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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문집인 《농암집(農巖集)》

작성자겸사|작성시간26.06.08|조회수44 목록 댓글 0

《농암집(農巖集)》 해제(解題)

강혜선(姜慧仙) 誠信女子大學校 國語國文學科 敎授

 

1. 머리말

 

이 책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문집인 《농암집(農巖集)》을 국역한 것이다.

김창협은 아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더불어 농연(農淵) 형제로 병칭되며 당대의 문운(文運)을 주도하는 한편,

철학사에서도 낙론(洛論)의 종장으로 추숭되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그중에서도 속칭 장동 김씨(壯洞金氏)의 일원으로서 숙종대의 치열했던 정치적 상황에서

갈등했던 노론(老論)의 정치가이기도 하였으니, 정치ㆍ철학ㆍ문학 등 어느 한 방면에서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이번에 그의 문집이 국역된 것은 곧 17세기 후반기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

 

 

2. 가계와 생애

 

김창협은 본관이 안동(安東)이며, 자가 중화(仲和)로, 농암(農巖)은 그의 호이다.

1651년 1월에 과천(果川) 명월리(明月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1708년 4월 11일에 58세로 양주(楊州) 석실(石室) 부근의 삼주(三洲)에서 세상을 떠났다.

증조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요 부친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명문의 자제로 성장하였고,

형제 육창(六昌)이 일세에 이름을 날림으로써 그의 가문은 조선 후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주지하듯 조선 후기 문화에서 우리는 명실상부한 국반(國班)으로서 안동 김씨 가문을 떠올리곤 한다. 안동 김씨의 가계는 멀리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왔던 개국 공신 김선평(金宣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고려시대 내내 향역(鄕役)에 그쳤던 것으로 보이거니와, 향반(鄕班)의 입지는 조선 성종(成宗) 때까지도 별다른 변화가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김창협의 9대조 김계권(金係權), 8대조 김영수(金永銖)에 이르러 점차 가세가 신장되더니, 7대조인 김번(金璠)이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장동 김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울 백악산(白岳山) 아래의 청풍계(淸風溪)와 장의동(壯義洞)에 터전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이곳은 차후 장동 김문의 경저(京邸)가 되는 곳이자, 정치적인 거점이 되는 곳이다.

 

6대조 김생해(金生海), 5대조 김대효(金大孝)를 지나 4대조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에 이르러 그들의 가문은 충절(忠節)의 가문으로 부상하게 된다.

김상헌은 본래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형제지간이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은 강화도 남문루(南門樓)에서 분신하였고, 김상헌은 척화항전(斥和抗戰)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또한 김상헌은 1639년에 청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에 압송되어 6년 동안 감금되기도 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그는 대로(大老)로 인정받으며 북벌(北伐)의 상징적 인물로 숭앙되었으나,

양주의 석실촌(石室村)에 은거하였다. 경기도 양주의 석실은 차후 김상용과 김상헌을 추숭하여 석실서원이 건립되었고,

후손들의 강학과 수련 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김상용과 김상헌이 그들의 가계를 충절의 반석에 올려놓고 불변의 명분을 제공하였다면,

부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과 백부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중부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은

장동 김문을 노론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김수흥과 김수항은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과 사우 관계를 맺으며,

현종조의 예송논쟁(禮訟論爭), 숙종조의 환국기(換局期)를 지나며 노론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1674년의 갑인예송(甲寅禮訟) 때에는 춘천(春川)과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에는 10년간 형제가 번갈아 가며 영의정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즈음하여 유배 후 사사(賜死)라는 파란을 겪는다.

오직 백부 김수증은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화악산(華嶽山)에 은거하며 곡운(谷雲)을 경영함으로써,

상박(相搏)하던 시절의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한편 김수항의 여섯 아들을 일러 육창(六昌)이라 부른다.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즙(金昌緝), 김창립(金昌立)이 이들인데,

정치ㆍ철학ㆍ문학ㆍ예술 방면에서 이들의 활약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김창협과 김창흡은 조선 후기 문화를 선도하였다고 할 만큼 그 위상이 높았다.

아우였던 김창흡이 백악시단(白岳詩壇) 등을 이끌며 진성(眞性)ㆍ진정(眞情)ㆍ진경(眞景)의 진시(眞詩) 운동을 창도하여

18세기 시풍이 일신하는 계기를 마련한 데 비해,

김창협은 주로 순정(醇正)한 당송 고문(唐宋古文)을 선창함으로써

이정귀(李廷龜)ㆍ신흠(申欽)ㆍ이식(李植)ㆍ장유(張維)를 이어

박지원(朴趾源)ㆍ홍석주(洪奭周)ㆍ김매순(金邁淳)으로 이어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김창협의 생애는 《농암집(農巖集)》 권35, 36에 수록된 〈세계(世系)〉와 〈연보(年譜)〉를 통해 그 개략을 가늠할 수 있다.

그가 39세 되던 해인 1689년의 기사환국을 분기점으로 본다면,

생애의 전반기는 수학과 출사의 길이요, 후반기는 은거와 강학의 길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부친 김수항과 모친 나성두(羅星斗)의 따님 안정 나씨(安定羅氏)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나성두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5세에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따님에게 장가를 간 것을 계기로

그에게서 성리서(性理書)를 수학했다.

 

24세에는 용문산(龍門山)에 거처하던 송시열의 문하에 출입하면서부터

사우의 연을 맺었고,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창계(滄溪) 임영(林泳)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일반적으로 그의 학문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경도되지 않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절충했다고 평가된다.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로 보건대, 사단과 칠정이 성(性)의 공발(共發)이라는 본 견해는 이이의 입론을 좇은 것이고,

사단은 이(理)를, 칠정은 기(氣)를 중심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견해는 이황의 입론을 수용한 셈이다.

또한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손자인 김원행(金元行) 대에 이르러 낙론의 종장으로 추종받게 된다.

 

김창협의 일생에서 첫번째의 정치적 시련은 1674년(24세)의 갑인예송으로부터 발생했다.

조 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를 두고 벌어진 이 논쟁에서 남인(南人)의 기년설(朞年說)이 승리함에 따라

이듬해에 송시열의 관작이 삭탈되고 부친 김수항이 영암으로 유배를 당했던 것이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울울한 심사를 시로 표현하는 한편,

1679년(29세)에는 부친의 명으로 영평(永平)의 응암(鷹巖)에 집을 마련하였다.

생애의 후반기에 이루어진 은거는 아마도 이때부터 그 싹이 배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80년(30세)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부친이 영의정이 되었다.

이해 가을 그는 별시 초시(別試初試)에 급제하였고

1682년(32세)에는 증광 별시(增廣別試)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후 1689년에 응암으로 돌아가기까지가 그의 사환기이다.

병조 좌랑, 부수찬, 부교리, 헌납 등 내직에 머물다가 1684년에는 암행 어사가 되어 영남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왔으며,

1685년에는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금강산과 함경도의 진영을 돌아볼 수가 있었다.

이해 10월에 이조 좌랑이 되었고, 1686년에는 이조 정랑, 부교리, 대사성, 1687년에는 승문원 부제조, 청풍 부사가 되었다.

청풍 부사 시절에는 월악산(月嶽山)과 단양(丹陽) 등지를 유람하였다.

 

순탄한 승진을 계속하던 차에, 1689년(39세)의 기사환국은 그에게 두 번째 정치적 시련을 의미하는 것이자,

추후 환로에 발길을 끊는 절체절명의 사건이 되었다.

이해 4월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던 부친이 사사되었고, 중부인 김수흥도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그곳에서 졸했다. 부친이 졸한 그해 9월 그는 영평(永平)의 응암(鷹巖)으로 들어갔고,

1692년(42세)에는 응암의 동쪽에 농암서실(農巖書室)을 짓고 스스로 호를 농암(農巖)이라 붙였다.

 

옛 지명 농암(籠巖)을 애써 농암(農巖)으로 바꾸고 스스로의 호를 삼은 까닭은

이제는 장차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야인의 삶을 살겠다는 뜻이었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이루어져 노론이 재집권한 이후 호조 참의, 동부승지, 이조 참판, 대제학 등 실로 수십 차에 걸친

조정의 부름에도 그는 번번이 사직소를 올리고 환로에 나아가지 않았다.

졸년의 한 해 전까지 계속되었던 조정의 부름에 그가 기필코 사직으로써 대응했던 것은 그가 얼마만큼

기사환국에서의 아픔을 절절히 여겼는지 대변해 준다.

 

농암으로 물러나서 1708년 58세로 수를 다하기까지 그는 은거와 강학으로 삶을 시종했다.

이따금 지인의 상사(喪事)나 혹은 유람 등을 계기로 원주(原州), 청평(淸平), 광주(廣州), 송도(松都), 강화(江華)를 다녀왔을 뿐,

영평의 농암을 중심으로 양주의 삼주(三洲), 석실(石室)에 머물렀다.

1703년(53세)에 모친상을 당했고, 1705년(55세)에 상복을 벗고 삼주로 돌아와 김상헌과 김상용이 배향된 석실서원에서 강학하였다.

이때에 가문의 후손은 물론이요 기환자제(綺紈子弟)들마저 이곳을 찾아 수학함으로써,

석실서원은 당시 명실상부한 노론계의 강학처가 되었다.

1708년 4월 11일, 그는 이곳 삼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후 1713년에는 석실서원에 배향되었고,

1725년에는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농암집 속집 하권 / 행장(行狀)

선부군(先府君) 행장 하 - 김수항이 아버지임 글 좋아서 퍼옴 

 

 

 

부군은 큰 키에 미목이 빼어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코가 오뚝한 데다 얼굴이 맑고 윤기가 나서 많은 사람 가운데 있어도 마치 옥산(玉山)이 높이 솟아 있는 것처럼 선명히 돋보였다. 이 때문에 대조회(大朝會) 때마다 띠를 늘어뜨리고 홀을 꽂고서 두 손을 맞잡고 의젓하게 서 있으면 조정 안의 모든 눈길이 선친에게로 쏠리며 ‘사람 중의 기린이요 봉황’이라고들 하였다.

 

효묘 때에는 어가(御駕)를 따라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한 번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몸가짐이 예의 법도에 맞고 용모가 준수하니, 참으로 이른바 걸출한 인물 덕에 그 지방이 빛난다는 경우입니다.”

하였다. 판서 이경휘(李慶徽)가 막내아우 상공(相公) 이경억(李慶億)에게 편지로 이와 같이 전하였다고 한다.

을축년(1685, 숙종11)에 청나라 사신이 왔을 적에는 어떤 화가 닥칠지 헤아리기 어려워 온 나라가 두려워 불안에 떨었는데, 부군은 관소(館所)에 가서 접대하는 가운데 행동거지가 지극히 차분하였다. 이에 청나라 사신이 혀를 내두르며 통역관들에게 말하기를,

“진정한 정승이로다. 저런 인물은 중국에서도 얻기가 쉽지 않다.”

 

하고는, 이어 차석에 있는 동료 정승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사람은 어찌하여 수상처럼 단정하고 장중하지 못하고 소곤대는 것인가?”

하였다. 부군은 청나라 사신에게 이처럼 존경받아 그들을 감복시켰다. 이에 사람들이 부군을 의지하고 중시하였으며 큰 화를 입지 않은 것 또한 이에 힘입은 바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부군은 타고난 문재(文才)가 지극히 뛰어나서 글을 읽을 적에 몇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도 대략 이해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반복하여 음미하면서 되도록 완전히 의미를 통달하는 경지에 이르고야 말았다.

문장을 짓는 것은 전아(典雅)하여 요체가 있었고 절대로 과장되거나 생소하고 교묘한 말을 쓰지 않았는데,

만년에는 더욱 문장 구조를 치밀하게 짜고 언어를 잘 가려 쓰고 정련해서 거의 빈틈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특히 상소와 차자에 뛰어났는데, 득실을 논변하고 진위를 가려 밝힐 때에는 말이 엄정하고 뜻이 긴밀하여 아무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수식을 일삼지 않아 어구가 산뜻하고 유창하였으며 성률이 조화롭고 정취가 알맞았으니,

요컨대 당나라의 문장 수준에 이른 것이 많았다. 문정공이 늘 부군의 시문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분명하고 긴요하여 주제에 꼭 들어맞으니, 쓸모 있는 글이다.”

하고, 또 부군의 변려문(騈儷文)을 감상하고는 강건하고 수려하다고 평하였다. 

 

 

 

 

 

 

 

 

 

 

 

 

 

 

 

3. 시문에 대한 제가의 평가

 

김택영(金澤榮)이 우리나라의 고문가(古文家) 아홉 사람을 들면서 그의 이름을 빼놓지 않았듯이 그의 문장은 고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이전의 선진 고문가(先秦古文家)와는 달리 당송(唐宋)의 순정(醇正)한 고문을 체득하여 문장의 품격을 높인 것으로 알려져 있거니와, 아우 김창흡이 “도(道)와 문(文)을 하나로 합치시켰다.”라고 한 것처럼 도(道)와 문(文)을 아우른 대표적인 작가로 추숭되곤 하였다. 이에 대해 김매순(金邁淳)은 “우리나라에 여러 유현(儒賢)이 있었으나 구양수(歐陽脩)의 문장과 주자(朱子)의 의리를 합하여 일가가 된 이는 오직 선생이 이에 가까울 뿐이다.” 하여, 그가 당송 고문파를 잇되 주자의 성리철학을 문장의 원천으로 삼았음을 전언해 주고 있다. 또한 그의 고문이 지닌 가치에 대해서는 김택영의 안목을 참조할 수 있다. 즉 김택영은 김창협이 제기한 ‘피상적이어서 깊고 절실하지 못하며〔膚率而不能切深〕, 속되어서 아려하지 못하며〔俚俗而不能雅麗〕, 번다하여 간결하지 못한 것〔冗靡而不能簡整〕’을 우리나라 문장의 폐단이라고 보았는데,비록 이러한 단점이 장유(張維)와 이식(李植)에 이르러 극복되어 가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누습을 완전히 씻어버린 이는 김창협이라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한편 김창협은 시가 문만 못하다거나, 혹은 그의 시는 아우 김창흡의 그것만 못하다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와 문이 골고루 뛰어났다는 평가가 공존하기도 한다. 김창흡은 이미 “참되고 담박함〔眞澹〕을 근거로 고금(古今)의 시체(詩體)를 출입하여 문과 괴리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며, 《숙종실록(肅宗實錄)》에서도 “그의 문장은 법도가 있고 풍성하여〔典則濃郁〕 구양수의 정수를 깊이 얻었고, 시 또한 한위(漢魏)에 출입하고 두보(杜甫)로써 보익하여 고고아건(高古雅健)하였다.”라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후대의 문인이었던 이덕무(李德懋)는 이에 대해, “선조대(宣祖代) 이래로 볼 만한 문장이 많으나 시와 문을 아우른 이는 농암일 것이다.”라고 하였고, 정조는 “농암의 시문은 단아하면서 깨끗하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시문이 두루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그는 고문가로서의 성가가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넘어서고 있었을지라도 시와 문이 양미(兩美)한 문사로서 후대의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창협이 남긴 잡지(雜識)는 그가 순정한 당송 고문을 선양하기 위해서 각고의 연마를 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문장비평론과, 또한 앞 시대의 의고주의(擬古主義) 시풍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시론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또 여러 편의 서발문(序跋文)은 17세기 후반기의 문학적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창협의 비평 활동은 다음 시대 문인들 및 현대의 연구자들로부터 각별한 주목을 받아 왔다.

4. 문집의 형태와 편찬ㆍ간행

 

《농암집》의 판본은 대략 원집(原集), 속집(續集), 별집(別集)으로 구분되며, 원집은 다시 권1에서 권34까지 편차된 초간본(初刊本)과 여기에 권35와 권36을 덧보탠 보각본(補刻本)으로 나뉜다. 이들을 각각 표제(表題), 권책수(卷冊數), 판본(板本), 반엽(半葉) 행자수(行字數), 판심(版心), 반곽(半郭) 크기, 간년(刊年), 소장처(所藏處)에 따라 개괄하고, 이어 편찬 및 간행 경위를 밝히기로 한다. 소장처는 국역의 저본이 된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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