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나신 지 얼마 안 돼
명성황후의 비명을 들으셨던 내 할아버지는
상투 올릴 무렵 먹고 살길이 막막해
일천 오백 척(尺)이 넘는
산마루 축축한 샘물가에
손바닥만 한 논을 일구셨단다.
맨몸으로 오르기도 힘에 부치는 그곳에
알량하게 벼 몇 포기 심어놓고
네발짐승처럼 들락거리셨단다.
늦가을 이삭을 거둘 때면
너무 찬 논물에 쭉정이가 반(半)
그 반 중에 얼마는 산새가 세금처럼 걷어가고
남는 것은 겨우 두어 됫박!
고향 집 뒤 천보산을 바라보면
기슭에서 마루까지
그 옛날 가난한 젊은 할아버지가 오르셨을 흐릿한 산길!
힘겨웠던 이승의 밑바닥을 기며 사시던
내 할아버지가 벗어놓은
기다란 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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