 등 점차로 닦는 수행이 없고, 또 법이니 뜻이니 하는 차별상이 없는 가운데 수행하기에 많은 법문과 모든 지위의 공덕이 묘심(妙心)에 갖추어져 있음이 여의주와 같다. 이 안에 「깨어 있고, 고요하다」는 이치를 바로 생각을 떠난 마음에서 말하기도 하고, 혹은 공부를 쌓는 법에서 말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과 본성이 다 원만하고 이치와 실천이 함께 통달하니 수행의 지름길로 이보다 훌륭한 것이 없다.
단득의수심(但得意修心) 탈생사병위요(脫生死病爲要) 하용명의쟁론(何用名義諍論) 이흥견장호(而興見障乎) 이금(而今) 약선득이념심체(若善得離念心體) 즉여불지상계(卽與佛智相契) 하론(何論) 삼현십성(三賢十聖) 접아법문(漸次法門) 원각증수의운(圓覺修證儀云) 돈문무정위(頓門無定位) 심정즉명진(心淨卽名眞) 기신론운(起信論云) 소언각의자(所言覺義者) 위심체이념(謂心體離念) 이념상자(離念相者) 등허공계(等虛空界) 무소불변(無所不遍) 법계일상(法界一相) 즉시여래평등법신(卽是如來平等法身)
요는 마음을 닦아 생사의 병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데, 왜 명분 다툼으로 지견의 장애를 일으키는가. 만약 「생각을 여읜 마음」을 얻으면 곧 부처의 지혜를 얻는데 왜 삼현이나 십성 등 점차로 깨달아가는 법을 논하는가. <원각수증의(圓覺修證儀)>에는 「돈문(頓門)에는 일정한 지위란 없고 마음이 깨끗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다.」했고, <기신론(起信論)>에는 「깨달음이란 마음 자체가 생각을 여읜 것을 말한다. 생각을 여읜 상태는 허공과 같아서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서, 온 법계가 한 몸이다.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 하였다.
우운(又云) 약유중생(若有衆生) 능관무념자(能觀無念者) 즉위향불지고(卽爲向佛智故) 사조(四祖) 위융선사왈(謂融禪師曰) 부백천삼매(夫百千三昧) 무량묘문(無量妙門) 진재여심(盡在汝心) 고지(故知) 약불요자심(若不了自心) 원해제법(圓該諸法) 우부지성교(又不知聖敎) 천도이설(千途異說) 수순기의(隨順機宜) 무불지귀자심법계(無不指歸自心法界) 이반집문자차별의문(而返執文字差別義門) 우자생겁약(又自生怯弱) 망만어삼지행위자(望滿於三祗行位者) 비성종득의수심자야(非性宗得意修心者也) 여유차병(如有此病) 청종금개(請從今改)
또 「만일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잘 관할 수 있다면 곧 부처의 지혜로 향한다.」하였다. 그리고 사조 도신(道信)스님은 융 선사에게 「수없는 삼매와 한량없는 법문이 모두 네 마음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제 마음이 모든 법을 포용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또 성인의 가르침이 천 갈래로 다르게 말한 것은 근기에 따라 자기 마음의 법계로 돌아가게 한 것인데도 도리어 글자의 차별에 집착하고, 거기에다 나약한 마음으로 삼아승지(三阿僧祗;보살이 부처되기 위한 수행절차. 또는 그 햇수를 말함)의 수행절차가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성종(性宗)에 뜻을 두어 마음을 닦는 자가 아니다. 만일 이런 병이 있거든 당장 고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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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어고인처(近於故人處) 득오위수증도(得五位修證圖) 내건주대중사강학사문영년(乃建州大中寺講學沙門永年) 배정(排定) 항주상부사전화엄교명의대사담혜(杭州祥符寺傳華嚴敎明義大師曇慧) 중상정(重祥定) 기서운(其序云) 부무상보리(夫無上菩提) 재삼수겁외(在三數劫外) 오위수행(五位修行) 육도원만(六道圓滿) 방능증득(方能證得) 금열돈점양도(今列頓漸兩途) 약원돈문(若圓頓門) 종중생계(從衆生界) 선남자등(善男子等) 구불종생(具佛種性) 일념배진합각(一念背塵合覺) 불력승지(不歷僧祗) 직지오계(直至悟界) 위지돈초견성성불(謂之頓超見性成佛) 약삼승점차(若三乘漸次) 오위성현(五位聖賢) 수력삼지(須歷三祗) 방성정각(方成正覺)
근래 친구한테 <오위수증도(五位修證圖)>를 얻었다. 건주 대중사의 강학사문 영년이 초안했고 항주 상부사의 화엄학자 명의대사 담혜가 세밀히 감정한 것이다. 그 서문에 「위없는 지혜는 아승지겁을 두고 오위(五位)의 수행과 육바라밀이 원만해야 증득한다. 그러나 지금은 돈(頓)ㆍ점(漸)의 두 길이 있다. 만일 원돈문(圓頓門)으로 본다면 중생계의 불성을 갖춘 선남자들이 한 생각의 번뇌를 버리면 깨닫게 되므로 아승지겁을 거치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경계에 이르는데 이는 단박에 초월하여 견성 성불하는 길이요, 차츰 닦아가는 삼승의 길은 오위의 성현이 삼아승지를 지내야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얻는다」하였다.
여시변명(如是辨明) 지어도중(至於圖中) 배정돈점행상(排定頓漸行相) 역불상잡유(亦不相雜) 소이연자(所以然者) 이기중생근기(以其衆生根機) 혹유이승종성(或有二乘種性) 혹유보살(或有菩薩) 종성(種性) 혹유불종성(或有佛種性) 이둔각별고야(利鈍各別故也) 교중역유여시구불종성중생(敎中亦有如是具佛種性衆生) 어생사지면상(於生死地面上) 돈오불승(頓悟佛乘) 제증제수(齊證齊修) 지지(之旨) 하득남종(何得南宗) 유돈문야(有頓門耶)
이렇게 분명히 밝히고, 그림 가운데 돈ㆍ점의 구체적 내용을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잘 배열해 놓았는데 이는 중생의 근기가 이승적인 성품도 있고, 보살의 성품도 있고, 부처의 성품도 있어서 예리하고 둔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종에서도 부처의 성품을 갖춘 중생이 생사의 땅에서 부처의 경지를 단박 깨달아 한꺼번에 증득하고 닦는 이치가 있는데 어째서 남종(南宗;혜능을 개조로 하는 돈오<頓悟>의 종파)에만 단박 깨닫는 법이 있겠는가?
단학교학선지자(但學敎學禪之者) 수우묘지(雖遇妙旨) 고추성경(高推聖境) 자생겁약(自生怯弱) 미능심관자심일용견문각지지성(未能深觀自心日用見聞覺知之性) 시무등등대해탈고(是無等等大解脫故) 생다반의혹이(生多般疑惑耳) 차후갱인성증(此後更引誠證) 구명돈초견성자(具明頓超見性者) 수불자삼승점차행위(雖不藉三乘漸次行位) 역불애오후원수행문(亦不碍悟後圓修行門) 여시오수본말(如是悟修本末) 불이원명(不離圓明) 각성성적지의(覺性惺寂之義) 원령수심인(願令修心人) 천권취실(遷權就實) 불왕용공(不枉用功) 자타속증무상보리(自他速證無上菩提)
다만 교(敎)나 선(禪)을 배우는 사람이 오묘한 뜻을 만났다 해도 성인의 경계로만 미루고 지레 겁을 먹는다. 나날이 쓰고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제 마음의 성품이 바로 부처님과 같은 큰 해탈임을 깊이 관찰하지 못하므로 온갖 의혹을 낼뿐이다. 이래서 다음에 다시 진실한 증거를 대어, 점차로 닦아가는 삼승에 의지하지 않고도 단박에 견성하는 자가 깨달은 다음에 원만히 수행하는 데에 전혀 장애가 없고, 이렇듯 깨닫고 닦는 본말 그대로가 원만하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을 떠나지 않은 부처의 경지임을 자세히 밝혀 마음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권학(權學)을 버리고 진실한 곳으로 나아가 헛된 공력을 들이지 않고 자타가 빨리 위없는 보리를 증득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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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여법집벌행록운(且如法集別行錄云) 시자발심(始自發心) 내지성불(乃至成佛) 유적유지(唯寂唯知) 불변부단(不變不斷) 단수지위(但隨地位) 명의초수(名義稍殊) 위약료오시(謂約了悟時) 명위이지(名爲理智) 약발심수시(約發心修時) 명위지관(名爲止觀) 약임운성시(約任運成行) 명위정혜(名爲定慧) 약번뇌도진(約煩惱都盡) 공행원만성불지시(功行圓滿成佛之時) 명위보리열반(名爲菩提涅槃) 당지시자발심(當知始自發心) 내지필경(乃至畢竟) 유적유지(唯寂唯知) 거차록지지즉수금시범부(據此錄之旨則雖今時凡夫) 능회광반조(能廻光返照) 선지방편(善知方便) 균조혼산(均調昏散) 성성적적지심(惺惺寂寂之心) 해인철과(該因徹果) 불변부단(不變不斷) 단생숙명매(但生熟明昧) 수공이이(隨功異耳)
또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에는 「처음 발심해서 성불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요하고 아는 것知〕, 그것은 변하거나 끊어지지 않고 단지 그 지위를 따라 이름이 다소 다르다. 만약 밝게 깨달았을 때는 이(理;고요함)와 지(智;아는 것)라 하고, 발심해서 수행할 때는 지(止;반연을 쉬어 고요함에 합하는 것)와 관(觀;마음을 보아 앎에 합하는 것)이라 하고, 제대로 연마하여 행을 이룰 때에는 정(정;선정, 즉 고요함에 듦)과 혜(慧;선정에 의해 분별없는 앎이 생김)라 하고,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고 공을 쌓는 수행이 원만하여 성불할 때에는 보리(菩提;깨달음, 즉 안다는 것)와 열반(涅槃;번뇌의 사라짐, 즉 고요함을 말함)이라 한다. 그러므로 발심해서 최후까지 오직 고요하고 안다」하였다. 이 <별행록>의 뜻에 의하면 지금은 비록 범부일지라도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춰보고, 방편을 잘 알아 혼미함과 산란함을 잘 조절하면 깨어있되 고요한 마음이 인과(因果)를 두루 포함하여 변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지만 단지 공부가 익었는가 덜 익었는가, 밝은가 어두운가에 따라 다를 뿐이다.
약원조자심(若圓照自心) 진상성덕(眞常性德) 동정쌍융(動靜雙融) 증회법계즉편지제지공덕(證會法界則便知諸地功德) 진수법문(塵數法門) 구세십세(九世十世) 불리어당념(不離於當念) 이심(以心) 성령묘자재(性靈妙自在) 함용만종법(含容萬種法) 만법미상이자성(萬法未嘗離自性) 여전여부전(如轉如不轉) 성상체용(性相體用) 수연불변(隨緣不變) 동시무애(同時無碍) 초무금고범(初無今古凡) 성선악취사지심(聖善惡取捨之心) 이불방공용점증(而不妨功用漸增) 역제지위(歷諸地位) 비지점원(悲智漸圓) 성취중생(成就衆生) 이시종(而始終) 불이일시일념일법일행야(不移一時一念一法一行也)
만일 자기 마음의 진실하고 변함없는 성품이,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융화됨을 비추어 법계를 증득해서 알면 모든 지위의 공덕과 한없는 법문과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생각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음의 성품은 신령하고 자재로우며 온갖 법을 포용하고 있다. 그 온갖 법은 각자 자기 성품을 떠난 적이 없어,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 본성(本性)과 현상, 본체와 작용, 인연을 따라 변하는 것과 불변하는 것이 동시에 서로 걸림이 없으므로 거기에는 애초부터 옛날과 지금, 범부와 성인, 선과 악,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리하여 공을 차츰 많이 쌓고 보살의 여러 지위를 거치는 동안 자비와 지혜가 점점 뚜렷해져서 중생을 구제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때도, 한 생각도, 한 법도, 한 행도 변함이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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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론운(華嚴論云) 이자심근본무명분별지종(以自心根本無明分別之種) 편성부동지불(便成不動智佛) 이법계체용(以法界體用) 이위신진오입지문(以爲信進悟入之門) 종신급입위법수(從信及入爲進修) 내지경십주십행십회양십지십일지(乃至經十住十行十回向十地十一地) 총불리본부동지불(摠不離本不動智佛) 불리일시일념일법일행상(不離一時一念一法一行上) 이유무무량(而有無量無) 변불가설불가설법계허공계미진수법문(邊不可說不可說法界虛空界微塵數法門) 하이고(何以故) 위종법계급근본부동지상(爲從法界及根本不動智上) 위신진오입고(爲信進悟入故)
<화엄론(華嚴論)>에는 「자기 마음 가운데 분별하는 종자인 근본 무명으로써 움직임이 없는 지혜의 부처를 이루고, 법계의 본체와 작용으로써 믿음과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삼으며, 여기에서 더 닦아 십주(十住;보살 수행에서 편안히 머무는 지위)·십행(十行;보살의 수행에서 중생 제도에 노력하는 지위)·십회향(十回向;중생 제도와 함께 불과<佛果>를 향해 노력하는 지위)·십지(十地;흔들림 없는 부처의 지혜를 내는 지위)·십일지(十一地;성인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흔들림 없는 지혜의 부처를 떠나지 않는다. 한 순간, 한 생각, 한 법, 한 행도 떠나지 않은 가운데, 한없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법계와 허공계의 티끌과 같은 법문이 거기에 들어있다. 왜 그러냐 하면 법계와 흔들림 없는 근본 지혜 위에서 믿고 나아가 깨달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하였다.
우운부동삼승권교(又云不同三乘權敎) 약열해중생(約劣解衆生) 존세간삼세지성(存世間三世之性) 설불과(說佛果) 재삼승지지외(在三僧祗之外) 거차론지지(據此論之旨) 원종원신지자(圓宗圓信之者) 이자심근본무명분별지종(以自心根本無明分別之種) 편성부동지불(便成不動智佛) 종신내지구경위(從信乃至究竟位) 무유전변성괴지상(無有轉變成壞之相) 가위심성(可謂心性) 본래자재(本來自在) 수연사전이상무변이자야(隨緣似轉而常無變易者也)
그리고 또 「삼승(三乘)의 방편에서 가르치듯이, 용렬한 견해를 가진 중생을 상대로 해서 세간에는 삼세(三世)의 성품이 있다고 한 말과 불과(佛果)는 삼아승지겁 밖에 있다고 말한 것과는 다르다」하였다. 이런 논지로 보면 원종(圓宗)을 원만히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 가운데 분별을 일으키는 근본 무명이 바로 흔들림 없는 지혜를 이루고, 믿음의 지위에서 마지막 지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도 바뀌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심성은 본래 자재하여 인연을 따라 변하는 것 같지만 변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근래(近來) 유습언설자(唯習言說者) 수광담법계무애연기(雖廣談法界無碍緣起) 초불반관자심지덕용(初不返觀自心之德用) 기불관법계성상(旣不觀法界性相) 시자심지체용(是自心之體用) 하시개자심정진(何時開自心情塵) 출대천경권(出大千經券) 경불운호(經不云乎) 지일체법(知一切法) 즉심자성(卽心自性) 성취혜신(成就慧身) 불유타오(不由他悟)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비록 법계의 걸림 없는 연기법(緣起法)을 말하지만 애초부터 자기 마음의 덕의 작용은 돌아보지 않는다. 이미 법계의 성상(性相)이 바로 자기 마음의 본체와 작용임을 보지 못하는데 언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티끌을 열어서 삼천대천세계의 큰 경전을 연설하겠는가. 경에도 「일체의 법이 마음의 자성(自性)인 줄 알면 지혜의 몸을 이룬다. 결코 다른 것에 의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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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불운호(又不云乎) 언사소설법(言辭所說法) 소지망분별(小智妄分別) 시고생장애(是故生障碍) 불료어자심(不了於自心) 불능요자심(不能了自心) 운하지정도(云何知正道) 피유전도혜(彼由顚倒慧) 증장일체악(增長一切惡) 복방수진고사(伏望修眞高士) 의여상간고지언(依如上懇苦之言) 선수심신자심(先修深信自心) 시제불본원(是諸佛本源) 이관조정혜지력발출지(以觀照定慧之力發出之) 불가단거포우(不可端居抱愚) 효무분별(效無分別) 이위대도(而爲大道) 소위재전진여(所謂在纏眞如) 혼산개구(昏散皆具) 출전진여(出纏眞如) 정혜방명(定慧方明) 총별조연(總別條然) 전후(前後) 무람고야(無濫故也)
그리고 「말로 하는 설법은 작은 지혜의 망령된 분별이다. 그러므로 장애가 생겨 제 마음을 알지 못한다. 제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바른 도를 알겠는가. 그들은 뒤집힌 지혜로 말미암아 온갖 악을 더할 뿐이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삼가 바라나니, 진리를 닦는 높은 선비는 이상의 간곡한 말에 의해 먼저 제 마음이 바로 부처의 근본임을 깊이 믿고, 그 근본을 비춰보는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어리석음을 안고 단정하게 앉아 분별이 없는 것만을 본받는 것으로 대도라 해서는 안된다. 얽매임 속에 있는 진여는 혼침과 산란이 들어 있고, 얽매임을 벗어난 진여라야 비로소 선정과 지혜가 밝아지는 것이니, 그것은 전체와 개체가 서로 조리가 있어 앞뒤가 질서정연하기 때문이다.
역불가위(亦不可謂) 현금치기염(現今治其染) 당래득기정(當來得其淨) 불관본묘(不觀本妙) 자생간조(自生艱阻) 이노수점행(而勞修漸行) 유심결운(唯心訣云) 혹양위(或讓位) 고추어극(高推於極) 성(聖) 혹적덕(或積德) 망만어삼지(望滿於三祗) 부지전체현전(不知全體現前) 유희묘오(猶希妙悟) 기각종래구족(豈覺從來具足) 인대공성(仍待功成) 불입원상(不入圓常) 종성윤전(從成輪轉) 지위매어성덕(紙爲昧於性德) 망변진종(罔辨眞宗) 사각순진(捨覺徇塵) 기본취말(棄本就末) 차지시야(此之是也) 시고(是故) 수심지인(修心之人) 불자굴불자시(不自屈不自恃) 시즉타어차심(恃卽墮於此心) 불수자성(不守自性) 능범능성(能凡能聖) 찰나조작(刹那造作) 환부표침지용(還復漂沈之用) 시이(是以)
또 「금생에 물든 번뇌를 다스려서 내생에는 청정해지리라」하여 본래의 묘한 마음을 보지 않고, 스스로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점차로 닦아가는 수행을 택해서는 안된다. <유심결>에 「보살의 지위를 사양하여 지극한 성인에게 미루고, 혹은 덕을 쌓아 삼아승지겁이 차기를 기다리고, 혹은 전체가 앞에 나타난 것도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묘한 깨달음만을 바라니 어찌 본래 구비해 있는 진여(眞如)를 깨닫겠는가. 이래서 공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원만하고 변함없는 데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침내 생사에 헤매는 것은 단지 성품에 어두워 참된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버리고 번뇌를 쫓아가고, 근본을 버리고 줄기로 나아가는 것이다」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닦는 사람은 비굴하지도 말고 의지하지도 않아야 한다. 의지하면 마음이 자성을 지키지 못하여 범인도 되고 성인도 되며, 찰나 찰나로 조작하여 다시 떴다 잠겼다 하는 작용으로 돌아가는 데에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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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是以) 주삼야삼(晝三夜三) 근근온습(懃懃蘊習) 성성무망(惺惺無妄) 적적명료(寂寂明亮) 불위수문(不違修門) 굴즉실어차심(屈卽失於此心) 영통응물(靈通應物) 상재목전(常在目前) 종일수연(終日隨緣) 이종일불변지덕(而終日不變之德) 시이(是以) 장치애(將痴愛) 성해탈진원(成解脫眞源) 운탐진(運貪嗔) 현보리대용(現菩提大用) 역순자재(逆順自在) 박탈무구(縛脫無拘) 순어성(順於性) 문야(門也) 차수성이문(此修性二門) 여조양익(如鳥兩翼) 궐일불가(闕一不可)
그러므로 밤낮 부지런히 공부하여 항상 깨어있으되 망령됨이 없고, 고요하되 밝아야 하는 그런 수행의 문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만약 물러서면, 항상 눈앞에서 사물을 상대하며 종일 인연을 따르되 변함이 없는 신통한 마음의 덕을 잃고 만다. 그러므로 어리석음과 애욕 가운데서 해탈의 참된 근원을 이루고, 탐욕과 분노를 잘 운용하여 보리의 큰 작용을 나타내어, 역경과 순경에 자재하여 결박과 해탈에 구애되지 말고 성품에 순응해야 한다. 수행과 성품이라는 두 문은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하나만 없어도 안된다.
선덕운(先德云) 흡흡용심시(恰恰用心時) 흡흡무심용(恰恰無心用) 곡담명상로(曲談名相勞) 직설무번중(直說無煩重) 무심흡흡용(無心恰恰用) 상용흡흡무(常用恰恰無) 금설무심처(今說無心處) 불여유심수(不與有心殊) 약능어차(若能於此) 득의진수(得意進修) 즉수시말세중생(則雖是末世衆生) 하환호낙단상지갱야(何患乎落斷常之坑也) 향래소위진수법문(向來所謂塵數法門) 제지공덕(諸地功德) 묘심체구(妙心體具) 여여의주(如如意珠) 기무야재(豈誣也哉) 언묘심자(言妙心者) 시성성적적지심야(是惺惺寂寂之心也)
옛 스님의 말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쓸 때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없이 쓰게 된다. 굽은 말은 이름과 모양을 헤아리느라 수고롭고, 바른 말은 번거로움과 되풀이가 없다. 무심히 자연스럽게 쓰면 항상 써도 자연스러워 쓰는 것이 없다. 지금 말한 바 마음이 없다는 것도 바로 마음이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만약 여기에서 뜻을 얻어 닦아나간다면 말세 중생이라도 어찌 단(斷;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과 상(常;항상 있다는 생각)에 떨어질 걱정을 하겠는가. 지금까지 이른바 수 없는 법문과 보살의 모든 지위의 공덕이 다 묘심의 본체에 갖추어져 있음이 여의주와 같다 한 것이 어찌 거짓말이겠는가. 묘심이란 바로 깨어있으면서도 고요한 마음을 말한다.」
문금시수심지인(問今時修心之人) 약박학다문(若博學多聞) 설법도인(說法度人) 즉송어내조(則損於內照) 약무이타지행(若無利他之行) 즉하아취적지도야(則何異趣寂之徒也) 답차각재당인(答此各在當人) 불가일향(不可一向) 약인언오도(若因言悟道) 자교명종(藉敎明宗) 구택법안자(具擇法眼者) 수다문이불기인명집상지념(雖多聞而不起認名執相之念) 수이타(雖利他) 이능단자타증애지견(而能斷自他憎愛之見) 비지점원(悲智漸圓) 묘계환중즉성당실행자야(妙契?中則誠當實行者也)
또 물었다. 「지금 마음 닦는 사람이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서 설법으로 남을 제도할 경우에는 마음을 관조하는 공부는 손실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이타행(利他行)이 없다면 고요함만을 즐기는 무리와 무엇이 다른가.」
답하다. 「이는 개인의 문제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말로 인해 도를 깨닫거나 교(敎)에 의해 종지를 밝히거나 일단 법을 택하는 눈을 갖춘 이는 많이 들었다 해서 이름과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타행을 하더라도 자기다, 남이다 하여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생각이 끊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점점 원만해져서 절대의 법계에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참다운 수행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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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어생견(若隨語生見) 제문작해(齊文作解) 축교미심(逐敎迷心) 지월불분(指月不分) 미망명문이양지심(未忘名聞利養之心) 이욕설법도인자(而欲說法度人者) 여예와라(如濊蝸螺) 자예예타(自濊濊他) 시내세간문자법사(是乃世間文字法師) 하명전정정혜(何名專精定慧) 북구명문자호(不求名聞者乎)
만약 말에 따라 견해를 내고, 글을 따라 해석을 하고, 교(敎)를 좇아 마음이 미혹되어 손가락과 달을 분별하지 못하고(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뜻), 명예와 이익에 대한 생각을 잊지 못하면서 설법으로 남을 제도하겠다는 사람은 마치 더러운 달팽이가 자기도 더럽히고 남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문자법사(文字法師)일뿐이니, 어찌 선정과 지혜를 닦으며 명예를 구하지 않는 이라 하겠는가.
화엄론운(華嚴論云) 약자유박(若自有縛) 능해타박(能解他縛) 무유시처(無有是處) 지공법사대승찬운(誌公法師大乘讚云) 세간기허치인(世間幾許痴人) 장도부욕구도(將道復欲求道) 광심제의분운(廣尋諸義紛?) 자구기신불료(自救己身不了) 전심타문난설(專尋他文亂說) 자칭지리묘호(自稱至理妙好) 도로일생허과(徒勞一生虛過) 영겁침륜생로(永劫沈淪生老) 탁애전심불사(濁愛纏心不捨) 청정지심자뇌(淸淨智心自惱) 진여법계총림(眞如法界叢林) 반작형극황초(返作荊棘荒草) 단집황엽위금(但執黃葉爲金) 불오기금구보(不悟棄金求寶) 구내송경송론(口內誦經誦論) 심리심상고조(心裏尋常枯燥) 일조각본심공(一朝覺本心空) 구족진여불소(具足眞如不少) 아난왈(阿難曰) 일향다문(一向多聞) 미전도력(未專道力) 선성지지(先聖之旨) 명유일월(明踰日月) 기가광심제의(豈可廣尋諸義) 불구기신(不求己身) 이영겁침륜호(而永劫沈淪乎) 단시중관행여가(但時中觀行餘暇) 불방피상성교(不妨披詳聖敎) 급고덕입도인연(及古德入道因緣) 결택사정(決擇邪正) 이타이(利他利) 기이사(己而已) 비위일향외구(非爲一向外求) 분별명상(分別名相) 여입해산사(如入海算沙) 허도광음(虛度光陰)
<화엄론>에 「스스로 결박되어 있으면서 남의 결박을 풀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하였고 또 지공법사의 <대승찬>에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사람이 도(道)를 가지고 도를 구하려 하는가? 여러 가지 뜻을 찾아 헤매다 제 몸도 미처 구제하지 못하는구나. 남의 어지러운 글만 보면서 지극한 이치가 묘하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헛되이 일생을 보내니 영원히 생노병사에 빠지고 마는구나. 흐린 애욕이 마음을 얽어매어도 버리지 못하니 청정한 지혜의 마음은 스스로 괴로워라. 진여법계의 총림이 도리어 가시덤불 거친 풀밭이 되었구나. 누런 잎을 가지고 금이라 하여 그걸 버리고 참 보배 구할 줄 모르니 아무리 입으로 경론을 외더라도 마음은 항상 메말라 있다. 하루아침에 마음이 공한 줄 깨달으면 완전히 갖추어진 진여가 적지 않으리라」하였다. 또 아난은 「많이 듣기만 일삼으면 도력에는 마음을 쓰지 못한다」하였다. 옛성현의 교훈이 일월보다 분명한데 왜 잡다한 뜻을 찾아다니고 자신에게서 구하지 않아 영겁의 생사에 빠지랴. 다만 관행(觀行)하는 여가에 성현의 가르침과 도에 들어간 옛스님들의 인연을 자세히 살피고 정사(正邪)를 가려 남과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은 무방하다. 한결같이 밖에서 찾으며 이름과 모양을 분별하기를 마치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를 세듯이 하면서 헛된 세월을 보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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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왈(先德曰) 보살본위도타(菩薩本爲度他) 시이선수정혜(是以先修定慧) 공한정처(空閒靜處) 선관이성(禪觀易成) 소욕두타(少欲頭陀) 능입성도(能入聖道) 차기증야(此其證也) 기발도(旣發度) 타지원(他之願) 선수정혜(先修定慧) 유도력즉운포자문(有道力則雲布慈門) 파등행해(波騰行海) 궁미래제(窮未來際) 구발일체고뇌중생(救拔一切苦惱衆生) 공양삼보(供養三寶) 소불가업(紹佛家業) 기동취적지도야(豈同趣寂之徒也) 문금시행자(問今時行者) 수전정혜(雖專定慧) 다분도력미충(多分道力未充) 약야불구정토(若也不求淨土) 유차예방(留此穢方) 봉제고난(逢諸苦難) 공성퇴실(恐成退失)
옛 스님의 말에 「보살은 본래 남을 제도하기 위해 먼저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 그래서 한가하고 조용한 곳이라야 선관(禪觀)을 이루기 쉽고, 욕심이 적은 고행이라야 성인의 도에 들어갈 수 있다」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이미 남을 제도할 서원을 세웠으면 먼저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도력이 있으면 자비의 문을 구름 펼치듯 하고, 행(行)의 바다에 물결 출렁이듯 하여 미래세가 다하도록 모든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해서 삼보에 공양하며 부처님의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니, 이 어찌 고요한 데에만 들어가는 무리들과 같다 하겠는가.」물었다. 「요즈음 수행하는 사람은 선정과 지혜에 전념하고 있으나 대개는 도력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만약 정토(淨土)를 얻지 못하고 이 사바세계에 머문다면 온갖 고난을 만나 타락할까 두렵다.」
답차역각재당인(答此亦各在當人) 불가일례취지(不可一例取之) 약시대심중생(若是大心衆生) 의차최상승법문(依此最上乘法門) 결정신해사대(決定信解四大) 여환포(如泡幻) 육진사공화(六塵似空花) 자심시불심(自心是佛心) 자성시법성(自性是法性) 종본이래(從本以來) 번뇌성자리(煩惱性自離) 성성직연성성(惺惺直然惺惺) 역력지경역력(歷歷直然歷歷) 의차해이수자(依此解而修者) 수유무시습기(雖有無始習氣) 이무의주지치지(以無依住智治之) 환시본지(還是本智) 불복부단(不伏不斷)
답하다. 「그것도 각자에게 달렸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만약 큰마음을 가진 사람이 최상승의 법에 의해 이 육신은 물거품이나 허수아비와 같고, 육진(六塵)은 허공의 꽃과 같으며, 자기 마음이 불심이요, 자기 성품이 곧 법성이라서 원래부터 번뇌는 떠났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려면 바로 깨어있고 분명할 때는 그대로 분명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알아서 여기에 의해 수행하는 사람은 비록 오래된 습기(習氣)가 있더라도 집착이 없는 지혜로 다스리면 그것이 곧 본래의 지혜이므로 억제하거나 끊을 것이 없다.
수유방편삼매(雖有方便三昧) 이혼산지공(離昏散之功) 이지연려분별(以知緣慮分別) 시진성중연기고(是眞性中緣起故) 임성정이무취섭지상(任性淨而無取攝之相) 수섭외연위순지경(雖涉外緣違順之境) 위요유심(爲了唯心) 무자타능소고(無自他能所故) 애증진희(愛憎嗔喜) 임운불생(任運不生)
비록 방편의 삼매로써 혼침과 산란함을 버린 공도 있겠지만 모든 생각과 분별이 바로 참된 성품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성품의 깨끗함 그대로에 맡겨 취하거나 거두어들이는 일이 없고, 바깥 인연의 역경이나 순경을 당하더라도 오직 마음인줄을 알아서 자타와 주관 객관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이나 미움, 분노와 기쁨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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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임법(如是任法) 조치습기(調治習氣) 사칭이지증명(使稱理智增明) 수연이물(隨緣利物) 행보살도(行菩薩道) 수처삼계내(雖處三界內) 무비법성정토(無非法性淨土) 수경세월(雖經歲月) 체불이시(體不離時) 임대비지(任大悲智) 이법수연고(以法隨緣故) 차인수불여상고과량인(此人雖不如上古過量人) 일초등위(一超登位) 구족통력자(具足通力者) 연이숙식선근(然以夙植善根) 종성맹리(種性猛利) 심신자심(深信自心) 본래적용자재(本來寂用自在) 성무갱개고(性無更改故) 여제세란(於諸世難) 무유퇴실지환(無有退失之患) 화엄론(華嚴論) 소위대심범부(所謂大心凡夫) 능생(能生) 신증입고(信證入故) 생여래가(生如來家) 불언이생불가(不言已生佛家) 제대보살자야(諸大菩薩者也) 금시여차수심자(今時如此修心者) 위상근야(爲上近也)
이렇게 법에 맡겨 습기(習氣)를 다스려서 이치에 맞는 지혜를 더욱 밝게 하고, 인연 따라 만물을 이롭게 하는 보살도를 행한다면 비록 삼계(三界) 안에 처하더라도 모두가 법성(法性)의 정토요, 비록 세월이 지나도 본체는 때를 떠나지 않는다. 대자비의 지혜에 맡겨 법으로써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이 사람은 비록 옛날에 뛰어난 사람이 한 번에 성인의 지위에 올라 신통력을 갖춘 이보다는 못하더라도 숙세에 심은 그 선근(善根)으로 성품이 영리하여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고요하고 자재로운 그 성품은 변함이 없음을 깊이 믿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도 실망할 염려가 없다. <화엄론(華嚴論)>에 「이른바 큰마음을 지닌 범부는 신념으로 깨달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여래의 집에 태어난 것이지, 부처의 집에 태어나서 대보살이 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하였다. 오늘날 이렇게 마음 닦는 이는 상등 근기라 할 것이다.
혹유행자(或有行者) 문자심정묘지덕(聞自心淨妙之德) 신락수습(信樂修習) 연이무시견집아상(然以無始堅執我相) 습기편중(習氣偏重) 치제혹장(致諸惑障) 미능망정자(未能忘情者) 차이공관(且以空觀) 추파자타신심(推破自他身心) 사대오음(四大五蔭) 종연환출(從緣幻出) 허가비실(虛假非實) 유여부포(猶如浮泡) 기중공허(其中空虛) 이하위아(以何爲我) 이하위인(以何爲人) 여시심관(如是深觀) 교세정진(巧洗情塵) 심상겸경(心常謙敬) 원리교만(遠離?慢) 절복현행(折伏現行) 자어정혜(資於定慧) 점입명정지성(漸入明靜之性)
어떤 수행자는 자기 마음이 깨끗하고 미묘한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즐겁게 받아들여 닦고 익힌다. 그러나 옛날부터 아상(我相)에 집착된 그 습기가 너무 무거워서 온갖 의혹의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이래서 망령된 정(情)을 잊지 못하는 자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는 모두 인연 따라 환영(幻影)으로 생긴 헛것이라 진실한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물거품과 같이 그 속이 비었는데 무엇을 <나>라 하고 무엇을 <남>이라 하겠는가?」하는 공관(空觀)으로 아상을 깨부수어야 한다. 이렇게 관찰하여 세상의 번뇌 티끌을 잘 씻고, 항상 겸손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교만심을 없애며 현재의 번뇌를 억제한다면 선정과 지혜에 힘입어 차츰 밝고 고요한 본성에 들어갈 것이다.
연차인(然此人) 약무만선(若無萬善) 조개자력(助開自力) 공성우체(恐成迂滯) 직수근공양삼보(直須勤供養三寶) 독송대승(讀誦大乘) 행도예배(行道禮拜) 참회발원(懺悔發願) 시종무폐(始終無廢)
그러나 선행을 하며 자력적인 개발이 없으면 우회하거나 막히기 쉬우니 항상 삼보에 공양하고 대승경전을 읽으며, 수행하고 예배하며, 참회와 발원을 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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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경삼보순후심고(以愛敬三寶淳厚心故) 몽불위가(蒙佛威加) 능소업장(能所業障) 선근불퇴(善根不退) 약능여시자력타력(若能如是自力他力) 내외상자(內外相資)지구무상지도(志求無上之道) 즉기불구미호(則豈不具美乎)
이렇게 삼보를 공경하는 순수한 마음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어 업장이 녹고 선근(善根)이 물러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자력, 타력의 안팎으로 서로 도와 최상의 도를 구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차내외상자중(此內外相資中) 유이종인소원각이(有二種人所願各異) 혹유비원중자(或有悲願重者) 어차세계(於此世界) 불염생사(不厭生死) 자리이타(自利利他) 증장비지(增長悲智) 구대보리(求大菩提) 소생지처(所生之處) 견불문법(見佛聞法) 이지위원야(以之爲願也) 차인불별구정토(此人不別求淨土) 역무봉난퇴실지환(亦無逢難退失之患) 혹유정예고락(或有淨穢苦樂) 흔염심중자(欣厭心重者) 소수정혜(所修定慧) 급제선근(及諸善根) 회향원구생피세계(回向願求生彼世界) 견불문법(見佛聞法) 속성불퇴(速成不退) 극래도생(?來度生) 이지위원야(以之爲願也)
안팎으로 서로 돕는 것에도 소원이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즉 비원(悲願)이 많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나와 남을 이롭게 하며 자비와 지혜를 더욱 늘리어 큰 보리를 구하므로 태어나는 세상마다 부처를 뵙고 법을 듣기를 원한다. 이런 사람은 따로 정토(淨土)를 구하지 않더라도 어려움 때문에 후퇴할 염려가 없다. 다른 하나는 깨끗함과 더러움,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해 기뻐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수행하는 선정과 지혜와 모든 선근을 회향하되 저 세상에 태어나서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듣고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힘을 얻어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중생을 제도할 것을 소원하는 사람이다.
차인의위수전내조(此人意謂雖專內照) 인력미성(忍力未成) 유차예토(留此穢土) 봉제고난(逢諸苦難) 공유퇴실지환(恐有退失之患) 차내외상자이종인지원(此內外相資二種人志願) 심해성교(心諧聖敎) 개유도리(皆有道理) 차중구생정토자(此中求生淨土者) 어명정성중(於明靜性中) 유정혜지공(有定慧之功) 현계피불내증경계고(縣契彼佛內證境界故) 망피단칭명호(望彼但稱名號) 억상종용(憶想尊容) 희망왕생자(希望往生者) 우열가지의(優劣可知矣)
이런 사람은 비록 마음을 관조하는 일에 전념하였으나 인내력이 모자라서 더러운 이 사바세계에 머물다가 여러 고난을 만나게 되면 공부를 포기할 염려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어쨌든 안팎으로 도와 수행하는 두 종류의 사람은 마음이 모두 성인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도리가 있다. 그러므로 정토에 나기를 구하기만 한다면 이미 밝고 고요한 성품 가운데 선정과 지혜의 공로가 있으므로 저 부처님이 깨달은 경계와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니 단지 부처님의 명호만 부르고, 거룩한 형상만 생각하며 극락왕생을 바라는 사람과 견주어보면 그 우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자대사(智者大師) 임종위문인왈화거상현(臨終謂門人曰火車相現) 일념개회자(一念改悔者) 유능왕생(猶能往生) 황계정혜훈(況戒定慧薰) 수행도력(修行道力) 공불당손(功不唐損) 정명경운(淨名經云) 욕정불토(欲淨佛土) 당정기심(當淨其心)
지자 대사는 임종 때 제자들에게 「지옥의 불 수레가 나타나더라도 한 생각만 고쳐먹으면 극락왕생하는데 하물며 계정혜로 닦으며 수행한 도력이라면 어찌 그 공덕이 헛되겠는가」하였고, <정명경(淨名經)>에는 「불토(佛土)를 깨끗이 하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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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심정(隨其心淨) 즉불토정(卽佛土淨) 법보기단경운(法寶記壇經云) 심지단부부정(心地但無不淨) 서방거차불원(西方去此不遠) 성기부정지심(性起不淨之心) 하불즉래영청(何佛卽來迎請) 수선사운(壽禪師云) 식심방생유심정토(識心方生唯心淨土) 착경지타소연경중(着境只墮所緣境中) 여상불조(如上佛祖) 소설구생정토지지(所說求生淨土之旨) 개불리자심(皆不離自心) 미심(未審) 이자심원(離自心源) 종하취입(從何趣入) 여래불사의경계경운(如來不思議境界經云) 삼세일체제불(三世一切諸佛) 개무소유(皆無所有) 유의자심(唯依自心) 보살약능요지제불(菩薩若能了知諸佛) 급일체법(及一切法) 개유심량(皆唯心量) 득수순인(得隨順忍) 혹입초지(或入初地) 사신속생묘희세계(捨身速生妙喜世界) 혹생극락정불토중(或生極樂淨佛土中) 차기증야(此其證也)
마음이 깨끗하면 불토가 깨끗해진다」하였고, <법보기단경(法寶記壇經)>에는 「마음이 깨끗하면 서방정토는 여기서 멀지 않지만 더러운 마음을 일으키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아주겠는가」하였다. 수선사는 「마음을 알면 바로 유심정토(唯心淨土)에 나고, 경계에 집착하면 집착하는 그 경계에 떨어진다」하였다. 이상과 같이 부처와 조사들이 말한바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취지는 모두가 자기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근원을 떠나서 어디로 찾아 들어가겠는가? <여래불사의경(如來不思議境界經)>에 「삼세의 모든 부처가 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에 의지해 있다. 만약 보살이 부처나 일체의 법이 다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 마음에 안주하며 움직임 없는 경계 즉 수순인(隋順忍)을 얻으면, 초지(初地)에 들어가 몸을 버리고 묘희(妙喜)의 세계에 나기도 하고 혹은 극락의 깨끗한 부처 나라에 나기도 한다」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이차이추(以此而推) 수불염불구생(雖不念佛求生) 단료유심(但了唯心) 수순관찰(隨順觀察) 자연생피(自然生彼) 필정무의(必定無疑) 근세다유의학사문(近世多有義學沙門) 사명구도(捨命求道) 개착외상(皆着外相) 면향서방(面向西方) 양성환불(揚聲喚佛) 이위도행(以爲道行)
이렇게 미루어본다면 염불하며 왕생을 구하지 않더라도 오직 마음에 있음을 밝게 깨달아 그대로 관찰해 나간다면 저절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요즘 경을 배우는 사문들은 목숨을 버리고 도를 구하면서도 모두가 바깥의 상(相)에 집착하여, 서방을 향해 앉아 소리 높여 부처를 부르는 것으로 도행(道行)이라 여긴다.
전래학습발면심지(前來學習發明心地) 불조비결(佛祖秘訣) 이위명리지학(以謂名利之學) 역위비분경계(亦謂非分境界) 종불괘회(終不掛懷) 일시기거(一時棄去) 기기수심지비결(旣棄修心之秘訣) 불식반조지공능(不識返照之功能) 도장총혜지심(徒將聰慧之心) 허용평생지공(虛用平生之力) 배심취상위의성교(背心取相謂依聖敎) 제유지자(諸有智者) 기불통상(豈不痛傷)
그리고 전부터 배우고 익혀 마음을 밝혀놓은 부처와 조사들의 비결을, 오히려 명리(名利)를 얻으려는 학문이다 하거나 또는 자기 분수에는 맞지 않는 공부라 하면서 마침내 생각에 두지 않고 일시에 버리고 만다. 이미 마음 닦는 비결을 버렸으니 마음을 관조하는 공부는 알 턱이 없고, 단지 세속적인 지혜로 평생의 힘을 헛되이 소비하면서 마음을 등지고 상(相)을 취하는 것으로 성인의 가르침에 의지한다 하니, 어찌 지혜 있는 사람으로서 슬퍼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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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지원법사아미타경소서운(孤山智圓法師阿彌陀經疏序云) 부심성지위체야(夫心性之爲體也) 명호정호일이이의(明乎靜乎一而已矣) 무범성언(無凡聖焉) 무의정언(無依正焉) 무연촉언(無延促焉) 무정예언(無淨穢焉) 급기감물이동(及其感物而動) 수연이변(隨緣而變) 즉위육범언(則爲六凡焉) 위사성언(爲四聖焉) 유의언(有依焉) 유정언(有正焉) 의정기작즉신수(依正旣作則身壽) 유연촉의(有延促矣) 국토유정예의(國土有淨穢矣)
고산 지원 법사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심성(心性)의 본체는 밝고 고요하여 하나일 따름이다. 거기는 범부도 성인도 없고, 의보(依報;인간이 의지해 사는 국토, 집, 의복, 음식 등)도 정보(正報;과거의 업에 의해 현재에 받은 몸)도 없고, 수명의 길고 짧음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물에 감응하고 인연에 따라 변할 때에는 여섯 가지 범부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네 가지 성인도 되며 의보(依報)도 있고, 정보도 있게 된다. 이미 의보와 정보로 태어났기에 수명에는 길고 짧음이 있고, 국토에는 더러움이 있다.
오불대성인(吾佛大聖人) 득명정지일자야(得明靜之一者也) 내가도어자(乃假道於慈) 탁숙어비(託宿於悲) 장욕구군미(將欲?群迷) 사부기본(使復其本) 어시호무신이시신(於是乎無身而示身) 무토이시토(無土而示土) 연기수정기토(延其壽淨其土) 비기흔(?其欣) 촉기수(促其壽) 예기토(穢其土) 비기염(?其厭) 기흔차염즉점유지책(旣欣且厭則漸諭之策) 행의(行矣) 수보루금지(雖寶樓金池) 위열목지완(爲悅目之翫) 이비혹탕지색(而非惑蕩之色) 이능달유심무경의(而能達唯心無境矣) 수풍수조성(雖風樹鳥聲) 유입이지오(有入耳之娛) 이비첨체지음(而非??之音) 이능념삼(而能念三) 보유귀의(寶有歸矣) 부여시즉부호명정지체자(夫如是則復乎明靜之體者) 여전장이(如轉掌耳) 여위원사(予謂圓師) 심지오불선권본말자야(深知吾佛善權本末者也) 금인번문(今引繁文) 서사금시구정토자(庶使今時求淨土者) 지불의이수지(知佛意而修之) 불왕용공이(不枉用功耳)
우리의 부처님 대 성인은 밝고 고요한 하나를 얻은 분이시다. 이에 자비의 방법을 빌려서 헤매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 근본에 돌아가게 하고자 육신이 없지만 육신을 나타내고, 국토가 없지만 국토를 나타내어 수명을 늘리고 국토를 깨끗이 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수명을 단축하고 국토를 더럽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싫어하게도 하신다. 그들을 기뻐하고 싫어하게 하여 차츰 깨우치는 방법을 행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보배로 된 누각이나 금으로 된 연못은 눈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마음을 홀리고 방탕하게 하는 빛깔이 아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경계가 없음을 밝게 알 수 있다. 나무의 바람소리와 새소리는 귀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이는 마음을 흔드는 음성이 아니다. 이런 소리에서 능히 삼보를 생각하고 귀의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밝고 고요한 본체로 다시 돌아가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다.」
나는 지원법사가 우리 부처의 교묘한 방편의 본말을 잘 아는 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번거로운 글을 인용하여 지금 정토를 구하는 이로 하여금 부처님의 뜻을 알고 수행하여 노력을 그르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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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불의자(知佛意者) 수염불명(雖念佛名) 근구왕생(懃求往生) 지피불경장엄등사(知彼佛境莊嚴等事) 무래무거(無來無去) 유의심현(唯依心現) 불리진여(不離眞如) 염념지중(念念之中) 이어혼산(離於昏散) 등어정혜(等於定慧) 불위명정지성(不違明靜之性) 즉분호불격(則分毫不隔) 감응도교(感應道交) 여수징월견(如水澄月現) 경정영분(鏡淨影分) 고만선동귀집운(故萬善同歸集云) 불실불래(佛實不來) 심역불거(心亦不去) 감응도교(感應道交) 유심자현(唯心自現) 우게운(又偈云) 능례소례성공적(能禮所禮性空寂) 감응도교난사의(感應道交難思議) 차인필불취심외(此人必不取心外) 경계(境界) 이흥변계도집(而興?計倒執) 초제마사(招諸魔事) 위배불의야(違背佛意也) 제수도자(諸修道者) 절수재의(切須在意) 절수재의(切須在意)
부처의 참뜻을 아는 사람은,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며 극락왕생을 간절히 바라지만 저 부처나라의 장엄한 일들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고,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서 진여를 떠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생각 생각마다 번뇌를 떠나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하여 밝고 고요한 성품에 어긋남이 없다. 이래서 도(道)와 서로 감응하는 것이 털끝만큼도 간격이 없어서 마치 물이 맑아 달이 나타나고 거울이 깨끗해 그림자가 분명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선동귀집>에도 「실제로 부처는 오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이 가는 것도 아니라 도와 서로 감응하여 마음이 스스로 나타난 것이다」하였고, 또 그 게송에는
능례소례성공적(能禮所禮性空寂)
감응도교난사의(感應道交難思議)
「예배하는 이나 예배를 받는 부처의 성품은 모두 비고 고요한데,
도와 통하여 서로 감응하는 이치는 헤아리기 어렵도다」
하였다. 이런 사람은 마음 바깥의 경계에 집착함으로써 잘못된 생각에 빠져 온갖 악마의 일을 불러들여 부처의 참뜻을 어기지 않을 것이니, 수도하는 사람은 부디 명심하여라.
혹유행자(或有行者) 견집명상(堅執名相) 불문대승유심법문(不聞大乘唯心法門) 우불식오불(又不識吾佛) 어명정성중(於明淨性中) 이본원력(以本願力) 권현신토(權現身土) 환주장엄(幻住莊嚴) 섭인중생(攝引衆生) 영기이목소완(令其耳目所翫) 달유심무경(達唯心無境) 부기본지선권(復其本之善權) 각위염불왕생((?謂念佛往生) 장오온신(將五蘊身) 수무량낙(受無量樂) 이시정집(以是情執) 미망고(未忘故) 혹견수선자(或見修禪者) 이위시인(以爲是人) 불념불구생(不念佛求生) 하시출리삼계재(何時出離三界哉) 부지성교(不知聖敎) 소명심정고(所明心淨故) 즉불토정지지(卽佛土淨之旨) 우문설소수심지(又聞說所修心地) 공명무물(空明無物) 이위무신수락지처(以謂無身受樂之處) 공락공거恐落空去)
혹 어떤 수행자는 명상(名相)에 집착하여 대승이라는 마음의 법문을 듣지 못하고, 또 우리 부처가 밝고 청정한 성품 가운데서 본원력(本願力)을 세워 일부러 방편으로 육신과 국토를 나타내어 환영(幻影)인 장엄(莊嚴)으로 중생을 이끌어들여 눈과 귀를 즐겁게 함으로써 마음에는 경계가 없음을 깨닫게 하여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교묘한 방편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염불하여 왕생하면 이 몸은 한없는 즐거움을 받는다」고 한다. 이래서 마음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혹 참선 수행자를 보면 「이 사람은 염불로 왕생을 구하지 않으니 언제 삼계를 벗어나겠나」고 한다.
경(經)에서 밝힌 「마음이 깨끗하면 곧 불토(佛土)가 깨끗하다」는 뜻을 알지 못하고, 또 「닦아야 할 마음은 밝고 비어서 아무 것도 없다」하는 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육신에는 즐거움을 누려할 곳이 없어진다」하며 공(空)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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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공본무공(不知空本無空) 유시여래원각명정지심(唯是如來圓覺明淨之心) 동허공변법계(同虛空遍法界) 해중생심(該衆生心) 무간단처(無間斷處) 일체중생(一切衆生) 무명분별지심(無明分別之心) 당처허명(當處虛明) 여시방제불(與十方諸佛) 동일지해(同一智海) 동일법성(同一法性) 지위중생(祗爲衆生) 종일기중행리(終日其中行履) 이자배부은덕이(而自背負恩德耳) 부지사지자(不知斯旨者) 이집인탐착지심(以執吝貪着之心) 구불경계(求佛境界) 여장방목(如將方木) 두원공야(逗圓孔也)
공(空)이라 하지만 본래 공이란 것도 없다. 단지 여래의 밝고 청정하게 깨달은 마음이 허공처럼 법계에 가득하여 끊임없이 중생심을 포용하고 있을 뿐이다. 일체 중생의 무명분별심(無明分別心)도 그 자체는 비고 밝아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와 동일한 지혜의 바다이며, 동일한 법성이다. 다만 중생들이 종일 그 가운데서 살면서도 스스로 그 은덕을 저버리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집착하는 마음으로 부처의 세계를 구하는 것이니, 마치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다.
혹유행자(或有行者) 품성부위(稟性浮僞) 문차심법(聞此心法) 신락수습(信樂修習) 연득소위족(然得小爲足) 불가결택(不可決擇) 지견미원(知見未圓) 전시본성(全恃本性) 불수만행(不修萬行) 역(亦) 불구정토(不求淨土) 견구생자(見求生者) 이생경만(而生輕慢) 차상이인(此上二人) 어불법중(於佛法中) 불선용심(不善用心) 다유체장(多有滯障) 가비가통야(可悲可痛也) 약시최하근인(若是最下根人) 맹무혜목(盲無慧目) 이지칭불호즉탄기희유(而知稱佛號則歎其希有) 기이부지불의수행(豈以不知佛意修行) 위과재(爲過哉)
어떤 수행자는 성질이 들뜨고 허황된 사람도 있어, 심법에 대해 듣고는 그대로 믿고 수행하지마는 작은 것에 만족하여 더 큰 세계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니 지견(知見)이 원만하지 못하여 단지 자기 본성만 믿고 만행(萬行)을 닦지 않으며, 또한 정토(淨土)를 구하지 않고 왕생을 구하는 사람을 보면 업신여기는 마음을 낸다. 이런 두 종류의 사람은 불법(佛法) 안에서 마음을 쓸 줄 모르니 많은 장애가 있게 되니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 만약 아주 낮은 근기의 사람으로서 지혜의 눈은 없다 해도 부처의 명호를 부르며 희유(希有)함을 찬탄할 줄 안다면 이 어찌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수행한다 하여 허물할 수 있겠는가.
혹유행자(或有行者) 수기강대(受氣剛大) 정연최심(情緣最深) 문차심법(聞此心法) 부지조의지처(不知措意之處) 연능관피불백호광명(然能觀彼佛白毫光明) 혹관범자(或觀梵字) 혹송경념불(或誦經念佛) 여시행문(如是行門) 전정불란(專精不亂) 능조망상(能調妄想) 불피혹장(不被惑障) 범행성건(梵行成建) 차인초종사행(此人初從事行) 감응교도(感應道交) 종입유심삼매고(終入唯心三昧故) 역시선지불의자야(亦是善知佛意者也)
또 어떤 수행자는 기질이 굳고 크며 감정도 깊다. 이런 사람이 심법을 들으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나 일단 부처의 백호광(白毫光)을 관하거나 범자(梵字)를 관하거나 경전을 외거나 염불을 하라 하면 이런 수행에는 산란함이 없이 정신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망상을 다스리며 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이룬다.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도(道)와 서로 감응하여 끝내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가기 때문에 부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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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화상고성염불삼매보왕론운(飛錫和尙高聲念佛三昧寶王論云) 욕대해자(浴大海者) 기용어백천(己用於百川) 염불명자(念佛名者) 필성어삼매(必成於三昧) 역유청주하어탁수(亦猶淸珠下於濁水) 탁수부득불청(濁水不得不淸) 염불투어난심(念佛投於亂心) 난심부득불불(亂心不得不佛) 기계지후(旣契之後) 심불상망(心佛雙亡) 상망정야(雙亡定也) 쌍조혜야(雙照慧也) 정혜기균(定慧旣均) 역하심이불불(亦何心而不佛) 하불이불심(何佛而不心) 심불기연(心佛旣然) 즉만경만연(則萬境萬緣) 무비삼매(無非三昧) 수부환지어기심동념(誰復患之於起心動念) 고성칭불재(高聲稱佛哉)
비석화상(飛錫和尙)의 <고성염불삼매보왕론(高聲念佛三昧寶王論)>에 「큰 바다에서 목욕하는 이는 이미 온갖 시냇물을 쓰는 것이고,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는 자는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그것은 마치 물을 맑히는 진주(水淸珠)를 흙탕 물 속에 넣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염불을 산란한 마음에 던지면 산란한 마음이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이렇게 합해지면 마음과 부처를 모두 잊게 된다. 모두 잊는 것은 선정(禪定)이요, 모두 비추는 것은 지혜이다. 선정과 지혜가 고르면 어떤 마음이 부처가 아니겠으며, 어느 부처가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그러하다면 온갖 대상과 온갖 반연이 삼매 아님이 없을 것인데 누가 다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고성으로 부처를 부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문수소설반야경중(文殊所說般若經中) 명념불(明念佛) 득일행삼매자(得一行三昧者) 역동차의야(亦同此意也) 불료차의자(不了此意者) 각장견애지정(却將見愛之情) 관피불상(觀彼佛相) 염피불명(念彼佛名) 일구세심(日久歲深) 다위마매(多爲魔魅) 소섭(所攝) 전광낭주(顚狂浪走) 허로공부(虛勞功夫) 경복일생(傾覆一生) 근세빈빈견문여차지인(近世頻頻見聞如此之人) 개유부지(皆由不知) 십계의정(十界依正) 선악인과(善惡因果) 유심소작(唯心所作) 무체가득고야(無體可得故也)
문수보살이 말한 <반야경>에 「염불해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얻는다」 한 것도 바로 이런 뜻이다. 이런 뜻을 모르면 도리어 견애(見愛)의 정을 가져 부처의 형상을 관하고,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며 오랜 세월을 보내면 흔히 마귀에 끌려서 미치광이 짓이나 하며 공부가 헛되어 일생을 망친다. 요즘 이런 사람을 자주 보는데 그것은 다 시방세계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와 선악의 인과가 오직 마음이 짓는 것이라 그 본체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혹어좌중(或於坐中) 견천인보살상(見天人菩薩像) 혹여래상호구족(或如來相好具足) 혹단정남녀(或端正男女) 급제공포지상(及諸恐怖之相) 설제종종환혹지사(說諸種種幻惑之事) 혹수비(或雖非) 외현지상(外現之相) 어자심중(於自心中) 수순마사(隨順魔事) 악각정견(惡覺情見) 불가구진(不可具陳) 당차지시(當此之時) 혼미불성(昏迷不省) 무혜자구(無慧自救) 횡리마망(橫罹魔網) 양가상재(良可傷哉)
또 혹 좌선하는 동안에 천인(天人)이나 보살상, 혹은 여래의 원만한 상호(相好)나 단정한 남녀나 혹은 온갖 무서운 형상이나 갖가지 현혹시키는 일을 말하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밖으로 나타나는 형상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속에 악마의 일을 그대로 따라서 나쁘게 깨달은 그릇된 소견 따위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경우를 만나면 정신이 혼미해서 살필 수가 없고 자기를 구원할 지혜가 없어서 악마의 그물에 걸리고 마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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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신론불운호(起信論不云乎) 당념유심(當念唯心) 경계즉멸(境界卽滅) 종불위뇌(終不爲惱) 우운(又云) 행자상이지혜관찰(行者常以智慧觀察) 물령차심(勿令此心) 타어사망(墮於邪網) 당근정념(當勤正念) 불취불착(不取不着) 교지여사(敎旨如斯) 하득축경배심(何得逐境背心) 이구불보리재(而求佛菩提哉) 금시행자다운(今時行者多云) 단득염불(但得念佛) 왕생연후(往生然後) 하유재(何有哉) 부지구품승강(不知九品昇降) 개유자심신해(皆有自心信解) 대소명매이발현야(大小明昧而發現也)
〈기신론(起信論>에도 「오직 마음임을 생각하면 경계가 소멸되어 마침내 괴로움이 없다」하지 않았던가. 또 「수행자는 항상 지혜로 관찰해서 이 마음이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올바른 생각을 가져 집착하지 말라」하였다. 가르친 뜻이 이런데 왜 경계를 따르고 마음을 등져서 불도를 구하려 하는가. 지금 수행자들은 흔히 「염불해서 왕생하면 그만인데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한다. 이는 구품(九品;정토에 왕생하는 아홉 가지의 품계)의 단계가 있는 것이 다 제 마음의 믿음과 아는 것의 대소와 밝고 어두움에 따라 나타나는 것임을 알지 못해서이다.
경중이해제일의제(經中以解第一義諦) 권진행자(勸進行者) 위상품(爲上品) 기이총명영리지심(豈以聰明靈利之心) 감위둔근(甘爲鈍根) 불해제일의(不解第一義) 단칭명호재(但稱名號哉) 만선동귀집운(萬善同歸集云) 구품왕생(九品往生) 상하구달(上下具達) 혹유화국(或遊化國) 견불응신(見佛應身) 혹생보토(或生報土) 도불진체(覩佛眞體) 혹일석이변등상지(或一夕而便登上地) 혹경겁이방증소승(或經劫而方證小乘) 혹이근둔근(或利根鈍根) 혹정의산의(或定意散意)
경에도 「최상의 진리를 알아 부지런히 수행하는 자를 상품으로 여긴다」했는데 왜 총명하고 영리한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우둔한 근기를 감수하여 최상의 진리를 모른 채 명호만 불러서야 되겠는가. 또 <만선동귀집>에는 「구품 왕생에는 상하가 다 통한다. 때론 화국(化國;중생제도를 위해 그들 근기에 맞춰 나타내는 국토)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응신(應身)을 보기도 하고, 혹은 보토(報土;수행한 보람으로 얻은 부처의 땅)에 태어나 부처님의 참몸을 보기도 하고, 혹은 하루 저녁에 상지(上地;보살의 지위)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겁(劫)을 지나야 겨우 소승의 이치를 깨닫기도 하고, 혹은 영리하거나 우둔한 근기로, 혹은 마음이 안정된 사람과 산란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한다」하였다.
시지고금달자(是知古今達者) 수구정토(雖求淨土) 이심신진여(以深信眞如) 전어정혜고(專於定慧故) 지피색상장엄등사(知彼色相莊嚴等事) 무래무거(無來無去) 이어분제(離於分齊) 유의심현(唯依心現) 불리진여(不離眞如) 부동범부이승(不同凡夫二乘) 부지전식현고(不知轉識現故) 견종외래(見從外來) 취색분제고야(取色分齊故也) 여시즉수왈(如是則雖曰)
이로써 고금의 달사(達士)는 정토를 구하되 진여를 깊이 믿고 선정과 지혜에 힘쓴다. 그래서 물질적인 색상이나 장엄 등의 일은 오고 감이 없기 때문에 분별심을 떠나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나되 진여를 떠나지 않는 줄을 안다. 그러므로 범부와 소승들이 마음에 의해 나타나는 것임을 모르고 밖에서 오는 줄로 알아 색상과 분별을 취하는 것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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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정토(同生淨土) 우지행상(愚智行相) 천지현격(天地懸隔) 하여현금학대승유심법문(何如現今學大乘唯心法門) 전어정혜(專於定慧) 면타범소심외(免墮凡小心外) 취색분재지견야(取色分齊之見也)
비록 다 같이 정토에 난다고 하나, 우자와 지자의 수행은 천지차이니, 이제라도 대승의 유심법문을 배우고 선정과 지혜에 힘써서 범부와 소승들이 마음 밖의 물질이나 분별을 취하는 소견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시즉수왈동생정토(如是則雖曰同生淨土) 우지행상(愚智行相) 천지현격(天地懸隔) 하여현금학대승유심법문(何如現今學大乘唯心法門) 전어정혜(專於定慧) 면타범소심외취색(免墮凡小心外取色) 분재지견야(分齊之見也) 약시조종문하(若是祖宗門下) 이심전심(以心傳心) 밀의지수지처(密意指授之處) 부재차한(不在此限) 기화상운(琪和尙云) 능오조도(能悟祖道) 발휘반야자(發揮般若者) 말계미지유야(末季未之有也) 고차권수문중(故此勸修文中) 개의대승경론지의(皆依大乘經論之義) 위명증(爲明證) 약변현전문신해발명지유치(略辨現傳門信解發明之由致) 병출생입사(竝出生入死) 정예왕래지득실(淨穢往來之得失)
그러므로 다함께 정토에 난다고는 하나,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의 수행하는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인데 어찌 대승의 유심법문을 배워 선정과 지혜를 닦아 범부와 소승들의 마음 밖의 물질적 차별을 취하는 것과 같겠는가. 조종(祖宗)의 문하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비밀한 뜻을 가르쳐주는 곳은 이 차한(此限)에는 없다. 그래서 기(琪)화상은 「조사의 도를 능히 깨달아 반야를 발휘하는 이는 이 말세에는 없다」하였다. 그러므로 이 권수문에서는 모두 대승 경론의 이치에 따라 밝게 증명하고, 현재에 전하는 법을 믿고 알아 밝힌 이치와 또 삶으로 나오고 죽음으로 들어가고, 정토와 예토로 가고 오는 이익과 손실을 간략히 분별하였다.
욕령입사수심지인(欲令入社修心之人) 지기본말(知其本末) 식제구쟁(息諸口諍) 변기권실(辨其權實) 불왕용공어대승법문정수행로(不枉用功於大乘法門正修行路) 동결정인(同結正因) 동수정혜(同修定慧) 동수행원(同修行願) 동생불지(同生佛地) 동증보리(同證菩提) 여시일체(如是一切) 실개동학(悉皆同學) 궁미래제(窮未來際) 자재유희시방세계(自在遊戱十方世界) 호위주반(互爲主伴) 공상조성(共相助成) 전정법륜(轉政法輪) 광도군품(廣度群品) 이보제불막대지은(以報諸佛莫大之恩) 앙유불안(仰惟佛眼) 증차미성(證此微誠) 보위법계군미(普爲法界群迷) 발차동수정혜지원(發此同修定慧之願)
그리하여 이 결사(結社)에 들어와 마음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본말을 알게 함으로써 모든 논쟁을 쉬고 그 방편과 실제를 분별하여 대승법문을 바로 수행하는 길에서 그릇되게 공부하지 않아 바른 인(因)을 같이 맺고 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으며, 행원(行願)을 같이 닦으며, 부처의 땅에 같이 나고 도를 같이 깨닫는 등, 이런 일들을 모두 같이 배워 영원토록 시방세계에 자재로이 노닐며 서로 주인과 손이 되어 서로 도와서 공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려 중생을 두루 구제하여 모든 부처의 막대한 은혜를 갚으려 하는 것이다.
우러러 바라나니 부처의 눈으로 이 보잘것없는 정성을 증명해주고, 이 법계의 무지한 중생들을 위하여 이러한 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으려는 원을 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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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嗚呼) 중생지소이왕래자(衆生之所以往來者) 육도야(六途也) 귀신침유(鬼神沈幽) 수지고(愁之苦) 조수회휼월지비(鳥獸懷??之悲) 수라방진(修羅方瞋) 제천정락(諸天正樂) 가이정심려취보리자(可以整心慮趣菩提者) 유인도능위이(唯人道能爲耳) 인이불위(人而不爲) 오미(吾未) 여지하야의(如之何也矣) 지눌낭열대승(知訥囊閱大乘) 역관료의승경론소설(歷觀了義乘經論所說) 무유일법(無有一法) 불귀삼학지문(不歸三學之門) 무유일불(無有一佛) 부자삼학이성도야(不藉三學而成道也)
아아! 중생들이 오가는 곳은 육도(六道)이다. 귀신은 어두운 곳에서 근심하는 괴로움이 있고, 새와 짐승은 잡힐까봐 날고 도망가는 슬픔이 있고, 아수라는 성을 내고, 제천(諸天)은 한창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각을 정돈하여 보리로 나아갈 이는 오직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이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저번에 대승경전을 열람하면서 <요의승(了義乘)>의 경론에서 말한 것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한 법도 삼학(三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었고, 어떠한 부처도 삼학에 의지하지 않고는 성불하는 법이 없었다.
능엄경운(楞嚴經云) 과거제여래(過去諸如來) 사문이성취(斯門已成就) 현재제보살(現在諸菩薩) 금각입원명(今各入圓明) 미래수학인(未來修學人) 당의여시법(當依如是法) 시고아배(是故我輩) 금결가기(今結佳期) 예신밀서(預伸密誓) 당수범행즉앙모진풍(當修梵行則仰慕眞風) 불생자굴(不生自屈) 이계정혜(以戒定慧) 자훈신심(資薰身心) 손지우손(損之又損) 수변임하(水邊林下) 장양성태(長養聖胎) 간월색이소요(看月色而逍遙) 청천계이자재(聽川溪而自在) 종횡방광(縱橫放曠) 축처소시(逐處消時) 유종랑지허주(猶縱浪之虛舟) 약능공지일핵(若凌空之逸) 현형용어환우(現形容於?宇) 잠유영어법계(潛幽靈於法界) 응기유감(應機有感) 적연무준의(適然無準矣) 여지소모(予之所慕) 의재사언(意在斯焉) 약수도인(若修道人) 사명입산(捨名入山) 불수차행(不修此行) 사현위의(詐現威儀) 광혹신심단월즉불여구명리부귀(惑信心檀越則不如求名利富貴) 탐착주색(貪着酒色) 신심황미(身心荒迷) 허과일생(虛過一生)
<능엄경(楞嚴經)>에도 「과거 모든 부처님도 이 문에서 성취하였고, 현재의 모든 보살도 지금 원만하고 밝은 데로 들었으며, 미래의 수학하는 사람도 이 법을 의지한다」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아름다운 기약을 맺고, 미리 비밀한 서약을 펴서 깨끗한 행을 닦으면서 참되고 바른 유풍(遺風)을 우러러 사모하여 스스로 물러서지 않고, 계율과 선정과 지혜로써 몸과 마음을 닦아 번뇌를 덜고 또 덜어서 물가나 숲 속에서 성인이 될 씨앗을 기르면서 달빛을 보며 소요하고, 냇물 소리를 들으며 자재하여 종횡으로 걸림이 없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마치 물결 따라 가는 빈 배와 같고 허공을 나는 새와 같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몸은 우주에 나타내되 그윽한 마음은 법계에 잠기게 하고, 얽매인 기준이 없이 인연 따라 감응할 것이니, 내가 바라는 뜻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일 수도하는 사람이 명리를 버리고 입산해서 이러한 수행을 하지 않고 거짓으로 형상만 나타내어 신심 있는 신도를 속이고 산다면 그것은 차라리 명리와 부귀를 바라고 주색에 빠져서 신심이 혼미하여 헛되이 일생을 보내는 것만도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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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문오(諸公聞吾) 함이위연왈타일(咸以爲然曰他日) 능성차약(能成此約) 은거임하(隱居林下) 결위동사즉의이정혜명지(結爲同社則宜以定慧名之)
인성맹문이결(因成盟文而結) 의언(意焉) 기후우인선불장득실지사(其後偶因選佛場得失之事) 유리사방(流離四方) 미수가기자(未遂佳期者) 지금기영십재의(至今幾盈十載矣) 거무신년조춘(去戊申年早春) 계내재공선백(契內材公禪伯) 득주공산거조사(得住公山居祖寺) 불망전원(不忘前願) 장결정혜사(將結定慧社) 치서청여어하가산보문난야(馳書請予於下柯山普門蘭若) 재삼간지(再三懇至)
여러 사람이 내 말을 듣고 모두 그렇다고 여기며 말하기를 ‘다른 날 이 언약을 성사시켜 숲 속에 은거하면서 결사(結社)를 하면 이름을 정혜(定慧)라 하자’ 하고는 곧 맹세하는 글을 지어 그 뜻을 맺었다. 그 뒤 우연히 수행도량이 맞지 않아서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아름다운 기약을 이루지 못한 지가 10년이 되었다.
지나간 무신년(戊申年;1188년) 이른 봄에 같이 결사를 맺었던 재공선백(材公禪伯)이 팔공산 거조사에 머물면서 전날의 원을 잊지 않고 정혜사를 맺자는 편지와 함께 나를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오기를 재삼 간절히 청하였다.
여수구거임학(予雖久居林壑) 자수우로이무소용심야(自守愚魯而無所用心也) 연추억전약(然追憶前約) 역감기간성(亦感其懇誠) 취시년춘양지절(取是年春陽之節) 여동행항선자(與同行舡禪者) 이서시사(移棲是寺) 초집석시동원자(招集昔時同願者) 혹망혹병(或亡或病) 혹구명리이미회(或求名利而未會) 차여잔승삼사배(且與殘僧三四輩) 시계법석(始啓法席) 용수낭원이(用酬囊願耳) 복망선교유도(伏望禪敎儒道) 염세고인(厭世高人) 탈략진환(脫略塵?) 고종외물(高遊外物) 이전정내행지도(而專精內行之道) 부어차의즉수무왕래결계지인(符於此意則雖無往日結契之因) 허제명자어사문지후(許題名字於社文之後) 수미일회이온습(雖未一會而蘊習) 상이섭념관조위무(常以攝念觀照爲務) 이동수정인즉여경소위광심헐처(而同修正因則如經所謂狂心歇處) 즉시보리(卽是菩提) 성정묘용(性淨妙明) 비종인득(匪從人得)
나는 오래 산 속에 살면서 스스로 어리석음을 지키면서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옛 약속을 생각하고 또 간절한 성의에 감동되어 그 해 봄 항선자(舡禪者)와 함께 이 절로 와서 옛날 발원을 함께 세웠던 사람을 불러 모았으나 혹은 죽기도 하고 앓기도 하고 혹은 명리에 얽매여 모이지 못했고 겨우 3, 4인이 법석을 열어 전번의 소원을 이루려 한다. 바라나니, 불교나 유교나 간에 세속을 싫어하고 뜻이 높은 사람으로서 번뇌를 벗어나 마음 닦는 도에 전념하려는 뜻을 가진 이라면 비록 지난 날 결사(結社)한 인연이 없다 해도 이 결사문 뒤에 이름을 쓰기를 허락한다. 비록 한 자리에 모여 공부하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생각을 모아 마음을 관조하는데 힘쓰면서 함께 바른 인연을 닦아나간다면 경에서 발한 바 ‘들끓는 마음 쉬는 곳이 바로 보리(菩提)다. 깨끗하고 오묘하고 밝은 성품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 하는 뜻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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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게운(文殊偈云) 일념정심시도량(一念淨心是道場) 승조하사칠보탑(勝造河沙七寶塔) 보탑필경쇄위진(寶塔畢竟碎爲塵) 일념정심성정각(一念淨心成正覺) 고지소시섭념무루(故知少時攝念無漏) 지인(之因) 수삼재미륜이행업(雖三災彌綸而行業) 담연자야(湛然者也) 비특수심지사(非特修心之士) 성기익야(成其益也) 이차공덕(以此功德) 상축성수만세(上祝聖壽萬歲) 영수천추(令壽千秋) 천하태평(天下泰平) 법륜상전(法輪常轉) 삼세사존부모(三世師尊父母) 시방시주(十方施主) 보급법계생망(普及法界生亡) 동승법우지소점(同承法雨之所霑)
또 <문수게>에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이다. 이는 강의 모래처럼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공덕보다 훌륭하다. 보배탑은 결국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은 정각(正覺)을 이룬다」 하였다.
그러므로 잠깐이라도 번뇌가 없는 깨끗한 생각을 가지는 그 인연은 비록 삼재가 휩쓸더라도 수행의 업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특히 마음 닦는 선비만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공덕으로 위로는 성수(聖壽)만세하고, 태자는 천세하고, 천하가 태평하여 항상 법륜이 굴러가고 삼세의 스승과 부모와 시방의 시주와 널리 법계의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가지 진리의 비에 젖게 함이다.
영탈삼도지고뇌(永脫三途之苦惱) 초입대광명장(超入大光明藏) 유희삼매성해(遊戱三昧性海) 궁미래제(窮未來際) 개발몽매(開發蒙昧) 등등상속(燈燈相續) 명명부진즉기위공덕(明明不盡則其爲功德) 불역여법성(不亦與法性) 상종시호(相終始乎) 서기낙선군자(庶幾樂善君子) 유신사찰언(留神思察焉) 시명창원년경술계춘(時明昌元年庚戌季春)
공산은거목우자(公山隱居牧牛子) 근지(謹誌)
그리하여 길이 삼도의 고뇌를 벗어나 대광명에 뛰어들며, 삼매의 바다에 노닐면서 미래가 다하도록 몽매한 중생을 깨우쳐서 불법의 등불이 이어져 광명과 광명이 다하지 않으면 그 공덕이 법성(法性)과 함께 영원하지 않겠는가. 바라나니 선(善)을 즐기는 군자는 정신을 차리고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명창 원년 경술년(1190) 늦은 봄, 공산에 숨어사는 목우자 지눌은 삼가 쓴다.
지승안오년(至承安五年) 경신(庚申) 자공산(自公山) 이사어강남조계산(移社於江南曹溪山) 이인유정혜사(以隣有定慧寺) 명칭(名稱) 혼동고(混同故) 수조지(受朝旨) 개정혜사(改定慧社) 위수선사(爲修禪社) 연근수문(然勸修文) 기포유고(旣流布故) 잉기구명(仍其舊名) 조판인시이(彫板印施耳)
승안(承安) 5년 경신(1200년)에 이르러 이 결사를 공산에서 강남 조계산으로 옮겼더니, 그 이웃에 정혜사(定慧寺)가 있었다. 이름이 혼동되었기 때문에 나라의 명을 받아 정혜사(定慧社)를 수선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권수문(勸修文)이 이미 세상에 유포되었기 때문에 옛 이름을 그대로 판에 새겨 인쇄하여 널리 반포한다.
2. 진각국사(眞覺國師) 어록(語錄)
(1) 위동화비장로(爲桐華備長老)
上堂云 雲去雲來 太虛 何損何益 ?生?滅 巨海 無欠無餘 況玆一物之長靈 豈有四山之可害 只如桐華老人 卽今在什?處 良久召大衆云 馬師曾?百丈鼻 野鴨何曾飛過去 以?杖擊香臺
上堂云 雲煙消散 孤月自明 砂礫汰除 眞金自現 此事亦爾 狂心歇處 卽是菩提 性淨妙明 不從人得 所以大覺世尊 初悟此事 乃以普眼 遍觀十方而興歎曰 奇哉奇哉 我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但以妄相執着 而不證得 若離妄相 無師智 自然智 無?智 悉得現前 大衆 如來 是眞實語者 豈欺人哉 若向者裏 信得及 直下一刀兩斷 休去歇去 則便見頭頭上明 物物上現 更不是別人 到者裏 無生死可出 無涅槃可求 只是一個無事人 時寒 久立 珍重
上堂 拈起?杖云 見? 卓一下云 聞? 看看 觀音文殊二大士 在山僧?杖頭上 放大光明 震大音聲 穿透爾諸人耳朶 ?破 爾諸人眼睛 說微妙伽陀 見聞如幻? 三界若空華 聞復?根除塵消覺圓滿 淨極光通達 寂照含虛空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召大衆云但辦肯心 必不相? 卓?杖
上堂云 截斷有無中間 自孤脫體無依 活卓卓 霽虛廓淨絶方隅【불교전서(한국불교문화종합시스템)】
○ 동화사 비장로(備長老)를 위하여
법당에 올라가 설법하기를,
구름이 가고 구름이 와도 큰 허공은 무엇이 더했고 무엇이 덜함이 있느냐? 물거품이 생기고 물거품이 꺼져도 큰 바다는 모자라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하물며 이 한 물건은 언제나 신령하거늘 어찌 사산(四山;生老病死)이 해칠 수 있으랴. 지금 동화사의 늙은이는 지금 어느 곳에 있소? 한참 있다가 대중을 불러 마조선사(馬祖禪師)가 일찍 백장선사(百丈禪師)의 코를 비틀었지만 ‘들오리가 언제 날라 지나갔었지?’하고 주장(柱杖)으로 향대를 쳤다.
법당에 올라가 설법하기를,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고 흩어지면 외로운 달이 저절로 밝아지고, 모래와 자갈을 일어서 버리면 순금(純金)이 저절로 나타난다. 이 일도 그와 같아 미친 마음이 쉬는 곳이 바로 보리니 성품이 깨끗하고 묘한 밝음은 남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크게 깨달으신 부처님도 처음에 이 일을 깨치시고 이에 널리 보는 눈으로 두루 시방세계를 보시고 감탄하여 말씀하시기를,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내가 모든 중생을 보니 부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지만 단지 망상과 집착 때문에 그것을 증득하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망상을 떠나면 스승이 없는 지혜, 자연의 지혜, 걸림이 없는 지혜 등이 모두 나타날 것이다. 대중이여! 부처님은 진실을 말씀하시는 분인지라. 어찌 사람을 속일까보냐. 만약 그 경지에 들어가 그것을 믿고 당장 한 칼로 두 조각을 내듯 망상을 그치면 그것은 일마다 분명하고 문건마다 나타날 것이오. 그러나 별사람이 아닐 것이요, 그 경지에 이르면 벗어나야 할 삶도 죽음도 없고 열반도 구할 것이 없네. 다만 일 없는 한 사람이 될 것일세. 날도 춘운데 오래 서 있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법당에 올라가 주장(柱杖)을 들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보이는가?’하고 주장을 내리치면서 ‘소리가 들리는가? 자세히 보라. 관음과 문수의 두보살이 산승(山僧)의 주장머리에 큰 광명을 내고 큰 소리를 질러 여러분의 귀청을 뚫고 여러분의 눈동자를 녹이면서 미묘한 게송을 읊도다.’
보고 듣는 것은 허끼비와 같고
삼계(三界)는 허공의 꽃과 같네.
들음이 회복되어 가리워진 감관이 없어지고
티끌이 사라지는 깨달음이 원만하네.
끼끗함이 지극하면 광명이 트이고
고요하면서 비추는 것이 허공에 머금었다.
다시 와서 세상을 보노니
그것은 마치 꿈속의 일 같구나.
대중을 부르며 말하길, ‘다만 긍정하려는 마음만을 지니면 속지 아니하리라’하고 주장을 세웠다.
법당에 올라가 설법하기를,
있고 없음과 중간을 끊어버리니 해탈한 몸이 스스로 우뚝하며 의지할 데 었어 씩씩하고 우뚝하며 밝은 허공은 트이고 깨끗하며 일정한 방위가 없노라.【진각국사(眞覺國師) 어록(語錄)에서】
(2) 신묘년하(辛卯年夏) 재공산청량암(在公山淸?庵) 울주수(蔚州守) 청(請)
上堂云 衆岳之宗兮 是我公山 淸?之窟兮 在乎其間 豁如也 望之無遮欄 奧如也 處之得幽閑 橫流直注兮 綠水潺湲 放去收來兮 白雲往還 分明示現兮 是何容顔 擬議尋思兮 自取癡頑 何也 莫把是非來辨我 悠悠心識不相關 以扇子擊臺一下
○ 신묘년 여름 공산 청량암(淸?庵)에 있을 때 울주군수(蔚州郡守)의 청으로
법당에 올라가 설법하기를,
「뭇 산악의 으뜸이어, 그것은 우리 공산(公山)이로다. 청량(淸凉)의 굴이여 그 산속에 있도다. 탁 트이었으니 바라보아 막힘이 없고 깊숙하니 거기 머물러 그윽하고 한가함을 얻도다. 가로 흐르고 곧게 내려 쏟음이어, 푸른 물이 잔잔하고 높아 가버리고 거두어 옴이어, 흰 구름이 가고 옴이로다. 분명히 나타나 보임이어, 이 어떤 얼굴이런고, 헤아리고 생각함이어 스스로 어리석음을 취하도다. 시비를 가져와 날더러 판단하라 하지 마오. 유유한 내 마음은 상관하지 않도다.」
하고 부채로 대를 한번 내리치다.
(3) 비문(碑文)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정우(貞祐) 기묘년에 조서를 내려 단속사(斷俗寺)에 머물게 하였다. 국사가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자, 그 이듬해에 원(院)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사(本社)를 상주하는 처소로 삼았다. 본사에 있으면서 병이 나니, 진양공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임금에게 알리매, 어의(御醫) 모(某)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였다.
봄에 월등사(月登寺)로 이주하였다. 마곡(麻谷)이 방에 들어오니, 조사는 말하기를,
“늙은 내가 오늘 고통이 몹시 심하다.”
하였다. 마곡이,
“무엇 때문에 이러합니까?”
물으니, 국사는 게(偈)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중고부도처(衆苦不到處) 중생의 고뇌가 이르지 못하는 곳에
별유일건곤(別有一乾坤) 따로 하나의 건곤이 있다
차문시하처(且問是何處)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大寂涅槃門(大寂涅槃門) 크게 적멸한 열반의 문이다.
국사는 주먹을 불끈 쥐어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 주먹으로 선(禪)을 설명하리니, 너희들은 믿겠느냐?”
하고, 드디어 주먹을 펴 보이면서 말하기를,
“펴면 다섯 손가락의 길고 짧음이 제각기 다르다.”
하고, 주먹을 쥐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합하면 한 덩어리가 된다. 펴는 것도 합하는 것도 자유자재하여 하나이거나 여럿이거나 구애됨이 없다. 그러나 이러기도 하고 이렇지 않기도 한 것이 주먹의 본분 설화(本分說話)이다. 어떠한 것이 본분 설화인가?”
하고, 곧 주먹으로 창문을 한번 내려치며 껄껄 웃었다.
갑오년 6월 26일에 문인들을 불러서 뒷일을 부탁하고, 마곡에게 말하기를,
“늙은 내가 오늘 몹시 바쁘다.”
하자, 마곡이 대답하기를,
“무엇을 가리키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국사는 말하기를,
“늙은 내가 몹시 바쁘다.”
하였다. 마곡이 멍하니 있으니, 국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가부좌(跏趺坐)하고 죽었다.【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한국고전번역원】
이는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위대한 너무도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열반과 별세(別世)의 광경이다.
팔공산은 한국 제1의 약사여래(藥師如來) 신앙의 총본산이다. 경덕왕(景德王) 14년(755년) 을미(乙未)에 분황사(芬皇寺)에 36만6천7백근(斤)의 약사불동상(藥師佛銅像)을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末)이 주성(鑄成)한 것은 사상(史上)에 유명하다. 분황사(芬皇寺)는 통일신라에 있어서 약사신앙(藥師信仰)의 중심 사찰이었다. 이 통일신라시대 이래 한국 약사신앙의 성산(聖山)은 팔공산(八公山)이었다. 팔공산 만큼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불상(佛像)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한국의 산악(山岳) 어디에도 없다. 팔공산에 있는 약사불(藥師佛)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동화사(桐華寺) 입구 마애약사여래좌상(磨崖藥師如來坐像;寶物 제243호) 암벽의 높은 곳에 조각되어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심지(心地)가 조각했다 한다.
2. 동화사(桐華寺) 대웅전(大雄殿) 삼존불(三尊佛)-약사(藥師)ㆍ석가(釋迦)ㆍ아미타(阿彌陀)의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3. 관봉(冠峯)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 : 높이 5.6m, 갓 바위 부처
4. 동봉(東峯;彌陀峯)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 높이 7m
5. 비로봉(毘盧峯) 마애약사여래좌상(磨崖藥師如來坐像) : 도학동 산 124-1
6. 삼성암(三省庵) 마애약사여래입상(磨崖藥師如來立像)
7. 불굴사(佛窟寺)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이상과 같이 약사불상이 산곡(山谷)과 산정(山頂)마다 조각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의 명산(名山)ㆍ영악(靈岳) 중의 이 산은 약사신앙(藥師信仰)의 영산(靈山)이요, 중심지였다.
약사여래(藥師如來)란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ㆍ대의왕여래(大醫王如來)라고도 칭한다.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七佛本願功德經)에 의하면, 동방(東方) 십(十) 항하사(恒河沙) 불토(佛土)를 지나서 유리광세계(琉璃光世界)의 교주(敎主) 부처를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라 호(號)한다고 한다. 이 부처님은 과거에 보살행(菩薩行)을 닦을 때 12대원(大願)을 발원(發願)하였다. 그 12대원(大願)은 다음과 같다.
1. 내 내세(來世)에 보리(菩提)을 얻을 때 자신의 광명치연(光明熾然)히 무량(無量)의 세계를 비추고 32상(相) 80종호(種好)를 가지고 장엄해져서 일체(一切)의 중생으로 하여금 또한 나와 다르지 않게 하리라.
2. 나의 몸 유리(琉璃)와 같이 내외청정(內外淸淨)해서 하구(瑕垢)가 없으며 광명일원(光明日月)보다도 더 밝아 사람으로 하여금 혼암(昏暗)의 중에서도 방소(方所)를 알게 함.
3. 지혜(智慧) 방편(方便)을 가지고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수용(需用)을 무진장(無盡藏)으로 함.
4. 이도(異道)를 행하는 이로 하여금 보살도(菩薩道)에 안립(安立)시키고 이승(二乘)의 도(道)를 행하는 자로 하여금 대승(大乘)에 안립(安立)케 함.
5. 나의 법(法) 중에 범행(梵行)을 닦는 이로 하여금 일체개계(一切皆戒)를 결감(缺減)케 하지 않는다.
6. 제근(諸根) 불구자, 귀머거리, 봉사, 절름발이, 문둥병, 지랄병, 미치광이 등 종종의 신병(身病)이 있는 자들이 나의 이름을 들으면 모두 제근(諸根)이 구족(具足)해서 신분성만(身分成滿)하는 것을 얻게 함.
7. 모든 병이 몸에 닥쳐 지킬 수 없고 의지할 것 없고, 일체의 자생(資生)이나 의약(醫藥)으로 치료받지 못하는 이 나의 이름을 들으면 모든 병고(病苦)가 깨끗이 없어짐.
8. 만약 여자가 여자의 몸을 버리려고 원하는 이는 나의 이름을 들으면 장부(丈夫;남자)의 상을 얻게 된다.
9. 중생으로 하여금 마강(魔綱)을 해탈해서 정견(正見)에 안립(安立)케 한다.
10. 왕법(王法)에 계박(繫縛)되어 국가권력에 의하여 무량(無量)의 재난(災難)에 전박(煎迫)되어도 나의 복력(福力)을 가지고 이 모든 고뇌에서 해탈시킴.
11. 굶주림에서 핍박되어 제악업(諸惡業)을 짓는 자가 있으면 내 향미(香味)의 음식을 가지고 그의 몸을 포족(飽足)케 한다.
이와 같은 대원을 발하여 드디어 성불(成佛)해서 지금 그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에 주(住)해 있다. 그 국토의 장엄은 극락국(極樂國)과 같다. 그곳에는 일광(日光)ㆍ월광(月光)의 두 보살이 있어 그 여래(如來)의 정법장(正法藏)을 가진다. 만약 사람이 중병에 걸려서 사상(死相)ㆍ현전(現前)에서 염마(閻摩)의 사인(使人)이 그 신식(神識)을 끌어 염마법왕(閻摩法王)의 앞에 놓아 좌복(罪福)에 따라서 장차 처분하려 할 때에 이 사람을 위하여 주야(晝夜) 육시(六時)에 그 여래(如來)를 예(禮)하고 공양해서 49편(遍)이 경(經)을 읽어 49등(燈)을 밝혀 49천(天)의 5색(色)의 채번(綵幡)을 만들어, 즉 꿈으로부터 깨는 것과 같이 이 사람의 신식환복(神識還復)해서 그 명(命)을 잇게 한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대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숭배는 주로 소위 속명법(續命法)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송대(宋代) 이래 이 신앙이 행해졌다. 이 약사불을 숭배함으로서 국가가 환난에서 탈피하고 9횡사(橫死)에서 탈피하여 명종시(命終時)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명호공덕(名號功德)에 의하여 문수사리(文殊舍利)ㆍ관세음(觀世音)ㆍ무진의(無盡意)ㆍ보단화(寶檀華)ㆍ약왕(藥王)ㆍ약상(藥上)ㆍ미륵(彌勒)의 8보살이 사자(死者)의 정신을 맞이하여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란 파라다이스로 데려가서 왕생케 한다고 한다. 매우 현세이익적(現世利益的)이고 대중의 고통에 직결되는 호소력이 있는 매력적인 교리였다.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七佛本願功德經)의 칠불약사(七佛藥師)의 불명(佛名)과 국토명(國土名)은 다음과 같다.
1. 선명칭길상왕여래(善名稱吉祥王如來):동방광승세계(東方光勝世界)
2. 보월지엄광음자재왕여래(寶月智嚴光音自在王如來):동방묘보세계(東方妙寶世界)
3. 금색보광묘행성취여래(金色寶光妙行成就如來) :동방원만향적세계(東方圓滿香積世界)
4. 무최승길상여래(無憂最勝吉祥如來):동방무우세계(東方無憂世界)
5. 법해뇌음여래(法海雷音如來):동방법륜세계(東方法輪世界)
6. 법해승혜희신통여래(法海勝慧戱神通如來):동방선주보해세계(東方善住寶海世界)
7.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琉璃世界)
이들은 약사여래의 분신(分身)에 지나지 않는다. 밀교(密敎)의 영향으로 동방(東方) 아축불(阿?佛)과 동체(同體)로 되었다. 사불(四佛)숭배에서 동방(東方) 약사(藥師)ㆍ서방(西方) 아미타불(阿彌陀佛;無量壽佛)ㆍ남방(南方) 보생(寶生)ㆍ북방(北方) 석가(釋迦)로 숭배되었다. 약사(藥師)는 일광(日光), 월명(月明)의 협시보살과 12신장(神將)과 8만4천의 권속(眷屬)을 거느리고 약사(藥師)의 명호(名號)를 수지(受持)하고 중생을 지킨다.
약사여래는 석가여래의 기능 중에서 분화되어 생겨났다. 사방정토(四方淨土)와 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숭배와 대조되게 동방정유리정토(東方淨琉璃淨土)의 왕생보다는 현세구복적(現世救福的)인 면이 강했다.
약사여래의 수인(手印)은 대개 시무외(施無畏), 여원인(與願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며 손에는 약합(藥盒), 약호(藥壺), 약주(藥珠;寶珠)를 들고 있는 상과 연반(蓮盤) 석장(錫杖)을 갖기도 한다. 손에 아무것도 갖지 않은 약사여래는 석가여래와 같아서 명문(銘文)이 없는 경우에는 구별이 안된다. 신라시대 약사신앙은 『삼국유사(三國遺事)』권5의 밀본최사전(密本?邪傳)에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병환이 중하자 흥륜사(興輪寺) 승(僧) 법척(法?)을 불러 고치려 했으나 아무 효험을 보지 못했다. 당시 덕행으로 유명한 밀본법사(密本法師)를 궁중으로 초치하여 약사경(藥師經)을 독송하여 왕의 병환을 쾌유케 했다. 그리고 무열(武烈)ㆍ문무왕대(文武王代)의 재상으로 일통삼국(一統三國)에 공헌한 김양도(金良圖)가 어릴 때 병으로 위독할 때 밀본법사(密本法師)를 불러 약사경을 독송하려고 펴기도 전에 밀본(密本)의 법력(法力)에 의하여 사방에서 금갑장극(金甲長戟)으로 무장한 대력신(大力神)과 무수한 천신(天神)의 호위 속에 병을 낫게 했다 한다.
밀본법사(密本法師)는 금곡사(金谷寺)에 거주했다. 혜통법사(惠通法師)는 통일 후 신문왕(神文王)ㆍ효소왕대(孝昭王代)의 고승으로 당(唐)에 들어가 구법(求法)하여 무외삼장(無畏三藏)의 고제(高弟)가 되어 인결(印訣)을 전하고 당(唐) 고종황제(高宗皇帝) 공주의 병을 고치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효소왕(孝昭王) 왕녀의 병을 고치고 신문왕(神文王)의 등창을 낫게 한 고승이다. 그는 신병(神兵)을 불러 교룡(蛟龍)을 쫓고 사귀(邪鬼)의 항복을 받았다.
통일신라의 성세(聖世)는 전쟁이 종식되고 문화의 난숙으로 인하여 문약(文弱)에 흐르고 사회적 모순이 노정되어 사회불안이 일고 빈부격차가 심하게 되니 질병, 가난, 병고와 부당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질곡을 탈피하려고 약사신앙이 성하게 되었고, 신라 귀족들은 그들이 현세에서의 이권과 부와 행복을 위하여 약사여래신앙을 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라 말 사회혼란이 심해지자 기근, 도적, 질병, 사회혼란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주술(呪術), 치병(治病), 호국(護國)의 신앙으로서 약사신앙은 더욱 민중에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팔공산은 신라통일기의 영웅 김유신이 수도하여 비방(秘方)을 전수받은 화랑 일급의 수련도장으로 호국의 성지였다. 그리고 심지(心地)의 성간자(聖簡子)가 봉안된 미륵신앙의 성산이었다. 이와 같은 조건위에 약사의 성지로 인민(人民)의 행복, 장수, 부(富)를 증진하고 재난(災難), 병고(病苦)로부터 구제를 비는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산골짜기 도처와 산상의 약사불(藥師佛)에 예배드리는 신도가 끊이지 않았다.
1. 부인사(符仁寺)
선덕여왕대(善德女王代)인 7세기 때 창건되었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은 부인사(符仁寺)였다. 고려(高麗)시대 기록에서는 부인사(符仁寺)라 쓰여 있다.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명병서(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銘幷序)와 이규보(李奎報)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과 『고려사(高麗史)』세가(世家) 권21 신종(神宗) 6년 9월조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14 신종(神宗) 6년 9월조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53 지(志) 제7오행(五行)1에도 부인사(符仁寺)라 쓰여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부인사(夫人寺)라 쓰여 있으며, 지금의 절 편액도 부인사(夫人寺)라 쓰여 있다. 몽고군의 침략으로 부인사(符仁寺)가 완전히 불타버리고 난 후 조선초기에 그 자리에 축소된 작은 절을 지으면서 부인사(夫人寺)로 개명되었다고 보여 진다. 이 절이 선덕여왕(善德女王) 시 창건되었다는 사전(寺傳)이 있고, 또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묘(廟)가 있고 그 안에 선덕여왕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에 신무동민(新武洞民)과 사찰에서 선덕제(善德祭)를 지내는 것을 볼 때 부인(夫人)이란 선덕여왕을 지칭한 듯 하다. 신라시대에는 왕비(王妃)를 부인(夫人)이라 칭했기 때문이며,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원당(願堂)이었던 듯 하다. 팔공산 남쪽 동화사 서쪽에 위치하며 대구시 동구 신무동(新武洞)에 소재한다.
○ 고려초조대장경(高麗初彫大藏經)의 봉안(奉安)
현종(玄宗) 2년에 글단(거란)의 대군(大軍)이 침략하므로 현종(顯宗)은 남으로 나주(羅州)에까지 피난길에 오르고 개경(開京)은 불바다가 되었다. 수도를 점령한 글단군은 개경(開京)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에 군신(君臣)이 함께 무상대원(無上大願0을 발하여 대장경판(大藏經板)의 각성을 맹서했던바 곧 글단병이 물러갔다. 이에 현종은 대장경을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동양 초유의 거질(巨帙)인 개보칙판(開寶勅板)의 조조(雕造)에 자극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북송(北宋) 칙판대장경(勅板大藏經) 개보(開寶) 4년(971년)에 익주(益州)에서 조조(彫造)하기 시작하여 12년 후인 태평여국(太平與國) 8년(983년)에 완성되어 성종(成宗) 8년(989년)에 승(僧) 여하(如何)를 보내어 대장경을 받아가지고 귀국하였다.
『송사(宋史)』에 의하면,
淳化二年遺使韓彦恭來貢 彦恭表述治意 救印佛經 詔以藏經幷御製秘藏詮 逍遙詠, 蓮華心輪賜之
고려의 한언공(韓彦恭)이 국왕의 사신으로 가서 대장경과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 및 『소요영(逍遙詠)』, 『연화심론(蓮華心輪)』 등을 구해서 왔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의 한언공조(韓彦恭條)에는,
彦恭秦請大藏經 帝賜藏經四百八十一函 凡二千五百卷 又賜御製秘藏詮 逍遙 蓮華心輪還
한언공이 가져온 대장경이 481函, 2500卷이라고 하며,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 및 『소요영(逍遙詠)』, 『연화심론(蓮華心輪)』 등을 구해서 왔다
이러한 기록에서 송판(宋板) 대장경이 성종(成宗) 10년(991년)에 수입해 왔던 것이다. 이를 대본(臺本)으로 현종조(顯宗朝)에 대장경 조조(彫造)의 작업이 일어나게 되었다.
현종(顯宗) 3ㆍ4년경부터 조각하기 시작하여 현종(顯宗) 20년경에 5,000축(軸)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대장경이 이루어졌다. 다음 덕종(德宗)ㆍ정종(靖宗) 두 임금은 이를 잘 수호 봉안하는데 힘쓰고 더 이상 조각하지는 못한 듯 하다.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왕 5년부터 대장경 조각 작업을 계승하여 대왕치세에 6,0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이 완성되었다. 이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의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 완성되어 선종(宣宗) 5년에 시작하여 숙종(肅宗) 4년에 완성된 속장경(續藏經)은 1070부, 4,857권이 개경(開京) 대흥왕사(大興王寺)에서 조조(雕造)되었다.
이 총 1만 여권의 대장경을 흥왕사(興王寺), 개국사(開國寺), 귀법사(歸法寺)에 봉안했었다. 그 중에서 중심사찰은 흥왕사(興王寺)임이 물론이다. 여기서 조조(雕造)하고 선종(宣宗) 4년 3월에는 대장경을 낙성했다. 개국사(開國寺)에는 문종(文宗) 37년 3월에 송(宋)으로부터 받아온 송대장경(宋大藏經)을 봉안했다. 문종(文宗) 4년에 귀법사(歸法寺)에서 대장경(大藏經)의 인성(印成)을 경축하였다.
그 후 어느 시기에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을 공산(公山) 부인사(符仁寺)에 봉안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 번의 인간(印刊)이 있었음은 물론이요, 국가적인 성보(聖寶)로 소중히 수호봉안(守護奉安)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고종(高宗) 19년(1232년)에 몽고 제2차 침입시 몽고병에 의하여 불에 타고 말았다. 2세기 간이나 보존되었던 이 대장경의 인간(印刊)도 많았지만 전란이 잦은 나라라 그 약간 권만이 국내에 전하고 일본(日本)의 경도(京都) 남선사(南禪寺)와 대마도(對馬島)에 상당량이 전하고 있다.
고종(高宗) 19년(1232년)에 대두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된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이 몽고군의 침략 병화로 불타 없어지고 난 후 현종(顯宗)때의 외침격퇴의 정신에 따라 불력(佛力)으로 표한한 원(元)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코자 고종(高宗) 24년 정유(丁酉)에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을 지어 군신이 함께 대장경의 재조(再雕)의 대발원(大發願)을 고했다. 그리하여 고려국대장경도감(高麗國大藏經都監)과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설치하여 16년의 세월에 걸쳐 이를 완성하였다. 판수 86,686장, 6,780권의 거질(巨帙)이다. 이를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봉안했다가 조선(朝鮮) 태조(太祖) 7년(1398년)에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에 전륜(轉輪)했다가 하절(夏節)의 우기(雨期)를 지나 추동절(秋冬節)에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봉안하게 되었다.
고종(高宗) 24년(1237년) 정유(丁酉)에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은 다음과 같다.
○ 大藏刻板君臣祈告文 丁酉年行
國王諱。謹與太子公侯伯宰樞文虎百寮等。熏沐齋戒。祈告于盡虛空界十方無量諸佛菩薩及天帝釋爲首三十三天一切護法靈官。甚矣達旦之爲患也。其殘忍凶暴之性。已不可勝言矣。至於癡暗昏昧也。又甚於禽獸。則夫豈知天下之所敬有所謂佛法者哉。由是凡所經由。無佛像梵書。悉焚滅之。於是符仁寺之所藏大藏經板本。亦掃之無遺矣。嗚呼。積年之功。一旦成灰。國之大寶喪矣。雖在諸佛多天大慈之心。是可忍而孰不可忍耶。因竊自念。弟子等智昏識淺。不早自爲防戎之計。力不能完護佛乘。故致此大寶喪失之災。實弟子等無狀所然。悔可追哉。然金口玉說。本無成?。其所寓者。器耳。器之成?。自然之數也。?則改作。亦其所也。況有國有家。崇奉佛法。固不可因循姑息。無此大寶。則豈敢以役鉅事殷爲慮。而憚其改作耶。今與宰執文虎百僚等。同發洪願。已署置句當官司。?之經始。因考厥初草創之端。則昔顯宗二年。契丹主大擧兵來征。顯祖南行避難。丹兵猶屯松岳城不退。於是乃與群臣。發無上大願。誓刻成大藏經板本。然後丹兵自退。然則大藏。一也。先後雕鏤。一也。君臣同願。亦一也。何獨於彼時丹兵自退。而今達旦不爾耶。但在諸佛多天鑑之之何如耳。苟至誠所發。無愧前朝。則伏願諸佛聖賢三十三天。諒懇迫之祈。借神通之力。使頑戎醜俗。斂?遠遁。無復蹈我封疆。干戈載?。中外晏如。母后儲君。享壽無疆。三韓國祚。永永萬世。則弟子等當更努力。益護法門。粗報佛恩之萬一耳。弟子等無任懇禱之至。伏惟炤鑑云云。【東國李相國全集卷第二十五】
○ 대장경(大藏經)을 판각할 때 군신(君臣)의 기고문(祈告文) 정유년에 행하였다.
국왕(國王) 휘(諱)는 태자(太子)ㆍ공(公)ㆍ후(侯)ㆍ백(伯)ㆍ재추(宰樞), 문무백관 등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끝없는 허공계(虛空界), 시방의 한량없는 제불보살(諸佛菩薩)과 천제석(天帝釋)을 수반으로 하는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일체 호법영관(護法靈官)에게 기고(祈告)합니다.심하도다. 달단(거란)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혼암함도 또한 금수(禽獸)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佛法)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재집(宰執)과 문무백관 등과 함께 큰 서원(誓願)을 발하여 이미 담당 관사(官司)를 두어 그 일을 경영하게 하였고, 따라서 맨 처음 초창(草創)한 동기를 고찰하였더니, 옛적 현종 2년에 거란주(契丹主)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와서 정벌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거란 군사는 오히려 송악성(松岳城)에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판각해 이룬 뒤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경도 한가지고, 전후 판각한 것도 한가지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또한 한가지인데, 어찌 그때에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불다천(諸佛多天)이 어느 정도를 보살펴 주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지성으로 하는 바가 전조(前朝)에 부끄러워할 것이 없으니, 원하옵건대 제불성현 삼십삼천(諸佛聖賢三十三天)은 간곡하게 비는 것을 양찰하셔서 신통한 힘을 빌려 주어 완악한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중외가 편안하며, 모후(母后)와 저군(儲君)이 무강한 수를 누리고 나라의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주신다면, 제자 등은 마땅히 노력하여 더욱 법문(法門)을 보호하고 부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합니다. 제자 등은 간절히 비는 마음 지극합니다. 밝게 살펴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운운. |
현재의 부인사(夫人寺)는 옛 부인사(符仁寺) 경내의 뒤쪽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절이다. 앞의 광활한 폐허인 옛 대장경을 봉안했던 장경각(藏經閣) 건물지를 위시하여 무수한 전각지(殿閣址), 초석(礎石), 장대석(長臺石) 등 석재가 널려있고 옛 웅장하던 대가람(大伽藍)의 규모를 말해준다. 석탑(石塔)은 동서(東西) 두기가 허물어져 있다.
이 옛 절터는 모두 포도밭으로 변해있고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에서 200m 떨어져 있고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석시(昔時)에 수천 명의 승려, 39동의 당우(堂宇)가 있었다는 거찰은 이제 대웅전(大雄殿), 요사(寮舍), 산신각(山神閣), 선덕묘(善德廟)만이 남아 있다. 지금의 절터 유지(遺址)만 오아도 해인사의 몇 배가 되는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정기(定期) 승시장(僧市長)도 섰다 한다. 『삼봉집(三峰集)』에 실려 있는 송화엄종사우운시권서(送華嚴宗師友雲詩券序)에 「명대공산부인사주지(命大公山符仁寺主持) 부인사거찰야(符仁寺巨刹也)」라는 글을 보아도 대가람(大伽藍)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화엄종(華嚴宗) 사원(寺院)임을 알 수 있다.
2. 동화사(桐華寺)
동화사(桐華寺)는 팔공산 수십여 사찰 가운데 동쪽의 은해사와 쌍벽을 이루는 큰 절이다. 과거는 31 대본산의 하나요,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대구시에서 동북으로 22㎞ 거리에 팔공산 준령(峻嶺)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명당(明堂)이다. 나대(羅代) 고찰로 유명하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桐華則羅僧眞弘飛錫空中 錫止於此 遂建寺以居 地形廻合 屋宇宏傑 自古多名僧修行者 동화사 절은 신라시대에 진홍대사가 석장(錫杖)을 하늘에 날려 그 석장(지팡이) 날아가 이곳에 떨어졌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지어 살았다. 땅의 형국은 좌우로 산맥이 에워싸 모여들었고 절 집은 매우 크고 웅장하다. 옛날부터 이름난 스님이 수도하였다. |
고 했다.
(1) 창건연대(創建年代)
『삼국유사(三國遺事)』권4 심지계조조(心地繼祖條)에 의하면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의 왕자인 심지대사(心地大師)가 진표(眞表)가 영심대사(永深大師)에게 전한 성간자(聖簡子)를 전수하여 중악(中岳)에 와서 이것을 봉안할 절을 지은 것이 동화사(桐華寺)라 한다.
그러나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상에 동화사(桐華寺) 대웅전(大雄殿)의 창건여대를 제(齊) 무제(武帝) 영명(永明) 4년 계유(癸酉) 즉, 493년 신라 소지왕(炤知王) 15년에 승(僧) 보조(普照)가 시창(始創)했다 하고 대력(大歷) 7년 즉, 782년 혜공왕(惠恭王) 2년에 승(僧) 심지(心地)가 재창(再創)했다 한다. 제41대 헌덕왕(憲德王;809~825년)의 왕자인 심지(心地)가 782년 혜공왕(惠恭王) 2년에 창건했다는 것은 연대에 맞지 않는다. 심지(心地)의 연대를 잘못 기록하고 있다.
『동화사사적기(桐華寺寺跡記)』에는 동화사의 창건을 소지왕(炤知王) 15년(493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흥덕왕(興德王) 7년(832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창(重創)할 때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 동화사(桐華寺)라 고쳐 불렀다 한다. 여기서도 심지대사(心地大師)가 중창했다 한다. 그러나 중창(重創) 연대는 심지(心地)의 생존연대와 맞아 들어가고 있어 중창을 시창(始創)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시창(始創) 사실은 동화사(桐華寺)의 창건연대를 올리기 위하여 가상(加上)했다고 보여 진다. 실제 동화사 창건은 중창이라고 하는 흥덕왕(興德王) 7년(832년)이 사실에 근사할 것이라고 보겠다. 이때 창건(創建)했다.
동화사(桐華寺) 창건시 사명을 유가사(瑜伽寺)라 했다는 것은 허구이다. 창건 이래 동수(桐藪)라고 불렀다. 신라시대에는 동사(桐寺)라 했지 동화사(桐華寺)라 하지 않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2 기이(紀異)제2 후백제견훤조(後百濟甄萱條)에 「동수망이궤산(桐藪望而潰山)」이라고 하였고, 민애대왕(閔哀大王) 석탑기(石塔記)에도 동수원당(桐藪願堂)이라 쓰여 있고, 경북대학교 윤용진(尹容鎭) 교수가 조사한 팔공산 용수동 와요지(瓦窯地) 조사보고서(1986년)에 「동수미륵당(桐藪彌勒堂)」이란 명문(銘文)의 와당(瓦當)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君護國城八角燈樓記)」에 동사(桐寺)라고 쓰여 있는 보아도 알 수 있다. 유가사(瑜伽寺)란 사명(寺名)은 한 번도 칭한 적이 없다. 고려시대에는 유가종(瑜伽宗) 동화사(桐華寺)라 했다. 지척인 포산(包山;玄風)에 유가사(瑜伽寺)란 명찰(名刹)이 있다. 그러므로 인근에 동일(同一) 사명(寺名)을 썼을 리가 만무하다.
(2) 민애왕(閔哀王) 원당석탑(願堂石塔)
동수(桐藪)는 민애왕(閔哀王)의 원당사찰(願堂寺刹)이 되었고 대왕(大王)의 명복(冥福)을 비는 석탑(石塔)을 세웠다. 민애왕(閔哀王)은 신라 하대 치열하던 왕위쟁탈전에 희생된 불쌍한 왕이었다. 김균정(金均貞)을 옹립하는 김우징(金祐徵), 김예징(金禮徵), 김양(金陽)의 군대를 격파하고 김균정(金均貞)을 죽이고 희강왕(僖康王;金梯隆)을 왕으로 옹립, 즉위시킨 시중(侍中) 김명(金明)과 아찬(阿?) 이홍(利弘)은 승리자로서 김명(金明)이 상대등(上大等)이 되고 이홍(利弘)이 시중(侍中)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僖康王)을 협박하여 죽게 하고 민애왕(閔哀王)으로 즉위하였으나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의 군사원조를 얻은 김양(金陽)의 5천 대군이 민애왕(閔哀王) 2년(839년) 이곳 달벌평원(達伐平原)에서 민애왕(閔哀王)의 국왕군과 싸워 국왕군은 대패하여 흩어지고 민애왕(閔哀王)은 김양군(金陽軍)에 의하여 참살되었다. 김우징(金祐徵)이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했다.
민애왕은 이찬(伊?) 충공(忠恭) 추봉(追封) 선강왕(宣康王)의 장자로 헌덕왕(憲德王) 9년(817년)에 태어나서 839년(왕 2년)에 2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렸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 충공(忠恭)은 원성왕(元聖王) 태자(太子) 인겸(仁謙)의 아들로서 소성왕(昭聖王), 헌덕왕(憲德王), 흥덕왕(興德王)의 아우로 헌덕왕(憲德王) 9년에 이찬으로 시중이 되었고, 헌덕왕 14년에 각간(角干)이 되었고, 그의 딸이 태자의 비(妃)가 되었으니 희강왕비(僖康王妃) 문목부인(文穆夫人)이다. 충공(忠恭)은 헌덕왕(憲德王) 13년 4월에 시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되었다. 김명(金明)은 아버지 충공(忠恭)의 형인 흥덕왕(興德王) 10년에 19살의 나이로 수상(首相)인 시중에 임명되었고, 22살에 상대등(上大等)이란 부왕(副王)에 임명되었던 왕족의 귀공자였다. 그는 흥덕왕(興德王)과 헌덕왕(憲德王)과 소성왕(昭聖王)의 조카이고, 애장왕(哀莊王)의 사촌이며, 희강왕(僖康王)의 6촌이자 처남이었다.
민애왕(閔哀王)이 달벌(達伐;大邱)의 대전에서 패전으로 죽은 뒤로 신무왕(神武王), 문성왕(文聖王), 헌안왕(憲安王)을 지나 경문왕(景文王) 3년(862년) 함통(咸通) 4년에 동수원당(桐藪願堂) 앞에 명복을 비는 탑(塔)을 세웠다. 동수(桐藪)는 신라왕가의 원당(願堂)이었다.
비로암(毘盧庵)의 대적광전(大寂光殿)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경문왕 3년(863년)에 민애왕(재위 838∼839)을 추모하기 위해 당시 동수(桐藪)에 머물고 있던 흥덕왕의 셋째 왕자인 심지왕사가 민애왕이 죽은 지 24년이 지난 뒤에 조성한 것이다. 839년 신무왕(神武王)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즉위했으나 3개월 만에 죽고 아들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여 857년에 죽으면서 숙부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헌강왕(憲康王)이다. 861년 1월에 헌강왕(憲康王)이 병이 들자 사위 응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는데 사위 응렴이 바로 경문왕(景文王)이다. 민애왕이 죽은 지 24년이 지난 뒤에야 민애왕을 추모하는 탑이 조성되었다.
민애왕(閔哀王) 삼층석탑(三層石塔) 사리장치의 원호(圓壺)가 도굴꾼에 의하여 도굴되어 1968년 수장자가 동국대학(東國大學)에 기증함으로서 원호(圓壺) 표면 주위에 기각(記刻)된 명문(銘文)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기록문은 다음과 같다.
1. 國王奉爲
2. 敏哀大王追崇
3. 福業造石塔記
4. 若夫聖敎所設利
5. 益多端雖有八萬
6. 四千門其中聿鎖
7. 業障廣?利物者
8. 無越於崇建佛?
9. 禮懺行道伏以
10. 敏哀大王諱肌」
11. 宣康大王之長子」
12. 今上之老舅以開」
13. 成己未之年太?」
14. 之月下旬有三日」
15. 奄?蒼生春秋二」
16. 十三葬▨星霜二」
17. 紀▨▨▨▨▨」
18. 惠▨▨▨▨▨至」
19. 欲崇蓮坮之業於」
20. ▨桐藪願堂之前」
21. 創立石塔冀?童」
22. 子聚沙之義伏願」
23. ▨▨路此功德」
24. ▨▨五濁之緣常」
25. ▨▨▨之上爰及」
26. ▨▨▨中跋行蠢」
27. ▨▨識之類咸賴」
28. ▨▨劫劫生生此」
29. 無朽」
30. 時咸通四年歲」
31. 在癸未無射之月」
32. 十日記翰林沙干」
33. 伊觀 專知大德」
34. 心智 同知大德」
35. 融行 唯乃僧純」
36. 梵 唯乃師心德」
37. 專知大舍昌具」
38. 典永忠 匠梵覺」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김남윤 황수영 문명대 허흥식
국왕은 삼가 민애대왕을 위하여 복업을 추숭하고자 석탑을 조성하고 기(記)한다.
무릇 성교(聖敎)에서 설한 바는 이익이 다단하여 비록 팔만 사천의 법문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업장을 없애고 이물(利物)을 널리하는 것은 탑을 세우고 예참행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엎드려 생각컨대 민애대왕의 이름은 명(明)이며 선강대왕의 맏아들로 금상의 노구(老舅)이었다. 개성 기미의 해(839) 정월 23일 창생을 버리니 춘추 23세였다.
장례 ▨▨ 치른 후 2기(紀) ▨▨▨▨▨ 혜(惠)▨▨▨▨▨ 연화 대좌의 업(부처님)을 숭앙하고자 하여 ▨ 동화사 원당의 앞에 석탑을 세우니 동자들이 모래를 모아 탑을 쌓고 공양하던 뜻을 본받기를 바란다.
삼가 원하노니 ▨▨ 이 공덕으로 오탁(五濁)의 연을 ▨▨ 일찍이 ▨▨▨의 위에 이에 ▨▨▨ 가운데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모든) 영식(靈識)이 있는 종류를 … 모두 ▨▨에 의지하여 겁겁 생생토록 이 무구 ….
함통 4년(863) 계미 9월 10일에 쓰다. 한림 사간 이관, 전지대덕 심지, 동지대덕 융행, 유나승 순범, 유나사 심덕, 전지대사 창구, 전 영충, 장 범각.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김남윤
이는 경문왕(景文王)이 민애대왕의 복업(福業)을 추숭(追崇)하기 위한 조석탑기문(造石塔記文)으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이는 민애왕이 죽고 24년이 지난 경문왕(景文王) 3년(863년) 함통(咸通) 4년 계미(癸未)에 건립하고 쓴 것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사기(史記)』에 누락되어 알 수 없는 사실을 몇 개 알게 되었다. 민애왕(閔哀王)이 선강왕(宣康王)의 장자란 사실과 23세로 하세(下世)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동화사를 동수(桐藪)라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민애왕(閔哀王)의 민(閔)자를 좋은 자(字), 즉 민(敏)자로 바꾸고 있다. 왕(王)이 비참하게 시해(弑害) 당했기 때문에 시호(諡號)를 「불쌍한 민(閔), 슬플 애(哀)」자를 올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민(敏)자로 바꾸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왕력(王曆)에는 민(閔)-작민애왕(作敏哀王)이라 쓰여 있다. 이것은 아마 이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겠다. 경문왕(景文王)의 부왕(父王) 파진찬(波珍?) 시중(侍中) 계명(啓明) 추봉(追封) 의공왕(義恭王)의 위 계명(啓明)의 명(明)자를 피휘(避諱)하기 위하여 명자(明字)를 결획(缺劃)하고 있다.
이 내용은 동화사적비명병서(桐華寺跡碑銘幷序)에,
景文王三年癸未自朝家 又安七粒於此 其文曰夫聖敎所設益多端 殄滅業障 廣博利物者 無越於建塔禮懺 所以欲 崇蓮臺之於業於 桐藪願堂之前 創立石塔 冀效童子聚沙之義云
이란 문구가 잇다. 이것은 민애대왕조석탑기문(閔哀大王造石塔記文)과 내용이 같다. 이것은 석탑의 개탑(開塔) 수리시에 이 명문(銘文)이 일려졌기 때문에 그와 같은 내용이 되었다고 보겠다.
이 기록의 내용은 경문왕(景文王)이 민애대왕(閔哀大王)의 복업(福業)을 추숭(追崇)하기 위하여 석탑을 만든 기문이며, 성스런 불교가 설(說)한 이익이 많아 비록 84,000문(門)이 있지마는 업장(業障)을 없애고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은 탑(塔)을 세우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민애대왕조석탑기문(閔哀大王造石塔記文)을 지은 이는 한림사간(翰林沙干) 이관(伊觀)이며 전지대덕(專知大德) 심지(心智)다. 이 심지(心智)는 동화사창건조사(桐華寺創建祖師) 심지(心地) 그 사람인 듯하다. 심지(心地)가 헌덕왕(憲德王)의 왕자이며 헌덕왕(憲德王;809~825년), 다음에 흥덕왕(興德王), 희강왕(僖康王), 민애왕(閔哀王), 신무왕(神武王), 문성왕(文聖王), 헌안왕(憲安王) 다음에 경문왕(景文王;861~874년)대까지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신라시대에 인명표기에 있어서 동음이자(同音異字)를 다양하게 사용한 예는 비일비재한 것이다. 심지(心地)는 심지(心智)가 동수(桐藪)를 성간자(聖簡子) 봉안의 사원으로 창건하고 신라 왕실의 원당(願堂) 사원으로 만들고 또 민애대왕(閔哀大王)의 원당(願堂)으로 만들 때 이 절의 주지(住持)는 장본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헌덕왕(憲德王)의 왕자인 심지(心地)는 민애왕(閔哀王)과 종형제(從兄弟)였다. 민애왕(閔哀王) 김명(金明)의 아버지 충공(忠恭)이 바로 헌덕왕의 아우였다.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心地)가 주지로 있던 동수원당(桐藪願堂)은 말할 것도 없이 심지(心地)의 아버지 헌덕왕가(憲德王家)의 원당(願堂)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종형제(從兄弟)인 민애왕(閔哀王)의 명복을 비는 탑(塔)을 동수원당(桐藪願堂)에 세움은 당연하다. 즉 그들 왕가의 원당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8)元聖王 ?? 仁謙 ?? (39)昭聖王(俊邕) ?? (40)哀莊王(淸明)
?? ?? (41)憲德王(彦昇) ?? 心地王師
?? ?? (42)興德王(景徵)
?? ?? 忠恭(葛文王) ?? (43)閔哀王(明)
?? 義英
?? 禮英 ?? 均貞 ?? (45)神武王(祐徵) ?? (46)文聖王
?? ?? (47)憲安王(誼靖)
?? 憲貞 ?? (43)僖康王(悌隆) ?? 啓明 ?? (47)景文王(膺廉)
동수(桐藪)는 원성왕(元聖王)의 태자(太子)인 인겸가계(仁謙家系), 즉 소성왕(昭聖王), 애장왕(哀莊王), 헌덕왕(憲德王), 흥덕왕(興德王), 충공(忠恭), 민애왕(閔哀王)의 명복을 비는 원당(願堂)이었던 듯하다. 경주창림사무구정탑원기(慶州昌林寺無垢淨塔願記)에 의하면, 이 탑은 대중(大中) 9년(855년) 문성왕(文聖王) 7년에 건립한 것이다. 첫머리에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라 되어 있다. 그리고 이 탑을 세우는데 관계한 자의 이름을 말미(末尾)에
봉교선수조탑사종제(奉敎宣修造塔使從弟) 사지행웅주(舍知行熊州) 기량현령(祁梁縣令) 김열(金銳) |
라는 전지수도승(專知修造僧)의 이름과 전지수조관세택대나말(專知修造官洗宅大奈末)과 김양박(金梁博)의 이름에서 전지(專知)라는 소임이 보인다. 이것은 탑을 건립하는 사무를 책임진 자를 말하는 것 같다.
동수원당(桐藪願堂) 삼층석탑(三層石塔)의 사리장치에서는 금동사방불함(金銅四方佛函)이 함께 도굴되었다. 사방의 금동판에는 불보살(佛菩薩)이 조각되어 있다. 이는 금강계(金剛界) 사방불(四方佛)의 배치이다.
① 북방(北方) 마가비로자나불좌상(摩訶毘盧遮那佛坐像)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쓴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연화합좌(蓮花合坐)에 앉아 있으며, 좌우에 보처보살이 합장입시(合掌立侍)해 있는 상이다. 상(像)이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보통 불(佛)은 보관(寶冠)을 쓰지 않고 장신구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신라인은 비로자나불에 보관을 씌웠던 것을 알 수 있다. 몸엔 통견법의(通絹法衣)을 입고 있다.
② 서방(西方) 무량수여래좌상(無量壽如來坐像)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주불(主佛)인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阿彌陀如來)가 팔각태좌(八角台座) 위에 합장인(合掌印)을 하고 앉았다. 법의(法衣)는 통견의(通絹衣)며 관음보살(觀音菩薩)ㆍ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협시보살 삼존불(三尊佛)이다.
③ 남방(南方) 보생여래좌상(寶生如來坐像)
연화좌(蓮華座) 위에 본존(本尊) 보생불(寶生佛)이 오른 손을 들어오지(五指)를 모으고 왼손을 배꼽 밑에서 작은 뚜껑이 있는 동근 합(盒)을 들었다. 협시보살은 본존(本尊)을 향하여 합장하여 서있다.
④ 동방(東方) 아축불좌상(阿?佛坐像)
주존(主尊)은 우견편단(右絹遍袒)의 법의(法衣)를 입고 아축불(阿?佛)의 파마인(破魔印)을 하고 앉았다.
이와 같은 민애대왕(閔哀大王)의 석탑은 지금 비로암(毘盧庵)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석조비로차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을 모신 비로전(毘盧殿) 앞뜰에 있다.
(3) 동화사(桐華寺) 금당암(金堂庵) 서탑(西塔) 사리장치(舍利裝置)
동화사(桐華寺) 금당암(金堂庵) 앞뜰에는 동서(東西)애 두기의 석탑(石塔)이 있다. 이 두기의 석탑을 사리탑(舍利塔)이라 칭한다. 이 두 탑은 본래 두 탑을 그 자리에 세운 것은 아니다. 다른 곳으로부터 옮겨 세운 것이다. 그중에서 서탑(西塔)은 1957년에 이홍식(李弘植), 전형필(全瀅弼) 씨 등에 의하여 해체 수리작업을 하였다. 이때 그 탑으로부터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나오게 되었다. 백지(白紙) 4장을 덮은 밑에 송판 2장을 덮었고, 그 밑에 다시 백지(白紙)를 덮은 사리장치가 나왔다. 중앙에 사리함(舍利函)을 장치하고 그 주위에 99개의 녹색(綠色) 석(石)으로 조각된 다층석탑(多層石塔)을 주위에 넣어 세웠다. 사리합(舍利盒)은 홍색(紅色)ㆍ감색(紺色)ㆍ황색(黃色)의 연화문(蓮花文)을 찍은 비단으로 싸여있었다. 이 놋쇠 장치 안에서 사리가 든 은제(銀製) 장은 동근 통의 탑기(塔記) 두루마리에 싸여 중앙에 세워져 있었다. 탑중수기(塔重修記)는 다음과 같다.
○ 西塔重修記(白紙 두루마리)
○ 歲在丙辰孟夏 比丘玄(口+?) 王命越燕都次年 丁巳三月得住玆 寺越戊午年三月 奉御香下山次年己未三月到通度寺燒香祝乞得 舍利五枚還山四月設大會焉 是年八月十四日 使隨院僧起役 壤而見之塔中無安 舍利至第五日朝奉持何者 舍利五枚置于 無量壽殿而徒 弟及役夫僧許多人念 釋迦六七百聲懇禱至得分身二十枚雖曰末運 佛法靈驗有如是也猶自慶哉至翌日安于此塔
大元廷祐六年八月十九日 高麗國桐華寺重修石塔
同願人名目
住持 淸悟妙源
大師 玄(口+?)
鎭江 資福寺有
大師 宏贊
靑林寺住持
大德宏祐
入室大德閑默
通知中德天惠
別知中德天惠
別色中德戒淸
中德戒明中忍
大選眞用
作者 老然 自心 正戒妙 明?守 淸慧 妙精
作者 徐最 親侍 定洪 紅蓮 水金
三綱 都監仁悟 都別監戒環 副都監允如
官屬 一慈 一之 忍全 洪智 益喜 ?典 方大 金大 史大一
大典大香于一
上請諭宋信
副請諭之明 于松
○ 嘉靖二十三年甲辰孟夏初六日始仲夏十二日畢役
夫石塔造成者其 於初志鑿地骨之 精而琢之磨之以 合規而成者以久遠 之計然創建年深歲 久而傾危似顚欲改 而不改者以財鳩之 難矣何幸智祖比丘如于鳩材而其時 無量壽殿階築破落
故兩塔重新焉 指揮 思? 擧禪
助力 信珠 供養主 義完 忠慧
化主 智祖 施主 義岑 戒宗 義寬 義元 丁允山 兩主 千允山 兩主 千允石 兩主
玉心
○ 歲在咸豊壬子孟夏重修錄
施主秩
大施主比丘 敬
濟堂正基
大施主比丘 慈月
堂武謙
漆谷 柳敏祚 大丘 秋尙祐 慧運堂幼 ? 快軒 兩運堂晩慧 退隱堂藏禪 昌原 馬湖韓氏
東萊 淸信女張氏 淸信女朴氏日樣花 綠化所
證明布雲堂閏聚 都監義月堂大順 化士兩運堂晩慧 別座退隱堂藏禪 外都監前僧通就定
誦祝樂菴棠性悟 左右片將賢午 ?政
供養主 永植 有喜 石手帙
都片手兩運堂 晩慧 李自斤連 金興伊 朴宗湜 郭性雲 冶匠 金白蓮 本房錄
祖室廣日堂寬誠 別堂義月堂大順 泗岳堂紋世 禪月堂晩成 慧運堂石? 樂菴堂性悟 千玉
慧寬 德順
佛尊善刹 戒喆 元信 覺于 體閑
立僧 志洽 斗如 定初 寬有 杜步 敬善 宇善 明彦 俊覺 應珏 德化 竺全 再喜 妙轉
致彦 奉侃 尙刻 碩文 碧俊 碩津 幸文 富演
處士 快演
負木 鄭慧文
渾山會衆三 百餘名
○ 이 석탑중수기(石塔重修記)는 충숙왕(忠肅王) 3년(1316년) 병진(丙辰) 맹하(孟夏;5월)에 비구(比丘) 현(玄(口+?)이 왕명을 받들어 원나라 수도 연도(燕都)에 갔다가 돌아와 충숙왕(忠肅王) 4년(1317년) 3월에 동화사에 주석(駐錫)하게 되었다가 이듬해 충숙왕(忠肅王) 5년 무오(戊午) 3월에 어향(御香)을 받들고 하산하여 이듬해 충숙왕(忠肅王) 6년 기미(己未)에 이르러 향 피워 향축(香祝)을 올리고 사리(舍利) 5매(枚)를 얻어서 공산(公山) 동화사(桐華寺)에 돌아와 4월에 대회(大會)를 열었다.
충숙왕(忠肅王) 6년 8월 14일에 수원승(隨院僧)을 동원, 공사를 시작하여 탑을 헐어서 보니 탑 중에 봉안한 사리(舍利)가 없었다. 공사를 시작한 지 닷새 되는 날 아침에 통도사에서 분양받아 온 사리(舍利) 5매(枚)를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하여 두고 도제(徒弟)와 역부승(役夫僧)들이 석가모니불을 염불함이 67백성(百聲)이 되도록 많이 염불하고 간절히 기도드렸더니 사리(舍利) 분신(分身) 20매(枚)를 얻게 되었다. 비록 말운(末運)일지라도 불법의 영험이 이와 같음을 스스로 경축하고 이튿날에 이 사리를 이 탑 안에 안장하였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끝에 대원정우(大元廷祐) 6년 8월 19일 고려국동화사중수석탑(高麗國桐華寺重修石塔) 동원임명목(同願人名目)에 주지(住持) 청오묘원(淸悟妙源), 대사(大師) 현玄(口+?)을 위시하여 이 역사에 관계한 자들의 이름을 나열해 놓았다.
○ 조선조에 들어와서 다시 가정(嘉靖) 23년 갑진(甲辰)<중종(中宗) 39년 1544년> 맹하(孟夏;5월) 초6일에 중수를 시작하여 중하(仲夏;6월) 12일에 필역(畢役)한 사실을 기록하고 중수한 사연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대저 석탑을 조성함에 있어서 그 첫 뜻은 땅을 뚫고 뼈를 묻는데 있다. 이것을 정교롭게 하여 돌을 다듬고 갈아 법에 맞추어 이룩하는 것은 오래도록 보존코자하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창건한 해가 깊고 오래되니 탑이 기울어져 위태롭게 되고 넘어질 지경이 되었다. 이 탑을 개수코자 했으나 고치지 못하였음은 비용을 장만키가 어려운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지조비구(智祖比丘)가 비용을 장만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의 계축(階築)도 파락(破落)했기 때문에 양탑(兩塔)과 함께 중신(重新)했도다.
○ 또 한 차례의 중수는 철종(哲宗) 3년(1852년) 임자(壬子)에 이루어 졌는데 중수시(重修記)인 「세재함풍임자맹하중수록(歲在咸豊壬子孟夏重修錄)」에는 기록이나 중수의 발원문이 없고 중수공사에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만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다.
(4) 동화사(桐華寺) 금당암(金堂庵) 동탑지(東塔誌)
1966년 가을 도굴꾼에 의하여 동탑(東塔)의 사리장치가 도굴되어 납석판(蠟石版)에 음각(陰刻)된 2매(枚)의 탑지(塔誌)가 금동외합(金銅外盒), 금동중합(金銅中盒), 은제내함(銀製內函)과 소석탑(小石塔) 다수(多數)와 함께 발굴되었다. 이를 수습하여 1969년 개탑환안시(開塔還安時) 제1탑신의 방형사리공내(方形舍利孔內)에 제3의 목판지명(木板誌銘)이 소탑(小塔)과 함께 잔존하고 있는 것을 발견 조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동탑(東塔)의 수리내역이 밝혀지게 되었다.
○ 桐華寺金堂庵東塔誌
[第一誌石]<세로 12.9㎝, 가로 9㎝, 두께 1.7㎝>
若夫三層石塔者從迦籃治成到
(在?)
於乾符二秊乙未九月任於講堂
南然而於金堂下建新塔已不獲已
故塔傳在於堂上大德三剛學生
助敎?於佛院從上破塔於金堂石有
舍利銅開甁知數一百八十一有色 (以上前面)
似積量過米碩德歎小漸
多衆人悅眼見舍利此中一軀在下
塔百餘有於斯
時在 道印大德泰大德
聖迦大德僧憬大德茹大德
開天大德令元大德眞藏大德卷大德 (以上後面)
上坐聖一法師 貞坐洪法師 (向右 側面)
前唯乃宗觀法師 解達法師 (向左 側面)
自? (上面 墨書)
嘉靖二十三年甲辰重修 (下面 墨書)
[第二誌石]
大丘桐華寺東塔記
是塔也歷難歷風雨層封傾成比丘道
修大馹等發心啓塔有舍利千餘枚乃
世尊三昧火中所出考古初封講堂
南至乾符二年乙未移封金堂上嘉
靖二十三年甲辰重修乾隆五十九年 (以上前面)
甲寅重修以銀盒盛之噫佛後三
千七百餘年而緇素同瞻眞迹共登
(?)
佛化也無疑矣 四月日訂弟子影波
聖奎謹誌化主道修比丘修塔都監
大馹 開敏 維勸 良工有坦萬寬
勸旿書 (以上後面)
[第三木製誌板]
大丘桐華寺東塔記
塔也往跡載於前記而今則大淸光
緖二十三年漢陽開國五百五年改國
?大韓開年光武歲壬寅重修是
誰之力爰有大師厥?錫柱一言先唱
泰羲次應渾山轉同雷不可破於是 (以上 前面)
乎召匠以釘之荷卷以鳩之物若天來 (以上 側面)
功苦神成層?寶級淸蓮湧出水
面重?慈容皎月團圓半空噫化
佛?于西天眞身留於東土使末葉
衆生耳之目之仗此勝緣俱成正覺
孟春證弟子在允誌 都監泰
羲別座在浩 化主錫柱 證弟子 (以上 後面)
佐彦書 (以上 側面)
○ 동화사금당암동탑지(桐華寺金堂庵東塔誌)
[제1 지석] 무릇 3층 석탑은 가람(伽藍)이 완성될 때부터 건부(乾符) 2년 9월까지 강당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금당(金堂)아래에 새로운 탑이 조성되자 부득이하게 탑을 강당 위로 옮겼다. 대덕(大德), 삼강(三剛)과 학생 조교 등이 불원(佛院)을 재촉하여 금당에서 탑을 위쪽에서부터 부서뜨리니 돌 속에 사리를 담은 구리상자가 있었다. 병을 열어 보니 1백8십1▨▨▨색이 있어(이상 전면) 반딧불이 겹쳐져 있는 듯하고, 양은 ▨▨▨가 넘었으며, 덕(德)이 높은 승려들이 ▨▨▨▨을 찬탄하였으며, 점차 많은 대중들이 기뻐하며 눈으로 사리를 들여다보았다. 이중에 일구(一軀)는 아래 탑에, 백여 개는 여기에 있었다. 이때 도인대덕(道印大德)?▨▨▨태대덕(▨▨▨泰大德)?성가대덕(聖迦大德)?승경대덕(僧憬大德)?▨▨▨여대덕(▨▨▨茹大德)?개천대덕(開天大德)?영원대덕(令元大德)?진장대덕(眞藏大德)?▨▨▨권대덕(▨▨▨卷大德) (이상 후면) 상좌(上座) 성일법사(聖一法師)?정좌(貞座) 홍▨▨▨법사(洪▨▨▨法師) 등이 있었다. (오른 측면) 앞은 오직 바로 종관법사(宗觀法師)와 해달법사(海達法師) (왼쪽 측면) [제이지석(第二誌石)] 갑인(甲寅)에 중수되어 은합(銀盒)에다 사리를 담았다. 아! 불멸(佛滅) 후 3천 7백 여 년, 승려와 속인[緇素]이 같이 (부처님의) 참된 자취를 우러러보며 함께 부처님의 열반(佛化)에 오르노라. 4월(月) 일(日) 바로잡아 제자 영파(影波), 성규(聖奎)가 삼가 기록함. 화주(化主) 도수 비구. 수탑도감(修塔都監) 대일 개민(開敏) 유권(維勸). 양공(良工) 유탄(有坦) 만관(萬寬). 권오(勸旿)가 쓰다. (이상 뒷면) 탑의 이전 행적은 앞의 기록에 실어놓았다. 지금은 대청(大淸) 광서(光緖) 23년 한양(漢陽) 개국 5백5년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친 임인(壬寅) 년에 중수하니 이것이 누구의 힘인가. 이에 어떤 대사(大師)가 그 지팡이를 내리치며 큰소리로 선창하니 태희(泰羲)가 그에 부응하자 온 산이 점차로 함께 진동하였지만 깨트릴 수가 없었다. 이에 (이상 앞면) 장인(匠人)을 불러 정으로 쪼아보았지만, 정성이 쌓이고 모아진 것이라 탑이 꼭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았으며, 노력과 수고로 신성하게 이루어져 그 층▨(層▨)이 보배로 왔다. 또 청련화(淸蓮花)가 솟아나 수면에 겹겹이 ▨니, 자태와 용모가 하얀 달과 같고 둥글어 반은 빈 듯 하도다. 아! 化佛은 서천(西天)에 계시고 진신(眞身)은 동토(東土)에 계시는 구나. 말기 중생으로 하여금 귀가되고 눈이 되도다. 이 수승(殊勝)한 연(緣)에 의지하여 정각(正覺)을 이루도다.【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
기문(記文)의 내용은,
삼층석탑이 이 가람(절)의 창건 시에 이루어졌다. 건부(乾符) 2년 헌강왕(憲康王) 2년(875년) 을미(乙未) 9월에 강당(講堂) 남쪽에 있던 탑(塔)을 금당하(金堂下)에 새로 탑을 세웠기 때문에 부득이 대덕(大德) 삼강(三剛)이 금당(金堂) 위로 옮겼다.
탑(塔)을 이건(移建)할 때 사리장치(舍利裝置) 동함(銅函) 안의 병(甁)에서 사리가 나온 것을 모두 보고 다시 장치했다. 그 후 다시 탑(塔)이 병란(兵亂)과 풍우(風雨)를 겪는 동안에 기울어지니 가정(嘉靖) 23년 중종(中宗) 39년(1544년) 갑진(甲辰)에 중수하고 건륭(乾隆) 59년 정조(正祖) 18년(1794년) 갑인(甲寅)에 중수하여 천여 매(千餘枚)의 사리(舍利)를 은합(銀盒)에 담았다. 이때 관계한 사람이 대일(大馹), 영파(影波) 등이었다. 다시 1902년(光武 6년) 광서(光緖) 28년에 다시 중수했다는 내용이다.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의 달성군팔공산동화사금당탑봉안세존사리조(達成郡八公山桐華寺金堂塔奉安世尊舍利條)에 방산거사(舫山居士) 허동(許董)이 찬(撰)한 「금당탑기(金堂塔記)」가 실려 있다.
本寺奉安釋迦世尊舍利 乃 梁大淸己巳 遺使沈瑚於新羅 送佛舍利一函 時卽眞興王卽位之十年 王謂有綠 剃髮爲僧 自號法雲 其孫眞平王卽位之四年壬寅 分安舍利於刹 而獨本寺所安者 一千二百餘顆仍爲福國之願堂 自唐咸通癸未景文大王奉爲閔哀大王 又安舍利七粒於本寺創立石塔 憲康大王元年乙未 卽唐乾符二年 釋三剛移塔于金堂以奉安焉 |
라는 기문(記文)은 위의 양탑(兩塔)의 사리봉안(舍利奉安)과 중수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동화사에 봉안했던 석가여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는 유명했던 것이니 『고려사(高麗史)』에 우왕(禑王) 원년(元年;1375년) 을묘(乙卯)에 동화사에 안장(安藏)된 석가불골(釋迦佛骨)을 신효사(神孝寺)에 가져다가 불사(佛事)했다는 기록이 실린 것을 볼 때 매우 유명했던 듯하다. 동화사의 사리는 양무제(梁武帝)가 신라에 보내준 불사리(佛舍利) 일함(一函)을 분안(分安)해 준 것을 12,00여과(餘顆)나 봉안했으며, 그 후 충숙왕(忠肅王) 3년에 현(玄(口+?)이 통도사(通度寺)에 가서 사리(舍利) 5매(枚)를 얻어 가지고 와서 동화사에 봉안했다 한다. 이 5매(枚)의 사리는 분신(分身)하여 20매(枚)가 되어 영험을 나타내 탑 안에 봉안했다. 통도사(通度寺)의 사리(舍利)는 『삼국유사(三國遺事)』권3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國史云 眞興王大淸三年己巳 梁使沈湖送舍利若干粒 善德王代貞觀十七年癸卯 慈藏法師所將佛頭骨 佛牙 佛舍利百粒 佛所著緋羅金點袈裟一領 其舍利分爲三 一分在皇龍寺 一分在太和塔 一分幷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 壇有二級 上級之中 安石蓋如覆? |
이라는 글에서 사리(舍利) 장래(將來)의 시말(始末)을 알 수 있고, 100립(粒)의 사리를 삼분(三分)하여 봉안했다 한다. 통도사(通度寺) 금강계단(金剛戒壇)의 사리를 고종(高宗) 22년 몽고난 때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조지(朝旨)를 받들고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이를 발굴하여 보았더니 소석함(小石函) 속에 들어있는 유리통(琉璃筒) 속에 사리가 단(單) 4매(枚) 밖에 없었다. 이를 『삼국유사(三國遺事)』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서,
古記稱百枚分藏三處 今唯四爾 旣隱現隨人多小 不足怪也 |
라 했다. 원종(元宗) 5년에 원(元)나라 사신이 와서 본국(本國) 사신(使臣)과 사방의 승려들이 다투어 이 사리 석함을 열고 첨례(瞻禮)했다 한다. 이를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眞身四枚外 變身舍利 碎如砂礫 現於?外 而異香郁烈 彌日不歇者 比比有之 此末季一方之奇事也 진신(眞身)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變身) 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셔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상한 향기를 강하게 풍겨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이따금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인 것이다. |
라 했다. 사리는 분신(分身), 변신(變身)하여 수시(隋時)로 다과(多寡)하는 모양이다. 1336년 충숙왕(忠肅王) 복위 5년 동화사 주지로서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된 보자국존(普慈國尊) 홍진(弘眞)이 통도사에서 舍利 몇과를 걸득(乞得)하여 좌우(左右)에 두었더니 분신(分身)이 많아 걸득(乞得)하는 자에게 수시로 나누어 주었으나 수는 항상 줄지 않았다 한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에 의하면, 우왕(禑王) 5년(1379년) 홍무(洪武) 12년 기미(己未) 8월 28일에 남산종(南山宗) 통도사 주지 원통무애변지대사(圓通無?辯智大師) 사문(沙門) 월송(月松)이 왜구(倭寇)를 피하여 통도사에서 소장하고 있던 사리(舍利)와 불골(佛骨)을 궁중에 옮겨 치경첨례(致敬瞻禮)하였다. 송림사(松林寺)에서 한때 봉안할 때 대중이 운집하여 사리분신(舍利分身)을 기도하여 많은 분신(分身)을 나누어 주었다 한다.
이와 같이 사리분신설(舍利分身說)에 의하여 이 동화사사리탑(桐華寺舍利塔)에 분신(分身)했다 한다. 1967년 서 탑(西塔) 수리시에 발견된 사리는 염주로 썼던 구멍 뚫린 수정(水晶) 일과(一顆)였다. 대개의 사리가 수정(水晶), 마노(瑪瑙), 진주(眞珠), 옥(玉)과 같은 보옥(寶玉)이다. 이 사리 분신(分身)은 동양(東洋) 삼국(三國) 중에서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설화이다.
? 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 洪武十二年己未秋八月?又四日。南山宗通度寺住持圓通無?辯智大師沙門臣月松。奉其寺歷代所藏慈藏入中國所得釋迦如來頂骨一。舍利四。毗羅金點袈裟一。菩提樹菜若干。至京謁門下評理李得芬曰。月松自歲乙卯。蒙上恩住是寺。歲丁巳四月。倭賊來。其意欲得舍利也。?之深。又恐其掘發也。負之而走。今年閏五月十五日。賊又來。又負之登寺之後岡。?榛莽聞賊語曰。住持安在。舍利安在。?掠寺奴。鞫之急。會天黑雨。又不止。無追者。踰山至?陽。明日。遇寺奴持吾馬。相持泣。欲還賊未退。適新住持將至。无所安?。遂奉以來。李公有微恙麾客。聞舍利至。躍然起曰。舍利至吾家乎。慶幸之極。身已平復矣。將入白于內。會張氏之難作。不果者一月。贊成事臣睦仁吉,商議臣洪永通啓于上前。太后,謹妃皆致敬瞻禮。而太后又施銀盂寶珠。命內侍參官朴乙生奉安于松林寺。李公重修是寺。設落成會故也。國中檀越。無問貴賤智愚奔波。禱舍利分身。李公得三枚。永昌君瑜得三枚。尹侍中桓得十五枚。檜城君黃裳之夫人趙氏得三十餘枚。天磨山諸衲子得三枚。聖居山諸衲子得四枚。黃檜城親得一枚。月松適出檀越。來乞舍利而去。月松不盡知也。明年六月十九日。李公來語臣穡曰。往者在江南。牢獄?楚間。願得生還。親禮本國名山。通度實在目中。及歸。玄陵特降香。命得芬躬詣各處行禮。至通度乞舍利。得六枚。得芬於舍利。謂之無緣不可也。舍利之在通度也。自新羅善德大王朝。入國家以來又將五百年。未嘗一至松京也。主上殿下臨御之初。臣等備員之際。月松師奉舍利而至。其非偶然也明矣。得芬告于上。上曰。其令領藝文臣穡具書之。得芬是以來。臣穡從月松師徵其事。繼書李公語。題其目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是月?一日。記。【이색(李穡)의 목은고(牧隱藁)】 ? 양주(梁州) 통도사(通度寺)의 석가여래(釋迦如來) 사리(舍利)에 대한 기문 홍무(洪武) 12년(1379, 우왕5)인 기미년 가을 8월 24일에, 남산종(南山宗 계율종(戒律宗)) 통도사 주지(住持)인 원통무애변지 대사(圓通無?辯智大師) 사문(沙門) 신(臣) 월송(月松)이, 그 사찰에서 대대로 소장해 온 바, 자장 율사(慈藏律師)가 중국에 들어가서 얻어 온 석가여래의 정골(頂骨) 하나와 사리(舍利) 넷, 비라 석굴(毘羅石窟)의 금박이 가사(袈裟) 하나와 보리수(菩提樹) 잎사귀에 쓴 약간의 불경(佛經) 등을 받들어 모시고 서울에 왔다. 그러고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득분(李得芬)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제가 을묘년(1375, 우왕1)부터 상의 은혜를 입고 이 절의 주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사년(1375, 우왕3) 4월에 왜적이 이곳에 쳐들어왔는데, 그 목적이 사리를 얻는 데 있었으므로, 깊이 움을 파고 숨겼다가 또 파내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등에 지고 도망쳤습니다. 금년 윤5월 15일에 왜적이 또 쳐들어왔으므로 다시 등에 지고 절 뒷산으로 올라가 피신하였는데, 덤불 사이에 몸을 숨기고서 왜적의 말을 들어 보니 ‘주지는 어디에 있으며, 사리는 어디에 있느냐?’고 급하게 다그쳐 물으면서 사노(寺奴)를 매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날이 깜깜한 데다 비가 또 멈추지 않아 뒤쫓아 오는 자가 없었으므로 산을 넘어 언양(彦陽)에 이르렀는데, 이튿날 내 말을 끌고 온 사노를 만나서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가려고 하니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또 마침 신임 주지가 오게 되었는데도 봉안(奉安)할 곳이 없기에, 마침내 받들어 모시고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이공(李公)이 그때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 손님을 사절하고 있다가, 사리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게 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리가 우리 집에 왔단 말인가.” 하고는, 너무도 반갑고 기쁜 나머지 아프던 몸도 완전히 나아버렸다. 그리하여 장차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상에게 아뢰려 하였는데, 마침 장씨(張氏)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 달 동안이나 그렇게 하지 못하다가, 찬성사(贊成事) 신(臣) 목인길(睦仁吉)이 신 홍영통(洪永通)과 상의하여 상 앞에서 아뢰게 되었다. 이에 태후(太后)와 근비(謹妃 우왕(禑王)의 비(妃) 이씨(李氏))가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바치며 예물을 넉넉하게 내렸는데. 그중에서도 태후는 또 은그릇과 보주(寶珠)를 희사하는 한편, 내시(內侍)인 참관(參官) 박을생(朴乙生)에게 명하여 송림사(松林寺)에 봉안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그 사찰을 이공이 중수(重修)하여 낙성 법회(落成法會)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나라 안의 단월(檀越 불교 신도)들이 귀천(貴賤)과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모두 물밀듯이 몰려와서 사리에 예배하고는 나누어 쪼개 가졌으니, 이공은 3매(枚)를 얻었고, 영창군(永昌君) 유(瑜)는 3매를 얻었고, 시중 윤환(尹桓)은 15매를 얻었고, 회성군(檜城君) 황상(黃裳)의 부인 조씨(趙氏)는 30여 매를 얻었고, 천마산(天磨山)의 납자(衲子 선승(禪僧))들은 3매를 얻었고, 성거산(聖居山)의 납자들은 4매를 얻었고, 회성군 황상의 부모는 1매를 얻었다. 이때 월송은 마침 밖에 나가 있었는데, 단월들이 몰려와서 사리를 구걸하고는 떠나갔기 때문에, 월송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듬해 6월 19일에 이공이 신(臣) 이색(李穡)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과거 강남(江南)에 있을 적에 감옥에서 매질이 난무하던 그 시기에 생환(生還)을 기원할 목적으로 내가 직접 본국의 명산(名山)을 예배하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통도사도 실로 나의 안중(眼中)에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돌아오고 나니 현릉(玄陵)께서 특별히 향(香)을 내리면서 나에게 직접 각처를 찾아다니며 예배를 행하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다시 통도사를 찾아가서 요청한 결과 사리 6매를 얻었으니, 나와 사리 사이에는 뭔가 인연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리가 통도사에 있게 된 것은 신라(新羅) 선덕대왕(善德大王)의 조정 때부터인데, 우리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오백 년이 되어 가는 지금에 이르도록 사리가 송경(松京)에 이른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주상 전하께서 이제 새로이 임어(臨御)하시고 우리 신하들이 관직에 몸을 담게 된 이 시기에, 월송 스님이 사리를 받들어 모시고 이르렀으니, 이 또한 분명히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께 보고를 드렸더니, 상께서 ‘예문(藝文)을 담당한 신하인 이색에게 갖추어 쓰도록 하라.’고 하셨으므로, 내가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다.” 하였다. 이에 신 이색이 월송 스님으로부터 그 일을 확인하고 나서 이공의 말을 잇따라 적어 넣은 뒤에, 그 제목을 ‘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라고 하고는, 이달 21일에 기록하였다.【한국고전번역원, 목은고(牧隱藁)】 |
□ 99기(基) 소탑(小塔)
서탑(西塔)에 사리장치를 에워싼 99개의 소탑(小塔)과 밑바닥의 다라니경문(多羅尼經文)은 유명하다. 동탑(東塔)에도 소탑(小塔)이 들어 있던 것은 또한 같다. 아쇼카왕의 84,000탑(塔) 건립은 유명한 이야기다. 조탑공덕(造塔功德)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多羅尼經)이 가장 유명하다.
若復有人欲得滿足六波羅蜜者 當作方壇先以牛糞塗後以淨土而覆其上 灑以湯滑淨塗拭五供養鉢置於壇上 寫前四種陀羅尼呪 各九十九本 手作小塔滿九十九 於此塔中各置一本 其相輪呪還置小塔 相輪?中 行列壇上以諸香華供養旋?七? 誦此陀羅尼曰 …<중략>… 若依此法而受持者 六波羅蜜 悉皆成滿是則同造九十九億百千那由他恒河沙等七?塔 已是則供養九十九億百千那由他如來應正等覺【大正新修大藏經 第19券 密部2所收 無垢淨光大多羅尼經】 |
이와 같이 다라니주(多羅尼呪) 각 99본(本)과 소탑만(小塔滿) 99개를 만들어 안치하면 99,000의 상륜박(相輪撲)을 세우고 99,000의 불사리(佛舍利)를 안치하여 99,000의 사리탑(舍利塔), 대보탑(大寶塔), 보리장탑(菩提場塔)을 세운 것으로 되어 수명이 증장(增長)하고 죄업이 소멸된다 한다. 일본도 나라조시대(奈良朝時代)에 효겸천황(孝謙天皇)이 백만소탑(百萬小塔)을 발원조립(發願造立)하여 십대사(十大寺)에 분식(分植)한 것은 유명하다. 99개의 소석탑(小石塔)은 전기(前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多羅尼經)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다.
(5) 동화사(桐華寺) 연혁(沿革)
(가) 동화사(桐華寺) 사적(寺蹟);사중유전(寺中留傳)
① 북제(北齊) 무제(武帝) 영명(永明) 11년(493년) 계유(癸酉) 신라(新羅) 소지왕(炤知王) 15년에 승(僧) 보조(普照)가 창건하여 이름을 유가사(瑜伽寺)라 했다.
② 대력(大曆) 7년 임자(壬子) 신라 혜공왕(惠恭王) 8년(772년) 심지왕사(心地王師)가 동림(桐林) 소정(小井)에 던진 성간자(聖簡子)를 안치하기 위하여 절을 지어 사호(寺號)를 개(改)하였다. 이를 재창(再創)이라 한다.
③ 대덕(大德) 2년(1298년) 무술(戊戌) 충렬왕(忠烈王) 24년 홍진국사(弘眞國師)가 3창하였다.
④ 선조(宣祖) 40년(1606년) 병오(丙午)에 송운대사(松雲大師) 사명당(四溟堂)이 임진전란(壬辰戰亂)으로 불 탄 절을 다시 창건하니 이를 4창이라 한다.
⑤ 숙종(肅宗) 3년(1677년) 정사(丁巳)에 승(僧) 상은(尙?)이 퇴락된 것을 중수하니 이를 5창이라 한다.
⑥ 영조(英祖) 1년(1725년) 을사(乙巳)에 승(僧) 석덕(碩德)이 6창했다.
(나) 동화사적비명병서(桐華寺蹟碑銘幷序)
① 신라(新羅) 소지왕(炤知王) 15년(493년) 계유(癸酉)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했다.
② 심지왕사(心地王師)가 간자(簡子)를 892개를 가져와 재창(再創)하여 유가사(瑜伽寺)를 동화사(桐華寺)라 고쳤다.
③ 경순왕(敬順王) 7년 갑오(甲午)<경순왕 7년은 계사(癸巳)이다. 갑오(甲午)는 8년이다> 933년에 영조선사(靈照禪師)가 3창했다. 이보다 앞서 고려 태조(太祖) 동수대전시(桐藪大戰時) 사리(舍利)가 방광(放光)하고 영조선사를 만나서 화를 면하여 절을 크게 도와주었다.
④ 고려 명종(明宗) 20년(1190년) 경술(庚戌)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4창했다.
⑤ 고려 충렬왕(忠烈王) 24년(1298년) 무술(戊戌)에 홍진국사(弘眞國師)가 5창했다.
⑥ 조선 선조(宣祖) 40년(1605년) 병오(丙午)<39년은 을사(乙巳), 40년은 병오(丙午)>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6창했다. 송운대사(松雲大師)가 해인사(海印寺)에서 도제(徒弟), 학인(學仁), 사승(寺僧), 천령(天靈), 해진(海眞), 옥보(玉寶) 등을 보내어 중창하다. 6창이다.
⑦ 조선 숙종(肅宗) 3년(1677년) 정사(丁巳)에 상은대사(尙?大師)가 7창하다.
⑧ 조선 영조(英祖) 8년(1732년) 임자(壬子)에 관허(冠虛), 운암(雲岩), 낙빈(洛濱), 청월 月) 등이 8창하다.<사적비(寺蹟碑)는 윤색이 가해졌다.>
동화사(桐華寺)는 신라(新羅)ㆍ고려(高麗)시대를 통하여 대가람이었으나 유가종(瑜伽宗)에 소속된 사찰로서 법상종(法相宗;瑜伽宗) 3대 사찰의 하나였다. 미륵불(彌勒佛)을 본존(本尊)으로 숭봉(崇奉)했다.
법상종(法相宗)은 유가종(瑜伽宗)ㆍ자은종(慈恩宗)ㆍ유식종(唯識宗)이라 한다. 자은사(慈恩寺)에서 현장(玄?;三藏法師)이 종지(宗旨)를 시강(始講)하였다. 그의 수제자 규기(窺基)와 해동육조(海東六祖)를 칭하여 팔조(八祖)라 한다. 해동육조(海東六祖)는 진표(眞表), 원효(元曉), 대현(大賢), 순경(順璟), 경여(憬與), 도징(道澄)을 칭한다. 현장(玄?)의 제자로 규기(窺基)에 대립되는 서명학파(西明學派)의 원측(圓測)과 승장(勝莊)이 대가였다.
진표(眞表)는 금산사(金山寺)에 장육미륵불상(丈六彌勒佛像)을 조성하여 이 종(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삼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이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서 제자 심지(心地)에게 간자(簡子)를 전하자 심지(心地)는 공산(公山) 동사(桐寺)에서 교법(敎法)을 홍화(弘化)하니 이것이 소위 유가종(瑜伽宗)의 3대 사찰이라 한다. 그 후 고려시대에 오면 문종(文宗) 때에 원주(原州) 법천사(法泉寺)의 지선국사(智先國師)가 나오고, 그의 문하에 속이산승통(俗離山僧統) 석규(釋窺)와 금산사(金山寺) 주지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이 나오고 소현(韶顯)의 문하에서 1천여인(餘人)이 나왔다.
그 후 13세기에 오면 유가종풍(瑜伽宗風)을 대진(大振)한 이대고승(二大高僧)이 출세(出世)하니 동화사의 홍진국사(弘眞國師)와 법주사의 혜정국존(慧靜國尊)이다. 이 두 대덕(大德)은 다 동화사의 주지로 있었으니 고려 말(高麗末)의 중심 사찰은 단연 동화사였다.
이 유가종(瑜伽宗)에서는 미륵불(彌勒佛)을 본존으로 숭봉(崇奉)한다. 금산사(金山寺)의 미륵전(彌勒展)과 법주사(法住寺)의 미륵불상(彌勒佛像)이 유명한데 오직 동화사(桐華寺)만이 미륵불(彌勒佛)이 없어졌다. 신라시대 동사(桐寺;桐藪)에 미륵전(彌勒殿)이 있었음은 팔공산(八公山)에서 발견된 『동수미륵당(桐藪彌勒堂)』의 기와 명문(銘文)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은 옛날의 찬란하던 역사와 전통이 이 시대에 와서 단절되었음을 의미한다. 매우 유감 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린 뒤에 광해군(光海君) 원년(1608년) 만력(萬曆) 36년 술신(戌申)에 절을 중건할 때 미륵전(彌勒展)을 화주(化主) 학인(學仁)이 중창하였으며, 영조(英祖) 원년(1725년)에 다시 중창했었다. 그 후에 사세(寺勢)가 기울어 중창시에 미륵전(彌勒展)을 중창치 못했다. 마땅히 동화사에 속리산 법주사에 버금가는 미륵불상(彌勒佛像)을 조성하여 옛 유가종(瑜伽宗) 대 가람의 전통에 복귀하여 옛날의 장엄한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동화사에 봉안한 석가(釋迦) 진신사리(眞身舍利)는 통도사의 사리와 함께 세상에 유명한 것으로서 국가적인 보호와 존숭을 받아 왔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우왕(禑王) 원년 9월에 왜구가 대구현(大丘縣)에 침략해 들어오자 동화사의 석가불골(釋迦佛骨)을 개경(開京)으로 옮겨 신효사(神孝寺)에 안치하여 불사를 열었다. 이는 왜구의 피해로부터 안전지대로의 소개(疏開)였다. 이만치 동화사의 석가(釋迦) 불골사리(佛骨舍利)는 유명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김관의(金寬毅)가 찬(撰)한 왕대종록(王代宗錄) 권2을 인용하여,
又按本朝文士金寬毅所撰王代宗錄二卷云 羅末 新羅大德釋? 獻太祖以表律師袈裟一領 戒簡百八十九枚 今與桐華寺所傳簡子 未詳同異 |
고 했다.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소위 계간자(戒簡子) 189매(枚)는 동화사(桐華寺) 소장(所藏)의 것이라고 보겠다. 태조가 받아보고 다시 동화사에 돌려주어 봉안케 했다고 보겠다. 동화사는 고려시대 유명한 계단(戒壇)의 절이었고 율(律)의 연수(淵藪)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정종(靖宗) 2년 5월의 제(制)에,
무릇 아들 넷이 있는 이들은 한 아들의 출가를 허(許)했다. 영통(靈通), 숭법(崇法), 보원(普願)이 동화사 계단(戒壇)에 있어 출가자에게 소업(所業)의 경률(經律)을 시험했다. |
는 기록에서 동화사는 고려시대 일급(一級)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종(神宗) 5년에 경주(慶州) 별초군(別抄軍)이 영천(永川)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아서 으르렁거리다가 경주 별초군이 난을 일으켜 운문사(雲門寺)의 적(賊)과 부인사(符仁寺)ㆍ동화사(桐華寺) 두 절의 승도(僧徒)를 유인, 가담시켜 영천성(永川城)을 공격했다. 이에 영천인(永川人) 이극인(李克仁)이 정예병(精銳兵)을 거느리고 서(西)에서 돌격해 나와 공격하여 경주 별초군을 격퇴함에 최충헌(崔忠獻)이 대관전(大觀殿)에 재상(宰相)과 제장(諸將)을 모아 의논하여 말하기를,
경주인(慶州人)이 불의(不義)를 자행(恣行)하더니 이제는 무리를 모아 이웃고을을 공벌(攻伐)하니 마땅히 병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벌해야 할 것이오.【고려사절요】 |
라 하고 전척후(全陟侯)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했다. 이때 부인사(符仁寺)ㆍ동화사(桐華寺) 등의 승병(僧兵)들은 반란에 가담하여 정부의 토벌을 받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승군총섭(僧軍總攝) 송운대사(松雲大師) 사명당(四溟堂)이 이 절에 승군사령부(僧軍司令部)을 차려 승군(僧軍)을 조련(造鍊)하고 승군(僧軍)을 지휘하여 공산성(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龍起山城)을 쌓았다 한다. 이때 승병을 지휘했던 송운대사(松雲大師)가 쓰던 영남도총섭(嶺南都總攝)의 동인(銅印)과 소라나팔이 전한다. 그리고 수릉향탄봉산수호총섭겸동화사승풍규정도승통(綏陵香炭封山守護總攝兼桐華寺僧風糾正都僧統)을 두었다.
동화사에는 임진왜란 때 왜병이 도적질하여 일본에 가져간 국보급의 진귀하고 영험있던 부처님 영정(影幀)이 있었다. 이를 일본에 갔던 사명대사(四溟大師)가 간곡히 반환을 요구했으나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와 사명대사조(四溟大師條)에 실려 있다.
즉, 팔공산(八公山)에 도승(道僧)이 주(住)하고 있어 명주 8필을 중국 연경(燕京)에서 사다가 이것을 한 폭으로 이어 장육금신(丈六金身)을 그려 영정(影幀)을 만들려고 팔도를 돌아다니며 불화가(佛畵家)를 구했으나 찾지 못했다. 이 화주승(化主僧)이 풍악(楓岳)의 수륙제(水陸齊)에 수천의 중과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찾았으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좌석 맨 끝에 몸이 깡마른 중이 자청하고 나오매 기뻐하여 같이 팔공산(八公山)으로 왔다. 이 중은 목욕재계를 하고 화주승(化主僧)에게 말하기를, 「이 일은 만 30일이 걸려야 이루어집니다. 나는 불전(佛殿)에 거처하며 몸을 숨기고 그림을 그릴 것이니 절대로 밖에서 엿보지 말아 달라. 벽의 사면을 모두 발라 밀폐하고 오직 밥 들여보내는 구멍 하나만 남기고는 사흘에 한 번씩 공양을 들여보내되, 절대로 안을 보지 말라」했다. 화주승은 그 말대로 했다. 스무 아흐렛날이 되었다. 화주승은 이제 다 그렸으니 하고 궁금하여 들여다보았다. 이에 놀란 화사(畵師)는 크게 노여워하여 붓을 던지고 일어서면서 「이제는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겠노라」하고 말을 마치자 노란 새 한 마리가 밥을 들여보내는 구멍으로 나와서 날라가 버렸다. 그리고 아무 기척도 없이 잠잠해졌다. 화주승은 이상하게 여겨 들어가 보니 불화(佛畵)는 다 그렸지만 다리 하나가 덜 완성되었고 거기에 새 발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그 후 동화사에서 그 불화(佛畵)를 걸어놓았더니 재해(災害), 질병(疾病)에 기도드리면 영험(靈驗)이 있었다.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동화사에서 수도하고 있었을 때 이 불화(佛畵)를 잘 알고 예배도 드렸다. 이 반환요구는 일본의 거절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각(殿閣)으로는 「팔공산동화사봉황문(八公山桐華寺鳳凰門)」이라 쓴 일주문(一柱門),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는 옹호문(擁護門), 봉서루(鳳棲樓), 대웅전(大雄殿), 심검당(尋劍堂), 강생원(降生院), 영산전(靈山殿), 산신각(山神閣),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금당암(金堂庵)에는 극락전(極樂殿)과 수마제전(須摩提殿)이 있고 금당(金堂)이 있다. 대웅전(大雄殿)의 삼존불(三尊佛)-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ㆍ석가여래(釋迦如來)ㆍ약사여래(藥師如來)는 영조(英祖) 4년(1728년)에 왕준(王峻)이 조성(造成)했으며, 탱화(幀畵)로는 신중탱(神衆幀)은 1887년에, 삼장탱(三藏幀)은 1728년에 만들었다. 괘불(掛佛)은 광해군(光海君) 12년(1620년)에 의현(義玄)이 그린 것을 숙종(肅宗) 14년(1688년)에 개화(改畵)했다.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는 영조(英祖) 6년(1730년)에 만들었고, 동범종(東梵鐘)은 철종(哲宗) 5년(1854년)에 만들었다. 극락전(極樂殿)의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은 인조(仁祖) 7년(1629년)에 조성했다. 수마제전(須摩提殿)의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은 동불(銅佛)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동화사 소장의 조사영정(祖師影幀)은 인악당(引嶽堂)ㆍ후묵당(嗅默堂)ㆍ능항당(楞巷堂)ㆍ죽항당(竹巷堂)ㆍ호월당(浩月堂)ㆍ명항당(明巷堂)ㆍ대봉당(大鳳堂)ㆍ서운당(西運堂)ㆍ현월(玄月堂)ㆍ용암당(龍岩堂)ㆍ자월당(慈月堂)ㆍ연월당(煙月堂) 등의 화상이 전한다.
○ 朝鮮佛敎禪敎兩宗第一首刹大本山慶尙北道達成郡公山面桐華寺跡碑銘幷序
自佛法東漸 邦國信奉 所以寺刹星羅於名勝地 而鍾磬相聞 桐華寺亦其一 而蓋古也 然隋時興替 若春?之尋謝 按極達尊宿創建於父岳南中麓 額以瑜伽 時卽新羅炤知王十五年癸酉也 按輿地勝覽 以此山稱父岳 亦以近國畿中央 謂之中岳 以自國設祭天壇於此 爲國重要山岳 故改稱公山 按東史 心地王師行跡 師得自彌勒菩薩傳來簡子中 八九二個於俗離山永深法師 而寶藏於此 至高麗睿宗 致內瞻敬 失九者一簡 王極未安 以自宋來佛牙代送 而本寺以彌勒遺訓中 八者新熏成佛種子 還奉於公山 思以?有瑞徵 爲記念而加八字於公山二字上 名八公山也 自始建經三百四十年 至興德王七年壬子 心地王師再創 按東史 心地王師行跡 師卽憲德王王子也 生而孝悌 天性沖睿 志學之年 落采從師 拳勤于道 寓止中岳 受具後遊方到伽倻山鳳棲寺 參希朗祖師 就俗離山東觀音寺 參永深法師 得彌勒上生經禮懺簡八九二個歸山岳神率二仙子迎至椒地 曰將擇地以安聖簡 請與三君卜之 與神等陟峰擲之 簡乃飄揚飛下林泉 遂於其地 構堂安之 今籤堂後小井是也 爾時天雨合歡梧桐華故 改瑜伽額桐華經一百二年 至敬順王七年甲午 靈照禪師三創 先是麗太祖與甄萱軍 大戰於桐藪下 隋舍利塔放光 會見禪師而免禍 感謝而至是 嚴修塔廟 宏殿宇廣禪師所居室 一人石在屬庵後王遇師之所 而一人指王言也 其古蹟可敬慕摩? 經二百五十六年 至麗明宗二十年庚戌 佛日普照國師四創 而越七年丁巳 國師甁鉢移住智異山無住庵 過三年轉移松廣寺云 經一百八年至忠烈王二十四年戊戌 弘眞國師五創 經三百八年朝鮮宣祖三十九年丙午 四溟大師六創 此則於壬辰之役 佛宇僧僚俱被? 而師在海印寺 遺道弟學仁與寺僧天靈海眞玉寶 告功者也 經七十年至肅宗三年丁巳 尙?大師七創 經五十五年至英祖八年壬子 冠虛雲岩洛濱晴月等師同心八創 此亦溯七年前乙巳 全舍當鬱攸之? 而四歸共榮者也 按釋尊舍利則 新羅眞興王十年己巳 自蕭梁帝遺使沈湖送舍利一函 王不勝感慶 遂剃髮爲僧 自號法雲 眞平王以法雲之孫 卽位之四年壬寅 自朝家又安七粒於此 其文曰 夫聖敎所設利益多端 殄減業障 廣博利物者 無越於建塔禮懺 所以欲崇蓮臺之業於桐藪願堂之前 創立石塔 冀?童子聚沙之義云 憲康王元年乙未 釋三剛移塔于金堂以奉焉 朝鮮中宗三十八年甲辰 宗親 解達重修之 肅宗元年乙卯印花道修復修之 哲宗四年壬子希雲兩運兩師繼葺之 近在辛丑 晦應師易其? 而治其缺 繼有普應師 金塔之鐵欄雪雲師雄殿之石階于前 有光有靈蹟 貴重品 佛舍利 佛牙 金剛杵 貝葉經 烏銅香爐 古銅香爐 象形香爐 浮圖碑石也 <口+竟>自有是寺 ?今一 千四百三十九年 益復昌大 可想如來敎闡揚時世 緇自奔趨之 如何雨日 現住持黃普應囑余日 當寺昔有寺蹟碑 煙磨於桑瀾劫風 只有殘紙微墨 亦不?然 若因循過了 前人之偉積 將無傳於世 使後人未免書契 未作前世界歎矣 是之爲懼 年來?搜於可考的史中 而詢謀僉同擬欲刻之石 君其無?勞神 余與黃君曾有同窓螢雪之誼 亦有緣於空門者也 義不可以無史眼辭故 隨?如右 銘曰 迦文悟道 作三界師 逗機說法 方便慈悲 衆生?苦 廣濟是期 光被大千 不仰其誰 公岳之南 開敞梵宮 創修碩德 次第鴻功 神祇擁護 禪敎宗通 法寶舍利 福世無窮 誠功歸依 利他利己 倍舊興旺 ?侍後 士 前績今謨 善無泯理 ?述刻石 以著厥美
附部分的
○ 靈山殿
光武壬寅八月劫水漂流矣 同乙巳化主月松性坡轄虛等師再建
○ 禪堂
擁正乙巳當火?至翌年丙午時僧統?勳指揮寺僧同力重建
○ 尋劒堂
大正癸丑住持金南坡化主黃普應再建
○ 金堂
憲宗戊戌化主退隱武益再建
○ 毘盧殿
宣祖辛卯瑞一化主創建
○ 浮圖庵
孝宗戊戌道悟化主創建 正宗庚戌春坡化主重修
○ 內院菴
仁祖丙寅惟贊化主創建 純祖丁亥霽月化主再建
○ 養眞庵
英宗癸亥無住禪師創建 光武戊戌雲坡化主重修
○ 念佛庵
新羅敬順王戊子靈照禪師創建 後朝鮮光海壬子惟贊 肅宗己卯勝下純祖癸亥義庵俱重修
○ 布敎堂
大正辛亥創建 在大邱府德山町 佛紀二千九百五十八年辛未三月下澣
藉堂居士 金鼎來 撰
肯石山人 金鎭萬 書
本寺土地面積 二十六萬四千六百六十五坪
山林面積 六百八町七反一畝二步六合
所屬末寺 八郡四十末寺
本末寺土地總面積 九十八萬七千三百十四坪三合五勺
本末寺山林總面積 三千二百十七町三反七畝六合七勺
住持 黃普應 監務 崔萬谷 監事 金雪雲 法務 尹海鵬 書記 李景宇 金慶善
山中老德秩
秋曉山 金星月 金寶月 鄭庸隱 朴秋月 李寶鏡 沈霽山 金月齊 禹瑞雲 金雪坡
李淸雲 林萬松 盧華峯 李百草 朴齊巖 趙大藕 金龍河 朱萬船 金龍鶴 楊華谷
劉桐隱 金亘坡 林善敏 金鏡波 金文燮 金寶雲 林在湖 李宇鏡 金大雲 金大巖
講師 權漢鏡
(6) 동화사(桐華寺) 소장(所藏) 성간자(聖簡子)
팔공산 동화사에 갈무리한 성간자(聖簡子)는 신라시대 불교 성보(聖寶) 중 가장 귀중한 것 중의 하나였다. 이 성간자(聖簡子)를 팔공산 동화사에 보장(保藏)한 것은 공산(公山)의 불교사상 가장 자랑스럽고 빛나는 것이었다. 이 성간자(聖簡子)의 내력을 살펴보겠다.
① 성간자(聖簡子)의 유래
성간자(聖簡子)는 신라 경덕왕대(景德王代)에 고승(高僧)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彌勒菩薩) 진신(眞身)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요,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고 성(姓)은 정씨(井氏)이다. 나이 12살에 금산수(金山藪;金山寺) 숭제법사(崇濟法師)의 강석하(講席下)에 나아가 불자가 되어 중이 되었다. 순[숭]제법사(順[崇]濟法師)는 당(唐)나라에 구법(求法)을 가서 정토교의(淨土敎義)를 대성한 고승 선도삼장(善道三藏)에게 현묘한 교의를 전수받고 귀국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하여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진신(眞身)에 감응(感應)하여 오계(五戒)를 받은 분이었다. 진표(眞表)는 스승으로부터 부지런히 정성껏 하면 1년이 지나지 않아 계(戒)를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과 『사미계법(沙彌戒法)』과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2권을 주며 이 계법(戒法)을 가지고 미륵(彌勒), 지장(地藏) 양성(兩聖) 앞에 나아가 간구(懇求)하고 참회하여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유전(流傳)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전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여 수도하고 변산(邊山), 선계산(仙溪山), 부사의암(不思義庵)에 주(住)하면서 삼업(三業)을 닦고 망신참(亡身懺)을 수행하여 미륵불(彌勒佛) 전에 계법(戒法)을 근구(勤求)하여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받지 못하여 7일 밤을 기약하고 오체(五體)를 바위에 던져 팔다리가 모두 부러지고 피가 바위에 비 오듯 하였다. 그러나 성응(聖應)이 없자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기약하여 두칠(14일)을 정성껏 수도했더니 밤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금석장(金錫杖)을 흔들고 와서 현신(現身)하고 가호(加護)하여 팔다리를 전과 같이 만들고 정계(淨戒)를 받게 되었다. 이때 대사의 나이 23살이요, 경덕왕(景德王) 3월 보름날 진시(辰時)였다.
지장보살이 가사(袈裟)와 법발(法鉢)을 주어 격려했다. 이에 진표(眞表)는 지장보살의 현신(現身) 감응(感應)을 받고자 영산사(靈山寺)에 들어가 비장한 각오로 정진 수도하였더니 드디어 3ㆍ7일(21일)이 되자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오는 것을 보았다. 드디어 미륵불(彌勒佛;慈氏菩薩)이 지장보살과 같이 감응(感應) 현신(現身)하였다. 자씨보살(慈氏菩薩)이 대사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장하구나.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戒)를 구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간구(懇求) 참회(懺悔)하는 구나」하고, 자장보살이 계본(戒本)을 수여하였고, 미륵보살이 점찰경(占察經)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주고 이르기를, 「그 간자 중에서 제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의 유(喩)함이요, 제9간자는 구계(具戒)을 더 얻은 것을 유(楡)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요 나머지는 모두 침담목(沈檀木)으로 모든 번뇌를 말한 것이니 그대는 이것으로써 법을 세상에 전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율법(律筏)로 삼아라」하였다. 대사가 교법(敎法)을 받고 금산사(金山寺)를 개창하고자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매 홀연히 용왕이 나와 옥가사(玉袈裟)를 바치고 팔만권속(八萬眷屬)을 거느린 채 그를 호위하여 금산수(金山藪;金山寺)에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절을 완공하였다. 또 미륵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구름을 타고 하강하여 사(師)와 함께 계법(戒法)을 받은 것에 감동되어 대사가 금당(金堂) 남벽(南壁)에 미륵보살이 하강하여 수계(受戒)하는 모양을 그리고 미륵불장육상(彌勒佛丈六像)을 조성하여 금당(金堂)에 봉안했다.
대사가 금산사(金山寺)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소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대사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탄 이가 이 소들이 어찌하여 화상(和尙)을 보고 우느냐 하고 화상(和尙)은 어디서 오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사가 말하기를,
나는 금산사(金山寺)의 진표(眞表)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邊山) 부사의방(不思義房)에 들어가 미륵(彌勒), 지장(地藏)의 양성(兩聖)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생(眞?)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서 오는 길인데,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戒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佛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꿇어앉아 우는 것이요. |
했다. 그 사람이 듣고 나서 말하기를, 「축생(畜生)도 이러한 신념이 있거늘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하리요」하고 곧 손으로 낫을 쥐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대사가 자비한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깎아주고 계(戒)를 받게 했다. 그리고 속리산에 가서 골짜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表)해두고 명주(溟洲)를 거쳐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발연수(鉢淵藪;寺)를 세우고 7년간 주(住)하다 나와 부사의방(不思義房)에 돌아와 진문대덕(眞門大德)의 방에 가서 거주하였다.
속리산 영심대덕(永深大德)과 융종대덕(融宗大德), 불타대덕(不陀大德) 등과 함께 율사(律師)를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찾아와서 「계법(戒法)을 구하오니 법문(法門)을 주소서」하고 간청함에 대사는 묵묵부답함에 세 사람이 복숭아나무 위로 올라가 거꾸로 떨어져 용맹(勇猛) 참회했다. 에에 대사가 감동하여 그들에게 교(敎)를 전하여 관정(灌頂)하고 드디어 가사(袈裟)와 바릿대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2권과 189생을 주고 미륵진생(彌勒眞?) 9자(者)와 8자(者)를 주며 경성(警誠)하기를,
아홉 번째 간자는 법(法)이요, 여덟째 간자는 새로 훈성(熏成)한 불종자(佛種子)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吉祥草)가 나는 곳이 있으니, 거기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의하여 널리 인간계(人間界)와 천상계(天上界)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 유포(流布)하라. |
하였다. 영심(永深)이 대사(大師)의 말을 따라 받들어 속리산에 들어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찾아 그곳에 절을 짓고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삼국유사(三國遺事)】
② 심지대사(心地大師) 전수(傳受) 성간자(聖簡子)
심지대사(心地大師)는 헌덕대왕(憲德大王)의 왕자로 금지옥엽(金枝玉葉)과 같은 존귀한 몸으로 천성이 효제(孝悌)하고 예지(叡智)가 있었다. 15살에 머리를 깍고 스승을 따라 불도(佛道)에 정진하였다. 중악(中岳;公山) 석굴에 살면서 수도하고 있었다. 이곳이 지금의 돌구무절(中岩庵)이다. 옛날 화랑의 성지로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수도하던 곳이다.
속리산 길상사(吉祥寺)의 영심대사(永深大師)가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아 증과법회(證果法會)를 개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찾아갔더니 벌써 기일이 지나 법회 참여를 거절당했다. 그래서 마당에 앉아 땅을 두들기며 대중을 따라 지성으로 참회(懺悔)했다. 7일이 지나 큰 눈이 내렸으나 심지(心地)가 선 곳은 사방 열자 가량이 눈이 내리지 않았다. 뭇 사람들이 이 이적(異蹟)을 보고 신이(神異)에 놀라 허락하며 법당(法堂)에 들어가기를 권했다. 이때 심지(心地)가 겸양하여 몸이 아파 불편하다하여 법당에 들어가지 않고 방에 물러나와 당(堂)을 향해 예배(禮拜)하였다. 그의 팔뚝과 이마에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선계산(仙溪山)에서 있었던 일과 같이 지장보살 진신(眞身)이 현신(現身)하여 날마다 와서 위문하였다. 법회(法會)가 파하고 팔공산으로 돌아가는데 도중에 보니 옷섶 사이에 2개의 성간자(聖簡子)가 끼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상하여 되돌아가 속리산의 영심대사(永深大師)에게 이 사실을 알리매 영심(永深)이 말하기를, 「간자(簡子)가 함(函) 가운데 있는데 그걸 리가 없다」하면서 조사해보니 함(函)은 봉한 그대로 있었으나 열어보니 간자(簡子)는 두 개가 없었다. 이에 영심대사(永深大師)가 놀라 기이하게 여기고 첩첩히 싸서 갈무리했다. 심지(心地)가 다시 하직하고 산을 넘다보니 또 간자(簡子)가 들어와 있으므로 다시 속리산으로 돌아와 알렸다. 영심(永深)이 놀랍고 기이하여 말하기를,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갔으니 그대는 받들고 가시오」하고 간자(簡子)를 주었다. 심지대사(心地大師)가 간자(簡子)를 머리에 이고 공산(公山)에 돌아왔다. 공산(公山) 산신(山神)이 두 선자(仙子)를 대동하고 산상에서 마중하여 심지(心地)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 산신(山神)과 선자(仙子)들이 바위 밑에 엎드려 공손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심지(心地)가 말하기를,
이제 길지(吉地)를 택하여 신성한 간자를 봉안하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간지를 던져 날아가 떨어지는 자리에 절을 짓기로 점을 치도록 하자. |
하고 산신(山神)들과 더불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던지니, 간자는 바람에 날려갔다. 이에 산신(山神)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바위가 멀리 물러가니 땅은 평평하고, |
라 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바람에 날려간 간자(簡子)를 숲속에서 찾아 그곳에 절을 지어 봉안하였다. 그 절이 지금의 동화사이다. 처음의 간자(簡子)가 떨어졌던 곳은 동화사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우물이었다. 이후 이 동화사에는 이 성간자(聖簡子)를 봉안하여 신라 불교의 일급 성보(聖寶)로 존숭(尊崇)을 받아왔다. 미륵불(彌勒佛)의 손가락뼈로 만든 불간자(佛簡子)를 모신 동화사는 한국 미륵신앙의 중심지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동화사는 의연히 한국 불교의 성지로 유명했다. 제16대 예종(睿宗)이 유명한 성간자(聖簡子)를 봉심하고자 칙사(勅使)를 보내어 공산(公山) 동화사로부터 성간자(聖簡子)를 대궐(大闕)에 맞아들여 친견하고 공경했었다. 그랬더니 문득 제9간자가 없어져 상아로 대신 만들어 동화사에 돌려보내어 봉안케 했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남에 14세기 충렬왕대(忠烈王代)는 색상이 변하여 옛것과 새것이 점점변하여 구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질(質)이 상아(象牙)도 옥(玉)도 아닌 것이었다. 점찰경(占察經) 상권에 189간자(簡子)의 이름을 들고 있다. 이는 아귀(餓鬼), 수라(修羅), 인(人), 인왕(人王), 천(天), 천왕(天王), 문법(聞法), 출가(出家), 치성승(値聖僧), 생도솔(生兜率), 생정토(生淨土), 심견불(尋見佛), 주하승(住下乘), 주상승(住上乘), 득해탈(得解脫)에 이르는 제189등(等)으로 되어 삼세선악과보(三世善惡果報)의 차별의 상(相)을 말한다. 이것으로 점을 친다고 한다.
심지대사(心地大師)는 왕사(王師)가 되었으며, 공산에 주(住)하면서 중암암(中岩庵) 석탑에서 수도하면서 중암암(中岩庵) 돌구무절을 창건하고 여기서 주(住)하고 동화사에서 주(住)하면서 공산(公山)에서 세상을 떠났다.【삼국유사(三國遺事)】
(7) 동화사(桐華寺) 산내말사(山內末寺)
① 염불암(念佛庵)
동화사사적비(桐華寺事蹟碑)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敬順王) 2년(928년) 무자(戊子)에 영조대사(靈照大師)가 창건하였고, 광해군(光海君) 4년(1612년) 임자(壬子)에 유찬(惟贊)이 중창하고, 숙종(肅宗) 25년(1699년) 기묘(己卯)에 승하(勝下)가 중수하고, 순조(純祖) 3년(1803년) 계해(癸亥)에 의암(義庵)이 중수했다 한다. 그러나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는 명(明) 만력(萬曆) 40년, 광해군(光海君) 4년(1612년)에 창건하여 청(淸) 강희(康熙) 38년 기묘(己卯) 숙종(肅宗) 25년(1699년)에 중창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1962년 원주(院主) 혜운(慧運)이 중수시 발견된 『양문록(樑問錄;1841年記)』에는 정통(正統) 3년(1438년) 무오(戊午)와 건륭(乾隆) 33년(1768년) 무자(戊子)와 도광(道光) 21년, 헌종(憲宗) 7년(1841년) 신축(辛丑)에 중수한 사실만 적혀있다. 『양문록(樑問錄)』에는 불기(佛紀) 2465년에 동조(洞潮) 원의(元義)가, 2588년에 희상(熙尙) 인은(仁隱)이, 2795년에 동곡(洞谷), 계잠(戒箴), 지일(志一), 개유(開宥)가 2868년에 양운(兩運), 탈해(脫慧)가 중창했다고 적혀있다.
이와 같이 각 기록이 맞지 않고 사실(事實)의 신빙성이 희박하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8년(1220년)에 공산(公山) 염불사(念佛寺)에서 주석(駐錫)하다 열반(涅槃)하여 이 절에서 다비(茶毘)한 원진국사(圓眞國師)가 고종(高宗) 2년에 공산(公山) 염불난야(念佛蘭若)에서 주(住)하여 동봉(東峯;彌陀峯)에서 차(茶)를 다려 양삼도(兩三道)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을 향응(饗應)하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것을 볼 때 고려(高麗) 때에는 유명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팔공산(八公山) 주봉(主峰)인 동봉(東峯;彌陀峯)의 밑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팔공산(八公山) 남록(南麓)에서 가장 높은데 자리 잡고 있는데 동화사 계곡을 따라 산정(山頂)으로 약 3㎞ 올라간 곳에 위치한다. 부근에 눌석(訥石)이라 새겨진 바위와 눌암석굴(訥庵石窟)이 있어 이곳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수도한 곳이라 전한다. 왕건(王建)과 연(緣)이 있는 일인석(一人石)과 오인득도(五人得道)의 전설(傳說)이 있는 오인석(五人石)이 있다. 절 뒤에는 거대한 암석(巖石)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양각(陽刻;浮彫)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음각(陰刻;線刻)의 대불상이 있어 유명하다. 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쌓았다는 수마노석(水瑪瑙石)으로 된 장엄탑(莊嚴塔)이 전한다. 당우(堂宇)는 극락전(極樂殿), 서당(西堂), 요사(寮舍),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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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양진암(養眞庵)
동화사 사적비에 의하면, 영조(英祖) 19년(1743년) 계해(癸亥)에 무주대사(無住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며, 광무(光武) 2년(1898년) 무술(戊戌)에 운파화주(雲坡化主)가 중수했다 한다. 1952년 6.25동란(남북전쟁) 이후 배성연(裵性蓮) 비구니(比丘尼)가 법주사(法住寺) 수정암(水晶庵)에서 이곳으로 와서 선원(禪院)을 열어 비구니선원으로 면모를 바꾸었다. 1980년 중창하여 인법당(因法堂), 정묵당(靜?堂), 미소당(微笑堂)의 선우(禪宇)를 지었다.
③ 내원암(內院庵)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와 동화 사적비에 천계(天啓) 6년, 즉 인조(仁祖) 4년(1626년) 병인(丙寅)에 승(僧) 유찬(惟贊)이 시창(始創)했다고 한다. 순조(純祖) 27년(1827년) 정해(丁亥)에 제월화주(霽月化主)가 재건(再建)했다 한다.
1960년경 장일(長一) 비구니(比丘尼)가 가야산(伽倻山) 국일암(國一庵)에서 이곳으로 와서 비구니 선원을 열어 1966년에 중창하였다. 관음전(觀音殿), 인법당(因法堂), 무주헌(無住軒)을 세웠다.
④ 부도암(浮屠庵)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와 동화 사적비에 순치(順治) 15년, 즉 효종(孝宗) 9년(1658년) 무술(戊戌)에 도오화주(道悟化主)가 창건하고 정조(正祖) 14년(1790년) 경술(庚戌)에 춘파화주(春坡化主)가 중수했다. 도광(道光) 21년, 헌종(憲宗) 7년(1841년)에 쓴 염불암 중수기인 『양문록(樑問錄)』에는 부도암에 72명의 스님이 있었다 하니 동화사 부속암자 중에 최대규모였다. 지금은 비구니(比丘尼) 절로 화(化)했다.
⑤ 비로암(毘盧庵)
동화사 사적비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 하여 선조(宣祖) 25년(1591년) 신묘(辛卯)에 서일화주(瑞一化主)가 창건했다고 한다. 비로암(毘盧庵)에는 심지왕사(心地王師)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3층 석탑과 비로자나불 석불상이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한다. 이 탑은 경문왕(景文王) 3년(863년)에 민애대왕(閔哀大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것이며, 이 절이 유명한 동수원당(桐藪願堂)이었다. 당시는 동수경내(桐藪境內)의 대적광전(大寂光殿)이었다고 보겠다. 그러므로 이 절의 창건은 바로 동화사의 창건과 같다.
⑥ 약수암(藥水庵)
1970년 약사전(藥師殿)의 터에 세운 것이다. 약사전(藥師殿)이 있다. 요사이는 약수암(藥水庵)이라 편액을 달았다. 부근의 구세약수(救世藥水)에 연유한다.
(8) 동화사(桐華寺) 방등지(方等地) 말사(末寺)
파계사(把溪寺), 부인사(夫人寺), 북지장사(北地藏寺), 신고사(新庫寺), 금산산(金山寺), 임휴사(臨休寺), 운흥사(雲興寺), 남지장사(南地藏寺), 용문사(龍門寺), 화장사(華藏寺), 용연사(龍淵寺), 보림사(寶林寺), 유가사(瑜伽寺), 소흥사(消興寺), 현풍포교당(玄風布敎堂), 통인사(通印寺), 김용사(金龍寺), 통천사(通天寺), 대덕암(大德庵), 보현사(普賢寺), 법성사(法性寺), 성주사(聖住寺), 여주사(余住寺), 자재암(自在庵), 대성사(大成寺), 안일암(安逸庵), 원각사(圓覺寺), 영화사(靈化寺), 보현사(普賢寺), 금강사(金剛寺), 옥련사(玉蓮寺), 문수사(文殊寺), 원만사(圓滿寺), 정법사(正法寺), 대성사(大成寺), 견성사(見性寺), 은적사(隱跡寺), 관음사(觀音寺), 지장사(地藏寺), 법장사(法藏寺), 관음사(觀音寺), 고성사(古聖寺), 용운사(龍雲寺), 용천사(龍天寺), 운문사(雲門寺), 사웅암(邪雄庵), 내원암(內院庵), 청신암(靑神庵), 북대암(北臺庵), 적천사(?川寺), 대운암(大雲庵), 운기사(雲起寺), 동문사(東門寺), 불령사(佛靈寺), 김용사(金龍寺), 덕사(德寺), 신둔사(新芚寺), 죽림사(竹林寺), 대적사(大寂寺), 대응사(大應寺), 관음사(觀音寺), 용천사(湧泉寺), 대산사(坮山寺), 대비사(大悲寺), 백련암(白蓮庵), 대운암(大雲庵), 청룡사(靑龍寺), 흥국사(興國寺), 백운암(白雲庵), 용천사(湧泉寺), 대각사(大覺寺), 영명사(永明寺), 천매사(天每寺), 금곡사(金谷寺), 대둔사(大芚寺), 월향사(月香寺), 위풍사(威風寺), 친음사(親音寺), 도정사(道淨寺), 보국사(寶國寺), 송림사(松林寺), 도덕암(道德庵), 천주사(天柱寺), 도봉사(道峯寺), 관음사(觀音寺), 반룡사(盤龍寺), 청룡사(靑龍寺), 선석사(禪石寺), 감응사(感應寺),
<소재지(所在地);대구(大邱), 달성(達成), 청도(淸道), 칠곡(漆谷), 고령(高靈), 성주(星州)>
3. 파계사(把溪寺)
팔공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여 대구시 동구 중대동(中大洞)에 있다. 파계사 창건연대에 관하여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는 그 연혁(沿革)을,
寺之初創在哀莊大王時 心地國師所建 其後重創與否 無可考 |
라 했다. 신라(新羅)ㆍ고려(高麗) 대에 있어서 파계사(把溪寺)의 연혁을 알 수 있는 문적(文籍)은 전무하다. 그러나 『파계사사적기(把溪寺寺蹟記)』에 의하면, 선조(宣祖) 38년(1605년)에 계관법사(戒寬法師)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잿더미에서 원통전(圓通殿)을 중건(重建)하고 광해군(光海君) 14년(1621년) 궁현당(窮玄堂)을 건립하고 인조(仁祖) 1년(1623년)에 설선당(說禪堂)을 지었고, 인조(仁祖) 4년(1626년)에 미타암(彌陀庵)을 지었고, 인조(仁祖) 24년(1646년)에 설선당(說禪堂)을 중건했다. 계관법사(戒寬法師)는 창건조사(創建祖師)와 같은 대공덕중창조(大功德重創祖)였다. 그는 법당지사중추부사절충장군가선대부대공덕주(法堂知事中樞副使折衝將軍嘉善大夫大功德主)라는 직함을 가졌다. 현종(顯宗) 6년(1667년)에 영현도인(靈現道人)이 백화루(白花樓)을 중건(重建)했다.
속암(屬庵)으로는 미타암(彌陀庵)이 있으니 명부전(冥府殿)ㆍ금당암(金堂庵)ㆍ칠성전(七星殿)이 있고, 성전암(聖殿庵)이 있으니 여기에 자응전(慈應殿)이 있다.
파계사(把溪寺) 삼창(三創)의 조사(祖師) 현응대사(玄應大師)는 파계사(把溪寺)를 크게 중창한 고승이다. 숙종(肅宗) 19년(1693년)에 본사 승(僧) 영원(靈源)이란 도승(道僧)이 관서(關西)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올 때 한양(漢陽)에 와서 자게 되었다. 그의 학술이 뛰어나 사람을 놀라게 하니 육상궁(毓祥宮)에 알려졌다. 그래서 왕자를 회임(懷妊), 탄생키 위한 기도를 수락산(水洛山) 성전(聖殿)에서 지성껏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리하여 원자(元子)가 탄생했다. 이가 후일 영조대왕(英祖大王)이다. 원자(元子)는 총명예지했다. 영원대사가 파계사로 돌아감에 본방비(本房妃) 김귀선(金貴善)으로 하여금 호송케 했다. 그리고 내탕금(內帑金)에서 금(金) 이천(二千)을 내려주어 칠성전(七星殿), 대법당(大法堂), 백화루(白花樓)를 짓게 하고 해마다 원자(元子)의 수복(壽福)을 빌게 했다. 그리고 영원사(靈源師)에게 현응(玄應)이라는 호(號)를 내려주었다. 숙종(肅宗) 22년(1696년)에 친제(親製)한 축책(祝冊)을 내려주어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숙종(肅宗) 30년(1704년)에 연잉군(延?君;훗날 영조)이 『자응전(慈應殿)』이란 편액를 써서 내려주었다. 원답(願沓)을 하사하여 공불(供佛)의 수(需)로 삼게 했다. 영조대왕이 종친부당상시(宗親府堂上時)에 완문(完文)을 내려주어 파계사를 종친본부(宗親本部)에 속하게 하고 관부(官府)의 잡역(雜役)에 승려들을 동원치 못하게 하고 양반(兩班)ㆍ관아(官衙)의 침탈(侵奪)로부터 보호되게 했다. 영조대왕이 등극하고 난 후에는 정성왕후(貞聖王后;英祖妃)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영조(英祖) 8년(1722년)에 어압완문(御押完文)을 내리고, 어의향촉(御衣香燭)을 내려 재(齋)를 설(設)하여 왕의 수명을 기도드리게 했다. 영조(英祖) 39년(1763년)에 수비(需費)와 완문(完文)을 내려 절을 짓게 하고 어의(御衣)와 도서(圖署) 완문(完文)을 내렸다. 이를 받드는 기영각(祈永閣)과 만세문(萬歲門)을 지었다. 영조(英祖) 27년(1751년)에 우의정 이의현(李宜顯)을 파견하여 영조의 생전(生前)과 사후(死後)의 축수복(祝壽福)과 명복(冥福)을 기원하는 축원당(祝願堂)으로 삼았다. 여기에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 정조(正祖), 순조(純祖)의 위패(位牌)를 봉안했다. 그리고 이곳에 여러 임금의 어압(御押)ㆍ어필(御筆)ㆍ어사금병(御賜金屛)ㆍ서병(書屛)을 진장(珍藏)했다. 정조(正祖) 1년(1777년)에는 천향각(天香閣)의 편액을 쓴 어필(御筆)을 하사했다.
중수사실을 보면, 숙종(肅宗) 46년(1720년)에 설원(雪元)과 각현사(覺賢師)가 백화루(白花樓)를 중건했으며, 영조(英祖) 14년(1738년)에 위징도인(偉澄道人)이 자응전(慈應殿)을 중건했으며, 순조(純祖) 31년(1831년)에 왕궁(王宮)에서 내려 준 돈과 희사(喜捨)로 미타암(彌陀庵)을 세웠다. 이때 순찰사(巡察使) 박지수(朴岐壽)가 성조도감(成造都監)을 맡았다. 이렇게 이 절이 국은(國恩)을 입은 것은 현응대사(玄應大師)의 도원력(道願力)이었다.
철종(哲宗) 8년(1831년)에 계정상인(戒正上人)이 성전암(聖殿庵)과 자응전(慈應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수보(修補)하고 축성루(祝聖樓)를 창건했다. 철종(哲宗) 11년(1860년)에 백화루(白花樓)를 중수할 때 왕비(王妃)가 내탕금(內帑金)을 내려주고 안사(按使) 홍우길(洪祐吉)에 특별히 유시(諭示)하여 자재를 공급케 하고 앞서 철종(哲宗) 4년(1853년)에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려준 내탕전(內帑錢) 천민(千?)을 합쳐서 비용으로 사용하고 경운(敬運)스님이 그 역사를 맡아했다. 그리하여 철종(哲宗) 12년(1861년)에 준공했다.
고종(高宗) 14년(1877년)에 순찰사(巡察使) 박제인(朴齊寅)이 기영각(祈永閣)을 수리하고 고종(高宗) 27년(1890년)에 백화루(白花樓)를 중건했다. 광무(光武) 4년(1900년)에 월주상인(月州上人)이 축성루(祝聖樓)를 중수했다. 1914년 성전암(聖殿庵)이 산적으로 인하여 화재가 나서 이듬해 주지(住持) 장보령(張保寧)과 최관해화상(崔寬海和尙)이 중건했다. 1918년 배용담(裵龍譚) 주지(住持)가 궁현당(窮玄堂)을 중건하고, 1922년 설선당(說禪堂)을 중건했다. 1924년에는 성전암(聖殿庵) 원주(院主) 반공산(潘公山)이 자응전(慈應殿)을 중수했다.
1977년 6월 개금불사(改金佛事) 때 원통전(圓通殿) 관음보살(觀音菩薩) 복장에서 영조(英祖)의 어의(御衣)가 나왔다. 파계사 입구에는 「대소인개하마(大小人皆下馬)」라 새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이는 왕실원당(王室願堂)에 감히 말을 타고 못 들어오게 한 것이다. 조선왕조 후기에 사원(寺院)이 관아(官衙)와 양반(兩班)의 부역(負役), 지묵(紙墨)의 공출(供出) 등 경제적 침탈과 사역(使役)에서 모면하기 위하여 왕실원당(王室願堂)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온 좋은 예이다. 그리고 주위 40리(里)를 원당봉계(願堂封界)로 사패(賜牌)되었다. 이 절에는 사명당(四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올 때 선물 받은 8폭 병풍(屛風)이 보관되어 있다. 이는 사무라이의 기마무예도(騎馬武藝圖)이다. 절에 청허당대사(淸虛堂大師) 문집목판(文集木版)이 소장되어 있다. 이 절에 중흥조사(中興祖師) 현응대사(玄應大師)의 부도(浮屠)와 비(碑)가 서 있다.
○ 玄應和尙浮屠碑文
師諱靈源 玉山李氏子也 童眞出家 冠年眼出神珠見失 受法東雲 參考禪臘 至耳順庵歸 圓寂超骨 乞得骨身 二介頂骨 各安石塔三座 曾於百日白衣 弄供心契 性空咸得一舍利一介也 又得唐士識書 委知根熟世也 引勤造成 比丘義生戒子 特請都監忍元
別座廣學
京人金貴善立碑
聖上卽位三十七年庚寅七月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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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은해사(銀海寺)
팔공산에서 서쪽의 동화사(桐華寺)와 동쪽의 은해사(銀海寺)는 팔공산의 대표적인 양대 사찰이다. 은해사(銀海寺)는 경북 5대 본산이자 한국 31대 본사의 하나였고,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경상북도 영천군 청통면 치일동에 소재한다.
1.1.1.1. (1) 창건내력(創建來歷)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기재된 영천군(永川郡) 북습면(北習面) 은해사(銀海寺) 고적조(古蹟調)의 사적원인내력(事蹟原因來歷)에,
1. 신라 헌덕왕(憲德王;809~825년)시에 홍진국사(洪眞國師)가 상용암(上聳庵)을 창건하여 늘 연좌(宴坐)하여 법(法)을 보이고 이 터를 가리키면서 「장차 여기에 절을 세우면 운백안(雲百安) 삼사(三寺)가 다 속암(屬庵)이 되리라」한 것이 창사(創寺)의 기원이 되었다. |
은해사사적비문(銀海寺事蹟碑文)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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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2) 은해사중건기(銀海寺重建記)
崇禎紀元後四丁未之銀海寺失火燒千餘架惟極樂殿了遺無乃玉眞觀一柱乎在寺蹟曰 孝陵胎室守護 英廟御押奉安闕??寶賦供維城之府僧會議建 八峯和尙主管海月長老都化士有大華幹蠱監?役永?掌則印彦皆心匠智巧可起空中一室郡候金公箕哲捐俸三百緡凡所後急無有不待官力而周旋 宗府關移棠營棠營亦輪關道內檀越影從役夫萬捐都料匠總繩墨積月九個有奇費數萬計殿縱橫九間香室連?藏十問尋劒說禪淸風三寮依舊制廐?同時訖役明年建寶華樓又明年作擁護門安養殿東別室滿月堂香積閣供客?物短未果 盖成者半 未成者半 象魏[?+不][?+思]丹?潑眼大雄殿 寶華樓佛光閣三字額皆秋史金相公墨妙依然若華嚴樓閣也 成住壞空雖曰關數非余府營俯賜之澤焉有二人子忘泯之努以是知先天兩露始終無有窺極也 寺以嶺表區區之刹名於世稱海銀銀海者衆多前三物饒楊一以也 冠盖車馬陸續如傳舍賈客行路留連若逆何止騷人墨客而東邊送客西邊設席蒲塞香積盃數百?差備辨無瓷漆匏朴竹著瓦椀之器於供客也 無窮家非薄之態?槌鐘魚松篁杉檜亦足以?淸眼淨谷?不必論價於樓臺水石之間然一經昆劫觸目蕭修安得不敎?感泣然而佛法濫觴於漢明始傳中國漸漬於齊梁晋唐之間天下寺刹未有盛於此時籍傳於騷人之口曰 南朝四百八十寺曰 棟宇自齊梁曰 此寺亦唐餘是而管領爲遊人淸賞者捐不堪樓然隔遠未料其存亡若我東羅麗卽中華齊梁也 建八伽藍五百禪刹三千裨補不惟比此有有名於三國遺史者不讓中華然今無一二存焉安和夫中華諸刹不爲邱墟緬惟同泰歸宗徑山等巨刹以當時壯麗皆經?劫安和夫羅麗之刹不以是若存若亡以此追惟海印月精等灰劫亦關於數也 然卽此寺丙午丁何足?歎然重建後十有五載少者皓首老者己作古人若過數年莫知其年人何人興造後無記事之責焉歸歸之寺人乎數乎興廢數記亦數乎杞宋之無徵風以是也 余不幸死者招粗識當年事一老僧依其口實而楣之然若人與功至於魚魯則招以盲之責無悔歟
玄??茂姑洗月哉生明
混虛智照謹識
玩山崔轉魯謹書
李彰海謹序
同首座目
邑都監吏房 李有完
收錢副吏房 李仲仁
監役官行首 李文錫
成造都監 前僧統 永旭
綠化都監 前僧統 永?
運木都監 前僧統 戒仁
前記室 奉沾
片將前行僧 戒察
前行僧 戒云
曹司 戒彦
指殿 白峯堂 仁洽
典座 漢明
焦頭復其所有若人不爲不多然??於十五載後各不可彈知故未遂書之誠可有槪然者存焉
1.1.1.3. (3) 은해사연혁변(銀海寺沿革辨)
聖上十三年丙子 余寄永川郡 郡西有八公山?然盤踞九邑 正幹東有仁宗胎室 麓下數里有寺曰銀海 卽胎室守奉處也 屬庵十二距三十里 規度亞於通度海印 而其環助若新 門額之銀海寺 佛堂之大雄殿 鐘閣之寶華 樓皆秋史金侍郞筆 爐殿曰一爐香閣 亦秋史隸也 余曰此非舊建也 建何勢老釋曰憲朝丁未全寺回祿而重建矣 有古蹟乎 釋進宗親堂上古關文 卽我英宗大王潛龍時敎飭守護 而押與印尙煌煌 余曰敬藏之 問其沿革 而始建於胎室奉安後其前無徵反問奚以銀海名 曰不詳矣 余歎曰 惟我仁宗誕于正德己亥歲 今六回有一歲矣 名蘭往蹟之無槪見於郡誌野史何哉 越己卯夏余兼緩新寧 見邑誌有梨旨銀所 高麗末陞爲縣 仍屬永川 繼有崔瀣碑文略曰 至元元年 上護軍安子由等朝京師 還以天后命 復梨旨爲縣名 若曰 永川梨旨銀所古爲縣 中央邑子違國 名廢而籍民 稅白金 稱銀所者久今其士人那壽也先不花 幼?禁中 積給使役 以其功 陞鄕貫復爲縣 王敎有司行之如中旨明年那壽奉使東還 以故處卑狹 徒懸于古所若干步 置懸舍長吏若初 又五年也先不花函香繼室 謂興復還徒顚末 不可無述 謁王請記于碑 那壽官奉議大夫甄用大監 也先不花官中議大夫 中瑞司承 姓皆李氏 本國又封 那壽信安君也先不花永川君 此在所略盖其 曰梨旨縣者卽公山之 下而介於永靈地矣士人曰 高麗太祖敗於甄萱 來保于此 食梨而佳之 故曰梨旨云 此與郡誌所云 太祖旨在郡西三十里 高麗太祖爲甄萱所敗 退保公山下一小峯 因太祖旨者相近矣 其曰在縣南二十五里 以懸之南公山也 東南川流之限永川也 特其正南爲梨旨故也 而今銀海等也 則銀海之住於梨旨銀所之境之 昭昭矣 然而銀海於寧可二十里 或疑其五里之?差 而道里之載於誌者 皆至坊曲終境而量之也 自寧量抵今銀海 則爲二十里 量至古之梨旨終境 則爲二十五里 理勢固有然者矣 其曰本永川梨旨銀所者 本是永而後屬寧也 其曰高麗末陞爲縣 仍屬永川者 言麗王之奉中旨 復梨旨爲縣還屬于永 而以至元年號攷之 則事在麗忠肅王二十二年 盖縣之復 實那壽也先不花之功也 崔瀣麗朝文章人 而碑文中此在所略云者 與其銀所之誌 略其事而?碑有所據也 梨旨之旣復而不曰縣誌曰所略者 重其沿革而襲舊也 但所略今無傳焉 寧邑誌曰 碑石今無 幷可歎也 然而初無是碑是誌 則銀所之降 梨旨之復 梨旨銀所之屬寧而還屬永 實無以稽 今日銀之建在於古之梨旨銀所 尤無以訂之矣 銀海銀以其銀所之同符於佛家銀地而取之歟 嗟呼 梨旨之復在於至元乙亥 胎室之奉在於正傳乙亥 地靈之古 干支之? 有若造物相感者 而至元後五百四十年之間 沿革之明證 是寺之名義 不與山訛水幼 而十無一二疑也 余與是話於僧 僧皆釵手而拜曰 是可作山中?? 余且念此事不辨 終遺後人之感 遂著之爲說
歲己卯仲夏知郡李鶴來靑田稿幷書
현재 전하는 「은해사사적비」의 연혁(沿革)은 믿을 바가 못 된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신라 헌덕왕(憲德王) 1년(809년)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지금의 운부암(雲浮庵) 아래 해안평(海眼坪)에 대가람(大伽藍)을 짓고 해안사(海眼寺)라 했다 하며, 조선(朝鮮) 인종(仁宗) 원년(1545년)에 대화재로 사찰이 전소됨에 따라 동년에 천교화상(天敎和尙)이 해안평(海眼坪)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은해사(銀海寺)라 개호(改號)했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신빙성이 결여된 후대의 두찬(杜撰)이다. 성종(成宗) 12년(1481년)에 찬진(撰進)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찬진(撰進)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영천군(永川郡) 불우조(佛宇條)에 「은해성(銀海城)」이라는 사명(寺名)이 나오고 있다.
거조사(居祖寺)ㆍ은해성(銀海城)ㆍ원명사(圓明寺)ㆍ안흥사(安興寺)ㆍ상원사(上元寺) 모두 공산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해안사(海眼寺)를 은해사(銀海寺)라고 개호(改號)했다는 조선(朝鮮) 인종(仁宗) 원년(1545년)보다 64년 전의 기록에 은해(銀海)라는 사명(寺名)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때 현재의 사전(寺傳)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보겠다.
고종(高宗) 16년(1879년)에 영천군수 이학래(李鶴來)가 지은 『은해사연혁변(銀海寺沿革辨)』에 의하면 은해사의 내력이 전혀 부전(不傳)했고, 은해(銀海)란 뜻도 전혀 알지 못하여 자기 나름대로 이지은소(梨旨銀所)와 연관 지어 억설(臆說)을 늘어놓은 사실을 볼 때 한말(韓末)까지 은해사(銀海寺)의 역사는 전무하고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은해성(銀海城)」이라는 사명(寺名)이 나오고 있다. 모든 사원이 사(寺) 또는 암(庵)으로 표기되었는데 유독(唯獨) 이 절만은 은해성(銀海城)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주목된다. 권상로편(權相老編)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은해사조(銀海寺條)에 의하면,
按伽藍考作銀海城寺○在永川郡淸通面八公山 三十大本寺之一太古時 本名海眼寺○新羅憲德王三年辛卯 火災後移建于今比 改名銀海寺 ○新羅憲德王三年初創 朝鮮明宗十九年丙午 天敎和尙再建 同十九年甲子 如眞大師三建 同正祖二十一年戊子 法永大師四建 同哲宗十二年辛酉 八峰海月兩師五建 ○元曉祖師率弟子千人 講華嚴於彦陽千聖山 遺弟子八人於八公山 結兩庵而居 三聖庵乃人見性處也 五道庵乃五人得道處也 銀海城卽(銀海寺 |
에 은해성사(銀海城寺)라 한다. 무엇 때문에 은해성(銀海城)이라 했는지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운해사(雲海寺)라 했다고 한다. 원종(元宗) 9년(1268년) 여름에 조지(朝旨)를 받들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명덕(名德) 100원(員)을 모아 대장경(大藏經) 완성을 기념하는 대장낙성법회(大藏落成法會)을 열었다. 이때 보각국존(普覺國尊) 일연(一然)이 주맹(主盟)이 되어 낮에는 금문(金文)을 독(讀)하고, 밤에도 강론(講論)를 함에 깊이 있는 조예에 감복했다 한다. 이때 일연(一然)은 현풍(玄風) 비슬산(琵瑟山) 인홍사(仁弘寺;仁社寺)에 주지로 있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인홍사(仁弘社) 주지만회(萬恢)가 일연(一然)에게 주석(主席)을 넘겨주었는데, 학려(學侶)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무진년(戊辰年) 여름 왕명에 의하여 이름이 높은 선사(禪師)와 강사(講師) 등 1백 명을 초청하여 대장경(大藏經) 조조(彫造)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운해사(雲海寺)에 개설하고, 스님을 청하여 주맹(主盟)으로 모시고, 낮에는 금문(金文)을 독송하고, 밤에는 종취(宗趣)를 담론(談論)하니, 제가(諸家)들이 의심하던 바를 스님께서 모두 해박하게 부석(剖釋)하였으니,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유연하여 핵심적인 뜻이 귀에 속속 들어와서 경복(敬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고려 말에 왜구(倭寇)의 분탕(焚蕩)과 화재로 사우(寺宇)가 모두 불타버리자 다시 이건(移建)하여 은해성(銀海城)이라 개명했다.
혜철국사(惠哲國師)는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을 말한다. 은해사사적비(銀海寺事蹟碑)에 「혜철(惠哲) 자(字) 체공(體空), 속성박씨(俗姓朴氏), 경사인(京師人)」이란 기록에서 혜철(惠哲)은 혜철(慧徹)을 말한다고 보겠다.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에 주석한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조(開祖)이다.
혜철(惠哲)은 당(唐)에 구법가서 서당지장(西堂知藏)에게 수학하여 인(印)을 전수받았다. 귀국하여서는 전라도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에서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선종산문(禪宗山門)을 열어 개조(開祖)가 되었다. 혜철(惠哲)이 은해사(銀海寺)를 창건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나 고전(古傳)이니 여기서는 기록한다.
사명(寺名)인 운해(雲海)는 고봉(高峯) 상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구름이 온 산 밑에 깔려 구름의 바다를 이룬다. 이를 운해(雲海)라 한다. 해안(海眼)은 지중(地中)을 잠류(潛流)하는 천(泉)을 말하며, 옥명(玉名)이기도 하다. 은해(銀海)라 함은 도가(道家)에서 눈(眼)을 말한다. 따라서 해안(海眼)의 안(眼)에서 은해(銀海)의 해석이 나왔다고 보겠다. 그리고 운해(雲海)의 음이 비슷하고 미자(美字)인 은해(銀海)로 고쳤다고 보겠다.
이 절은 조산시대에 인종태실(仁宗胎室) 수호원당(守護願堂)으로 조정의 비호와 관(官)의 원조를 받아 발전해 왔다. 영조(英祖)가 잠저(潛邸)시에 태실(胎室) 수호를 당부하여 내린 글이 최근까지 보관되고 있었다.
1.1.1.4. (4) 은해사(銀海寺) 산내말사(山內末寺)
① 기기암(寄寄庵)
신라 헌덕왕(憲德王) 8년(816년)에 정수대사(正秀大師)가 창건(創建)하여 안흥사(安興寺)라 했다. 명종(明宗) 1년(1546년)에 천교화상(天敎和尙)이 중건(重建)하면서 기기암(寄寄庵)이라 개명했다 한다.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는 건륭(乾隆) 신유(辛酉) 영조(英祖) 17년(1741년)에 기성당(箕城堂) 쾌선사(快禪師)가 초창(草創)했다 한다. 영조(英祖) 49년(1773년) 계미(癸未)에 명암당(鳴巖堂) 재징사(再澄師)가 구지하(舊址下)에 이건(移建)하고 도광(道光) 무자(戊子) 순조(純祖) 28년(1828년)에 중수했다. 함풍(咸豊) 8년 무오(戊午) 철종(哲宗) 9년(1858년)에 정곡사(淨谷師)가 중수했다. 기기(寄寄)란 뜻은 신기파파(身寄婆婆)니 심기극락(心寄極樂)이라는 뜻이다.
② 백흥암(百興庵)
신라 경문왕(景文王) 9년(869년)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창건하였다. 당시 잣나무가 울창하여 백지사(栢指寺)라 했다. 후일에 개창하여 백흥암(百興庵)이라 한다.
극락전(極樂殿)에 수미단(須彌壇)이 보물 데486호로 지정되어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유일한 아름다운 나무 조각으로 된 정교한 예술품이다. 극락전(極樂殿) 또한 아름다운 건물로 조선시대 중기의 우수한 건축이다.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액(筆額)이 유명하다. 명부전(冥府殿), 보화루(寶華樓), 진영각(眞影閣), 심검당(尋劍堂) 등 고아(古雅)한 산사(山寺)로 비구니(比丘尼)가 주(住)하는 난야(蘭若)로 청정(淸淨)한 도량(道場)이다.
③ 운부암(雲浮庵)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5년(651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 이 절에서 공부하면 성공하는 명당(明堂)이라 명승(名僧)이 많이 배출되었다. 지금도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든다. 보물 제514호 청동관음보살상(靑銅觀音菩薩像)이 원통전(圓通殿)에 봉안되어 유명하다.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할 때 서운(瑞雲)이 하늘에 떴다하여 운부사(雲浮寺)라 했다 한다. 수백 년이 된 보리수(菩提樹)가 있어 유명하다.
④ 묘봉암(妙峯庵)
신라 흥덕왕(興德王) 9년(834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했으며, 성화(成火) 기미(己未) 성종(成宗) 16년(1485년)에 죽청사(竹淸師), 희찬사(羲贊師)가 중수하고 가정(嘉靖) 계묘(癸卯) 중종(中宗) 38년(1543년)에 보조사(寶珠師)가 중수하고, 가정(嘉靖) 갑진(甲辰), 즉 이듬해 중종(中宗) 39년(1544년)에 삼인(三印), 지징(志澄) 두 스님이 중수했다. 건륭(乾隆) 경자(庚子) 정조(正祖) 4년(1780년)에 중수했고, 6.25 남북전쟁 후 퇴락된 것을 근년에 크게 중창(重創)했다. 대웅전(大雄殿) 뒤의 대암(大巖)이 유명하다.
⑤ 중암암(中岩庵)
민간에서는 돌구무(돌구멍)절이라 한다. 즉 석굴암(石窟庵)이란 뜻이다. 옛 이름은 천태사(天台寺)이다. 기절(奇絶)한 천인단애(千?斷崖)에 제비집 마냥 붙어 있다. 여러 석문(石門) 석굴(石窟)을 지나 절벽에 자리 잡았다. 절벽에서 흐르는 한줄기 샘물은 대감대사(大鑑大師) 단연(坦然)이 지은 문수사(文殊寺) 시(詩)인 『로천석하통(路穿石?通) 천투운근락(泉透雲根落)』의 시구(詩句)가 연상되는 풍경이다. 뒤에는 삼인암(三印岩), 건들바위(動石), 만년송(萬年松), 석굴이 있어 팔공산 제일의 승경(勝景)을 이루고 있다.
신라 흥덕왕(興德王) 9년(834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했다 하며 도광(道光) 3년 순조(純祖) 23년(1823년)에 태여사(太如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법당(法堂)엔 『천태난야(天台蘭若)』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절의 측간(厠間;화장실)은 깊기로 유명하다. 세간(世間)에 통도사(通度寺) 문지도리, 해인사(海印寺) 쇠가마와 함께 3대 대찰의 자랑이다. 통도사(通度寺) 중이 자랑하기를,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여닫을 때 문지도리 쇳가루가 1말3되가 떨어진다고 하니, 해인사(海印寺) 중은 쇠가마가 얼마나 큰지 동짓날 팥죽을 쑬 때 배를 가마솥에 띄워 팥죽을 젓는다고 자랑하니 돌구무절의 중은 말하기를 우리 절의 뒷간은 어찌나 깊던지 정월 초하룻날 똥 누고 나와서 섣달 그믐날 뒷간에 가서 앉으니 똥 떨어지는 소리가 그때야 나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얼마나 깊은 가를 알만한 비유이다.
⑥ 거조암(居祖庵)
신라 경덕왕(景德王) 9년(750년)에 왕명에 의해 창건했다고 하고 또는 진흥왕대(眞興王代) 혹은 효성왕대(孝成王代)란 창건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과 원참대사(元?大師)가 이 절에 주(住)한 사실을 볼 때 고려시대에는 유명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명한 국보인 영산전(靈山殿)은 고려 말 조선초기의 건물로서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장려한 건축예술이다. 이를 지은 목수(木手)의 이름은 진춘근(陳春根)이라 전한다.
1.1.1.5. (5) 은해사(銀海寺) 방등지(方等地) 말사(末寺)
은해사(銀海寺)ㆍ수도사(修道寺)ㆍ신녕포교당(新寧布敎堂)ㆍ진불암(眞佛庵)ㆍ부귀사(富貴寺)ㆍ영천포교당(永川布敎堂)ㆍ영통사(靈通寺)ㆍ동도사(東道寺)ㆍ죽림사(竹林寺)ㆍ신흥사(新興寺)ㆍ거동사(巨洞寺)ㆍ묘각사(妙覺寺)ㆍ영지사(靈芝寺)ㆍ봉림사(鳳林寺)ㆍ거조사(居祖寺)ㆍ안흥사(安興寺)ㆍ경산포교당(慶山布敎堂)ㆍ천성암(天聖庵)ㆍ경흥암(慶興庵)ㆍ제석사(帝釋寺)ㆍ인흥사(仁興寺)ㆍ불굴암(佛窟庵)ㆍ반룡사(盤龍寺)ㆍ영원사(靈願寺)ㆍ환성사(還城寺)ㆍ하양포교당(河陽布敎堂)ㆍ선본암(禪本庵)ㆍ원효암(元曉庵)ㆍ안성암(安星庵)ㆍ삼룡사(三龍寺)ㆍ지보사(持寶寺)ㆍ신흥사(新興寺)ㆍ인각사(麟角寺)ㆍ압곡사(鴨谷寺)ㆍ오도사(悟道寺)ㆍ법주사(法住寺)ㆍ도성암(道成庵)ㆍ수태사(水泰寺)ㆍ석굴사(石窟寺)ㆍ보광사(普光寺)ㆍ청송포교당(靑松布敎堂)ㆍ흥룡사(興龍寺)ㆍ관룡사(觀龍寺)ㆍ학운사(鶴雲寺)ㆍ비봉사(飛鳳寺)ㆍ대전사(大典寺)<소재지 영천(永川), 경산(慶山), 고령(高靈), 성주(星州), 군위(軍威), 청송(靑松)>
5. 송림사(松林寺)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東明面) 구덕동(九德洞)에 소재하며 창건연대는 잘 알 수 없다. 신라 내물왕(奈勿王) 때 창건했다는 사전(寺傳)의 창건연대는 신빙성이 없다. 9세기경 신라시대에 창건으로 추정된다. 신라(新羅)ㆍ고려대(高麗代)는 대찰(大刹)이었던 듯 경내(境內)에 흩어져 있는 주초석(柱礎石) 등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大雄殿), 명부전(冥府殿), 산신각(山神閣)이 있고, 석등(石燈), 부도(浮屠),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大雄殿)의 편액(扁額)은 숙종대왕(肅宗大王)의 어필(御筆)이다. 시왕전(十王殿)의 규모는 한국에서 제일 크다. 대웅전(大雄殿)의 삼존불상(三尊佛像) 또한 목불(木佛)로서 한국에서 가장 큰 것에 속한다.
유명한 오층전탑(五層塼塔)은 우리나라 전탑(塼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959년에 중수했고, 1961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이때 1층에서 신라시대의 호화찬란한 사리장치(舍利裝置)가 석귀함(石龜函) 속에서 나왔다. 한국 불교미술의 걸작품으로 유명하다. 전탑(塼塔)은 보물 제189호, 사리장치는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었다.
6. 기타(其他)의 사찰(寺刹)
① 삼성암(三聖庵)
팔공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구름 위의 운무(雲霧) 속에 있는 천상(天上)의 절과 같다. 서봉(西峰) 밑에 남쪽에 위치한 샘이 있는 절터이다. 팔공산 사찰 중에 가장 높은데 위치해 있다. 해발 900m이다. 이곳은 팔공산 남쪽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전망이 좋다.
옛날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제자 여덟 사람이 공산(公山)에 와서 수도하여 득도했는데 그중 세 사람이 이곳에 절을 짓고 득도하여 삼성암(三聖庵)이라 했다.【여암전서(旅菴全書), 가람고(伽藍考)】
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풍부한 수량을 자랑한다. 절은 6.25전란으로 없어졌다. 깎아지른 천인단애(千?斷崖)의 산허리에 자리 잡은 곳이다.
② 오도암(悟道庵)
삼성암(三聖庵)의 정반대인 공산성(公山城)의 일부인 청운대(靑雲臺) 밑에 북봉(北峰)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다. 신라시대에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제자 여덟 사람이 공산(公山)에 들어와서 남북(南北)에 두 암자를 세워 수도하여 각각 득도(得道)했다. 이곳은 다섯 스님이 득도(得道)했다 하여 오도암(五道庵)이라 한다.【여암전서(旅菴全書), 가람고(伽藍考)】이 절은 6.25전란으로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있다.
공산(公山)의 화엄종(華嚴宗) 사찰은 입당구법(入唐救法)하여 지엄(智儼)의 종통(宗統)을 전래한 부석종(浮石宗) 의상파(義湘派)의 절이 미리사(美理寺)였고, 원효(元曉)가 해동종(海東宗;芬皇宗)을 창시하여 신라에서 독자적으로 화엄종(華嚴宗)을 창립했다. 이들 원효종파(元曉宗派)의 사원(寺院)이 삼성암(三聖庵)과 오도암(悟道庵)이었다.
오도암(五道庵)은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여기에 와서 뒤 절벽의 석굴에서 수도하여 도(道)를 깨달았다고 하여 오도암(悟道庵)이라 칭한다. 원효(元曉)는 이곳에서 가장 많이 수도했다 한다. 원효의 수도처로 불굴사(佛窟寺) 석굴과 가장 궁벽하고 높은 이곳에서 수도한 것은 원효의 수도생활의 후기에 속한다. 공산(公山) 수도생활은 초기에 불굴사(佛窟寺) 석굴, 중기에 삼성암(三聖庵), 후기에 오도암(悟道庵)이었고, 여기서 대성하여 원효(元曉)는 동경(東京;慶州 王京)으로 진출했다. 동경(東京)에서는 황룡사(皇龍寺), 분황사(芬皇寺), 고선사(高仙寺), 혈사(穴寺)에 주석(駐錫)했다. 이것은 원효(元曉)의 만년(晩年)에 일이다. 그의 청년기의 수도처는 공산(公山)이었다. 오도암(悟道庵) 석굴에는 장군수가 있어 옛날 원효(元曉)가 오도암(悟道庵)을 지어 수도랄 때 마시던 물이다. 이곳 오도암(悟道庵)은 정밀유수(靜謐幽邃)한 공산제일(公山第一)의 수도(修道) 명당(明堂)이다.
③ 미리사(美理寺)
팔공산의 왕산(王山) 밑에 있던 절이다. 동수대전시(桐藪大戰時) 김낙(金樂), 신숭겸(申崇謙) 두 장군이 이 절 앞에서 전사하여 유명하다.【삼국유사(三國遺事)】
이 절은 해동화엄십찰(海東華嚴十刹)의 하나로 유명하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故寺主?經大德法藏和?傳)에 화엄학(華嚴學) 십산(十山)의 절을, 중악 공산(公山)의 미리사(美理寺), 남악(南岳) 지리산의 화엄사(華嚴寺), 북악(北岳)의 부석사(浮石寺), 강주(康州)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와 보광사(普光寺), 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 계룡산(鷄龍山)의 갑사(岬寺), 삭주(朔州)의 화산사(華山寺), 양주(良州) 금정산의 범어사(梵魚寺), 비슬산(琵瑟山)의 옥천사(玉泉寺), 전주 무산(毋山)의 국신사(國神寺), 한주(漢州;서울 은평구) 부아산(負兒山)의 청담사(淸潭寺)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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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미리사(美理寺)는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 중의 하나였다.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을 열어 당(唐)의 두순화상(杜順和尙)과 이조(二祖) 운화(雲華) 지엄법사(智儼法師)와 삼조(三祖) 현수(賢首) 법장법사(法藏法師)의 종통(宗統)을 전승(傳承)한 부석종(浮石宗) 의상(義湘)의 계통을 이은 의상(義湘)의 상문십대덕(湘門十大德)에 의하여 연 화엄종(華嚴宗)의 대가람(大伽藍)이었다.
④ 불굴사(佛窟寺)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강학동에 위치한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10년(69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 위의 암벽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석굴(石窟;지금은 紅珠菴)이 있으며, 일명 원효암(元曉庵) 또는 불암(佛庵)이라 불린다. 유명한 약수(藥水)가 있다. 석굴(石窟)은 팔공산에서 중악석굴(中岳石窟)과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자연의 석굴로 절묘하다. 천수백년간 팔공산 산사(山寺) 수십 사암(數十寺庵)에 법등불멸(法燈不滅)과 함께 승려들 사이에 전해진 이곳은 이 지역 출신인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했다 한다. 이 석굴에서 연전(年前)에 26㎝ 크기의 금동관음보살(金銅觀音菩薩) 입상(立像)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수장되었다.
옛날에는 대찰(大刹)이었다 한다. 영조(英祖) 12년(1736년)에 홍수로 절이 유실되었다. 보물 제429호의 삼층석탑(三層石塔)과 미륵불(彌勒佛) 입상(立像)이라 하는 약사여래(藥師如來) 입상(立像)이 있다. 석등(石燈)이 있다. 경종(景宗) 3년 계묘(癸卯)에 중건하고 승(僧) 유혜(有惠) 쾌옥(快玉)이 철종(哲宗) 11년(1860년) 경신(庚申)에 다시 중창하였다. 그후 1939년 기묘(己卯) 춘(春) 3월에 은해사(銀海寺) 경파백현(鏡波伯鉉)이 다시 중창(重創)하였다.【경종(景宗) 3년을 초창이라 하고 이것을 삼창(三創)이라고 절에서 칭한다.】
⑤ 선본사(禪本寺)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대한동에 위치한다.
신라 소지왕(炤知王) 13년(491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보물 제431호인 관봉(冠峰) 석조여래좌상(石彫如來坐像)과 지방문화재 제115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그리고 관봉(冠峰)의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갓바위 부처)가 있다. 사전(寺傳)에는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선덕여왕(善德女王) 7년(638년)에 조성했다 한다. 그러나 수법으로는 통일신라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여 진다. 작년에 대대적인 중창사업을 벌려 대웅전(大雄殿) 등을 새로 세워 면목을 일신했다.
⑥ 환성사(環城寺)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읍 사기동에 위치한다.
흥덕왕(興德王) 10년(835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했다 한다. 그 후의 중건연대는 알 수 없다.
대웅전(大雄殿)은 고려 말 조선조 초기의 건물로 보물 제562호로 지정된 유명한 건축물이다. 심검당(尋劍堂)은 지방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고려시대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은해사(銀海寺) 영산전(靈山殿)을 옮긴 건물이라 한다. 건물로는 성전암(聖殿庵), 명부전(冥府殿), 수월관(水月觀)이 있다. 심검당(尋劍堂) 현판에 『도광(道光) 4년 갑신(甲申) 추팔월(秋八月) 추파서(秋波書)』란 것을 볼 때 도광(道光) 4년 즉 순조(純祖) 24년(1824년)에 중수한 듯 하다.
이 절이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속하여 공물(供物)을 받쳐오다가 숙종(肅宗)시에 박서봉(朴瑞鳳), 황윤중(黃允中)이 여러번 상소하여 하양향교(河陽鄕校)에 소속시켰다.
⑦ 원효암(元曉庵)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전사동(傳沙洞) 대동골(大洞谷) 4 팔공산(八公山) 동록(東麓)에 위치한다.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창건이라 전한다. 뒤의 바위에 배 모양의 감실(龕室)을 파고 반양각(半陽刻)의 마애좌불상(磨崖坐佛像)이 있다.
⑧ 삼존석굴(三尊石窟) 삼존불상(三尊佛像)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동(南山洞) 팔공산 북쪽 기슭의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한다. 지상에서 20m 높이의 둥근 동굴(높이 4.25m, 길이 4.3m)에 안치한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와 좌우(左右)에 협시보살(脇侍菩薩)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삼존상(三尊像)이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본존은 좌상(坐像)이며, 좌우의 협시보살은 입상(立像)이다. 7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8세기 중반의 석굴암에 반세기 정도 앞선 작품으로 중국 석굴사원의 동점(東漸)에서 석굴암의 전 단계로 넘어가기 전의 선행(先行)양식의 석굴이다.
앞에는 고사지(古寺址)가 있어 모전석탑(模塼石塔)의 잔탑재(殘塔材)가 허물어져 있다.
⑨ 수도사(修道寺)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면 치산동(雉山洞) 팔공산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비로봉 아래에 있다.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4년(650년)에 원효(元曉), 자장(慈藏) 양조사(兩祖師)가 창건하고, 고려 희종(熙宗) 2년(1206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重創)했다 한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모신 원통전(圓通殿)과 응향각(凝香閣)과 요사(寮舍)를 좌우로 배치하고 있으며, 조선 숙종(肅宗)대에 제작한 너비 4m, 길이 10m의 괘불(掛佛)이 있다.
징월대사(澄月大師)가 관찰사(觀察使) 김의순(金義淳)의 후원으로 중창했다.
⑩ 진불암(眞佛庵)
팔공산 주봉(主峰)인 비로봉하(毘盧峯下) 북쪽 영천군 신녕면 치산동(雉山洞)에 있다. 영남(嶺南) 좌도(左道)의 상승선원(上乘禪院)으로 유명했다. 고려 말에 보각국사(普覺國師) 환암(幻庵) 혼수(混脩)가 창건했다. 인조(仁祖) 15년(1637년) 정축(丁丑)에 이응추(李應秋)와 그의 처 상옥(祥玉)이 재창(再創)했다. 순조(純祖) 13년(1813년) 계유(癸酉)에 대시 중창(重創)했다. 6.25 이후 급격히 퇴락되어 가고 있다.
⑪ 부귀사(富貴寺)
팔공산 북록(北麓) 신녕(新寧)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절의 이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볼 때 절의 역사는 오래인 것 같다. 일명 부귀사(浮龜寺)라 하기도 하고 창건 연대는 알 길이 없다.
⑫ 오은사(悟恩寺)
팔공산 북쪽 군위군 부계면 동산동(東山洞) 팔공산 중절뫼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극락전(極樂殿은 1982년 선묵(仙?;都昭達)스님이 중창했다. 절위에 비로봉(毘盧峯)의 북쪽 청운대(靑雲臺) 밑에 남향으로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암자를 구하고 수도하여 도(道)를 증오(證悟)한 유명한 오도암(悟道庵)이 1300여년간 법등(法燈)을 이어오다가 10여 년 전에 철거되자 선묵(仙?)스님이 산 밑으로 이기(移基)하여 오은(悟恩)이라 개호(改號)하여 절을 중수했다. 이 절 부근에는 유명한 열천(冽泉)이 잇고 비천(飛泉)이 있어 그윽하다. 제2석굴암과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일대에 무수한 사지(寺址)가 있어 속칭(俗稱)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가 있었던 곳이라 한다. 그 많은 사찰유지(寺刹遺址)에 이 절과 석굴암(石窟庵) 만이 있다.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수도처(修道處)인 오도암지(悟道庵址)가 있어 불교(佛敎)의 성지(聖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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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대구(大邱) 신무동(新武洞) 일명사지(逸名寺址)
팔공산 순환도로를 사이에 두고 부인사(符仁寺)에서 약 250m 거리에 무명(無名)의 폐사지(廢寺址)가 방치되어 있다. 본 폐사지(廢寺址)와 부인사(符仁寺)와의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원래 부인사(符仁寺)에 속한 암자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속칭 금당지(金堂址)로도 불리고 있다. 현재 이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주초석(柱礎石), 불좌대(佛坐臺), 석탑재(石塔材) 등이 산재(散在)하고 있으나 오래전에 밭으로 개간되어 파괴가 심하다.
폐사지(廢寺址)의 현상을 살펴보면, 동쪽으로 낮은 구릉(丘陵)이 있고 그 서남쪽으로 금당지(金堂址)로 추정되는 건물지(建物址)가 있으며, 그 남쪽에는 석탑재(石塔材)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동쪽으로 또 다른 건물지가 유존하고 그 중심에 불좌대(佛坐臺)로 생각되는 큰 석재(石材)가 놓여있다.
「고고미술(考古美術)」에 수록된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의 보고(報告)에 의하면, 1964년 이 폐사지(廢寺址)를 조사하면서 석탑재(石塔材)와 석등재(石燈材)를 상세히 기록하였고, 석등(石燈) 지대석(地臺石)과 석탑(石塔) 대석(臺石) 1개만 현장에 남아있고 파불두(破佛頭)는 아는 사람이 없으며, 석등재(石燈材) 일부는 최근에 은통당명(隱通堂銘) 부도(浮屠)와 함께 분실되었다가 다시 수습되어 부인사(符仁寺)에 운반해 두었다.
폐사지(廢寺址)의 가람배치(伽藍配置)는 통일시라기의 형식으로 볼 수 있으며, 금당(金堂)의 규모(規模)는 정면 3칸(間), 측면 2칸(間)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7. 없어진 사찰(寺刹)
원명사(圓明寺):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천(永川) 불우조(佛宇條)
상원사(上元寺):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천(永川) 불우조(佛宇條)
자화사(慈華寺):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불우조(佛宇條)
보리사(菩提寺):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미리사(美理寺):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림사(新林寺):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하양현(河陽縣) 불우조(佛宇條)
남태사(南泰寺):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량사(淸凉寺):홍진국사어록(弘眞國師語錄)
오도암(悟道庵):홍진국사어록(弘眞國師語錄)
오도암(悟道庵):여암전서(旅庵全書)
삼성암(三聖庵):여암전서(旅庵全書)
삼성암(三省庵):대구읍지(大邱邑誌)
충효암(忠孝庵):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미타암(彌陀庵):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석굴사(石窟寺):금계집(金溪集)
팔공산에는 수백을 헤아리는 폐사지(廢寺址)가 있다. 팔공산 남쪽 기슭에도 많으며, 북쪽 기슭에도 많다. 북쪽 기슭에는 세전(世傳)에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만치 많은 절이 있었다는 구전(口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