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림은 펼치면서 봐야 제맛>
- 가장 오래된 그림 형식, 두루마리 그림
박물관 서화실에 들어갔다고 가정하자. 관람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림의 형태일 것이다. 어떤 그림은 양쪽이 둘둘 말아져 있고, 어떤 그림은 위아래로 길쭉하다. 어떤 그림은 책처럼 접혀져 있고 어떤 그림은 부채처럼 생겼다. 병풍처럼 생긴 그림도 있고 여러 개의 화선지를 붙여서 그린 것도 있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그림은 각각의 이름이 있고 목적이 있다. 그 형태를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살펴보면서 이름도 알아 두면 그림과 금새 친해질 수 있다. 내가 그림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 그림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될 것이다. 그림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꽃 이름을 불러주는 것과 같다. 패랭이, 국화, 진달래, 금낭화, 각시투구꽃... 두루마리(卷), 축화(軸畵), 선면화(扇面畵), 화첩(畵帖), 병풍 등등.
1-1)작자미상, <가례반차도>, 종이에 목판 채색, 57×1887cm, 고려대박물관
1-2)작자미상, <가례반차도>(세부)
두루마리 그림, 이래서 좋다.
그럼 가장 먼저 두루마리 그림을 감상해보자. 둥글게 말면서 보는 이런 그림을 ‘두루마리 그림’ 또는 ‘수권(手卷)’, ‘권화(卷畵)’라고 하는데 가로로(橫) 길게 펼쳐지기 때문에 횡권(橫卷)이라고도 한다. <가례반차도(嘉禮班次圖)>(1)는 두루마리 그림의 목적과 형식이 잘 갖추어진 대표적인 작품이다. 위의 <가례반차도>는 왕비(혹은 세자빈)가 별궁으로부터 대궐로 들어가는 장면이나, 왕(혹은 왕세자)이 신부를 맞이하여 대궐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렸다. 그런데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 수 백명에서 수 천명에 이른다. 이런 국가적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서는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순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럴 때 각 인물의 위치와 순서를 담은 그림이 있다면 매번 행사 때 그 그림을 보면서 준비하면 효과적일 것이다. 세부 그림(1-2)을 보면, 각종 호위를 맡은 시위대, 문무백관, 의장대, 악대, 상궁, 의녀 등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져 있다. 행사에 참여할 사람들은 그림을 보면서 그날 행사에 입고 나갈 옷을 점검하고 자신이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행사는 예법에 따라 진행되는 만큼 전체 진행순서를 그린 <반차도>를 미리 제작하여 왕의 어람을 거치곤 하였다. 이런 반차도는 궁궐뿐만 아니라 관청에도 갖춰져 있어 행사를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8m가 넘는 이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할까. 긴 그림이라고 해서 꼭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림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놓고 볼 필요 없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치면서 보면 된다. 시선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갈 때마다 왼손에 든 두루마리는 펼쳐지고 대신 오른손에 든 두루마리는 되감는다. 이미 감상한 부분은 오른쪽에서 감겨지고 새로 감상할 부분이 왼쪽에 펼쳐진다. 감상자는 전체 그림을 펼쳐놓지 않고 두 손으로 말고 펴는 동작을 되풀이하면서 자신이 보고자 하는 부분을 어깨 폭만큼씩 펼쳐 감상하면 된다. 그러니 이 그림은 한꺼번에 펼쳐놓고 감상하는 그림은 아니다. 두루마리 그림은 아무리 긴 그림이라도 좁은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긴 그림을 바닥에 펼쳐놓고 보기 위해 감상자가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불편함도 없다. 두루마리 그림은 목적과 형식이 아주 경제적인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치는가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쳐진다. 글씨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가로쓰기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쓰는 세로 쓰기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책의 형식과는 정반대로 쓰여졌다. 두루마리 그림 뿐만 아니라 축화, 선면화, 병풍화 등 모든 옛 그림과 글씨는 모두 이런 형식이 원칙이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동양에서 세로쓰기의 전통은 그 역사가 아주 깊고 오래 되었다. 한(漢)나라 때 채륜(蔡倫:50년경-121년경)에 의해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글씨는, 나무나 대나무를 쪼개서 그 위에 적었다. 이렇게 글자가 적힌 나무 조각을 ‘목간(木簡)’ 혹은 '목독'(木牘), '목첩'(木牒)이라 불렀고, 대나무 조각은 죽간(竹簡)이라 했다. 목간과 죽간은 총칭하여 '간독'(簡牘)’이란 용어로 쓰였다. 간독을 여러 개 둘둘 말아 놓은 것이 ‘책(冊)’이다. ‘冊’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개의 나무 조각을 실로 꿰어놓은 상형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쭉한 나무 조각을 여러 개 묶어놓고 거기에 글자를 쓴다고 가정해보자. 세로쓰기가 편할 것이다. 또 오른손은 붓을 들고 글씨를 써야 하므로 둘둘 말린 죽간을 펼치는 건 왼손이다. 죽간이 움직이지 않도록 잡고 있는 손도 왼손이다. 그러니 순서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게 되었다. 전통이란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죽간에 글씨를 쓰던 전통은 종이가 발명되어서도 계속되었다. 두루마리에 그림을 그리는 방향도 역시 글씨 쓰는 방향을 따르게 되었다.
2. <죽책>, 1759년, 대나무, 25.3×107.3cm, 국립고궁박물관
서서히 시작하고 서서히 끝내다.
그렇다면 이제 <가례반차도>처럼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려진 기록화 대신 순수한 감상용 그림을 살펴보자. 이인문(李寅文:1786-1856)이 그린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가로길이가 856cm나 되는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이렇게 긴 그림을 한 번에 펼쳐놓고 감상하려면 적어도 방안이 8m가 넘을 정도로 커야 한다. 작가는 당연히 전체 그림을 조금씩 펼치면서 감상하라는 의도로 이 그림을 그렸다. 두루마리를 펼칠 때마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산수의 모습은 마치 사람이 여행하면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새롭게 만나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①번에서 ④번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특징을 읽을 수 있다. 그림이 처음 시작하는 ①번과 끝나는 ④번이 여백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드라마에서 사건이 시작되고 인물들간의 갈등이 고조된 후 클라이막스를 거쳐 결말에 이르듯 그림도 마찬가지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전체 그림을 세부적으로 분해한 그림(3-2)를 보면 그 특징이 보다 명확해진다. ‘끝이 없는(無盡) 강산(江山)’을 여행하는 사람의 눈에 처음 들어온 장면은(①) 매우 조심스럽게 시작된다. 여행이 계속될 수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지는 산수의 장면(②③)은 웅장하면서 기운이 넘치고 볼거리가 많아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마치 일일연속극에서 전날까지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것과 같다. 이윽고 여행이 다 끝났을 때(④) 작가는 산자락을 분명하게 그리지 않고 아스라이 물과 안개 속에 사라지게 함으로써 여행에서의 여운이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비록 여행은 끝났지만 강산은 끝이 없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긴 두루마리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산수 속을 유람하듯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펴보는 가운데 정신을 쉬게 하는 것이야말로 두루마리 그림의 감상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3-1) 이인문, <강산무진도>, 비단에 연한 색, 44.4×856.6cm, 국립중앙박물관
(3-2)(세부) ④ ③ ②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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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무ㅈiㄱH뜬풍경(정연) 작성시간 11.09.16
꽃샤방
)
행운 무진당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본각장 작성시간 11.09.16 *^^* 두루마리 그림에 관한 자세한 설명의 글을 읽으며, 전에 올려주신
안견의 < 몽유도원도>~ 해설에서 ~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림의 세계가 서서히 전개되는데, < 몽유도원도>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은
과감한 구도로 서론이 생략되고 바로 본론이 펼쳐진다고 하신 말씀이 떠오르고
그 뜻이 깊이 이해됩니다.*
'그림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꽃 이름을 불러주는 것과 같다.'
다음에 연재될 글을~ 꽃이름 부르듯 이쁜 목소리로 부르면~ㅎㅎ
축화(軸畵)인가요?^^ 선면화(扇面畵)인가요?^^ ...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
답댓글 작성자무진당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9.16 다음 그림은 축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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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국 작성시간 11.09.16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죽간부터 두루마리그림에관한 그림감상법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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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무진당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9.16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