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공 부 방

Re: 공주(公州)의 취원루(聚遠樓)에 대한 기문

작성자겸사|작성시간26.06.06|조회수31 목록 댓글 0

사가문집 제1권 / 기(記)

 

공주(公州)의 취원루(聚遠樓)에 대한 기문

 

거현(車峴) 이남에 산천의 맑은 기운이 서리고 어려서 큰 고을을 이룬 것으로는 공주가 제일이다.

대개 장백산(長白山) 한 줄기가 동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계림(鷄林)에 이르러 원적산(圓寂山)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 웅진(熊津)을 만나 응축되어 큰 산을 이룬 것이 계룡산(鷄龍山)이다.

 

물은 용담현(龍潭縣)과 무주현(茂朱縣)에서 발원하여 합쳐져 금산(錦山)으로 흘러들고,

영동(永同), 옥천(沃川), 청주(淸州) 세 고을을 거쳐서 공주에 이르러 금강(錦江)이 되고,

꺾어 사비(泗沘)가 되어 넘실대며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곳이 웅진이다.

공주는 계룡산으로 진산(鎭山)을 삼고 웅진으로 금대(襟帶)를 삼았으니, 그 승경을 알 만하다.

 

거정이 젊을 적에 공주에 갔던 적이 있는데, 금강루(錦江樓)에 올랐더니 눈에 가득 들어오는 풍광이 참으로 이전에 들은 바 그대로였다.

다만 읍내에서 그래도 멀어 몇 걸음에 갔다 올 거리가 아니었으며, 고을의 객관은 너무 좁고 또 올라가 볼 만한 누대도 없었다.

이것이 참 서운하였다. 객관 동쪽에 몇 칸의 연정(蓮亭)이 있어 조금은 거닐 만하나 규모가 좁고 누추하여 마음에 흡족하지가 않았다.

나는 이런 것을 공주의 흠이라 생각하였다.

 

지난번에 나의 족질 안동(安東) 권공 체(權公體)가 공주 목사로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권공이 연정을 철거하고 그 동쪽에 누대를 짓기 시작하여 일이 끝날 무렵에 마침 흉년이 들어 미처 낙성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계사년(1473, 성종4)에 가선대부 남양(南陽) 홍석(洪錫)이 목사가 되니 정사가 정비되고 폐습이 제거되었다.

다시 동헌(東軒)의 동쪽에 터를 잡아 그 누대를 옮겨 고쳐 몇 칸을 지어서, 사신과 빈객이 오면 함께 그 누대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시를 읊으니, 공주의 경물이 이전보다 백배나 빛이 났다.

 

홍후(洪侯)가 지금 예빈시 정(禮賓寺正) 김공 수손(金公首孫)을 통하여 나에게 누대의 이름과 기문을 부탁했다.

이에 내가 말하였다.

“누대의 훌륭한 경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취원(聚遠)보다 나은 것이 없다.

대개 멀리까지 여러 좋은 경관을 취해서 하나의 누대에 모으는 것이다.

누대에 올라 바라보면, 좌우와 전후가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무릇 위아래로 수백 리 사이에 논밭이 광활하게 이어져 있는 것,

집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는 것, 나루에서 위험하게 물을 건너는 것, 객관에 나그네들이 드나드는 것들이 한눈에 보이며,

농사짓는 자들, 누에 치는 자들, 나무하는 자들, 목동들, 사냥하거나 물고기 잡는 자들, 물건을 사고파는 자들 등등,

살아가느라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이 다 보인다. 아침 햇살과 저녁 해거름, 사시사철의 순환, 비 오고 이슬 내리고 서리 내리고 눈 내리는 변화, 초목과 화훼가 피고 시드는 것, 저대로 날고 울고 하는 것들, 저대로 형색을 드러내는 것들 등등, 형기(形氣) 안에 있는, 기상이 같지 않은 이런 것들을 눈을 한번 들면 모두 볼 수 있다.

 

아! 멀리 있는 좋은 풍광이 어쩌면 이렇게도 누대에 모일 수 있단 말인가? 누대에 올라 구경하는 풍광이 또한 끝이 있겠는가.

그러나 누대를 만드는 것은 단지 놀고 즐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 누대에 오르는 자가, 들판의 논밭을 바라보면서는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여염의 집들을 바라보면서는 백성의 고생을 알며,

나루터를 바라보면서는 ‘어떻게 하면 시내를 편하게 건널 수 있게 할까?’라고 하고,

떠돌이 나그네를 바라보면서는 ‘어떻게 하면 이 들판에서 소출이 늘어날 수 있게 할까?’라고 하며, 생업이 일정하지 않은 곤궁한 백성을 보면 이들의 생명을 살려 주고 추위를 따뜻하게 해 줄까를 생각하고, 산천, 초목, 조수(鳥獸), 어별(魚鼈)에 대해서까지 모두 순리대로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그런 뒤에 이에 멀리 사물에서 취하여 누대에 모으고 누대에 모은 것을 다시 마음에 모으되, 이 마음이 항상 주인이 되어 귀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나의 마음을 휘젓지 못하게 한다면, ‘취원’이라고 누대의 이름을 지은 의의에 거의 가깝게 될 것이고 목민관으로서의 책무에서도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홍후와 평소 돈독하게 지내는 사이이고, 또 내가 전에 공주 고을의 흠이라 여겼던 것을 홍후가 거행하여 크게 이루어 놓았으니, 내가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홍후는 일찍이 광주(廣州)의 목사가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기에 지금까지 그곳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모한다.

홍후가 그 다스림을 공주에 옮겼을 것이니, 공주에 잘 다스려지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홍후가 장차 임기가 차서 돌아오게 되었다.

홍후가 떠나더라도 누대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주의 백성들이 누대를 보고 홍후를 생각하기를, 감당나무를 보고 소백(召伯)을 생각하듯이 할 것임을 또 어찌 의심하랴. 이는 기록할 만한 것이다.”

 

[주-D001] 사비(泗沘) : 대본에는 ‘泗泚’로 되어 있다. 고전 자료에는 두 가지가 모두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泗沘’를 쓰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주-D002] 거닐 만하나 : 대본에는 ‘可庚猶矣’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庚’은 ‘夷’가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주-D003] 홍석(洪錫) :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공서(公敍)ㆍ군서(君敍), 호는 손우(遜愚)이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4년(성종5) 2월 10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공주 목사(行公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주-D004] 감당나무를 …… 생각하듯이 : 《시경》 〈감당(甘棠)〉에 나온다. 주나라 소백(召伯), 즉 소공(召公)이 남방을 순행하면서 문왕의 정치를 펼 적에 감당나무 아래에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 뒤 그곳 백성들이 소공의 덕을 그리워하며 그 감당나무를 보호했다는 내용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